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An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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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tough wave of life, lucky and unlucky

한 촌에서 한 여자가 외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재산도 없이 남의 집 살이 해 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너무나 힘이 들고 어려워서 때로는 낙심도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나 자기 한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그 아들은 누가 키우나 하는 생각 때문에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가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들에 나가 일할 일거리도 없어지고, 민심은 더욱 각박해졌습니다. 뒤주에 있던 밀가루도 동이났습니다. 혹시나 하고 뒤주 옆에 붙어 있던 밀가루를 박박 문지르니 겨우 한 줌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정말로 대책이 없습니다. 죽을 일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처럼 아무리 둘러 보아도 살길이 보이지 않고, 피할 길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 길이 보이지 않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 한국에는 정선희라는 개그 우먼의 남편인 안재환 씨의 자살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죽었을까? 의문을 제기합니다. 부인은 인기도 있고, 돈도 잘 버는 사람인데, 그렇게 살 길이 없었을까? 때로 우리들에게는 이처럼 살 길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버틸 수 있고 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에게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내일이면 남아 있는 한 줌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고 난 후에 꼼짝없이 굶어 죽겠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 하나님이라는 분이 그녀를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녀를 찾아와서 " 내일 누군가가 너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할 것인데 그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시키는대로 해라" 이런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꿈입니다. 자기가 먹을 것도 없어 굶어 죽을 판인데, 자기의 한끼 남은 식사를 달라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개 꿈이 있나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날, 이 과부는 성문 안 들에 나가서 땔감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마지막 빵을 만들어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라한 행색을 한 한 남자가 자기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로 "마실 물을 한 그릇만 떠다 주시오"하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이 남자는 보니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갑자가 퍼뜩 꿈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까 그 남자가 "저기요" 하면서 자기를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먹을 것도 좀 주시오"하는 겁니다. 이 과부는 꿈 생각을 하면서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건데, 저에게는 빵이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단지 밀가루가 한줌, 병에 기름이 몇 방울이 전부입니다. 보다시피 저는 땔감을 주워 이것으로 마지막 남아 있는 것을 먹으면 우리는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두려워 하지 말고, 내가 말한대로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리고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 가뭄이 그칠 때 까지 당신의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연일까요? 행운일까요? 정말로 이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가 말한대로 했다가 사람들이 굶어 죽는 그 무서운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는 정말 뜻하지 않은, 우연과 같은 행운, 행운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우연을 붙잡고 우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연과 같은 행운은 일정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의 우연과 같은 행운은 한번의 불행으로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이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고, 그 병은 매우 위중하여 끝내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이 인생의 불행 앞에서 그 여인은 생각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이 행운이 불행과 함께 찾아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에게 오셔서, 내 죄가 생각나고, 내 죄 때문에 이 아들이 죽었습니다." 행운속에는 불행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녀는 인생 속에서 기근이 찾아오든지, 질병이 찾아 오든지, 굶주림이든지, 아니면 죽음 속에서라도 그녀가 붙잡고 나갈 것이 무엇인가?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는 이 과부의 인생처럼 끊임없이 힘든 일들이 찾아 옵니다. 불경기도 있고, 질병도 있고,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피할 길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 또한 우연같은 행운이 찾아와서 피할 길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그 행운 속에 불행이 깃들어 있어서 슬픔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특별히 사방이 막혀 있는 그 순간에 내가 붙잡을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흔드는 무수한 행운과 불행들

예수님을 믿었던 히브리인들도 이런 인생의 불확실성과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은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놀라운 표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을 일으키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고, 제자들에 의해서 evil spirit이 물러가며, 병들이 고쳐지는 체험을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놀라운 표적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Hebrews 10:32-34). 또 자신들도 기도를 통해서 병을 고쳐보기도 하고, 또 기도의 응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Hebrews 5:12) 이 예수님이 곧 재림하셔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하루 하루의 삶 속에 진정한 천국을 가져오시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셨던 축복,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고, 이 약속을 그들이 상속을 받았다는 것과 이 상속을 맹세로 보증해 주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Hebrews 6:13-17). 이렇게 복음을 들었고, 삶에서 많은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면서 삶에 소망이 생겼고, 기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피하여 교회로 들어 왔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들은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도들의 가정을 돌아가면서 가정 예배를 드리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정말 행복했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믿음 생활을 해 나가면서 기도의 응답들도 컸지만 그러나 그 믿음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몰려왔습니다. 1) solitary: 자기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들의 믿음을 비난하며 손가락질 합니다. 점점 가족과 친구들로 부터 외톨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2) not doing well: 하는 일들도 잘되는 것 같더니 또 어려움이 오고, 잘되지 않습니다. 3) delay Jesus' coming: 오신다고 하시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4) Apostle's martyr: 그들에게 믿음을 전수해 주고 믿음의 기둥이 되었던 야고보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등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5) fellow Christian's ill-behavior: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형제와 자매들이 좋을 때는 좋았지만 때로는 신앙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런 신앙인 답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나 자매들의 모습속에서 발견되는 비신앙적인 모습 때문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게 되었습니다.

Fell in doubt about Christian faith: 이렇게 되니까 과연 예수님이 그리스도였는가? 우리들의 믿음은 진짜일까? 하는 의문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정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의 삶이 천국처럼 변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이런 회의들이 거세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남아 있던 성도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영적인 무기력감에 빠져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포기하는 성도들도 생겨났습니다 (Hebrews 10:25).

이것은 2천년이 지난 우리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것이 무슨 행운인가 할 정도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능력을 체험했고, 은사도 체험했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꼭 필요한 기도가 응답되어지지 않을 때가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형제와 자매들의 모습속에서 비신앙적인 모습을 보게 되면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나를 괴롭힙니다.

What is my anchor of soul?

이렇게 나를 흔드는 인생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의 배가 파선하거나, 파도에 떠내려가거나, 아니면 뒤짚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영혼의 닻, 우리를 흔들리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도록 굳건하게 붙잡아 줄 닻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묘한 존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들을 한번쯤 들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죽지를 못합니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온 것을 알고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 여러분 너무나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가장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붙들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들을 보겠다는 일념'이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인을 자꾸 비유해서 안됐지만 안재환씨가 직면한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사람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절반을 탕진하고,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기근이 와서 더이상 거지 노릇하기도 힘든 그 시점에 그를 붙잡아 준 것은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1) Not having this type of anchor: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어떤 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붙잡아 주는 힘들입니다. 하다 못해 오기라도 있고, 복수심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런 종류의 영혼의 닻이라도 갖지 못하면 이 인생에서 생존하기가 힘이 듭니다.

2) Having wrong type of anchor: 이처럼 흔들리기 쉬운 인생 끊임없이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면서 심하게 출렁대고 요동하는 이 인생이 뒤짚어지거나 떠내려 가거나 파선하지 않으려면 내 영혼을 붙잡아 줄 닻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곳에 닻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수심이나 미움에 자기를 묶어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나 오기에다 자신을 묶어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에 자기를 묶어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영혼의 닻에 대하여 잘 묘사한 소설이 있습니다. William Jacobs라는 분이 쓴 'The Monkey's Paw'라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1902년에 출판 되었는데, 그 후에 연극으로, 무성 영화 시대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가지' '세번' 이렇게 3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 소설에서도 '세가지 소원'이 등장합니다. 죽은 원숭이의 발을 가진 사람은 세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성취되는 행운 뒤에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주인공 White씨 부부는 이 원숭이의 발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Herbert가 시험삼아서 이 원숭이 발톱에다가 집 페이먼트 2백 파운드를 달라고 소원을 빌어보라면서 출그을 했습니다. 화이트 씨는 하루 종일 돌아 다녔지만 집 페이먼트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난 삼아 발에다 대고 2백 파운드만 달라고했습니다. 그런데 2백 파운드게 생겼습니다. 그 아들이 일을 하다가 기계에 끼어 들어가 그만 죽어 버리고, 그 보상금으로 2백파운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하자 그 부인이 남편에게 저 발톱에 대고 자기 아이를 살려달라고 소원을 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그들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화이트 부인은 자기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런데 문을 연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기계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진 아들의 유령이 강시의 모습으로 문앞에 서 있었습니다. 나머지 하나,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요? 제발 아들이 편히 쉬게 해 주세요.

Jacobs라는 이 소설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인생의 행운에는 언제나 슬픔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잘못된 곳, 불완전한 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맹세

그렇다면 이렇게 행운과 불행이 출렁대고, 우리들의 행운에 늘 슬픔과 고통이 깃들어 있는 이런 삶 속에서 우리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어 매주는, 우리가 결코 이 인생의 풍랑과 바람 속에서 떠내려 가지도, 파선하지도 않게 하는 내 영혼의 닻.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하시고, 그 분께 내 인생의 소원, 내 인생의 소망을 두라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우리가 붙잡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알 지 못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이 예수님이 우리안에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숭이 발이 여러분의 영혼의 닻이 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혼의 닻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위기 속에서도 이 예수님께 여러분의 배를 단단히 묶어 두십시오. 어떤 바람이 불어도 이 예수님께 단단히 묶어 부십시오. 어떤 폭풍이 불어와도 이 예수님께 여러분의 영혼을 단단이 묶어 두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대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장은 안전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무참히 순교를 당하면서 베드로 사도요한 사도를 대제사장과 지지자들이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옥에서 데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들이 감옥에 가둔 사도들이 성전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사도들을 데려다가 산헤드린 의회에 세우고, 대제사장이 복음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가르치느냐, 예수의 피를 왜 우리들에게 덮어 씌우려고 하느냐?고 심문을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두려움없이 대답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은 그대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또 성령님도 그 증인이다"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사도행전 5:17-32).

왜 이렇게 담대하고, 왜 이렇게 용감합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맹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영혼의 닻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의 닻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그들은 결코 이런 위협 속에서 파선하지 않고, 위대한 인생의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여러분에게 이 영혼의 닻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이 위기 속에 있고, 인생의 풍랑이 거세면 거셀수록 여러분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견고하게 그 닻을 내리기 원하십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께 닻을 내리면 우리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어떤 폭풍 속에서도 결코 파선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를 마칠 수 있습니다.

토요일 새벽에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온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즘 사업장 마다 장사가 너무 안되고, 문을 닫는 사업장도 늘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제가 만난 우리 교우들은 문을 닫은 집이 없습니다. 일거리도 많아지고, 사업도 어렵지만 순탄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문닫게 되신 분이 저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대화를 나눌 때 항상 '요즘 어떠세요?'하고 묻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눈 분들은 모두 사업장을 늘렸습니다. 쇼에 성과가 매우 좋았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에게는 영혼의 닻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 내 영혼이 견고하게 닻을 내리고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파선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어려운 분들은 주님 앞에 더 메달리고, 몸부림 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면서 오늘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우리 영혼의 닻이 되시는 예수님께 견고하게 붙어 있으면서 우리에게 가라 하신 그 길을 가십시오. 그 소망의 길을 가십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영광을 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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