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처럼
마가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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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마가
실패한 마가
36절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자고 합니다. 이유는 ‘형제들이 어떠한가'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데려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39절에 ‘서로 심히 다투어' 여기서 심히 다투다는 말은 'παροξυσμός’ 심한 불일치와 불화가 일어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도발'적 상황이 벌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이 말한 밤빌리아에서 떠난 사건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에 대해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를 향해 도발적 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결과는 결별입니다. 이로 인해 바나바는 더 이상 이름이 거론되지 않습니다.
이런 결별은 우리 주변에서 안타깝게도 자주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누구입니까. 그는 다소에 깊이 숨어있던 바울을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사울이라는 바울을 본 무대로 이끌어 준 사람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두려워 할 때 그를 신분 보장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에게 베풀은 은혜를 본다면 바울이 너무한 면이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베드로의 보고를 받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안디옥 주변 여러곳에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보낸 사람이 바나바요 그에 대한 평은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게 한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총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11:25 사울을 찾아러 다소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를 사귀고 싶다고 9장26에 기록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를 믿었습니까. 그때 27절 ‘바나바가 데리고'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을 들어주었습니다.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 결과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결국 그를 다소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드디어 바울이 일할 때를 알았던 것입니다. 200키로나 떨어진 곳까지 찾아가는 바나바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일에 적임자. 함께 할 동역자 그 사람을 찾아 떠나고 다소에 묻혀 있던 바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이며 기쁨일까요.
그랬던 바울이 마가의 일을 들춰내고 반대했을 때 바나바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물론 우리는 승자 중심의 글을, 역사를 읽게 됩니다. 어떤 이의 말로 왜 우리는 이순신을 기억하는가? 이는 그가 많은 분량의 글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이런 사실만을 보더라도 초기 바울의 자세는 얼마전 그가 취했던 형제를 핍박하고 죽이는 그 열심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닌지 얼마되지 않지만 은혜를 받았다는 그것 때문에 받아주고 용서해준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일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흔한 일입니다.
13-15:36절까지의 1차 여행은 약 2년입니다. 마가가 떠난 그 일이 여전히 바울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독히도 과거를 끄집어 내는 바울의 모습은 바나바가 보기에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성정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기 심히 다툰 것은 마가 때문입니까. 마가에 대한 용서하지 못한 바울의 마음 때문입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때론 누군가에 의해 그 연약이 확인되면서 더 고통받습니다. 누군가의 잘남 때문에 나의 부족은 더 연약해지거나 더 약한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여전히 우리는 마가를 부자집 도련님, 힘들어서 떠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살펴봅시다. 큰 사람에 의해 상처받는 일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에 의해 상처받는 자녀들, 어머니의 보살핌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상처가 결국 우리 사회를 얼마나 병들고 공포스럽게 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뚝 선 마가의 회복은 누가 한 일일까요?
바나바의 시선을 따라 갔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는 마가의 시선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120문도가 모였던 다락방(사실은 결코 작은 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곳입니다. 또한 학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52절에 소개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이를 마가로 보기도 합니다.
마가는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그러나 그 부모의 헌신으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인물이며 머리가 좋아서 마가복음에는 라틴어가 등장하는 등 그 당시의 양식에 맞춰 글을 쓸 정도의 능력을 소유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 자신을 드러니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서서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이도 아님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 , 25절의 언금을 통해서 마가이면서도 요한인 그가 라틴어의 ‘마가' 이름을 사용함으로 로마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헌신으로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 달려간 곳에 이곳 마가의 집이라면 마가는 베드로에게 베드로는 마가에게도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성으로 갖는 예수님과의 함께, 그리고 그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음도 분명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핵심이며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은 자신의 실패와도 비슷해 보이는 홑 이불을 버리고 도망했던 글 앞에 베드로의 예수님의 부인 사건등을 볼 때도 실패한 유대 민족을 향한회복과 승리도 결국 자신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했음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인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며칠전 코로나 19로 인해 하루에도 몇번이나 호흡의 경계를 오가고 목에 삽입한 기도관을 통한 호흡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만하겠다고 손으로 뿌리치는 환자가 손자의 ‘사랑해요 할아버지 힘내세요'라는 말을 듣고 의사의 손을 잡고 다시 병과 싸우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마가가 어려서부터 봤던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으로 인해 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섰던 마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나바의 생질()이었습니다. 스데반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로 가는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분명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지로 보내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가 역시 13:5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3:13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떠나는 이를 바울의 말을 밀러 ‘배반'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는 왜 그랬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살펴보겠습니다.
11:30절에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
13:1절에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절에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7절에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바로 ‘바나바’가 앞에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바울을 찾고 그리고 1차 전도 여행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구브로 섬 그곳을 더 지나 ‘바보'라 하는 곳에서 마술사 엘루마을 강하게 대적하는 바울의 모습이 9절부터 그려집니다. 그런 과정에서 12절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바울이 중심으로 떠 오르게 됩니다.
13절부터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바로 버가에 이르러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후 성경은 바울에 집중합니다.
13:16 ‘바울이 일어나' 말씀을 전합니다.
13:43절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누가는 이 글을 기록하면서 분명 바나바와 바울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순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6절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50절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14장 1.3절은 ‘두 사도'라고 이미 누가는 그의 사도성을 인정합니다.
14:8절에는 바울이 행하 기적을 소개합니다. 14절에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표현함으로 이미 바울을 사도로 말합니다.
그리고 15장 예루살렘의 총회에서 2절 ‘바울 및 바나바'로 말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제 바울은 주인공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소에 묻혀 세워준 바나바를 향한 어떤 내용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세상 일이 그렇듯 이제 바나바는 지고 바울을 세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가 아들이라 불렀던 디모데에게 보였던 애정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바뀔 때 우리는 상처받는 사람이 없는지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주인공으로 나서게 될 때 자신의 이름이 앞에 서게 될 때 때론 그 현장에서 떠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원들은 앞 선 이들의 돕는 자들입니다. 삼촌을 따라 먼 길을 왔던 마가 그가 경험한 것은 삼촌의 이름이 사그라지는 것, 그럼에도 그가 불평하지 않는 그의 성정이 마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울 왕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소문이 사울의 마음을 불타게 했습니다. 어쩌면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하며 배반의 아이콘, 사명을 버린 마가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기의 쓸모가 없어질 때, 자기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때 수행하던 이들의 연약함은 바닥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려던 앞 길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더 먼 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닥칠 어려움 때문이라는 이유로는 불충분합니다. 어쩌면 마가복음에서도 자신을 드러내길 원치 않았던 마가의 성정은 그런 삼촌이 뒤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패란 무엇인가요?
결국 자신이 보던 것과 다른 상황이, 기대와 달라진 상황이 현실이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와 자신에게서 자신을 떠나 보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주 스스로가 참지 못하는 일을 자신의 성정에 따라 다른 일들로 만납니다. 사업이 망해도 굳건하게 버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에도 낙심하여 관계를 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을 보세요.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한 주범 다윗, 그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성공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없었다면 죽음을 맞이할 다윗이었지만 그 계략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다윗을 침몰하려던 계략이 실패하자 그는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시선을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