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피하라

시편 시리즈(신뢰시)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49 views
Notes
Transcript
여호와께 피하라! (시 11편)
20170802수요예배
우리나라처럼 짧은 시간 내에 급격한 변화를 겪는 나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어른들의 입에서 ‘국산은 안돼’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30년 정도 지난 지금 국제시장에서 대한민국 제품은 최고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뿐만아니죠. 동남아 국가들에 단기선교를 가보면 그 나라가 얼마나 부정과 부패가 많은지 놀라게 됩니다. 몇 해 전에 캄보디아에 단기선교를 갔는데 나라가 가난하니까 현직 군인인데 국가가 월급을 주지 못하니까 사설업체에서 보안경비 업무를 담당해주고 거기서 월급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항에서 뇌물을 줘야 빨리 들여보내주는 등 부정이 많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은 예전에 비해서 부정과 부패가 많이 근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통해서 또는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고발하는 모습을 보면 곳곳에 얼마나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검찰은 검찰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많은 부조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터가 무너진 세상

시편 11편은 이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3절에 보니까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고 합니다. 터가 무너진다는 것은 기초적인 법과 정의가 무너져가고 불법과 불의가 만연한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정직한 자가 손해를 보게 되고 도태하게 됩니다. 터가 무너지는 곳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악인의 폭력입니다. 2절을 보세요.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따라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는 말은 한숨과 탄식이 섞인 매우 절망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해서 생각해 봅시다.
먼저 가정에서 터가 무너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요? 부부의 사랑과 신뢰에 금이 가서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술과 도박을 일삼거나, 투기로 재정적인 큰 손실을 입은 경우, 또는 엄격한 규율과 법칙으로 통제하기 때문에 숨이 막힐수도 있고, 가슴을 후벼 파는 상처를 주는 말과 폭력으로 멍든 가정도 터가 무너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장에서 터가 무너지는 상황이란 무엇일까요? 성실한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아부를 일삼고 출세하는 라인에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죠. 또한 하청업체로부터 접대와 수수료를 받고 부실을 눈감아 주고 계속 그 업체와 거래를 하는 겁니다. 성희롱을 포함한 인격모독의 차별대우를 받는 것도 해당되죠.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어떻습니까? 일진이 아이들을 왕따, 은따 시키는 학원폭력이 바로 터가 무너지는 상황이죠.
우리나라에서 터가 무너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어딜가나 죄인들이 모여사는 곳에는 문제들이 다 많죠. 검찰, 경찰, 군대 등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ex) 제가 ROTC장교로 군대에서 근무할 때가 벌써 20년 전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조리가 많았습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임관을 했는데 도시근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어요. 그랬는데 거의 매주 회식을 합니다. 그러면 그냥 밥만 먹고 끝나면 좋겠는데, 끝나고 단란주점 같은 곳엘 갑니다. 그러면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데 거기다가 가끔 노래하는 아가씨들을 부릅니다. 그렇게 질펀하게 마시고 나면 회식비가 꽤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무조건 N분의 일입니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이 좀 많이 내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술도 안 먹고 노래도 부르지 않고 오히려 끝나고 집에 까지 지휘관을 모셔드려야 하는 저는 너무 억울하고 아까운 거예요. 그런데 그것가지고 따지면 예수쟁이가 쩨쩨하게 그런 것 따진다고 할까봐 말도 못하고...
그런데요, 이런 것과 성질이 다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 터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일들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순장반 카톡방에 글을 남겼습니다만, 지금 국회에서 헌법개정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국회의원들과 전문위원들이 개정안에다 동성애와 동성결혼 합법화를 포함하려고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현행 헌법 36조에는 혼인이 양성 평등을 기초로 성립된다고 나오는데 개정안에는 ‘양성평등’대신 ‘성평등’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양성평등이라는 것은 남녀평등이지만, 성 평등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을 포함한 성 소수자들의 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게 허용되면 동성결혼이 자연스럽게 합법화됩니다. 또한 현행 헌법 11조 차별금지 조항에 ‘동성애 차별금지’를 포함시키려 하고 있어요. 정말 이런 식으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그때는 대한민국의 터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말 겁니다. 인터넷으로 반대서명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께 피하라!

자 이렇게 각 영역에서 터가 무너지는 때에 본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말합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첫 번째 선택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내 산으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 산으로 도망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과 내 방식대로 하는 삶입니다. 악한 계획에 동조하는 것이죠. 2절에 나온 것처럼 어두운 데서 마음이 바른 자를 화살로 쏘는 것이요,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직하게 행하는 자를 억울하게 만들고 경쟁에서 짓밟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 피하라’라는 말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부조리와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도망쳐서 교회에서 살려고 하거나,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있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겁니다. 예전에 사회 생활하는 게 힘들면 ‘신학교나 가볼까?’ 이렇게 신학교를 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기에 목사가 그렇게 만만한 것 같죠? 그런 사람은 절대로 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혹시 주변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한 달만 한 번 해보고 하라고 하세요. 
ex) 언젠가 아들 건희가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는 나중에 직장에 안 갈거야. 나는 그냥 교회에 있을래.’ 왜냐하면 회사생활에서 보니까 툭하면 상사가 부하직원한테 막 소리지르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무서운 겁니다. 이해는 되죠.
진정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길은 의로운 길이며, 정직한 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힘든 길이요, 손해를 보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터가 무너진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마음이 너무 힘들고 지치면 하나님께로 도망와서 주님의 품에서 위로받는 겁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은 “아버지, 터가 무너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가 저 너무 힘들어요. 저를 위로해주시고 이길 힘을 주세요. 이대로는 힘듭니다.” 이렇게 탄식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군사용어로 ‘리트릿’이라고 하는데, 퇴수회라고 합니다. 다음 전쟁을 위해 작전상후퇴하고 회의 및 전력보강을 하는 것이죠. 수요기도회는 그런 의미로는 리트릿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마지막 폐회송을 부르죠.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이렇게 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터가 무너진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사회로, 세상 속으로 보내시죠. 그러다 지난 3일간의 삶을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야 나머지 이틀, 삼일 간의 삶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환>> 그런데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확신해야 할 영적 진리가 2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의로우신 하나님이 보시고 감찰하신다! (4,5)
4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통촉한다는 말은 ‘보신다’는 뜻이고 ‘감찰하신다’는 것은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또한 하나님은 성전에도 계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다 살피신다는 것이죠. 이것을 보통 하나님의 초월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나랑은 너무 먼 존재로 느껴지죠. 그런데 성전에도 계신다는 거예요. 즉 내 옆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더욱 우리 상황을 잘 아시는 겁니다.
2) 둘째,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7)
모든 일에 옳고 완전하다는 뜻이죠. 의로운 분이시기에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매우 무섭고 단호하신 분입니다. 절대로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cf. 가끔 구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너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6절에도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무엇이 떠오릅니까?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롯과 두 딸 외에는 전체 도성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족속을 멸하되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는 짐승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또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법궤를 들여다보았다가 몇 만 명의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법궤를 잡았다가 웃사가 죽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려고하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있는 인간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의식법들이 까다로운 것은 죄있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보호막입니다.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십니까? 시내산 아래에 경계를 만들어서 아무도 그 경계를 넘어서 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죽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전환>> 자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7절 끝에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합니다. 악인이 아니라 정직한 자라야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인데, 어느 정도 정직해야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성경 인물들 중에 정직히 행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 꼽으라면 모세라고 할 수 있겠죠. 모세에 대해서 신명기에서 평가하기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만큼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만 간신히 보았을 뿐입니다. ,,23에 하나님은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즉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불완전한 의입니다. -12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늘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실 동안에도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 못 들으신 적이 있어요. 언제 입니까?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의의 옷을 벗으시고, 우리 대신 죄의 옷을 겹겹이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앞은 캄캄해져서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전혀 비치지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지만 마치 벽에다가 소리치는 것처럼 돌아오는 소리는 아무 것도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신 채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아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죄를 밖에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죄 하나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지옥으로 떨어질 만큼 죄는 무거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벗어주신 의의 옷을 우리가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얼굴도 진노의 얼굴이 아니라 웃으시는 미소고, 음성도 죄로 진노한 재판장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의 권세를 깨뜨려버리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새롭게 되는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터가 무너져가는 듯이 보이고 악이 승리하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전환>> 마지막 날에 만물을 새롭게 될 것을 믿는 우리가 터가 무너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도록 한 것은 먼저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 영역이 점점 확장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터가 무너진 우리의 가정, 직장, 학교,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나만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살던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연봉이 중요하지만 연봉이 내가 직장을 선택하거나 남거나 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진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직장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내가 가진 직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고 유익을 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유익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가정이나 직장, 학교의 문화가 어떻게 나를 통해서 새롭게 될 수 있을지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바뀔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를 더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격려하고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섬기려하셨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섬길 때 우리를 통해서 생명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면 지치기 때문에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세요. 특별히 함께 가까이 기도할 기도 짝을 만들어서 함께 기도하십시오.
2) 터가 완성될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 의를 행하십시오.
반지의 제왕을 썼던 톨킨의 작품 중에 <니글의 이파리>라는 것이 있는데요,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니글은 엄청난 완벽주의 화가인데요, 일생에 꼭 완성시키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요. 멋진 숲과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 멋진 나무 한 그루인데, 아주 장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엄청 큰 캔버스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완벽주의자라 진도가 안나가요. 나뭇잎 하나 그리는데 표면에 맺힌 이슬방울까지 재현하며 심혈을 기울입니다. 또 거절을 못하는 성미라 이웃 사람들이 이런저런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가서 도와줍니다.
어느 추운 밤 이웃에 사는 남자의 아내가 위독하니 대신 의사를 불러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추운 밤거리를 비를 맞으며 갔다 오다가 그만 독감에 걸렸고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엉엉 울면서 제발 그림을 완성 못했으니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하지만 그렇게 씁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니글이 작업하던 엄청 큰 캔버스 위에는 멋진 이파리만 한 장 그려진 채 발견되어서 마을 박물관 구석에 전시되었습니다. 
니글은 하늘나라의 열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하늘나라 끝자락쯤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죽기 전에 완성하고 싶은 그림과 똑같은 나무와 풍경이 그림이 아닌 실재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니글은 팔을 활짝 벌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선물이야”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데, 때로는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있어요. 터가 무너진 듯한 세상에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엄청 큰 인생의 캔버스 위에 내가 노력한 것이 이파리 한 장 밖에 그리지 않은 듯이 보여도,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면 그날에 주님이 우리의 그림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기본적인 법과 질서, 도덕이 무너져버린 그야말로 터가 무너진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인들처럼 자기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고, 마지막에 공의롭게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정직함과 의가 없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따라서 절망하지 않고 의를 행합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주님이 내가 꿈꾸던 완성본을 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 예수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