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31.수요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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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Notes
Transcript
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290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이금보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신약 365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서론
서론
본문은 믿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왜냐면 앞서 말했다시피 믿음만이 생명을 갖게 하는 것이고, 뒤로 물러나, 다른 말로 다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장은 40절에 걸쳐 길게 믿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히브리서의 첫 수신자들, 당시의 성도들은 큰 환난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인 이상 그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고문과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고, 빠져나온다하더라도, 지금까지 모았던 재산을 억울하게 강탈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본론
이에 비해 우리의 삶은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으로 세상을 우리를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때는 눈에 보이는 고난이 있었기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했지만, 은밀히 우리를 공격하는 이 시대는 우리 스스로 공격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본문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작부분인 1절과 2절에서 믿음이 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5절까지 믿음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후, 6절에서 그 역할을 정리합니다.
그 후 7절부터 31절까지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들며 믿음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에 32절에서 38절까지 믿음의 사람들이 행했던 역사들을 정리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스스로를 추스르며, 다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으로서 39절과 40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까지 이야기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믿음의 개념-믿음의 역할-믿음의 예시-우리의 믿음 이렇게 11장은 진행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역할과 믿음의 예시는 구체적인 내용과 정리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부분인 1절과 2절, 특히 1절에서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해 명쾌하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본체로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판단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상으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체의 형상이라고 할 때, 그 본체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게 된 것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만드는 밑바탕이며, 혹시나 그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계속 바로 잡는 역할을 한다입니다.
본론
그렇다면 이런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나요.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열어주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 선 우리에게 몇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합니다. 이것이 3절의 내용입니다.
첫째는 옛 생각,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하나님께 더 나은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것은 4절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는 새 것에 대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새 언약, 새로운 길, 두 번째 성전, 그 모든 새 것들의 탁월함을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새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 것이 된다는 것은 옛 방식, 습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셋째, 믿음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닌 영생을 얻게 합니다. 이 내용이 5절입니다.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구뿐 아니라 옷까지 싹 새 것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그 집은 어떻게 됩니까. 옛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집의 새 것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침대를 들여놔도, 나는 평생 바닥에서 잤으니 계속 바닥에서 잘거야 라고 하면 침대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새집이 깨끗해도 청소를 잘 안하는 습관이 있다면 금방 더러워질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새 언약을 받고, 옛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함을 누리지만,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더욱 간단하게 2가지로 정리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둘째로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어야 한다입니다.이중 두번째인 상주심이란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존재가 되어 예배 드리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배와 영생이란 말보다 상주시는 이라는 말을 할까요. 이 말은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을 구하는 자에게 합당한 보답을 생성시키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세상이 합당한 보상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라도 합당한 보상을 꼭 준다는 뜻입니다.
22절에서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말을 마음이 씻겨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악한 양심, 죄악에 속한 사고방식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음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에게 가장 큰 상은 믿음 그 자체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믿음이 있기에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우리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살면, 보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꼭 값진 것으로 보상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 말합니다.
마음이 씻겼다는 말은 이해를 하겠는데, 몸이 맑은 물로 씻은 것과 우리가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왜냐면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값진 것으로 보상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값진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헬라어의 보상, 상급 원 뜻이 매우 값진 것,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사 때, 사람을 정결하게 할 때 쓰이는 것은 맑은 물이 아닙니다. 암송아지의 재를 섞어 만든 잿물입니다. 잿물을 우슬초에 적셔 뿌리면 깨끗함을 얻습니다. 그것이 옛 제사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재가 아니라 맑은 물로 우리 몸이 씻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값진 것이 보상으로 나오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노아로 시작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의 열매인 방주를 만들었을 때, 그가 믿음의 열매, 방주로서 세상을 심판했다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전부 발아래에 놓은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새로운 방식으로 씻겼으니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몸에 밴 습관도 새로운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마음이나 말이 아닌 우리의 삶을 통해 훈련된 방식입니다. 그래서 어느 상황이든지, 우리가 믿는 대로, 훈련해온대로 움직일수 있는 상태입니다. 군인이 처음에 전쟁에 나가면 패닉에 빠집니다. 하지만 몸은 평소에 한 훈련을 기억하고 무의식중에 움직입니다. 그래서 전투를 수행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몸이 옛 방식이 아닌, 새 방식으로 훈련하라고 오늘 본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마치 세상의 발아래에 깔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발아래에 놓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되게 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소망의 고백, 다른 말로 소망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지금의 상태가 아닌, 세상 위에 있는 노아처럼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소망을 끝까지 잡아야 합니다. 노아가 만약 방주(법궤)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을 직역하면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믿고 있는 믿음을 소망가운데서,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들며 말합니다. 그들이 소망이 없는 중에 믿음으로 바랬던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위로합니다. 사라가 웃은 이야기를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약속에 헛웃음을 지을 수있겠지만, 믿음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악들을 없이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후에 이삭과 야곱의 축복에 대해서 적습니다. 분명 자기 앞에 있는 아들이 야곱임을 눈치챘지만, 믿음으로 모든 축복을 한 이삭입니다. 여기에서도 그 후에 있었던 사건, 에서에게 변명했던 이삭의 추한 모습은 적지 않습니다. 그가 약하지만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을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잘 보면 21절에 누구에게 경배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헬라어성경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했을까요. 그 아들 요셉에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요셉에게 한 약속, 해 달 별이 절하는 약속을, 야곱은 그 때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어찌보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을 경배한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이후 나오는 모세의 예에서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애굽의 모든 재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라는 말씀에서도 나옵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믿음은 삶을 통해 훈련된 방식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정말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예배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내일 살아갈 것을 걱정하지만, 주일 예배에 나아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나도 모르게 먼저 생각하며 챙기게 됩니다. 왜 우리가 그런 믿음을 지닐수 있습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삶이 내 모든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며,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것을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나오는 모세의 예에서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애굽의 모든 재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면 믿음이 있다면, 그 때가 언제가 될까. 그날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 때를 바라는 마음, 소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계속 기도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낙심해본 적 있지 않습니까? 낙심할 때, 주변사람의 도움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후 요셉은 출애굽을 위한 제물로서 자신을 드립니다. 말그대로 애굽에서 자신은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400년이 넘도록 장례가 끝나지 않게 했습니다. 현대로 따지면 입관을 했지만 발인은 하지 않은 격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는 법궤와 함께 나란히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했지만,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약속의 땅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셋째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라입니다.
이후 요셉은 출애굽을 위한 제물로서 자신을 드립니다. 말그대로 애굽에서 자신은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400년이 넘도록 장례가 끝나지 않게 했습니다. 현대로 따지면 입관을 했지만 발인은 하지 않은 격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는 법궤와 함께 나란히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했지만,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약속의 땅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미쁘신, 꼭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서로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23절부터 29절까지 설명합니다.
그의 믿음의 중심 역시 앞의 모든 선진들과 같은 하나님의 상주심입니다. 그래서 죄악의 낙보다 고난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도의 수모를 더욱 크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부르시지 않고 함께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응답은 난공불락의 성인 여리고가 무너짐을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퍼지게 됩니다. 언덕위에 2중 성벽으로 세워진 성이 그렇게 쉽게 함락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합을 기생이라고 칭함으로 비천한 그녀가 믿음의 계보에 들어오게 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격려해야 할까요. 사실 격려라는 말은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좀더 적극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24절에서 격려라는 말은 원어로 옆과 찌르다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럼 격려라는 말은 옆에서 푹 찔러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격려라는 이미지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격려라고 하면 감싸주고 다독거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정신을 차리도록 푹 찔러라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옆에서 찔러라는 말은 사랑과 선행이 서로 찔리게 해라는 말입니다. 겨울에 손이 시립니다. 그런데, 장갑도 없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형편도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을 비비죠. 그러면 열이 나서 좀 나아집니다. 사랑과 사랑을 격려해라는 말은 사랑과 선행을 서로 맞부딛혀 찔리게 해서 열이 팍팍 오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다가 옆구리를 아프도록 푹 찔리면 순간 아프면서 화가, 다른 말로 열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처럼 믿음으로 살았고, 그 믿음의 삶을 통해 고난을 받았지만, 또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얻은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자, 그런데, 무작정 이렇게 찔러야 할까요? 옆사람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성경에서 찌르라고 하니까 찌르자. 하고 팍팍, 옆구리에 피멍이 들든지 말든지 찔러야 할까요. 그래서 24절 상반절에 서로 돌아보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32절부터 37절까지 믿음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들이 행했던 기적과도 같은 일들, 하지만 그들이 받았던 큰 고난들까지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38절에 이와같이 정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서로 돌아보라는 말은 이해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서로를 보는 것만 아니라 서로의 상황을 따라 이해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상황은 어떤지, 그렇다면 어느 부분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라. 그래서 그 사람처럼 되어서 이해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세상은 이들에게 가치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뜻은 ‘세상은 이들을 담을만큼 가치가 있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삶은 산 자들이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해서, 세상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옆을 찌르는 것이 격려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찌르게 되어서 열이 나게 되고, 그래서 사랑과 선행을 안하면 안되겠구나 라는 상태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라 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인간의 죄가 가득한 곳이 아닌 변방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격려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 된다면,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그 사람이 격려를 받고 열이, 힘이 나서 다시 일어서게 될까요. 찔려서 마음아파하고 상처를 받게 될까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상주심, 그 약속을 믿고 따른 자들에게 예외없이 모두 합당한 보상을 하셨습니다. 이 상주심에 예외란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보상, 값진 보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보상이 세상에 없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서라도 그 보상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해없는 격려는 사랑의 격려가 아닌 공격일 뿐입니다. 그래서 24절은 먼저 서로 돌아보아서 이해하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니 그 사람을 돌아보고 그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는 것도 힘든데, 서로를 정말 면밀하게 살펴서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고,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서 사랑과 선행을 이어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나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리 저리 다 살피나. 나도 사랑과 선행이 안되는데, 무슨 옆의 형제 자매에게 격려를 해야 하나.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39절과 40절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산 자들이 증거, 상주심은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것, 약속의 성취는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날,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로 갈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먼저 일지는 모릅니다. 또한 그날 전에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 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날은 분명히 다시 올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만 온전하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닌, 우리까지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계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그날, 하나님 앞에서 설 그날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옛 방식에서 벗어납시다.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나뿐 아니라 주위 형제들을 격려하여 함께 달려갑시다. 그것이 35절에 말씀하시는 큰 상을 향한 길입니다. 왜냐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결론
앞서 본 것 같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이루는 밑바탕이며, 우리가 어긋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할 수있게 만드는 판단기준이 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악한 양심, 죄에 매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믿음과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서로를 이해하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삶을 통해 훈련된 방식인 것처럼 온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야 하는 일입니다.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때문에 26절부터 31절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다. 결코 죄의 노예로 돌아갈수 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동시에 우리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봐라고 32절부터 34절까지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어떻습니까.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저렇게 살아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소유를 포기하고 하늘의 영원한 소유를 쌓고 있습니다. 물론 시험에 들때도 있었고, 넘어졌던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지나, 여기 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라는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담감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10장 마지막, 39절에서 우리가 어떤 자인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경주를 끝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경주가 끝나지 않아서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이 궁극적인 상,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경주를 계속 진행하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아직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40절처럼, 마지막 주자인 우리가 그 영광의 면류관을 다 함께 쓰는 그날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주자로서 진영밖으로 나가야할 책임을 가졌습니다. 이 세상이란 진영에서 믿음의 선진들처럼 나와서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가 되어야 할 의무이자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해도 끝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란 진영에서 나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속이 아니며,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자격조차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그런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그 수모에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담대함을 잊지 않고 그 약속의 날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벌써 믿음을 가졌으니,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며, 오늘 말씀처럼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2여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 특송은 5교구입니다.
ㅇ2019년 부서별 여름성경학교 및 수련회가 진행됩니다. 주보를 참고하시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부산 기독여성협의회 주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가 있습니다. 8월 1일 목요일 낮 12시에 여전도회 회관에서 있습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ㅇ새가정부 수련회가 이번주 금요일 토요일 양일간 있습니다. 장소는 경주 성호리조트이며 금요일 오후 1시에 출발합니다. 해당되시는 분들은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ㅇ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02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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