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 [공동체 예배] 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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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13:13–14 NKRV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화점

불이 나면 발화점, 불이 나기 시작한 곳을 찾고 그곳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화점을 찾지 못하고 주변에 물을 뿌려대면, 불을 끄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한 번은 낡은 기와집에 불이 나서 화재진압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겨우 불길이 잡혔다.
돌아와서 호스도 빨고 정리도 하고 한참 지났는데,
또 화재 벨이 울리면서 아까 거기에 불이 다시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서 또 껐다.
그리고 돌아와서 정리하고 하루쯤 지나가는데
또 거기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한 집에 3번 출동을 한 경험이다.
아저씨들 말을 들어보니, 이런 기와집이 불을 끄기 정말 어렵다고 한다.
기왓장 아래 지붕에서 불이 나면 아무리 물을 뿌려대도
‘화점’ 근처에 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와를 전부 드러내지 않고는 불을 끄기가 힘들단다.
차라리 불이 확 붙어서 전소 상태가 되지 않으면
화점을 찾지도 못하고 계속 물을 뿌려서 온도를 낮추는 일밖에 못한다고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화점’을 찾는게 중요한데,
그 주변을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직시하고 딱 그 지점을 수정하고 고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은 이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다 잡힌 불 같고 뭔가 해결된 것 같은데,
또 다시 불이 나고 불이 번지고 반복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우리에게 ‘화점’을 찾아야 할 숙제가 생겼다.

다윗이 생각한 화점

다윗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진 이유가 사울 때에 하나님의 궤에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한 목적은 사울 때에 궤 앞에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3절)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다.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과 가까웠다. 그런데 이 법궤 이동을 위해서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은다. :1에 따르면 삼만명이 모였다. 전쟁을 준비하는 수준이다. 법궤의 이동이 짧아보여도, 전 이스라엘의 진군과 같은 행사였다.
하나님의 궤를 최선을 다해서 잘 모셔 올려야 했고,
그 궤에 질문하고 답을 얻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런데,
- 오늘 본문 기럇여아림의 설명이 이상하다.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이다. 바알라는 바알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할 때,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신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룹의 날개로 움직이신다.
- 바알은 구름을 타시는 이다.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의 비교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이동하실 것인가?

진짜 이스라엘의 화점

-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려고 한다. 그런데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싣는다.
- 여호와의 궤를 ‘묻기 위해서’ 가져오려고 했는데, ‘묻지 않았다.’
- 새 수레에 싣는 방법은 블레셋 사람들이 한 행동이었다.
-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전통에 따라서 새 수레를 준비했다. 그룹의 날개로 움직이시며 구름을 타는 바알보다 위대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새 수레에 타셨다. 긴장감이 넘친다. 그러나 다윗과 3만의 사람들은 이 긴장을 파악하지 못한다.
-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한다. 엄청난 행렬이다.
- 기돈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어놀아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잡자마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치시매 하나님 앞에서 웃사는 죽는다. 11절은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다라고 설명한다. 블레셋을 찢으셨던 하나님께서 웃사를 찢으셨다.
본문에 이어지는 긴장감이 대단하다.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 법궤를 가지고 올라오려했는데, 어떻게 옮길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움직이시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해주셨는데, 다윗과 제사장들은 새롭게 생긴 전통에 따라 행동했다. 규례가 아니라 전례대로 행한 것이다.
그들의 전례는 바알의 방법이었으며, 하나님을 바알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3만명의 사람들이 시리아, 이집트 각지에서 몰려와서 엄청난 열정과 뜨거운 예배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이 행사는 완전히 처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묻지 않은 방향성에 최선과 열심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리더십의 교체

리더십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제일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묻는 것’이다.
신학을 시작 하면서 결단했던 것이 하나 있다.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니까 저는 더 어려워보이는 길로 가겠습니다.
왜 그랬을까. 평탄한 길과 넓은 대로를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도 모자랐을텐데.
어쨌든 그래서 늘 어려운 선택을 했다.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고 개척을 해서 아무것도 받을 기대도 하지 않는 곳으로 선택해서 내려왔다.
친구들이 다 군대가던 시절에 휴학을 하고 교회에서 노가다를 선택했다.
학사장교를 준비해서 돈좀 모아서 신대원가고 유학 가려던 계획을 내려놓고 이사한 교회를 섬기기로 했다.
대형교회로 가기로 했던 약속들을 무르고 익산에 남기로 했다.
아내를 만나면서 서울로 가야한다는 처가 식구들과 아내의 극렬한 반대를 무릎쓰고 익산을 선택했다.
그 가운데에서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질문했는지 모른다.
왜 접니까?
그때마다 내적인 음성으로 채플 강단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거기 맞아’라는 응답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럴때마다 화도나고 어쩔수가 없었다.
설교대회 1등 했던 설교 제목이 ‘고임목’이었다.
한참 준비하던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니가 그 고임목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하나님께 물음으로 왕적사역을 감당하려고 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물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을 선택하고 진행하든지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응답을 주시든지 주시지 않든지, ‘질문해야 한다’
묻지 않으면- 우리는 대번에 규례가 아닌 전례를 따라가게 되어있다.

전례

전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전에 하던대로 이다.
전통에 입각해서다.
우리가 이전에 하던대로 예배할 수 있다.
이전에 하던대로 식사준비하고
이전에 하던대로 말씀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신앙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해보자는 거다.
우리가 교회인데, 우리 꿈이있는교회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이 무엇인지 질문하자는 거다.
묻지않고 목사님 하자는대로 따라갑시다 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다.
‘효율성’은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다.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만들고 효율적으로 행정을 하고 효율적으로 재정을 움직이고
효율적으로 인사체계를 만들고 효율적으로 전도하고 효율적으로 말씀듣고
효율적으로 기도하고 효율적으로 예배하는 모든 것이
불필요한것이 아니다!
필요하지만 질문해야 한다.
옳지 않은 방향성, 옳지 않은 효율성으로
규모를 거대하게 불리고 최선을 다해서 예배하고 열심을 다해서 노력할때
하나님은 ‘심판’ 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다.
우리의 효율성이라는 치장으로 하나님을 더 영광스럽게 만들어 드릴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자.
우리는 더 좋은, 더 나은, 더 편리한, 더 효용감있는 무엇을 자꾸만 바라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례’가 아니라 ‘규례’다.

규례

규례는 무엇인가?
불편감이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일이 아니다.
십계명, 산상수훈, 아주 기본적인 신앙적인 원칙들을 내밀어도
삶이 빡빡해진다고 하소연할 것이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큐티, 기도시간, 십일조-
설교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들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제자훈련하자고,
시간을 빼서 기도하고 성경읽는 훈련하자고,
가정예배 회복하자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아이고 이 교회 이제 글렀다. 촌스럽다. 대번에 이런 불평불만이 나올꺼다.
우리는 전례대로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대로 선언한다.
잘못된 방향에서 우리의 전례대로 하다가.
거기에 우리가 부흥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성장하기라도하면,
우리가 커지기라도하면 재앙이다.
아니. 지금 교회가 반토막이 나고 찢어져버려도
할 말이 없다.
우리가 방향을 잃은 전례대로 하면 말이다.

뜻밖의 은혜

- 다윗은 분노하고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궤는 예루살렘으로 오지 못한채 오벧에돔의 집에 둔다.
- 그런데 오벧에돔의 출신이 의미심장하다. ‘가드’사람이다.
- 가드는 블레셋 다섯 방백의 성읍이었으며 골리앗의 고향이다.
- 오벧에돔이라는 이름은 에돔을 섬기는자라는 뜻이다.
- 온갖 적들의 이름들로 가득한 그곳에 하나님께서 그 궤가 함께 있음으로 복을 내리신다.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복을 누리는 것은 좋고 선한 의도를 가졌던 사람들이 아니다.
왕의 분노와 사람들의 실망과 사망한 사람의 저주받은 이름- ‘베레스 웃사’ 찢어져 버렸다는 이름-이 부여된 곳에 있었던 수상하고 의심쩍은 사람이다.
그는 철저히 외부인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스라엘이 더 찢어지기 전에 가드 사람이 그 찢어짐을 대신 당하도록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신다.
역대상 13:13–14 NKRV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늘 본문은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 에돔의 집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
세 번이나 강조되면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고 서술한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세렌디피티

세렌디피티
세렌디피티라는 말이 있다.
행운이 찾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완전히 우연에 의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무라카미 카즈오의 [바보는 신의 선물]이라는 책에 세렌디피를 설명하면서 과학의 발전에서 세렌디피가 작동하는 법을 설명한다.
행운이 오느냐 아니냐는 평상시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주의깊게 살필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아, 이건 아니야’ 라고 부정하고 외면한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닥친 현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다.
또 실패와 실수 속에 끊임없이 그 일을 반복할 수 있는 인내심, 끈기, 그 안에서 뭔가를 알아보고 그것을 끌어내는 ‘힘’을 가질 때,
과학적 발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수로 군사용 레이더를 점검하다가 초콜릿이 녹아서 전자렌지가 만들어지고 실수로 곰팡이가 만들어져 페니실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저스는 재미 삼아 차고에서 중고책을 판 경험이 자신의 세렌디피티였다고 하고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도 단순히 동창들 찾는 걸 쉽게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자신의 세렌디피티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렌디피티, 인생의 진짜 ‘화점’을 발견한 것이다!

뜻밖의 은혜 속 화점

뜻밖의 은혜 속 화점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전례도 규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다.
전례도 중요하고 규례도 중요하다.
그 가운데 균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방향성 없는 전례들을 찢어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를 속박하는 규례들을 풀어 헤치실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유’다.
이것은 뜻밖의 은혜다.
오벧에돔의 자격없음에도 은혜를 주신것처럼,
우리의 자격없음에도 은혜를 주실 것이다.

뜻밖의 은혜를 얻기 위해

뜻밖의 은혜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간단하다.

1. 말씀을 들어야 한다.

다윗이 ‘듣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오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각자의 인생에 요구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듣기 위해 우리는 모든 선택에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실천이다.
모든 선택에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밥을 먹기 전에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도,
기도하고 시작하자.
최고의 듣기는 ‘읽는 것’이다.
매일 성경, 큐티하는 것-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하지 않는 듣기다.
우리가 듣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가까워진다.
듣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참된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법궤를 들어야 한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결국 자신의 성으로 옮기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간다.
법궤를 들었다.
수레로 끄는 방식이 아니라, 환호와 열광과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처참하고 슬픈 방식으로 ‘들었다. ‘
어쩌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아니냐고
울었을지 모르겠다. 참담함이 밀려왔을 것이다.
다윗의 분노 속에 많은 감정의 소용들이들이 있었음이 충분이 느껴진다.
온 감정의 소용돌이를 하나님의 궤와 함께 ‘들어서’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
하나님이 왜 내 인생가운데 이런식으로 행하시냐고 질문이 들거든,
따져 묻고 듣고 그 질문을 그대로 들어 짊어 메어야 한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와 아픔과 질문과 눈물과 한숨과 때로 다가오는 절망을
들쳐메야 한다.
무겁다. 피곤하다. 편리하지도 않다. 이유도 모르겠다.
그러나 들쳐 메야 한다.
이게 십자가의 원리다.
‘왜’ 냐고 묻기만 하고 방치해버리면 우리에게 복이 들어올 통로가 생기지 않는다.
왜냐고 묻고 분노하고 따지고 눈물흘리며 몸부림치며 법궤를, 십자가를 들쳐 메야 한다.
그래야 그 법궤로 부터, 십자가로부터 우리를 살리고 복주시는 진짜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다.

화점, 그리고 더 큰 발화.

이제 다윗은 전보다 더 전심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에 따라서 레위인들을 준비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어 올라온다.
그리고 다윗 성으로 법궤가 들어온다.
그때에 백성들의 모습을 보라.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과 제금과 비파와 수금이 다시 힘있게 울리며
춤추며 뛰논다.
스프링처럼 튀어오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미 영광스러운 하나님 이시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올려드리며
그분의 영광스러우신 빛을 나눠 누릴 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올려드려야 한다.
그때에 우리도 또한 그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겁게 ‘반응’할 수 있다.
법궤가 우리 영혼에 들어야 한다.
기쁨으로 반응해야 한다.
감사로 반응해야 한다.
신속하게, 확신을 가지고, 은혜를 확장하며 반응해야 한다.
이 기쁨의 예배가 우리의 삶에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방법과 모습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때
다윗의 나라는 점점더 부강해졌다.
우리 인생의 화점,
교회의 화점,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곳부터 우리의 방향과 길들을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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