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8.금요기도회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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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예배순서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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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1절-15절 말씀입니다. 신약 360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특송 :남녀회장단 특송있겠습니다.
설교
서론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주요한 개념중 하나는 하늘 성전과 지상 성전의 비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멜기세덱역시 그 둘의 비교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7장은 멜기세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이 등장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다라고 하면 그저 수긍을 합니다. 하지만 그당시는 달랐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히브리서의 주요한 개념은 하늘성전과 지상성전의 비교입니다. 이 지상성전은 구약의 제사나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당시 현존하고 있던 예루살렘성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에 따르면 히브리서의 기록시기중 가장 신빙성있는 것은 네로황제의 박해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서기 6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서기 70년이니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성전과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한번도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성전도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를 처음으로 받아서 읽었거나, 히브리서가 설교라면, 그 설교를 처음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성전과 제사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영접한지 10년이 넘은 자들이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자들입니다. 그 말은 매년 드리는 대속죄일이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본적이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매년은 가지 못했을지라도 평생 몇 번은 가보았을 것입니다.
이 대속죄일에는 엄청난 제물들이 바쳐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각자 모여서 양을 잡는 것같지만, 모든 제물들은 성전에 모이고, 각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제물과 제물을 잡을 제사장들이 서게 됩니다.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동시에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립니다. 흘러나오는 피와 다른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분문이라는 문이 따로있어야 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요세푸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256,500마리의 양이 잡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장되었겠지만 그 1/10이라도 약 3만마리의 양과 그만큼의 닭과 소가 제물로 바쳐졌다는 뜻이 됩니다.
당시 헤롯성전은 약 4만3천평정도 되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9m로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 13층정도 되는 높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웅장하고 장엄한 성전에서 엄청난 규모로 드려지는 제사를 경험한 자들이 바로 당시 유대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규모에 비해 그들이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는 어떠했습니까. 대부분 가정집에서 예배드렸으며, 나중에 가서야 한 장소를 빌려서 예배드렸습니다.
비교되지 않는 지상의 처지
그리고 그들의 이웃과 친구들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박해의 때에 유대친구들은 당연히 믿는자들을 만나 설득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내용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맞는지, 맞다는 그 증거는 무엇인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맞다면, 그분은 왕이실뿐 아니라 제사장이시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쿰란 공동체의 기록을 보면 멜기세덱에 대한 기록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를 살펴본 학자들에 의하면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를 2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즉 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있고, 시편 110편을 따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메시아, 2명의 메시아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은 유대공동체내에도 어느정도 퍼져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시편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므로, 그들역시 이런 사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혈통이었습니다. 사독계열은 혈통이 끊겼지만,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레위자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족보였습니다.
이 두가지를 위해, 본문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2명의 메시아가 아니라 한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왕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레위혈통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는 그 모든 것이 필요없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있는 모든 제사장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에서 엄청난 규모로 제사를 드리지만, 매년, 매일 그렇게 드려도 끝나지 않는 제사이며, 결국 제사장 자신도 연약해서 자신을 위해 먼저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제사를 집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성전의 근거가 되는 율법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말합니다. 레위자손, 제사장을 통해서 드려지는 제사가 온전했다면 왜 매일매일, 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먼저 드리고서야 제사를 드릴수 있는가. 그들이 가진 율법은 그저 율법이지만 우리가 가진 복음은 시편 110편에서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7장 1절에서 25절까지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직면한 도전에 대응할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깥에서 공격해오는 큰 환난과 안에서는 자신과 친한 유대인들이 하는 모든 공격들을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하기 위해서,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끝없이 논쟁을 걸었듯이, 믿는 자들을 끝없이 시험하는 세상에 반박할 힘을 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길게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한 것입니다.
결론
7장을 통해 우리는 왜 멜기세덱이 언급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목적은 당시 유대기독교인들이 당하고 있던 가장 큰 공격을 막고 오히려 역공하기 위한 무장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로의 박해라는 큰 환난속에서 그 모든 것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며, 같은 동포라 알고 지냈던 유대인들의 공격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환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알고 이 땅의 성전이 아닌, 하늘 성전을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당시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이 처했던 공격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공격을 받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왜 예수를 믿느냐. 굳이 예수여야 하는, 교회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봐라 네 주변의 믿는자들도 다 술마시고 할거 다하고 사는데 왜 너만 그래야 하느냐. 너무 광신적인거 아니냐. 믿는 것도 좋지만, 일단 먹고 살아야 할 것아니냐. 등등 우리는 수많은 세상의 의문을 가장한 공격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공격에 대응하며 말씀합니다.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리고 다시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기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중보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도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뒤를 봐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공격하는 모든 자들을 향해 이 말씀을 준비하십시오. 앞의 모든 질문의 답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움직이고 계시다고, 2000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앞뒤에서 모든 것을 지키고 계신다고 대답할 수있기를 원합니다.
왜냐면 26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합당하다라는 말은 딱맞다. 알맞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합당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와 딱맞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요구들은 세상의 기준에 맞추라는 요구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이땅에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닌, 하늘성전에 들어갈 날을 바라며,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공격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능히 대적할 수 있는, 세상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설교
서론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줄 압니다. 그후에 히브리서는 지상성전, 예루살렘 성전과 하늘 성전을 비교합니다. 웅장한 건물과 장대한 규모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 그러나 결국 가짜에 불과한 곳과 진정한 성소,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8장에서는 드려지는 제물에 대해 말하며, 지상 성전의 제사장과 하늘 장막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지상 성전을 세운 언약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성소 그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과하다 싶은 설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는 이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9장 1절에서 5절은 말씀드렸듯이 그당시 땅에 있는 성전, 예루살렘 성전안에 있는 성소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소안에 있는 등잔대와 상, 진설병, 지성소,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조각품등등 그 모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 마지막에 이에 대해선 낱낱이 말할수 없다. 다른 말로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본문의 중심은 지상 성전의 웅장함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는 등잔대가 금으로 되어 있고 또 촛대가 어떻고, 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동시에 지성소안에 있는 법궤를 언급함으로써, 지금 있는 성전, 그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모형으로서 조차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언약궤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이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성전이며, 이 언약궤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상징입니다. 그것때문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만나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제사장을 뜻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인, 십계명 돌판이 언약궤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언약궤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성전이 아무리 웅장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이 없는 사실을 읽는 모든 자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당시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성전, 완공된지 3-5년밖에 되지 않은 성전은 처음부터 제대로된 성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도 사독계열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두개인, 즉 사독계열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때문에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6절과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면, 이미 언약궤가 없음을 눈치챘습니다. 귿음에 제사장이 제사를 하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알지못하는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할지라도 그게 온전한 제사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즉시 눈치채지 못하는 성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8절에서 10절까지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성전은 그저 비유다.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히 있다는 것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함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둘째장막, 하늘의 장막이 우리에게 온전히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대제사장되심을 말합니다. 12은 염소와 송아지가 아닌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린다라고 14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양심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판단기준준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양심, 헬라어로 양심이라는 말은 우리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양심은 함께 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말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볼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고려하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는 말이 양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양심은 겸손과 맛닿아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마음이 살아있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면, 양심이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잘 새겨들어 내 판단이 아닌 가장 좋은 판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9장 처음에 땅에 있는 성소를 말하며, 일부러 언약궤를 언급해서 그 성소가 온전하지 않음을 주지시킵니다. 그리고 6절, 7절에서 제사장을 말함으로 제사장도 온전한 제사장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8절에 첫장막이 온전하면,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땅의 성전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 있었던 양심상 온전하게 할수 없는 제사와 14절에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비교합니다.
왜냐면 양심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겸손할 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세하게 지상성전과 하늘성전을 비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늘 성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로 새로운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낯선것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옛날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이 당시 성도들은 새것, 새언약, 새언약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새것이 좋음을 말해도, 고난당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낯선 것보다는 옛것이 좋습니다. 옛것에 미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한치앞도 보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은 반대로, 이미 이루어진 이라고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영어번역본도 우리말도 이것을 미래라고 말할 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뭐가 들어가도 맞기 때문입니다.
왜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모호하게 썼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소위 보장된 것이 있습니다. 보장된 직업, 보장된 집, 보장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장된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든 그 길로 올라타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우리의 눈과 판단에 보장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보다는 당장 1000평이 넘는 호화 주택을 준다고 하면 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부터, 제물, 성소와 성소안의 집기들, 그 집기들을 이용해서 제사를 시행하는 제사장들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봐라, 이 모든 것이 정말 화려하고 있어보이고, 익숙한 것이지? 하지만 이모든 것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이 없음을 믿습니까.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고백하십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 장막으로 데려다주실 것이라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하늘 장막을 선택하기가 참 힘듭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포기하고 희생하고 참고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그를 믿으면, 당장은 고난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로 우리의 존재자체가 넘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당장 믿고따르면 포기하고 손해보는 것같다. 그리고 헌금을 내야하고 헌신을 해야하고 봉사를 해서 만들어갈게 너무 많은것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벌써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예비해놓으셨다. 우리는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간 이 목소리를 듣고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그 길로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분명 세상의 길이 편해보이고, 좋은 것도 많아보입니다. 옛방식, 세상방식이 눈에 보이는 보장도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로 가면, 험하고 좁은 길에서 고생할 것같습니다. 하지만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사실을 믿고 기쁨으로 하나님앞에 나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
기도제목(간단하게)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놓으신 좋으 것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또한 더 좋은 것을 이루실 예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교육부서의 여름행사, 특별히 지금 진행중인 청년2부의 수련회를 위해서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성도들과 아픈이들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광고
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