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8.수요예배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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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365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김금자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출애굽기 5장 22절에서 6장 13절 말씀입니다. 구약 89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다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 ◎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 ◎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설교
서론
서론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바로의 계책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분열되었습니다. 나서야 할 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민족의 원수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기록원들은 이제 막 알게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모세와 아론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컸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속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속에서 머무를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와 아론이 첫 번째로 바로 앞에 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바로 앞에서 누구를 두려워했을까요. 본문을 살펴보며, 모세와 아론의 모습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본론
이 상황속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22절과 23절을 통해 한탄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두 번 나오는 어찌하여 라는 단어는 ‘왜’라는 뜻입니다. 왜라고 번역하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말을 순화시킨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와의 대담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바로 앞에 처음으로 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절의 내용은 :18절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해라 하는 것을 전했습니다. 몇가지 빠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빠진 부분은 3절에서 다시 말하기 때문입니다.
22절과 23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는데 왜! 상황은 악화되기만 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라는 원망과 항의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2절에서 바로의 반응역시 매우 당연한 반응입니다. 노예들이 갑자기 듣도보도 못한 신의 이름을 대며 제사하러 가겠다고 3일길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주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특히 광야에서 3일길이면 이미 쫓는게 불가능합니다. 3일길을 가게 하라는 것을 우리를 해방시켜달라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겠다라고 선언하시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 8절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지, 그리고 그 구원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그리하여 구원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십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2절의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처음이자 마지막 선언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나는 여호와라’입니다.
문제는 3절 후반절입니다.
2절에서 ‘나는 여호와라’로 시작하며, 8절에서 ‘나는 여호와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과 약속의 성취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3절과 4절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지, 그리고 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었음에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라는 구절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19에 누굴친다고 합니까. 바로를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침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3절에 나온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말을 함으로써,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걸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몰랐습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다른 모든 신, 우상들의 이름이 어떻든지 그 모든 것위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커녕 소위 말해 자기 밥그릇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믿음을 기쁘게 여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가나안땅, 그들이 지금은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며 핍박당하는 그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언약입니다.
자연스럽게 4절에서 애굽왕은 비웃고 있습니다. 4절의 내용은 ‘백성의 일보다 너희는 일이 가볍고 편한가보지? 내가 보기엔 너희가 할 일이 더 힘들거 같은데?“라는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언약은 그들이 믿음의 삶을 잘 살아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4절에 나오는 언약하였고라는 단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로는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힘들게 만듬으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게 됩니다. 딱 바로의 빈정거림 그대로 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에서 언약을 맺다, 언약을 세우다라는 말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언약을 자르다라고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풍습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당시 고대 중동에서는 언약,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갖다놓고 그 짐승을 반으로 자릅니다. 그리고 반으로 잘라진 짐승 사이를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나란히 걸어갑니다. 이것은 내가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처럼 반으로 잘려 죽겠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언약을 맺다는 언약을 자르다, 언약을 쪼개다라는 말로 쓰입니다.
말그대로 애굽인의 왕 바로에서 애굽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왕, 애굽왕이 된 것입니다. 바로를 애굽왕으로 높여준 것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아론의 비굴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종처럼 행동했기에, 그들은 민족 전체를 팔아먹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4절에 언약했다라고 하실 때는 이 ‘자르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십니다. 언약을 일으키다, 언약을 세웠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는 2절에서 물어볼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더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경우는 구약 전체에 1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자르다라는 표현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사람과 하신 언약에만 쓰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비굴함은 결국 자기 자신만 비굴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무시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책임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인애로 언약을 세워주셨고, 그 언약을 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믿음과 그 믿음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언약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의 언약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은 잊었습니다. 조상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름도 없는 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모세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당할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도 잊어버린 언약을 기억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너희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셔서, 언약을 실행하여,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12장에는 아브람이 사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간 일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애굽왕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사래를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것이 6절과 7절 상반절의 내용입니다. 조상들조차 알지 못했던 그 이름,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두고 다시한번 언약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빼내고, 건지고, 속량하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이뿐입니까. 요셉의 일도 있습니다. 풍년과 흉년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조차 하나님보다 못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속량,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그 의미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하며 받지 못했던 정당한 값을 받을 것이고, 애굽은 이스라엘을 학대했던 정당한 값, 큰 심판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모세와 아론은 4절에서 애굽왕이 그렇게 빈정거릴 때,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지 못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 바로가 무서웠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비틀어서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결과, 언약이 실행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그 땅이 너희의 기업, 다른 말로 너희의 소유물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만약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아브람과 사래의 일과 요셉의 일을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또한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큰 일들을 보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너희가 알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6절처럼 그날 당장 감독관을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괴롭히려고 했을까요? 아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왕실의 기록을 뒤져서 사실인지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인 것을 알고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빈정거리고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430년간 애굽에서 살며 잃어버렸던 하나님, 그저 피상적으로 입으로 입으로 마치 전래동화처럼 전해지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내게 찾아오셨고, 그 큰 손으로 구원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너희는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을테니까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의 크신 인애, 사랑으로 인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를 죽이지 않으셨고, 노아를 살리셨고, 이제 조상들을 통해 하신 언약들을 기억하시고 자격없는 이스라엘을 살리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너무나 비굴했기 때문에, 바로는 너무나 쉽게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정작 이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게 사랑인지도 느끼고 있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왜냐면 9절에 보다시피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지 않는 것은 단순히 모세의 말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하지만 그들을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6절처럼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9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영혼이 짧아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통 노하기를 더디한다라는 말을 쓸 때, 히브리어는 코가 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화가나면 콧김을 씩씩거리는 그림으로 표현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화를 낸다라는 말을 코가 짧다로 표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노하기를 더디한다라는 표현을 코가 길다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9절에서 영혼이 짧아졌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화를 잘내게 변한 것이 아니라 가혹한 노동 이전에 이스라엘 자손의 영혼 자체가 애굽의 우상숭배와 노예생활속에서 변질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한가지 효과를 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결과를 노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먼저 7절에서 나오는 가서 짚을 모으게 하라는 것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은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요청은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애굽땅으로 가서 애굽사람을 위해 짚을 모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모세와 아론,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대처할래라고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은 똑같이 나빠졌습니다.
또한 9절에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상황이 나빠졌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와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않게하라 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소망이나 의견을 부정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순전히 모세와 아론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나빠진 상황속에서, 자신에게 찾아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짓말이라고 말함으로 이런 뜻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변질되어버린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모세조차도 무너지게 만듭니다. 민족이 변질되어 있는데, 언제까지 한 사람이 그들을 이끌어갈수 있겠습니까. 성도라는 의미가 변질되었는데, 언제까지 앞에 선 자들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쫓겨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게 하려는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12절에 말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8절까지는 백성, 그들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9절에 그사람들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쫓아낸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냥 사람이 되길 바라며 쓴 표현입니다.
“나는 할례받지 못한 입술입니다”
적용
12절에 입이 둔한 자라는 말은 이전에 :10에서 나온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와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때는, 혀가 무겁다라는 말을 썻습니다. 말을 잘 못한다는 뜻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할례받지 못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는 말을 세상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우리를 비웃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애초부터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라고 좌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앞에서 비굴하게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우리를 함부러 대하고, 하나님도 함부러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고 물으시면 당당하게 말해줍시다. 우리나라 독립선언문을 쓴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명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구는 카톨릭까지 합쳐서 2%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교회는 계속해서 어려운자를 돌보며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교회나 교회와 관련된 기관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많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가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개신교의 대표인 칼빈에 의해서 출발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은 소위 노가다라고 부르는 기술자들도 존경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습니까.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이기에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라는 교회가 가진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퍼지기 전에 먼저 교육열풍이 불어버렸기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애굽이란 세상속에서 짧아진 그들의 영혼, 변질된 그들의 마음은 결국 자신들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를 원하는 자들까지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재 사회를 이루는 근간까지 교회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속에서 다시 한번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세와 아론처럼 세상앞에 비굴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들을 우리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강권적으로 움직이십니다.
결국 우리의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만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3절은 뭐라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움직일 힘을 잃어버린 모세와 아론을 다시한번 움직이게 하시고,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십니다.
적용
이제는 비굴함을 넘어서 아예 바로의 편이 된 사람도 교회안에 많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사회의 논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결정하는데, 기도와 말씀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 효율과 자본, 마케팅같은 것들이 더 우선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것을 모두 배제할수도 없고 배제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온 땅을 기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이라는 틀로 세상의 논리들을 컨트롤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슬픈 사실은 세상과 교회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 모습, 교회에서는 저 모습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거짓말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이라는 말은 바로 이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목욕을 하고 정갈한 옷을 입고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어도 우리에게는 평소에 생활속에서 쌓인 마음의 때를 씻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의 논리에 의해 컨트롤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마음의 때는 종래에는 마음 자체를 변질시켜 버릴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사는 동안 그들의 영혼이 짧아진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말씀속에 모세와 아론은 비굴하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우리의 마음들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 천국의 길을 제시하는 자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 바로의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어렵고 힘든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압니까. 세상을 많이 알고 있습니까. 살면 살수록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아는 것같습니다. 세상의 재리와 이치에는 탁월에도 하나님의 뜻에는 둔하고 느린 것이 우리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모세와 아론에게는 변명거리라도 있었습니다. 왜냐면 요셉이후 애굽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변명거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뭐라 말할 것입니까. 무슨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소망합니다. 모세는 원망을 해도 하나님께 와서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나아오기를 소망합니다.
두려워해도 좋고, 비굴해도 좋으니 그래도 하나님의 편에 설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그 크신 역사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사회에서 회사에서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의 일꾼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결국 모든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앎으로 회복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함께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사랑으로 세우셨듯이 서로를 사랑으로 세울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 하반기 회계 감사가 있습니다. 각 기관과 부서는 시간을 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12월 22일 : 교육부서, 면려기관, 찬양대, 찬양위원회
12월 29일 : 재정부, 선교부, 건축부, 장학위원회, 재직회, 유치원 및 기타기관
ㅇ2020년 요람용 사진, 주소, 연락처등의 변경을 원하시는 분은 12월 마지막 주까지 사무실로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ㅇ이번주 목요전도는 1여전도회입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 특송은 청년 1,2부입니다.
ㅇ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여.
ㅇ대림구역의 오우순집사님의 장남 정영수 집사님의 결혼식이 12월 21일 토요일 낮 12시에 교회에서 있습니다.
찬송가 290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잡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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