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브리서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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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언약의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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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Κεφάλαιον(요지,핵심) δὲ ἐπὶ τοῖς λεγομένοις, τοιοῦτον ἔχομεν ἀρχιερέα, ὃ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οῦ θρόνου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2 τῶν ἁγίων λειτουργὸς καὶ τῆς σκηνῆς τῆς ἀληθινῆς, ἣν ἔπηξεν ὁ κύριος, οὐκ ἄνθρωπος.
지금까지 말한 것들의 핵심은, 이렇게나 좋은 대제사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보좌 오른쪽에 앉아계신다. 그 보좌는 하늘에 있는 굉장한 것
2 그분은 성소에서 섬기는 이며 참 장막에서, 그 장막은 주님께서(하나님?) 세우신 것이다
왜 대통령보다 신자가 나은가? 바로 이런분이 우리의 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보좌 오른쪽이면 우리가 볼 때는 왼쪽이다.
우리는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는가. 우리의 시각에서 보지는 않는가.
높이 계셨다고 다른 일을 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만 성소에서 섬기는 이시지자,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다.
성전이 아니라 장막이다.
언제든 움직일수 있는 장막이다.
그리고 섬기는 이는 바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물론 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장막에 오면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돕는자라는 뜻이다.
3 πᾶς γὰρ ἀρχιερεὺς εἰς τὸ προσφέρειν δῶρά τε καὶ θυσίας καθίσταται· ὅθεν ἀναγκαῖον ἔχειν τι καὶ τοῦτον ὃ προσενέγκῃ.
모든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물들을 갖다드리려고 임명을 받았다. 그러기때문에 이도 가져가셔야 할 것을 가질 필요가 있다.
주제가 대제사장직에서 제물로 바뀜
4 εἰ μὲν οὖν ἦν ἐπὶ γῆς, οὐδ᾽ ἂν ἦν ἱερεύς, ὄντων τῶν προσφερόντων κατὰ νόμον τὰ δῶρα·
만약에서 그분이 땅에 기반을 두고 존재하시는 분이라면, 제사장이 되지 않았을거다(될 필요가 없었다라는 뜻), 율법을 따라서 예물들을 드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 현재조건, 과거조건.
그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있으므로 그분은 제사장이 되실 필요가 없다.
5 οἵτινες ὑποδείγματι καὶ σκιᾷ λατρεύουσιν τῶν ἐπουρανίων, καθὼς κεχρημάτισται Μωϋσῆς μέλλων ἐπιτελεῖν τὴν σκηνήν, Ὅρα γάρ φησιν, ποιήσεις πάντα κατὰ τὸν τύπον τὸν δειχθέντα σοι ἐν τῷ ὄρει·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지다. 모세가 장막을 완성하려고 할 때,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바와 같다.
출5:40 너는 모든 것을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모양을 따라서 하늘에서 너에게 보인,
하늘에서 보인 실체가 있고, 모세는 그것을 따라 만들었다.
6 νυν[ὶ] δὲ διαφορωτέρας τέτυχεν λειτουργίας, ὅσῳ καὶ κρείττονός ἐστιν διαθήκης μεσίτης, ἥτις ἐπὶ κρείττοσιν ἐπαγγελίαις νενομοθέτηται.
지금은 거기에 늘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있어 더 훌륭한 예배, 직분을 받았다. 그 언약은 더 좋은 약속에 근거해서
더 좋은 약속에 근거해 더 훌륭한 예배의 직분을 받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거기에는 늘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안에서 예배드림이 더 좋은 예배이지만
하나님께도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예배드림이 더욱 훌륭한 예배라는 뜻이다.
7 Εἰ γὰρ ἡ πρώτη ἐκείνη ἦν ἄμεμπτος, οὐκ ἂν δευτέρας ἐζητεῖτο τόπος.
저 첫번째 언약이 흠이 없다면, 두번째 항목은 구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8 μεμφόμενος γὰρ αὐτοὺς λέγει, Ἰδοὺ ἡμέραι ἔρχονται, λέγει κύριος, καὶ συντελέσω ἐπὶ τὸν οἶκον Ἰσραὴλ καὶ ἐπὶ τὸν οἶκον Ἰούδα διαθήκην καινήν,
9 οὐ κατὰ τὴν διαθήκην, ἣν ἐποίησα τοῖς πατράσιν αὐτῶν ἐν ἡμέρᾳ ἐπιλαβομένου μου τῆς χειρὸς αὐτῶν ἐξαγαγεῖν αὐτοὺς ἐκ γῆς Αἰγύπτου, ὅτι αὐτοὶ οὐκ ἐνέμειναν ἐν τῇ διαθήκῃ μου, κἀγὼ ἠμέλησα αὐτῶν, λέγει κύριος·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그리고 유다집위로 새 언약을 확정짓는다. 그 언약은 그들조상과 맺은 언약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의 손을 붙잡고 애굽으로부터 끌어내던 날에 그 조상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않다. 그들이 내 언약안에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예레미야서의 중요한 주제는 성전훼파다. 그때 주셨던 말씀이 이 성전, 이 율법 말고 새언약을 세우겠다.
성전에서 제물로 가기 전에 예배와 언약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언약이 지금의 주제다.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고, 그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가 무의미하다.
멜기세덱본문이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을 설명하한다.
그렇다면, 언약은 성전을 지을 때 언약을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말한다.
예레미야당시에 유다는 망했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표현은 전체를 말한다.
그들에게 보다 긍정적인 입장에서 새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언약을 어떤 언약, 그 조상들에게 제정했던 언약을 따라서 가는게 아니다. 그 연ㅇ장선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옛것은 낡아지고 새것이 온다.
그때는 내가 그들의 손을 잡던(끌어주던) 날, 그들을 애굽땅에서 이끌어내려고.
새언약을 완성하겠다.
10 ὅτι αὕτη ἡ διαθήκη, ἣν διαθήσομαι τῷ οἴκῳ Ἰσραὴλ μετὰ τὰς ἡμέρας ἐκείνας, λέγει κύριος· διδοὺς νόμους μου εἰς τὴν διάνοιαν αὐτῶν καὶ ἐπὶ καρδίας αὐτῶν ἐπιγράψω αὐτούς, καὶ ἔσομαι αὐτοῖς εἰς θεόν, καὶ αὐτοὶ ἔσονταί μοι εἰς λαόν·
이것이 그언약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다. 저 날들 후에,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 율법을 그들의 지성이 있는 곳에 두어서(허용하여서) 그들의 마음위에 까지도 그것이 기록되게 하겠다.
διδοὺς νόμους μου εἰς τὴν διάνοιαν αὐτῶν καὶ ἐπὶ καρδίας αὐτῶν ἐπιγράψω αὐτούς, καὶ ἔσομαι αὐτοῖς εἰς θεόν, καὶ αὐτοὶ ἔσονταί μοι εἰς λαόν·
이해되게 하셔서 마음에 기록되게 하고, 그러면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러면 나도 그들을 내 백성으로 받겠다.
11 καὶ οὐ μὴ διδάξωσιν ἕκαστος τὸν πολίτην αὐτοῦ καὶ ἕκαστος τὸν ἀδελφὸν αὐτοῦ λέγων, Γνῶθι τὸν κύριον, ὅτι πάντες εἰδήσουσίν με ἀπὸ μικροῦ ἕως μεγάλου αὐτῶν,
12 ὅτι ἵλεως ἔσομαι ταῖς ἀδικίαις αὐτῶν καὶ τῶν ἁμαρτιῶν αὐτῶν οὐ μὴ μνησθῶ ἔτι.
각자그의 이웃들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알아라고. 왜냐면 모두가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이들부터 큰 이들까지.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다시 그들의 죄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 미래완료로 그럴 것으로 기대된다라는 뜻이다
13 ἐν τῷ λέγειν Καινὴν πεπαλαίωκεν τὴν πρώτην· τὸ δὲ παλαιούμενον καὶ γηράσκον ἐγγὺς ἀφανισμοῦ. ( GNT)
새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첫번째 것을 오래된 것으로 삼으실 것이다. 낡고 늙은 것은 사라진 것에 가깝다.
본문
서론
본론
구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1절 하늘보좌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2절 주님이 세우신 장막에서 섬기는 그리스도 :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을 말하는 듯.
우리가 가진 것. 믿음이 이 세상에 모든 것보다 나은 이유.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섬기고 있기 때문
사람은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섬기기 위해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다.
주님의 보좌 우편이지만,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잊지 않으신다.
이 섬기다라는 말은 일하는 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노예와는 차이가 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분상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으나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장막에 계신다.
성전이 아니라 장막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움직일수 없는 성전이 아니다.
왜 장막일까? 바로 우리가 성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장막이라 칭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 장막을 섬기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삼으신 우리를 돕는 자로서 지금도 함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주께서는 중보자이시다.
3절
이제 제물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한다.
왜냐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자이며, 제사에는 제물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4절
그러나 그분이 드리는 제물은 땅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과 같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드렸기에, 우리는 제사가 아니라 예배를 드린다.
5절
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우월성, 중요함을 말한다. 제사는 결국 하늘 성전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 성전을 보고 그것을 따라 장막을 만든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조상이 드렸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제사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는 결국 천국에서 누릴 것의 모형으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려도 그것은 단지 모형, 가짜에 불과하다. 진짜는 천국에서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이다.
6절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더 좋은 것이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가진 더 아름다운 직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직분이라는 단어는 직무, 예배, 사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특별히 예배에 관련된 단어다.
즉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좋은 언약의 중보자께서는 더 아름다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그분은 예배를 섬기고 계신다. 예배를 드리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제사보다 탁월하다.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케 된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이다. 그리스도께서 주관자로서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이기 때문이다. 염소, 양, 소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가 드려지고, 그 피로 덮힌 우리가 드려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배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다.
7절
그렇다면 첫언약, 구약은 무의미한 것인가? 히브리서를 읽은 이 당시 성도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언약과 맹세가 함께 있는, 새언약을 받았을 뿐이다. 이제 더 좋은 것이 있으니 옛것은 버리라는 것이 7절이다.
8-9절
그에 대한 근거로 예레미야서를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새언약이다. 왜냐면 예레미야서의 주요 주제는 성전 훼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 첫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수 있겠는가이다.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언약이다. 성전도 언약에 기초해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근거한 예배다. 그러니 언약이 파괴되었으니 자연히 성전도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너진 언약을 대신할 언약으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발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은 무너진 옛 언약의 연장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언약이다.
이 새 언약이 이미 계시되었고, 우리는 지금 받고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새언약은 10절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그 법을 우리의 생각속에 넣어주셔서 이해하게하심이 기초다. 그래서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기록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먼저 전제되는 언약이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다.
말하지 않아도 말씀만 읽어도 이해되는 새언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거룩한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13절
이 새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옛 언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91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방재숙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6절입니다. 신약 350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설교
서론
앞서 살펴본 7장은 그리스도 예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직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그 직무와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8절까지를 보면 뜨끔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도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은 거 같아서입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처럼 고난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위로만을 바라고 올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걷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본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본론
오늘 본문 8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지 말하며 시작합니다.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 누구도 앉지 못하는, 거룩한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동시에 2절을 통해 그분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3가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하늘의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지만 동시에 그분의 직무인 중보를 결코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장막에서 섬긴다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 그자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일하다, 돕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높은 곳에서도 우리를 돕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망을 가져라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계신 곳은 하늘의 성전이 아니라,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보면 하늘 성전이 건물로 표현된 것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곳도 휘장안입니다. 지금도 장막으로 표현합니다. 휘장은 헬라어로 펄럭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성전이 건물이라면, 성전문을 닫으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장막이라면, 밑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막은 움직일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움직일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긴 것이 장막, 쉬운말로 텐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막, 이 텐트는 유대인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유목을 했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집을 지어 사는 것보다 텐트에서 사는 것이 익숙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히브리서는 6장 1절에서 8절까지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 있을까요. 바로 소망을 위해서입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있기 때문에 성립됩니다. 결국 8절까지 말하는 떠나간 자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자들은 소망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장막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늘 성전이 아닌 하늘 성막을 지어놓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전을 우리와 함께 만들어가시기를 원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망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답은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도 적혀 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두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참고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없음은 여기서 말하는 두가지는 아닙니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히브리서가 지금 이 본문에서 말하는 두가지는 아닙니다. 그냥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우리의 소망의 원천, 변할 수 없는 두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이후 우리를 위해 다시한번 맹세하신 것. 이 두가지 변할수 없는 사실이 우리의 소망의 원천이 됩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자신의 고향과 혈육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향한 것과 같습니다.
라는 -22절의 말씀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저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10년전 20년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단순히 몸이 자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자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알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성막에서 섬기는 자로서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주께서 우리의 무엇을 섬기고 돕는 것입니까.
그것은 6절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약속들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동시에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약속의 성취와 성경속에 적혀있는 수많은 약속과 성취들을 보며, 성경이 그저 적혀있는 글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고, 우리에게 주실 성취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직분이라는 단어는 예배, 사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직분은 바로 예배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믿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말씀이 괴리가 느껴지십니까. 믿음이 흔들리고 말씀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느껴지십니까. 소망을 가지십시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공감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소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이 예배가 끝나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휘장안에 들어가서 아직도 나오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잃은 양들을 찾고, 그 양들이 모두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한마음으로 한 성령안에서 예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흔들릴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환경이 흔들리면, 우리는 자연히 같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배가 튼튼하고 크다하더라도, 태풍이 치게되면 그 배는 흔들립니다. 어쩌면 뒤집어지고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예배를 돕고 섬기는 자로서 우리 곁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께서는 더 아름다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둘째, 흔들릴 때, 소망이 우리의 영혼의 닻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누구보다 우리와 가까이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더 좋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기에 우리 한명한명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가 이제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닻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지금 말하는 것은 닻입니다. 돛이 아닙니다. 돛은 배가 바람을 받아서 갈수있게 만드는 겁니다. 반대로 닻은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도 더 좋은 예배를 드리는 분이십니다. 그저 염소, 양, 소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로 드렸고, 또한 우리와 성령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실 만한 예배를 지금도 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닻을 생각하면, 어디에 고정할 수 있게 생긴 쇳덩어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닻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쇠도 아닙니다. 그당시에는 그냥 돌덩이에 밧줄을 묶어서 닻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닻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 안에 들어가면 그냥 조그만 방에 돌덩어리, 작은 것은 돌맹이같은 것에서부터 큰 돌덩이까지 쭉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 줄을 묶어서 닻으로 썼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예배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영혼의 닻, 소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닻을 만들라면 만들 수 있겠습니까. 쇳덩어리로 되어 있고, 고정시킬 수 있게 모양이 된 그 닻을 우리가 만들 수 있습니까.
물론 이땅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예배속에서 은혜를 느낄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데, 그 임재는 전혀 느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닻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소망은 거창해보이는 것이고, 내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닻을, 소망을 가지라고 하는 거야고 항의할 수 이도 있습니다.
저기 카톨릭은 매우 엄숙하고 장엄한 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예배중간중간 의식도 많습니다. 신부들의 복장도 엄숙합니다. 화려하고 웅장해보입니다. 불교는 어쨌든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경배드리는 대상이 이렇다는 것을 눈으로 직관적으로 보게 해줍니다. 공통적으로 이 둘은 종교의식중 볼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그저 돌멩이와 같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밧줄을 묶기에 좋은 돌멩이 하나 골라서 묶어놓고, 물속으로 던지면 그것이 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앞에 있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이 십자가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이 있습니다. 진짜 예배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입으로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듣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배에 돌덩이가 하나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 바로 그 당시의 닻이었습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보는 것이 빠져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보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들은 보는 것에 매우 신경을 많이 씁니다. 조명부터 시작해서 어떤 교회들은 이 화면을 통해 여러 가지 자료를 띄우기도 합니다. 교회뉴스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배가 끝나지 않은 광고시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보는 것이 없는 예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그랬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대상은 성소에서 우리를 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해야할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배할 수있겠습니까.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소망을 듣고, 소망대로 사는 우리를 보며 비웃을수도 있습니다. 그딴 돌멩이로 뭘하겠냐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왜 무겁게 이런 돌멩이를 돌덩어리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의 제사, 로마의 카타콤에서 수만의 군중들에게 둘러쌓여 죽어가는 우리의 처참한 모습이 우리의 본모습이 아니란 것을 말했습니다.
그냥 없애버리고 세상이 제시하는 길로 가면 안전하지 않나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바로 믿음으로, 하늘 장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장막은 5절에 말했듯이 이전에 모세가 보았던 장막입니다. 우리는 그 장막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그러나 그 닻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방황하며, 헤메대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소망을 붙드십시오.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닻입니다. 그 닻은 겉보기에는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배에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항해중에는 무게만 차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그 어떤 예배보다 탁월한 예배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섬기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도와 말씀, 찬양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본질에 집중하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닻,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폭풍우같은 시련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성도들은 유대인으로 오래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켰던 그 모든 계명과 말씀들은 무의미한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믿고 그 믿음의 소망,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는 소망을 끝까지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7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 결론은 이렇습니다.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새언약이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도 새언약이다.
이런 말을 하는 배경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구약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성도들에게 구약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면, 그들은 이 말씀을 핑계삼아 다시 유대교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만큼 환난이 심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구약, 오래된 약속이지만, 그들에게는 현재의 약속이며, 몇 년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평생을 지켰던 약속입니다. 오히려 새언약보다 더욱 익숙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기에 13절을 말한 것입니다.
셋째 약속의 소망속에서의 삶 – 영원한 예배
그리고 그들에게 8절에서 12절까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왜냐면 예레미야서의 중요한 주제는 성전훼파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때 유대인들이 그렇게 완고했던 이유가 성전이 파괴될 리가 없다는 믿음이 큰 이유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 예레미야서에 새 언약에 대해 적혀 있음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망을 끝까지 붙든다면, 또한 붙들기를 원한다면, 예배의 삶을 사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헷갈려하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벌써 한번 무너졌던 성전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 소망을 가지고 휘장안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20절에서는 그 휘장 안쪽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먼저 들어가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니라 그 성전을 성전되게한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란 사실을 말하는 것이 8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커녕 평생 한번도 이스라엘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속죄제, 특히 대속죄일 때 제사는 간단하게 3가지 순서를 가집니다. 먼저 백성들이 제물을 대제사장에게 드립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이 그 제물을 받아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다시 백성에게로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있는 이 교회가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에 속해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세상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일 모여서 그렇게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도 나중에는 매일 못모이고 주일에 모였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러했는데, 우리가 별다를게 있겠습니까. 우리도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말했던 가톨릭과 불교의 종교의식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볼 것들과 할 것들속에 파묻혀서 있다고 옵니다. 당연히 볼것이 없는 예배가 참 심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대속죄일 때 드려지는 제사의 모습입니다. 왜 이걸 말하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가 이 속죄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를 대신해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보좌로 그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다시 나오셔서, 우리를 위해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재림입니다. 새하늘과 새땅, 성도의 부활, 그 모든 것은 바로 예배의 완성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려고 합니까. 어차피 그들은 죽은 후 백보좌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그들이 원하든지 원치않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예배는 새언약의 예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예배이며, 그 섬김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늘장막에서 제사장으로 우리를 돕고 계시는 예배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이 세상에서 당한 모든 환난과 핍박의 보응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예배의 탁월성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보이는게 없고, 너무 오래 이렇게 해왔기에 변화를 주어야 하고, 그래서 새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배때 어떻게 새마음과 새뜻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 나머지 반을 지금 말합니다. 예배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드렸던 제사때, 대제사장이 나와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하는 것. 그것으로 제사가 끝나는 것처럼, 예배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완전한 예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결론
또한 그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 이후,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뿐 아니라 이땅에서 드리는 예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예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그날까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드리는 그 때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완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러나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그 중보의 절정은 하늘 장막에서 예배의 중보자로 계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좋은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하나님께도 더욱 나은 예배를 드리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소망을 붙잡았다면, 우리의 산 소망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의 자리를 기대하며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찬양이 끊이질 않아야 합니다. 단순히 끊이지 않는 것을 넘어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찬양이 되어야 하며, 기도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이는 이 장소보다 더욱 멋지고 아름답고 웅장한 장소, 우리가 보기에 더욱 나아보이는 예배처소는 많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예배장소를 보십시오. 온갖것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있는 성막을 말합니다. 건물이 아닌 텐트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텐트는 모세가 보았던 것이며, 우리의 최초이자 본질적인 예배의 처소임을 말합니다.
왜냐면 아직,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중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장막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약속에 근거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로서 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을 소망으로 부여잡고 나아갑니까. 그렇다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도록 기도와 간구로, 또한 기쁨과 감사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 예배는 우리에게 더 좋은 예배이며, 하나님께도 더욱 기쁜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에는 보는 것이 빠져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의 예배는 사람이 보기에 혹하고 뭔가 거룩해 보이고 압도할만한 것이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삼으며 예배합니다.
결론
그러니 우리가 말씀안에서 예배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배는 새언약,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의 예배입니다. 더 좋은 예배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것이 너무도 많지만,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천국의 그 어떤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추구하고, 사람의 눈에 멋져보이고 있어보이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험한 십자가의 자리를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찌르는 것같고, 아플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그 소망은 돌멩이처럼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 같은 소망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끝까지 믿음과 소망의 경주를 인내로 감당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망을 가졌다면, 예배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그날을 위해 지금도 하늘보좌, 은혜의 보좌, 휘장너머에 계십니다. 그러니 소망을 붙잡고 믿음의 경주를 하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이 우리의 예배와 예배가 되는 우리의 삶의 언제나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1남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 특송은 아브라함, 모세, 안나, 루디아입니다.
ㅇ2남전도회 주관 가족찬양대회가 있습니다. 7월 7일 주일 저녁예배후에 하며 대상은 3인 이상 가족입니다.
ㅇ2019년 부서별 여름성경학교 및 수련회가 진행됩니다. 주보를 참고하시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부산기독여성협의회 주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6월 1일 낮 12시에 여전도회 회관에서 있습니다.
ㅇ1여전도회 6월 한달 연속 철야기도가 있습니다.
ㅇ루디아회 야유회가 있습니다. 30일 목요일 8시에 교회에서 출발합니다. 해당되시는 분은 8시까지 교회로 오시기 바랍니다.
ㅇ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41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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