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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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본문해석
15 וַיֹּ֨אמֶר֙ מֶ֣לֶךְ מִצְרַ֔יִם 1/4
לַֽמְיַלְּדֹ֖ת 1/8
הָֽעִבְרִיֹּ֑ת 1/2
אֲשֶׁ֨ר שֵׁ֤ם הָֽאַחַת֙ שִׁפְרָ֔ה 1/4
וְשֵׁ֥ם הַשֵּׁנִ֖ית 1/8
פּוּעָֽה׃1/2
애굽왕이 말했다(칼 완)1/4
산파들에게(피엘 분사)1/8
히브리여자1/2
하나는 십브라라는 이름이며1/4
다른 하나의 이름은1/8
부아인1/2
: 애굽왕이 히브리여자 산파들에게 말했다. 한명의 이름은 십브라였으며 다른 한명의 이름은 부아였다.
이 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아 알수 있다.
16 וַיֹּ֗אמֶר בְּיַלֶּדְכֶן֙ אֶת־הָֽעִבְרִיּ֔וֹת 1/4
וּרְאִיתֶ֖ן 1/8
עַל־הָאָבְנָ֑יִם 1/2
אִם־בֵּ֥ן הוּא֙ וַהֲמִתֶּ֣ן אֹתוֹ֔ 1/4
וְאִם־בַּ֥ת הִ֖יא 1/8
וָחָֽיָה׃1/2
그가 말했다(바익톨) 너희가 히브리 여자의 산파일을 할 때(피엘 부정사)1/4
볼 것이다(칼 완)1/8
그 두 돌을1/2
만약 그가 아들이면 그를 죽여라(히필 완)1/4
또 만약 그가 딸이면1/8
살 것이다(칼 완)1/2
: 그가 말했다. “너희가 히브리여자의 산파일을 할 때, 아이의 성별을 잘 살펴봐라. 만약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 것이다.”
완료형으로 말을 한다.
명령형이 아니다.
이것은 왕의 말이니 곧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 위에 있는 자, 생명을 주관하는 자로서 결정했기 때문에 명령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의 위치에 섰다.
동시에 실질적으로 명령이 아니므로 아기가 죽게 되면 그 원망은 파라오에게가 아니라 먼저 산파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왕으로서의 권한은 극한으로 누려 신처럼 대우받고 싶지만, 그 책임은 지지 않고 싶어한다.
아들은 죽이지만, 딸은 살린다. 그 살린 여자를 어떻게 이용할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17 וַתִּירֶ֤אןָ הַֽמְיַלְּדֹת֙ אֶת־הָ֣אֱלֹהִ֔ים 1/4
וְלֹ֣א עָשׂ֔וּ 1/8
כַּאֲשֶׁ֛ר דִּבֶּ֥ר אֲלֵיהֶ֖ן 1/16
מֶ֣לֶךְ מִצְרָ֑יִם 1/2
וַתְּחַיֶּ֖יןָ 1/4
אֶת־הַיְלָדִֽים׃1/2
그러나 그 산파들은(칼 분사) 그 하나님을 경외했다1/4
그래서 행하지 않았다(칼 완)1/8
그들에게 한 말대로1/16
애굽 왕이1/2
그래서 살아있게 했다(피엘 바익톨)1/4
그 남자아이들을1/2
: 그러나 그 산파들은 그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애굽왕이 그들에게 한 말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남자아이들을 살아있게 했다.
하나님 경외 = 애굽왕의 말 불복종
결과 : 남자애들이 살아있음
그 하나님 : 그냥 신, 우상이 아니라 그들이 조상때부터 섬기는 하나님을 말한다.
이런 명칭은 첫째로 ,‘그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면 우상과 구별이 안될 정도의 상황이란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읽는 자에게 ‘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나를 살리신 하나님, 구원하신 하나님이다.
십브라와 부아는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따랐다. 말그대로 보지 않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이 있었다.
우상으로 칠해져, 그 하나님이라 구별해야 하는 상황, 신과 같은 애굽왕의 명령.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심은 이런 자들때문이 아닐까? 그루터기가 된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어지게 하지 않을까?
18 וַיִּקְרָ֤א מֶֽלֶךְ־מִצְרַ֨יִם֙ לַֽמְיַלְּדֹ֔ת 1/4
וַיֹּ֣אמֶר לָהֶ֔ן 1/8
מַדּ֥וּעַ עֲשִׂיתֶ֖ן 1/16
הַדָּבָ֣ר הַזֶּ֑ה 1/2
וַתְּחַיֶּ֖יןָ 1/4
אֶת־הַיְלָדִֽים׃1/2
그리고 애굽왕이 그 산파(칼 분사)들을 불렀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가 그녀들에게 이야기했다(칼 바익톨)1/8
왜 너희는 행했냐1/8
이 것을1/2
살아있다(피엘 바익톨)1/4
남자아이들을1/2
: 그 후 애굽왕이 그 산파들을 불러서 말했다 “왜 너희는 이렇게 행했느냐. 남자아이들이 살아있도다.”
자신의 결정과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왕으로서, 살아있는 신으로서 말을 했으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낱 노예민족의 산파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전에 조선시대에서 종이 주인의 중대한 계획을 어그러뜨리면, 주인이 그 종을 가만히 두겠는가.
바로 이 상황이다
아이를 죽이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계획이다.
먼저 했던 막중한 노역으로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이 실패했기에, 정복에 방해가 되는 남자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이다.
완료형으로, 실제 일어난 일인것처럼 썼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왕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 것이기에 왕이라면 당연히 이에 대해 대응을 해야 한다.
즉, 일벌백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 וַתֹּאמַ֤רְןָ הַֽמְיַלְּדֹת֙ אֶל־פַּרְעֹ֔ה 1/4
כִּ֣י לֹ֧א כַנָּשִׁ֛ים הַמִּצְרִיֹּ֖ת 1/8
הָֽעִבְרִיֹּ֑ת 1/2
כִּֽי־חָי֣וֹת הֵ֔נָּה 1/4
בְּטֶ֨רֶם תָּב֧וֹא אֲלֵהֶ֛ן הַמְיַלֶּ֖דֶת 1/8
וְיָלָֽדוּ׃1/2
그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이야기했다(칼 바익톨)1/4
왜냐면 그 애굽여인들처럼이 아니다1/8
그 히브리여인들은1/2
왜냐면 그들은 건장하다1/4
그 산파들이 그들에게 가기(칼 미완) 전에1/8
출산한다(칼 완)1/2
: 그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이야기했다. “왜냐면 그 히브리여자들은 그 애굽여자들과 달라서 건장하기 때문이다. 산파들이 그들에게 도착하기 전에 애를 낳아버린다.”
애굽왕이 아니라 파라오다.
왕으로서, 신이상이고 싶은 애굽왕이다.
하지만 왕이 아니라 파라오다. 그는 신이 아니라 애굽에서만 영향력을 미치는 자일 뿐이다.
그래서 공동의 주권자인 ‘왕’이 아니라 애굽에서만 통용되며, 이집트인에게만 그 영향력을 발한다는 뜻이다.
히브리 여자들에게도 힘을 쓸수 없다. 왜냐면 파라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히브리산파들에게는 더더욱 힘을 쓸수 없다.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이런 변명에도 아무 말도 못하는 무능함, 왕이 아니라 파라오에 불과하다.
파라오는 왕, 주권자, 신이고 싶었지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앞에서 그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정말 모든 여자들이 남자같이 건장하나? 그러나 아무말도 못했다.
20 וַיֵּ֥יטֶב אֱלֹהִ֖ים 1/4
לַֽמְיַלְּדֹ֑ת1/2
וַיִּ֧רֶב הָעָ֛ם וַיַּֽעַצְמ֖וּ 1/4
מְאֹֽד׃1/2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행하셨다(칼 바익톨)1/4
그 산파들에게1/2
그리고 그 백성들이 번성하고(칼 바익톨) 강해졌다(칼 바익톨)1/4
매우1/2
: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하셨고, 그 백성들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다.
은혜를 베푸셨다-> 토브를 행하다.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함은, 산파들의 일이 잘되는 것이다. 당연히 산파의 일이 잘 되면, 애를 잘, 많이 낳게 된다.
개인의 축복이 민족의 축복이 되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된다.
왜 정복이 아니라 번성만 나오나?
처음 말했듯이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이 상달되기를 기다리신다.
번성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다.
이스라엘은 조상의 언약의 결과, 그 축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세상을 정복하지도 못했고, 하나님께 정복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지도 않았기에, 그들의 축복은 번성으로 끝난다.
부모는 자식이 더 잘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도 이전 세대에 준 축복에 더해서 한가지를 더 주시기를 원한다.
우린 그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
그래서 산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내고, 멋지게 성취함같은 능력을 행하고 있나.
21 וַיְהִ֕י 1/4
כִּֽי־יָֽרְא֥וּ הַֽמְיַלְּדֹ֖ת 1/8
אֶת־הָאֱלֹהִ֑ים 1/2
וַיַּ֥עַשׂ לָהֶ֖ם 1/4
בָּתִּֽים׃1/2
그리고 일어났다(칼 바익톨)1/4
그 산파들이 경외하였다(칼 완)1/8
그 하나님을1/2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만드셨다(칼 바익톨)1/4
그 집을1/2
: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산파들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문을 만들어주셨다.
가문은 남자가 잇는다.
만들다 행하다는 같은 단어다.
이스라엘이 학대받을 동안, 이름이 알려진 이스라엘인은 오직 이 두 산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이 두산파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가문을 만들어주셨다.
하나님 경외와 순종의 축복은 첫째로 민족에게 이어져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나타났고, 둘째로 자신의 집안으로 이어져 믿음의 명문집안이 되게 했다.
세상 권세, 아무것도 아니다.
21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집을 만들었다는 삼하7장에 나오는 다윗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다.
이 언약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22 וַיְצַ֣ו פַּרְעֹ֔ה 1/4
לְכָל־עַמֹּ֖ו 1/8
לֵאמֹ֑ר 1/2
כָּל־הַבֵּ֣ן הַיִּלּ֗וֹד הַיְאֹ֨רָה֙ תַּשְׁלִיכֻ֔הוּ 1/4
וְכָל־הַבַּ֖ת 1/8
תְּחַיּֽוּן׃ ס[1]1/2
바로가 명령을 내렸다(피엘 바익톡)1/4
모든 백성에게1/8
말하길(칼 부정사)1/2
“아들을 낳으면 모두 나일에 던져버리고(히필 미완) 딸은 모두 살려두라(피엘 미완)”
: 바로가 모든 백성에게 명령했다. 이야기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모두 나일에 던져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두라.”
왕이 아닌 바로다.
모든 백성이라고 해도 앞서 본 것처럼, 애굽만의 왕이다. 아니 왕이라 할 수 없다.
당연히 이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거라 예측할수 있다.
나일에 던지라고 한다.
왜 첫째 재앙이 나일인가.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인가(유월절 : 양의 피)
그것도 나일이 피로 변함인가.
하나님께서 이때 죽은 이스라엘 아기들의 피를 갚으셨다.
나일은 이집트에서 신들의 아버지, 하피로 여겨진다.
아기들, 그 비천한 노예의 아기들의 죽음을, 신들의 아버지의 피로 갚으시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약함을 공격하는 자들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 경외.
이것은 나중에 10재앙할때 말하자.
구조
본문의 시작
15절 히브리 산파 소개
기억 사항 : 여자, 산파. 이름
여자, 산파 :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로가 있음(), 그럼에도 바로가 부른 것은 여자인 산파.
요셉 이후, 모세(80세 부름)까지430년, 350년의 기간중, 요셉의 나이(110)를 빼면, 240년. 240년 동안 이름이 나오 이스라엘인은 이 두 산파뿐.
16절
애굽왕(바로아님)
명령형 – 완료 : 이루어짐. 하나님께서 예언하실 때 이런 폼을 쓰심. 즉, 이미 이루어져서 결코 뒤집을 수 없다는 뜻.
그러나 명령을 받는 대상은 우습게도, 이스라엘 장로도 아닌 산파.
무슨 뜻?
왕, 주권자 -> 신 : 나는 신이다. 내 말은 법이며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왕의 왕이란 표현을 쓴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2. 그러나 그 대상은 히브리 산파(아무 권한도 능력도 없음) : 모든 원망과 책임은 너희가 다 받아라. 죽이는 건 너희다. 나는 책임지지 않겠다.
=> 진짜 왕인가?
왕을 넘어 신이 되고 싶어하고, 그 권력과 능력은 누리고 싶어하지만, 정치적인 책임은 전혀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들 죽이고 딸은 살려라 – 여자는 노예로서, 사용하겠다.
------
-> 너무나 높고 위엄넘쳐 보이는 애굽 왕이지만, 그 실체는 너무나 치졸하다.
17절
왕의 명령vs하나님경외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지시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왕과는 전혀 다르게 역사하신다. 직접하시고, 책임지신다.
그 하나님 : 하나님을 구분할 필요가 있던 시대다. 우상도 다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민족의 신이다. 성전도 없다. 상징도 없다. 신상도 없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모든 조건을 다 갖췃다.
가혹한 노역을 시키는 애굽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시간을 따로 주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자신이 쉬는 시간, 어쩌면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하나님께 제사했을지도 모른다. 제물은 쉽게 준비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십브라와 부아는 애굽왕에게 불려갈 정도인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의 문화와 노예근성, 우상숭배에 물든 상황이었을 것이다(황금송아지)
그 상황에서, 특히 고위층과 관련이 있는데, 믿음을 지키기가 쉬웠을까? 일제 강점기, 고위인물인수록, 천황숭배와 사상을 더욱 주입받았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했다.
모든 환경, 사회적 분위기와 다른, 하나님을 따랐다.
18절 애굽왕의 분노
권위가 훼손당한 애굽‘왕’
당연히 일벌백계가 필요한 상황
‘살렸느냐’를 피엘 -> 강조
시제 : 바익톨(완료와 같음) -> 권위의 훼손
wbc : 무슨 권리로 이렇게 했느냐?
=> 강한 징계가 예상되는 상황
더욱이 남자아이학살은 이스라엘의 정기를 꺽기위한 애굽왕의 대계. 더욱 큰 징벌이 있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의 권리, 권위로 이 일을 행했다.
19절 하나님의 역사 1
변명 : 애굽여인과 같지 않고 히브리여인은 건장하다
건장하다 : 일반적으로 한창때, 혈기 넘치는 남자에게 쓰이는 단어.
지혜(산파) : 하나님의 도우심
미련(애굽왕) : 하나님의 떠나심, 앞서말한 권위의 실추도 생각지 못함. 사람이 이렇게 쉽게 설득당하는가? 고집피우고,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자는 결코 고집을 쉽게 꺽지 않음
-> 하나님의 역사하심
20절 하나님의 역사 2
은혜를 베푸심(선하게 행하심) -> 백성 번성, 강해짐.
왜 산파가 잘 되는게 아니라, 백성들이 잘되는게 먼저인가?
산파들의 일은 무엇인가? 아기를 낳게 하는 것,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하심
-> 이 선하게 행하다란 말은, 창1에서 창조후 좋았더라에서 나온 단어.
-> 산파들의 일, 생활에 하나님의 선함과 도우심이 있었다는 뜻.
-> 산파는 아기를 낳게 하는 것이기에, 그일이 선해질수록, 다른말로 잘될수록 당연히 애가 더 많이 낳을 수밖에 없음.
-> 산파가 잘 사려면 임신한 사람이 많아야함 -> 산파도 잘살고 백성도 강해지고.
산파와 같은 축복이 있길
21절 하나님의 역사 3
집안 축복
이 축복은 삼하7의 다윗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본문과 똑같다.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 믿고 따른 산파만 복을 받고, 그 집안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산파들이 결코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세상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을 지어주셨다.
다윗도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지어주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위대한 구원의 길에서 그저 뒤따르는 자가 아닌, 빛을 발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경외함으로 이와같은 자 되길
설교
서론
출애굽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방어만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애굽왕이 어떤 공격을 이스라엘에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뿐입니다. 공방을 주고 받을 때, 여러 수를 쓰고 가장 지혜롭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지난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시고 계시는지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굽은 결코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가장 비겁하고 잔인한 수를 씁니다. 갓난 아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도 하지 않을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잔인하고 야비한 공격을 막아내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에 함께한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살펴보며, 이 두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수 있었는지 나누어보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본론
본문은 애굽왕이 히브리산파 2명을 부르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애굽왕은 히브리 산파 2명에게 자신의 명령을 실행할 것을 말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도 지도자격인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자의 인권이 없다시피한 그 시대에 애굽왕은 히브리산파2명을 불러서 자신의 명령을 실행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명령을 받은 산파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요셉의 사망이후, 모세의 출생까지, 약 2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스라엘인 중에 이름이 성경에 나온 자는 지금 이 두산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며 계속 본문을 보겠습니다.
16절에서 애굽왕의 명령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참 끔찍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본문을 보면 이 명령이 완료형, 이미 이루어진 일로 나와있습니다. 성경에서 명령인데 완료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외에는 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예언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벌써 실행되어,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 이렇게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애굽왕은 자신이 그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명령했으니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왕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안에 모든 민족의 생사여탈권을 지닌자로서 신으로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명령은 너무나 잔인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명령은 히브리여자 산파 2명에게 내려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소집한 것도 아니라, 여자 산파, 그중 2명만 불러놓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아기를 학살하라는 잔혹한 명령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명령했지만, 모든 원망과 그로 인한 공격은 너희 여자 2명이 다 뒤집어쓰라는 뜻입니다. 만약 실행되어 너무 큰 정치적 리스크가 생기면, 이 두 산파만 처형해서 민심을 다스리겠다는 악독한 심보가 뒤에 있는 것입니다.
애굽왕을 넘어 신이 되고싶어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리스크는 하나도지지 않겠다는 정말 치졸한 심보입니다. 거기다 여자아이는 살림으로써, 자신이 좋을대로 사용하겠다는 음험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높은 보좌에 앉아, 신처럼 명령을 내리지만, 그 실체는 한낱 노예민족의 여자산파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애굽전체를 다스리는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분명 두 산파에게는 엄청난 시련과 갈등, 고난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두 산파는 둘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는 왕의 명령, 그 권위를 따를 것인가. 내 조상의 신, 실체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정확한 교리도 없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다인 하나님의 권위를 따를 것인가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이 당시 신의 권위의 기준은 몇 번 말씀드렸지만 그 민족의 위치입니다. 노예민족의 신은 신들중에서 노예입니다. 신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인, 성전도 없고 화려한 신상도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도 없습니다. 왜냐면 모세오경의 기록시기를 bc1200년경으로 보는데, 이때는 bc1500년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신화와 교리까지 완비된 애굽의 우상들에 비해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의 우상들에게 물든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절은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즉, 산파들은 애굽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봤고 자신을 죽일 애굽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높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부분을 ‘산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때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가 노예는 아니지만, 말씀의 권위보다 세상이 더 높아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들지만, 현대인답게 사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시대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하면 됩니다. 법을 제정하고 법관들도 법을 바꾸면서 시대가 달리지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법도 개편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법조차 바뀌는데, 우리가 법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 두 산파, 한낱 히브리여자에 불과했던 이 둘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당시 세상의 모든 물결과, 당장 눈앞에 있는 왕의 권위와 그 협박앞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가 그 모든 것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되었습니까. 아무일 없이 넘어갔습니까. 애굽왕의 분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8절에 애굽왕은 분노하며 말합니다. 살렸느냐를 강조합니다.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여,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한 주석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 너희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했느냐? 애굽왕은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 것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심판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산파는 죽음을 각오하고 애굽왕앞에 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랐지만, 두 산파가 직면한 것은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우리야 결과를 알고 있지만 두 산파가 결과를 알았을까요.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은 세상의 그 어떤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 권세가 높으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난이 더욱더 심해져도, 이 고난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시다는 것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죽겠다고 할 지점까지 우리를 몰아붙일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산파가 바로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를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믿고 따릅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이런 믿음과 인내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한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극한상황까지 믿음을 지킨 두 산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엄청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니고,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먼저 산파들에게 지혜를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술에 바로 앞에서 할말이 있게 하십니다.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입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산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분명히 화가 난 바로앞에서 지혜로운 대답을 할수 있도록 마음에 지혜를 부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산파들은 긴장을 했겠지만, 바로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할 수있었습니다. 이것은 19절에 애굽왕이 아니라 바로라고 칭함에서도 나타납니다. 애굽땅에 사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애굽인들만의 왕,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인 두 산파가 바로를 무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는 우리의 전인격과 몸에까지 역사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키심과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십니다. 분명 바로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산파들을 징죄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산파들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합니다. 정말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이 건장해서 아이를 잘 낳을까요? 라헬은 왜 죽었습니까. 아이낳다 죽지 않았습니까. 생각할 것없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텐데 바로는 그말에 수긍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산파들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미련한 자가 지혜로운 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세상은 우리를 시험하고 극한으로 몰고 갈테지만, 세상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고, 세상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은 선하게 행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선하게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산파들이 좋게, 잘되게 만드셨다라는 뜻입니다.
20절에 산파들이 잘되니 백성들이 번성하고 강해졌다라고 나옵니다. 이건 산파라는 역할을 이해하면 알 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을 잘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산파들의 일거리가 늘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출산하는 여인이 많아야 산파들이 할 일이 많고 그에 따른 댓가도 많이 받을테니까요. 산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도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선하게, 잘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산파들의 집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아는대로 개인이 잘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입니다. 나만, 당대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든든히 세워져서 대대로 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1절의 후반.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다윗언약과 똑같습니다. 바로 후반절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성경을 보면 다른 단어는 2개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너를 위해, 하나님이, 여호와가’ 이 두가지뿐입니다. 삼하7장의 언약, 다윗언약을 통해 누가 우리에게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오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일 메시아를 찾게한 언약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이 언약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언약과 똑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실행하셨습니다. 누구에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그가 세상에서 고난받고 압박받아 낮아진 것 이상으로 높이십니다. 그러니 이를 기억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되길 소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받는 이스라엘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 여인을 통해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경외함으로 받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첫째, 이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욱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첫째, 모든 위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키십니다.
둘째,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른 말로 잘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잘됨은 개인을 벗어나 민족 전체로 영향을 미치게 하십니다.
셋째, 그의 집안에 복을 주시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모두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