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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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설교제목: 하나님 향하여 갈망합시다
설후찬양: 나는 예배자 입니다
저는 성경에 이야기 중에서 궁금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말씀인 시편 42편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궁금증 하나가 느낌표로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을 하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물도 전혀 안 마시시고 금식을 하셨을까란 궁금증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나 성도 분들이 금식기도를 할 때 물은 마시면서 금식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도 귀한 그 광야에서 어떻게 금식기도를 하셨을까란 궁금증이 생깁니다.
인간의 생체에는 물의 비중이 70프로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생체에 있어서 물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저는 8월의 뜨거운 여름에 입대를 해서 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었습니다. 군대를 입대하기 전에는 목마르면 바로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훈련소에서는 물먹는 자유까지도 제한되었던 곳이었습니다.
한번은 군장을 매고 행군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강원도 최전방 GOP 철책에 있는 ‘을지 전망대’로 행군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그 날 만큼 땀을 많이 흘린 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 땀이 게릴라성 폭우처럼 몸에서 흐르고 있었지만 훈련조교는 물을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것은 타는 듯한 갈증이 있지만 그렇다고 물을 허우적대고 마시면 탈수로 쓰러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산 중턱에 도착한 후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훈련조교는 산중턱에서 등을 지고 앉게 하고는 수통에 있는 뚜껑에 물을 담아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물의 양은 한모금도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그 물이 몸으로 들어갈 때는 마치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는 것처럼 그 물이 몸의 온 부위로 퍼져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육체적인 갈금함의 해갈이 이정도인데 영적인 갈급함이 해갈되는 은혜는 얼마나 특별하고, 클까요.
오늘 영적인 갈급함이 해소되는 세 가지 이야기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1.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합시다
육체의 목마름에 대한 갈급함은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너무나 당연하게 만드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뜨거운 여름 태양아래 몇 시간을 서 있다고 한다면 땀을 많이 흘리실 겁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원한 ‘아아’가 떠오르실 겁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면 시원한 냉수 한잔이 떠오를 겁니다. 육체의 목마름에 우리의 몸이 반응을 하듯이 우리는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42편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1인칭 관점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슴에 비유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시냇물 찾기에 갈급한 목마른 사슴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 이라는 자신을 비유적 표현한 이 말씀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은혜로 다가옵니다. 많은 찬양들이 “목마른 사슴”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찬양의 가사로 불렀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저는 이 찬양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20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몰랐던 목마른 때에 이 찬양이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이 찬양이 시편 42편의 시로 불러진 찬양인걸 알았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영적인 갈급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찾는 갈급함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영적인 갈급함은 똑같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갈급함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갈급함은 어느 누구나 다 느끼게 되는 갈급함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영적인 갈급함은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공허함을 세상의 다른 것들도 채워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채우고자 하는 갈급함의 대상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아테네를 전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 하반절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아테네 사람들의 모습처럼 모든 인간은 종교심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갈급함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갈급함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 곧 생명 없는 신에게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해소하고자 몸부림칩니다.
이 시대를 바라 볼 때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정말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시냇물을 찾는 갈급한 사슴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믿지 않은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세상이 정해준 기준들이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줄 것이라는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성공, 물질적인 풍요, 남들과 다른 권세를 잡고자 하는 마음들이 바로 그런 것 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진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2절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우리가 진실로 갈망하고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다시금 소생케 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나아가시는 지금 이 시간 되길 축원합니다.
2. 위로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합시다
(예화)
예전에 한 미션스쿨 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반에 40명 정도의 학생이 수업을 하고 있었고, 매주 마다 채플예배를 드리는 학교였습니다. 저는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그 질문은 “너희 40명 중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손을 들어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적어도 10명 정도는 손을 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든 학생은 고작 4명 이내에 불과했습니다.
고작 10프로 이내만이 자신이 신앙인인 것을 표한 것입니다. 후에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손을 들지 않는 친구들 중에 신앙은 있지만 손을 들지 않은 학생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손을 들지 못한 것이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믿지 않은 친구들에게 놀림꺼리가 되지 않을까란 부담감에서 비롯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한 동안 신앙적인 고민을 했었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 신앙과 삶이 분리된 상황들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신가? 교회 안에서만 우리의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그런 분이신가? 라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삶에 지금도 여전히 위로가 되고 계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나의 삶의 모든 현장과 영역속에서 경험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대부분 크리스천의 삶은 세상 가운데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비단 크리스천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이 이러합니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한 주간의 빽빽한 스케쥴을 감당하느라 여기저기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힘든 인생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지만 위로 받을 곳이 없다는 막막함 속에서 한숨 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은근한 따를 시키고, 믿는 자로서 크던 작던 핀잔과 핍박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주변의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너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 있어?” 라고 핀잔을 주고 무안하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 가운데 시편 기자는 마음 둘 곳 없어 밤낮 눈물을 흘렸다라고 비유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이러한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는 삶이 교회 밖에서의 우리 크리스천에 ‘안타까운 현실의 모습이 아닌가’ 묵상해 보았습니다.
나의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고백하고 결단하지만 세상은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돈보다도, 아니 자신의 작은 어떤 유익보다 더 작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밀려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현실속에서 하나님 주시는 위로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매번 눈물 흘리며 세상 가운데 희미한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위로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의 위로되시는 그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사슴의 목마름은 목의 고통을 호소하는 타는듯한 목마름입니다. 그 타는듯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복된 삶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서있는 어디서나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삶 속에서 갈망해야 합니다.
(예화)
저는 대학교 1학년 방학기간 중에 용인시 지역에 있는 물류센터에서 파트타임 일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전국에서 들어온 택배 물류들을 분류하고 윙바디 탑차에 적재하는 단순하지만 힘든 일이었습니다.
2달간 일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영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같이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 모습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빠지지 않고, 1시간에 1번씩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작업장을 나갑니다. 그리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저는 1시간에 그 짧은 휴식도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려오는 택배 물품들을 운반하고 실었습니다.
그리고 한 숨 돌리려고 함께 일을 하셨던 어느 선교사님의 사모님과 교회를 다니시는 몇 분의 성도 분들과 함께 쉬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휴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심 이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한 상황들이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든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은 위로를 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오후근무가 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날 선교사님 사모님과 교인 몇 분과 함께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으로 방문을 했었습니다. 그곳에서 토마스 선교사님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 초창기에 고통과 순교를 당한 믿음의 선조들의 글귀와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 기억이 그 각박한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한국기독교 초창기에 선조들에게는 믿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극심한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훼방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있냐? 있으면 보여봐라”라는 비난과 냉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조들은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하나님을 통해서 공급받았습니다. 현실 상황이 더욱 힘들어 질 수록 위로자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갈망했음이 분명합니다. 그 은혜의 위로로 한국교회가 굳건히 서가는 씨앗이 심기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들을 지금의 한국교회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교회 밖 세상 속에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고단한 현실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내 하나님은 어디있냐”라고 질문에 믿음으로 반문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교회 밖,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시길 축원합니다.
3.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합시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삶의 현실과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갈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도 자신의 삶의 낙심과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또 다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에 밀려드는 낙심과 불안이 무엇인지를 사무치도록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려고 해도 위로가 안됩니다.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단호하게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우리는 아무리 스스로 평안을 누리고, 마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합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무엇가로 자신을 위로하고 평안을 찾고자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음을 바로 알게 됩니다. 참 평안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수술이나 시험을 앞에 두고 있는 갈급한 성도분들을 심방할 때 자주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도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시는 걸 많이 경험합니다. 낙심과 좌절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할 때 그 분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게 됩니다.
(예화)
예전에 한 새가족 성도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분이 하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의 지인분께서 성경을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나오라고는 강요하지 않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 가야할 확신이 생기면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새가족 성도분의 가정에 건강과 경제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였다고 합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한장 한장 읽어가면서 쉽지는 않았지만 구약을 일독하고 신약을 읽고 있는 중에 한 말씀 절에서 멈춰섰고, 전율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말씀 절은 로마서 5장의 하나님께 소망을 둔 바울의 갈망함에 대한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성도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상의 성공과 물질을 갈망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시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로 성경을 선물로 준 그 지인분께 연락을 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 새가족 성도처럼 나를 낙심되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 돈입니까? 자녀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성공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갈망하고 살아보지만 그 결과는 상처와 불안함만 더욱 커지게 만듭니다. 많은 물질을 얻었지만 더 많은 물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탐욕입니다. 성공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이탈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을 진학했지만 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진정으로 우리의 갈망은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소망은 어디서부터 솟아나야 합니까?
오늘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고통와 불안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자 몸부림치며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여전히 찬양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편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에 큰 결단으로 다가오시길 축원합니다.
(예화)
지난 방학기간에 목장모임을 비롯한 훈련반이 휴식기를 가지며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가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방학기간이 덜 분주하고, 편하지만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치 학기중에 날카롭게 갈아온 칼을 장맛비에 녹슬어 버린 무딘 칼로 만들어 버린 시간은 아닌가 조시스럽게 묵상해 봅니다. 또한 영적인 갈망함이 희미해진 시간이 아니었나 하나님께 죄성스런 마음도 듭니다.)
저는 지난 방학기간 중에 교회에 허락으로 한주간에 휴식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물론 피곤한 육신에 쉼을 누리는 휴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적으로는 느슨해지는 시간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설상가상으로 휴가를 마치고, 8월 15일 광복절의 휴식을 덤으로 누렸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외치며 즐거워해야 했지만 심령 깊은 곳에 이거 너무 느슨해지는건 아닌지란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휴식을 통해 깨달은 것은 육체적인 쉼을 누린다는 것 우리의 사역과 삶을 재충전하는 귀한 시간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육체적인 쉼이 영적인 갈급함을 희미해지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영적인 민감함도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사도행전에 반복되는 말씀의 본질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긴장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함을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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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께서 이미 성도가운데 임함과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재림을 향해 선포되는 긴장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 긴장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삶 속에서 영적인 긴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며 우리의 생명되시고 위로되시며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매순간 나아가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영적인 갈급함은 누구나 다 간절히 필요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영적인 갈급함이 있고, 그것들을 해갈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인 갈망을 해야 합니다. 삶의 반복되는 긴장속에서 매순간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날마다 갈급함중에 생명되시는 하나님! 환난중에 위로되시는 하나님! 낙심중에 소망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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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심령과 삶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채워질 때 그 삶을 통해 한 영혼을 향한 마음은 더욱 갈급해 집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나 스스로 이 땅에 것이 아닌 하나님이 갈급함을 채우시는 것을 확신하며 믿을 때 세상에서 갈급함을 쫓는 사람들에게 진짜 갈급함을 해결해 줄 분이 누구인지를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오직 주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하나님께 예배자로 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세상의 영적인 목마름과 갈증 속에 고통당하고 있는 한 영혼 한 영혼들에게 주님의 생명의 복음과 충만한 은혜를 전합시다.
설교 후
나는 예배자입니다.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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