멜기세덱,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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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 views멜기세덱에 관한 설명,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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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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Οὗτος γὰρ ὁ Μελχισέδεκ, βασιλεὺς Σαλήμ, ἱερεὺς τοῦ θεοῦ τοῦ ὑψίστου, ὁ συναντήσας Ἀβραὰμ ὑποστρέφοντι ἀπὸ τῆς κοπῆς τῶν βασιλέων καὶ εὐλογήσας αὐτόν,
2 ᾧ καὶ δεκάτην ἀπὸ πάντων ἐμέρισεν Ἀβραάμ,
이 멜기세덱은, 살렘(평강)의 왕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그가 왕들을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축복했다.
2절 10번째 것을 아브라함이 그에게 몫이 되게 했다.
멜기세덱의 존재의 중요성.
멜기세덱을 소개(1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엘은 그냥 신이라는 뜻.
πρῶτον μὲν ἑρμηνευόμενος βασιλεὺς δικαιοσύνης ἔπειτα δὲ καὶ βασιλεὺς Σαλήμ, ὅ ἐστιν βασιλεὺς εἰρήνης,
3 ἀπάτωρ ἀμήτωρ ἀγενεαλόγητος, μήτε ἀρχὴν ἡμερῶν μήτε ζωῆς τέλος ἔχων, ἀφωμοιωμένος δὲ τῷ υἱῷ τοῦ θεοῦ, μένει(주동사)ἱερεὺς εἰς τὸ διηνεκές.
먼저 번역하면 의의 왕(멜렉크+쩨덱) 그리고 평강의 왕. 하나님의 아들과 흡사하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제사장으로 있다.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날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앞에 예수님은 영원히 제사장으로 있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면 그 영원성의 증명은?
멜기세덱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멜기세덱은 2번 나온다. 첫번째는 창세기다. 그리고 시편 110편에 이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라 말씀하신다.
쿰란의 멜기세덱의 문서는 히브리서와 다르다.
쿰란은 2명의 메시야를 말한다. 왕적 메시아와 대제사장적 메시아다.
그 이유는 다윗의 왕좌를 따르는 메시아와 시편110편의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직을 따르는 메시아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 두 메시아가 바로 같은 분임을, 왕으로 오신 메시아께서 대제사장이시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는 둘이 하나인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사역을 통해 그 두직분이 한몸에 있음을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시편말씀을 이해하냐라고 하신 것도 이에 따른것다.
수직적 관계만을 고려하니, 성육신은 생각도 못했다.
이사야서의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이, 인생으로 오신 것임을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중요하다. 구약의 두부분의 종합적 해석이며, 그 해석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승천으로 확실히 되셨다.
멜기세덱 자체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부분이다.
나무에 달린자는 구약에 많다. 떡맡은관원장도 나무에 달렸다. 그것은 요셉이 구원자의 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왕들은 나무에 달린다. 그러나 그들이 달렸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에스더에서 두 환관이 반란을 계획하다 나무에 달린다. 그 두환관이 나무에 달렸기에 모르드개가 구원받았다. 하만도 마찬가지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자들은 그 결과 이스라엘의 길을 연다. 구원의 길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무에 달린 자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나무에 달렸나?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의를 선하게 쓰셨다. 악인도 때에 맞게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나무에 달리셨고, 그 결과 구원은 우리에게 까지 오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똑같은 행동이며, 구원이라는 결과도 어찌보면 같지만, 그 범위와 효력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의 아들이심과 성육신도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를 위함이냐, 하나님과 우리를 대적이냐의 부분도 크다.
우리는 이 세상 고난과 유혹속에 죄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당하고 있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다면 하나님께서 더욱 더 큰 선함과 축복으로 쓰실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겨우? 구원으로 끝날것이다.
멜기세덱은 역사속 한 인물로서 하나님께서 쓰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있다. 예수님과 멜기세덱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법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 마태복음, 누가복음 족보를 보면 꼬인 부분, 어머니는 확실하지만, 영원전 발출이신 예수님의 아머니라고 말할 수있나?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하면 우리의 근본이지만, 예수님은 다르다.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이 불분명.
4 Θεωρεῖτε δὲ πηλίκος οὗτος, ᾧ [καὶ] δεκάτην Ἀβραὰμ ἔδωκεν ἐκ τῶν ἀκροθινίων ὁ πατριάρχης.
이가 얼마나 큰지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10번째 것을 조상 아브라함이 노락물중에서 주었습니다.
그가 매우 큰 것을 강조하고 있다.
- πηλίκος를 의문대명사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 πηλίκος는 2장3절의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시하면 에서 지시대명서로 나왔다.
이렇게나 큰 분을 통해 이루어진 그렇게나 큰 구원.
노략물은 끝, 꼭대기란 뜻ㅇ다. 즉, 전리품은 매우 좋은 것이고, 그중 가장 좋은 것을주었다는 뜻이다.
5 καὶ οἱ μὲν ἐκ τῶν υἱῶν Λευὶ τὴν ἱερατείαν λαμβάνοντες ἐντολὴν ἔχουσιν ἀποδεκατοῦν τὸν λαὸν κατὰ τὸν νόμον, τοῦτ᾽ ἔστιν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αὐτῶν, καίπερ ἐξεληλυθότας ἐκ τῆς ὀσφύος Ἀβραάμ·
레위아들들출신의 사람들 일부가 제사직분을 받고 율법을 따라서 백성에게 십일조를
부가할 수 있는 계명을 가지고 있다. 그 백셩은 누구냐? 형제다. 비록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들이지만
레위지파 모두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님.
그들의 형제이고 똑같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들이지만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부가할 수있는 계명, 권리를 가졌다.
6 ὁ δὲ μὴ γενεαλογούμενος ἐξ αὐτῶν δεδεκάτωκεν Ἀβραὰμ καὶ τὸν ἔχοντα 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εὐλόγηκεν.
그들(레위)로부터 족보가 같지 않는 한 사람(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부과했다. 그리고 약속들을 가진 자(아브라함)을 축복했다.
레위자손은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부과했지만 멜기세덱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부과했다.
여기서 복을 빌었다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반드시 축복하겠다라고 할 때 썼던 단어이다.
멜기세덱은 레위와 비교할 수 없다.
레위의 제사직분은 이당시 예루살렘성전의 제사직분과 비교된다.
7 χωρὶς δὲ πάσης ἀντιλογίας τὸ ἔλαττον ὑπ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εὐλογεῖται.
반대가 있을 수 없이 더 작은 자가 더 힘있는(더 나은) 자에 의해서 축복을 받는다.
새배를 하면 세배를 받는 분이 덕담을 한다.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더 크다.
8 καὶ ὧδε μὲν δεκάτας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ἄνθρωποι λαμβάνουσιν, ἐκεῖ δὲ μαρτυρούμενος ὅτι ζῇ.
여기서는 죽는 자들이 십일조를 받는다. 저기서는 살아있다고 증거를 받은 자가 받는다.
- ὧδε 바로 여기, 바로 그자리에 있는 것.
- ἐκεῖ 멀리 있는 것.
죽는 자는 레위이며, 살아있는 자는 멜기세덱이다.
화자는 레위자손과 같이 있다.
설교자는 예수님께로 가야한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자들은 유대회당에 머물러있다.
로마서는 율법을 따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자유가 있다.
히브리서는 유대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성전에 머물러야 한다.
9 καὶ ὡς ἔπος εἰπεῖν, δι᾽ Ἀβραὰμ καὶ Λευὶ ὁ δεκάτας λαμβάνων δεδεκάτωται·
굳이 말을 하자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십을조를 취하는 그 레위도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10 ἔτι γὰρ ἐν τῇ ὀσφύϊ τοῦ πατρὸς ἦν ὅτε συνήντησεν αὐτῷ Μελχισέδεκ.
왜냐면 레위가 아버지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그를 만날 때.
11 Εἰ μὲν οὖν τελείωσις διὰ τῆς Λευιτικῆς ἱερωσύνης ἦν, ὁ λαὸς γὰρ ἐπ᾽ αὐτῆς νενομοθέτηται, τίς ἔτι χρεί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ἕτερον ἀνίστασθαι ἱερέα καὶ οὐ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Ἀαρὼν λέγεσθαι;
무슨 필요가 아직도 있겠느냐. 온전한 것이 레위에게 속한 제사직분을 통해 있다고 하면 왜냐면 백성을 그 레위제사직분에 기초해서 율법이 정해지고 법이 정해졌다. 아론반차를 따라서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시내산 율법이 수여될 때, 아론자손이 제사장으로 세워지고 레위자손들이 구별된다.
율법은 레위 제사직분과 연결된다. 로마서에서 율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말한 것은 이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땅에 있는 성전과 연결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께 연결되고, 그 분은 큰 대사장이며, 하늘 성전과 연결된다.
여기 레위 제사직분을통해 온전함을 얻을수 있다면, 비현실적 조건이다.
사실과 다른 조건이다.
당연한 결과가 나온다면 귀결절이생략된다.
레위제사직분을 통해 완전함이 있었다고 하면 시편 110편과 다윗의 반차를 잇는 메시야가 올 필요가 없었다.
12 μετατιθεμένης γὰρ τῆς ἱερωσύνης ἐξ ἀνάγκης καὶ νόμου μετάθεσις γίνεται.
제사직분이 바뀐다고 하면 꼭해야 하는 것과 율법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리더쉽이 바뀌면 법이 바뀐다.
제사직분이 바뀐다라면 그와 연계된 율법의 변경이 있을수 밖에 없다.
13 ἐφ᾽ ὃν γὰρ λέγεται ταῦτα, φυλῆς ἑτέρας μετέσχηκεν, ἀφ᾽ ἧς οὐδεὶς προσέσχηκεν τῷ θυσιαστηρίῳ·
율법에 근거해서 이것들이 언급되었다. 다른 족속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족속으로는 아무도 제단에서 섬기는 자가 없는.
제단에서 섬기는 자가 아무도 없는 다른 족속이 참여해야 한다.
왜냐면 율법이 아닌 복음이기 때문이다.
14 πρόδηλον γὰρ ὅτι ἐξ Ἰούδα ἀνατέταλκεν ὁ κύριος ἡμῶν, εἰς ἣν φυλὴν περὶ ἱερέων οὐδὲν Μωϋσῆς ἐλάλησεν.
그래서 유대지파에서 우리주님이 일어나신 것이 확실하다. 그 족속에는 제사장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세가 이야기하지 않았다.
유다지파의 제사장직은 모세도 언급하지 않았다.
15 καὶ περισσότερον ἔτι κατάδηλόν ἐστιν, εἰ κατὰ τὴν ὁμοιότητα Μελχισέδεκ ἀνίσταται ἱερεὺς ἕτερος,
16 ὃς οὐ κατὰ νόμον ἐντολῆς σαρκίνης γέγονεν ἀλλὰ κατὰ δύναμιν ζωῆς ἀκαταλύτου.
훨씬더 분명한 것이 있다. 멜기세덱하고 유사한 반차를 따라서 전혀다른 제사장이 일어났다.
그분은 육체의 계명의 율법을 따라서 되신 분이 아니라 파괴되지 않는(생명의 특성) 생명의 능력을 따라
17 μαρτυρεῖται γὰρ ὅτι Σὺ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증거하신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계속되는 제사장이다.
18 ἀθέτησις μὲν γὰρ γίνεται προαγούσης ἐντολῆς διὰ τὸ αὐτῆς ἀσθενὲς καὶ ἀνωφελές-
19 οὐδὲν γὰρ ἐτελείωσεν ὁ νόμος- ἐπεισαγωγὴ δὲ κρείττονος ἐλπίδος δι᾽ ἧς ἐγγίζομεν τῷ θεῷ.
이전에 있던 계명은 약하고 유익하지 못하므로 무효와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더나은 소망으로 된다.
계명이란 것의 핵심요소가 있다. 그런데 그 요소가 바뀌게 되면 그 계명은 무효화된다.
계명 자체의 약함과 유익하지 않음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은 우리는 짐승의 제물이 끝난 살을 먹는 것은 무익하다.
즉, 제사가 끝나고 속죄되었다는 의미의 먹음이다?
율법은 어떤것도 온전케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폐해질수 밖에 없다. 또한 그렇기에 더 나은 소망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
20 Καὶ καθ᾽ ὅσον(어느정도는) οὐ χωρὶς ὁρκωμοσίας·
또 어느정도는 맹세없이 된 것이아니다.
제사직이 바뀌고 율법이 바뀌는 맹세가 있었다. - 시편110편
시편110편은 모세율법의 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정도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οἱ μὲν γὰρ χωρὶς ὁρκωμοσίας εἰσὶν ἱερεῖς γεγονότες,
21 ὁ δὲ μετὰ ὁρκωμοσίας διὰ τοῦ λέγοντος πρὸς αὐτόν, Ὤμοσεν κύριος καὶ οὐ μεταμεληθήσεται, Σὺ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왜 그러냐면 그들(레위자손)은 맹세없이 제사장이 된 것이다.
한편 그분은 그에게 말씀하신 분을 통하여 주께서 맹세하시고 그후에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다.
레위자손이 복수로 표현되는 것은 그들의 생명의 한계(죽음)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말씀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 때 듣는 수신자들은 히브리서가 아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모른다.
그들에게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성전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보다 많다. 당연히 논쟁을 하는 중에 질수밖에 없다.
이것은 로마의 그 박해중에서 유대인들의 공격이 있고 순교의 위기가 있기에 이렇게 계속해서 말한다.
말싸움을 할 때 확신이 없어 질수 있다.
저기는 약속과 맹세가 있고, 여기는 법밖에 없다.
의 하나님의 맹세다.
22 κατὰ τοσοῦτο [καὶ] κρείττονος διαθήκης γέγονεν ἔγγυος Ἰησοῦς.
이렇게나 큰(맹세까지 포함되어서)것을 따라서 예수님은 더좋은 언약의 보증 이 되셨다.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다.
예수님의 언약은 둘사이의 계약이다.
예수님의 언약이고 예수님의 보증이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제물이시기 때문이다.
23 καὶ οἱ μὲν πλείονές εἰσιν γεγονότες ἱερεῖς διὰ τὸ θανάτῳ κωλύεσθαι παραμένειν·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된다. 계속해서 유지함에 죽음때문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호이οἱ와 호ὁ가 계속 반복된다.
24 ὁ δὲ διὰ τὸ μένειν αὐτὸ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ἀπαράβατον ἔχει τὴν ἱερωσύνην·
그런데 그분은 빗겨가지 않는 제사직분을 가진다. 왜냐면 그분이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이다.
25 ὅθεν καὶ σῴζειν εἰς τὸ παντελὲς δύναται τοὺς προσερχομένους δι᾽ αὐτοῦ τῷ θεῷ, πάντοτε ζῶν εἰς τὸ ἐντυγχάνειν ὑπὲρ αὐτῶν.
그리하여 그분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완벽하게 구원하실수 있다.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위한 사역에 계속계시다.
간구하심은 그저 기도하심이 아니라 항상 살아가시고 계속 간구하고 계시고, 그래서 그들을 완벽하게 구원하실수 있다.
즉, 예수께서 우리의 뒤를 봐주시는 것이다.
26 Τοιοῦτος γὰρ ἡμῖν καὶ ἔπρεπεν ἀρχιερεύς, ὅσιος ἄκακος ἀμίαντος, κεχωρισμένος ἀπὸ τῶν ἁμαρτωλῶν καὶ ὑψηλότερος τῶν οὐρανῶν γενόμενος,
27 ὃς οὐκ ἔχει καθ᾽ ἡμέραν ἀνάγκην, ὥσπερ οἱ ἀρχιερεῖς, πρότερον ὑπὲρ τῶν ἰδίων ἁμαρτιῶν θυσίας ἀναφέρειν ἔπειτα τῶν τοῦ λαοῦ· τοῦτο γὰρ ἐποίησεν ἐφάπαξ ἑαυτὸν ἀνενέγκας.
이렇게나 큰(훌륭한) 우리에게 합당한 대제사장이 계시다. 경건한(거룩한) 해롭게하심이 없고, 얼룩지게 하시는 분도 아니시고 죄인들로부터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더 높이 계신분이시다.
그분은 날마다 해야하는 필요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다. 자기자신의 죄를 위해서 먼저 제물들을 가져오는, 그 다음에 백성들의
것을 가져오는 대제사장들처럼. 단번에 이것을(백성을 위해 드리는 것) 스스로를 드려 다 이루셨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보지 못했기에 그 웅장함을 모른다.
그러나 로마의 크리스챤들은 대부분 그 경험이 있다. 그 경험과 만족, 기쁨, 유대감이 있기에 그것보다 하늘보좌가 더욱 높고 크다고 해도 전혀 와닿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10만명이 모이고 온 땅과 하늘을 가득채우는 찬양과 화려함 속에서 예배드리다가 2-3명이 모여 예배드리면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규모가 규모가 아니다. 이것은 처음에 천사들을 통해서 온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통해 온 복음의 비교, 콜루세움의 상황과 온땅의 덮는 천사들의 숫자에서 살펴보았다.
우리, 세상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성전을 삼는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 아닌,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에게 우리의 직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믿음 없는 재벌의 자리와 지금 현재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까.
당시 유대크리스찬과 믿는자들에게 닥친 현실은 바로 이런 비교와 선택이었다.
28 ὁ νόμος γὰρ ἀνθρώπους καθίστησιν ἀρχιερεῖς ἔχοντας ἀσθένειαν, ὁ λόγος δὲ τῆς ὁρκωμοσίας τῆς μετὰ τὸν νόμον υἱὸ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τετελειωμένον.
율법은 사람을 제사장들로 세웠다. 그 사람들은 약함을 가진 자들이다. 율법이후의 맹세의 말씀은(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우겠다는 율법이후의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세웠다. 그 아들은 영원토록 온전케 되신 분이다(고난을 통해서)
- 성육신하셨기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자격을 얻으시고
- 자신을 속죄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실수 있으셨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그 말씀에 기초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계속해서 온전케 하실수 있으실 만큼 온전케 되신 분이시다.
설교
서론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주요한 개념중 하나는 하늘 성전과 지상 성전의 비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멜기세덱역시 그 둘의 비교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7장은 멜기세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이 등장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다라고 하면 그저 수긍을 합니다. 하지만 그당시는 달랐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히브리서의 주요한 개념은 하늘성전과 지상성전의 비교입니다. 이 지상성전은 구약의 제사나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당시 현존하고 있던 예루살렘성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에 따르면 히브리서의 기록시기중 가장 신빙성있는 것은 네로황제의 박해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서기 6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서기 70년이니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성전과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한번도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성전도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를 처음으로 받아서 읽었거나, 히브리서가 설교라면, 그 설교를 처음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성전과 제사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영접한지 10년이 넘은 자들이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자들입니다. 그 말은 매년 드리는 대속죄일이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본적이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매년은 가지 못했을지라도 평생 몇 번은 가보았을 것입니다.
이 대속죄일에는 엄청난 제물들이 바쳐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각자 모여서 양을 잡는 것같지만, 모든 제물들은 성전에 모이고, 각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제물과 제물을 잡을 제사장들이 서게 됩니다.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동시에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립니다. 흘러나오는 피와 다른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분문이라는 문이 따로있어야 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요세푸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256,500마리의 양이 잡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장되었겠지만 그 1/10이라도 약 3만마리의 양과 그만큼의 닭과 소가 제물로 바쳐졌다는 뜻이 됩니다.
당시 헤롯성전은 약 4만3천평정도 되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9m로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 13층정도 되는 높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웅장하고 장엄한 성전에서 엄청난 규모로 드려지는 제사를 경험한 자들이 바로 당시 유대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규모에 비해 그들이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는 어떠했습니까. 대부분 가정집에서 예배드렸으며, 나중에 가서야 한 장소를 빌려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웃과 친구들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박해의 때에 유대친구들은 당연히 믿는자들을 만나 설득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내용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맞는지, 맞다는 그 증거는 무엇인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맞다면, 그분은 왕이실뿐 아니라 제사장이시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쿰란 공동체의 기록을 보면 멜기세덱에 대한 기록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를 살펴본 학자들에 의하면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를 2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즉 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있고, 시편 110편을 따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메시아, 2명의 메시아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은 유대공동체내에도 어느정도 퍼져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혈통이었습니다. 사독계열은 혈통이 끊겼지만,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레위자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족보였습니다.
이 두가지를 위해, 본문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2명의 메시아가 아니라 한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왕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레위혈통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는 그 모든 것이 필요없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있는 모든 제사장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에서 엄청난 규모로 제사를 드리지만, 매년, 매일 그렇게 드려도 끝나지 않는 제사이며, 결국 제사장 자신도 연약해서 자신을 위해 먼저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제사를 집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성전의 근거가 되는 율법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말합니다. 레위자손, 제사장을 통해서 드려지는 제사가 온전했다면 왜 매일매일, 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먼저 드리고서야 제사를 드릴수 있는가. 그들이 가진 율법은 그저 율법이지만 우리가 가진 복음은 시편 110편에서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7장 1절에서 25절까지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직면한 도전에 대응할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깥에서 공격해오는 큰 환난과 안에서는 자신과 친한 유대인들이 하는 모든 공격들을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하기 위해서,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끝없이 논쟁을 걸었듯이, 믿는 자들을 끝없이 시험하는 세상에 반박할 힘을 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길게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한 것입니다.
결론
7장을 통해 우리는 왜 멜기세덱이 언급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목적은 당시 유대기독교인들이 당하고 있던 가장 큰 공격을 막고 오히려 역공하기 위한 무장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로의 박해라는 큰 환난속에서 그 모든 것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며, 같은 동포라 알고 지냈던 유대인들의 공격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환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알고 이 땅의 성전이 아닌, 하늘 성전을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당시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이 처했던 공격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공격을 받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왜 예수를 믿느냐. 굳이 예수여야 하는, 교회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봐라 네 주변의 믿는자들도 다 술마시고 할거 다하고 사는데 왜 너만 그래야 하느냐. 너무 광신적인거 아니냐. 믿는 것도 좋지만, 일단 먹고 살아야 할 것아니냐. 등등 우리는 수많은 세상의 의문을 가장한 공격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공격에 대응하며 말씀합니다.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리고 다시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중보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도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뒤를 봐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공격하는 모든 자들을 향해 이 말씀을 준비하십시오. 앞의 모든 질문의 답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움직이고 계시다고, 2000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앞뒤에서 모든 것을 지키고 계신다고 대답할 수있기를 원합니다.
왜냐면 26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합당하다라는 말은 딱맞다. 알맞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합당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와 딱맞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요구들은 세상의 기준에 맞추라는 요구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이땅에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닌, 하늘성전에 들어갈 날을 바라며,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공격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능히 대적할 수 있는, 세상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