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가 아들인가?

갈라디아 강해설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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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생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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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가 아들인가? ()
주일설교 (20190915)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만큼 신기한 일이 없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조카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모부랑 건희랑은 완전 붕어빵이에요. 이모랑 아양이도 완전 똑같아요.’ 아들이 저를 닮았다는 말은 이전부터 수도 없이 들었어요. 왜 닮겠습니까? 제 유전자를 받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함께 살면서 대화도 하고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 하다보니까 생긴 것 말고도 분위기도 닮아가게 되는 겁니다. 말투와 행동, 심지어는 걸음걸이까지 닮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잖아요. 그 말은 예수의 유전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자, 예수의 DNA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대조가 되는 두 단어를 발견하셨죠? 바로 종과 아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종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있고, 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을 진단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종인가 아들인가’라는 제목으로 종의 상태로 신앙생활하는 것과 아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두 가지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첫째, 종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23절을 보세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종으로 살아가는 삶은 믿음이 오기 전의 삶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에 매이고, 갇혔다고 말하죠? 손발에 착고를 하고 감옥에 갇힌 상태로 묘사합니다. 한 마디로 자유가 없는 종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사회의 제도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23절에 ‘초등교사’라고 번역된 말은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인데요, 자기 아들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 주인이 특별히 임명한 종을 말합니다. 주인은 보통 성년식이 될 때까지 아들을 ‘초등교사’에게 맡깁니다. 그러면 이 종은 주인에게 의복, 식사를 비롯한 삶의 전반적인 예절과 관습을 가르치고, 학교에도 데려다줍니다. 만약에 말을 제대로 안 들으면 어떻게 할까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때려서라도 복종하게 만듭니다. 그런 권한을 주인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러니까 성년식을 할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분명히 아들이지만 실제 삶은 종이나 다름이 없어요. 4장 1,2절을 보세요.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바로 이런 삶을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cf. 북한의 강제노동현장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매질을 당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진 채 감독관의 눈치만 살핍니다. 감독관이 없으면 누구나 다 손을 놓고 쉬려고 합니다. 할당량보다 더 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기쁨과 자발적 헌신은 없어요.
신앙생활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어요. 주일에 교회를 안 오면 왠지 깨림칙하고, 무슨 사고가 날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담임목사 눈치도 보여서 눈도장이라도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오실 수 있죠. 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내 삶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어요. 자발적인 헌신이 없고 의무와 책임으로 최소한만 하는 거예요. 절대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마음속에 수많은 법과 규칙들이 나에게 끊임없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너는 쓸모없는 존재다. 하나님은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죠. 여러분이 혹시 이런 상황에 계시다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그런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그건 ‘믿음생활’이 아닙니다. 종교생활입니다. 아직 ‘믿음이 오기 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주일성수, 성경읽기와 기도, 봉사와 섬김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런 것들을 해야 합니다만, 마음의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동기가 아니라 믿음의 동기로 해야 하는 거예요. 종교적인 동기는 내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믿음은 나를 이미 사랑하시고 인정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하는 것입니다.
cf. 불교에서는 삼천 배를 하면 부처님이 눈을 뜨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소원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누구에게 달려있어요? 나의 정성과 행동에 달려있어요. 삼천 배를 다 하는 순간 부처님은 내 소원을 무조건 들어줄 의무가 있는 겁니다. 즉, 자판기에 천 원을 넣었으니까 천 원짜리 음료수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거예요. 안 나오면 화를 내면서 막 두들기고 신고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종교행위에요. 믿음은 다릅니다. 일천번제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요, 잘 알고 하셔야 합니다. 천일을 빠짐없이 채우면 하나님이 나의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셔야 하는 ‘만능티켓’을 얻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반대로 천일을 채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내가 구하기 전에 이미 뭐가 필요한 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기 원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셔서 우리와 만나는 시간 자체를 기뻐하시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경험하게 하시는 거죠. 기도하면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면 믿음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할 바에야 아예 포기하는 게 낳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믿음생활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둘째,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들로 살아가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25,26절을 보세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억압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초등교사의 채찍질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왜요? 이제 성년식을 통해서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종의 옷을 벗기고 아들의 옷을 입혀줍니다. 그럼 전에 매로 자신을 다스리던 ‘초등교사’는 어떻게 할까요? 공손하게 아들에게 예를 갖추게 됩니다. 이제 자기가 매로 다스리던 아들은 주인의 상속자가 되어 자신을 다스릴 사람이기 때문이죠.
ex)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던 때가 떠올랐어요. 장교로 임관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격훈련을 받았어요. 유격훈련 때는 계급장을 떼요. 그리고 번호만 있습니다. 장교라도 유격훈련기간 동안은 계급이 아니라 ‘올빼미’라고 불러요. 유격훈련의 조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시죠?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각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창소리가 작거나 장애물을 제대로 넘지 못하면 얼차려를 받아요. ‘엎드려뻗쳐’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을 시키면 해야 돼요. 훈련을 제대로 시키기 위해서 교관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기 때문이죠. 그렇게 2주 동안 조교 밑에서 빡빡 기고 나서 수료식을 할 때는 어떤 줄 아세요? 조교가 유격훈련을 받은 신임장교들에게 단체로 경례를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래, 내가 장교였지. 조교들이 나를 강하게 훈련시키느라 그런 거지. 고맙네.’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더 이상 조교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더 이상 내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그런 믿음이 오면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히 용납하셨다는 확신과 함께 자유와 기쁨이 몰려오는 거예요.
cf. 제자훈련을 받은 한 남자 집사님이 훈련을 통한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고백하셨어요. “내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망보다 현재 내게 주어진 크고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맘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를 정죄하거나 스스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하고 작은 바람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로 변화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이제는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게 되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도,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이 내 일이요, 하나님 나라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니까 그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해보세요. 나는 종의 마음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중인가, 아니면 자녀의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가?
3.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대가지불입니다.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어요. 먼저, 아들을 보내셨어요. 4,5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자에게 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 무한의 존재가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유한의 세계로 들어오신 거예요.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 친히 율법 아래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존재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죽기 위해 범죄 소굴로 오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cf. [파파로티]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한 시골의 예술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그 학교에는 한때 잘 나가던 성악가였지만 성대에 암이 생겨서 꿈을 접은 음악선생님(한석규씨)이 있어요. 어느 날 장호라는 학생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조폭세계에 일찍 입문한 깡패에요. 교장 선생님의 특별부탁으로 음악선생님이 장호를 맡는데요, 사사건건 부딪힙니다. 장호의 재능을 알게 된 선생님은 마음을 고쳐먹고 장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조폭생활과 음악을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음악 선생님은 큰 결심 끝에 조폭 두목을 찾아가서 장호를 놓아달라면서 이렇게 말해요. ‘저는 피아노를 치기 때문에 손목아지는 못 내놓지만, 발목아지는 내놓겠습니다. 제발 장호를 놓아주십시오.’ 목숨을 건 선생님의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인 조폭 두목은 결국 장호를 놓아주고, 장호는 세계적인 성악가가 됩니다. 장호가 그냥 조폭생활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어디서 칼을 맞아서 죽었을 겁니다. 그런 장호가 선생님 때문에 완전히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이죠. 영화 정보 밑에 이런 댓글이 있었어요. ‘타고난 재능보다 더 부러웠던 것은 인생이 바뀔만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내 인생에도 저런 참된 스승이 있었으면...
예수님이 바로 그 음악선생님과 같은 분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죄에 매여 죽음으로 끝나버릴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캄캄한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의 세상에서 손을 씻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발목아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어요. 굵은 대못 때문에 손과 발의 뼈가 으스러지셨고, 긴 창은 주님의 창자를 꿰뚫고 물과 피를 다 쏟게 했습니다. 우리는 장호처럼 꿈을 이뤄보겠다는 의지도 없었어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하고 거부하던 자격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하나님이시니까 어차피 부활하실 거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별 게 아닌 게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사랑하셨던 주님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진다는 사실은 영원의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시고, 아들의 신분은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셨어요.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아빠 아버지’는 아주 친밀한 호칭이에요. 우리가 ‘아빠’라고 부를 때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당시에 기도문을 외우고 유창하게 기도하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어요.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그 아들의 영’ 즉 오직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인 예수의 영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구세주로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의 영을 받은 사람이에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멘!
4. 넷째,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라는 유니폼을 입고 살라는 거예요. 유니폼은 신분과 정체성을 말합니다.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회사의 유니폼을 입으면 그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소속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 유니폼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28절을 보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예수의 옷을 입을 때 나머지 조건들은 다 상대화되는 거예요. 돈이 많든지 적든지, 세상에서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가방끈이 길든지 짧든지, 어느 지방 사람인가, 나이가 적은가 많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직분이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직분이 없든, 이런 것이 주 안에서 하나 됨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죠. 오직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ism)과 ‘주의자’(ist)는 그리스도와 함께 결합될 수 없어요. ‘주의’와 ‘주의자’는 그것을 절대화하고 그것에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절대화하고, 하나님 만 줄 수 있는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자 한다면 여러분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여러분,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이념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정치성향상 어떤 분은 보수고, 어떤 분은 진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화시키지 않습니다. 보수주의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진보주의가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지 않습니다. 또 예수의 옷을 입었는데 전라도 경상도를 왜 따집니까?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많은지 몰라요. 예수를 믿는데도 그 사람의 믿음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로 평가합니다.
cf. 교회의 중직자인데,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는 왜 사주팔자 궁합을 봅니까? 그 사람이 예수의 옷을 입었는지 보지 않고 왜 연봉이 얼마인지, 세상에서 얼마나 이루었는지만 봅니까? 다락방 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선입관과 편견을 내려놓으세요. 제가 얘기했죠? 곱슬머리에, 옹니 에다가 성까지 ‘강’이니까 고집이 장난이 아니겠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멀쩡한 사람도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인류가 되는 겁니다. 옛 사람, 옛 가치관은 죽고 이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로 날마다 새롭게 빚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날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십시오.
2)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입니다. 4장 6절을 다시 보세요.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죄용서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를 쓰셔야 합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잖아요. 그러면 불러야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는 삶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이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예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라! 자주자주 불러라!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매주 매달 매년 자라나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신앙성장입니다. 친밀함은 쌍방이 헌신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야 합니다. 한쪽은 자꾸 만나려고 연락하고 하는데, 한쪽은 일하느라 전화도 제대로 안 받고 피곤하다고 만남을 자꾸 미루고 그러다보면 점점 멀어지게 되는 거예요. 어쩌다가 만나도 서먹서먹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난 지가 너무 오래 돼서 ‘하나님 아버님’처럼 느껴져서는 곤란합니다. 천국에 가서 ‘목사님한테 아내한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러시겠어요?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엄청 자랑합니다. 시계를 보여주면서 이게 대통령이 준 시계라고 하면서요. 하물며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특권입니까?
cf. 존 F.케니디가 대통령으로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사진 중에서 재미난 사진을 봤습니다. 아들 케니디 주니어가 네 살이나 다섯 살쯤 되었을까요? 하나는 아버지가 집무하는 책상 밑에 장난치며 노는 사진입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로 눈을 마주친 채 웃으며 백악관 앞 회랑을 걷는 사진입니다. 백악관 자체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특별히 초청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가 있잖아요. 게다가 대통령 집무실은 비서실장이나 극히 제한된 몇 사람들만 업무 때문에 제한적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케네디 주니어는 대통령 집무실을 맘대로 드나듭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언제나 웃으며 반겨줍니다. 이게 바로 자녀의 특권이에요. 더군다나 기도할 때 황송하게도 하나님이 오십니다. :16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종입니까, 아니면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아들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제 날마다 수시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교제합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가장 귀중한 정체성으로 삼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삽시다.
♬ 아바 아버지 (E) / 내 이름 아시죠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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