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order to win what we need
(2 kings 10:28-31)
Today's Spiritual Situation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영적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은, 적어도 이 서부는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많은 영적 장애물들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여진 미국의 경우에 사람들이 무신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영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야 하고, 봉사를 해야 하고, 헌금을 해야 하는 기독교 신앙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신앙인으로 바뀌기도 하고, 뉴에이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미국 성인의 약 20% 정도가 어느 정도 뉴에이지가 추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지금 뉴에이지 상점들이 문을 열고 있습니다. 점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뉴에이지는 특정한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예배 순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우주의 신과 자신을 합일 시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와 사회나 문화적인 구조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니티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슬림의 공격은 말할 수 없이 거셉니다. 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아제르바이잔, 우크레인, 또 알바니아와 보스니아, 코소보등은 이미 모슬림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영국에 1백만, 독일에 2백만, 프랑스에 2백 50만의 모슬림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강성일 선교사님이 말씀해 주신 모슬림의 포교 방법에 따르면 이들은 서방 세계에 모슬림을 확장하기 위해 미인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모델 뺨치는 미모의 여성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영국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가서 영국인과 독일인과 결혼합니다. 그들의 남편은 모슬림이 되기 어렵지만 그들 자녀들은 어머니를 따라 모슬림이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독일은 순식간에 모슬림이 배가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은 영어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미모의 영어 강사를 한국에 보냅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를 위해서 한국인과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국에서는 이들 모슬림들이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든 피켓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이슬람을 욕되게 하는 자는 목을 베어 죽여라’, ‘이슬람을 조롱하는 자는 도살하라’. 이런 내용입니다.
이들은 포교에서 3단계가 있는데, 비모슬림 국가에서 소수로 살아갈 때, 즉 힘이 없을 때는 ‘이슬람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번째 단계는 준비 단계인데 모슬림이 소수 민족에게 인정 받기 시작할 때, 힘과 역량을 투자해서 재정적, 물질적, 군사적, 정신적 준비를 합니다. ‘대적하는 자의 심장을 찌를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3번째 단계는 지하드 단계로 싸우는 단계입니다. 비모슬림 국가의 시스템을 붕궤하고 이슬람 정권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 앞에 직면한 문제는 이렇게 표면으로 나타나는 적그리스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무서운 공격들이 있습니다. 때로 사단은 사업 파트너의 모습으로, 직장 상사의 모습으로, 돈의 모습으로, 배우자의 모습으로, 또 가장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우리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격들 앞에서 우리는 늘 쓰러집니다. 이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고집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잘못된 신앙 행위를 하기도 하고, 좌절에 빠져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오히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승리할 것인가? 우리가 이런 모든 공격과 싸움으로부터 승리하려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알고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Penetrate the core of the knowledge of God.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핵심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주변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후라는 인물도 그런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북조 이스라엘이 아합 왕으로 말미암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 숭배의 나라가 되었을 때, 반정을 일으켜서 모든 우상 숭배를 척결했던 사람입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역사가는 예후를 평가할 때 비록 그가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로부터 쓸어 내었지만, “베델과 단에 세운 금 송아지를 섬겼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후는 개혁적인 인물이었고, 바알 종교를 그 나라에서부터 몰아냈습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로 끌고 들어왔던 아합 왕의 집안을 구데타를 통해서 척결을 했습니다. 예후가 이렇게 구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전쟁터에 있었던 예후에게 그의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 때 예후는 여러 장군들과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 본부에 도착한 엘리사의 전령은 회의장에 들어가 “장군을 잠시 뵙고 싶습니다”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후가 “지금 여기에 여러 명의 장군이 있는데 누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이냐?”고 되묻자 “바로 장군입니다.” “무슨 말인지 해 보라.” 그러자 엘리사의 전령은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조용히 뵙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후와 엘리사의 전령은 작은 천막에서 은밀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전령은 엘리사가 시킨대로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이 말 한마디를 하더니 엘리사 선지자의 전령은 부리나케 천막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는 곧 군사를 일으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에 퍼지게 한 아합의 아들 요람왕과 유다왕 아하시야를 죽이고,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을 죽였으며, 왕자 70여명을 죽임으로 아합 집안을 완전히 땅 위에서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과 모든 우상들을 다 이스라엘에서 없애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어 모든 바알 우상을 척결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던 아합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렇게 우상을 싫어했던 예후는 어째서 금송아지를 척결하지 않았을까? 왜 금송아지를 단과 베델에서 없애지 않고, 열왕기 역사가의 아쉬움을 샀을까? 한가지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 핵심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그는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제물을 바치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북조 이스라엘이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떠난 것이 아닙니다. 북조 이스라엘에도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여, 모세 오경 곧 창세기로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칩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진리의 핵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핵심에서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듭니다. 그 형상이 금송아지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쉽게 하나님을 떠나고, 쉽게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Jesus’ Model;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착각하여 예배하는 것처럼,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고,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열심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합니다. 주일 성수 하고, 착실히 예배를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직장에서도 신앙인으로서 열심을 가지고 있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싸움, 영적인 싸움에서 자꾸 실패합니다. 시험이 몰려 오고, 힘든 일이 찾아올 때 쉽게 낙심합니다. 세상에서 유혹이 오면 쉽게 세상에 동화가 됩니다. 이단과의 싸움에서 자꾸 패합니다. 때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을 하든지, 아니면 쉽게 분노하거나 좌절합니다. 세상에서 믿는 이로서 세상 권세를 이기고, 무슨 일을 하든지 좋은 성과를 나타내야 하는데 2%가 모자라거나 부족합니다. 예후처럼 하나님을 위해 종교를 개혁하고,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다. 곧 10점 만점에서 1-2점이 모자라는 신앙 생활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모든 영적 싸움, 일상 생활에서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고 영광을 받으셨을까? 그분에게는 진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John 1:14).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니면서 배웠던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1 Peter 2:22).
예수님을 3년 동안 지켜 보았지만 한번도 거짓말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번도 죄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가끔 만나는 사람이었다면 늘 좋은 면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3년을 함께 먹고, 마시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진리 자체십니다. 제가 결혼 생활 22년 차입니다. 혹시 제가 여러분에게 늘 좋은 면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제 아내에게 “목사님은 정말 훌륭하고, 너무 깨끗하신 분 같아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마 우리 집사람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이럴 겁니다. “같이 살아봐.”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동안 매일 같이 생활했는데 그 결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죄를 짓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진리시고,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시기에 세상을 이길 수 있었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증언하기를 “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1 Peter 2:23). 이 베드로의 증언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십시오.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Matthew 5:48). 예수님이 완전한 신앙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구약의 성도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이방인들도, 그리고 세리와 같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을 완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실 때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모든 것은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삶을 사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예수님이 진리셨고, 진리로 자유 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삶을 모든 거짓을 이기고 승리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단도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진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 모든 시험과 그 모든 영적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시고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완전하게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모든 실패에서, 모든 질병에서, 얽매임에서 자유 함을 가질 수 있고, 모든 시험에서부터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늘 내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William Backus는 “내 자신에게 진리 말하기를 배우기”라는 책에서 우리는 내 스스로에게 늘 잘못된 자기 고백, 내적인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잘못 해석하고 부정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이유도 없이 부정적으로 내 자신에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에게 늘 ‘진리’, 진리이신 말씀을 고백한다면 그 결과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어떤 사업가가 아프리카에 물건을 팔기 위해 지역 추장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추장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사업가가 추장에게 "그 책은 옛날 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보던 책입니다. 요즘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그 책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 추장은 한참 동안 그 사업가를 바라 보더니 "만일 이 성경을 내가 읽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요. 이 세상 과학 지식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한 것이요”
!Conclusion
만약 우리가 완전하게 진리를 안다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꿰뚫기만 한다면, 그 진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의 모든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꿰뚫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늘 나의 내면에서 고백만 해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정말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진리의 말씀을 내 안에 있는 나에게 고백합니다. 몸에 무서운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malachi 4:2). 이런 치료의 말씀들을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내 안에서 계속해서 고백만 해도 우리는 상당히 많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히 압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안다면 내 모든 삶은 승리의 영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2% 부족한 신앙 생활 때문에 언제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지고, 눈물 흘리고, 낙심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은 승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를 방해하는 금송아지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히 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실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