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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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시.(9)
감사시.(9)
1-3 / - 3절 원수들이 망함으로. ‘전한다’
4-6 / - 4절 나를 살펴본 의롭게 심판의 결과다 그럼 대상은 어떻게 되나. 5절,
5.6 상당한 고난을 받았을 것 같다. 아니면 철저한 심판에 대해 확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7-9 / 7절에 이러한 심판, 4절의 의로움. 1절에 ‘기이한 일들’ - (뜻박의 벌어짐) 이것이 7절 ‘준비’되는 것. 살펴보고 계시는 것에 대한 감사인가?
8절, ‘공의’, ‘정직’이 판결의 도구다. 이것을 신뢰한다.
9절부터 생각해보니까. 그런 일이 있기전에 화자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요새. 오새.
10-11 -13절까지도 명령의 형태로 유지된다.
10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그런 상황에서 주를 알고 있는가?
11절 분위기는 바뀌어서(명령). ‘너희는’ - 그러니까. 지금 ‘고난 중에 있기 때문에’ 일까. 아니면 이런 사실을 기반해서 ‘찬송. 선포’인가?
12-13 / 12절 갑자기 강한데.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13절 은혜, 사망의 문 / 주여. 주여, - 그런 앎으로 요구하는가. 끝난 사건인데 다시 요청하는가?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일까?
14절 ‘그리하시면’ 미완료 형
15- 16 / 완료 / 16절 ‘자기를 알게 하사’ - 신적 표현 - 하나님은 알아서 자기를 나타내신다. - 8절 ‘공의’ ‘정직’하시니까?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심판을 통해서 ‘자기를 알게’하시는가? 악인은 ? 시편1편에서 -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가볍다. 악인의 길은 망한다. 의인들의 길은 인정이 된다. 악인의 특징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힌다.
17- 18 / 미완료.
19-20 명령형/ 알게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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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다. 감사가 대체적으로 어떤 일의 결과가 내가 원하는대로 될때 감사를 하거나 뜻하지 않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해결될 때 감사하게 된다.
1절이 미완료형을 볼 때 진행중인 사건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기이한 일들’이라고 했을때 이것은 시편 기자가 의도하지 못했거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절 부터 완료형의 전개는 ‘그러한 사실’을 봄으로 인해 시편 기자의 확신이 고백적으로 나타난다. 뒤에 나오는 ‘알게’라는 것은 이런 고백을 통해 되어질 일을 보는 저자의 고백이 담긴것 같다. 그러면서 ‘앎’이란 의인이나 악인에게 같이 적용이 된다. 후반에는 그 적용이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일하시는데 그 근거는 ‘공의’ ‘정직’이다. 그걸 보니 ‘알게’된다는 것이고, 악인은 넘어지는데 그걸 보니 ‘알게’된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서 20절 ‘알게’ 해달라고 한다. 그렇다면 감사는 ‘알게’됨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됨에 대한 시편 기자의 감사가가 터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다윗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본다. ‘내 원수들’이라고 했을 때 원수들이 물러감(3)이 ‘넘어져 망함’이 나타났다. 이것은 ‘보좌’에 앉으사 (나를 판단하신다.)내가 왕인데 나 역시 판단을 받는다. 그 결과가 의롭다는 결과 역시 원수들의 넘어짐, 망함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그 보좌에 영원히 앉으신다면 이것은 지금처럼 계속해서 심판을 위함인데 심판은 만민이 대상이 된다. 의인은 의롭게 심판되어지고 불의는 망함. 심판./ 의롭게 된 자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요인이다.
시편30편
1-3절
나를 끌어내사…상황이 어디 숨어있었나? 끌어내사 원수가 기뻐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하신다는 건가? / 원수가 기쁘게 하지 못한다.(완료) 내가 주를 높이는 것은 미완료 상태, 그러니까. // 끌어낸다.(미완료) 하나님께서 그리고 구하게했다. 원수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게 했다.
계속 ‘내가’이네.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다. 끌어내신 것도 여호와,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한 것도 여호와이시라면 ‘부르짖으매’ 하도록 하신것도 여호와 아니신가? 끌어낸 곳이 스올이었다. 그렇게 살리심 때문에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다. 영혼이 스올에 이는 깊은 절망에 있고 절망은 곧 실재적 죽음이라는 곳에 도달한다. 다윗은 아마도 아히도멜의 이야기를 알것이다.
6 כִּ֤י רֶ֨גַעa׀ בְּאַפֹּו֮ חַיִּ֪יםb בִּרְצֹ֫ונֹ֥ו בָּ֭עֶרֶב יָלִ֥יןc בֶּ֗כִי וְלַבֹּ֥קֶר רִנָּֽה׃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SESB Version. (2003). (electronic ed., 시 30:6). Stuttgart: German Bible Society.
4-5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SESB 2.0 Version Chapter 30
וְ֝הֹוד֗וּ לְזֵ֣כֶר קָדְשֹֽׁו׃
주의 성도들아 =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왜지? 문제가 해결되었나?
וְ֝הֹוד֗וּ לְזֵ֣כֶר קָדְשֹֽׁו׃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노염은 잠깐, 은총은 평생./ 저녁에는 울음, 아침에는 기쁨/ 때 - 짝을 맞춰서 잛은 것과 긴 것을 대조한다.
6-7 자신의 상태, 교만. 그리고 거기에서 나타난 결과를 의미하는 것 같다.
형통할 때 사람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 의도가 무엇일까?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어서 이것을 ‘주의 은혜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6.7절은 다른 구조일까? 형통할 때는 나를 굳게 세운것같고, 흔들리면 주의 얼굴을 가리신 것 같다고 하는 것인지.?
8-12 응답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계속 보면 원수의 이야기는 상반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후반부는 슬픔, 근심에 대해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한다. 후반부에는 ‘여호와’를 계속 부른다.
시편 기자는 성전을 봉헌할 때의 내용을 돌아본다. 다만 기것이 봉헌과 자신의 상황을 연결하는 것이 봉헌의 취지와 맞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처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의 어려움이 있었다가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우리가 삶에서 교만했던(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시편 기자의 말처럼, 형통할 때하나님께서 해준다.) 모습을 반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에서 처럼 원수가 나의 어떤 형편 곧 스올로 내려간 상태, 무덤 곧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대해 기뻐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회복’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까지 이를 뻔한 일은 무엇일까? 오늘날 코로나처럼 그런 상황이 있었을까? 자신이 형통할 때 교만했던 것을 돌아보는 것처럼 자신이 무너져 어려움에 처해볼 때 그런 교만을 깨닫게 된다. 다만 그럼에도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이다. 그 자리로 끌어내어 주시는 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시편32
복이있다로 시작한다. 그럼 1장과 연결되는 의미는 없는가? ‘허물의 사함’은 뭘까? ‘허물의 사함’과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닐까? 죄 사함에 대해 쓰는 것을 느낀다. 마음의 간사가 없는 것이니 의도적 죄악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종일 신음’하는 상황 이것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고 있다고 본다면 관계에서 회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허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안는다는 시편 기자의 모습을 통해 기쁨은 곧 기도 대상자와의 관계가 아닐까.
32편은 참회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 교수님께서. 탄식과 감사가 어떻게 구분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죄사함으로 오는 기쁨을 시편 기자와 같은 정도, 결국 내가 느끼는 것에 비할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시편 기자가 왜 이렇게 기뻐하지. 아니면 그래 죄 사함은 이정도의 기쁨과 감사의 자세가 나와지..하는 상태는 결국 이것을 해석하는 나의 모습과도 함께 비춰 볼 수 있겠구만.
8~
`후반부는 ‘훈계하리로다’ 시인데 훈계도 하는 상황이네.
3절의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고집스럽움인가? 1-2절은 3절의 상황에 보면 시간적 공간이 보이기도 한다. / 복이 있는 상태’(시편 1편) 의 상태와 같이 지냈지만 그것을 모르다가 죄를 짓고/ 어떤 이유인가 모르지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라고 말함으로 이것이 결국 자신에게 ‘신음’./ 내 뼈가 쇠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라고 볼 수 있는가?
반전은 5절에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미완료 /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이는 곧 관계의 회복으로 느껴진다. 조건적 용서라는 개념이 아니라. 2절에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상태. 곧 ‘복의 상태를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다시 보면 1-2절은 하나님에 대해 시편 기자가 알고 있는 것을 ‘선언’하고. 3-5절까지는 자신이 그러하지 못한 상태를 정리하고 6-7이 반전의 결과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로 마무리하면서 8절부터는 교훈, 훈계, 가르침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10절 - 악인에게는 - 시편 1편의 흐름을 생각해 볼수 있겠다. 질문> 시편은 이렇게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가? 시가 고백, 기도라면 과연 기도에서 올려져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고백하는 자, 기도하는 자가 의에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불의한 자의 모습에 있는가?
본문의 말씀처럼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라고 했던 것처럼. 그 경건은 결국 1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복’이다. 축복이다. 3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1.2절에 선언한 내용은 중요하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았다. 물론 3절. 신음. 내 뼈가 쇠하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상황일 때 개선. 변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1장의 의미를 다시 세계야 한다. 시편 기자의 교훈처럼. 교만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73편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고백처럼. 관계는 곧 정직. 죄사함을 받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다.
주와 함께 있음이 복이라. 그렇다면 시편기자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9절처럼 하면 10절의 악인의 모습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11절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는 계속되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SESB 2.0 Version Chapter 92
הַשַּׁבָּֽת
시편 92편 / 안식일을 노래하는 시. (샤바트)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의 노래이다. / 다시 들어보니. 시편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자’, ‘악인’, ‘악을 행하는 자들’, 원수들’ ‘죄악을 행하는 자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일’ 없다.
이런 일이 주께서 행하신 일이 아닐까. 그러면 이렇게 찬양하는 건 빙 둘러 이야기할 뿐 실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게 아닐까?
시편 기자는 4. 5절 두 번이나 ‘주께서 행하신 일’를 헤아리고 있다. 그것을 아는 자신과 반대로 그것을 6절 ‘깨닫지 못하’는 것을 대비한다.
6절-7절은 그들의 상태와 결과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8절 ‘영원토록 지존하시’기 때문이다.
10절은 제사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뿔’, ‘신선한 기름’
14절의 ‘진액’은 특별한 단어로 기억한다. 사용이 잘 안되는 단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15절은 ‘정식’, ‘불의가 없음’은 감사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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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드리다.(부정사.) / לְהֹדֹ֥ות /
5 כִּ֤י שִׂמַּחְתַּ֣נִי יְהוָ֣הa בְּפָעֳלֶ֑ךָb בְּֽמַעֲשֵׂ֖יc יָדֶ֣יךָ אֲרַנֵּֽן׃
감사를 드린다. / 완료시제라면. 나를 기쁘시게 하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5절에 ‘키’
6 מַה־גָּדְל֣וּ מַעֲשֶׂ֣יךָ יְהוָ֑ה מְ֝אֹ֗ד עָמְק֥וּ מַחְשְׁבֹתֶֽיךָ׃
의문문이라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충분한 감사. 그리 크신지요. 어떤 것에 대한 궁금중인가.? ‘너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충분히 크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라는 의미일까?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이건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하실 수가 없다. // 이런 고백으로 생각해본다.
6절 부터가 어렵다.
감사한 내용이라면 악인이 깨닫지 못한것,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멸망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8 בִּפְרֹ֤חַ רְשָׁעִ֨ים׀ כְּמֹ֥ו עֵ֗שֶׂב וַ֭יָּצִיצוּ כָּל־פֹּ֣עֲלֵי אָ֑וֶן לְהִשָּֽׁמְדָ֥ם עֲדֵי
악인의 결과는 영원한 파괴 (미래) - 이것이 감사의 내용/ 아니면 이런 사실을 5절에 ‘주의 생각’에 대한 앎일까?
11 וַתָּ֣רֶםa כִּרְאֵ֣ים קַרְנִ֑י בַּ֝לֹּתִ֗יb בְּשֶׁ֣מֶן רַעֲנָֽן׃
주께서 높이셨다/ 10절에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 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럼 이 시는 대적에 대해 승리를 그리고 불의와 대립되는 의로운 사람에 세우심을 감사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이 또한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12 וַתַּבֵּ֥ט עֵינִ֗י בְּשׁ֫וּרָ֥יa bבַּקָּמִ֖ים עָלַ֥י מְרֵעִ֗יםb תִּשְׁמַ֥עְנָהc אָזְנָֽי׃
וַתַּבֵּ֥ט는 과거시제이고
תִּשְׁמַ֥עְנָה는 미완료시제이고
보는 것이 이미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그렇게 믿는다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확신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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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은 하나님을 찬양 하는 내용이라면
4-7절은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이유로 보인다.
8-11절까지 대적들은 하나님의 지존하심 그기고 원수의 패망과 연결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원수는 시편기자의 원수(11)로 보인다.
12-15절은 시편1편의 모습처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은 인상을 준다. ‘종려나무’, ‘백향목’… 예전 어느 설교자가 ‘상주하면 참외’하듯 이스라엘 사람에게 ‘종려나무’, ‘백향목’하면 풍요와 축복을 반대로 ‘풀과 같은’ 악인의 모습과 대비가 된다.
무엇보다. 이런 백향목은 성전 건축의 재료(왕상 5장) 나 종료나무는 레위기에서 즐거워 할 때(레23:40), 에스겔에서 ‘널판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각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등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종려나무와 백향목은 ‘성전’에 가까이 있다. 의인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의 성전에 가까이 있는 자가 의인이다. 그런 의인은 복이 있고 번성한다. 라고 본다면 감사시이면서도 이 부분은 일종의 교훈? 일 수도 있겠다.
시편65편
무엇이 감사의 내용일까? 특이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 땅에서 잘됨 때문 같아 보이기도 한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곡식을 주시나이다’ = 그들에게 (시편 기자는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잘됨을 감사하는가?)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라고 기술함으로 예를 들어 한해의 농사가 잘되어서 감사를 드리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들의 초장’에 떨어지는 기름 방울, 골자끼는 곡식으로 덮였다.
לְךָ֤ דֻֽמִיָּ֬הa תְהִלָּ֓ה אֱלֹ֘הִ֥ים בְּצִיֹּ֑ון וּ֝לְךָ֗ יְשֻׁלַּם־נֶֽדֶרb׃
침묵인데 - 그렇다면 찬송이 아직은 시온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 아니면 주께 침묵있고, 찬송 있고, 찬양에 다른 시편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라는 것에서 보면/ 찬양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는 생각이 든다.
3 שֹׁמֵ֥עַa תְּפִלָּ֑הb עָ֝דֶ֗יךָc כָּל־בָּשָׂ֥ר יָבֹֽאוּd׃
들으신다. 성막에서 분향단에서 제사장이 하는 기도가 생각이 난다. 매일마다 상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번제단에 나와 기도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강력한 표현을 보게하는 것 같다.
3절에서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는 성막이 속죄하는 곳. 속죄를 받는 곳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계속해서 4절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으 ㅣ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함은 레위기의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시고 백성에게 가까이 오게 하심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신 것이다.
1-4절은 마치 제사의 순서를 따라 기록한 느낌. 아니면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적 찬양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결국 ‘땅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인이 함께할 축복은 땅의 축복이다. 의인이 돌아올 때 땅은 회복 받는다.
קְ֝דֹ֗שׁc הֵיכָלֶֽךָ
성전의 아름다움/ 거룩한 곳인데/ 4절 후반절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거룩한) 만족하리이다’는 궁극적 감사의 극치를 나타낸다.
그리고 65편은 ‘땅 끝에 사는 자’라고 표현한 것 외에는 ‘원수’, ‘대적’이나 시편기자를 힘들게 하는 자신의 죄 - 물론 3절에 ‘죄악이 나를 이겼’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고 말함으로 사함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튼 나머지까지 그런 대상이 나오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감사시’와는 다른것 같다.
결과적으로 축제나 추수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땅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1-4절까지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이 같는 복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우리의 삶에 현장에서 올바르지 못한 경우들이 많다.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현장에서도 ‘주의 은택으로’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6편
65편 볼 때 땅을 돌보신다고 했는데 66편에 ‘온 땅이여 하나님게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라고 한다. 시편이 1편을 제목으로 잡는다면 66편은 ‘온 땅에서 드리는 찬양’으로 하면 될 것같다.
זַמְּר֥וּ כְבֹֽוד־שְׁמֹ֑ו שִׂ֥ימוּa כָ֝בֹ֗ודb תְּהִלָּתֹֽו׃
노래하라(명령형) 고 시작한다.
אִמְר֣וּ
3절은 ‘말하라’/ 4절에는 ‘경배하고’ 미완료/ 이는 절하게 해야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악한 자는 하나님의 위엄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래서 멸망을 받는데 여기에서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 이 무리들은 여호와의 권능을 경험한 자들이다. 6절에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음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보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7절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에 대해야 일종의 기억. 그 일에 대한 감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감사는 미래적으로 ‘경배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 경배하게 하게 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적했던 애굽을 향해, 더 나아가 7절 ‘나라들을 살피’신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다. 이는 다른 시편에서 보인 것 처럼 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확인된다.
8절에 다시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בָּרְכ֖וּ עַמִּ֥ים׀ אֱלֹהֵ֑ינוּa וְ֝הַשְׁמִ֗יעוּ קֹ֣ול תְּהִלָּתֹֽו׃
9-12절은 광야에서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이는 16절에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이를 듣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 잘 맞는 시같다. 그러나 9-12절의 위기가 민족적인 상황이거나 다른 상황일수도 있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한 이들과 풍부한 곳에 들이신 곳이 같은 사람이라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보기에는 어려움도 있어보인다.
원수나. 대적과 같은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기자의 개인적인 체험일 수도 있고 이를 16절의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임으로 본다면 기자 자신의 당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더 크게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서원했다고 말한다. 13-14절에 ‘서원을 주께 갚는다. 내 입술이 낸 것,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라고 함으로 기자 자신의 일임을 더 볼 수가 있다. 이 사실을 16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고 말함으로 하신 일을 ‘너희들아’라고 말함으로 선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0절에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라고 마무리하면서 시편 기자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더 강력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편115편
115편은 우상에 대한 부분이 잘 나온다. 그런데 그 우상을 섬기는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백성 곧 ‘이스라엘’에 대하여 2절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라고 한다. 상황이 그렇게 보이는 어려움에 있음을 시편 기자가 말하고 그 위에 계신 3절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이는 각 모양을 하고 땅에 있는 우상과 대조된다. 어쩌면 옆에 있는 우상이 더 있어보이고 그들의 모습이 그럴듯 해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 빠졌을 때를 보면 그런 모습이 있다.
1-4절 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한다면
וֵֽאלֹהֵ֥ינוּ בַשָּׁמָ֑יִם כֹּ֭ל אֲשֶׁר־חָפֵ֣ץ עָשָֽׂה׃
3절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완료형으로 볼 때 그렇게 믿음에 대한 고백으로 읽힌다.
이어지는 5-8절까지는 바로 우상의 모습을 보면서 대조적으로 설명된다. 하나님께서는 행하셨다. 우상들은 무능력하다.
그런데 시편 기자의 걱정은 그들의 말에 휘둘리고 있는것일까? 그래서 약속을 근거해서 9절 ‘이스라엘아’, ‘아론의 집’을 언급하면서 나아가는 것일까?
9-11절까지 계속해서 ‘도움과 방패’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보라는 것. 신명기에서 ‘독수리 날개’로 표현하는 것처럼.
12절에 ‘여호와께 우리를 생각하사’
그렇다면 어떤 일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분명한 것은 ‘강한 확신’은 보인다. 아니면 그런 상황에 대해 기편 기자는 앞서서 고백적으로 찬양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처럼 코로나 19로 인한 어려움에 많은 사람들이 준흑 들어 있고 교회에 대한 불신들이 있을 때 어쩌면 설교자는 115편의 기자처럼 찬양하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17절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찬양하지 못한다. 곧 살아 있는 자는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12-16절까지 마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올려드린 기도가 생각이 난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보여주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도움’, ‘방패’이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약속은 여전함을 굳게 확신하면서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라면 찬양을 해야함을 고백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축복하다는 의미를 네 번 강조함으로 보다 분명하게 하려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보인다. 가장 축복된 상태는 분명 에덴에서의 모습일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자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14-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다. 지금의 보이지 않는 것보다 그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한 복을 소망, 있음에 대한 고백은 찬양으로 나아오라는 권면으로 읽혀진다.
시편 124편
도움…여기서도 나오네. 도움은 동맹같은 의미로 보인다. 어려움. 적과의 대치. 특히 이러저러할 수 없는 각 개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7절. 사냥꾼의 오무는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말이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감사하고 있다.
1절 ‘우리 편에’ לוּלֵ֣י יְ֭הוָה שֶׁהָ֣יָה לָ֑נוּ בְּק֖וּם עָלֵ֣ינוּ אָדָֽם׃
사람들이 반역할 때 우리를 위해. = 이는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 개입을 하신다. 예를 들어 다윗이 아히도멜의 계략에 넘어갈 때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5절 ‘그 때에’ אֲ֭זַי 어떠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편 기자는 어려운 상황, 곧 반역의 사건으로 인한 어려움. 그것이 사냥꾼의 올무처럼 걸려 넘어지기를 바라는 어떤 상황에서 ‘도움’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서 감사한다. 그러나 1절에 ‘이스라엘은’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공동체적으로 사건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도와주신다. 구원해 주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감사’하고 있다. 특히 2절 이하 ‘우리 편에’ 계심을 통해서 감사의 내용이 함께 고백되고 있음도 보인다. 그리고 그 사건이 단회적이지만 긴 시간을 둔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포로 후기의 고백인지도 고민해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루를 돌아보면 순식간에 일은 벌어진다. 사고가 나거나 아프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이 그렇다. 그런 일들이 자신과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115편의 고백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우상을 섬겨 두려움을 이겨보려하지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도움’이 되신다.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또한 124편의 기자는 시간의 흐름을 본다면 결국은 멸망하지 않고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나는 미래적인 모습으로도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보았고 감사한다. 분명 ‘그 때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니 과거나 미래에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 시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롬8장의 고백처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구절이 함께 떠오른다.
시편 126편
1절에 포로에서 귀한을 말하고 시작한다. 음 그럼 124편도 포로 귀한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본다면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아무튼. 포로에서 귀한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꿈는 것 같았도다’ 우리도 어떤 일이 그러할 때 꿈만 같다고 한다. 극치의 상태가 이를 때, 2절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일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한다. 3절에도 그렇게 이야기 함으로 ‘우리는 기쁘도다’고 고백한다.
이들에게 시온은 마치 극치의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레9장에서의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 그 회복을 늘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 두었을 것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시온’을 피 속에 두고 자랐을 것이다. 공동체가 회복됨을 찬양하며 감사한다.
돌려 보내실 때 - (슈브) 돌아가다. 운명의 전환, 포로의 상태에서 자유자의 상태, 시온의 상태로 가는 이들에게 기쁨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닐 것이다. ‘꿈꾸는 것’, 웃음이 가득하고 자연스럽게 찬양이 넘처나는 것이다. 특히 슈브동사를 사용함으로 ‘포로된 자를 다시 데려오다’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이에 대한 반응은 결국 실제이다.
4-6절 우리의 회복에 대한 시편기자의 기쁨.
שׁוּבָ֣ה יְ֭הוָה אֶת־שְׁבִותֵ֑נוּa כַּאֲפִיקִ֥ים בַּנֶּֽגֶב׃
여호와가 복원하셨다.(명령) / 돌려보내소서 -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해달라. 기쁨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회복은 더 필요할 수 있다. 5-6은 돌아온 자들에게 더해지는 진정한 개인의 회복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곡식 단을 가지고’ 기쁨의 배가는 회복에서 더 나아가 풍요의 상태까지 이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아버지 하나님께 더 적극적으로 ‘곡식 단을 가지’는 기쁨까지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로 끝나지 않고 종국의 극치 상태를 더 기다리며 ‘씨를 부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129편
감사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다만 제목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임을 볼 때 먼저 살펴본 126편 처럼 구체적으로 포로에서 돌아와서 기쁨을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5권에 있는 제시된 감사시에는 ‘시온’, ‘이스라엘’과 같은 표현들이 보다 영적인것을 볼 수 있다.
1-2절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러나 나를 이지지 못하였도다. 여기에 4절 ‘여호와께서는 의’롭다. 5절 ‘시온을 미원하는 자들’을 대적자로 수치를 당아여 물러감을 보여준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한 상태를 3절에 4-5절 에서는 그 일을 행하신 여호와를 6절에 그런 자들의 결과를 그리고 7-8절에 지나가는 자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로 마무리한다.
감사인가? 아니면 애가인지? 마치 예레미야가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핵심은 괴롭힘에서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그리고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간다는 것이다. /
물론 시편 기자는 깊은 고통을 느꼈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고 고백한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 (왕상 18:28).
악인에 대한 심판의 요구는 5-8절에서 나타난다. 지붕의 풀이 뿌리가 없고 내리쬐는 해에 시들것이다. 그렇게 소멸되며 추수하는 자는 모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축복이 없는 상태를 요구한다. 어쩌면 그래서 감사보다는 애가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미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의 괴롭힘에 대해서 ‘시온’의 날에는 분명 그들이 추수되지 못함을 시편 기자가 갖는다면 감사의 마음을 분명하게 갖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507
향가를 읽으면 이해가 되는가?
성경은 3천년 전의 이야기다. / 보편 타당한 언어이지만 이것은 3천년 전의 이야기이고 이것을 설교해야 할 사람이다. 예를 들어 렘은 60%가 시이며 각각 썩여 있어서 알기도 어려운데//
현재 시편 전체 구성이 어떻게 맞춰지는가. / 사람(학자)마다 왜 보는 시각이 다른가?
오늘은 우리가.
찬양시를 읊을 수 있다면 축복이다. 시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풍요가 오면 할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젊었을 때 찬양하라는 것이다. 시편은 늙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 레위기를 가르치고, 전도서를 가르치고, 잠언을 가르치고 시편을 가르친다./
시편이라는 텍스트 안에 곡이 있다. // 일종에 작사자 들이 다양한다. 예를 들어 다윗같은 사람 말이다. 사실 다윗은 전장의 용사였다. 그렇다면 이런 다윗에게 시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러면서 전문적인 음악가들이 아삽, 고라 자손, (우리는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있었다. // 포로기에 쓴 텍스트가 들어가 있다는 건 켄텍스트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삶의 자리(지찜 레벨)를 어려원 한다.
표제가 있다. - 컨텍스트를 알게 해준다. 역사 시편은 길다. 예를 들어 18편.(50절까지) / 98편의 경우 ‘시' 라고 한다. 표제가 없는 경우는 나름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뒷쪽이 주로 그렇다. 1. 2편이 대표적으로 없다. / 사실 한스요한크라우스(김정우), 베스터만, 부르구만 참조하라. 궁컬은 다 맞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새 노래' -한 번도 안 부른 노래일까? 이런 식이다. /
즐거움은 어디일까? 우리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편은 그렇지 않다. ‘의지'에 가까고 그 장치를 찾아내는 것, 다윗은 자기를 세워가기 위한 방법은 ‘시'였다.고 본다는 것이다.
제왕시.
시편 5권. 배열의 구성이 어쩌면 모세오경의 구성을 맞춘듯 하다.
구약의 키 구조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분되어 있다(1–41; 42–72; 72–89; 90–106; 107–150)
지혜시와 제왕시가.
찬양.탄식, 감사 = 고정적 패턴이 있다. / 제왕시는 그런 패턴이 없다. 그래서 해석이 어렵다. 예를 들어 4권에 두 편 정도가 그렇다.
궁컬이 제일먼저 장르를 분류했다. 지혜, 제왕이 어떻게 엮이는지를 살피면 시편이 열린다. - 학자들은 여기까지 봤다.
2,18,20,21,45,72,101,110,132,144(일부)
부르그만 - 로얄 삼스에서
2. 18.21.42.37, 45, 49, 72. 73, 78, 89(?) 89편은 탄식시와(문자 그대로 읽으면) 같이 읽힌다. 여기에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낸다. (공동체적 애가로 많이 본다.)
베스투르만 - 이 잘보고 있다.
제왕시는 매우 전략적 구성을 갖고 있는 시이다.
시편은 수세기 동안 편집자에 의해 모여졌는데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 제왕시가 놓여 있는 자리에 어떤 텍스트가 연결되었는지 보자.
90편은 4권에 속하고. 89가 제왕이냐 아니면 영역을 마무리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구성으로 볼 때 배열의 고민을 할 수 있다.
89 제왕 - 90
72 제왕 - 73 감사(탄식의 내용이 있으나, 궁컬은 지혜의 시이며 개인의 탄식, 앤더슨 - 제의적 교훈시, 케스투르만 - 묵상과 고백, / 보편적 - 지혜의 영역을 가진 시로 본다.
마무리할 때 제왕시를 ㅆ는데 150편은 그렇지 않다.
106 탄식 - 107 감사(패턴이 다름) -
진득하게 연구하라는 이야기다. 설교에서 ‘장르'를 말할 필요가 없다. 시편을 읽을 때 작년에 쓰인것 처럼 보편타당하게 해야한다. 89는 탄식적 성분을 (장성길) 가지고 있다. 기능으로 볼 때 ‘제왕시'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배경을 갖고 연구를 하고 설교는 폭발적으로 시원한 물을 쏟듯 해야 한다.
42편은 탄식시로 보는데. 41편은 - 18편 제왕 19 - 토라시 // 토라 - 하나님의 말씀의 힘, / 지혜 - 삶에 대한, 또는 토라에서 나온 결과적인 지혜//
1편과 2편. // 제왕시는 대를 이어서, 다윗 왕들이 세습되었는데 다윗 보다 나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는다 이들의 죄로 인해 성전이 뽑혀 갔다.
포로기에 어쩌다 이렇게 될까? 제왕은 - 메시아적 왕에 대한 갈망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왜 이런 이해가 중요할까? -
32편의 탄식을 보라. - 자신을 제어하기 위한 다윗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 제왕시-에 들어 가 있다.
반면, 지혜의 시는 // - 시편은 결국 자기의 사고를 바꾸는 것이다. 자기 성정을 다스리는 훈련이다. 지혜시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니 내면 속에 분노를 버려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데 너는 왜 그러니!!!
너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리플렉션' 사물 자체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시각을 갖는 것이다.
일반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전을 받는다. 토라를 따라 걸을 수 있다. 왕(제왕)은 아무나 되지 않고 또한 그의 책임은 전 백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왕정)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의무 만땅, 권리는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이방의 왕처럼 하고 싶다. - 고대 근동 왕은 백성이 물건이다. 왕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1.2가 여기에 속하고.
72-73편 솔로몬의 시로. 그리고 제왕시로 정의하는
‘뭔가 이야기하다가 1-3권까지 ‘제왕' 이야기로 끝내고 혹시 그래서 그렇게 권별을 나눈거 아닌가?’
시편 1편 - 복에 대한 명사, 지혜의 시다. 표제가 없다. 생각을 해보자.
감사시는 기본이다. 모든 권에 포진되어 있다. 감사를 이야기할 때 ‘두려움, 근심'이 없어야 하는데 있다면 탄식아닌가? 탄식은 찐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기도이다. 진짜 기도는 ‘감사의 시간'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더라.
시편2ㅣ편은 제왕시.
크게 4단락 3절까지. 6절까 9절 12절까지다.
앨런로스는 다른게 - 참조하라. / 1.2-3,/4,5-6/ 7a, 7b-9/ 10, 11-12/ 이런식이다.
학자들은 2편 1권 자체를 표제로 본다./ 1편은 시편 전체의 표제다/ 구성의 중요는 책의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카탈 (완)_ 익톨(미)
1 לָ֭מָּה רָגְשׁ֣וּ גֹויִ֑ם וּ֝לְאֻמִּ֗ים יֶהְגּוּ־רִֽיק׃
어떻게 / 흥분하는가/ 나라들이/ 민족들이 /헛된 것을 하는가?
1장에서 ‘헛된, 꾀다'를 가져오는 것같다. 아무튼 1절은 이런 ‘선언'을 하고 있다.
2 יִ֥תְיַצְּב֨וּ׀ מַלְכֵי־אֶ֗רֶץ וְרֹוזְנִ֥ים נֹֽוסְדוּ־יָ֑חַד
나서다/ 왕들이/ 세상에/ / 통치자들이 함께 엉켜있다./
aעַל־יְ֝הוָהb וְעַל־מְשִׁיחֹֽוa c׃
나라들, 왕들, 집권자, 여호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이렇게 출연한다. = 큰 대결 구도를 가지고 있다. 대적하고 있다.
נְֽ֭נַתְּקָה אֶת־מֹֽוסְרֹותֵ֑ימֹו וְנַשְׁלִ֖יכָה מִמֶּ֣נּוּ עֲבֹתֵֽימֹו׃
밧줄을 끊자, 2절의 세상의 군왕들이/ 메시아는 그리스도로 예표되는 메시아적 대망을 하고 - 시편을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4 יֹושֵׁ֣ב בַּשָּׁמַ֣יִם יִשְׂחָ֑ק אֲ֝דֹנָ֗יa יִלְעַג־לָֽמֹו׃
하늘에 있는자/ 웃는다/ 그들을 비웃는다/
5 אָ֤ז יְדַבֵּ֣ר אֵלֵ֣ימֹו בְאַפֹּ֑ו וּֽבַחֲרֹונֹ֥וa יְבַהֲלֵֽמֹו׃
그 때에(언제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노하셔서 말씀하신다. 진노하셔서 놀라게 하신다. = 바보같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주권을 던지려는 인간의 무익함 - 앨런 로스)
וַ֭אֲנִי נָסַ֣כְתִּיa מַלְכִּ֑יb עַל־צִ֝יֹּ֗ון הַר־קָדְשִֽׁיb׃
내가 세웠다.(카탈) - 새로운 왕을 세운다.? / 시온에 세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