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7.수요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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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183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오명옥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5장 1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구약 88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오늘 본문은 모세와 아론이 첫 번째로 바로 앞에 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바로 앞에서 누구를 두려워했을까요. 본문을 살펴보며, 모세와 아론의 모습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다보면 이럴 때, 하나님께서 나서셔서 해결해주시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때가 참 많습니다. 주위 환경부터 시작해서 나 자신의 마음이나 태도까지 그런 영역도 참 다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지 않으실까요? 본문을 보며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본문은 바로와의 대담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바로 앞에 처음으로 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절의 내용은 :18절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해라 하는 것을 전했습니다. 몇가지 빠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빠진 부분은 3절에서 다시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론
2절에서 바로의 반응역시 매우 당연한 반응입니다. 노예들이 갑자기 듣도보도 못한 신의 이름을 대며 제사하러 가겠다고 3일길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주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본문 18절은 이드로에게 돌아가 간청하는 모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자신이 왜 애굽으로 돌아가려하는지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드로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만 합니다.
특히 광야에서 3일길이면 이미 쫓는게 불가능합니다. 3일길을 가게 하라는 것을 우리를 해방시켜달라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그리고 18절의 분위기 자체가 앞서 말했다시피 모세가 이드로에게 간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말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발이라는 말도 있고, 가게 하소서라는 표현자체도 사위가 장인에게 할 표현은 아닙니다. 18절에 나온 둘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라기보다는 주인과 종에 가깝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가야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님께서 부르심조차 말하지 못합니다. 감히 제사장인 이드로가 아닌 한낱 양치기에 불과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둘의 관계가 주인과 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2절의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3절 후반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계속 종으로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어떤 자가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라는 구절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19에 누굴친다고 합니까. 바로를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침을 당한다고 합니다.
본문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을 함으로써,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걸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세가 저지른 죄가 이제 무효화되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커녕 소위 말해 자기 밥그릇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4절에서 애굽왕은 비웃고 있습니다. 4절의 내용은 ‘백성의 일보다 너희는 일이 가볍고 편한가보지? 내가 보기엔 너희가 할 일이 더 힘들거 같은데?“라는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온 위치가 참 묘합니다. 모세가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모세는 애굽에 가면 잡혀서 죽을수도 있는데, 그 위협을 무릅쓰고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이드로에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다면, 모세는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드로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목숨의 위협을 각오하고 애굽행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완전히 확정되어서 무를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도 생명이 위협받는 일은 전혀없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로는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힘들게 만듬으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딱 바로의 빈정거림 그대로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의 선후를 바꾸셨을까요? 바로 모세가 변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위협을 감수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그대로 애굽인의 왕 바로에서 애굽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왕, 애굽왕이 된 것입니다. 바로를 애굽왕으로 높여준 것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아론의 비굴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종처럼 행동했기에, 그들은 민족 전체를 팔아먹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단순히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로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대화하며 고와 낙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2절에서 물어볼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더 초점을 맞춥니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함은 결국 자기 자신만 비굴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무시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반자는 등을 기댈수 있는 사람입니다. 위협이 오면 마음을 모아 함께 극복해가야하는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당할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출애굽,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가 되시기를 바랬습니다. 이제 종이 아니라 동반자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자신의 생명의 위협보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 위협은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창12장에는 아브람이 사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간 일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애굽왕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사래를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뿐입니까. 요셉의 일도 있습니다. 풍년과 흉년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조차 하나님보다 못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왜 모세와 아론은 4절에서 애굽왕이 그렇게 빈정거릴 때,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지 못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 바로가 무서웠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비틀어서 전했습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는 3장 19절과 20절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과 그 결과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만약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아브람과 사래의 일과 요셉의 일을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우리말로 완악하게 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강하게 하다, 단단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음 단디 먹어라’라는 표현을 쓰죠.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6절처럼 그날 당장 감독관을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괴롭히려고 했을까요? 아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왕실의 기록을 뒤져서 사실인지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인 것을 알고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빈정거리고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을테니까요.
본문의 내용상으로 보면,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하는 자는 바로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바로의 마음은 단단하게 만드시면서 모세의 마음에는 그러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하셨듯이 모세의 마음을 강하고 단단하게 하셨다면, 처음에 부르실 때부터 모세가 하나님을 그렇게 거부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이드로앞에서 저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27절의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너무나 비굴했기 때문에, 바로는 너무나 쉽게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은 단단하게 하시지만, 모세의 마음은 건드리지 않으십니다. 모세 스스로 마음을 강하고 단단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위해 계속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절처럼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종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지었던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의대로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동반자이기에 모세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굳게 서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한가지 효과를 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결과를 노립니다.
먼저 7절에서 나오는 가서 짚을 모으게 하라는 것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은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요청은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애굽땅으로 가서 애굽사람을 위해 짚을 모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모세와 아론,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대처할래라고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과 23절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모세에게 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니 장자, 황태자가 죽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하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드로 앞에서도 벌벌떠는 모세가 과연 바로 앞에서 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갈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의 돌판을 던져서 부셔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도록 간청합니다. 둘다 종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장자인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함을 아파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또한 9절에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24절부터 27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않게하라 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소망이나 의견을 부정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순전히 모세와 아론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단순히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20절에 그 계기가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짓말이라고 말함으로 이런 뜻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쫓겨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게 하려는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는 2가지가 따로 적혀있습니다. 모세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이 두문장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상으로 이 두문장은 동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모세에게는 가족이나 하나님이나 똑같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8절까지는 백성, 그들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9절에 그사람들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쫓아낸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냥 사람이 되길 바라며 쓴 표현입니다.
동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서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20절은 모세에게 가족이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 같은 길을 걸어갈 자로서 합당한 마음가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적용
24절 후반절을 번역하면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죽이기 위해 찾으셨다’라고 됩니다. 개역개정에는 모세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죽이려는 대상이 모세인지, 모세의 장자 게르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어의 어순상으로는 모세의 장자를 죽이려했다고 보는게 더 맞는 표현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하셨던 대상이 모세이든지 게르솜이든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의 안위를 더욱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는 말을 세상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우리를 비웃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이것은 :14에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앞에서 비굴하게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우리를 함부러 대하고, 하나님도 함부러 할 것입니다.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고 물으시면 당당하게 말해줍시다. 우리나라 독립선언문을 쓴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명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구는 카톨릭까지 합쳐서 2%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교회는 계속해서 어려운자를 돌보며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교회나 교회와 관련된 기관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많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분명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을 더 중하게 여기고 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개신교의 대표인 칼빈에 의해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5절에서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시키는 장면에서, 히브리어는 ‘그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세의 아들이 아니라 십보라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족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물론 정말 인연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이제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욱 중요시 여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은 소위 노가다라고 부르는 기술자들도 존경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습니까.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이기에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라는 교회가 가진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퍼지기 전에 먼저 교육열풍이 불어버렸기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동반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는 것이 모세에게는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사회를 이루는 근간까지 교회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세와 아론처럼 세상앞에 비굴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들을 우리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세와 같이 애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속에서 살다가 잠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세상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자리는 모든 곳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영적 전투의 자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만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상황도, 사람도, 내 마음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까닥하시고, 입김한번 후 불면 끝날텐데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비굴함을 넘어서 아예 바로의 편이 된 사람도 교회안에 많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사회의 논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결정하는데, 기도와 말씀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 효율과 자본, 마케팅같은 것들이 더 우선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것을 모두 배제할수도 없고 배제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온 땅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이라는 틀로 세상의 논리들을 컨트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변화시켰지만 우리는 변화시키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뜻, 마음을 느끼고, 한 마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의 논리에 의해 컨트롤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 모세와 아론은 비굴하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이드로앞에서도 위축되었던 모세가 바로에게 협박할 수 있는 자가 되었듯이, 우리가 당당히 서서 하나님의 빛을 온 땅에 뿜어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바로의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힘이 드십니까. 고난이 찾아옵니까. 쉽게 되는 일이 없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습니까.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물론 당장은 이해되지 않은 일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 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라나고 변화되었듯이, 우리를 그 풍성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모세와 아론에게는 변명거리라도 있었습니다. 왜냐면 요셉이후 애굽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변명거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뭐라 말할 것입니까. 무슨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두려워해도 좋고, 비굴해도 좋으니 그래도 하나님의 편에 설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그 크신 역사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은혜를 믿고, 그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의 일꾼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 이번주 금요기도회 후 교사 전체 기도회가 찬양 연습실에서 있습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1여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 특송은 영아, 아동, 유치부교사입니다.
ㅇ각 기관 연령조정표 및 총회장소가 게시판에 공고되어 있습니다. 각 전도회 명단과 연령조정표를 사무실에서 받아 참고하셔서 총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ㅇ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ㅇ등대1구역의 김영도성도, 길성애집사님의 장남김지원군의 결혼식이 11월 30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의정부 웨딩플로체6층 플로체홀에서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 7시 모피코앞에서 출발하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91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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