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27 SEEIT 북한중보연합기수도회 (잠12:26) '인도자여 일어나라'
찬양
본문
서론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북한 교회의 수난
1) 주일 인민위원 선거
광복을 맞이한 북한 교회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교회를 재건했지만 뜻하지 않은 소련군 진주와 김일성 등장으로 탄압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5년 11월 16일 평안북도 용암포 지역에서 윤하영,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서 몇 명이 모여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자 했지만 탄압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 교인과 학생 5,000여 명이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 등으로 집결해 퇴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공산당 당원과 소련군인 들은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때 김화식 목사를 비롯해서 많은 민주 인사들이 구속당했다.
또한 1946년 3월 1일 독립운동기념일을 맞이해서 평양 교역자회에서는 3·1절 기념예배를 장대현교회에서 드리기로 했다. 같은 날 공산당측에서는 평양역 앞에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그러자 기념예배를 하고 있는 장대현교회에 공산당들이 들이닥쳐 교인 일부를 구타했다. 이때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항의했다. 당시 공산당들이 주도했던 역전 기념식장에서는 수류탄 투석 사건이 발생하여 식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공산당들은 이 수류탄 투석 사건이 기독교가 공산당을 방해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기독교를 탄압하고, 교회 지도자를 영장 없이 구속했다. 그러자 김일성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어용 기독교 지도자 세력이 일어났다.
북한 공산당은 1946년 9월 5일 입법부 설립을 위해 시·도·군 인민위원 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겠다고 법령을 포고했다. 이처럼 주일에 선거를 실시하려 한 것은 참여하지 않은 교역자나 교인을 색출하여 숙청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렇게 일자를 정한 것은 과거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동방요배 강요와 다를 바 없는 일로 교회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교계는 이를 반대했다. 당시 평양에는 30여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목회자 대부분이 신사참배에 참여했지만 그중에는 출옥한 성도도 있고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를 사임하고 은거한 목회자도 있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주일 선거에 강경하게 반대했다.
1946년 10월 25일 북한5도연합회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소집되었었다. 이때 5도연합회 회장인 김진수 목사의 사회로 개회된 회의에서 총선거를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문을 작성하여 김일성과 소련군 사령관에게 제출하기로 하고 7인 위원회를 선출했다. 7인 위원은 장대현교회 이유택 목사, 산정현교회 김철훈 목사, 사인장교회 최감은 목사, 연회동교회 김윤찬 목사, 신암교회 김길수 목사 등이었다. 이때 결의한 5개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둘째, 정치와 교회는 엄격히 구별한다.
셋째, 예배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사용을 금한다.
넷째,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8)
북한5도연합회의 7인 위원은 곧바로 선거를 평일로 변경해 달라고 공산당 본부에 청원을 냈지만 거절당했다. 이때 7인 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평양을 사수한다.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성을 위하여 이 작은 몸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기로 한다.9)
이들은 교인들에게 투표에 참여하지 말 것을 통보했으며, 투표일인 주일은 새벽 기도회부터 밤 12시까지 남아서 기도하며 온종일 교회에서 보내도록 했다. 많은 교인들은 이러한 지시에 따라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지역 공산당원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교역자와 교인 들을 정치 보위부로 연행해 무자비한 고문을 시작했다.
2) 조선기독교도연맹 출현
이 무렵 공산당 당원들은 강양욱 목사를 비롯해서 기독교 어용 단체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을 결성하고, 김익두, 박상순, 김응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켰으며, 초대 총회장에 박상순 목사, 부총회장에 김응순 목사, 서기에 조택수 목사를 선출했다. 이들은 11월 3일 주일에 모두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꼭 투표장에 나와 투표에 참여토록 열심히 선전했다. 여기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은 11월 3일로 예정된 선거를 지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주장했다.
첫째,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둘째,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략한다.
넷째, 교회는 선거에 솔선하여 참여하기로 한다.10)
김일성의 장인 강돈욱 장로와 육촌간인 강양욱 목사는 당대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1943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48년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민족 진영의 목사와 5도연합회 소속 목사들에게 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강요했으며, 응하지 않는 자는 공산당원에게 고발해 갖은 고초를 당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사들은 어용파, 거부파, 불가피파로 나뉘었다.11) 이 일로 북한 교회는 크게 양분되면서 상호 모략과 중상을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공산당의 지지를 얻으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강령을 발표했다.
첫째, 기독교의 박애적 원칙에 기초하여 인민의 애국열을 환기하며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건국 사업에 일치 협력할 것
둘째, 민주 조선 건국에 해독인 죄악과 항쟁하고, 도의(道義) 건설을 위하여 분투할 것
셋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와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전력할 것
넷째, 기독교의 발전을 위하여 매진할 것12)
조선기독교도연맹에서 발표한 강령에 반대하고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은 5도연합회는 탄압과 숙청을 당하기 시작했다. 광복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이성휘 목사는 신학교가 조선기독신학교로 통폐합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뒤 공산당의 감시를 받다가 결국 한국전쟁 당시 우익 인사들과 함께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목회자는 추방되거나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인민재판은 공개여론재판이기에 목회자나 평신도 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당시 북한 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왔던 김화식 목사를 비롯하여 김인준, 이정심, 김철훈, 이유택 등 많은 목사들이 순교를 당했다. 일부 목회자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야밤에 38선을 넘기도 했다. 이러한 탈출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목회자들이 숙청당하거나 월남하자 한때 북한에는 기독교가 사라지기도 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릴 때 남측 기자들이 과거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실질적인 인물이었던 강양욱 목사(당시 조국통일 민주주의 조선중앙위원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문 : 북한 기독교의 형편은?
답 :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도발한 침략 전쟁 3년 동안 미 제국주의의 폭격으로 교회가 다 파괴되었으니까. 미군을 따라온 종군 목사들이 선전하기를,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며 미국에 복종시키기 위한 술책을 썼다. 미국 선교사들이 종교를 선전했는데 교회를 파괴한 것도 미국 종군 목사였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없어졌고 신도들 중에서도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북반부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했지만 다 말아먹기도 했다. (……)13)
이 회견대로라면 북한에는 단 하나의 교회도 없으며, 교인도 공식적으로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남북적십자회담 기자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한국일보〉 사회부 김창열 부장은 북한 교회의 실정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북한에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유일한 종교, 유일사상이 있을 뿐이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