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5.금요기도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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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
구역연합예배ㅇ
(헌금)
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4장 10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구약86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특송 : 3교구 특송있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지난 시간 우리는 모세가 살인하고 미디안으로 쫓겨난 사건을 통해 나타난 모세의 정체성문제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잘 살게 만드는 문제를 다루는 애굽사람임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게르솜을 낳고 한 말을 통해 자신이 이제는 애굽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닌 이방땅에 사는 이방인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약속의 땅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을 원하시지만, 전혀 다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임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은혜를 알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에게 노하셨을까요. 함께 본문을 나누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본론
오늘 본문에서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면, 모세가 등장하거나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모세’라는 이름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인지는 6절에 가서야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라고 되어있지만 히브리어에는 단순히 그가 말했다라고만 적혀있습니다. 반면 모세가 말할 때나 등장할 때는 항상 모세라는 이름이 쓰입니다. 그러면,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모세라는 이름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그때는 종이가 귀함. 문맹도 많음) 오늘 말씀은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세라는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구성되었다는 뜻입니다.(우리말은 편의성 때문에 생략).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데, 정작 모세는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문제, 단 한번도 이스라엘인이 되어본적이 없는 모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10절은 모세의 핑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시겠다고 했고, 이적까지 보이시자, 모세는 더 이상 하나님께 뻗뻗하게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모세가 하나님께 말할 때, 앞에 ‘오 주여’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이 말은 왕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말을 할 때, 먼저 허락을 구하는 표현입니다. 즉, 좀더 예의를 갖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예배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었지만, 속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본 모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핑계를 댄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듯이 자신은 말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셨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호렙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내산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알고 간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양떼가 먹을 풀을 찾아 광야 깊숙이 들어가다보니 도착한 곳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으로 모세를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양치기로 있게 한 것도 하나님이시고, 오직 양떼를 위해서 미디안의 서쪽, 광야 깊숙한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탈굼은 모세가 간 미디안의 서쪽 방향이 그가 보통 양을 치는 루트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그런 주요한 루트를 벗어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변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 답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지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특히 12절에는 하나님께서 너의 입에 함께 있겠다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호렙산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임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 천사를 보내어 떨기나무를 예비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불이 붙었지만 타지않는 그 떨기나무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를 하나님의 곁으로 이끄십니다.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정의 공통점은 모두 자연스럽게 모세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때처럼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명하여 호렙산으로 오라고 했다면, 모세가 따랐을까요. 이후에 나타난 모세의 반응을 보면,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매우 단호합니다.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답합니다. 이 말을 원문그대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 오 주여 제발 보낼 손을 보내소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직역하지 않고 오 주여 주님이 원하시는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해석을 합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요?
모세를 모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올 수있도록 모든 상황을 이끄셨습니다.
모세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먼저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으라는 말로서, 모세를 준비시키십니다. 신을 벗으라는 말은 예배, 섬김을 뜻합니다. 당시 종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 말중에는 발에 신을 신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방의 제사장들은 제사를 할 때 누드로 했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신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를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그저 양치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살게될 모세를 가장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을 통해 지금 모세가 보는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십니다. 그저 이름없는 신,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택하고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왜냐면 3장 20절에서 바로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치겠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손을 들어라는 표현이 바로 손을 보낸다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일상적으로 다니던 그 길에서 벗어나 호렙산까지 오게 하시고,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게 하시고, 그 앞에서 신을 벗어 예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변화시김에 앞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한마디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한 표현 그대로 다시 하나님께 말한 것입니다. 보통 말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싸울 때,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세가 말을 잘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가기 싫은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뜻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고 이제 80세의 미디안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미디안중에서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미디안의 주 사업은 무역과 광업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인들은 광야라는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에 많은 무역을 했다고 합니다. 요셉을 애굽에 판 자들도 미디안인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는 많은 귀금속과 광물들이 났기 때문에 그것들을 채굴해서 파는 광산업이 주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디안은 환경은 좋지 않지만 부유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모세의 상황을 다시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당시 엄청난 성세를 떨치던 애굽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애굽사람을 죽인 것으로 볼 때, 무예도 전수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미디안에 와서 한 것은 양치기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미디안의 주요산업은 목축이 아니라 중계무역과 광업입니다. 양치기란 정말 하층민들이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이드로는 그에게 양치기를 시켰을까요? 아마 모세가 저지른 살인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모든 국가들도 애굽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실제 가나안 정복전쟁 당시 발견된 문서를 보면, 가나안민족들이 애굽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문서도 있습니다. 중계무역이 주인 미디안에서 모세가 두각을 나타낸다면, 당연히 애굽에 모세의 위치가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모세에게 양치기를 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모세를 중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출애굽기 18장에서 이드로가 모세의 부인과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모세가 모든 재판을 직접 하는 것을 보고 체계를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40년동안 이드로는 모세에게 어떤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오직 양을 치기 위한 지식말고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이드로는 결코 모세에게 높은 직위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상업도 채광도 아닌 목축을 하고 있는 모세는 사회의 비주류중에 비주류라 할 수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집에 딸린 양치기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처음에는 자신이 결혼하고 자식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둘째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하지만 40년간 양치기를 했습니다. 양을 치러 나가면 미디안 광야의 특성상 풀을 찾아 계속 이동을 해야 합니다. 며칠씩 노숙을 해야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양치기를 하며, 홀로 밤을 보낼 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서 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나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신이 본 것, 자신이 들은 것에 따라 움직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보시고 들으신 것, 그래서 결정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들으시고 아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도망가기전 잠시 보고 들은 것, 그래서 조금 알게된 그 지식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과 결과까지 완전히 꿰뚫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과연 모세가 편하게 잠을 잘수 있었을까요. 3장 1절에서 나온 것과 같이 80세가 되었는데도, 자기 소유의 양떼 하나 없이 끝까지 소위 삯꾼으로 부려먹히던 모세였습니다. 물론 이드로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를 받아주고 애굽으로부터 숨겨주고, 딸을 주고 살 곳을 주었다는 것만해도 그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일방적으로 움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입장이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애굽인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노릇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십니다. 8절 처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내가 내려가서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가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내려가다와 마지막에 데려가다는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올라오게 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애굽의 나날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큰 일이 벌어지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그래서 지금도 그 여파로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이 계속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분명 모세는 수많은 밤을 근심과 울분, 한을 삭히며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올라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에 함께 하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걷자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는 말은 모세의 한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정말로 말을 못한다기 보다는, 40년의 세월중 수많은 나날을 홀로 광야에서 보내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한이 어린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모세를 향해 이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며 14절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4절의 핵심은 아론입니다. 아론이 말을 잘하고 그가 모세를 이미 만나러 나오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개역개정을 제외하고 4개는 모두 이렇게 번역). 그리고 이미 아론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27절에서 아론이 하나님의 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이야기하는 이 산에서 모세를 만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며, 직접 내려왔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애굽땅으로 가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까. 단순히 모세가 순종하지 않아서 진노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마치 사탄이 아담을 유혹할 때 햇듯이 그대로 받아서 말하고 있어서 진노하십니까.
그러나 그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제가 누구인데 그걸 하겠습니까”입니다.
그것보다 모세가 자신에게 갇혀있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형제들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광야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과 이방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나그네가 되었다는 것은 모세가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는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40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밤을 한숨과 울분속에서 지새웠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호화로운 잠자리가 아닌, 유목민의 천막에 누워서 탄식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지명수배자입니다. 바로 앞에는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셨고,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살인자, 실패한 혁명가, 양치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언자로 부르시고,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신이 행했던 실패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 아론이 지금 그를 만나기위해 오고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세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은 쫓겨나고 버림받고 숨어 이방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모세를 버렸다면, 모세를 잊었다면,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아론이 기쁨으로 가득차서 모세를 만나러 올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애굽의 노예민족이라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힘들었을 텐데, 호렙산까지 그 광야길을 80이 넘은 노인이 기쁨으로 올 수 있었을까요.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뭐라 대답하십니까. 모세에게 넌 실패자가 아니야. 넌 살인자가 아니야. 넌 단순한 양치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까. 그저 한마디만 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애써서 모세가 누구인지, 모세의 정체성이 세계관이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음만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은 아론뿐만 아니라 모세의 가족이 모세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모세가 처음에 물에 버려졌을 때, 모세를 구할수 없어 지켜보았던 것처럼, 그의 가족들이 모세를 잊지 않고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언자로, 선지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대변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을 대변하게 한 단체나 인물의 생각입니다. 자신을 보낸 단체나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대변인의 위치가 달라지고, 대우가 달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하시고 보내십니다. 단순히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십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살인자이든, 실패자이든, 40년간 양만친 일개 양치기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의 곁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가 하는 말과 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혼자 생각하며 혼자 상상하며, 버림받았고, 소망이 없다고 낙심하고 한을 품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대로 그는 이방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역시 계속 그를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모세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나를 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가 쌓아져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일, 할수 없는 일을 판단합니다. 스스로 틀을 만들고 그 틀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순종으로 진노하실 것이었으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애굽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애굽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모세가 자신의 시야,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고, 자신의 형제를 보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인데, 그 한가지조차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나오라 하십니다. 모세를 일상적인 루틴에서 벗어나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그에게 신을 벗게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여 경외함으로 예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을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16절에 모세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론이 장자인데 모세가 아론보다 훨씬 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쫓겨나기 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길 꿈꿨던, 그 꿈을 이루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럼에도 내가 만든 우물속에 있으려 할 때 있지 않습니까.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면서도 저 떨기나무는 불타지 않지만 나는 불탈걸야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로 지팡이를 말씀하십니다. 이적을 일으킨 지팡이를 손에 잡고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가 누구인지 굳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역시 삶의 곤고함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잠이 들수 없는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내 능력이 어떤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셨고,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보지 못하여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모든 만물의 유지가 그분께 달려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변하지 않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보며 기도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절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내 좁은 시야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넓은 은혜의 바다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황이 아닌 하나님의 어떠함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감으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
기도제목(간단하게)
말씀을 기억하며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있을 부흥회를 위해
교육부서를 위해 특별히 11월 14일에 있을 수능을 위해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환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광고
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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