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되, 낙망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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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 views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보면서, 기도의 대한 필요성과 자세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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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는 앞의 구절에서 나온 최종 심판의 맥락을 반영하여, 판사와 과부에 관한 비유 (누가에게만 해당)를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하시는 분명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게 되면,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음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것 입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낙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보니까, 낙심하다라는 것은 바라던 일을 이루지 못하여서 맥이 빠지고 마음이 상한 상태를 낙심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되, 오늘 우리에게 낙심은 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계신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재판관과 과부가 등장을 하는데요,
재판관이라고 하면, 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분쟁을 조정하고 심판하는 권한을 가진 자로 말합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시고 (; ; ) 소외된 인생들을 돌보시는 재판관이십니다.
()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따라 재판하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신 재판장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의미에서 보게되면 재판관이 되려면 하나님을 누구보다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의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정의를 실행키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을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재판관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았라고 말씀합니다. 재판관으로써 가장 가져야 할 덕목인데도 불구하고 기본이 안된 사람이였습니다.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였을 것을 가만할 때 재판관이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재판장이었기에 이스라엘 사람을 무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재판관은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장면을 보면, 굉장히 나밖에 모르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였던 것 같습니다.
상대로 과부가 등장을 합니다.
과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남편을 여읜여자를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에서의 과부는 나그네와 고아와 함께 소외된 계층 중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사회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남편을 여읜(사별한) 여자. 항상 외침을 많이 받아 온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 나그네와 더불어 가장 소외된 계층 중 하나다. 이스라엘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또 남편과 일찍 사별한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았다는 그릇된 인식과 편견 때문에 과부는 사회·경제적 활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이 과부의 보호자이심을 천명하면서, 과부들이 억울하게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 ; ; ).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매 삼 년째 드리는 십일조는 과부의 구제에 사용되었으며(), 절기 때는 특별히 과부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 즐거워하였으며(, ), 환난 중에 있는 과부를 돌아보고(), 추수 때에는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기억하여 기근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중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심으로써 과부에게 관심을 보이셨다(). 이뿐 아니라 성경에는 비록 과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효행의 대명사 룻(),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께 축복한 여선지자 안나(), 성전에서 두 렙돈 헌금한 과부(), 선행과 구제에 힘쓴 도르가() 등이다.
한편, 구약 시대 제사장의 아내로서 과부된 자는 다른 제사장과 혼인할 수 있었다(). 또 남편과 사별한 여자는 남편의 형제를 통해 후사를 얻는 계대결혼(繼代結婚) 제도도 있었다(). 여기서 보듯이 고대 사회에서도 과부는 엄연히 재혼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 ).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절제할 수 없다면 재혼하되(; ) 할 수 있다면 과부는 혼자 살며 믿음 생활에 열심을 품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권면하였다
가스펠서브. (2006). In 라이프 성경사전 (1판 ed., p. 76).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길 5-9(03176): 생명의말씀사.
오늘 본문에서는 사실 과부에 관련되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과부는 승부사의 기질이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끊기 있는 사람 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담대하고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과부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부의 상황이 어찌되었든 간에 어떠한 것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나오는 재판관 행위를 보았을 때 ‘얼마 동안 듣지 않았다 ’는 표현으로 보아 굉장히 책임감이 없고 관심도 없는 행동이 한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과부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은 과부의 모습입니다.
끊기 있게 계속 찾아가서 괴롭힙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간청이라는 것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매달리는 자세를 말합니다. 바로 과부의 자세가 이러했습니다. 단순하게 요구하는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는 방법을 간청이라고 말합니다. 지위가 낮거나 힘이 없는 자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바로 간청입니다. 지금 이 과부의 상황과 너무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 이 재판관은 5절에 보니,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진피터슨의 메세지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여자에 집요한 펀치에 내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말겠다.”라고 표현합니다.
절대로 바뀌지 않을 꺼 같은 재판관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왜 바뀌었을까요? 재판관이 과부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동정하고 그의 입장을 배려해서 변화 된 것이 아니라, 과부의 끊길긴 탄원이 재판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괴롭게 하였습니다. 재판관이 보았을 때 쉽게 과부가 인정하고 떠날껏 같지 않고 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힐 것이 분명하기에 그를 도와준 것입니다.
여러분 과부를 도와주는 사람을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요즘 시대에 국회앞에서 소외계층에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듯, 이 과부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다 보니, 시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그럼에도 그는 당돌하고 더 당차게 재판관을 찾아가서 호소한 것입니다.
1절 - 재판장에게 공정한 판결을 호소한 이 여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의가 시행되도록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비유임.
과부 - 가난하고 궁핍하며 억눌린 자들을 상징함.
7절 -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의 기도를 들어 줬을 떄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자신이 택하신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보면, 밤낮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항상 이라는 의미이다.
재판장이 과부의 탄원을 무시하고 응답하지 않았을지에 대한 부분은 자세하게 알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재판의 상대방이 상당한 권력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유력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또는 과부의 송사가 자신에게 아무 이익이 없기 때문에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고 애가 타는 사람은 과부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판장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거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뭔가 조치를 취해서 그녀가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해주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과부의 입장을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그녀를 동정하거나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가 갑자기 개과천선한 것도 아닙니다. 과부의 끈질긴 탄원이 그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가 고통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명예에 흠이 생기고 위신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과부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직접 재판장을 찾아가서 정의로운 판결을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사회적인 규범도 넘어서고, 수치심도 무릅쓰고 당돌하고 담대하게 직접 재판장에게 호소합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원수는 재판의 상대방 또는 피고를 가리킵니다. “원한을 풀어주다”는 말은 하나님이 억압받는 의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때 쓰는 말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는 정당합니다.
과부는 재판장의 반응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약해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녀는 자주 재판관에게 갑니다. 이는 반복적이며 지속적인 그녀의 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한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실망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탄원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결국 재판관은 염려하는 마음이 들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기적이고 불의한 재판장이지만 지속적이고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하물며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합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정의로운 하나님을 직접 대비시키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불의한 사람과 극단적으로 정의로운 하나님을 대비시킴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불의한 재판장이 말하는 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깊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내가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리라”는 말입니다. 재판장이 원한을 풀어주기로 결심하게 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부의 끈질긴 탄원이 불의한 재판장의 응답을 받아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끈질긴 기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7절과 8절에서는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재판장으로서 그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시는 주권과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의함 속에서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며, 의로운 백성의 박해자들을 심판하여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움과 긍휼하심으로 그의 백성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때가 되면 결연하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게 만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속히” 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NIV 성경에는 “quickly”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판결의 행동이 시간적으로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 판결이 갑자기, suddenly, 혹은 결정적으로, decisively하게 진행되어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억울함을 갚아주시는 종말론적 개입은 오래 참으시는 것 같지만 정한 때가 되면 그 백성들에게 단연코 임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밤낮 그에게 부르짖는 그의 택하신 자들”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밤낮’은 오래 계속된 기간이 아니라 긴박성과 집약성과 전적인 헌신을 포함하는 간절하고 계속적인 기도의 형태를 말합니다. “부르짖는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고립되고 주변으로 밀려나서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택하신 자들”은 “남은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그들의 기도는 개인적인 소원성취의 기도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집합적이며 의례적이며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정의의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알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이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17장 20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자가 올 때, 즉 재림과 종말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여하여 주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을 보겠는가?”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전과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인자의 강림이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이 이루어질 때 그의 정의로운 판결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인지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신뢰의 행위 즉 끈질기고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도로 증명되는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개인적이고 세상적인 기도 제목을 포기하지 말고 부르짖으라는 의미로 축소시키곤 합니다. 자녀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좋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 고시 패스하게 해주세요, 좋은 직장 갖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남편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더 큰 아파트 갖게 해주세요, 좋은 차 사게 해주세요........ 등등. 이런 기도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인자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그 전까지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을 확실하게 분명히 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실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불의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으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들과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하게 돈을 버는 자들에게 강도들이라며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반면에 잡히신 뒤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와 빌라도 앞에서, 그리고 헤롯 앞에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억울함을 하나님은 아시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시고,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는 여전히 억울한 일들이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최근에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과 그것을 옹호하는 보수언론에 의해 한 개인과 한 가족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과부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억울한 일들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서 20년을 보내야 했던 윤모씨와 같은 일이 이 땅에 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우리 자신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미시오데이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와 정의가 물 같이 흐르며 사랑과 평화가 가득 찬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초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골방에서, 십자가 밑에서 기도만 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부르짖고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인자가 다시 오셨을 때 보고 싶어 하는 믿음은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처우에 대해 끈질기게 요구하는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믿음을 지켜가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