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6 [공동체 예배] 탁월한 주님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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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7:24–28 NKRV
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정리 정돈

이번 주에 동양물산에 다녀왔다.
공장장님의 소개로 공장 곳곳을 다니면서
3s를 소개받았다.
정리, 정돈, 습관화 이다.
정리는 쓸 것과 쓸모 없는 것을 구분해서 잘 버리는 것이다.
정돈은 쓸 것이 제 자리에 항상 놓여 있는 것이다.
습관화는 정리 정돈이 모든 삶에 녹아져 들어가는 것이다.
공장을 3일만 3s를 실천하지 않아도
제품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공장이 엉망이 된다는 것이다.
인사이트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인생의 탁월함을 위해서
신앙의 탁월함을 위해서 정리, 정돈, 습관화가 되어 있는가?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돈할 것은 무엇일까?
습관화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참 너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설비를 하면서
동우 형제랑 방송실이 너무 더러워서
우리 방송실 한 번 또 치워야 겠다 그랬더니
일주일이면 도로 더러워져요 하더라.
이런데 무슨 탁월함이 나올까.
이런데 무슨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을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나님이 이번주에 마음이 상하는 일을 만나게 하셔서
크게 낙심이 됐다.
이런 감정적 정리가 되지 않는 난데,
무슨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마음이 많이 어려웠다.
‘나’에게 그렇게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실수하고 실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곧바로 질문하게 된다.
지난 주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마른 뼈 같은 존재임을 생각했다.
우리는 뼈가 마르고, 소망이 사라지고, 끊어진 존재다.
널부러진 마른 뼈 같은 우리들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직접 무덤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를 끌어 나오시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이라고 나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일으키시려고 하시는지
다음 넥스트 플랜을 질문해야 한다.
우리를 일으키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마른 뼈를 왜 탈출해야 하는가?
그 일을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무엇을 하시는가?

뼈 - 막대기

에스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바빌론에 멸망하기 전후로 20년동안 사역했다.
그는 유다가 어떻게 멸망해가는지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이후로도 유다의 지도자였던 사람들은
여전히 성전이 건재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에스겔은 계속해서
유다가 심판을 받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셨다고
선언하고 선포했다.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에스겔을 싫어했을 것이다.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586년에 완전히 성전까지 무너진 이후로
그들의 자아 정체성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느냐고
질문하고 원망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른 뼈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 에스겔의 메시지의 방향성과 톤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심판을 이야기했었는데, 이제는 회복을 이야기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오늘 이야기를 다시 마른 뼈와 함께 읽어보자.
오늘 본문에서 주되게 등장하는 상징은 ‘막대기’ 이다.
유다라고 쓴 막대기와 온 이스라엘 이라고 쓴 막대기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막대기 둘이 에스겔의 손에서 하나로 쥐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 된 이 민족을 다윗이 왕이 되어 다시금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준수하며
야곱에게 준 땅에서 자자 손손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이 ‘막대기’가 히브리어로 에쯔 인데,
앞서 환상가운데 나왔던 ‘뼈’가 히브리어로 에쩸 이다.
그러니까, 이 막대기 이야기는 마른 뼈가 다시 일어나서
하나가 됨과 동시에,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른 뼈가 살아나듯이,
막대기들은 다시 생명을 얻어 싹을 틔울 것이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들은 ‘군대’가 되어, 마곡의 왕 곡을 물리치는
위대한 나라로 세워질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환상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 환상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틀리셨는가?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합쳐지는 일이 생기지 않았고,
이후에 나오는 성전에 대한 환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혹자들은 에스겔의 환상 속의 제 3의 성전이 세워질 때
종말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일까?
하나님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것일까?

완전함과 탁월함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위치’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코로나 사태 속에서 사람들이 고통하고 아파하고 죽어갈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는가?
우리의 아픔에 관심이 있으신가?
이것이 우리의 당면한 질문이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 분이신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속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하나님이 이 질문에 답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계시는지
청사진을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탁월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처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서 보여진다.

‘내 처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리라는 약속에서
‘그 범죄한 모든 처소’(23)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다.
에스겔 37:23 NKRV
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리고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루시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27).
에스겔 37:27 NKRV
27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처소가 ‘그 범죄한 모든 처소’와 비교된다.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질 것이다.
그 성소는 그 범죄한 모든 처소를 거룩하게 한 곳이다.
‘마른 뼈’, 막대기, 범죄한 처소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
이곳이 바로 ‘내 처소’ 인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자서전적 소설인 ‘나이트’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에게 하나니밍 어디에 계시는지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생긴 일 이다.
세 명이 똑같은 순간에 교수대에 올라갔다. 세 명의 목에 똑같이 올가미가 씌워졌다. 두 명은 어른이고 한 명은 어린아이다. 두 명의 어른은 “자유 만세!”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 외쳤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동시에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깔렸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줄에 매달린 소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생생했다. 누군가가 또 외쳤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있어”
우리가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라고 외치고 울부짖을 때
우리의 마른 뼈 같은, 메마른 막대기 같은,
범죄한 처소와 부정해진 그 곳에,
하나님은 그 곳에 계신다.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나님은 성소에, 거룩한 곳에 계셔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성소를
부정한 이방인, 탐욕스럽고 추악한 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히고, 치욕스럽게 변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리고 그 성소를 떠나셨다.
그리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눈물흘리며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들을 향해
찾아오셨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탁월하심이다.
우리가 밤 가운데 헤메고 있을 때,
길을 잃은 안개 속에서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서
수영을 멈추는 존재 같을 때,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해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는 존재 같을 때,
이미 포기할 만큼 완전 엉망이 된 것 같을 때,
미래가 없고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 될 때,
내 인생은 여기까지라고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의 탁월하심은
망가지고 상처난 우리를 향해 오셔서 우리 안에
자신의 성소를 만들기 원하신다.
그 안의 마른 뼈를 일으키기 원하시며
막대기를 살려 잎사귀를 내고 열매맺도록 만드시기 원하신다.

여호와 삼마

다시 살리신 마른 뼈로 만드신 군대로
알 수 없는 나라와 알 수 없는 왕인
마곡의 왕 곡을 물리치게 만드신 하나님은
성전을 다시금 아름답게 세우시고,
그 안에 좌정하실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완전하신 계획이 보인다.
38-39장의 마곡의 왕 곡의 심판과 멸망 이야기는
고스란히 요한계시록 21장의 최후 심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0-48장 에스겔 마지막 부분은
오로지 성전이 어떻게 다시 세워질 것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 중에 임하실 것인지 보여준다.
여기에 측량되는 모든 모양은
‘정육각면체’로 집중된다.
이 정육각면체의 성전은 계시록 21-22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으로 등장하며,
성전에서 흐르는 강물은 계시록의 생명 시냇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에스겔 맨 마지막,
48장 35절은 이렇게 끝난다.
에스겔 48:35 (NKRV)
35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의 뜻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 이다.
요한계시록 21:22 (NKRV)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요한계시록 22:21 (NKRV)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렇게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3:16 (NKRV)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탁월하신 계획은
성전을 깨뜨리시고,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것이다.
마른 뼈 같은, 소망이 사라진 것 같은, 멸절된 존재 같은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셔야 하는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제 우리의 답은 나왔다.
우리에게 계신다.
하나님은 어디 계셔야 하는가?
우리에게 계셔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성전이 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가 된 우리는
어떻게 마곡의 왕 곡을 무찌를 수 있는가?
이것의 답은 오로지 ‘성령’님의 역사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우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이야기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탁월하심을 닮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닮은 완전함과 탁월함을 통해서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회의 선교역사는 그것을 아주 명확하게 반증해왔다.
완전함과 탁월함은 어떤 ‘영웅’을 필요로하는게 아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교육자, 그리고 뛰어난 정치가로서
네덜란드의 수상까지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네덜란드에 삶의 체계로서의 신앙을 뿌리내리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학교를 세웠고, 국가 시책들을 강구했다.
정말 뛰어난 정치가로서 그런 면모들이 네덜란드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 뼘의 공간에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신 곳은 없다’ 라는 기치 아래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지금의 네덜란드가 그런 나라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은 한 사람의 뛰어남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변화는 아무런 힘이 없다.
반짝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은 명백하게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뛰어난 다윗 왕을 또 다시 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윗의 자손은 마른 뼈 처럼 고뇌하고
살 소망이 끊어지셨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저주받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성령의 임재로 변화받은 이들을 통해서
교회가 만들어졌다.
교회의 정체성은 헤드쉽이 아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함과 탁월함을
닮아갈 때 진짜 교회가 힘이 생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신앙생활을 우리 멈추길 소망한다.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신앙에 매몰될 때,
우리는 조금만 무너지고 실패하고 실수하고 어려운일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어디계시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이 고정될 때,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진짜 교회 답게, 탁월하게 만드시길 원하시는,
그래서 ‘내 처소’를 ‘우리’에게 두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여호와 삼마’ 내가 그 속에 , 그 안에,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 공동체 가운데
계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탁월한 주님의 처소로

5월 3일 마지막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5월 10일 ‘성찬식’을 기점으로 다시 공동체 예배가 시작 될 것이다.
가을에 또 다시 코로나가 재발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 더 큰 위협이 올 수 도 있다는 위기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있는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함께 모인 곳에서도, 흩어진 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길 원하신다.
우리의 영적 근육들이 더욱 단련되고 키워져서
어떤 위험과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마른 뼈 같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멸절된 존재 같아도-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속으로 들어오신
자신의 ‘처소’ 삼으신 주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기회에 함께 모이지 못해도 제자훈련 할 수 있는 시스템과
한 번 모였을 때 정말 밀도있게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양 날개를 구축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우리교회가 ‘위로부터’의 신앙주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신앙 개혁이 이뤄질 수 있기를.
그래서 진정한 영적 전쟁의 승리와
세상속에 탁월한 복음의 빛을 전달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탁월한 주님의 처소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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