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7.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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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심호흡하고 천천히 말하며 진행하자
종
ㅇ다함께 묵상기도드림으로 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ㅇ찬송가 305장 다함께 찬양드리겠습니다.
ㅇ이금보 권사님 기도드리겠습니다.
ㅇ오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신약 319페이지입니다. 교독하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5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ㅇ미리암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없음 바로 설교)
설교
서론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는 이때,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요.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서론
본론
본문 5절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라고 말씀하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고난을 받으셨을까요.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5절에서 말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 재앙 3재앙을 제외한 재앙들과 같은 방식으로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씀에는 차이가 생깁니다.
본문에서 번역된 ‘마음을 품다’라는 단어는 보통 이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생각하다. 심사숙고하다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다섯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실 때,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내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재앙과 넷째 재앙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분명 ‘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다섯째 재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3절의 ‘여호와의 손’도 ‘내 손’이라고 했을 것이고, 4절과 5절도 ‘여호와’대신 ‘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4절과 5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현재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4절과 5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다른 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식으로 바로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구절은 :23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던 구절입니다. 이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는 말씀에서 ‘생각하는도다’가 바로 오늘 본문 5절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실제로 이 단어는 신약에서 33번 쓰이는데, 그중에서 26번이 ‘생각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아주 번역을 잘 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단어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이해를 모두 가지고, 동시에 감정역시도 함께 가지고 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렵죠? 쉽게 말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본문 5절의 생각하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는 지혜와 감정, 그 속내를 그대로 가지고 오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3에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한 것은 베드로의 마음 온통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영광만 구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바로와 애굽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하게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공감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지혜, 다르게 말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해 있으며, 멸망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와 그렇게 죽어가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의 감정, 그 모든 마음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사실 3번째 재앙에서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불러 일으키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별한다거나, 이런 재앙을 행하신 분,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모세가 선포하기는 하지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는 강조되는지는 않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냐면 빌립보교회역시 갈등도 있었고 고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힘들지 않는 사람이 없고, 위기가 없는 사람이나 공동체가 없듯이, 빌립보나 우리역시 그런 위기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넷째재앙부터는 달라집니다. 넷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성호를 분명히 바로에게 각인시키십니다. 이제 다섯째 재앙에서는 여호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제사를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기에 대한 극복방법으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로, 하나님의 성호, 그 거룩한 이름으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수 있을까요.
바울사도는 그에 대한 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님의 본체이심부터 말씀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와 이어지는 것으로 다섯째 재앙이 가축들을 죽이는 재앙으로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우상들은 모두 가축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개를 살펴보면, 아피스는 수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시스는 암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몬은 양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 앞서 있었던 개구리역시 신의 모습중 하나입니다.
6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또한 이것은 앞서 8:26에서 모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억을 더듬기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바로가 애굽안에서 제사를 하라고 하니 모세가 안된다고 하며, 그렇게 하면 애굽인들이 끔찍하리만큼 싫어해서 돌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칠거라고 했습니다.
후반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네, 저는 이 번역이 참 잘된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하나님과 똑같은 지위를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마치 내가 일했으면 일한 만큼 댓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일하는 것정도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심을 당연히 가져야할 자신의 기득권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사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양이나 소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양이나 소의 피로 보석금을 내는 것이 제사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양이나 소는 애굽에서 신의 모습입니다. 신의 모습을 가진 동물을 죽이고 각을 떠서 그 피와 살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애굽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들의 신을 죽이고 그 피와 살로 다른 신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절대 안될 노릇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걸 우리의 피부와 와닿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열대 우림에 들어가면 지금도 식인을 하는 부족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식인을 하는 자도 있지만, 다른 의미, 적들을 정복했다거나, 조상을 섬기는 의미로 하는 식인을 하는 부족도 있습니다. 소위 조상의 살을 먹음으로서 그 권위와 능력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당연히 이정도 대우를 받아야 하고,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 너는 내게 이렇게 해줘야 한다등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당연한 것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지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우들, 댓가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부족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부족에서 우리가 엄청난 존경을 받는 원로, 추장과 같은 위치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가족이 왔습니다. 온 마을이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서 우리의 가족이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이제 장례를 지내야죠. 그런데 그 부족에서 우리를 너무 존경해서 우리의 가족의 시신을 다같이 구워서 먹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순순히 그래라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목숨을 다해 반대할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보는 눈이 이랬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비우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우다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쉽게 말해 비우다는 좋은 뉘앙스입니까 나쁜 뉘앙스입니까. 우리에게 비우다는 좋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것도 들어올 수 있는 여유가 갖게 하는 것. 아니면 자기성찰을 위한 것이 비우다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영향에서 온 것이죠. 그러나 7절에서 비우다는 이렇게 좋은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의 비우다라는 뉘앙스는 헛되게 하다. 파괴하여 공허하게 하다에 가깝습니다.
실제 역사속에서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왕이 애굽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페르시아의 왕은 양과 소같은 애굽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들을 앞세웠습니다. 애굽 군대는 감히 그 가축들을 향해 칼과 창을 휘두르지 못했고, 그 결과 애굽군은 패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가 신학을 배우면서 매우 놀랐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자체가 엄청난 고난이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되는 것이 무슨 고난일까요. 다르게 생각해볼까요.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개나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까.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말한다고 개가 되고 싶나요?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애굽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기 위해 무엇을 비웠습니까. 하나님의 본체를 비웠습니다. 본체와 형체는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심을 포기하고 파괴하여 공허하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8절에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이 ‘모양’이 어디에 쓰는 단어인지 아십니까. 창세기에 나옵니다. :26에서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이라고 할 때, 그 모양입니다. 조물주께서 완전히 피조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LXX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애굽사회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축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섬겼던 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 모든 우상들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애굽과 바로에게 알게하기 위해서, 각인시키시기 위해서 다섯째 재앙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것만해도 엄청난 고난이며 순종이십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거기서 더욱 낮추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애굽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저가 8절을 개인적으로 번역해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이 되심으로 스스로를 낮추셨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가 심판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나와 너, 1:1의 관계로서 바로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쉽게 말해 공식적인 계약서와 같습니다. 계약서에는 그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바로와 애굽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피재앙을 제외하고 애굽인들의 목숨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까? 심지어 피재앙조차 정말로 애굽인들이 죽기 전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가축의 재앙이후 나타나는 재앙들은 애굽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재앙들이 나타납니다. 악성종기가 애굽인들의 피부에서 돋아나고, 하늘에서 불타는 우박이 떨어져서 논밭의 작물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있는 가축과 사람도 죽입니다. 메뚜기가 와서 조금 남아있던 먹거리들을 다 없애버립니다. 이와같이 이제 애굽인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고, 환경이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들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기다리심, 사랑의 인내가 끝나고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 때문인지 5절과 6절에서 가축의 죽음을 ‘이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나타난 단어가 사건이나 일과 관련해서 쓰인 경우, 그 사건은 ‘심판’과 관련해서 쓰입니다. 창12장에서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고 바로를 속인 사건에서도 ‘이 일’로 큰 재앙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약 200번 정도 이 단어는 심판과 관련해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애굽을 향한 관용과 인내를 끝내고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8절을 번역하며 한 부분을 깊게 묵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순종이 되심’이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무엇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되셨습니까. 영광이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순종이 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높이심에 주목할 것입니다. 특히 뒷부분인 9절부터 11절을 읽으며 가슴이 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9절에서 11절처럼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까. 정말로 이전에 받을수 없었던 영광과 존귀를 한몸에 받으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 어디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축을 구별하여 죽이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까. 오히려 그것은 공의의 심판이라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5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 말씀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축의 죽음 자체에 있습니다. 왜 지금 애굽인의 가축들이 떼몰살을 당하고 있습니까. 애굽인의 죄 때문입니다. 바로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있는 애굽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의 가축이 죽고 있습니다. 왜 이게 하나님의 선하심입니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희생, 그것이 양이든지 소이든지 비둘기든지 그들의 생명으로 다른 자의 죄를 속한다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가축들은 누구의 죄 때문에 희생되고 있습니까. 애굽인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의 소와 양이 말과 나귀가 낙타가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인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있는 제사를 억지로 받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애굽인들을 모두다 죽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끊고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의 주인 애굽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피의 제사를 혐오했는데, 그 결과 제물이 되어야 하는 가축들이 제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9-11절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당연히 받아야할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서는 것도 당연한 자리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셨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 하늘과 땅, 땅아래의 모든 무릎과 혀가 예수님께 굴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피조물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중에서도 분명히 애굽인들과 결탁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소위 착한 애굽인을 만나 배려받으며 그럭저럭 사는 이스라엘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자들은 모세와 아론의 행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9절에서 11절이 감명이 되는 것일까요.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역시 받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재앙을 통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실제로 11절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받아주시고 살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수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우리에게 좋다고 꼬리친다고 직장에서 우리가 높임을 받습니까. 진급을 합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죠.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다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가축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곱 번째 우박재앙에서 들에 나가 있다가 죽은 가축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또,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쫓아온 애굽군대가 타고 있던 말들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고센땅은 이 재앙에서 빼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축과 함께 있던 애굽인의 가축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또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순종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축이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된 것처럼 이야기하시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심조차 자신을 위해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하늘 위, 천국에 있든지, 죽어서 땅아래에 묻히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모든 것을 모아서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시고 있다라는 말씀이 바로 9-11절의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죄를 짓고 그 자리에서 곧장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리에서 즉시 죽을 것이라는 뉘앙스였는데, 죽었습니까. 잘 살면서 자자손손 번성하지 않았습니까.
즉,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영광이 되게 하시는 분,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분명 심판하지만, 그 속에 결코 은혜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이스라엘에게 선대하는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에 뭐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정말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깔보는 애굽인이었다면, 종의 가축과 주인의 가축을 섞어서 기르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시며, 이 죄악된 세상에 선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때, 우리는 악인이 망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저사람이 믿는자가 맞나 싶을 정도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울분에 차고 답답해할 때도 있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를 사랑하시고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랑, 말로 다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여 예배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찬양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십니다. 헌금을 할 수 있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시에 결국 끝까지 하나님을 무시했던 자들이 우박재앙때 자신의 가축과 종들을 죽게 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은 장자의 죽음으로 10재앙이 끝났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지는 않으십니다.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다면, 그 선하심을 항상 앙망하며, 우리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상황을 살피는 자입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삶으로 그 선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습니까. 어떤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댓가를 치를 수있겠습니까. 그럴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순종 그자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영광받으심조차 우리를 위함이신 예수님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그 고난주간에 우리의 구주의 마음을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ㅇ교회소식은 주보를 참고하시기바랍니다.
ㅇ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입장은 예배30분전부터 가능하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ㅇ이번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기헌금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ㅇ이번주 금요기도회는 연합구역예배로 드리며 특송은 6교구입니다.
ㅇ이번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하루 한 끼 이상 금식하셔서 고난주간 금식헌금을 다음주일에 준비하여 드리기 바랍니다.
ㅇ 김중식 목사님 원로추대예배가 있습니다. 일시는 2월 22일 이번주 토요일 오후 2시이며, 장소는 우리교회입니다.
ㅇ환우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16장 다같이 찬양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ㅇ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좋으신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