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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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5 τοῦτο ⸆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 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6 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7 ἀλλʼ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8 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9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10 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11 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5
 τοῦτο ⸆ ⸀φρονεῖτε
ἐν ὑμῖν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이것을 너희는 생각하라(현능직2복)
너희 안에
또한 그리스도예수안에 있는 이것을
: 너희는 너희안에 이것을 생각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것을,
이것. 이 마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이것을 생각하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생각하라는 원래 영적인 기관을 지칭하는 말, 마음.
단순히 마음이 아닌 영적이고 지적인 기관
그래서 이것은 ‘이해, 지혜’와 연관되는 단어
LXX에서는 지혜없는자, 미련한 자를 말할 때, a-를 붙여 이 단어를 씀(부정적).
그러므로 5절에서 마음을 품으라는 그냥 같은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지혜를 가져라는 뜻.
그 지혜는 무엇인가? 주동사로 설명되는 비움(공허하게함), 낮아짐의 지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마음과 지혜를 받아들여라. 이것은 고난을 본받음인데, 그 고난은 구원을 위한 고난이다.
6 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하나님의 형체이신(현능분단주남) 그분은
가져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부과중직3단)
하나님과 동등 됨을(현능부)
: 하나님의 형체이심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임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가져야 할 것은 당연히 자신이 가질 것이다.
다른 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뜻.
(폰이나 뭐나) 내것이라 당연히 내 손안에 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두란노번역은

6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매우 잘 된 번역.
7 ἀλλʼ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반대로 스스로를 비워(부과능직3단)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부과능분단주남).
사람들의 모양이 되셨다(부과중분단주남).
그리고 사람같은 외모를 얻으셨다(부과수분단주남)
: 오히려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를 얻으셨다
비우다 는 ‘헛된’ 으로 많이 쓰임.
‘공허한’ 이라는 느낌이 좀더 많은 단어.
좋은 뉘앙스가 아님.
우리는 불교의 영향으로 비우다가 좋은 뉘앙스이지만 여기서는 ‘공허하게 만들다’가 좀더 나은 번역인듯.
자신의 내면을 (파괴하여) 공허하게 만드심.
‘사람의 모양’ LXX에서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 할 때 그 ‘모양’
지금까지 쓰인 ‘형체’는 인간창초의 형상과 모양과는 전혀 다른 단어.
그렇다면 이전까지 ‘형체’는 본체, 본질을 의미하는듯 하다. 용례를 보면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이야기하는 로 2번, 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에서 1번, 총 3번 쓰였다.
즉 그냥 형체라기보다 ‘본질’에 가까운 단어다.
그런데 7절에서(한글개역개정에서 8절 초반) 의 ‘모양’이 쓰인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신적 본질’이 아니라, 피조물, 사람의 형상이 비워진 자리에 들어왔음을 뜻한다.
8 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스스로를 낮추셔서(부과능직3단)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이 되심(부과중분단주남)
바로 십자가의 죽음.
: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하심으로 스스로를 낮추셨으니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이 되심’ 이 직역
‘순종되심’은 수동태가 아님. 예수님이 순종 그 자체가 되셨다는 뜻.
종의 본질이 ‘순종’임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진짜 ‘종’이었음.
우리는 말로만 ‘종’이지만 예수님은 진짜 ‘종’이 되심.
메인동사는 ‘낮추다’이다
낮아지기 위해서 ‘순종’ 그자체가 되셨다.
* 5-8절까지 한문장.
*주동사는 ‘생각하라(마음을 가져라)’, ‘비우다’, ‘낮추다’
*첫 주동사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사역임.
*빌립보서의 기쁨의 근원, 예수그리스도의 마음. 그 종됨. 순종. 낮춤. 스스로 순종 그자체가 되신 그리스도보다 더큰 희생, 더 큰 댓가, 더 큰 고난, 슬픔이 있는가? 엄청난 값어치의 구원을 선물받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싸움인가 슬픔인가 기쁨인가.
9 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또한 그를 지극히 높이셨고(부과능직3단) 모든 이름중에 뛰어난 이름을 베푸셨고(부과중직3단)
베풀다의 명사형은 기쁨이며 변형된 명사형이 ‘은혜’.
10 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그 결과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든 무릎이 절하고(부과능가3단)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땅 아래의 것이나
: 그결과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든 무릎이,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땅아래의 것이나 꿇고
모든 무릎, 땅위의 피조물, 아담의 통치안에 있는 피조물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다 포함한다.
통치의 영역이 늘어났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종(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확장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 사람의 본질이 확장된 것을 뜻한다.
그것이 영광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영광.
본질인 하나님은 변한 것이 없음.
11 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그리고 모든 혀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부과중가3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모든 것은 모아서 모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다.
에이스라는 전치사의 의미 그대로 모든 무릎과 혀가 예수 그리스도로 모여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영광받는 것이 하나님인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앞에 상달된 모든 무릎과 혀가 영광받은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릎과 혀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또한 앞에 순종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께, 우리를 모아 하나님앞에 데려다주신, 하나님께서 받을만하게 하신 예수님께 무엇을 했는가.
자연스럽게 12절이 나올수밖에 없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멘.
서론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는 이때,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요.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본론
본문 5절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라고 말씀하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고난을 받으셨을까요.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5절에서 말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번역된 ‘마음을 품다’라는 단어는 보통 이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생각하다. 심사숙고하다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구절은 :23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던 구절입니다. 이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는 말씀에서 ‘생각하는도다’가 바로 오늘 본문 5절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실제로 이 단어는 신약에서 33번 쓰이는데, 그중에서 26번이 ‘생각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아주 번역을 잘 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단어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이해를 모두 가지고, 동시에 감정역시도 함께 가지고 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렵죠? 쉽게 말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본문 5절의 생각하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는 지혜와 감정, 그 속내를 그대로 가지고 오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공감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지혜, 다르게 말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해 있으며, 멸망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와 그렇게 죽어가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의 감정, 그 모든 마음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냐면 빌립보교회역시 갈등도 있었고 고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힘들지 않는 사람이 없고, 위기가 없는 사람이나 공동체가 없듯이, 빌립보나 우리역시 그런 위기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위기에 대한 극복방법으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수 있을까요.
바울사도는 그에 대한 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님의 본체이심부터 말씀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6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후반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네, 저는 이 번역이 참 잘된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하나님과 똑같은 지위를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마치 내가 일했으면 일한 만큼 댓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일하는 것정도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심을 당연히 가져야할 자신의 기득권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당연히 이정도 대우를 받아야 하고,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 너는 내게 이렇게 해줘야 한다등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당연한 것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지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우들, 댓가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비우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우다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쉽게 말해 비우다는 좋은 뉘앙스입니까 나쁜 뉘앙스입니까. 우리에게 비우다는 좋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것도 들어올 수 있는 여유가 갖게 하는 것. 아니면 자기성찰을 위한 것이 비우다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영향에서 온 것이죠. 그러나 7절에서 비우다는 이렇게 좋은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의 비우다라는 뉘앙스는 헛되게 하다. 파괴하여 공허하게 하다에 가깝습니다.
저가 신학을 배우면서 매우 놀랐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자체가 엄청난 고난이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되는 것이 무슨 고난일까요. 다르게 생각해볼까요.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개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까.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말한다고 개가 되고 싶나요?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기 위해 무엇을 비웠습니까. 하나님의 본체를 비웠습니다. 본체와 형체는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심을 포기하고 파괴하여 공허하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8절에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이 ‘모양’이 어디에 쓰는 단어인지 아십니까. 창세기에 나옵니다. :26에서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이라고 할 때, 그 모양입니다. 조물주께서 완전히 피조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LXX
그것만해도 엄청난 고난이며 순종이십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거기서 더욱 낮추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8절을 개인적으로 번역해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이 되심으로 스스로를 낮추셨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저는 8절을 번역하며 한 부분을 깊게 묵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순종이 되심’이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무엇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되셨습니까. 영광이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순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높이심에 주목할 것입니다. 특히 뒷부분인 9절부터 11절을 읽으며 가슴이 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9절에서 11절처럼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까. 정말로 이전에 받을수 없었던 영광과 존귀를 한몸에 받으신 것입니까.
5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 말씀하였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9-11절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당연히 받아야할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서는 것도 당연한 자리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셨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 하늘과 땅, 땅아래의 모든 무릎과 혀가 예수님께 굴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피조물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9절에서 11절이 감명이 되는 것일까요.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역시 받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1절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수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우리에게 좋다고 꼬리친다고 직장에서 우리가 높임을 받습니까. 진급을 합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죠.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또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순종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심조차 자신을 위해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하늘 위, 천국에 있든지, 죽어서 땅아래에 묻히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모든 것을 모아서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시고 있다라는 말씀이 바로 9-11절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영광이 되게 하시는 분,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에 뭐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여 예배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찬양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십니다. 헌금을 할 수 있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습니까. 어떤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댓가를 치를 수있겠습니까. 그럴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순종 그자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영광받으심조차 우리를 위함이신 예수님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그 고난주간에 우리의 구주의 마음을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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