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5.수요예배순서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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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종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446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김순복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2장 23절에서 2절 말씀입니다. 구약 84페이지입니다. 합독하겠습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정리 및 설교
서론
우리는 피곤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과 지침, 힘든보다 더욱 심한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었다. 이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임했는지 살펴보며 위로와 은혜, 겸비함을 얻길 소원합니다.
서론
본론
1 모세의 성장
당시 바로는 모세를 키운 공주
그러나 그 다음대 바로와 문제가 많았음
출애굽기라고 하시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모세가 떠오를 수도 있고, 10가지 재앙이 떠오를 수도 있고,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가 떠오를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세를 후계자로 키우려했기에 벌어진 것이 아닐까?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그게 탄로난 후에야 나선 것, 15절에 이르러서야 바로가 나선 것은 이때문으로 보임. 그전에 벌써 히브리인 사이에서 소문 다났음.
그렇다면 출애굽기를 한마디로 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출애굽기를 정복의 책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정복하시고, 광야를 정복하시고, 그 두가지 정복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정복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그 정복은 미완료로 끝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정복의 책, 출애굽기를 함께 살펴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모세는 후계자 싸움에서 거의 패배한 것으로 보임.
물론 자신의 목적은 히브리인,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지만 그를 위해 첫 번째로 권력을 잡으려했음. 그러나 실패.
2. 모세의 행동 - 그의 동포들이었음. 당연히 노예의 지지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머릿수를 지닌 이스라엘이었기에 하나로 규합되어 지도자가 되면 가능성있음.
본론
그의 동포들이었음. 당연히 노예의 지지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머릿수를 지닌 이스라엘이었기에 하나로 규합되어 지도자가 되면 가능성있음.
---------------------여기까지 성경 외적 이야기---------------------------------
출애굽기는 요셉과 형제들, 그 세대 사람들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후 요셉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이 두가지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진짜 모세의 의도는 알 수없음. 하지만 그가 동포를 구원하려 한 것은 사실로 보임.
11절에서 그는 그의 형제들의 무거운 노동을 보게 됨. 이것은 나중에 25절에서 하나님께서 보심과 같지만 완전히 다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형제로 여긴다.
7절을 살펴보면 3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생육했다 번성했다 온땅에 가득했다입니다. 물론 불어났다 매우 강했다도 있지만 저는 앞에 3가지 생육, 번성, 온땅에 가득 다른 말로 충만을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이 3가지 단어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가지 단어는 창세기 1장 21,22절과 28절 쓰인 단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히브리인이자 그의 형제인 한 남자와 애굽인인 한 남자를 보게 된다.
모세는 또 다른 한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찾는다(12절 좌우를 살펴보고 사람이 없음)
처음부터 정복과 다스림이 없었습니까?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요셉이 애굽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알다시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 식량을 주관했고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스라엘이 고센땅에 사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 한 남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애굽인이 히브리인에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
애굽인도 히브리인을 치고, 모세도 애굽인을 쳤다. 같은 단어가 쓰인다. 결과가 다르다. 히브리인은 살았지만 애굽인은 죽는다.
13절에 다음날 이번에는 히브리인이 히브리인을 ‘치고’ 있는 것을 본다.
만약 요셉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애굽 전체가 굶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의 손에 모든 애굽인의 생명이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셉이 애굽을 정복하고 다스렸다라고 표현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말한다. ‘왜 치느냐?’ 네 동포다.
그 히브리인(동포를 치던 히브리인) 왈 : 왜? 나도 죽이려고(죽이다, 도살하다, 살육하다)? 단순히 죽이다보다 좀더 강하다.
모세는 히브리인을 ‘형제’로 여기지만, 히브리인에게 모세는 그냥 애굽인을 쳐죽인 ‘애굽인’이었다. 이 인식은 나중에도 나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아는 자가 없어지자, 그 정복과 다스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번성과 정복, 혹은 다스림이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요소인 정복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6절까지 나오는 요셉과 족장들의 죽음이 중요합니다. 그때까지는 번성의 명령은 지키지 못해도, 정복의 명령은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복의 명령조차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는 치는 자. 너는 죽인 자.그런데 무슨 재판관?
14절 다스리는 자, 재판관(사사)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모세의 의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애굽인에게 모세는 ‘이집트왕자인척’하는 자였고,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는 그저 ‘이집트왕자’에 불과했다.
모세는 ‘죽이는 자’였고, 자신의 어머니인 바로도 모세에게 ‘죽이는 자’가 된다.(15절)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원래 사람이 지켜야할 명령인데,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권력을 구했다.그러나 모세는 이집트인들에게 이집트왕자인척 하는자,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였다. 실패한 후, 자신의 동족을 형제로 여기며 히브리인의 지도자, 통치자, 판관 다른 말로 사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와 히브리 양쪽에서 ‘죽이는 자’가 되었다.
모세가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누가 죽이는 자와 함께 있으려 하는가.
도망간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 하루는 우물곁에 앉아있었다.
그 결과 번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합니까? 정복과 다스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면 7절의 생육, 번성, 충만은 창세기 1장 28절과 똑같은 단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때마침 미디안 제사장의 딸 7명이 우물물을 길어 양떼를 먹이기 위해 다가왔다.16절
그런데 양치기들이 나타나 그녀들을 쫓아내었다. 모세는 우물 옆에 앉았다가 일어나서 위협을 당하고 내쫒기고 있는 그녀들을 도와주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도왔다. 양치기들을 내쫒았고, 양떼에게 같이 물을 먹였다.
그런데,
-22에서 이 3가지 단어가 똑같이 나옵니다. 21절과 22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에 사는 것과 하늘에 사는 것이 생육, 번성, 충만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왜 이랬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양치기들에게 쫓겨나는 모습에서 애굽에서 쫓겨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모세는 그녀들을 ‘도왔다’
그런데 그녀들의 반응은 다르다.
만약, 이스라엘이 번성으로 끝난다면, 이스라엘은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그저 짐승들, 물고기들, 새들도 생육, 번성, 충만은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정복을 누가 시도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애굽인이 정복을 시도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을 정복하고 10절에서 바로 말한 것처럼 출애굽해야 하는데,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모세가 우리를 구해주었다라고 말한다19절
모세의 행적을 매우 자세하게 말한다.
정당한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못하고, 정작 하나님을 버리고 죄에 의해 정복당한 애굽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복하려고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7절에서는 모세가 양떼에게 물을 준것만 말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세가 자신들을 구원해주었고, 물을 길어주었고(특히 여기 매우 강한 강조가 들어간다), 양떼에게 물을 주었다고 세세하게 다 말한다.
19절은 한명이 말하는게 아닌거같다. 7명이 돌아가며 어떤때는 다같이 말하는것같다. 그가 우릴 구해줬어. 물도 길어줬어! 맞아맞아. 양떼한테 주기도 했다구! 하고 여러명이 말한 것을 모아넣은 것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짐승이 되었습니다. 1장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까. 이스라엘의 반응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바로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위해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이 아닌 바로의 농노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마치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마냥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습니다.
19절에서 그녀들은 모세를 ‘한 애굽 남자’라고 표현한다.
11절에서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기 전 ‘한 애굽 남자’를 찾는다. 그가 찾지 못하고 죽였다. 그러나 사실 모세가 찾던 ‘한 애굽 남자’는 그 자신이었다.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바꾸려 했다면, 애굽에서 쫓겨났을까.
이렇게 끝났다면 출애굽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서십니다. 바로의 정복, 학대에 대응하여, 번성으로 맞서십니다. 그래서 12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애굽인이 근심한다고 하는데, 이 근심하다라는 단어는 걱정한다 정도가 아니라, 매우 두려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자로서 쫒겨났다.
하지만 미디안, 이 황량한 땅에서 그는 새롭게 태어났다.
분명 정복을 시도하는 것은 애굽인이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데, 반대로 정복자인 애굽인이 더욱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벌어지는 사사기의 상황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이후 르우엘은 자신의 딸들을 구해준 모세를 집으로 데려오고 그에게 자신의 딸을 준다.
모세는 애굽에서 자신이 애굽인인 한 남자인지 몰랐다.
그러나 미디안에서야 애굽인인 한 남자로서 역할을 한다.
왜냐면 이스라엘과 애굽인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죽이는 자가 아니라 구하는 자가 되었다.
가정이 생기고 자식이 생긴다.
사람으로서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고 짐승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처음은 하나님과 애굽의 싸움으로 시작됩니다. 짐승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우시고자 정복을 시작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아예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어 사람이 아닌 소나 말과 같은 짐승으로 써먹으려는 애굽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자가 아니라 양치는 자가 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했던 그 일을 하게 된다.
물론 그는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14절에서 애굽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흙 이기기는 요즘 말해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등을 넣고 반죽하는 일입니다. 벽돌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사의 일이란 것은 애굽의 특성상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나일강의 물을 퍼날라서 논밭에 뿌려야 하는 일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한다.
이제 나는 이방인이다라는 뜻이다.
즉, 아무생각없이 몸만 사용해야 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시키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만드려고 하는 것입니다.
게르솜은 내몰리다 라는 뜻이다.
그는 쫓겨나서야 애굽인의 모습을 버렸다.
그는 쫓겨나서야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12절처럼,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번성시키면서 하나님 자신이 나설 그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사람이 해야 하는 정복을 대신 이루실 것입니다.
그는 쫓겨나서야 원래 조상들이 했던 일(목축)으로 돌아갔다.
세상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패배했을 때, 그는 오히려 본모습을 찾았고, 승리할 준비가 되었다.
결론
이제 그는 쫓겨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나가는 자가 될 것이다.
이제 애굽인인 한 남자가 아니다. 요셉을 형들에게 인도했던 한남자, 그 역할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할 한 남자가 되었다.
이후 24절이 나온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출애굽기는 정복의 책입니다. 그리고 그 정복은 원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다시피, 이스라엘은 그럴만한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아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마치 사람이 아닌 짐승같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1-22절에 나오는 짐승들같이 생육하고 번성하기만 했지, 정복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애굽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노예, 짐승이 되어서 살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신들, 우상들이 아닌 자신들의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다.
드디어 사람이 준비되었다. 내쫒김과 패배, 실패를 통해 모세가 준비되었다. 백성들이 애굽신에게서 떠났다.
24절에서 사람들이 준비되고, 하나님께서 등장하신다. 들으신다. 기억하신다.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신다. 24절의 뉘앙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학대받는 중에 더욱 크게 번성하게 하십니다. 먹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상황에서 더욱 강하게 하여, 학대하는 애굽인들이 더욱 두렵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이삭을 기억하시고 야곱을 기억하신다. 그 한명한명을 다 기억하신다. 그들이 살았던 생애 그들의 실패, 그럼에도 했던 순종들을 기억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한명한명의 신음을 들으시고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약속했으니까 억지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한명한명을 들으시고 기억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차서 하나님께 상달될 그 때를 기다리십니다.
25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듣고 기억으로 끝내지 않는다. 이제 보신다(돌보다가 아니라 보다다). 그리고 아셨다(기억하다가 아니라 아신다). 이 알다는 경험으로, 체험으로 실질적으로 아신다는 뜻이다.
듣고 기억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 보고, 신음하는 그들의 자리에 가서 함께 아파하고 경험해서 아셨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차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리는 세상에서 너무나 미약하기만 합니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악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씩 우리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나님의 아심이 완성되었다.
법은 점점 세상의 편리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간통죄는 오래전에 폐지되었습니다. 점점 전도하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퀴어축제, 동성애는 더욱 퍼지고 있습니다. 평등이란 이름하에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고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하는 우리를 억압하는 법안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우리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완전한 행하심, 역사하심이 드러날 것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고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 때처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갈 때를 기다리고 있으십니다.
이 모든 실패를 통해, 때로는 미디안으로 내쫒김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다.
모세가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로 준비되고, 애굽의 왕자가 아니라, 족장들이 했던 양치기로 돌아간 것처럼,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우상들도, 애굽왕도, 애굽인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것처럼
그러니 우리의 모습을 인정합시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정복할 기력이 없음을 인정합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한번 이 땅을 정복하기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그 준비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2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심은 모든 것을 경험하고 직접적으로 아심이다. 우리의 신음과 힘들어함을 하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언제 기쁘고 행복해하는지도 모두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준비와 하나님의 아심이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가 드러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이땅을 정복해가는 우리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바쁜 세상, 힘든 세상에 매몰되지 말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이 과정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축복과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한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9월은 전교인 전도의 달입니다.
9월 7일 토요일 오후 1시에 다음세대 축제가 있습니다.
ㅇ 9월 29일 주일은 태신자 전도주일입니다.
이번주는 태신자와 식사입니다.
ㅇ교회 대청소가 있습니다. 9월 27일 금요일 6시입니다. 청소도구를 가져와주시기 바랍니다.
ㅇ교구별 릴레이기도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내일은 3,7교구이니 1층 게시판을 참고하시어 함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ㅇ중직자 및 직분자들께서는 당일 주차장이 혼잡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시기 바랍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1남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는 연합구역예배로 드리며 특송은 아브라함, 모세, 안나, 루디아회입니다.
ㅇ권세회 9월 한달 연속철야기도가 있습니다.
ㅇ결혼소식입니다.
동래구역 김기원 이옥순 집사님의 장녀 김소현양의 결혼식이 9월 28일 토요일 오후 6시에 서울그랜드호텔 LL층에서 있습니다. 버스를 대절하여 모피코 앞에서 오전 10시 10분에 출발하고 교대역 8번 출구에서 오전 11시에 경유하오니 함께하실 분은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93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