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금요기도회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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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
구역연합예배x
(헌금)
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절-3절 말씀입니다. 신약 367페이지입니다. 합독하시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특송 :5교구 특송있겠습니다.
설교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우리가 걸을 길, 걷고 있는 이 길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이라는 진영 밖으로 나간 선진들처럼 우리 역시 이 길로 걸어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지치고 뒤처지고 주저 앉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가지 주제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헛됨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두 번째 것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둘은 따로 교훈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은혜이자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이 은혜이자 능력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1절은 먼저 우리를 돕는 증인들이 구름같이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들을 증인이라고 칭한 것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경주를 이미 마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즉, 지금 우리가 하는 경주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론
그러나 우리를 방해하는 죄는 매우 끈질깁니다.
세상은 우리의 경주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끊임없이 놓습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죄는 매우 끈적하며 잘 달라붙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고 달라붙습니다. 또한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도, 그 끈적함으로 우리 주변에 있다가 기회만 되면 달라붙습니다.
본문은 율법이 단지 그림자임을 말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당장 죽을 위기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속죄와 재림에 대해 말하며, 그들에게 그 위기에 지지 않을 것을 말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인 권면은 10장 23절에서 25절에 나옵니다. 하지만 10장의 권면이 나온 이유가 9장이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방해와 죄의 끈적거림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해나가기란 힘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2절에서 우리의 구주를 말합니다. 왜냐면 믿음의 경주를 먼저 하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우리에게는 경주라고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담긴 경주를 경주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2절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믿음의 조물주이며 완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말그대로 믿음을 만드신 분이시고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의 헛됨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율법의 죽음은 아무것도 이룰수 없기때문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린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언약, 새생명에는 결코 이를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위에서 이미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지난 시간 설명했듯이 믿음의 삶이란 세상이란 진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안주하고 있던 것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가신 험하고 좁은 길로 가는 삶입니다. 험하고 좁은 길입니다. 지금까지 탄탄대로라고 생각되던 길을 가던 사람이 이 길을 가기가 쉽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차를 타고 간다면, 고속도로를 놔두고 비포장도로로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 길은 정말 좁고 험한 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이정표나 목적지가 있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길을, 바닥만 보고 걷지 말고 눈을 들어 앞을 봐라. 누가 있느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두에서 달려가고 계시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좁고 험한 길이라고 투덜대고 힘들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예 길을 새로 만들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이 길로 가자. 힘을 내서 이 길을 가자 라고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2절 마지막에 말하듯이, 이 길 끝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3절 4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길을 만드셨나. 예수님을 적대하는 죄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참으시고, 인내로서 이 길을 개척하시지 않았느냐? 너희는 그렇게 죄와 싸우며, 피흘려 목숨을 걸고 이 생명의 길로 가고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벌써 목숨을 바치셨다. 그런데 너희는 길을 나선지, 이 길로 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못하겠다고 투정부리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복의 첫 번째 이유는 율법의 헛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쭉 말했지만, 다시한번 율법이 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당시 율법에 익숙한 성도들을 향해서 익숙하지만 이미 죽은 율법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속해서 머무를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와 살로 새롭게 개척하신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좁고 험한 길입니다. 시선을 예수님께로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비틀댈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를 향해 먼저 질책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너희가 지금 비틀대고 힘들어서 못하겠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는 이 길이 어떤 희생, 댓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길인지 아느냐라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것이 5절부터 11절까지 이어지는 징계라는 주제에서 나옵니다. 사실 이 징계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더욱 이해하기 쉽습니다. 정확히 이 징계란 말은 옛날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분명 다른 것을 배우러왔는데, 가르쳐 줘야 할 것은 가르치지 않고 온갖 것을 시키며, 여러 방식으로 시험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줍니다. 어떤 때는 일부러 알려주지 않고, 그래서 힘들어 할때는 모르는 척 눈앞에서 가르쳐줄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힘으로 터득하게 합니다. 그렇게 쌓인 지식은 어떻게 됩니까. 단순히 머리로 얻는 지식이 아닌 몸에 새겨지는 지혜가 됩니다. 그렇게 제자의 몸과 마음이 자신이 가르칠 것으로 완전히 준비되고 가르칠 것이 새겨지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본 징계란 단어의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율법에는 없고, 그리스도에게는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은혜이자 능력은 죄의 양심입니다. 2절에서 나오는 죄를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번역들에는 죄의식, 죄에 대한 의식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게 9장 7절에서 말한 양심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 쉽습니까.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이 과정이 우리에게 벅참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모님과 다른 일을 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 자녀란 특히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인맥과 관계, 유무형의 모든 것을 다 이어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업을 잇는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말씀드렸듯이, 종합적인 판단을 뜻합니다.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 기준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헬라어로 양심의 뜻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다른 말로 바꾸면 종합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업을 잇기를 원하십니다. 당연히 우리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패잔병처럼 되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이 길로 못가겠다라고 주저앉거나, 세상의 방식을 적당히 섞어서 이 길로 가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타협을 하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수 있겠습니까. 우리말 표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업을 이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죄를 깨다는 일, 죄의 양심이라는 말은 죄를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즉,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죄가 아님을 알고 죄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예배마다 온전히 우리가 예배에 우리를 드립니까. 그럴 때도 있지만, 온갖 잡념이 다 들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예배를 방해하는 우리의 죄부터 시작해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시며, 우리가 예배에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까지 말합니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2절에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축 처진 어깨를 바로하고 풀린 다리에 다시 힘을 주라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며, 이미 승리의 길을 달려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단순히 예배때 드는 잡념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 그당시까지 이루어지던 예루살렘의 제사는 겉보기는 그럴듯해보이나 진짜 중요한 능력, 죄를 떠나고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그래서 4절이 나옵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힘없이 축 처진 어깨를 바로 하십시오. 그런 패배감을 가져야 할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패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왜 승리한 우리가 힘없이 축 쳐져 있습니까.
그래도 걷기 힘듭니까. 그 길을 가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달려나가기가 힘이 드십니까. 13절에 뭐라고 합니까.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라.
황소와 염소의 피입니다. 만약 우리가 제사를 드리다면, 속죄제로 드려지는, 좀더 직접적으로 도살되는 황소와 염소, 양, 비둘기같은 제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소가 울부짖으며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죽어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할까요. 아니면 끔찍하다는 생각을 먼저할까요. 익숙해지면 별 감흥이 없겠지만 처음 제사를 접하면 끔찍하다는 생각부터 할 것입니다. 특히 유월절이 되어 한꺼번에 엄청난 수의 제물이 도살되는 것을 보고 성전에 가득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로 경건하고 하나님앞에서 겸손한 자라도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구나 라고 자신의 죄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것이 다일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 발이 똑바로 되도록 길을 맞추어라.
뭐라고요? 뭐를 맞추라고요? 네, 길을 맞추어라!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도록 발에 힘을 주라, 발을 맞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길을 맞추어라! 어디까지 길을 맞춥니까. 나만 똑바로 달릴수 있을정도면 됩니까. 아닙니다.
네, 방금 말했듯이 ‘아 내 죄가 저렇게 끔찍하구나’ 가 제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능입니다. 그 이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몇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절기마다, 또한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 반복해야 합니다. 2절의 내용을 좀더 쉽게 풀자면 섬기는 자들,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한번의 제사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완전한 양심, 의식을 가지게 되어서 더이상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고 제사도 더이상 드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래서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고침을 받을 만큼 맞추어라 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힘들게 하느냐? 그 세상을 바꾸어라! 세상에 너희를 맞추지 마라. 반대로 세상을 너희에게 맞추어라! 라고 히브리서는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통해 말하는 바는, ‘제사는 죄를 상기시킬수는 있어도 은혜를 상기시킬수는 없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전혀 다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아 내죄가 이렇게 끔찍하구나. 이번주동안에도 엄청난 죄를 내가 저질렀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버러지, 벌레라고 불렀는데, 나는 버러지보다 못하구나. 라는 죄에 대한 자책만 더하는 것이 우리 예배는 결코 아닙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 그 때 당시 핍박받고 순교하던 사람들에게 이런 힘과 능력이 있습니까. 이런 권력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할까요. 왜냐면 우리가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11장에 이야기했듯이 벌써 이 믿음의 길을 다 걷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증인들이 구름같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은 저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마라톤의 마지막 지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코스를 달리는 주자들을 응원하듯이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내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하게 합니다. 내가 일주일동안 한번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기하지도 않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를 지고 갔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구나.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초대하시고 그 초대를 위해 지난 한주를 은혜로 덮으셨구나.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가지는 생각과 감정일 것입니다. 만약 예배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은혜가 생각나지 않고, 내 죄의 끔찍함이 먼저가 된다면, 그 예배는 온전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구주께서 앞서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너를 맞추려고 하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능력없는 분이시냐. 이 길로 달려가기 위해 너희를 훈련시키신 아버지께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분이시냐!
그러니 담대하게 나가라. 세상에게 너희를 맞추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이 어두운 세상의 기준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 업을 잇게 하신 아버지께 물어봅시다. 그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구주께서는 이미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세상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세상보다 크신 분이 세상에 맞출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초라함, 벌레보다 못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상기하게 되고, 기뻐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를 위해 준비되셨습니다. 그것을 이제 5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담대함으로 굽은 어깨를 펴고, 풀린 다리에 다시 한번 힘을 주고 일어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앞서 달리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특히 5절에서 7절까지를 통해 이미 시편 40편에 메시아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예비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8절과 9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모든 제사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음을 다시한번 증언합니다. 5절에서 9절의 말씀은 이런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메시아를 제물로 예비하셨다. 왜? 제사가 온전하지 못하니까. 아무리 황소와 염소등을 죽여봐야 사람은 결코 은혜의 자리로 가지 못하니까. 겨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이 구원입니까. 물론 죄의 심각성을 아는 것은 구원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위해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드려지는 제물로 예비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중요한 것을 한번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좋아하십니까. 쉽게 말해 사람을 제물로 죽이거나 불태워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것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기사를 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삭을 제물로 받으실 의향이 전혀 없음을 그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데리고 오던지 말던지, 숫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당대의 의인이라 합니다. 그런 노아지만, 그가 구원할 수 있었던 대상은 자신의 가족에 불과했습니다. 의인의 권속, 가족만이 의인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아들을, 그 몸을 제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노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자매,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왜 하나님께서 인신공양을 금지하셨을까요. 저는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물로 선택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제물이 됩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해서 스스로 팔던지, 아직 아이라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주장을 못하던지입니다. 공통적으로 상황으로든지 뭐로든지 강압적으로 제물로 만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셨다면, 결국 그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아래 벌어지는 살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사랑하시기에 스스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으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장 심판할 수 있지만, 원수들만 따로 모아질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찾아질 그날을 기다리고 계심을 13절과 14절을 통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음을 16절에서 18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서론에 말했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은혜이자 능력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처음 말하는 것은 죄를 구별하고 떠날수 있는 양심입니다. 죄를 떠난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며,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때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도 죄가운데 살았구나가 아니라 이번주도 하나님의 은혜가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나를 지키셨구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속에서 지치고 피곤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 여러분, 이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으로 이 은혜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의 모습이 아닌 은혜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무리기도
기도제목(간단하게)
말씀을 기억하며
교육부서의 여름행사, 특별히 내일부터 있을 유치부의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교육부서와 여름수련회, 청년1부
다음세대축제와 태신자 전도주일을 위해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환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광고
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