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12.금요기도회 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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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구역연합예배x(헌금)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1절-15절 말씀입니다. 신약 360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특송 :남녀회장단 특송있겠습니다.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
구역연합예배x

설교

(헌금)
서론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줄 압니다. 그후에 히브리서는 지상성전, 예루살렘 성전과 하늘 성전을 비교합니다. 웅장한 건물과 장대한 규모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 그러나 결국 가짜에 불과한 곳과 진정한 성소,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8장에서는 드려지는 제물에 대해 말하며, 지상 성전의 제사장과 하늘 장막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지상 성전을 세운 언약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성소 그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과하다 싶은 설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는 이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본론 9장 1절에서 5절은 말씀드렸듯이 그당시 땅에 있는 성전, 예루살렘 성전안에 있는 성소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소안에 있는 등잔대와 상, 진설병, 지성소,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조각품등등 그 모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 마지막에 이에 대해선 낱낱이 말할수 없다. 다른 말로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본문의 중심은 지상 성전의 웅장함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는 등잔대가 금으로 되어 있고 또 촛대가 어떻고, 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동시에 지성소안에 있는 법궤를 언급함으로써, 지금 있는 성전, 그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모형으로서 조차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언약궤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이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성전이며, 이 언약궤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상징입니다. 그것때문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만나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제사장을 뜻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인, 십계명 돌판이 언약궤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언약궤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성전이 아무리 웅장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이 없는 사실을 읽는 모든 자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당시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너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성전, 완공된지 3-5년밖에 되지 않은 성전은 처음부터 제대로된 성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또한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도 사독계열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두개인, 즉 사독계열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때문에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6절과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면, 이미 언약궤가 없음을 눈치챘습니다. 귿음에 제사장이 제사를 하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알지못하는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할지라도 그게 온전한 제사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즉시 눈치채지 못하는 성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8절에서 10절까지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성전은 그저 비유다.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히 있다는 것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함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둘째장막, 하늘의 장막이 우리에게 온전히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대제사장되심을 말합니다. 12은 염소와 송아지가 아닌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린다라고 14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흔히 양심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판단기준준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양심, 헬라어로 양심이라는 말은 우리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양심은 함께 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말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볼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고려하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는 말이 양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양심은 겸손과 맛닿아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마음이 살아있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면, 양심이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잘 새겨들어 내 판단이 아닌 가장 좋은 판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9장 처음에 땅에 있는 성소를 말하며, 일부러 언약궤를 언급해서 그 성소가 온전하지 않음을 주지시킵니다. 그리고 6절, 7절에서 제사장을 말함으로 제사장도 온전한 제사장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8절에 첫장막이 온전하면,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땅의 성전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 있었던 양심상 온전하게 할수 없는 제사와 14절에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비교합니다. 왜냐면 양심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겸손할 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세하게 지상성전과 하늘성전을 비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늘 성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로 새로운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낯선것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옛날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이 당시 성도들은 새것, 새언약, 새언약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새것이 좋음을 말해도, 고난당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낯선 것보다는 옛것이 좋습니다. 옛것에 미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한치앞도 보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장래라는 말은 반대로, 이미 이루어진 이라고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영어번역본도 우리말도 이것을 미래라고 말할 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뭐가 들어가도 맞기 때문입니다.왜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모호하게 썼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입니다.세상일은 소위 보장된 것이 있습니다. 보장된 직업, 보장된 집, 보장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장된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든 그 길로 올라타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우리의 눈과 판단에 보장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보다는 당장 1000평이 넘는 호화 주택을 준다고 하면 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부터, 제물, 성소와 성소안의 집기들, 그 집기들을 이용해서 제사를 시행하는 제사장들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봐라, 이 모든 것이 정말 화려하고 있어보이고, 익숙한 것이지? 하지만 이모든 것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이 없음을 믿습니까.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고백하십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 장막으로 데려다주실 것이라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하늘 장막을 선택하기가 참 힘듭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포기하고 희생하고 참고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그를 믿으면, 당장은 고난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로 우리의 존재자체가 넘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당장 믿고따르면 포기하고 손해보는 것같다. 그리고 헌금을 내야하고 헌신을 해야하고 봉사를 해서 만들어갈게 너무 많은것같다.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벌써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예비해놓으셨다. 우리는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그러니 이 시간 이 목소리를 듣고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그 길로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분명 세상의 길이 편해보이고, 좋은 것도 많아보입니다. 옛방식, 세상방식이 눈에 보이는 보장도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로 가면, 험하고 좁은 길에서 고생할 것같습니다. 하지만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이사실을 믿고 기쁨으로 하나님앞에 나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기도제목(간단하게)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놓으신 좋으 것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또한 더 좋은 것을 이루실 예수님께 기도하겠습니다.교육부서의 여름행사, 특별히 지금 진행중인 청년2부의 수련회를 위해서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성도들과 아픈이들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마무리기도주기도문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나라이 임하옵시며,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아멘 -광고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
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절-10절 말씀입니다. 신약 363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특송 :2교구 특송있겠습니다.
설교
서론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줄 압니다. 그후에 히브리서는 지상성전, 예루살렘 성전과 하늘 성전을 비교합니다. 웅장한 건물과 장대한 규모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 그러나 결국 가짜에 불과한 곳과 진정한 성소, 성막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8장에서는 드려지는 제물에 대해 말하며, 지상 성전의 제사장과 하늘 장막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지상 성전을 세운 언약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가지 주제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헛됨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두 번째 것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둘은 따로 교훈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은혜이자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이 은혜이자 능력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성소 그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과하다 싶은 설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는 이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본론
9장 1절에서 5절은 말씀드렸듯이 그당시 땅에 있는 성전, 예루살렘 성전안에 있는 성소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소안에 있는 등잔대와 상, 진설병, 지성소,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조각품등등 그 모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 마지막에 이에 대해선 낱낱이 말할수 없다. 다른 말로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본문은 율법이 단지 그림자임을 말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당장 죽을 위기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속죄와 재림에 대해 말하며, 그들에게 그 위기에 지지 않을 것을 말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인 권면은 10장 23절에서 25절에 나옵니다. 하지만 10장의 권면이 나온 이유가 9장이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본문의 중심은 지상 성전의 웅장함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는 등잔대가 금으로 되어 있고 또 촛대가 어떻고, 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의 헛됨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율법의 죽음은 아무것도 이룰수 없기때문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린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언약, 새생명에는 결코 이를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위에서 이미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성소안에 있는 법궤를 언급함으로써, 지금 있는 성전, 그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모형으로서 조차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복의 첫 번째 이유는 율법의 헛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쭉 말했지만, 다시한번 율법이 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당시 율법에 익숙한 성도들을 향해서 익숙하지만 이미 죽은 율법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속해서 머무를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언약궤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이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성전이며, 이 언약궤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상징입니다. 그것때문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만나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제사장을 뜻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인, 십계명 돌판이 언약궤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언약궤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성전이 아무리 웅장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이 없는 사실을 읽는 모든 자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율법에는 없고, 그리스도에게는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은혜이자 능력은 죄의 양심입니다. 2절에서 나오는 죄를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번역들에는 죄의식, 죄에 대한 의식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게 9장 7절에서 말한 양심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5절에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당시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성전, 완공된지 3-5년밖에 되지 않은 성전은 처음부터 제대로된 성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양심은 말씀드렸듯이, 종합적인 판단을 뜻합니다.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 기준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헬라어로 양심의 뜻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다른 말로 바꾸면 종합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도 사독계열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두개인, 즉 사독계열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양심이라는 말을 통해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이전의 제사는 결코 줄수 없는 능력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것때문에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6절과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면, 이미 언약궤가 없음을 눈치챘습니다. 귿음에 제사장이 제사를 하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알지못하는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할지라도 그게 온전한 제사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즉시 눈치채지 못하는 성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8절에서 10절까지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죄를 깨다는 일, 죄의 양심이라는 말은 죄를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즉,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죄가 아님을 알고 죄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예배마다 온전히 우리가 예배에 우리를 드립니까. 그럴 때도 있지만, 온갖 잡념이 다 들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예배를 방해하는 우리의 죄부터 시작해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시며, 우리가 예배에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까지 말합니다.
지금 있는 성전은 그저 비유다.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히 있다는 것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첫장막, 지상성전이 온전함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둘째장막, 하늘의 장막이 우리에게 온전히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듯 단순히 예배때 드는 잡념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 그당시까지 이루어지던 예루살렘의 제사는 겉보기는 그럴듯해보이나 진짜 중요한 능력, 죄를 떠나고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그래서 4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대제사장되심을 말합니다. 12은 염소와 송아지가 아닌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소개합니다.
2절과 3절에서 말하는 바는 구약의 제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완성하시고, 둘 째 장막을 이루신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나, 진짜 중요한 능력이 죄를 떠나고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린다라고 14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입니다. 만약 우리가 제사를 드리다면, 속죄제로 드려지는, 좀더 직접적으로 도살되는 황소와 염소, 양, 비둘기같은 제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소가 울부짖으며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죽어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할까요. 아니면 끔찍하다는 생각을 먼저할까요. 익숙해지면 별 감흥이 없겠지만 처음 제사를 접하면 끔찍하다는 생각부터 할 것입니다. 특히 유월절이 되어 한꺼번에 엄청난 수의 제물이 도살되는 것을 보고 성전에 가득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로 경건하고 하나님앞에서 겸손한 자라도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구나 라고 자신의 죄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것이 다일 것입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양심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판단기준준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양심, 헬라어로 양심이라는 말은 우리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양심은 함께 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말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볼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고려하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는 말이 양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양심은 겸손과 맛닿아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마음이 살아있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면, 양심이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방금 말했듯이 ‘아 내 죄가 저렇게 끔찍하구나’ 가 제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능입니다. 그 이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몇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절기마다, 또한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 반복해야 합니다. 2절의 내용을 좀더 쉽게 풀자면 섬기는 자들,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한번의 제사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완전한 양심, 의식을 가지게 되어서 더이상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고 제사도 더이상 드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잘 새겨들어 내 판단이 아닌 가장 좋은 판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통해 말하는 바는, ‘제사는 죄를 상기시킬수는 있어도 은혜를 상기시킬수는 없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전혀 다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아 내죄가 이렇게 끔찍하구나. 이번주동안에도 엄청난 죄를 내가 저질렀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버러지, 벌레라고 불렀는데, 나는 버러지보다 못하구나. 라는 죄에 대한 자책만 더하는 것이 우리 예배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9장 처음에 땅에 있는 성소를 말하며, 일부러 언약궤를 언급해서 그 성소가 온전하지 않음을 주지시킵니다. 그리고 6절, 7절에서 제사장을 말함으로 제사장도 온전한 제사장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8절에 첫장막이 온전하면, 성소에 들어가는 길, 즉 진정한 구원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땅의 성전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내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하게 합니다. 내가 일주일동안 한번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기하지도 않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를 지고 갔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구나.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초대하시고 그 초대를 위해 지난 한주를 은혜로 덮으셨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가지는 생각과 감정일 것입니다. 만약 예배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은혜가 생각나지 않고, 내 죄의 끔찍함이 먼저가 된다면, 그 예배는 온전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에 있었던 양심상 온전하게 할수 없는 제사와 14절에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제사,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비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초라함, 벌레보다 못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상기하게 되고, 기뻐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를 위해 준비되셨습니다. 그것을 이제 5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양심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겸손할 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특히 5절에서 7절까지를 통해 이미 시편 40편에 메시아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예비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8절과 9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모든 제사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음을 다시한번 증언합니다. 5절에서 9절의 말씀은 이런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메시아를 제물로 예비하셨다. 왜? 제사가 온전하지 못하니까. 아무리 황소와 염소등을 죽여봐야 사람은 결코 은혜의 자리로 가지 못하니까. 겨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이 구원입니까. 물론 죄의 심각성을 아는 것은 구원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위해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드려지는 제물로 예비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세하게 지상성전과 하늘성전을 비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늘 성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로 새로운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낯선것 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옛날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드려지는 제물로 예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중요한 것을 한번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당시 성도들은 새것, 새언약, 새언약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새것이 좋음을 말해도, 고난당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낯선 것보다는 옛것이 좋습니다. 옛것에 미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한치앞도 보지 못하니까요.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좋아하십니까. 쉽게 말해 사람을 제물로 죽이거나 불태워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것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기사를 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삭을 제물로 받으실 의향이 전혀 없음을 그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데리고 오던지 말던지, 숫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은 반대로, 이미 이루어진 이라고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영어번역본도 우리말도 이것을 미래라고 말할 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뭐가 들어가도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왜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모호하게 썼을까요.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소위 보장된 것이 있습니다. 보장된 직업, 보장된 집, 보장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장된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든 그 길로 올라타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당대의 의인이라 합니다. 그런 노아지만, 그가 구원할 수 있었던 대상은 자신의 가족에 불과했습니다. 의인의 권속, 가족만이 의인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 우리의 눈과 판단에 보장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장막보다는 당장 1000평이 넘는 호화 주택을 준다고 하면 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아들을, 그 몸을 제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노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자매,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부터, 제물, 성소와 성소안의 집기들, 그 집기들을 이용해서 제사를 시행하는 제사장들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봐라, 이 모든 것이 정말 화려하고 있어보이고, 익숙한 것이지? 하지만 이모든 것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구약에서 왜 하나님께서 인신공양을 금지하셨을까요. 저는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물로 선택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제물이 됩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해서 스스로 팔던지, 아직 아이라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주장을 못하던지입니다. 공통적으로 상황으로든지 뭐로든지 강압적으로 제물로 만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셨다면, 결국 그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아래 벌어지는 살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금지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이 없음을 믿습니까. 온전함을 넘어선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고백하십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 장막으로 데려다주실 것이라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하늘 장막을 선택하기가 참 힘듭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포기하고 희생하고 참고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사랑하시기에 스스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으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장 심판할 수 있지만, 원수들만 따로 모아질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찾아질 그날을 기다리고 계심을 13절과 14절을 통해 말씀합니다.
그를 믿으면, 당장은 고난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로 우리의 존재자체가 넘칠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음을 16절에서 18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믿고따르면 포기하고 손해보는 것같다. 그리고 헌금을 내야하고 헌신을 해야하고 봉사를 해서 만들어갈게 너무 많은것같다.
결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벌써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예비해놓으셨다. 우리는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서론에 말했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은혜이자 능력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처음 말하는 것은 죄를 구별하고 떠날수 있는 양심입니다. 죄를 떠난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며,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때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도 죄가운데 살았구나가 아니라 이번주도 하나님의 은혜가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나를 지키셨구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 이 목소리를 듣고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그 길로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속에서 지치고 피곤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 여러분, 이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으로 이 은혜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의 모습이 아닌 은혜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분명 세상의 길이 편해보이고, 좋은 것도 많아보입니다. 옛방식, 세상방식이 눈에 보이는 보장도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로 가면, 험하고 좁은 길에서 고생할 것같습니다. 하지만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사실을 믿고 기쁨으로 하나님앞에 나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
기도제목(간단하게)
말씀을 기억하며
교육부서의 여름행사, 특별히 내일부터 있을 유치부의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성도들과 아픈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위급한 중에 있는 오정웅집사님을 위해서 간절히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광고
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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