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12~18
순종의 삶으로 구원의 빛을 내는 성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두려움과 떨림”, 즉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성화를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리 와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시키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후자의 확신이 없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지 않은 채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그런 성화는 당연히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런 성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화를 이루려는 의지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실상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주의적 관점이 없는 알미니안주의는 인본주의에 불과하고, 성화를 위한 알미니안적 강조가 없는 칼빈주의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세(두렵고 떨림)로 노력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그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여 일러 줍니다. 첫째로 모든 것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불만스러워 수군거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고 하여 불만에 차 수군거리며 그들의 해방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의 지도력과 지침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합니다(출 16:2–3, 민 14장과 16장, 고전 10:10). 물질적으로 쪼들리거나, 핍박이 있거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해 특히 지도자에 대해 원망하고 시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원망과 시비야말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공동체의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서 설령 신앙생활이 여러모로 어렵더라도 원망과 시비 없이 공동체의 모든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들과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들처럼 멸망 받을지도 모르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의 자세를 가지고 원망과 시비를 자제함으로써 자신과 교회 공동체가 멸망 받지 않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뒤틀리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흠 없는, 순전한, 마치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고, 그런 암흑의 세상에서 별(발광체)로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별로 빛난다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말합니다. 빛을 발하는 자들로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 다른 사람들이 빛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들이 순전한 자들이 되고 원망과 시비가 없는(그러니까 화평과 일치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 수행의 기본 조건이며, 지금까지 말한 바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해야 할 일 하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말씀을 밝힘’입니다. 여기서 ‘밝힌다’라고 번역된 말은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는 동작을 그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동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듦,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내밈(즉 선포함)”. 이것은 첫째 외적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그것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듯이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앞으로 내밀어(즉 선포하여) 사람들을 흑암의 세계에서 건져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물론 복음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복음이 생명(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외적의 핍박이라는 고난에 처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그들의 선교 사명을 상기시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흠 없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유난히 분란이 심하고 세상과 타협한 복음과 신앙 행태로 비난 받는 우리 한국 교회가 과연 선교를 감당할 자격 또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권면대로 순전한 사람들의 공동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 가운데 하나가 된 공동체로서 타락한 암흑의 세상에서 태양같이 찬란히 나타나 생명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 교회의 목사인 자신이 “헛되이 달리거나 헛되이 수고한(중노동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곧 심판의 날)에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훌륭한 교회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여기 삽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