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2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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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새해가 되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이것저것 계획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새해에 세웠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돌아보자.
본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그 계보이후의 탄생
그리스도의 계보는 모든 사람이 적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보를 타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주관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왜 계보를 한 이후에 예수님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가?
혹자는 유대인들에게 논증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맞다. 그 당시 흔들리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을 부인하던 유대인들에게 계보의 이어짐,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난 메시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그러나 이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당시에도 모두 유대인이 아니었다. 마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썼을까? 당연히 이 서신, 말씀을 유대인의 혈통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읽을 것이란 것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의도로 썼는가? 바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썼다. 우리로 따지면 수천년전, 그들입장에서는 몇천년전, 문명이 막 시작되던 그 시기부터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났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뜻하는 계보를 적은 것이다. 특히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익숙해서 숫자에 익숙한 그들을 위해 14대라는 것을 3번 반복한 것이다.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태초부터, 세상을 지으시기전부터 우리를 작정하셨고, 그 영원한 뜻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알맞는 환경과 문화, 모습으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멋진 형체를 가지지 않으신 것도,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모양하나까지도 손톱의 모양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지으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새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기 바란다. 우리가 세운 계획과 목표들은 우리를 세심하게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세웠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안에서 우리의 계획도 수립할 수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2. 순종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하신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계획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단어가 유혹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관은 모든 유혹을 포용하는 풍조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쉽게 말해 내 맘대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나은 길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로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해 되는대로 살아간다. 물론 여러분중 몇몇은 나는 내 인생의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은 잡고 있다고 반박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유혹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 신분적, 자본주의적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그 대답은 매우 쉽고 간단하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부터 시작해서 명예, 사회적 인정등 많은 부분에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중에서 특히 의식주의 욕망, 소위 말해 본능이라고 불리는 욕망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러나 말은 쉽지, 순종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죄가 되는가? 비싸고 좋은 옷들, 명품백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들고 다닌다고 죄가 되는가? 자기 능력만 된다면 마음껏 하라는 것이 요즘의 풍조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도 허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연한 것이되는게 요즘 사회다. 아무리 부모님이 게임하는거 싫어해도 내가 게임하는게 재미있고 좋으면 게임은 좋은 것이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인색해진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치뤄야 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앞에 사는 것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 계시록을 하면서 잠시 다룬것처럼 신학조차, 성경을 보는 눈조차 그에 영향을 받는다.
재산이다. 당시 신부는 사오는 것이다. 서로가 혼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일방적으로 준비하고 처가에 엄청난 돈과 그에 준하는 물품들을 줘야한다. 요셉이 결혼할 당시 나이가 40세정도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모았던 재산을 대부분 포기했다는 소리다.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역ㅇ도 동성애를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유혹이라 보셨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또한 명예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기도 전에 동침하고 임신시켰는데 버렸다는 것은 남자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다. 만약 학교나 교회, 회사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수모와 재손실을 감당키로 한 것이다. 그만큼 요셉은 자신의 아내 마리아가 다른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용납할 수없었더는 것이다.
본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앞에 그는 이 큰 고집을 꺽어버렸다.
우리는 말씀앞에 우리의 뜻을 꺽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가장 알맞게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그 알맞음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요셉과도 같은 순종의 결단이 필요하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과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진짜 귀에 들리는가? 눈에 보이는가? 오감으로 느낄수 있는가?
튼튼해 보이는 다리와 투명한 다리 비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단어가 유혹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관은 모든 유혹을 포용하는 풍조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순종이란 이 투명한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말 요셉처럼 이 투명한 다리를, 튼튼하고 넓어보이는 다리를 두고 갈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명령에 따를 때,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있다.
이런 복을 받는 우리가 되길.
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해 되는대로 살아간다. 물론 여러분중 몇몇은 나는 내 인생의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은 잡고 있다고 반박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유혹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회적, 신분적, 자본주의적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부터 시작해서 명예, 사회적 인정등 많은 부분에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중에서 특히 의식주의 욕망, 소위 말해 본능이라고 불리는 욕망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대하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죄가 되는가? 비싸고 좋은 옷들, 명품백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들고 다닌다고 죄가 되는가? 자기 능력만 된다면 마음껏 하라는 것이 요즘의 풍조이다. 그러니까 동성애도 허용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연한 것이되는게 요즘 사회다. 아무리 부모님이 게임하는거 싫어해도 내가 게임하는게 재미있고 좋으면 게임은 좋은 것이다.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남에 대해서는 인색해진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앞에 사는 것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전에 계시록을 하면서 잠시 다룬것처럼 신학조차, 성경을 보는 눈조차 그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서역ㅇ도 동성애를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유혹이라 보셨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득이나 자기 좋을대로 사용하는 것을 유혹이라 보셨다.
이것이 첫번째 유혹이다.
첫번째 유혹이 무엇인가?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절대 그 떡을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40일을 굶었는데, 눈앞에 먹을게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먹지 않고 배길사람이 있겠는가?
금식수련회 3박4일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겠는가? 만약 돌들을 떡,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일반적인 식사였던 납작한 빵, 우리로치면 밥으로 만드셨다면, 그것을 과연 먹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그걸로 끝나겠나? 밥먹으려면 반찬이 생각난다. 당연히 꿀을 만들거나 물을 만드시거나, 여러가지 먹을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40일동안 그럴 능력이 없어서 금식하셨나?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능력을 네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혹은 앞서 내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식욕과 결부시켜서 유혹한 것이다.
왜 이것이 유혹인가. 방금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금식하셨다. 그리고 금식하는 동안 언제든지 돌들을 떡으로, 물을 꿀로, 다른 잡초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만드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그 무엇보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신을 만드시는데 주력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그 모든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3의 말씀을 인용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둘째는 방법에의 유혹이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모든 것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할 필요는 없지 않냐? 라는 말이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두번째 유혹과 세번째 유혹에서 중요한 부분중 하나다.
두번째, 거룩한 성의 꼭대기로 마귀는 데리고 간다.
우리는 이로서 알수 있다. 거룩한 성의 꼭대기, 하나님의 보좌를 지금 사탄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가셨을 때, 그렇게 화를 내신 이유이기도 하다. 성전꼭대기에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있으니 그러신거다.
사탄은 유혹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이 세상에 온 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지금 당신이 성전에 뛰어내림으로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 천사들을 보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내 수족이 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도 당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거에요.
원래 아래에서의 개혁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훨씬 쉬운법이다. 3년간 공생애, 고난의 세월과 십자가보다는 권력층에게 인상을 남겨 한방에 쉬운 길을 가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뭐로가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 이루어지면 되지 않냐?
세번째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세상 전부가 지금 사탄의 손에 있으니, 잠시 내앞에 무릎을 꿇으면 되는게 아닌가?
눈앞에 불길이 있는데 그 불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 아닌가?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사탄은 하나님앞에 무릎꿇을수밖에 없으니, 잠시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는게 뭐가 나쁜까? 구밀복검, 표리부동하면 되는게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셔서, 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결론
우리에게도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유혹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눈은, 그 기준은바로 말씀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도 말씀이다.
그러니 말씀으로 살길 바란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외워도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첫번째로 말씀을 내 임의로 해석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두번째처럼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란 식의 유혹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노치지 않고 온전히 시험을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등불삼자. 말씀을 도구 삼는게 아니라 나의 길과 등불, 따를 대상으로 삼자.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따라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세상의 유혹 시험이” 찬양
다함께 기도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찬양드리며 헌금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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