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나타난 독특한 메시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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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나타난 독특한 메시지 이해
어떤 책이든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메시지는 전달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시고 기록하셨는가?
요한 14:25-26 성령이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에 의존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약 60년이 지난 후에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요 3:16-21
16절 독생자를 주었다(단순과거)
19절 빛이 세상에 왔다.(과거완료)
21절 좇는 자(현재진행)
빛으로 "오고 있다"(현재진행
3:1-15 니고데모와의 대화
우리와 너희의 대비
11절 우리가 아는 것과 본 것
요한복음은 요한과 예수님과 당시 요한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내용 형식이다.
쿨만은 "요한 써클"이란 책을 썼다. 또 많은 사람들이 [요한 공동체]라는 표현을 써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표현하였다.
요한 써클과 대조되는 써클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집단이 있는 반면 이런 신앙과 대조되는 신앙을 강조하는 집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베드로적인 신앙을 가진 집단으로 추정된다. 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중심한 기독교 신앙집단이란 '유대인을 중심하여 복음을 해석하는 기독교 신앙집단이다.
특히 예수님 때부터 70년 이전까지는 유대에 평신도를 중심한 바리새파와 제사장을 중심한 사두개파와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엣세네파(열심당)들이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 3파중 어느 파도 대세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역사에 정통한 요세퍼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 보면 70년 이후에는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바리새파가 유대인들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중심하여 구약의 메시아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복음을 전하여 오던 베드로 마태 마가 누가 바나바 ... 등등의 초대교회 복음전도자들이 더 구약적이고 더 유대주의적인 색채를 띤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성령 강림 후 약 60여년이 지난 상태에서 성령의 순수한 열정보다는 인간의 열심과 상식과 지식과 환경이 어우러진 복음을 전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무슨 말이냐면 베드로를 위시한 초대교회 전도자들이 더 구약적이며 더 유대주의적인 색체의 복음을 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된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통하여 구약에 매인 복음이 아닌,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이 아니고 전 세계인을 중심한 복음을 주신 것이 요한복음이다.
공관복음은 유대인을 의식한 내용이지만 요한복음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와 같이 "온 세상"을 가슴에 붙은 복음을 주신 것이다.
요세퍼스의 유대전쟁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망해버리고 백성들은 흩어졌지만 유대가 바벨론에 멸망하자 바른 신앙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여기서 철저하게 믿자는 바리새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로마에 의하여 나라가 완전히 망해버리고 바벨론에 의하여 성전이 무너지듯 로마에 의하여 성전이 훼파되자 다시 바른 신앙 철저한 신앙찾기 운동인 바리새운동이 일어나고 바리새 파가 기선을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유대인들에게 확산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더 이상 잘못된 기독교 복음에 유대인들이 물들어 유대교를 버리지 못하도록 감시감독체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요한복음 9장에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자 그 부모들이 출교를 당할 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9:2) 이는 9:1-23절을 참고할 때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출교를 당하도록 하고 있었다. 유대사회에서는 출교를 당하면 사고 파는 것도 금지되고 길가는 것도 금지된다. 길을 가다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인사도 주고 받지 못한다. 밥도 같이 먹지 못한다. 같은 가족에게도 철저하게 왕따를 당한다.
이는 9:1-23절에 출교로 표현된 [이단 저주법령(Birkath ha - Minim)]에 의하여 추방을 당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크리스천들이 성령강림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나면서 점차 [그리스도교적인 유대인]에서 [유대교적인 그리스도교]로 변질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현상은 갈라디아서 같은 곳에 잘 나타나 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4집단으로 대별되고 있었다고 마틴이나 브라운 같은 신학자들은 보고 있다.(J. Louis Martyn, R.E. Brown)
마틴은
유대교 회당에서 축출된 기독교인 공동체를 전제하고 분류한 당시 유대인 4집단을 분류하면 1)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 2) 양다리 걸친 이중 충성자들(외면적으로는 유대교인이면서 비밀리에 기독교 신자생활을 하는 자) 3) 요한공동체에 속한 신자 4)유대인 회당에서 추방받았으나 마태복음적인 베드로를 중심한 유대교적인 복음공동체가 있었다고 본다.
이 요한복음에 제시된 복음을 믿는 요한공동체에는 유대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기독교인, 사마리아 전도를 통하여 믿게된 사마리안 인(요 4:), 이방인, 세례 요한의 제자들(요한이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었음), 갈릴리 인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를 중심한 유대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수용하지 않았었다.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것까지도 문제를 삼았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 전했다고 베드로의 변명을 수용하였을지라도 이방인 고넬료 자신을 자신들의 교회의 멤버로 수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전도를 통하여 믿게 된 많은 사마리아의 신자(4:41-42)들도 베드로의 유대인을 중심한 신앙공동체는 배타하고 수용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유로 이방인 신자와 사마리아 신자를 폭넓게 수용한 요한복음만이 사마리아전도를 구체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 복음의 적용 영역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와 같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복음적용 영역도 "유대인"이 아니라 "세상으로" 확장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의 특색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신앙을 중심한 신앙공동체는 바울 사도가 제시한 복음과 동질이며 베드로를 중심한 유대주의적인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는 다른 분위기의 복음이다.
1:11절에 메시아가 자기 백성 자기 땅에 오매 영접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공관복음에는 없지만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은 편협한 유대주의를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마리아인을 수용하는 요한공동체 4:39-42
공관복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마리아 인 찬양이 있다. 요한복음 4: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전도를 하신다. 다른 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무시하고 쉬쉬하고 감춘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사마리아 전도의 문을 연 사람이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이다. 그 사마리아 여인을 은연중에 찬양하고 있다.
그런 여자의 전도를 받고도 아무런 이적이나 신비한 일을 행치 않았어도 많은 사마리아 인들이 주님을 믿었다.(4:39)
예수님을 자기들과 함께 지내기를 청하기 까지 하였다.(40절)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 12명의 의식주를 책임지겠다는 각오까지를 암시한 그들의 신앙을 소개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잘 듣는 사람이다. 그들은 여인에게 말하기를 네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믿는다고 42절에 자신들의 신앙동기를 고백한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란 원칙에 매우 합당한 고백이다.
요한복음은 4:41절에서 많은 사마리아 인들이 믿었다. 신자의 급증을 말하고 있다.
4:35절에서 시장하신 주님께 드리려고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해 온 제자들이 진지 잡수시라고 권하자 "나는 이미 먹어서 배부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하시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것은 많도 일군이 적다"고 탄식하신다. 이 말씀은 사마리안 여자를 전도하여 믿게 하시고 그 여자가 주님을 증거하러 성안으로 들어 간 직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런 뜻을 암시하고 있다. 얼마나 일군이 없으면 행실이 바르지 못해 지역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런 여자를 복음 일군으로 쓰겠느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으니 이런 여자라도 써야지 어떻게 하겠느냐? 탄식하신다. 여기서 "... 눈을 들어 밭을 보라..."하신 주님은 눈을 들어 사마리아의 영혼들을 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면 지금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사마리아에 오셔서 사마리아 여자를 전도하신 끝에 사마리아 성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님의 의중을 공관복음은 생략하고 있다. 왜냐면 유대주의에 반대되기 때문에 생략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들을 수용하는 교회를 만들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8:48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고 귀신들렸다고 하는데 그 말에 동의합니까?"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님은 사마리아 인을 수용하고 계시는 반면 유대인들은 반대한다. 베드로를 중심한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런 유대인들의 입장을 반영하여 교회내에 사마리안 인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면 같은 사도 출신이고 예루살렘 공동체 출신인 요한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신자를 수용한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요한공동체 (12:20-23)
예수님을 찾아 온 헬라인들의 사건과 한알의 밀알로 죽으실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37-43절은 이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고 이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도 믿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는 유대인과 비교하여 아무런 표적도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아도 믿으려고 찾아 온 이방 헬라인을 비교하고 있는 분위기의 말씀이다.
42절은 헬라인은 담대히 믿으려고 찾아오는 반면 유대인은 그것도 관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마음으로 믿으면서도 출교를 당할까봐, 자기의 지위와 명예나 영광을 잃어버릴까봐, 하나님의 영광을 뒤로 밀쳐내는 비겁한 신앙을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설사 믿는다고 하더라도 니고데모는 밤중에 비밀리에 찾아오고 관원들의 상당수가 믿으면서도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과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사람 중심으로 (자기 중심, 바리새인 중심)결정하고 행동하는 비겁자라고 폭로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이다. 이런 예수님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을 존중하여 요한은 이런 이방인들을 수용하는 신앙공동체이다.
갈릴리 사람을 수용한다.
4:53절에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을 고친 사건을 통하여 그 온집이 다 믿었다고 한다.
5:1-16절에서 갈릴리 가나의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고침을 통하여 온 식구가 믿었지만 38년이나 병중에 있다가 고침받은 사람은 주님이 그렇게 고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16-17절에서 바리새인들을 찾아가 안식일에 자기 병을 고쳐 준 사람은 예수라고 고발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고 18절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아들의 병을 고친 사람과 자기 병을 고친 사람, 병이 난지 얼마 안된 병을 고침받은 사람과 병을 고치기 위하여 38년간 온갖 노력을 다해도 못고쳐 38년간 엄청난 고생을 해 온 사람이 고침받은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온 가정이 믿는 것은 그만두고 자기도 안믿고, 안믿어도 38년된 병을 고침받았으니 가만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을 찾아가 고발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핍박과 함께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감시를 받게 만들고 있다.
병을 고침받고 은혜를 받고 표적을 체험해도 갈릴리 인과 유대인은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갈릴리인은 촌놈이고 산골짝에 사는 천민이다. 유대 본토에 사는 사람,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 바로 코밑에 누워 있으면서 만나는 사람이 양을 씼으러 오는 제사장 레위인만 만나고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만 만나고 이들의 가르침과 대화를 늘 들으며 지낸 유대인을 대조하고 있다.
7:1절에서는 갈릴리와 유대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는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시지만 유대는 가시기를 싫어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이 유대인의 비위를 맞춰가며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마리아 사람도 갈릴리 사람도 이방인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요한의 신앙지도를 받는 신자들은 이들을 모두 수용하는 교회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4:43-45의 고향에 대한 해석은 난해구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갈릴리에 가시자 사람들이 환영하며 영접한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고향(마13:57, 막6:4, 눅 4:24)은 나사렛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되어 고향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4:44절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과 긴장상태에서 배척을 받고(1:13-20) 갈릴리로 내려가시면서 사마리아에서 환영을 받으시고, 이제 갈릴리로 들어가시면서 갈릴리의 받을 환영을 예견하고 계신다. 이런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말씀은 갈릴 리가 아니라 메시아로 왔지만 하나님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서 배척받고,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온 메시아지만 정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배척받으신 사실을 상기시킨 일이다.
이런 성경해석 입장은 웨스트콧트(B.F. Westcott)와 바레트(C.K. Barrett)는 유대로, 다드(C.H.Dodd)와 린다스(B.Lidars)는 예루살렘으로, 프라이오(J.W.Pryoy)는 사마리아와 반대관계에 있는 모든 지역으로 추정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서막에서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영접하지 않았다는 구절을 상기한다면 예수님께서 고향이라고 말씀하시는 곳은 나사렛이 아니라 유대임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요한복음 7:1 유대인들은 죽이려고 하여 유대를 가시지 않으려 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자요 갈릴리인들은 환영자이다.
공개적인 신자가 되어라 12:20, 42,
이방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오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숨어서 믿었다. 요한공동체 신자는 이런 이중 충성자들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과 가이사에게 하나님과 재물에 공동으로 충성하는 자)
신앙이 피상적이었다. 8:31, 59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는]이 아니고 [믿은]이다. 이미 믿고 있는 유대인이다. 지금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과거에 믿은 유대인이다. 그들은 다시 찾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때 주님은 진리가 속에 들어가 자신을 자유케 한 사람만 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 여기서 자유란 해방이고 구원이란 뜻도 된다. 이때 이들은 속이 뒤틀리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종이 된 일이 없거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자유냐?며 투덜거린다. 주님의 말씀을 그냥 방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속에 주님과 다른 인생관과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31절에 주님은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 온 유대인들에게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된다."고 하셨다. 내 말에 맞지 않는 인생관 가치과 신앙관을 가진자는 내 제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믿는다고 하는데 안 맞는다. 지금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안맞는다, 그래서 필경은 주님과 갈등관계에 들어간다.
36절에 이들에게 "아들을 믿으면 아들이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진리이고 진리가 아들이라는 뜻이다. 나하고 맞지않으면 내 제자가 안된다는 암시이다. 또 말씀이 예수님이시란 요한복음 1:과 맥이 같다. 신앙은 말씀'진리'예수님'중심이 되어야 한다.
59절 이들은 필경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달려 들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깊이 배우고 말씀을 들을수록 예수님을 깊이 알수록 골이 깊어져 나중에는 돌로 때려 죽이려고 하고 있다.
31절에 이들도 예수님을 믿는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과 안맞는 믿음의 내용을 가진 신자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회안에서 군시렁거리다가 결국은 돌을 드는 자이다.
구약과 신약의 대립 9장
9장은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일로 인하여 유대인들과 충돌한다. 28절에 눈뜬 소경에게 너는 예수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선언한다. 이는 모세를 중심한 구약을 구약 문자대로 믿는 유대교 신자와 예수님을 중심한 신약의 신자는 대립관계임을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중요 인물
마태마가 누가복음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중요인물로 등장하지만 요하복음에는 베드로 빌립 도마가 현저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공관복음에는 전혀 없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등장한다.
베드로보다 우월한 사도 요한의 위상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부정적으로 등장한다. [사랑하는 제자]에 대하여는 한번도 부정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정적이다. 긍정적으로 언급을 했어도 뒤에 가서는 부정적이다.
요한복음 6:68절 떡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 간 다음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뉘게로 갑니까?] 신통한 대답을 하였지만 18:17, 25절에서는 주님을 부인한다. 베드로는 큰 소리만 떵떵치는 허풍쟁이란 의미를 가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회개한 것을 마가는 마가복음 14:72절에서 [울었다]고 했다. 마태와 누가는 [심히 통곡하였다(마 26:75, 눅 22:63)]고 하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부인한 것마 기록하고 그가 회개하였다는 말을 생략하여 버린다.
13:23-36 예수님의 마지막 성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워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요한을 통하여 물어 보라고 하고 있다. 이는 요한은 주님과 매우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인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는 소원한 관계이며 또 이런 이유로 베드로는 요한의 권위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이기도 한다. 마치 군대에서 졸병이 사단장에게 직접 의견을 말할 수 없고 중대장 대대장을 통하여 전달하여 의견을 전달하는 예에 해당한다.
21:1-7절, 7명의 제자가 갈릴리 바다에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새벽 이른 아침에 날이 어둑어둑하여 베드로를 위시하여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몰라 보았으나 요한은 날이 어둑어둑해도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베드로가는 주님과 친밀하지 않았고 요한이 더 친말하고 더 사랑했다는 뜻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는 아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아들인 줄로 알아보는 것처럼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예수님을 요한이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자 그때에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고 한다.
21:15-18, 요한에게는 나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신다. 중심을 이미 보신 주님께서는 어둑침침한 새벽에도 얼른 주님을 알아보는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것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묻지 않으시고,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지척간에 와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고기잡는 일에만 정신이 빠지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기나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다고 슈나이더(G.F. Snyder) 타이터스(E.L.Titus)는 말한다.
베드로 공동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미성숙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17:9,20절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셨다.
17:14절에서 그들도 주님 제자들로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
20:4,19,24, 21:2, 그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21:19절 베드로의 죽음이 영광이 될 것을 예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신앙지도를 받고 요한의 복음을 믿는 공동체와 비교할 때는 베드로의 신앙지도를 받는 로선의 공동체 사람들의 신앙이 덜 영적이고 덜 지각적이고 통찰력이 부족하고 영적인 용기와 소신이 결여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오직 예수님만 강조한다. 1:8-9, 29-34,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써 예수님을 따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쿨만, 브라운) 그런데 자신의 첫 선생이었던 세례 요한에 대하여 혹독하게 부정적이다. 다른 복음서는 그냥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는 메시가아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선을 그어 전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다.(1:8-9) 세례 요한은 메시아는 그만두고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다.(1:19-24) 세례 요한은 종중에서도 신발이나 들고 다니는 종에 불과하다.(1:27) 세례 요한은 신랑도 아니다.(3:29)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하여 디딤돌이 되었다고 쇠할 자이다.(3:30)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설득하여 예수님을 좇게 하였다(3:28) 이런 세례 요한으로 요한이 기록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요한으로 백성들의 상당수가 세례 요한이 메이사아 아닌가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헥갈리게 하는 것이나 명확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옛날 선생님이었던 세례 요한일지라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증거하는 자는 주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전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부정해야 한다는 암시를 두고 있다.
10:16절 다른 양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요한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이미 기록된지 20여년이 지난 후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 들이 않은 다른 양"을 이야기 한 것은 무슨 뜻일까?
선한 목자 --예수님
양의 우리 --요한 공동체교회
다른 양 -- 유대주의적인 복음아래 미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을 말한다고 보여진다. 마틴(J. Louis Martyn)은 이미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핍박을 피하여 흩어져 있었으며 그들의 상당수는 베드로와 초기 오순절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과 베드로의 제자들이 전했던 유대교적인 기독교인들을 [내가 인도하여 이 우리로 인도(모아) 들여야 한다]라고 해석을 한다. 여기서 양은 양인데 우리에 들지 않는 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 중에 유대주의적인 미성숙 복음(초등학교 1학년 복음)을 믿는 베드로 계열의 신자들을 암시한다고 믿어진다.
영적이고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볼 때 이단은 아니지만
신앙지도를 현세적이고 물질적으로 가르쳐서 구원받는 데 지장을 주는 오염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할것인가? 도의나 윤리적으로는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여 방치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좁은 길로 인도하는 교회냐 넓은 길로 인도하는 교회냐는 고민을 하는 목사가 있다면 오늘 말씀이 그 해답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브라운, 바레트, 슈나켄부르크 같은 신학자는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요한공동체에서는 이미 우리 밖의 공동체를 이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거의 60년이 지나 신앙이 변질되고 현세와 되고 특히 갈라디아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이방교회가 세워진 후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유대인들 뿐이기에 지도자로 모셔오면 신속히 유대교적인 기독교로 만들어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때의 현실이었다. 이런 면에서 이 본문은 이방인을 전도하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그 보다더 절실하게 안타까워 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위시하여 유대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의 현세 주의적인 복음이 지나쳐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위기를 만났다고 보기 때문에 이미 믿기는 믿지만 구원과 영생과는 상관없이 믿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요한복음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밖의 다른 양의 실제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보다 바른 믿음과 구원과 영생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육적중심의 믿음과 영적 중심의 믿음을 구분시키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각장마다 육적인 것을 중심하여 형성된 신앙을 교정하는 내용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공관복음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복음은 유대가 망하기 전에 그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설득시켜 믿게 하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지 약 40년 후에 유대는 망해버렸다. 이제 복음의 첫 일군들을 유대인들로 세우tu서 30-40년간 복음을 전하게 하셨지만 이제는 유대는 망하고 없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하다. 대 다수가 이방인이며 이제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구약에서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고려하고 전해진 공관복음적인 신앙으로 되어 있다. 이를 뛰어넘는 복음이 요한복음이다.
이는 같은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1학년도 초등학생이고 6학년도 초등학생이다. 그러나 수준에 있어서 1학년과 6학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은 구약이 초등학문이라면 그 초등학문과 대학학문과 가운데 정도의 위치이고 요한복음은 주님의 입을 통하여 가르치신 가장 고학년 복음이다. 더 영적이고 더 하늘나라 적이고 더 영생을 강조하고 더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1:12-13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으로 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여기서 혈통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부정하고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강조하는 [세상]을 강조한다. 그러나 베드로 공동체는 아브라함의 혈통과 구약의 메시아 언약에 매어 있는 제한적인 유대인들 만을 위한 복음이다.
신자와 세상과의 긴장관계
요한복음 15:18-19, 16:20-21
베드로와 그의 인맥들이 전한 유대인들을 중심하여 형성된 땅의 복음과 현세의 복음을 더 강조하는 구약적인 색채가 강한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전한 기독교 신자들과, 우주적 복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누구나 세상 사람들이 믿고 하늘나라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을 강조하는 요한의 복음을 믿는 교회와도 긴장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긴장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요한의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3:16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핍박한다. 이에 요한복음이 진행되어 가면서 세상을 사랑하사란 의미는 뒤로 물러간다. 세상은 예수님과 복음을 믿는 신자들을 미워한다. (15:18-19, 16:20-21)
그 이유로는 요한복음 3:16절 이후에 19-20절에서
이렇게 사랑으로 독생자까지 보내시고 그 동생자는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하는데 세상은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 이 믿지 않는 것은 빛인 하나님보다 어둠인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것은 죄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아예 빛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회개하기는커녕 자기의 어둠을 합리화 시키고 그 어둠을 더 사랑하고 존속시키려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왜 그들은 오지 않을까?
이는 갈라디아서나 다른 바울의 교회에서 보여주듯이 물질적인 세상을 하늘나라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적인 베드로의 기독교는 구약 성경을 수용하는 만큼 이 세상의 땅의 것을 수용하여 하늘의 복음에 물을 많이 타 지지를 받았고 이런 베드로의 제자들이 일군이 없는 이방 바울의 교회에 지도자로 들어가 모든 교회를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로 만들었지만 요한의 교회는 이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교회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주님의 태도
주님은 기도도 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을 우리로 인도한다]는 대목은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베드로 공동체에 속한 베드로가 전한 유대주의 중심의 미성숙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을 요한의 교회로 이끌어 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7:9절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15:12절의 예수님의 새 계명에도 세상에 대한 사랑은 생략되어 있다. 13:31-17:21의 고별 설교와 마지막 기도 어디에도 세상에 대한 언급없다. 12:31, 16:33절에서는 이 세상 신은 마귀며 쫓겨날 것을 예고하고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을 예언하신다.
예수님께 대한 세상의 태도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유대인을 지칭한다. 유대교도 세상과 동일시 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 유대교가 들어 온 것은 새상이 들어 온 것으로 요한복음은 간주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세상적이며 육적인 메시아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것도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으로 간주하여 베드로 공동체 속에 있는 이런 유대교적인 요소를 세상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기에 외면적으로는 같은 복음을 믿고, 같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베드로 공동체와 요한공동체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는 바울공동체와 베드로 공동체 간에도 존재한다. 바울공동체와 요한공동체는 동질이지만 베드로 공동체와는 이질적인 요소가 현저하다는 것을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은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 유대교를 앞세운 세상은 예수를 핍박하고(5:16) 비난하고(7:15) 부활 예고를 이해 못하고(2:18-22)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을 추방(9:33-34)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11:53)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19:15)친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과 세상의 거부받는 분으로 묘사된다.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운명과 자신의 공동체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예수님은 세상과 유대인과 유대교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요한 공동체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만큼 고난을 받는 것으로 언급한다.
세상이란 용어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란 유대인이란 의미로 해석을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고 미워할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유대가 망한 후에는 이 [세상]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총칭한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믿음 좋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상속했다고 주장한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몽학선생이고 초등학문이며 의문이란 형식이다. 이것은 땅엣 것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강조점
하늘나라를 대망하는 종말론적이다.
그리스도론적이다.
성례전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이런 것을 강조하게 되었을까? 이는 당시 요한공동체가 유대인들로부터 소외와 박해를 받고 있었으며 이런 사회적 종교적인 박해와 소외를 피하기보다는 정당화하고 합리화시켜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되었다.
요한복음은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이들에게도 추방 박해 출교 순교 처형같은 여러 방향으로 조여오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두려움에서 담대히 승리하여 침묵하지 않고 믿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 16:33) 이런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 특히 예수님의 고별 설교의 내용이다.(14:-17장) 16:1절에서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고난과 핍박에 대한 이해
요한공동체가 고난과 핍박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였고,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의 포기가 아니라 최후의 더 큰 기쁨을 주시려는 불가피한 단계로 보고 있다. 해산의 고통은 기쁨을 더 극대화 한다(16:20-21) 예수님도 같은 고난을 받으신 분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당시 신나들은 고난과 소외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겼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하늘의 영광을 더 소망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