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1 더리버처치 새벽예배 (마27:62-66) '약속을 남겨두신 승리의 예수님'
본문
서론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토요일 – 육신은 무덤에 영혼은 낙원에 계심(마 27:62–66).
본론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빌라도,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자(Pilate) ‘빌라도’(Πιλᾶτος, 필라토스)는 ‘창을 가진 자’란 뜻이다. 본명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예수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게 했던(막 15:15; 눅 23:23; 행 3:13; 13:28)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A.D. 26–36년경, 눅 3:1)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의 후임으로 파견되어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지휘 아래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유럽 전 지역에 퍼져 있던 개신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일 것이다. 이는 특히 크게 루터 중심의 루터파와 칼뱅과 그의 제자들 중심의 개혁파 운동 사이에서 나타난 신학적 견해 차를 말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개신교의 다양한 개혁 운동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통합된 교리교육서의 필요성이 개혁 운동자들 사이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258)
이번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입니다.
38문: 그분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定罪)를 받으셨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 말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말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셨다고 말하면, 빌라도만 나쁜 놈이 됩니다. 하지만 ‘빌라도 치하에서’라고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재판 자체가 빌라도의 책임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역할, 두 가지
예수님의 재판에서 빌라도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의 무죄 입증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 앞에 와서는 “이 예수는 로마 황제 아닌 다른 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라면서 모함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적어도 로마를 대신하는 총독으로서, 예수님이 반역을 꾀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2) 빌라도의 두 번째 역할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 즉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책임 하에서 예수님은 사형당하셨습니다. 유대의 총독은 로마 군인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높거나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권력 앞에 예수님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추셨습니다. 더 이상 낮출 수 없을 만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어마어마한 대로마제국의 황제도 우스운데, 그가 보낸 변방의 작은 나라를 책임지는 총독이야 얼마나 낮은 자리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앞에 엎드려, 그의 권위에 순종하십니다. 그의 재판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빌라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빌라도의 재판을 하나님의 재판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시킬 권한이 있다고 으스대자 주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요한복음 19:11)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별 하찮은 권력을 가진 빌라도 앞에서 대꾸도 제대로 못하시면서 자신을 낮춰서 죄인으로 벌을 받으신 이유는, 진짜 죄인이기에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꼼짝없이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해야 할 우리가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들어가되, 재판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라도 치하에서!”
빌라도를 비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을 낮추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하찮은 권력을 가지 빌라도 앞에 한없이 낮아지심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우리를 당당하게 그 앞에 설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