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6.수요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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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종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202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방재숙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4장 18절에서 26절 말씀입니다. 구약 87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다보면 이럴 때, 하나님께서 나서셔서 해결해주시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때가 참 많습니다. 주위 환경부터 시작해서 나 자신의 마음이나 태도까지 그런 영역도 참 다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지 않으실까요? 본문을 보며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 반문하고 그 반문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질문은 많은 원망을 담은 질문입니다. 인생을 살며,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중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모세의 질문은 그런 우리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질문에 가장 깊고 세세하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알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본론
본론
본문 18절은 이드로에게 돌아가 간청하는 모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자신이 왜 애굽으로 돌아가려하는지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드로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만 합니다.
모세의 정체성을 바꾸며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13절에 보다시피 매우 시니컬합니다.
그리고 18절의 분위기 자체가 앞서 말했다시피 모세가 이드로에게 간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말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발이라는 말도 있고, 가게 하소서라는 표현자체도 사위가 장인에게 할 표현은 아닙니다. 18절에 나온 둘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라기보다는 주인과 종에 가깝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가야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님께서 부르심조차 말하지 못합니다. 감히 제사장인 이드로가 아닌 한낱 양치기에 불과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둘의 관계가 주인과 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3절에 우리말 번역에 빠져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소서’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13절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계속 종으로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어떤 자가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모세가 그 하나님께 말했다.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내가 그들에게 너희의 조상들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내게 그의 이름이 뭐냐고 말할텐데 저가 그들에게 뭐라 말해야 합니까?”
본문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이 질문이 정말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입장에서 묻는 질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이제 제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백성들에게 가야하는데, 그 백성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인도하여야 합니까. 라고 공손하게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세가 돌려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걸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당신 뭔데?”입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세가 저지른 죄가 이제 무효화되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그의 이름이 뭐냐라는 질문은 그가 뭘 할수 있냐?라는 말로 바꿀수 있습니다. WBC라고 유명한 주석은 아예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왜냐면 신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그 신의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시 신들은 모두다 자기만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태양신이 있고 달의 신이 있습니다. 바다의 신도 있고 땅의 신도 있고 하늘의 신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름은 그 신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온 위치가 참 묘합니다. 모세가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모세는 애굽에 가면 잡혀서 죽을수도 있는데, 그 위협을 무릅쓰고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이드로에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다면, 모세는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드로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목숨의 위협을 각오하고 애굽행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완전히 확정되어서 무를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도 생명이 위협받는 일은 전혀없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의 선후를 바꾸셨을까요? 바로 모세가 변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위협을 감수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면 모세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돌이가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자로서 배운 것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었고, 그의 무력이 괜찮기 때문에 광야에서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모세의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왜냐면 모세의 입장에서 조상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방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오랜 세월동안 이집트에 의해서 고통당하고 있고, 수많은 아기가 물에 빠져 죽을 때도 침묵했던 무능력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저 족장들 몇 명만 믿었던 신입니다. 또한 지금은 광야 한 가운데서 아무도 없는 산에, 떨기나무 하나에만 영향을 미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단순히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로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대화하며 고와 낙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되시기를 원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내가 이 꼴이 되고, 이스라엘이 노예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했냐고 묻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반자는 등을 기댈수 있는 사람입니다. 위협이 오면 마음을 모아 함께 극복해가야하는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출애굽,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가 되시기를 바랬습니다. 이제 종이 아니라 동반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자신의 생명의 위협보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 위협은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우상들을 섬겼다는 것을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내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아파할 때, 외면했던 분이 아니냐라고 이집트의 신들만 못한 분이 아니냐라고 하나님께 온갖 원망을 담아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모세가 11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며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했던 것을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11절에서 ‘내가 누구이기에’는 나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모세의 질문, 그의 이름은 무엇이냐는 당신은 누구이고, 당신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이런 큰 일을 할 수 있느냐라는 원망어린 질문인 것입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는 3장 19절과 20절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과 그 결과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13절에서 모세가 ‘그 하나님께’ 말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반대로 14절에서는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모세의 이런 질문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옳은 태도인지를 은연중에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완악하게 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강하게 하다, 단단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음 단디 먹어라’라는 표현을 쓰죠.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런 모세의 원망어린, 그리고 의심어린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알맞은 대답을 주십니다.
본문의 내용상으로 보면,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하는 자는 바로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바로의 마음은 단단하게 만드시면서 모세의 마음에는 그러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하셨듯이 모세의 마음을 강하고 단단하게 하셨다면, 처음에 부르실 때부터 모세가 하나님을 그렇게 거부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이드로앞에서 저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27절의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우리 말로는 이 이름의 뜻은 홀로 존재하시는 완전한 분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창조되었고 근원이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 심지어 신들역시도 근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존재하시지 않는 영원 불변하는 스스로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은 단단하게 하시지만, 모세의 마음은 건드리지 않으십니다. 모세 스스로 마음을 강하고 단단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위해 계속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이 이름은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해석을 다르게 하면 여러 가지가 되는데, 가장 단순하게 해석하면, 나는 나다입니다. 그리고 새번역에는 각주를 달아서 ‘나는 되고자하는 대로 될 나다’ 라고 해석합니다. 왜냐면 이 이름은 미완료라는 끝나지 않는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그 의미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해석대로 영원불변이며, 그 스스로 있으신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나됨은 나임이다. 나될 것이 나임일 것이다.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이것은 무엇이든지 될수 있으며 어떤 것도 할 수 있지만, 결코 변하지 않고 구별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 하나님의 이름 4글자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심, 편재하심, 전지전능하심을 한번에 담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에 그분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며,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신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만물이 신이라 결코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 불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확실하게 구별하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심으로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고, 하나님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초월해계시지 않고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며,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종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지었던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의대로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동반자이기에 모세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굳게 서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모세의 의심어린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매우 단순하지만 가장 잘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2절과 23절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모세에게 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니 장자, 황태자가 죽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하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드로 앞에서도 벌벌떠는 모세가 과연 바로 앞에서 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갈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의 돌판을 던져서 부셔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도록 간청합니다. 둘다 종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장자인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함을 아파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모세의 약함과 악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24절부터 27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5절을 통해 이런 하나님께서 바로 너희의 아버지들의 하나님이심을 다시한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섬기는 모든 것보다 위에 계신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며, 이제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단순히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20절에 그 계기가 적혀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안에서 모든 자들이 살아있으며, 그 아버지들, 조상들도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고통당하고, 그 이해할 수도 인정할수도 없는 고통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자녀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모든 고통을 품어주시고 그들의 모든 눈물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절에는 2가지가 따로 적혀있습니다. 모세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이 두문장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상으로 이 두문장은 동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모세에게는 가족이나 하나님이나 똑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후 말씀은 의심어린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 모든 일어날 일들을 자세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너가 의심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너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것이다. 순조롭게 바로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가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 내 손이 뻗어져서, 20절 표현 내손을 들어 그나라를 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빈손으로, 가난하게 가는 것이 아닌, 애굽의 보물들을 약탈하여 풍족하게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동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서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20절은 모세에게 가족이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 같은 길을 걸어갈 자로서 합당한 마음가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24절 후반절을 번역하면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죽이기 위해 찾으셨다’라고 됩니다. 개역개정에는 모세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죽이려는 대상이 모세인지, 모세의 장자 게르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어의 어순상으로는 모세의 장자를 죽이려했다고 보는게 더 맞는 표현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하셨던 대상이 모세이든지 게르솜이든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의 안위를 더욱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백성을 압제한 애굽이 받을 댓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4에서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습니다. 8절처럼 건지심을 받습니다. 애굽은 약탈을 당합니다. 취함을 당합니다. 22절에서 취하리라라는 단어는 약탈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8절에서 건지다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의 뜻의 떼어내다 찟어내다라는 뜻입니다. 물에 의해 붙잡혀 있는 사람을 건지다라고 쓰입니다. 즉, 압제자의 손에서, 죄의 사슬에 의해 붙잡혀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손은 그의 손을 찢어내어서라도 그의 자녀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자녀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에게는 찢어내는 손길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힘을 가졌든지,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불위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찢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분명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을 더 중하게 여기고 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분명 같은 손이며, 같은 일을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손길,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손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25절에서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시키는 장면에서, 히브리어는 ‘그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세의 아들이 아니라 십보라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족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물론 정말 인연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이제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욱 중요시 여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있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던 바로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저 기적의 역사를 눈앞에서 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세의 요청,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바로와 똑같습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동반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는 것이 모세에게는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계속해서 권면하며, 모세의 불만과 원망을 받아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왜냐면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애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속에서 살다가 잠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세상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자리는 모든 곳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영적 전투의 자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
그래서 서두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상황도, 사람도, 내 마음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까닥하시고, 입김한번 후 불면 끝날텐데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임재하신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항상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변화시켰지만 우리는 변화시키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뜻, 마음을 느끼고, 한 마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할 때도, 그래서 믿음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실족할 때도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것에서 우리를 떼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우리가 실족할 때도, 세상의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강하게 느껴질 때도, 그래서 좌절해서 낙심해 있을 때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위로하시고 다시한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드로앞에서도 위축되었던 모세가 바로에게 협박할 수 있는 자가 되었듯이, 우리가 당당히 서서 하나님의 빛을 온 땅에 뿜어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원한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심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안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항상 구원의 손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힘이 드십니까. 고난이 찾아옵니까. 쉽게 되는 일이 없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습니까.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악과 붙고 세상의 모든 논리와 하나되어서 하나님을 시험하며, 흔드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찢는 손길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하나님의 손길을 찢는 손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당장은 이해되지 않은 일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 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라나고 변화되었듯이, 우리를 그 풍성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안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우리의 자녀들도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위로속에서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잇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은혜를 믿고, 그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 11월 11일월요일부터 14일 목요일새벽까지 부흥회가 있습니다. 기도로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3여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 특송은 5교구입니다.
ㅇ1-8여전도회 11월 한달 연속철야기도가 있습니다. 빠지는 기관없이 모두 다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ㅇ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결혼소식입니다.
감천2구역 심우술 안순남 집사님의 장남 심재윤군의 결혼식이 10월 19일 토요일 오후 1시에 JW웨딩컨벤션센터 4층 그랜드볼룸에서 있습니다.
교회출발은 오전 11시 30분입니다.
함께하실분은 11시 30분까지 교회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16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