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3 [공동체예배] 붓기, 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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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37–38 NKRV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살리는 물, 죽이는 물

물 갈이 라고 들어 본적이 있는가?
여행을 하러 다른 나라에 갔는데, 복통과 구토, 미열, 설사 등의 증세가 나타나서
여행을 망치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데, 보통 물갈이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갈이는 물속 석회나 미생물 함량이 평소 마시던 물과 다르거나 세균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정식 의학 용어는 ‘여행자 설사' 이다.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물을 잘못 먹었다가 며칠을 고생한 적이 있다.
게다가 기차 안이어서 정말 힘들었다.
어머니는 섬에 사역하실 때 물갈이 때문에 너무 힘드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모든 물이 마셔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목이 말라 마셨는데, 오히려 물갈이를 하게 하고- 바닷물을 마시면 탈수가 생겨 심하면 죽음에 이른다.
또 물 중독이라는게 있어서 너무 급하게 많은 물을 마시면 죽기도 한다.
2007년 새크라멘토 소재 라디오 방송국에서 물 많이 마시기 대회라는 것을 개최했는데,
한 여성이 약 7.5리터의 물을 마시고 의식을 잃은 후에 몇 시간 후 심각한 물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물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잘못된 물은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왜 우리는 물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물을 섭취하는가? 당연히 우리 몸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빠져나간 물을 보충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부족한 수분을 보충하라고 보내는 싸인이 ‘목마름'이다.
사람들은 ‘목마르기 때문에' 물을 구하고 물을 마신다.
우리의 육체가 이렇게 목마름으로 물을 공급받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목마름으로 물을 공급받고자 하는 신호가 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영적 목마름을 느끼는 원인이 무엇인가?
영적 무관심 - 불신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책, 죄책감, 수치감 등
거짓 믿음
하나님을 시험
자기 만족
더 심각한 상태는 내가 목마르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희망과 즐거움도 사라지고
영적인 무력감을 넘어서 삶의 의욕과 방향성을 잃게 되고만다.

영적 목마름의 해결 방식 1

우리는 영적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선언'이다.
이 말을 하는데 배경지식이 한가지 필요하다.
그것은 ‘명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시간은 초막절이라는 ‘명절’의 마지막 날, 곧 ‘큰 날' 이었다.

유대의 3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가운데 하나다. 이 시기는 양력으로 추분(秋分)이 가까운 시기였다. 이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각 가정의 지붕 꼭대기나 광야 또는 밭에 장막(초막)을 짓고 1주간 기거하며 절기를 지켰다(포로기 이후로는 예루살렘 성 주변에 장막을 지었다, 스 3:1,4). 그래서 ‘장막절’(帳幕節)로도 불렸다. 또 장막을 풀과 나뭇가지로 지었다고 하여 ‘초막절’이라고도 했다(레 23:40–43). 이렇게 장막을 짓고 거기에 머물면서 절기를 지킨 것은 40년 광야 생활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매일 아침에는 하나님께 물을 헌납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특히 절기 첫날 아침에는 나팔 소리와 함께 제사장 무리가 실로암 못에 가서 성대한 의식 속에 일주일 동안 사용할 물을 길었다. 그 동안 순례자들은 할렐 찬송을 불렀고, 제사장 행렬이 물을 길어와 제단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순례자들은 손에 종려나무나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후 제사장은 제단에서 두 개의 은 그릇에 물과 포도주를 담아 하나님께 바쳤다. 이렇게 물을 바치는 의식은 절기 내내 매일 반복되었고, 마지막 7일째는 제사장 일행이 제단을 일곱 바퀴 돌았다.

매일처럼 물을 붓는 예식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로 와서 목마름을 해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매일처럼 물을 부을 수 있다.
때로 우리의 경건의 삶의 모양들이 물을 붓는 행동일 수 있다.
큐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물을 붓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표시로 작동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와 외침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렇게 물을 부을 수 있다.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물을 부을 수 있다.

해결방식 1의 문제

이 방식의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이 물붓기 행동을 마칠 때 오는 엄청난 여파와 후폭풍이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으면 먹을 수록 목이 마르고 탈 수 증상이 오듯이,
외형적인 ‘행동'으로 길어올린 물붓기 방식은
도무지 우리의 영적 갈급함과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이 명절의 큰 날에 자신들의 만족과 구원을 위해 여전히 물 붓기를 행했지만,
진짜 참된 생수를 주시는 분을 무시했다.

해결방식 1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렇다면 이 행동으로 길어올린 물붓기 방식의 한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7:37 NKRV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고 말씀하신다.
‘어떤 물'
‘부을 것인가' ‘마실 것인가'
다시 명절 풍습으로 돌아가보면,
물 붓기 행사는 7일 동안 이루어지지만, 이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첫 째날, ‘실로암'에서 물을 뜨는 행사가 진행된다.
그 동안 순례자들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친다.
그들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떴다.
실로암은 B.C. 700년 경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안의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앗수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양쪽에서 지하수로를 파다가 한지점에서 동시에 만났는데,
그곳에서 샘이 만들어져 흐른 것이 실로암이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1880년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실로암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공사에 동원된 인부가 수로 개통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었다.
때로 우리는 어떤 ‘경험'에 의지할 때가 많다.
특별한 경험과 치유의 역사들.
하나님이 지키시고 행하신 기적의 증거물로서의 연못인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을 뜨는 ‘장소'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수를 주시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요한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풍성한 ‘물'에 대한 표현들을 추적해봐야 한다.
영적 무관심 - 불신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책, 죄책감, 수치감 등
거짓 믿음
하나님을 시험
자기 만족
더 심각한 상태는 내가 목마르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희망과 즐거움도 사라지고
영적인 무력감을 넘어서 삶의 의욕과 방향성을 잃게 되고만다.
1. 우선 대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받으시는 장면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는 애매하게 에둘러 표현한다.
대신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는 가나 혼인잔치가 등장한다.
2. 대신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는 가나 혼인잔치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물동이 여섯에 물을 채우고 포도주로 변하게 만들어
잔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셨다.
2. 그리고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에
3.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만나 물을 달라고 요청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상해 보이는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을 경계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 물을 내게 주십시오' 라는 여인에게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하시며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메시아가 올 때 이뤄지리라고 여인이 말하자
‘내가 그다' 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 두고 마을로 돌아간다.
4.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누웠는데,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일 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야 나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이 평자를 고치시는데, 이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 아버지 되신다 소개하며 하나님과 동등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핍박이 심해졌다.
정리하면, 예수님과 ‘물'이라는 상징이 지금
1. 기쁨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잔치 집에 임한다.
2. 의심하고 회의하며 예수를 의심하고 있는 이에게 다시 태어나는 물을 소개한다.
3. 죄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싸여있는 예배자를 만나시며 자신이 물이심을 소개한다.
4. 육체의 아픔과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병자에게 치유 기적의 물이 베데스다가 아니라 자신임을 보이신다.
그들이 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의 최종목적지에 ‘예수님'께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최종적인 물의 사용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물의 수여

예수님께서 마지막 자신의 사역을 종결시키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물이 등장한다.
이로써 다른 복음서들은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과 등장하시는 성부 성령에 집중했다면,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씻김을 수여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부각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어디에서 등장하냐하면,
요한복음 19:34 NKRV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십자가에서다.
다른 본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물'이 나왔다는 기록이 없고
오로지 요한복음에만 등장을 한다.
왜 옆구리를 찌름으로 피와 물이 나왔을까?
십자가는 구조상 몸을 비틀어놓기 때문에 심각한 육체의 스트레스를 유발시켜 ‘기흉'을 만든다.
폐에 물이 차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압박이 심하게 되면 심부전이 와서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막에 물이 생긴다.
이것을 심낭 유출이라고 하는데 급성 심부전은 90%가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창으로 찔리셨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폐와 심장이 찔린,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보여주는 기가막힌 그림이 바로 출애굽 당시의 반석에서 물이 터지는 장면이다.
모세가 반석을 내리치자 물이 터져 목이 말라 불평불만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물'을 제공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는
생명의 반석이신 예수께서 찢기시고 맞으시고 찔리셔서
우리에게 새롭게 회복될 ‘물'을 허락하신 사건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요한복음 7:37–38 NKRV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명절 끝날 곧 큰날은 초막절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의 큰 날이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하신다.
‘배'는 생명을 주관하는 장소다. 같은 단어를 가지고 여성의 자궁을 표현하면서 이런 의미를 심화시킨다.
이 ‘배'가 찢겨졌다.
이럼으로써 드디어, ‘믿는 자들에게' 생수의 강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다.
영적 목마름의 해결방식은 ‘붓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오는 생수의 강'을 받는 것이다.
기쁨이 사라지는 곳에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를 경험할 때- 참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
우리의 의심이 사라지는 곳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독대할 때 뿐이다.
우리의 죄와 질병이 용서받고 치유되는 곳도 오직 예수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를 만날 때 뿐이다.

스스로 물붓기 / 부어주심을 경험하기

예레미야 2:13 NKRV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가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두가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스스로 물붓기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수여되는 생명의 물 외에
다른 무엇을 얻으려고 몸부림친다면,
우리의 갈증과 갈급함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물붓기는 우리 스스로를 물 중독에 걸려 죽게 만들 수 있다.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행동을, 과정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우리 자신 스스로를 해칠 수 있다.
누군가가 의식되어서 예배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물붓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방해되는 그 무엇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벗겨지는 것처럼 뛰었어도,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여기에 나와있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진짜 예수의 생명수를 맛봐야 한다.
십자가 앞에 홀로 단독으로 서서
나의 진짜 문제와 갈급함을 십자가 위에서 흘러나는 물과 피에
적시고 성령님께서 단단한 심령의 깊은 곳을 만져주셔서
생명이 소생되는 역사를 맛봐야 한다.
경험하기'의 사
얼마전에 아버지께서 사역하시던 위도의 대리교회 목사님과 연락이 닿았다.
40주년을 맞아서 아버지를 수소문했는데, 소천하셨다는 이야기만 듣고
연락이 닿지 않아서 초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아버지가 사역하실 때는 교회가 미자립이었고, 너무나 힘든 시절을 보내셨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실재로 아버지가 무너져 가는 교회 수리를 하셨고,
후원해주시는 것으로 겨우 버티셨을 때다.
아직 교회가 제대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을 때라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서해 훼리호 사건과 더불어 용왕 신에게 제사하는 띄뱃놀이를 교회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교회가 문제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어려움은 더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사역하시면서 어려움이 없으시다는 거다.
교회는 자립했고, 선교사와 미자립교회를 돕고 계시다는 거다.
아니 그 작은 교회가 어떻게 그런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40-50명 모인 신자들이 교회 앞의 땅을 조금 더 매입하기 위해서
헌금하고 있는데 이미 채워졌고 여유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버지가 그곳 위도에서 목사 안수 받으셨을 때 입으셨던 가운을 물려받아
이번에 안수도 받고 축도도 했다.
느낌이 달랐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실패한 목회자였다.
열심히 붓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저 실패하고 볼품없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지 않았던
그런 목회자였다.
그런데, 난 항상 기억하는 것이
아버지의 강대상이다.
늘 언제나 엎드려있으셨고, 밤새 엎드리셨고, 어려울 때마다 엎드리셨던 강대상.
아버지는 열심히 붓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받기 원하셨던 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눈으로 보이는 걸 받지 못하신건 분명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역하셨던 교회는 잘 닦여서 건실하게 세워졌고,
힘든 시간을 잘 버텨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은
당신의 가운을 입고 안수를 받고 축도를 하고
이자리에 서 있다.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함께 하기 원하는 것은
붓지 말고 받자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자꾸 나의 어떤 노력과 종교적 열심으로 교회 생활을 영위하지 않고
같이 십자가에서 ㅅ흘러나오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영적이 방황을 종식시키고,
아픔을 치료하고, 무너진 좌절감을 회복시키고,
물질의 문제든지, 자녀의 문제든지,
다 십자가 앞으로 끌고 와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 발 앞에 서서
그분이 흘리신 물과 피에 우리의 문제를 적셔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대로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게 될 줄 믿는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심령이 쪼개져
십자가 위에 흘리신 물과 피를 받아낼 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참된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님'이 임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 우리 안에 일하시고 역사하시길..
오순절은 성령님의 임재가 있었다면,
마지막 초막절-
열매를 거두고 매 순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절기에
우리 주님의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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