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4)
공감하여 위로해 주신 주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1 views주님이 나인 성의 과부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해 주신 사건
Notes
Transcript
다른 사람의 일을 충분히 공감하며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같이 나누어가지는 일은 참 어렵다
다른 사람의 일을 충분히 공감하며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같이 나누어가지는 일은 참 어렵다
많은 상담가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한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도 표면적인 공감일 때가 많다
기독교상담가들이나 목회자들 역시나 ‘다른 이의 마음을 공감한다’고는 하지만 그 일이 쉽지가 않다
본문을 보면 ‘주님이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위로 받아야 할 여인을 만나주셨다
주님이 계셨던 ‘가버나움’에서 ‘나인성’까지의 거리는 약 40km정도이니 ‘걸어서 약 10시간’정도 걸린다
적어도 주님과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하루 이상을 걸어가야만 도착하는 거리였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낫게 한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하루이상을 걸어서 나인성’으로 갔다
왜 그 먼 거리를 걸어가셨을까요? 그 나인성에 ‘주님의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한 여인’이 있어서였다
그때 나인성에는 ‘하나뿐이었던 아들이 죽어 깊은 슬픔에 빠진 과부’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잃은 후에 하나뿐이었던 아들마저 죽어버린 한 과부의 슬픔이 나인성을 가득메우고 있었다
12b절을 보면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왔다”고 하는 걸 보면 ‘나인성의 많은 사람들’이 이 과부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깊은 절망으로 슬퍼하는 나인성에 ‘주님이 많은 무리와 함께 도착’하셨다
12a절에는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고 했다
그냥 한 사람이 죽은 단순한 장례식 행렬이 아니었다
한 젊은 아들의 죽음이 ‘나인 성 모든 사람에게 깊은 절망을 가져다 주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말로 그 아들을 잃어버린 과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정말 어떤 위로의 말이 이 과부의 슬픔과 절망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를 누가 쉽게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이런 깊은 슬픔으로 절망하게 될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 과부에게 일어난 비극처럼 ‘깊은 슬픔과 절망의 사건’이 생겼을 때 ‘누가 어떻게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몇 마디 말로 공감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EX) 수년 전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SFC후배’의 비극적인 사건...
EX)어린 아들을 먼저 보내었던 ‘동기목사님 부부의 슬픔’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그 아픔과 절망과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을 위로하시는 모습을 통해 장차 우리의 아픔에도 동일하게 공감하시며 위로해 주실 주님의 마음을 마음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공감과 위로의 주님이 아들을 잃은 여인의 마음을 공감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울지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공감과 위로의 주님이 아들을 잃은 여인의 마음을 공감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울지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공감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찬성하여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마음이나 행동의 표현’이다
주님은 ‘아들을 잃은 과부의 장례식 행렬’을 보기 위해 하루 이상의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왔다
13절에는 “불쌍히 여겼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애타는 마음으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게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애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리킨다
주님이 이 과부의 형편을 보고 느끼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이 ‘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애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지면 ‘울다가 울다가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또 아플 때’가 있다
그렇게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슬픈 과부의 심정을 ‘주님도 똑같은 마음’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프고 아픈 마음을 느끼며 주님이 하신 말이 “여인이여 울지 말라”는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아픈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고작 하신다는 말이 “울지 말라”는 말일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4절에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행동을 보면 ‘울지 말라’는 말이 허튼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주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신 후에 그 여인이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을 ‘공감하고 위로한답시고 섣부른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는 경우가 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울지 말라’고 하면 그건 그 사람을 더 괴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그 사람이 울지 않아도 될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울지 말라’는 위로가 효력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냥 슬퍼하는 그 사람과 함께 ‘눈물 흘리며 슬퍼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무런 말하지 않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의 곁에서 함께 공감하며 울어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섣부르게 그 사람의 슬픔을 공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튼 말로 위로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남편을 잃은 과부가 하나 뿐인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괴로워할 때 그 여인의 마음을 위로해 줄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의 주님이 그 여인의 고통을 ‘마음 깊이 공감하시면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다
말로만의 위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어 행렬을 멈춘 후”에 관에 누운 청년을 향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과부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죽어 그 시체가 든 관을 옮기는 현장에서 주님이 ‘그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이다
아들이 죽어 절망에 빠진 여인에게 ‘그 죽은 아들을 살려서 되돌려주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더는 울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그 여인의 마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 앞에 누가 슬픔에 빠져 울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먼저 그 사람이 왜 울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왜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우는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사람이 슬픔에 빠져 울 때는 반드시 ‘울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슬픔을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 사람의 우는 이유를 알았다면 다음에는 무얼 해야 할까요?
이유를 알았으니 당연히 ‘그 슬퍼하게 만든 일에 해결책’을 찾아주어야 한다
이유만 알았다고 슬픔에 대해 공감만 해 주었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슬퍼하는 이유에 대한 이유를 알았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한 여인의 아픔을 보시고 그 여인의 슬픔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분히 공감해 주셨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공감만 하신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여인의 슬픔에 대한 이유를 찾아 해결해 주셨다
물론 주님은 ‘죽은 아들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에 ‘공감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셨다면 그 사람의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능력의 주님에게 기도’할 수 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깊은 공감의 마음과 위로하시는 기적’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그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며 그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그 누군가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함께 공감하며 그 슬픔을 함께 해결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