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ng that be never fogo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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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 (욥기 19:25-29)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때로 우리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내 자신을 ‘행운아’라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왜 나에게 이런 행운이 왔을까, 그 원인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나, 불행한 일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몸에 질병이 생겼습니다. 사업이 잘 안됩니다. 실직을 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합니다. 그럴 때는 그것이 나에게 무척 아프고 견디기 힘 들기 때문에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지난 수요일에 우리는 ‘야고보 사도’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10년쯤 후에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 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때는 그저 순교했나 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 분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핵심 제자 중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던 수 만명의 사람들 중에서 단지 12명을 그 분의 제자로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것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직분인지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랐던 12명의 핵심 제자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inner circle이라고 해서 핵심 제자 중에 핵심입니다. 이 3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장 비밀한 것, 예수님의 가장 영광스럽거나, 가장 인간적인 부분까지 다 보여 주셨던 제자들입니다. 야고보는 베드로를 첫째 제자라고 불렀을 때, 그 제자들의 명단에 2번째로 이름을 올린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얼마나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고보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의 사역이 막 확장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그렇게 힘들게 훈련시킨 보람도 없이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죽이실 야고보를 그렇게 3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아끼시면서 훈련을 시키셨을까? 야고보가 살아 있었다면 베드로나 요한 사도 못지 않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었을 텐데, 왜 사역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야고보 사도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이런 부분들은 도저히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은 왜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은 이 부분을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불행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욥도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욥에게 일어난 그런 불행한 일이 그의 잘못과 실수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의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양이 7천마리, 낙타가 3천마리, 소가 1천마리, 암나귀가 오백마리… 그의 사업장은 많은 고용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행복한 가정 그 자체였습니다.

아들 7명에 딸이 3명 있었는데 그들은 생일이든, 뭐든 가족사가 있으면 언제나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그저 화목하고 우애 있게 살았습니다.

또 신앙 생활도 나무랄 데 없이 잘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한번도 예물을 빼놓지 않고 드렸습니다. 혹시, 부지 중에 잘못을 저지를까, 부지중에 불경한 일을 행할까 예상해서 또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정적으로, 세상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던 욥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쌓아 올렸던 인생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재산이 다 날라갔습니다. 자식들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또 욥의 건강이 무너져서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병든 욥을 내 팽개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욥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왔지만, 욥에게 돌리는 신망과 존경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이 욥기 기자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인생의 불행은 죄로 인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인생의 불행이 우리가 자초할 때가 많이 있고, 이 때문에 우리는 종종 ‘내가 내 발등을 찍었어’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행 앞에서 우리는 그 불행의 화살을 남에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잘못이나, 내 실수나, 죄 때문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은 욥의 생각이었고, 욥의 세 친구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엘리바스라는 친구는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 인간의 죄와 악이 재난을 가져온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닷은 경험주의자요, 전통주의자였습니다. 우리 과거 선조들의 신앙과 이런 경험들을 통해 보면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소발은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볼 때 ‘의로운 사람을 벌하시는 그런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불행은 죄로부터 오며,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구원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하나님은 상을 주시고, 죄인을 벌하시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에 욥은 자신의 불행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서 욥의 3친구나 욥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 또 경험에서 볼 때, 그리고 신학적으로 볼 때 인생의 불행은 인간의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행 앞에서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내 자신’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은 없는지, 사람 앞에 실수한 것은 없는지 항상 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당시 유대의 통치자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잘 보여서 자기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야고보 사도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못된 죄를 저지르는 흉악한 그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이샤라에 있는 여름 궁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와 있던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배알하기 위하여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와 함께 전차 경주를 구경하면서 갖은 아양을 다 떨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전차 경기장에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안개가 가득 끼더니 헤롯 아그립바 1세 앞에 올빼미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이 올빼는 성경에서 보면 언제나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고, 파괴된 곳에 날라 다닙니다. 이런 올빼미가 나타나서 당신은 5일 안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 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그립바는 가슴과 복부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하면서 땅바닥에서 뒹굴었습니다. 결국 그는 5일 후에 심장 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불행은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경험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진리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 백성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로마 황제 앞에서 그렇게 갖은 아양을 떨던 그가 그 권력을 유지 하지 못한 채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는 아그립바의 죽음을 계기로 분봉왕 제도를 없애 버리고 총독제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불행이 찾아오고, 힘든 일이 찾아올 때 혹시 우리들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범죄한 것이 없는지 되돌아 보고,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회개하면 됩니다. 우리들의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흰눈 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시며,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기억 조차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때로 우리 안에 고백 되어지지 않은 죄들, 내 가슴에 품고 있는 죄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상처를 만들어 내고, 심하면 육체의 질병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이것이 전염되어 하는 모든 일들이 꼬이게 됩니다.

이 모든 불행한 일에서 벗어날 아주 간단한 길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은밀한 가운데 은밀한 죄들을 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인생의 불행이 나의 죄 때문에 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욥기에서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욥기 저자가 욥기를 시작하면서 욥의 의로움에 대해 우리에게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욥의 불행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 시키기 위함입니다. 때로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시험으로서 불행을 참고 견디고 통과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되고, 더욱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를 넘어지게 해서, 죄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사단의 유혹 때문에 불행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경우 입니다. 욥은 세상이 인정하는 의인이었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신뢰를 시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을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단은 욥을 실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망하게 합니다. 화목했던 가정을 깨트려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망과 사람들에게 얻은 모든 의리를 다 잃게 합니다.

욥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셨고,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면서 골고다 언덕에 끌려가 거기에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사형 형벌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분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처럼 때로 우리들에게 당하는 형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일 수도 있고, 사단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행을 만난 이웃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비난이나 정죄를 삼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불행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뭔가 ‘충고할 말을 찾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충고하기 보다 위로해야 합니다. 특히 아내들이 이렇게 하기 쉽습니다. 남편이 매우 힘들고 어려워서 토로할 때 대부분의 아내들은 뭔가 충고할 말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충고가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것은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욥에게 찾아온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불행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유혹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한 욥의 친구들은 욥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욥을 두번 죽입니다. 욥의 친구들 말은 아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경험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바른 말이 욥에게, 특정한 개인에게는 예외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 하고,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53장에서 예언한 것 처럼,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4절)”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은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리던 강도 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고, 병들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을 때 …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고 (4절)…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약함 때문에 상처를 받으셨는데 (5절)…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가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충고나 정죄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바른 말을 하고도 꾸중을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황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3친구들에게 수송아지 7마리와 수양 7마리를 욥에게 가지고 가서 번제를 드리고 용서를 빌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앞으로는 누군가가 힘들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Conclusion

그런데 나에게 이 불행이 찾아 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쩌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이 불행이 찾아 왔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나 실수한 것이 없는데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애매히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나에게 뒤짚어 씌우고, 사기를 치고 달아 났습니다. 내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만약 혹시 우리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다면 설혹 내가 죄를 지어서, 그 죄값을 치루고 있다고 할찌라도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욥은 오늘 본문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비록 이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이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 살갗이 다 썩을지라도 또 죽어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우리가 만약 나의 불행 속에서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이든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든지, 아니면 사단의 유혹 때문이든지 그 이유는 상관 없습니다. 어떤 불행 속에서라도 불 같은 시험 속에 있다할 찌라도 우리가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며 참고, 인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고, 성공시키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참고 기다린 천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엘버트 아인슈타인은 네 살까지 말을 못하고 일곱 살까지 글을 읽지 못했다. 베토벤은 음악 교사에게 '작곡가가 될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디즈니랜드를 세운 월트 디즈니는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낙제생이었고, 파스퇴르는 대학 다닐 때 화학을 못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중학교 때 낙제생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어려움과 불행들이 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거기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참고 견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공을 하려면 3p가 있어야 한다는데, practice, peace와 더불어 그 중 한 p가 Patience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회복시키시고, 성공시키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의 어려움을 잘 참고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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