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Confronting with Accidental Mis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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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orean-American who killed his sister accidently

지난 1월 30일에 웨스트 코비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20살 먹은 청년이 권총을 만지작 거리다가 그만 총이 발사되어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벽을 뚫고 나간 총알이 자기 방에 있던 25살 난 누나의 머리에 맞았습니다. 급히 USC병원으로 후송을 했지만 뇌사 상태라는 것입니다 (미주 한국일보, 2005년 2월 1일 자).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이런 우발적인 불행들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아니면 행운이든 불행이든 이런 우발적인 일들로 가득찬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A Laborer who killed co-worker with ax

이렇게 말도 안되는 우발적인 불행이 오늘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직장에서 사용하는 작업 도구로 사람을 죽인 직장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 들고 직장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들은 동네 뒷산에서 나무를 자르는 ‘벌목공들’이었습니다. 힘든 노동판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은 일이 힘든 만큼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 이웃 사촌처럼 그렇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날도 그들은 함께 일터로 올라와 그날 잘라야 할 나무를 배당 받았습니다.  그리고 도끼 날을 잘 점검한 후에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이쪽에서 한번 내리 찍으면 저쪽에서 한번 내리 찍고… 이렇게 교대로 나무 밑둥이를 내리 찍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무 밑둥이가 거의 다 잘려나가 이제 한번 만 더 내리 치면 그 나무가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온 힘을 다해서 도끼를 내리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입니까? 갑자기 도끼 자루가 가벼워 지더니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 도끼 날이 날라가 반대편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는 이웃집 친구의 머리에 맞은 것입니다.  일하던 사람들이 우루루 쓰러져 있는 동료 곁으로 몰려갔습니다. 하지만, 이웃 사촌이었던 그는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그리고 힘껏 일한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도끼 날이 빠져나가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그와 원수처럼 지냈다면 그나마 무슨 변명거리라도 있겠는데, 평소에 가족같이 절친하게 지냈던 형제가 자기의 도끼 날에 머리를 맞고 절명하고 말았다면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Teaching in Law

율법은 그런 살인자들을 반드시 죽음으로 그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음식으로 허락하시면서 노아에게 이런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생명의 피를 찾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창 9:4-5).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절대로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나의 피도 흘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피를 흘리게 되면 나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을 반드시 그 피를 흘리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살인은 살인자의 생명으로 보상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첫번째 원리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보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인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은 내 생명을 내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피의 복수자 가능하게 했습니다. 누군가가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다면, 그 가족들은 피를 흘려 죽게 한 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피의 복수자’라고 부릅니다.

Cities of Refuge for accidental killer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처럼 사람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로 들은 사람의 경우, 그는 정말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만 도끼 날이 빠져나가 우발적인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친구의 생명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의 생명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또 친구의 가족들이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그의 피를 요구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억울한 것이 사실입니다. 친한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도 견디기 힘든데, 자기도 같이 죽어야 할 운명이 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출애굽 당시에 이미 제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1:12-14에 보면, 이럴 경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도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발적인 사고로 인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피의 복수자들로 부터 자기의 생명을 보호 받도록 지정한 성읍을 가리켜서 우리는 ‘도피성’이라고 부릅니다. 

Cities of Refuge

그리고, 이런 도피성들은 민수기 35장 9절에서 15절과 오늘 본문을 보면 6개의 성읍, 특별히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48개의 성읍 중에서 6곳을 지정하였고, 여호수아 20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지정한 여섯곳의 도피성 이름이 나옵니다.  그곳은 요단강 동편에 3곳이 있었는데, 베셀, 길르앗 라못, 그리고 골란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 서편을 정복한 후에 그곳에 다시 세곳의 도피성을 지정하였는데 그곳이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었습니다. 이 도피성들은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어서, 이런 우발적인 살인들이 이스라엘의 어디에서 일어났든지 간에 그가 급하게 뛰어 간다면 반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 약 32Km 반경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피성을 들어가는 길은 특별히 잘 닦아 놓았고, 표지판도 잘 붙여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그 도피성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을 통해서 우발적인 범죄자들이 피의 복수자들로 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게 한 것입니다.

The Tool prevent from improper use

하지만, 이런 도피성에 대하여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도피성이 지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범죄자들이 도피하는 성읍들이 과연 깨끗할 수 있을까? 요즘도 교도소를 보면 범죄자들이 교도소에 가서 교화 되고, 새 사람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교도소에서 더 많은 범죄를 배워 가지고 나와서 결국 사회에 나와 다시 범죄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이런 범죄자들이 모여 살아야 하는 이 도피성이 과연 범죄의 안전지역이 될 수 있을까? 범죄자들로 인하여 이 성읍들이 오염되고, 깡패와 흉악범의 소굴이 되지는 않을까? 이런 염려들을 반영하듯이 범죄자들이라고 해서, 또 ‘우발적인 살인자’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도피성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서 ‘우발적 살인’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이 도피성은 그 스스로 ‘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범죄를 했으니 나는 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이 도피성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이 도피성은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이 도피성으로 피해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피성에서 그 생명을 보전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Blessing of Refuge

이런 도피성에 대한 제한 규정들은 제대로 작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발적인 범죄자들이 도피하여 살던 그 성읍들은 결코 범죄로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생명을 구원받은 그들은 그런 실수를 씻기 위하여 더욱 더 조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피성을 관할하는 대 제사장, 자기에게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한 대 제사장이 죽게 되면 더욱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도피성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한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으로 피해 왔던 사람들에게 ‘사면’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들이 지은 모든 죄로 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이상 ‘피의 복수자’들이 이 우발적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레위 지파의 성읍이었던 도피성속에서 ‘피난처인 성전과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46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로다.

한 시내가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지존하신 하나님의 성전을 기쁘게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며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중략)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46:1-7)

만약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도피성을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성전이 구약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면, 오늘 신약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인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인 브림교회는 ‘우리의 피난처이며, 환난 날에 큰 도움입니다’.

예수님은 게데스라는 도피성이요,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게데스’란 도피성의 이름은 의와 구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죄로 인하여 더렵혀져 있는 우리가 그곳으로 피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하시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그 분을 믿기만 하면 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겜이라 이름하는 피난처이십니다.  세겜은 어깨의 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짐을 그 분께 내려 놓으면 그 분이 그 두 어깨에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 (마 11: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롭고 쓸쓸한 우리들이 피하면 우리와 교제하시는 헤브론이시며, 예수님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우리가 피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시는 골란이시며,  낮고 비천한 자들이 피하면 그를 높여 주시는 라못이 되시며, 끊임없이 사단의 유혹과 공격앞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피하기만 하면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베셀이 되십니다. 그래서,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심지어는 내가 믿었던 그 산들이 모조리 바다에 빠져 버리고, 반대로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켜 산을 흔들게 하여도, 예수님께 피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새벽에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발적인 일로 가득찬 인생

우리들의 인생은 온통 ‘우발적인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과연 몇개나 될까요? 여러분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시면서, 여러분 스스로 계획하고 목표한 대로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몇개나 됩니까? 우리가 목표하고 계획한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또 얼마나 많은 우발적인 일들, 내가 원하지 않던 일들—행운과 불행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때로 무수한 혼란의 연속이 될 때가 많고, 이런 우발적인 사건들이 우리들의 삶에 많은 짐을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나라는 생명체 자체도 무수한 우연한 움직임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계획되지 않는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머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내가 늘 의식적이고, 계획적이고, 어떤 목적에 따라 내가 생각하며 삽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무수히 우발적인 생각의 흐름을 따라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순간적으로 우리 생각의 흐름을 잃어버릴 때가 많고,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망상’ 혹은 ‘잡념’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온통 이런 우발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우발적인 사고로 얼룩져 있고, 이런 우발적인 사고들이 때로 우리들의 삶에 치명타를 주어 도무지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나옵니다. 때로는 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양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특별히 아들을 잃어버린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부모님 곁에서 잘 자라나 주었지만, 두번째 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가슴에 깊은 아픔과 상처를 주고,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그 재산을 갈라 가지고 부모님이 없는 먼 나라에 갔습니다.  그는 분명히 돈을 쓰기 위하여 그곳에 갔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자기 나름 대로 성공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업을 한답시고, 교제를 해야 한다면서 가지고 온 돈을 다 허랑방탕하면서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떨어지니까 그는 남의 집에서 돼지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갑자기 기근까지 들어 결국 그는 돼지 먹이를 먹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이 향락을 목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타 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허랑 방탕하며 살겠다고 작정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목적하지 않은 일들이 그에게 거듭 거듭 나타납니다. 돈이 떨어졌는데 기근까지 겹칩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다가 그는 그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기가 아버지에게 불효하고, 그렇게 못되게 굴었지만 자기 집에 가면 그래도 이런 비참한 생활보다 났지 않을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돌아가자 과연 아버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그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면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유명한 스토리를 떠올리면서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 아들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없었다면 그 아들의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그 아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그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의 삶의 태도로 보아 고생 고생하다 결국 하류 인생으로 그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인생을 역전한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그런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아버지의 집, 그의 위기에서 도망칠 피난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Thomas Andrew Dorsey라는 Jazz 음악가가 있습니다. 1989년 죠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난 복음 성가 작곡가인데 그 분의 대표곡이 ‘Peace in the valley’라는 곡입니다.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녹음을 하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또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저도 이 곡을 들어봤는데 사실 이 곡은 우리들의 정서와는 별로 맞지 않는 곡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활동했던 1930년대에 이 분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많은 거부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의 복음 성가가 ‘너무나 세속적인 사탄의 음악’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이런 평가들이 얼마나 그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리고 있던 부흥회 독창자로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임신한 아내가 갑자기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탄의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임신한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어 버렸습니다. 이 일로 그는 엄청난 슬픔 속에 빠져들었고, 그의 믿음은 뿌리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께 피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Precious Lord’. 입니다.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빛으로 날 인도 하소서”

귀하신 주님, 내 손을 잡아 주소서.

나를 인도하소서, 나를 서게 하소서.

나는 지치고, 약하고, 야위어졌습니다.

폭품우 휘몰아치는 밤을 지나

그 빛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귀하신 주여

내손을 잡으시고 저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그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넘어져도 아무도 그에게 너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가 절망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피하기로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복음 성가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미국의 복음 성가가 그로 부터 출발점을 삼을 만큼, 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큼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피난처이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연으로 가득차서 도무지 우리들 앞에 우리들이 목적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행운이 있는 것처럼, 우발적인 불행도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에 행운이 따르든지, 불행이 따르든지, 이런 모든 종류의 우발적인 일들에 직면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슬플 때 예수님께 피하면 기쁨을 주시고, 우리가 약하고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예수님께 피하면 우리의 모든 짐을 그 어깨에 대신 짊어 주시고, 우리가 외로울 때 그 분께 피하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사 내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가 범죄하여 자책하고 있을 때 그 분께 피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결단: 새벽에 만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분께 피할까요? 시편 46편의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니, 환난 날에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새벽에 우리를 도우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는 길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는 길은 그 분이 계시는 성전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에 도움을 주시는 그 분께 피하고, 그 분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새벽에 주님의 전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이 찬송을 함께 부르면서, 우리가 새벽에 하나님께 피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피하고, 성소로 피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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