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여 무등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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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 무등산이여
머리말
머리말
군중들의 외치는 함성(喊聲)이 들려옵니다.
어떤 이들은 큰 싸움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응원 군중을 생각할 것입니다.
음악가는 우렁찬 오케스트라를 연상할 것입니다.
신문기자는 특종을 생각하면서 달려갈 것입니다.
정치가는 데모군중을 생각할 것입니다.
전경들은 방패와 최루탄을 챙길 것입니다.
집권자들은 비상조치를 생각할 것입니다.
'빛고을' 광주에는 두 번의 역사적인 큰 함성이 터졌습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어났던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 운동과 군부독재 치하에서 일어났던 1980년 5월18일의 광주학생시인 민주항쟁의거를 말합니다. 무등산의 함성은 당당하고 의로웠습니다. 애석하게도 무등산의 합성은 그 때마다 총칼에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독재자들은 잡아 가두고 때리고 짓밟고 찌르고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잠잠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무등산을 옮겨버릴 수 없듯이, 그 함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광주시민을 영원히 폭도로. 정죄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영원히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와서 누가 감히 그들을 폭도라 할 것입니까? 누가 감히 그들을 불순분자라 할 것입니까? 누가 감히 용암처럼 분출했던 무등산이 무등산의 함성을 잠재울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감히 알고 있는 그 진실을 숨길 수 있을 것입니까?
5.18의 진상은 숨김없이 밝혀져야 하고 공개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등산은 또 함성을 지를 것입니다. 이 함성은 나라를 지킨 함성이요, 민주주의를 지킨 함성입니다. 이 함성의 극히 적은 부분이 이 책에 담겨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충무공의 정유재란 때의 글 한 구절을 회상하면서 이 함성을 되새깁니다.
"岩無湖南 是無國家"
1988.2. 22
무등산 밑에서 趙 在 泰
차 례
차 례
1. 새해의 소원(새해, 소원)
2.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민주주의, 정의)
3. 고문(拷問)(민주주의, 고문)
4. 죽음을 기억하라!(구원, 죽음)
5. 망명(亡命)(인권, 희망)
6. 헌법제정권(헌법, 민주주의)
7. 부불견, 모불견(父不見, 母不見)(심판, 재림)
8. 「생명물」 예수(구원, 생명)
9. 태도가 중요하다!(적극성, 생명)
10. AIDS, 그것은 천형인가?(음란, 심판)
11. 기도의 법칙(기도, 소원)
12. 빛과 어두움(종말, 소명)
13. -(1)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신의,충성)
13. -(2)세 개 먹은 놈은 배 터져 죽겠네!(자녀, 교육)
14. 다 이루었다!(죽음, 승리)
15. 일조(1兆)원의 의미(정의,물질)
16. 「다모클레스」의 칼(역사, 권력)
17. 오월 그날이 오면(민주주의, 오일팔)
18.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민주주의, 오일팔)
19. 아, 민족사의 비극이다!(민주주의, 오일팔)
20. 무등산의 함성(민주주의, 오일팔)
21. 그날의 금남로(민주주의, 오일팔)
22. 오월에 떨어진 꽃들이여!(민주주의, 오일팔)
23. 증언(證言)(민주주의,오일팔)
24. 군사독재정치(민주주의, 오일팔)
25. 인권(人權)(민주주의, 인권)
16. 20세기의 기적 「헬린 켈러」(최선, 성공)
27. 칼이 짧거든 일보 전진하라!(민주주의, 정의)
28. 최루탄(催淚彈)(민주주의, 정의)
29. "아아 잊으라, 어찌 우리 이날을"(애국, 육이오)
30. 「노벨」평화상(민주주의, 평화)
31. 「야누스」의 얼굴(민주주의, 정의)
32.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자유, 교권)
33. 집중호우(集中豪雨)(재난, 폭우)
34. 김구선생 저격범 안두희(애국심, 정의)
35. 「호메이니」(신앙, 회교)
36. 무신론자(無神論者)(신앙, 무신론)
37. 밖에 선교사가 있느냐?(선교사, 신앙)
38. 관동대 학살(關東犬虐殺)(불의, 국가)
39. 「오대양」사건(五大洋事件)(신앙, 이단)
40. 애국가(愛國歌)와 안익태(安益泰)(애국, 음악)
41. "동인아 동신아, 아버지가 묻혔다!(신앙, 순교)
42. 여순반란사건(신앙, 순교)
43. 손양원목사의 감사‥‥‥
44. 「유관순」의 옥사(獄死)(애국, 삼일절)
45. 종교개혁(宗敎改革)(1)(신앙, 정의)
46. 종교개혁(宗敎改革)(2)(신앙, 정의)
47. 종교개혁(宗敎改革)(3)(신앙, 정의)
48. 종교개혁(宗敎改革)(4)(신앙, 종교개혁)
49. 증교개혁(宗敎改革)(5)(신앙, 종교개혁)
50. 종교개혁(宗敎改革)(6)(신앙, 종교개혁)
51. 범사에 감사하라(감사, 기쁨)
52. 광주학생독립 운동사刻(1)(애국, 독립)
53. 광주학생독립 운동사건(2)(애국, 독립)
54. 광주학생독립 운동사건(3)(애국, 독립)
55. 대통령선거(민주주의, 선거)
56. 투표(投票)(민주주의, 선거)
57. 그놈이 그놈이다(민주주의, 선거)
55. 세월을 아끼라(시간, 종말)
1. 새해의 소원
1. 새해의 소원
새 해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숨 막히는 괴로움과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점철된 1985년은 영원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동녘 하늘을 바라봅니다. 둥글고 큰 태양이 떠오릅니다. 산 넘어서 바다 건너서 희망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딴은 태양입니다. 아름다운 태양입니다.
저 아름다운 태양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은 새해 아침입니다. 저 밝은 태양처럼 밝은 꿈을 꾸고 싶은 새해 아침입니다. 세상이 어둡기에 밝은 꿈을 꾸고 싶고, 세상이 추하기에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습니다."주님, 새해에는 주님이 원하는 큰일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18세기 초에 「몽골피에」라는 사람이 최초의 기구를 하늘로 올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자들이나 친구들 사이에까지 큰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그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자인 프랭클린」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프랭클린」앞에서 기구의 상승 실험을 악평하였습니다. “설사 기구가 공중에 올라갔다 해도 그것으로 어떤 목적이 달성 되었단 말씀입니까?"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없던「프랭클린」은 그에게 반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갓난 어린애가 어떤 목적을 가졌다고 설명하겠습니까?" 「프랭클린」의 이 반문에 비난하던 학자는 한 마디의 대답도 못했다고 합니다.
”성공은 목표한 것을 달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에 목표를 두는 데 있다"는 말이 진리라면 「몽골피에」는 기구를 띄운 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성공도 작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난로 위에서 끓는 주전자 뚜껑의 노래가 증기기관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두 나뭇가지를 이은 거미줄이 조교(弔橋 Suspension Bridge)의 가설에 암시를 주었다고 합니다. 빨래줄 위에서 흔들리는 셔츠가 「챔벌린」백작이 발명한 기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밝고 아름다운 아침에 큰일을 위한 작은 꿈이라도 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키며 몽매에도 그리던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해에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을 수는 없을까?(수5:12).
"주님, 이 해에 우리 모두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요.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큰일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아멘.
(87. 1. 1)
2.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2.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국입니다.
민주 공화국이란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민주주의란 인민을 위하여 인민이 행하는 인민의 정치를 해 나가려는 정치제도를 말합니다.
이 같은 민주정치는 필연적으로 일당독재 정치일 수가 없습니다. 다수의 정당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정당의 주의와 정책을 기초로 하여 행해지는 정치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민주정치는 다수파에 의한 정치를 말합니다.
51과 49는 불과 2의 차이밖에 없지만 하나는 다수파요 다른 하나는 소수파입니다. 다수파의 지배를 원칙으로 삼는 민주정치에서는 49%가 51%의 지배를 받기 마련입니다. 민주주의에 없어서 이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이 다수지배의 사상은 인민주권에서 비롯되는 것은 물론입니다.「룻소」가 이 인민주권을 제시한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소국가를 상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정치는 소국가 형태를 벗어날 대중국가의 통치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제도입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의원의 국회가 다수지배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정치의식이 낮은 사람의 한 표와 그것이 높은 사람의 한 표와는 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한 표마저 자유와 비밀이 보장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수결이 언제나 만능일 수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전제 때문입니다.
또한 다수라 하여 찔레를 장미라고 우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다수일지라도 장미를 장미라고 말할 수 있는 힘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미가 찔레가 아니고 장미라는 판단에 이르기까지는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 발표와 토론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국회의 다수와 소수는 토론의 과정에서는 서로 평등하고 자유로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 토론이 무시되거나 제한된 상황에서는 장미를 찔레라고 규정할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다수당이요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창당 기념일입니다. 민정당은 그동안 다수의 위력으로 고비 고비 마다 소수의 당을 무력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수의 집권당은 최루탄을 가장 많이 뿌린 정치를 하여 왔고 학생들을 가장 많이 구속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공과는 후일의 역사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오늘 그 창당을 기념하는 민정당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수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양식이야말로 민주정치의 미덕이 아닐까?"
"한줌의 사실은 한톤의 토론 이상으로 중요하다."
(87.1.15)
3. 고문(拷問)
3. 고문(拷問)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프랑스」사랑입니다. 그는 신학자요, 의사요, 저명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아프리카」적도 부근의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 건너가 원시림 속에 병원을 세우고 흑인들의 벗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면서 봉사하는 중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겁고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본 식인종 「아프리카」 추장이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이 몇 명이나 죽느냐?"고 물었습니다. 「슈바이쳐」는 몇 십만 혹은 몇 백만 명이 죽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프리카」 흑인 추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잡아먹을 만큼만 죽이면 되지 무엇 때문에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낭비하느냐?"
그러나 지금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우리는 그 「아프리카」흑인 추장을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아래 인간의 가치와 권리가 무참하게도 짓밟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그 인권선언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인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고유한 존엄과 평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한다는 것은 세계에 있어서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인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언젠가 「앰네스터」 국제위원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 60여 개국에서 정권유지를 위한 한 방법으로 잔인한 고문이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육체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고통도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문 때문에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재수 끝에 서울대학에 입학하여 어렵게 공부하다가 모진 고문 때문에 「박종철」군은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숨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야당 당수가 그 보고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없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정의사회의 구현과 선진민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구호를 내건 어느 집권당의 치하에서 그것도 대낮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슬픔과 분노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6,37). 시인은 저희 생명은 너무나 귀하다고 하였습니다(시49:7-8).
고문 때문에 죽어간 스물하나의 그 생명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 부모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
"누가 너를 앗아 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면서 조사를 읽다말고 울어버린 동료 여학생의 울음과 함께 어느 누가 함께 눈물을 감출 수가 있겠는가!
(87. 1. 22)
4. 죽음을 기억하라!
4. 죽음을 기억하라!
로마에 가면 「우르반」대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학의 대강당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그 다음에는,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결코 가볍게 읽고 흘려버릴 말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인생의 종말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의미의 종말이 없습니다. 첫째는 우주의 종말이요, 둘째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올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인생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인 「필립」II세는 이상한 신하 한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아침마다 냉수 한 잔을 가지고 대왕의 처소에 들어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필립스 대왕이여, 그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법대를 다니던 고학생이 「필립 네리」란 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네리」 노인은 청년의 향학열에 감탄한 나머지 그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청년, 법대를 졸업하면 무얼 하겠소?"
"변호사가 되렵니다"
"그 다음에는요?"
"돈을 많이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요? "
"좋은 집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
"마차를 사겠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
"결혼을 해야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
"자녀를 낳아 영재를 만들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
“··········”
젊은 법대생은 대답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황혼이 오고, 뜨거운 이 피는 식어 싸늘해질 것이다. 음산한 겨울날 장례식이 거행되면 북망산에는 무덤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한 망각 속에 빠질 것이다.····"
「네리」 노인은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하여 엄숙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영원한 천국이요, 예수 밖에서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돈뭉치를 받아든 청년은 「네리」노인의 말씀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중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로마」법대에서 「우르반」대학으로 전학하여 거기서 신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축복만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밀고 경성하는 사람"은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모진 박해 속에서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메멤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 하라! )
5. 망명(亡命)
5. 망명(亡命)
청취자 여러분 안념하십니까?
우리는 사망(死亡)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망이란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출생(出生)과는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그 "망자(亡者)"는 쓰기 쉽고 익히기 쉬운 글입니다. 그러나 그 글자를 옥편에 찾아보면 의외로 많은 의미가 담긴 말임을 곧 알게 됩니다. 첫째는 죽인다는 뜻입니다(殺也). 둘째는 없어진다는 뜻입니다(失也). 셋째는 죽은 사람을 뜻합니다(亡人), 넷째는 망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滅也). 다섯째는 죽는다는 뜻입니다(死也). 여섯째는 도망한다는 뜻입니다(逃亡).
우리가 망명(亡命)이라 할 때에는 바로 이 여섯 번째의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망명(亡命)이란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여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망명을 "어사일럼"(Asylum)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붙잡힐 권리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붙잡힐 권리가 없다"는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망명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정치체제에 항거하던 자가 그 체제를 탈출할 경우 그것은 망명인 것입니다. 그는 조난자와는 달리 마땅히 망명자로서의 보호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반대파에 의해 박해를 받던 신교도 「유그노」들의 국외탈출은 망명이었습니다. 영국의 절대주의 시대인 「스튜어트」도 말기 그 체제를 벗어나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 역시 종교적인 망명자들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국외로 탈출한 「에미그레」들과 독일의 나치 집권 후 유대인들의 국외탈출은 역사상 유명한 망명을 기록한 것들입니다.
20세기의 망명자들 가운데는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문학가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한때는 망명문학이 꽃을 피우던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망명이 한창 유행하던 시대에는 「파리」 「런던」「빈」등이 그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후 「정치범 불인도의 원칙」이 여러 나라에서 받아지면서 부터는 오늘날 망명지는 특정국에 한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때 국록을 먹고 고위관직을 누리던 자들이 자신들의 비행과 과오 때문에 국외에 나아가 망명을 선언하던 추태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외 도주이지 망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만철씨 일가의 북한 탈출은 남북이 분단된 이래 처음 있는 일로 철의 장막에도 헛점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일본정부가 그들 일가를 망명자로 처리한 것은 인권의 승리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낡은 말뚝도 봄이 돌아오면 푸른빛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김만철씨를 맞이한 조국 대한에 이제는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피는 봄이 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87. 2. 12)
6. 헌법제정권
6. 헌법제정권
1787년에 제정된 미국의 헌법은 금년으로 꼭 200년이 됩니다. 이 미국 헌법은 오늘날 많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첫째는 세계 최초의 성문헌법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세계 최장수 헌법으로 존속해 오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많은 법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된 헌법의 모델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헌법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글래드스턴」같은 이는 미국의 헌법에 대하여 "인간의 두뇌가 일정한 시간 내에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까지 극찬합니다.
넷째는 그 기간입니다. 불과 3개월 만에 이와 같은 이상적인 헌법을 제정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최초의 회의가 1787년 5월 25일이었고, 같은 해 9월 17일에 통과시켰습니다. 그것도 휴회한 10일을 빼면 회의 기간은 95일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헌특위가 조직 되자마자 좌초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 부럽기조차 합니다.
미국의 제헌의원들도 처음부터 이해가 엇갈리고 입장이 상반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정면충돌을 피하며 타협점을 찾아 최고의 헌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엇갈린 이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모두가 이해를 달리하는 정치문제에 있어서 토론과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을 가진 영국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회의에 임하기 전에 매일 아침 제헌작업을 비는 기도회를 가졌다는 사실도 돋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정파의 이해관계를 떠나 독립전쟁을 일으키며 선언한 민주혁명의 이상을 제도화 하는 데만 전념했다는 점입니다.
그러하여 오늘날까지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헌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를 위한 개헌을 시도하면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집권당과 대통령 직 선제 개헌을 시도하는 야당이 팽팽히 맞서 있습니다. 개헌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시에예스」(Sieye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헌법은 그 각 부분 모두가 「헌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권력」(Pouvoir constitue)의 작품이 아니고, 「헌법을 만드는 권력」(Pouvoir constituant)의 작품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종류의 위임된 권력도 위임의 조건에 대한 어떤 변경도 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헌법제정 권력에 대하여 "헌법을 만드는 권력은 오로지 국민만이 갖는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개헌정국도 「시에예스」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각제건 직선제건 국민들이 선택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7. 2.19)
7. 부불견, 모불견(父不見, 母不見)
7. 부불견, 모불견(父不見, 母不見)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신라의 장군입니다. 그는 나이 60세에 태종대왕의 딸 「지조」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녀는 참으로 현숙한 부인이었습니다.
슬하에 아들만 다섯을 두었는데, 맏아들을 「삼광」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삼광」은 뒤에 재상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원술」(元述)이라 하였습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일찍 화랑이 되었습니다.「원술」은 「문무왕」12년(672년)에 석문(石門)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대패하여 수치스런 패잔병으로 도망쳐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죽어 돌아오지 않고 패잔병으로 돌아온 것은 불충불효하다하여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돌아보지도 안했습니다. 「원술」은 부친에게 쫓겨나 부끄럽다면서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이듬해인 「문무왕」 13년(673년)에 아버지께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술」은 집을 찾아왔습니다. 「원술」의 어머니 「지조」부인은 돌아온 「원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못 본 자식을 어머니인들 볼 수 있겠는가?"(父不見, 母不見) 쫓겨난 아들 「원술」에의 정을 한 시간인들 잊었겠습니까만 그녀의 입에서는 더 무서운 말을 토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후 2년 뒤인 「문무왕」 15년(675년)에 당나라 대군 20만은「양주」로 침략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술」은 이때에 의병을 일으켜 나아가서 당나라 군사를 맞아 싸워 대승하여 전일의 그 수치를 다 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고 거기서 종신했다고 전합니다.
"패잔병이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이 죄가 되어‥‥
그 부끄러움 다 씻고도,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니···
아버지 어머니 앞에도 부끄러워 서지 못 했다면,
언젠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감히 부끄럼 없이 설 수 없을까?"
중국의 철인 맹자는 "하늘을 우리러 마음에 두려울 것이 없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보아도 사람이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天心不愧 情頗人不愧). 사도 바울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5).사도 요한은 주님 강림하실 때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서기 위하여 "주안에 거하라"고 권면합니다(요1서2:28). 언젠가 그날 그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없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87. 2.26)
8. 「생명물」 예수
8. 「생명물」 예수
한때 영국에서는 양 도독을 처형한다는 법을 제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을 훔치다가 붙잡혀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목사님 중에 유명한 「필립 도드리지」(Philp Doddridge)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이 범죄자의 구명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법은 너무도 엄했습니다.
유명한 목사의 노력과 영향력으로도 그를 구출해 낼 수 없었습니다. 범인은 형장으로 가는 길에 자기를 위하여 애써주신 목사님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았습니다.
그 범죄자는 목사님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목사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명을 살려 주지는 못했군요" 너무나 가슴 아픈 말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일지라도 범죄자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에게 나오는 자는 다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 말했습니다(딤전1:15).
성경 중에 요절이라고도 하고 「작은 복음」으로 불리우는 요한복음 3: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네 부분으로 나누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부분을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라 이름 지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부분은 이 사랑의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이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하는 부분은 "사랑의 물을 떠서 마실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도 그릇이 있어서 그 물을 마셔야 우리의 기갈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그릇은 곧 '믿음'입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넷째 부분은 "사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큰 사랑의 호수」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강물」을 「사랑의 그릇」인 믿음으로 떠서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아니 하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생명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물」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되리라"(요4:14). 이 「생명물」 예수를 마심으로 죄의 갈증으로부터 해갈 받으시기 바랍니다.
(87. 3.12)
9. 태도가 중요하다!
9. 태도가 중요하다!
「커밍 워크」(Cumming Walk)는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악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I.Q)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지식"(Knowledge)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기술"(Technique)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적인 삶에 93%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어떤 이는 성공하고 어떤 이는 실패합니다. 어떤 이는 만점의 여건 중에서도 실패한 이가 없고, 어떤 이는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성공한 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운명의 장난이 아닙니다. 실패한 자들 중에는 부정적 사고주의자가 많고 성공한 자들 중에는 적극적 사고주의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전자는 무슨 일이든지 잘 되게 할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 보려하지 않고 "왜 그 일이 잘될 수 없는가?"라는 원인과 그 이유만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 된다"는 결론부터 내리고 맙니다. 그들은 그 일은 나쁘다는 원인과 성취될 수 없다는 이유와 그런 일의 실패한 예와 그 일을 하기 위하여서는 너무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등 의식적으로 반대를 일삼습니다.
그리하여 의심을 품게 하고 공포심을 자아내게 하며 비관적인 풍토를 조성합니다. 그리고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맙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사고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산이 앞을 가로막으면 그 산을 넘기 위하여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거나 길을 찾아내거나 밑으로 굴을 파고서라도 그 산을 정복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합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이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면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자들입니다.
성공적인 요인 중에서도 이 적극적인 태도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어려움을 참아 이기려는 의지가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투덜대는 사람은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불평 많은 사람은 안락의자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장미의 가시 때문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발자가 될지언정 결코 용서하는 자는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발 없는 사람을 보면서도 구두를 갖지 못한 불평 속에서 삽니다. 그들은 햇빛을 보는 대신 먼저 그늘을 봅니다. 사람들은 왜 저 밝은 태양을 등지고 살면서 한숨을 쉬고 있을까?
돌아섭시다. 돌아서면 찬란한 태양빛으로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이 태도와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87. 3.19)
10. AIDS, 그것은 천형인가?
10. AIDS, 그것은 천형인가?
일찍이 「우스」땅의 족장 「욥」은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고 탄식하였습니다(욥7:1).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했다"고 하였습니다(욥14:14).
생각해 보면 인생의 삶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인류역사상 지구상에는 평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웃나라와 싸웁니다. 작게는 이웃끼리, 크게는 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들이 속에 휩싸입니다. 영국 격언에 "전쟁이 시작되면 지옥문이 열린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비참하고 처절한 것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말한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살륙 전쟁만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달픈 모든 생존 경쟁을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죄와 불의와의 싸움도 심각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 전쟁이니 입시 전쟁이니 무역 전쟁이니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또한 질병과의 싸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6세기와 14세기에 크게 번졌던 흑사병과 천연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폐결핵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병들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퇴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무서운 병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암이요, 그 둘째가 지금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후천성 면역결핍증」, 소위 「에이즈」(AIDS)로 불리우는 병입니다. 사람들은 이 AIDS를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질병이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극히 높은 치사율입니다. 둘째는 광범위하게 미치는 전염력입니다. 셋째는 그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쥐나 벼룩 같은 동물의 감염에 의해 확산되는 자연의 질병이라면, AIDS는 인위적인 질병이고 현대사회의 문명병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한 성도덕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AIDS, 그것은 인류의 종말을 몰고 올 것인가?"라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 가공할만한 성병 AIDS는 타락한 성도덕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로 받음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하여 들려주는 성령의 음성을 들읍시다.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롬12:2).
AIDS, 그것은 과연 음란한 이 세대를 향하신 천형(天刑)인가? 이 세대의 마지막 경고로 간주되는 AIDS를 보면서, 형제여 그대의 귀에는 재림하시는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87. 3.25)
11. 기도의 법칙
11. 기도의 법칙
“기도는 아침의 열쇠이고 저녁의 자물쇠이다"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이는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빌리그레함」목사의 말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 없이는 못산다는 의미의 말이기도 합니다.
페이톤(Edward Payton)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첫째로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둘째로 필요한 것도 기도이며 셋째도 기도이다. 그렇다면 친애하는 나의 형제여,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부탁을 받습니다(살전5:17). 우리는 또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중언부언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의심합니다. 우리는 많이 기도하면서도 하늘 보좌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기도의 법칙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를 대신하여 해주시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첫째 법칙입니다.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숙제를 받아가지고 와서 부모님에게 도와달라고 조르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 숙제를 부모님이 대신 해주면 참 좋겠지만 그래서는 어린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현명한 부모라면 누구나 다 압니다. 정말로 어린아이를 돕기를 원한다면 어린아이 스스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지도하고 설명하고 격려해 주는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 밀어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우리를 바꾸는 일입니다. 상황은 예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힘과 그 상황에 맞붙은 새로운 능력으로서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에 대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셋째, 기도는 도피가 아니라 정복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이를 정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넷째,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기도는 물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언제나 듣는 일로써 마쳐야 합니다. 기도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무엇 하기를 바라십니까?"라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기도를 그만 두거나 쉬는 것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의 법칙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피니(Finney)의 말도 기억합시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87. 4. 2)
12. 빛과 어두움
12. 빛과 어두움
18세기 중엽 「에덴버러」에 「월리엄 브로디」라는 덕망 높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석공조합의 조합장이었고, 시의회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원이 영문학사상 가장 무서운 주인공의 모델이 되였습니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서 정신분열증에 걸린 과학자 「지킬」박사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브로디」는 고결한 가면 뒤에 비밀의 생활을 감추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낮에는 실업가였지만, 밤에는 도박사, 도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비밀을 몰랐으며, 그와의 사이에 다섯 명의 아이까지 낳은 두 명의 정부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정부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없었습니다.
「브로디」가 악의 길에 들어선 것은 27세 때였습니다. 그는 1768년 8월에 시립은행의 열쇠를 만들어 800파운드를 훔쳤습니다. 그 후 그는 18년 동안 수십 개의 건물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했으나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종말이 시작된 것은 1786년, 그는 세 명의 좀 도둑과 손을 잡고 「스코틀랜드」 세무서 본부를 습격하였으나 직원에게 발각되었고 결국은 체포되었습니다. 「브로디」는 「에딘버러」로 송치되어 몇 달 전만 해도 자기가 배심원으로 앉아 있던 바로 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증거는 결정적이었습니다. 경찰은 가짜열쇠, 권총, 검은 옷 등 그의 이중성을 증명하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브로디」는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년간이나 법을 조롱했던 「브로디」는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형 전날 밤 교수대 밧줄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목에서 발까지 옷 속에 철사를 넣었고 올가미로 질식하지 않도록 목구멍에 은제 튜브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1788년 10월 1일,「에던버러」의 교수대에서 죽었습니다.
이중적인 삶은 언젠가는 탄로가 나기 마련입니다. 한쪽 발은 어두움 속에 두고 다른 한쪽 발은 및 가운데 둔 채 박쥐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빛을 등진 어둠의 인생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당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하였습니다(롬13:11-14)
주 예수님은 "너희 빛을 반짝이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빛을 비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불타지 않고는 빛을 비출 수는 없습니다.
(87. 4. 9)
13.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1)
13.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1)
「알렉산더」대왕이 전쟁 중에 병에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목욕을 하다가 독벌레에게 물려서 얻은 병입니다. 몸에 열이 대단하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한 병이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들을 다 불러 들였지만 신통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필립」이란 의사가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왕을 진찰한 「필립」은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왕의 병은 대단히 위독하기 때문에 약을 쓰되 강한 것을 써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필립」은 물러나 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전선에서 싸우는 「파르메니오」장군에게서 편지를 가지고 왕에게 왔습니다.
그 편지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대왕님 「필립」의사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적국의 간첩입니다. 대왕님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입니다" 왕은 그 편지를 받아서 읽고는 한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필립」이 약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왕에게 "대왕이여, 이 약을 드십시오. 고통은 심하지만 이틀 후면 낫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대왕은 약사발을 받아들고 「필립」에게 그 편지를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약을 마시는 동안 자네는 그 편지를 읽어보게" 왕은 그 약을 다 마셨고 「필립」은 그 편지를 읽었습니다.
왕은 이틀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왕은 「필립」에게 "의심은 죽는 길이고, 믿는 것이 사는 길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불신의 세대인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젊은 학생들 사이에 퍼져있는 속어나 수수께끼를 모은 경희대 서정범 교수가 펴낸 「수수께끼별곡」이란 책에 부자(父子)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엘 함께 갔습니다. 먼저 목욕탕에 들어간 아버지가 "아! 시원하다. 너도 어서 들어온" 합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정말 시원하나요?" "그래 어서 들어와" 아들이 목욕탕에 뛰어 들어갔더니 물이 뜨거워서 도로 뛰어나오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들을 때리려하자 그 아들 하는 말이 “때려라, 때려.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고 대꾸하더라는 것입니다.
박장대소할 이야기입니다만 음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정계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금방 그 어린 아들이 내뱉었던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을 것만 같습니다. 개헌을 확인하고 협상을 구두선처럼 외어대던 그 입에서 무슨 말을 했다던가? 불구대천의 원수 김일성과는 회담하자고 재촉하는 어른들이 두 김가와는 안 만나겠다고 했다던가? 도무지 믿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됩니다.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離怨을 莫結하라 路逢陸處에 難避避니라"
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7. 4. 16)
13. 세 개 먹은 놈은 배 터져 죽겠네!(2)
13. 세 개 먹은 놈은 배 터져 죽겠네!(2)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선생이 쓴「어린이 예찬」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것도 어린이요, 눈이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람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본 어린이는 이렇게 아름답고 밝고 깨끗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의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시127:3). “집안에 애들이 없는 것은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는 영국 격언은 정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모이면 어울립니다. 그리고 웃습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의 부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들 때문에 웃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 문명 속에서 자란 어린이들은 그렇게 순진하지만도 않고 아름답지만도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어른들을 비웃기도 하고 환멸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경희대학교 서정범 교수는 「수수께끼별곡」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 퍼져있는 속어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지난해에 퍼졌다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아들을 생각하여 방 다섯 개를 산 아버지가 아들에게는 두 개를 주어 먹게 하고, 세 개는 자기가 먹었습니다. 아들이 맛있게 다 먹은 것을 보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부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 대답하기를 "두 개 먹고 배가 부르면 세 개 먹은 놈은 배 터져 죽겠네"하더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 매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렸습니다. 아들이 말리는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그만둬요. 지 새끼 지가 때리는 데 누가 말려 " 하더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지금 그런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야 할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87. 5. 7)
14. 다 이루었다!
14. 다 이루었다!
미국의 악한(惡漢) 「파마」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교수형을 받기위하여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파마」는 자기 앞에 드리운 그 밧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줄이 튼튼할까?"(Are you sure it's safe?)
그는 악한다운 한 마디를 세상에 남기고, 그가 염려하던 줄에 매달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로마황제 「비텔리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폐위된 후 곧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얼마 후면 창에 찔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가 억울했던지, 자기에게 학대하는 호민관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임금이었다!"
「비텔리우스」는 전날에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장의 주인공입니다. 발버둥쳐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있는 병사가 죽은 황제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항상 죽음의 전후좌우를 배회하며 살아가면서도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죽음은 엄연히 우리의 랄 속에 내재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죽음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이처럼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건만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하여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다. 죽음은 바로 내 앞에 있건만 죽음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죽음을 향한 행진은분 초를 다툴 만큼 정확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피안의 것으로만 여겨 버립니다.
그러다가 불원간 그 죽음이 내 앞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합니다. 미국의 사학계를 개척한 「H.B.아담스」 는 애원하는 듯한 눈매로 그의 비서를 바라보면서 "여보게 나 좀 살게 해 다오"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Dear Child, Keep me alive).
무신론자 「볼테르」는 1778년에 죽었는데 그 담당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입니다. 나의 생명을 6개월만 더 연장시켜 준다면 나의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
그러나 그의 재산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의사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죽음 앞에서 그를 건져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운명하면서 남긴 말을 유언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슬픈 말을 남기고 갑니다. 어떤 이는 절망적인 말을 남기고 갑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개선장군처럼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전자는 대부분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감사하면서 하늘나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운명하시기 직전 그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이는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승리의 환성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평생을 살았다는 감격스런 외침입니다. 고난과 부활의 계절에 새롭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87. 4.23)
15. 일조(1兆)원의 의미
15. 일조(1兆)원의 의미
일금 1조원!
이는 요즈음 시중을 떠들썩하게 하는 범양상선(汎洋商船)의 부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플레」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兆)에 대한 감각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조」(兆)의 한자 의미는 "많다" "조점" "백성"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어원은 거북이 등(甲)이 갈라진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사전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숫자의 단위인 兆가 되었는지는 끝내 궁금합니다.
「1조원이 얼마나 큰 돈 일까?」 「兆」는 억(憶)의 1만 배에 달하는 크기입니다. 동그라미를 그러자면 12개나 그려야 그 수치에 이릅니다. 우리나라 예산에 조 단위가 등장한 것은 1976년 부터였습니다. 금년 우리나라의 예산이 15조 5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 15분의 1에 해당하는 「1조」원의 크기는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조원은 1천원 권으로 10억장이나 됩니다. 이것을 한 줄로 이어놓으면 지구를 4바퀴나 돌 수 없습니다. 10억장의 천원 권을 쌓아올린다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에베레스트」산의 10배 높이가 더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루에 100만원씩을 하루도 빠짐없이 100년을 써도 365억 원에 불과하고 1조원을 다 쓰자면 2,700년이 걸려도 다 쓰지 못하는 그런 숫자라고, 어떤 호사가는 계산해 놓고 있습니다.
「범양상선」은 그렇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세청이 발표한 범양사건은 부정외화 유출이 1,644만 달러, 세금포탈이 110억, 박 모 회장의 개인 재산이 무려 344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노출되지 않은 숨겨둔 재산은 더 많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범양상선」의 경영인들은 어떻게 하여 그렇게 많은 개인 재산을 챙겨 놓을 수가 있었을까? 주거래은행과 주무관청은 정말로 범양상선의 내막을 모르고 있었을까? 정교한 전산화 시스템과 막강한 정예요원을 자랑하는 국세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범양사건은 정부의 비호와 지원을 받은 부실기업이라는 독버섯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인가?
그들은 할 수 있는 탈법은 다 저질렀다고 합니다. 범양상선의 장본인인 한 사람은 "나를 건드리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의 말이 기억납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17:11)."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솔로몬은 말했습니다(잠29:2).
왠지 오늘을 사는 것이 자꾸만 부끄러워집니다.
(87. 4. 30)
16. 「다모클레스」의 칼
16. 「다모클레스」의 칼
B.C 4세기경 「그리스」에는 「시라쿠사」라는 도시국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칠리아」에는 그 도시국가의 문과 유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도시국가에는 「디오니시우스」라는 왕이 있었고 그 밑에는 「다모클레스」라는 신하가 왕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왕이란 무엇이든지 할 수 없는 절대권은 물론 사람의 생사에 관한 엄청난 권한을 한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왕의 삶이란 영광과 행복의 연속일 거라고 사람들은 우리러 보고 있었습니다.
「디오니시우스」왕의 신하 「다모클레스」도 그 왕권을 흠모하면서 날마다 왕의 권력을 찬양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디오니시우스」왕은 그의 신하에게 말했습니다."다모클레스 경, 경이 늘 부러워하는 이 왕좌에 하루만 앉아보시오. 경이 그처럼 칭송하는 왕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오"「다모클례스」는 왕의 배려가 눈물겨웁도록 고마왔습니다. 단 하루이기는 하지만 마음껏 행복을 맛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입니까?
왕의 신하였던 「다모클레스」는 이제 하루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연회를 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따라 벌어지는 눈앞의 사태에 흡족해 하면서 희희낙락했습니다. 그는 산해진미와 주지육림 속에서 순간순간을 만끽하면서 왕좌의 권세를 즐겼습니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먹은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하루 동안만이라도 왕이었으므로 거만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신하들의 움직이는 모습을 감상하였습니다. 그는 왕좌에 푹 파묻혀 대궐 안을 감상하다가 천정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한 가닥 실오라기에 매달린 예리한 칼이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그는 술기운이 확 깼습니다. 그는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왕과의 약속 때문에 하루 동안만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가 누리던 행복의 감격이 일순간 공포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남은 시간 내내 그 영광스런 왕좌에서 벌벌 떨며 죽어지내야 했습니다.
참으로 일각이 여삼추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흔히 "다모클레스의 칼"로 인용되곤 합니다. 권력의 정상에 있다고 해서 만인이 부러워 할 만큼 화려하고 행복하고 평안한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위험이 수반되는 매우 고독한 자리가 권좌라는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권좌는 언제나 수많은 칼이 겨누고 있고, 부지기수의 대적들이 넘어다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은 붕괴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된다"는 「맥튼」의 말은 무게 있게 들립니다.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87. 5.14)
17.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17.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오월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6·25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대 참변의 달이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국군과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동족의 유혈충돌로 빚어진 엄청난 광주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전라도민은 물론 양식 있는 전 국민들의 비통을 자아내게 하는 이 사태는 비상계엄이라는 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있음은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도된 국민으로부터 자업자득이었다는 비난과 함께 질시의 눈초리를 당하고 있다.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양심과 신앙의 충동에 따라 사래의 진상을 전국인 앞에 발표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 사태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한 맺힌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결정하여 아래와 같이 전 국인 앞에 밝히고자 한다"
그해 6월에 「천주교 광주대교구사제단」이 발표한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의 머리말입니다. 그들이 발표한 그 날의 진상은 대략 이러합니다. "비상계엄이 실시되기 전까지 광주시내의 학생 데모는 3만 여명의 대규모 데모였지만 평화적인 것이었고 경찰과 충돌조차 없었으며 질서정연하게 민주화를 추구하는 의사전달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상계엄령이 확대 선포되고 데모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하자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경찰이 진압에 실패하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그들은 붙잡힌 학생들이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차고 밟고 때리고 붙잡아갔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정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양 이틀간의 그들의 만행은 많은 시민을 데모에 가담케 했으며 군중의 분노를 가열케 했다. 일부시민들은 그들의 무차별 만행에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맨주먹으로 대항하던 시민들은 이에 대항할 무기의 필요성을 깨달아 화순을 비롯한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과 예비군용 총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때는 벌써 많은 사상자가 난 후였다.
시가지는 완전 전쟁상태로 돌변했다. 총을 든 시민들에 의해 계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때에도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 모여 "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2시 계엄군은 유혈진압의 작전을 전개 하고 말았다.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계엄군의 성급한 진압으로 유혈진압이 되어버린 것이다.
군은 이상과 같은 한국 근래 사상 유례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하여놓고 그 책임을 광주 시민에게 전가하기 위해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광주시민들과 우리 국민 전체의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놓았다. 더욱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없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광주사태는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너무나 엄청나고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주시민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오는 그 오월에는 광주시민의 명예는 회복되리라!
18.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18.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시인 김준태
1.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 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2.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 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 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 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만 뒤집어 쓸지언정
아 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 가는
아 아, 온 몸에 상처 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 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었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 버렸나
3.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 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 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서 어쩌지도 못 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아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리는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 아, 여보!
그런데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는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남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 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4.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들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 몸의 참 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며,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 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뼈와 뼈만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 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 와 달을 입마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 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19. 아, 민족사의 비극이다!
19. 아, 민족사의 비극이다!
이 글은 5.18의 비극이 있은 지 닷새만인 5월 22일에 발표한 「조선대학교 학생성명서」를 대부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아, 민족사의 비극이다. 하늘은 우리를 버렸다. 국토수호를 위임받은 군인이 제 나라의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 국민의 가슴이 산산이 부서진 오늘은 참을 수 없는 비극의 날이다. 5월 17일 밤을 기해 전두환과 그 일파는 기존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군부통치에 비판적인 정치인, 민주인사들을 체포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말살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광주의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를 비롯하여 각 전문대학교와 고등학생들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계엄당국은 3만 여명의 전투경찰을 시내에 투입, 도로를 차단하여 시위군중들을 고립시켜 페퍼포그를 쏘아대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교 서울에서 급파된 3천 여명의 공수특전단들은 곤봉과 대검을 때어들고 닥치는 대로 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 거리는 피로 물들었으며 시체는 군 트럭에 내어 던지고, 젊은이들을 집에까지 쫓아가서 대문을 부수고 어린 여학생들을 집에서 끌어내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검으로 난자하여 죽였다.
이러한 만행에 시민들은 치를 떨며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맨손인 시민들은 도리어 칼질을 당하였고 여학생을 죽이는 것에 항의한 70노파는 그 자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찔려 죽였다.
돌을 날라다 준 여학생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난자하였고 군인에 대고 울부짖는 시민들을 향해 피 묻은 칼을 휘두르며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수많은 여학생들이 옷이 찢기고 발가벗긴 채 트럭에 실려 갔다"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스러운 학살에 분노한 광주의 애국시민들은 궐기하여 중무장한 공수부대에 대해 맨손으로 항거했다.
시민의 분노는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매스컴에로 돌려져 문화방송을 불태웠으며 몇 군데의 파출소와 군용트럭, 페퍼포그 차를 불태웠다. 이 모든 것은 비무장 시민들에게 가한 만행에 대한 응답이었다. 계엄당국은 이런 파괴행위를 시민들이 계획해 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실을 왜곡했다.
5월 20일 밤을 계기로 전라남도 내의 모든 통신이 차단되고 군부의 살육 작전은 최후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고등학생들조차 엉금엉금 기어가도록 두들겨 맞았으며 지금까지 희생된 사망자 수는 200여명, 부상자는 1,000여명을 헤아리고 없다. 한국의 언론은 이 사태에 침묵을 지키고 없으며 18일부터 21일까지 5일간의 악몽통안 특히 그러했다.
그들은 전두환이 작성해준 원고를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사태가 '불순분자들'의 책동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아까 붓을 움직일 수가 없구나!
5월21일 전두환은 수많은 사실을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낙인찍었으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한다.
첫날 최소한 40여명이 백주에 공수부대의 대검에 의해 죽어갔으며 한 여학생은 광주의 분수대에 발가벗겨지고 유방을 도려 내인 채 매어져 죽어갔다. 현재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에 의해 도시 외곽으로 쫓겨나고 시내의 수많은 관공서가 불타고 있으며 모든 교통통신은 두절되었다.
시민들은 군대의 진주를 막기 위해 광주로 들어오는 철길을 파괴했으며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는 "우리함께 죽자!" "죽여 달라!"이다. 부마사태 때에는 전라도출신 군인들을 보내 민중을 진압시켰고 이제 광주에서는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을 투입시켜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시민들을 행동하게 하고 있다.
전두환은 국민을 둘로 나눈 채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 민족의 소망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 이 사래를 방관하지 않겠다.
더 이상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는 영광스러운 역 사를 후손에 물려주기 위해 우리는 전두환을 몰아내고 그의 군대를 우리 사회에서 쫓아내야 한다. 이 사명을 우리의 마음속에 새기고 함께 일어서서 함께 싸우고 숨이 붙어 있는 한 애국가를 부르며 함께 나아가자.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20. 무등산의 함성
20. 무등산의 함성
80년 5월의 그날 우리는 무등산의 함성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금남로에 핏빛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장님이었습니다. 성난 빛고을 사람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때 하늘이 울고 무등산이 떨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우리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우고 입을 봉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5.18광주민중항쟁 증언록」의 일지에 의하면, 그날에 벌써 수십 명이 쓰러졌고, 그 이튿날에는 수백 명이 피살되었고, 20일에는 10만의 광주시민들이 데모를 했으며, 21일에는 30여만 명이 일어나온 시가지를 휩쓸고 다녔으나, 우리는 그날의 정확한 정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당국의 발표대로라면 그들은 모두가 다 폭도요,난동분자요, 불순분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통제된 언론에 의해 장님이었을 따름입니다.
훗날 그 오월의 증인들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살의 원흥들에게 묻겠다.
과연 누가 폭도인가?
과면 누가 폭동을 일으켰는가?
과연 누가 순박한 겨레의 심장을 향하여 최초의 총격을 가했던가?"
광주의거 5주년 추도미사 강론에서 함세웅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그 비참한 살육의 참상을 우리는 흔히 광주사태라 부르며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사태란 표현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의거이며 항쟁이며 그리고 혁명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이러한 명명은 아주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부터 광주시민항쟁, 광주민중항쟁이라 부릅시다.
그것은 악과 불의를 거스려 싸워야 하는 크리스천의 임무를 일깨워 주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광주시민항쟁과 관련된 또 하나의 치욕은 이 나라 언론의 보도 태도였습니다. 민족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극이었음에도 그 몇 주년을 맞아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상을 취재하고 규명하지 못한 것은 한국 언론의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입니다.
광주시민항쟁 당시 허위보도의 산실이었던 방송국이 파괴 방화된 것은 사상자 수에 대한 허위보도와 시민들을 무장폭도 및 난동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해 5월 25일 그 비극의 와중에서 개최된 「목포시 기독교연합회비상구국기도회」에서는 「광주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위 군중에 의하여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역사적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이 나라 언론인에 대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신문. 통신. 방송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언론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더러운 노예로 만족했다는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 광주 목포의 참상을 바로 보고 정확히 전달해 주기 바란다"
"광주사태에 대해 당시 언론이 통제되었기 때문에 자료가 없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광주시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짓밟은 잔인한 행위였다. 즉 절대 권력의 비극적 종말을 보인 10.26 사태는 민주주의에의 국민적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개 보안사령관이 12.12사태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과도정부에 압력을 가해 사퇴시키려 하자 학원가는 술렁였고 김대중씨는 군부정권 수립의 계기를 주지 말자고 학생들의 자제를 호소하였다.
5.17조치로 김대중씨를 제거한 군부정권에 대한 광주시민의 분노와 항의를 저들은 잔혹하게 살육한 것이다"
금남로는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무등산은 그날의 진상을 낱낱이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한줌의 사실은 한톤의 토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무등산은 잠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 :40).
21. 그날의 금남로(錦南路)
21. 그날의 금남로(錦南路)
"붉다 못하여 낭자한 선혈로 타오르던 진달래도 떨기 떨기 다 떨어지고, 한 많은 역사의 고장 광주 무등산록 수많은 원혼이 잠든 망월동에는 또 붉다 못하여 핏빛으로 타는 홍장미가 가신 님들의 빛나는 넋인 양 가시 위에서 온몸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지워 버릴래야 지워 버릴 수 없는 역사의 페이지에 얼룩진 그 진한 핏자국, 1980년 5월의 피바람은 광주 일원을 생지옥으로 만들었으며, 아비규환의 참혹한 유혈극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나 사건이 아니며, 인류의 정치사에 있어 양심과 비양심과의 싸움이요,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요, 자유와 억압과의 충돌이요, 명명한 하늘의 섭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질러진 폭력의 난무로서, 하느님과 양심의 심판 위에서 단죄되어야 할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인간의 비정과 비리와 죄악이 어찌 세월이 흐른다 하여 잊혀지며, 아무런 역사적 해결이 없이 망각의 심연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단순한 과거지사입니까?
이 쓰라리고 아픈 추억은 저 무등이 이 땅에 남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이 고장 광주의 분수대와 금남로와 화정동과 상무대의 헌병대 감방과 망월동의 무덤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생생한 역사의 기록이요, 이 진하디 진한 피의 댓가는 오직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인 민주주의의 실현이며, 아무런 역사적 업보에 대한 속죄도 해결도 일체 보류한 채 무조건 잊어버리자고 하는 구두 선 내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허울 좋은 화합은 아닐 것입니다.
3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미봉적, 시행착오적 억압 일변도의 묵살 내지 자기 범죄의 합리화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속죄와 진혼의 절차를 따라 가신 님들의 원혼을 위로해야 할 것이요, 납득할만한 역사적 해명을 통해 광주시민들 산 자나 죽은 자나 다 가지고 있는 원한을 풀어주는 거국적 화해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 마지않습니다.
아!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 금남로, 노도와 같이 물밀어 가던 자유, 자유, 자유, 그 절규 속에서 무참히 죽어간 수많은 꽃다운 생명들! 그것이 설사 적군이라 하더라도 목불인견의 비극일진대 어찌 같은 동족으로서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다시 한 번 가슴에 손을 싫고 가장 기본적인 양심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세월은 망각의 양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쓰라린 과거는 빨리 잊는 것이 낫다고도 하지만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도 있는 것입니다. 저 1980년 광주의 5월이야말로 결코 잊을 수 없으며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것입니다.
그날의 금남로엔 다시 아름다운 5월이 와서 가로수 잎사귀들이 파란 손길을 흔들고 낭만과 함께 다시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망각도 단념도 아니며 맺힌 한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화해란 정치적 해결이 없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고착과 억압은 아닐 것입니다.
"
22. 오월에 떨어진 꽃들이여!
22. 오월에 떨어진 꽃들이여!
누가 네 상복을 입어주랴?
5월의 애닲은
혼들이여.
올해도 금남로 가로수는
파릇하게 짙어가고
네가 흘린 핏자국은
아스팔트 깊숙히
젖어 있다.
아직 걷히지 않은 구름
쌓여 있는 한(恨)
너를 그리는 광주의 하늘은 오늘 비를 내리고 있다.
오늘은
네 상복(喪服)을 입어주마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잘 가라는 전송도 없이
맨발로 질질 끌려 무참히 떠난
네 상복을 입어주마
몽둥이로, 총칼로
깨어진 머리를
하늘로 향한 채
조용히 눈감고 길바닥에 누워있던
너의 모습
아-아 애통한 그날의 회오리여
누가 너를 그리 했느냐?
누가 너를 그리도 모질게 하였더냐?
아무 말 없는 너
너의 아픈 침묵은
우리 모두를 때린다
오호라
정의의 무력함이여, 사랑의 무력 함이여
욕망의 횡포여 ‥‥‥
망령의 손길은
너의 무덤까지 파헤치고
호곡하는 우리의
목덜미를 조이고 있다.
오월이여
오월이여
오월에 떨어진 꽃들이여
오늘 우리는
너의 영전에
향을 피워
꽃다운 네 청춘을 앗아간
망령을 훠이 훠이
쫓고,
조국의 이름으로 곡하며
네 혼을 달래노니
네 뜻 기리
민족의 얼되어
5월의 향기되어
누리에 피지라. 누리에 피지라.
(광주의거 3주기 추모사에서)
23. 증언(證言)
23. 증언(證言)
필자는 지난 5년 동안 광주에 몸을 담고 살면서 수없이 많은 5.18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왔습니다. 오월, 그날은 너무나 비참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하지도 못했고 쓸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 [5.18광주민중항쟁 증언록]을 얻게 되어 그 서문 일부를 그대로 옮길 뿐입니다.
"내 민족의 가슴에 총 뿌리를 겨누고 내 겨레의 심장에 대검을 꽃은 그날의 참혹하고 처참했던 현장 광주. 그 학살의 현장에서 우리는 날마다 분노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피무늬 얼룩진 금남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병원의 복도,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거리거리의 총소리 총소리들‥‥‥ 계엄군의 곤봉과 대검에 으깨지고 찢겨나간 육신을 부둥켜안고 질러대던 그 신음소리 소리들‥‥‥ 죽은 자식, 죽은 남편과 아내의 시신을 얼싸안고 몸부림치던 통곡소리 소리들‥‥‥ 광주 일원의 하늘을 누비며 살기어린 목소리로 "폭도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고 뇌까려 대던 그 잔인한 헬기소리‥‥‥ 음료수와 방과 답배와 물수건을 던져주며 "우리 손으로 광주를 지키자"고 울부짖던 순박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전XX을 타도하는 데 우리가 앞장서겠다"며 교복을 입고 돌덩이와 각목을 들고 차에 올라탔던 어린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들‥‥‥ 최후의 밤 죽음의 새벽 5월 27일까지 총을 들고 응사하며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해 가신 광주의 전사들. 총을 들고 광주를 지키며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대항하여 총격전을 벌이다 몸에 총탄을 맞고 불편한 몸이 되어 있는 우리들. 그러나 우리에게 후회는 없다.
우리는 그날의 기억들을 날이 가고 해가 가면 갈수록 더 생생하게 떠올리며 투쟁의 결의를 더욱 새로이 다지고 전진할 뿐이다. 어찌 그 학살의 열흘 동안을 잊겠는가? 어떻게 그날 우리가 똑똑히 확인한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동지애와 친부모보다 더한 보살핌으로 광주를 지켜나간 빛고을 사람들의 넉넉한 사랑을 잊을 수 있겠는가?
5.18 광주학살은 명백한 범죄요 반민족 행위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현장에서 온몸으로 목격한 증인들이다. 그러나 죄 없는 민중의 목숨을 빼앗고 정권을 거머쥔 자들은 우리를 지금도 폭도'라 부른다. 그들은 또 장엄한 민주화의 대장정의 출발인 광주민중항쟁을 '폭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은 우리들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광주 인구 80만이 살아 있는 증인이고, 400만의 전남 도민이 또한 엄연히 두 눈을 부릅뜨고 건재해 있는 증인들이다. 이 수백 만의 증인들을 한꺼번에 모조리 학살해 버리지 않는 한 5월 학살의 진상은 결코 숨길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학살의 원흉들에게 묻겠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대답해 보라.
과연 누가 '폭도'인가?
과연 누가 '폭동'을 일으켰는가?
과연 누가 순박한 겨레의 심장을 향하여 최초의 총격을 가해 왔던가?
우린 계엄군의 총격에 맞서 응사하던 바로 일의 통지가 총탄에 맞아 피를 튀기며 쓰러지던 그 순간순간들을 수없이 겪었다. 우린 공수부대원들의 대검에 찔려 금남로 한복판에 누워 있던 시민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우린 살해된 시신들을 트럭에 바삐 싣고 어딘가로 서둘러 옮겨가던 광경을 또한 분명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우리 또한 척추 뼈에, 왼쪽 눈에, 다리에, 허리에 총상을 입고 부상당한 직접 희생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이 온몸으로 겪은 광주민중항쟁과 그 현장, 그 진상들을 낱낱이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참된 통일조국이 건설되는 날까지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할 우리들의 신성한 의무이다.
"
24. 군사독재정치
24. 군사독재정치
「아르헨티나」의 2,800만 인구 가운데 4분지 1이 넘는 800만 명이 정신장애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머리가 돈 사람, 미친 사람이 800만 명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구의 절반이 넘는 1,500만 명이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합하여 2,300만 명이나 됩니다.
계산대로라면 「아르헨티나」 인구의 80%이상이 정신이상자인 셈입니다.
이 소름끼치는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축복받은 팜파스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비극의 땅으로 변해 버렸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군사독재정치가 뿌린 씨앗으로부터 맺힌 열매라는 것입니다. 1976년의 구테타로부터 시작되어 1983년까지 단지 7년을 끌었을 뿐인 군사독재정치가 그처럼 무서운 결과를 및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사평의회는 좌익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미명아래 속칭 "더러운 전쟁"을 벌였는데 그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그늘에서 수백 명, 수천 명도 아닌 30,000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일단 끌려갖다 하면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고 돌아올 수도 없었습니다. 행방불명된 그 가족과 친지들의 좌절과 분노의 감정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장애자 800만 가운데 400만 명이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고 100만 명은 헛소리를 하며 정신이 나가있고 80만 명이 불면증에 걸려 눈동자가 뒤틀려 있다고 합니다.
70만 명은 정신적 신체장애에 걸려 거동이 부자유스런데다가 과도한 긴장을 술로서 풀어보려다가 알콜중독자가 된 사람도 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경우 총인구의 4분지 1가량이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중환자의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3분지 2가량은 그보다는 좀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수도권 인구의 대부분이 정신이 상자란 이야기입니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헤치지도 못하고, 다만 두려워서 벙어리 냉가슴 않듯 시름시름 가슴 속에 한을 키워 왔으니 정신병이 되고만 것 같습니다.
다행히 1983년 말에 이 군사독재정권은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민주지도자인 「알폰신」대통령은 군부출신의 세 독재자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및 만행을 저지른 고급장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고 조사위원회는 실종자의 증거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는 좋은 것이고 민주주의는 더욱 소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유명한 미국의 「패트릭 헨리」의 명언을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오! "
「케네디」대통령의 선언은 우리를 더욱 고무시켜 줍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어떤 값도 치를 것이며 어떤 짐도 질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견딜 것이며 어떤 벗도 도울 것이며 어떤 적도 맞아 싸울 것이다"
(87. 5.21)
25. 인권(人權)
25. 인권(人權)
인간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은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그 뜻을 풀이하기를 "사"란 산다는 뜻이며, "람"은 보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보람 있게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없어서 보람이 없다면 사람 아닌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보람 있게, 가치 있게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일 수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도 그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그들은 인생을 "안드로포스"라 합니다. 이 말 위를 쳐다보고 사는 자란 뜻입니다. 인생이란 땅만을 쳐다보거나 현실만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는 자 즉 하나님과 그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귀하다는 것은 그가 위를 바라보며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말하기를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요 성인인 「소크라테스」가 언젠가 제자들과 함께 「아덴」성을 향하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 밖에 있는 흰 돌의 조각들을 가리키면서 탄복하였습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너희는 그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성안에서 보리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성안을 다 돌아다녔으나 그것들보다 더 좋은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엇이 더 나은 것입니까7"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기를 "그 조각품을 만든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도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막8:36,37).
「루이」 15세가 사냥터에 사냥하러 가려면서 그의 신하인 「로스마트」에게 "개와 말이 지쳐있지 않으면 사냥을 해야 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답하지 않고 있던 「로스마트」가 말하기를 "폐하, 죄송스럽습니다. 처음 말씀하셨을 때 대답을 드리지 못한 것은 이런 생각이 떠오른 탓입니다.
그것은 폐하께서는 사람을 걱정하시기보다 개와 말을 더 염려하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권이 문제시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스러우며 존엄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세계인권선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귀에 익은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우리는 언제나 창조자로 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모두가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가 기다려집니다.
(87. 5.28)
26. 20세기의 기적 「헬렌 켈러」
26. 20세기의 기적 「헬렌 켈러」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19세기의 기적은「나폴레옹」이요. 20세기의 기적은 「헬렌 켈러」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중에 「헬렌 켈러」Heller, Helen Adams)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녀는 1880년 6월27일 「터스컴비아」(Tus-cumbia)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천재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생후 1년 남짓하여 무서운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하나의 지식도 얻기 전에 열병 때문에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요 벙어리에다 냄새도 못 맡는 불구인 운명의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가련한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설리반」(Sulivan)여사가 이 불구인 병신을 소개받은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설리반」여사는 이 불쌍하고 가련한 어린 것을 맡아서 키우려고 대단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물(water)이란 단어 하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7년이란 세월을 보내야했습니다.
한 손은 물 대야에 넣게 하고 다른 한 손은 자기 자신의 입과 목에 손을 대게하여 그 단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설리반」여사는 일생을 마치기까지 50년을 「헬렌 켈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고귀한 사랑과 끈질긴 집념으로, 「헬렌 켈러」는 1904년에 「라드클리프」(Radcliffe)대학을 졸업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구인 그녀가 문학박사 법학박사의 학위는 물론 저술가로서 사회사업가로서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과연 "사중고의 성녀(聖女)"라고 부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20세기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미국정부는 1965년 그녀에게 미국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968년 88세를 일기로 「웨스트 포트」에서 고요히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써 일하는 자에게 그의 노고의 소산인 영광을 돌려준다"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꽃이 피는데도 오랜 세월의 노력이 필요하거든, 하물며 사중고의 불구가 성녀가 되기까지 뼈를 깎는 아픔과 함과 눈물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람이 잠잠하면 노를 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달에 이르는 길은 노력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6월에 왔다가 6월에 간 20세기의 기적 「헬렌 켈러」를 생각하면서 6월을 맞습니다. 이 6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난히도 많은 것 같습니다.
(86. 6. 3)
27. 칼이 짧거든 일보 전진하라!
27. 칼이 짧거든 일보 전진하라!
일찍이 전도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없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거들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없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없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 가 있느니라"(전3:1-8).
인생에게는 항상 광명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빛과 어둠은 어느 하나가 계속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낮과 밤을 적당하게 내셨습니다. 낮이 지나면 반드시 밤이 옵니다. 이 질서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8:22). 세월은 이 낮과 밤의 어김없는 교차 속에서 흘러갑니다.
여름이 지나면 서늘한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옵니다. 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또 봄이 옵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이 있으면 행복이 있고 행복 뒤에는 불행이 오기 마련입니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있고 절망 뒤에는 희망이 샘솟습니다. 실패와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몇 번인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게 되며 또 성공의 기쁨도 경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대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상황을 대하는 배도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한사람은 말하기를 "오늘은 먼지가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오늘은 길이 질겠다"고 말합니다.
같은 포도를 먹으면서도 한 사람은 "그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씨앗이 귀찮다"고 불평합니다. 같은 장미를 보면서도 한 사람은 "그 꽃이 참 아름답다"고 탄복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 장미에는 가시가 많다"고 불평합니다. 같은 국화꽃을 보면서도 한 사람은 "그 향기가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쑥 냄새가 좋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한 사람은 창문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곳으로 더러운 먼지가 들어온다면서 싫어합니다.
출전을 준비하는 「스파르타」의 한 청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어머니 내 칼이 짧으니 적군을 무찌르기에는 부족합니다" 그 아들의 불평을 들은 어머니가 말하기를 "칼이 짧거든 일보 전진하라, 그리하면 네 칼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가 있다"라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이 말씀은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바라보라는 가르침도 됩니다. 최루탄 가스를 맡으면서 민주화의 향기를 생각하고, 데모군중의 함성을 들으면서, 영광된 조국의 장래를 기약하는 팡파르로 바꾸어 들읍시다.
(87. 6.11)
28. 최루탄(催淚彈)
28. 최루탄(催淚彈)
지난달 5월 24일 주일 오후3시, 금남로는 광주시내교회 성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날 광주시내 교회는 YMCA강당에서 같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연합예배를 드리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기도의 제목은 넷입니다.
첫째, 단군신화의 사실화(史實化)를 반대하고 둘째, 교회당 건축법의 환원을 요구하며 셋째, 주일 학생통원 및 주일행사를 반대 항의하고 넷째, 민주화 요구 등이었습니다.
골목마다 차단하고 있는 전경들의 장벽 앞에서, 밀고 밀치는 몸싸움이 계속되었으나, 4시가 가까워졌을 때 수만의 광주시내 교회 성도들은 금남로 광장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는 질서정연하게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계속 울고만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멎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울고 나면 전보다 기분이 나아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우는 사람들은 위궤양이나 대장염과 같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팀은 울음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18살에서 75살까지에 해당하는 331명의 지원자들을 실험대상으로 모았습니다. 연구팀은 이들 지원자들에게 30일간에 걸쳐 자기가 운 경우에 대해 상세한 일지를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여자들의 경우 30일 동안 정서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운 적이 평균 5.3번이었으며, 남성의 경우에는 평균 1.3번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85%의 여성들과 73%의 남성들이 울고 나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온종일 충혈된 눈만큼이나 기분이 무겁고 우울할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눈물은 최루탄 때문에 흘린 억지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최루탄 피해가 문제되고 있습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대학가의 최루탄 공해는 이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시위 학생과 진압경찰은 물론 인근 주민들마저도 최루탄성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변화도 무시 못할 것 같습니다. 꽃들도 피지 못한 채 시들고 물고기도 죽고 새들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내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최루탄 구입비로 85년에 40억 원, 86년에는 60억 원이 들었다고 하니 금년에는 또 얼마나 될 것입니까?
지난해 12월 반핵시위가 한창일 때 서독 내상 「슈노르」는 자신이 직접 최루가스를 맞아본 후 CS제제의 최루탄 사용을 금지시킨 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위정자는 없을까? 이제는 돌맹이도 화염병도 사과탄도 지랄탄도 페퍼포그도 다 몰아냅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민주화의 꽃도 피게 하고 새들도 모여와서 노래하게 합시다.
그리고 억지 눈물이 아닌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합시다. "눈물로 씻어지지 않는 슬픔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7. 6.18)
29. "아 아 잊으라. 어찌 우리 이날을···"
29. "아 아 잊으라. 어찌 우리 이날을···"
6.25는 우리 민속사상 최대의 비극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서른일곱 번째를 맞으며 그날의 비극을 되씹게 됩니다. "아아 잊으랴? 어제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 땅에 태어난 공동 운명체인 우리 민족은 지난날 수 없이 수 없이 이 노래를 불렸습니다.
북괴군의 기습남침으로 평화롭던 조국은 수일이 못되어 전국은 피바다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UN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으나,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1.4후퇴를 하는 동안 이 땅에 찾아온 비극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이 전란 중에 희생된 동족들은 300만의 인명이 살상되었으며, 납치된 자만도 85,000명, 그리고 행방불명된 사람은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침략자들은 이 전쟁 중에 2,122개의 교회를 파괴하였고 535명의 교역자를 학살하였으며 수많은 생명을 무참히 앗아갔습니다. 남으로의 피난 행열은 길을 메웠고 남편 잃은 30만 미망인들의 한숨과, 부모 잃은 10만 고아들의 울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아사자와 병사자 그리고 격전으로 말미암아 죽은 시체들이 산과 들에 널려 있었으니 그날의 비극은 너무나 처절하였습니다.
여기 그날의 비극을 그린 「전봉건」씨의 시가 있습니다.
"아랫목에서 죽은 것은 할머니였다.
토방위에서 죽은 것은 할아버지였다.
마룻바닥에서 죽은 것은 아버지였다.
부엌바닥에서 죽은 것은 어머니였다.
마당에서 죽은 것은 형이였다.
곡간문지방에서 죽은 것은 아우였다.
사립문 알에서 죽은 것은 누이었다.
사립문 앞에서 죽은 것은 누이의 젖먹이였다.
울밑에서 죽은 것은 봉선화였다.
시뻘거니 뭉개져 있었다.
봉선화도 할머니도
봉선화도 할아버지도 뭉개져 있었다.
봉선화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뻘거니
봉선화도 형도 아우도 시뻘거니 시뻘거니
봉선화도 시뻘거니 누이도 시뻘거니
봉선화도 누이의 젖먹이도
시뻘거니 뭉개져 있었다. "
이 얼마나 잔혹한 역사입니까? 얼마나 한 맺힌 표현입니까? 우리는 그날 이후 그 비극을 잊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따라, 그날의 눈물도 잊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과학자는 물고기의 지능은 0.4이고 그것의 기억력도 3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낚시꾼이 던진 미끼 앞에서 동료의 고기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도 또 그 같은 미끼에 걸려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인간들도 그 물고기에 비하여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6.25의 그 비극을 겪었음에도 그 상처를 잊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87. 6.25)
30. 「노벨」평화상
30. 「노벨」평화상
「노벨」(Nobel, Alfred Bernhard)은 「스웨덴」의 발명가입니다. 그는 1863년에 화약을 발명하고, 1867년에는 다이나마이트를 발견하였으며 또 최초의 무연화약을 발명하였습니다. 그는 이 밖에도 129종의 발명특허를 얻었습니다. 그는 특약과 무연화약 등의 공업적 대량생산을 목표로 「스웨덴」 「스코트랜드」 「영국」 「독일」등에 대한 공장을 세움으로 유럽 최대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나이 많은 노년기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신문을 펼쳐 들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조간신문의 일면에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다"라고 쓴 큰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기사 내용도 이러하였습니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다이나마이트의 왕이 죽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신문보도는 불란서의 한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잘못알고 보도한 것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 기사는 나이 많은 「노벨」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해 줄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로 평가되는 것에 대하여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는 "죽음의 사업가"로 일생을 마치고 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파괴의 발명가"로 그의 이름이 남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 평화와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노벨상제도"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 「노벨상」은 인류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활동을 장려하고 고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상입니다. 이는 「노벨」의 유언에 의하여 그 유산을 기금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 상이 제정된 것은 지금부터 86년 전인 1901년 7월 1일 바로 어제였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상」으로 불리우는「노벨」상의 꽃은 역시 「노벨」평화상이라고 합니다. 「노벨」평화상은 지난 86년 동안 대상자 없음」이 20여회 이상이나 된 것만 보아도 그 선정의 신중함을 알 것 같습니다.
그처럼 신중을 기했어도 이론이 없던 것은 「슈바이처」박사 때뿐이었다고 전합니다.
그 「노벨」평화상 후보에 우리나라의 불우한(?) 한 야당 정치인이 서독과 일본 국회의원들의 추천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이 땅에도 「노벨상」 수상자는 탄생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87.7. 2)
31 「야누스」의 얼굴
31 「야누스」의 얼굴
얼마 전 「TV문학관」에 「두 개의 얼굴」이란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코가 못생긴 한 젊은이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외모 때문에 입사시험에 번번이 실패합니다. 젊은이는 할 수 없이 서적외판원 생활을 하지만 평범한 용모를 갖지 못한 그는 여기저기에서 수모를 당합니다.
어느 날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술을 잔뜩 마시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형수술을 하여 추남인 그가 미남이 됩니다.
한편 재벌 딸인 여자주인공은 못생긴 얼굴을 성형수술로 그녀도 미녀가 됩니다. 성형수술로 미남 미녀가 된 이들은 서로 결혼하여 부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태어난 어린이 못생긴 옛날 부모를 닮았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두 개의 얼굴」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성을 「성형수술」을 한 「두 개의 얼굴」을 통해 풍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얼굴」을 흔히 「야누스」의 얼굴(Janus faced)라이라고 말합니다. 「야누스」는 원래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민물입니다. 고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그 실상을 보면 머리는 하나인데 얼굴은 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개의 얼굴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 「야누스」의 표징은 "열쇠"와 "몽둥이"입니다.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 구실을 하고 몽둥이는 남을 쫓아버릴 때 쓰입니다. 그러니까 「야누스」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남을 때려 내쫓기도 하고, 또 문을 열어 맞아들이기도 합니다.
「야누스」의 얼굴이 「두 얼굴」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 얼굴이 두개인 것은 뒤죽박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옥스퍼드」사전은 「야누스」의 얼굴을 협잡 ·사기 · 허위 등을 나타내는 형용사로(deceitful) 그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두 얼굴」이란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얼마동안 세상 많이 바뀌었습니다. 약삭빠르게 「야누스」의 얼굴처럼 변신하는 사람들의 말도 많이 듣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까? 어느 신문의 만화에 실린 글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얼마 전까지 저쪽에 붙었다가」
「금새 민주를 찾고‥‥」
「변신 잘하는 지식인들 하는 소리 있지」
「"지조가 밥 먹여 주나? "」
(87. 7. 9)
32.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32.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미국의 대통령과 소련 수상이 만나 서로 자기의 경호원들이 더 충성스럽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쉽게 우열이 가려지지 않자 그들은 절벽 위로 올라가 경호원들의 충성심을 서로 시험해 보자고 내기하였습니다. 먼저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경호원에게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경호원은 "그럴 수 없다“면서 대통령의 명령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소련 측의 경호원이 똑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소련 경호원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결국 그는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물론 충성의 시험은 소련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 났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후반부가 있습니다. 파면을 당한 미국의 경호원이 병원에 입원 중인 소련 경호원에게 문병을 갔습니다. 소련 경호원은 문병 온 미국 경호원에게 물었습니다."자네는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나?" 그러자 파면당한 미국 경호원이 대답했다. "여보게 내가 뛰어내리다 죽기라도 하면 누가 내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나? 그래서 뛰어내리지 않았지. 그런데 자네는 뛰어내리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왜 겁 없이 뛰어내렸나?" 소련 경호원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자네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뛰어 내렸다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그런거지"
미국 경호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소련 경호원이 말을 계속했습니다. "생각해보게 내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우리 가족 전체가 반동으로 몰릴 것은 뻔한 사실이 아닌가? 그래서 눈 딱 감고 뛰어내린 것이라네‥‥‥“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를 나타내 줍니다. 「엘리어트」는 공산주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불평등한 소득의 평등한 분배를 열망하는 무리들이다. 자기의 동화(銅貨)를 지불하고서 남의 은화(銀貸)를 착복하려고 하는 게으름쟁이다"
공산당 선언은 말하기를 "일체의 사유재산을 없애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는 인간을 국가의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즉 그들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공산주의를 과소평가는 자들이 적지 않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fp닌」이 1917년 제정「러시아」에 대한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그 혁명의 지지자는 4만 명에 불과했으나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오늘날 10억의 공산주의자들이 지구 표면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들은 반민주주의자들과 함께 우리의 적들입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 이론가 「로져 개로디」는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세계에는 두 개의 세력이 남을 것이다. 하나는 진짜 공산주의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진짜 기독교 신자들이다"
결국 민주주의와 개인의 가치와 자유와 인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는 기독교이며, 그 짐은 기독교인인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또 다른 사명 하나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할 한 마디 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무기는 민주주의이다" 이는 자유중국 장경국 총통의 말입니다.
(87. 7.16)
33. 집중호우(集中豪雨)
33. 집중호우(集中豪雨)
우리나라 속담에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없습니다. "삼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 둘 다 장마와 홍수를 걱정한 말들입니다.
장마가 계속되는 요 며칠 동안 충남 「서친」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태풍 「셀마」가 남부지방을 강타하여 300여명의 인명과 2,000여억 원의 재산 피해를 입히더니,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뒷 따른 이번 폭우는 중부지방을 휩쓸어 사망과 실종이 152명에 이르고 재산 피해만도 647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아마 최종 피해 집계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대에 의하면 또 다른 태풍 「버넌」이 큰 비바람을 몰고 북상 중이라고 예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강수량을 보면 즘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첫째, 년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한여름에 내립니다. 해안지방은 50%정도, 내륙지방은 60% 정도가 여름에 쏟아집니다. 여름이면 우리나라는 갖가지 기상의 교차로가 됩니다. 여름 계절풍은 물론 양자강 유역에서 발달하여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이동하는 온대성 저기압과 그리고 폭풍우에 떠밀린 열대성 저기압이 모두 이 무렵 우리나라를 지나갑니다.
둘째, 우리나라 강우의 또 다른 특색은 호우(豪雨)성입니다. 열대의 「스코올」과 같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동안 30mm의 폭우가 쏟아지는 때도 없지 않습니다.
이번 집중호우는 충남 「서천」과 「부여」 등지에는 22일 하루 동안에만도 500mm이상의 폭우가 쏟아졌고, 23일 오전까지 「서천」에는 무려 693mm의 기록적인 강수량을 보여 일 년 강우량의 절한이 한꺼번에 쏟아진 셈입니다. 이 집중호우는 1912년 7월19일의 250.9mm이래 75년만의 최대 호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호우입니다. 그 결과 「금강」 하류지역은 「노아」 홍수를 연상케 하는 물난리를 겪고 있습니다.
기상학(氣象學)에서는 비를 가랑비에서 호우(豪雨)까지 다섯 종류로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첫째는 가랑비, 가늘게 내리는 비라 하여 세우(細雨)라 합니다. 둘째는 미우(徵雨), 가장 약한 비로써 하루의 강우량이 5mm미만을 말합니다. 셋째는 소우(小雨), 2m 안팎의 비입니다.
넷째는 10m까지의 비로서 대우(大雨)라 합니다. 그 이상을 호우(豪雨)라 합니다. 아마 이번에 중부지방에 쏟아진 비는 그 이상인 폭우(暴雨)라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
같은 비라 할지라도 빗방울의 크기며 떨어지는 속도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가랑비는 빗방울의 직경이 0.5mm이고 초속 50cm정도인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집중호우의 경우 빗방울의 크기가 3mm나 되고 속도도 초당 700cm가 넘습니다. 이 같은 폭우가 쏟아질 때에는 그 홍수의 피해도 엄청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치수(治水)의 역사(歷史)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까지 이 엄청난 재난 앞에서도 속수무책입니다.
(87. 7.24)
34. 김구 선생 저격범 안두희
34. 김구 선생 저격범 안두희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은 이 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무렵인 1876년 황해도 해주 서쪽 백운방(白雲坊)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파란만장의 생애만큼이나 여러 차례 개명하는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18세가 되었을 때 동학(東學)에 관계하면서 그 이름도 창수(昌洙)로 고쳤습니다. 그는 그 후 20대 우국청년으로 일본군에게 쫓겨 전국을 유랑하면서 그의 이름은 다시 거북구자 구(龜)로 개명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일본 총독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이름을 또 다시 아홉 구자 구(九)로 고쳤습니다. 그의 이 여러 이름들은 어지러웠던 우리의 근세사를 보는 듯 합니다. 김구선생은 이와 같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바꾸어 새로운 각오를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백범(白凡)이라는 호도 그렇습니다. 그는 안명근(安明根)사건으로 피검되어 17년의 징역 언도를 받고 옥살이를 한지 3년 만에 백정(白丁)이라는 「白」자와 범인(凡人) 이라는「凡」자를 따서 「백범(白凡)」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미친한 사람까지 모두 나와 함께 애국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소원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니다.
백범은 20세가 되던 해 동학의 실패 후 황해도 신천(信川)에 머물면서 고능선(高能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의 감화가 켰던 것 같습니다.
백범이 평생 잊지 못해 하는 그가 가르친 시구가 없습니다. "나물가지를 취어잡고 발붙일 때가 없을 때 절벽에서 손을 한번 놓아버리는 것이 대장부야"(得樹拏技災奇 怒濯撤手犬夫兒) 뜻 깊은 이 한 마디가 그의 젊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릅니다.
한평생 그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독립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그의 여생을 통일된 조국을 위하여 바치려 하였습니다. 그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예견했던지 "38선을 베고 눕겠다“면서까지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949년 6월26일 동족의 층란에 쓰러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월은 흘러 38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은 그때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곽태영씨는 10년이나 추적 끝에 강원도 양구까지 쫓아가 저격범 안두희씨에게 비수를 날렸습니다(1965.12.22). 권중희씨는 또 마포구청 앞에서 그 저격범에게 몽둥이질을 했습니다(87.3.27). 며칠 전 노송구씨는 안두희 집까지 찾아가 폭행했습니다(87. 7.21). 그들은 한결 같이 민족과 역사의 심관을 대행하는 하수인임을 자처 합니다.
백범의 저격범 안두희는 올해로 그의 나이 일흔입니다. 노령의그가 얼마나 오래 살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는 지금쯤 입을 열어 자신과 역사 앞에 그 비극의 배후를 밝혀야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대답하지 않겠다“면서 입을 다물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까지 "그 일을"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전4:5). 어서 그의 입이 열렸으면 합니다.
그래야 그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87. 7.30)
35. 「호메이니」
35. 「호메이니」
사람들은 「마호메트」(Mahomet 570-632)가 세운 종교를 「마호메트교」라 합니다. 더러는 「회회교」 「이슬람교」라고도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이슬라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섬기는 「알라」신에게 자기를 완전히 복종시킨다는 뜻입니다.
「이슬람교」는 그 이름부터가 벌써 어떤 강박관념을 느끼게 합니다.
교주 「마호메트」는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숙부의 대상에 가담하여 일하다가 25세 되는 해에 부유한 과부와 결혼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종교적인 열정으로 동굴 속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던 중 천사의 지시로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로 부터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조소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가 태어난 「메카」(Mecca)에서 쫓겨나 「메디나」로 도망갔습니다. 「마호메트」는 거기서 와신상담 기회를 노리다가 8년 만에 무력으로 그를 내쫓았던 그의 고향 「메카」를 탈환했습니다.
이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에 위치한 인구 40만 가량의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 7억 회교도의 성지입니다. 그곳은 「이슬람」교의 교주 「마호메트」가 태어난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슬람」교도들에게 「메카」순례는 가장 신성한 삶의 의무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이곳을 향하여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연례적인 성지 순례 기간 중 이곳 성도 「메카」에 운집한 순례자는 무려 2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홍해 항구도시 「지다」에서 「메카」에 이르는 72km도로는 온통 순례행렬로 붐볐다고 합니다. 그들 중 「이란」 순례자들이 일으킨 시위로 「사우디」경찰과 충돌한 끝에 일어난 유혈사태는 수천의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사우디」의 관영통신은 402명이 사망하고 649명이 부상했으며 사망자 중 「이란」인이 275명, 「사우디」경찰이 42명, 나머지는 기타 외국 순례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번 「메카」 참사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은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에서 온 순례자들의 시위가 발단의 원인이라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그들은 과격한 회교 혁명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슬람」교의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간의 뿌리 깊은 반목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란-이라크」전을 둘러싼 관련국들의 반이란, 친이라크적인 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시아」파가 집권한 「이란」이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수친」파가 집권하고 있는 「사우디」 「쿠웨이트」등 주변 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해 왔습니다.
여기에다 미국의 「쿠웨이트」 유조선 호위작전이 펼쳐지자 「이란」은 목이 졸리우는 것 같은 위기의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란」의 「시아」파는 「이슬람」 교도 중 가장 반항적이고 테러 공격을 서슴지 않는 극단주의파인데다 그들은 정치를 종교의 도구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이란」을 종교혁명으로 집권하였고 나아가 중동을 지배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호메이니」는 「호르무즈」해협에서 3차 대전의 뇌관에 불을 지를 것인가? 오늘 온 세계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87. 8. 6)
36. 무신론자(無神論者)
36. 무신론자(無神論者)
잉거솔( Robert Ingersolll ,1833.8. lI-1899.7.21)은 미국의 법률가입니다. 그는 또한 유명한 무신론자요, 철저한 반기독교 강연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번은 무신론 강연을 마친 후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사람을 죽음으로 벌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 하나님을 모욕할 것이고 저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가 내게 죽음을 내릴지 내 영혼을 저주할지 시험해 보됐습니다. 5분간의 시간 여유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라는게 있다면 이제 그 힘을 보여 5분간에 나를 죽여 보라는 것입니다"
1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2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3분이 되자 한 여인이 졸도했습니다. 4분이 지나자 「잉거솔」은 입을 삐쭉거렸습니다. 마침내 5분은 곧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잉거솔」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계를 호주머니에 도로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보셨지요? 세상에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미 제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을테니까요"
그가 뽐내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그에게로 가까이 가서 조용하게 물었습니다. "잠간 실례합니다만 당신에게는 자녀들이 있습니까?" “예, 자녀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정중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일 당신의 어린애 중 하나가 당신에게 칼을 주면서 '아버지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어린 것을 죽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펄쩍 뛰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망령이십니다. 누가 제 사랑하는 자식을 죽입니까?" 그 할머니는 이 말을 듣고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쳐 죽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 「필립브룩스」가 중병으로 임종이 가까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분들이 목사님을 뵙기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중의 목사님을 뵈오려고 찾아갔으나, 아무도 그를 뵈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병중의 목사님께서 면회를 사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잉거솔」만은 병실에서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잉거솔」은 목사님을 면회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저명인사들은 다 돌려 보내시면서도 특별히 저를 만나 뵙게 허락하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임종이 가까운 노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천국에서 또 만날 수 있겠지만 당신과는 이것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입니다"
이 말을 듣고 되돌아서는 무신론자 「잉거솔」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도다"(시l4:1)
(87. 8. 13)
37. 밖에 선교사가 있느냐?
37. 밖에 선교사가 있느냐?
「고종」은 나이 겨우 12세에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나이어린 「고종」이 위에 올랐던 그때는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했던 때입니다. 「고종」은 즉위하자마자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했고 「대원군」은 한때 과단성 있는 개혁정치를 도모하였으나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쇄국정치를 고집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왕비 민씨(閔氏)의 세가 커져감에 따라 결국 나라를 개방하여 열국과 수교통상의 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로부터 한반도에서는 청 · 일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고, 대원군과 민씨 일파의 암투가 계속되었으며, 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갈등과 반목은 날로 극심해 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또 다시 「대원군」에게 밀리던 민씨 일파는 청국(靑國)에 원병을 청함으로 일본(日本)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학란(東學亂)으로 인하여 한반도에 몰려온 청일양국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이것이 소위 청일전쟁입니다(1894- 1895)
기독교는 이런 때에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884년 9월20일 「알렌」(Allen) 의사가 입국하였고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는 1885년 4월 5일 그해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알렌」은 후에 궁정의사 곧 시의(侍醫)로 임명받았고 그가 한국에 끼친 공로로 국왕으로부터 세 번이나 훈장을 받기까지 하였으며 「언더우드」부인은 「민비」(閔妃)와 가깝게 지났습니다.
「언더우드」부인은 어느 날 「민비」에게 평화롭고 문명한 미국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동차 기차, 비행기는 물론 문명한 미국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우리나라 백성들도 그런 나라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면서 감탄하였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부인은 "중전마마 그 보다 더 좋은 나라가 또 있습니다"고 했더니 "그 보다 더 좋은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 나라는 하늘나라인데 예수만 믿으면 다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우리 백성 모두가 그런 나라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민비」는 가난한 「민치록」의 딸이었는데 조실부모한 후 「대원군」(大元君)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대원군」과 친일파 세력을 몰아내려다가 1895년8월20일 일본 놈들에게 비참하게 살육 당했습니다. 일본이 민비를 그렇게 한 것은 영특했던 그가 한국을 장악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이 일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비극이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고종황제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그 화가 멀지 않아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라 직감했던지 용상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면서 "밖에 선교사가 있느냐?"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드려졌던 을미년의 경복궁 안에서 부르짖었던 고종황제의 절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왕관을 쓴 머리는 편안하게 잠들지 못 한다"고 합니다. 그 무더웠던 을미년의 8월에 고종황제는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니라"
(87. 8. 20)
38. 관동 대학살(關東大虐殺)
38. 관동 대학살(關東大虐殺)
9월은 여름이 아닙니다. 9월은 가을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 좋은 9월을 맞으면서 우리는 어두운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9월 1일은 역사적으로 불길한 징조의 날로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이날을 "마의 9월 1일"로 부르지만 역사적으로 총월흉일(幽月幽日)이란 피치 못할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루이」 14세가 이날 죽었고, 「크레오파트라」도 이날 죽었습니다. 역사적 대화재인 「로마」의 화채도, 그리고 「런던」의 대화재도 이날 일어났습니다. 특히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도 이날이고 「이란」정부요인들이 폭사당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민항기인 KAL여객기가 「사할린」상공에서 「소련」미사일에 격추되어 269명의 생명이 공중분해 된 비극의 날이기도 합니다.
특히 갑자년 대홍수(甲子年 大洪水)도 이날에 시작되었고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말미암은 대학살도 이날에 일어났던 비극입니다.
정확히 말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44초,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도 7.9로 기록된 지진이 일본의 관동일대를 아수라장으로 휩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진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사가미」만의 해저 어떤 곳은 400m나 융기하였고 가라앉은 곳은 200m나 되었다고 합니다.
시가지의 전신주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뒤엉켜 새파란 불이 비같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고 목격자는 전 합니다.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가옥전파 또는 소실(燒失)이 575,394동, 반파 126,233동, 이재민은 3,404,898명, 그중에 사망자는 91,344명, 행방불명된 자만도 13,275명이었고, 피해액은 55억600만 불에 이르렀다 합니다.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관동 일대에는 사회적인 불안과 동요가 막심했다고 전합니다. 지진과 화재가 휩쓸고 간 뒤 불안에 떨고 있는 중에 이상한 유언비어가 피지고 없었습니다. "한국인이 폭동을 음모하고 있다"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흥분한 일인들은 집집마다 거리마다 뒤지면서 만나는 한국인마다 죽창이나 총검으로 집단학살의 광란이 벌어졌습니다.
미치광이가 된 일인들은 "한국인을 찾아내라" "한국인을 죽여라"고 아우성치면서 이 거리 저 거리에 몰려 다녔습니다.
이때에 학살당한 한국인은 일제의 공식집계만도 6,600여명에 이르고 한국인 변호사들이 현지에서 일본당국의 방해를 받아가면서 조사한 희생자 수는 20,000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냈습니다.
이 같은 엄청난 비극은 관동대지진 후 뒤숭숭한 민심을 딴 곳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일본정부와 군부가 짜고 저지른 대량학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만족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 중적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도 약소민족의 울분을 되씹게 됩니다.
무참하게 학살당한 동족의 한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또 그 비극의 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87. 9. 1)
39. 「오대양」사건(五大洋事件)
39. 「오대양」사건(五大洋事件)
한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이아나」인민사원의 교주였던 「짐죤스」는 1931년 5월13일 「인디애나」주 농촌의 가난한 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방탕하고 날마다 술 취한 엄마 밑에서 가까스로 대학을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33세가 되던 해 「인민사원순복음교회」라는 교회를 세웠고 여기저기에 다니면서 부흥집회를 열었습니다. 그가 인도하는 집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설교 중에 "암환자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였습니다. 손을 든 환자 중 한 사람을 부인으로 하여금 데리고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다시 들어와서는 "이것이 암 덩어리라"면서 외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리 닭의 내장을 썩혀가지고 주머니에 감추어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 측근을 변장시켜 병 고침 받은 자로 간증케 하기도합니다. 대개 이 같은 집회 때마다 금 은 보석과 많은 헌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모았으며 주위에 모여든 수많은 부녀자들을 농락했으며 심지어는 43명이 되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냈다고 큰소리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거짓은 오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측근에서 이탈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제일 귀찮은 존재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미의 「가이아나」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는 「가이아나」의 밀림 속에 「죤스타운」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그에게 평안의 곳은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된 이탈자와 함께 「인민사원」의 내막을 조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양의 탈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978년11월 18일, 그는 결국 추종자들을 설득하고 억압하여 "아버지" "메시야"라 부르며 따르던 923명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집단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소름끼치는 인민사원 사건의 재관을 또 보고 있습니다. 소위 "오대앙사건"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도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광신집단이나 이단은 적지 않습니다. 이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들입니다. 둘째는 교주를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길들여진 광신집단들입니다. 셋째는 모두가 집단 자살로 끝났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마 7:15) 이단을 경계합시다.
(87. 9. 10)
40. 애국가(愛國歌)와 안익태(安益泰)
40. 애국가(愛國歌)와 안익태(安益泰)
철새처럼 낯설고 산설은 이국땅을 떠돌면서도 한국의 예술을 세계에 심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곧 안익태(安益泰)입니다. 그는 이 땅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던 어수선한 때인 1905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첼로를 배우고 미국으로 건너가 첼로와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1936년에는 유럽에 건너가「요한스트라우스」에 사사하였으며 유럽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향악단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스폐인」 여성 「타라베라」와 결혼 「스페인」국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7년에 귀국하여 한국 환상곡 등을 지휘하였고, 3회에 걸쳐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3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획한 국제음악제가 3회로써 좌절되었을 때 그는 실의에 빠져 서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고국에 돌아와서 살겠다던 조국을 멀리 바라보면서 1955년 9월17일 「바르셀로나」의 하늘 아래서 60년의 생애를 조용히 끝마쳤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코리아 환타지」 「강산의 논개」 「흰 백합화」등 수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으나, 그보다 그는 애국가의 작곡자인 것입니다. 한때 그가 작곡한 애국가를 「불가리아」민요와 너무 닮았다고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안익태의 명성을 시기한 몇 사람들의 소견 좁은 장난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센프란시스코」의 한국인 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을 드랭사인」을 부르는 교포를 보고 애국가를 만들 것을 결심했습니다. 앞 절은 미국에서, 후렴은 고심 끝에 1935년 「부다페스트」음악학교 재학 중에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국가는 미국의 「대한국민회」와 「중경」의 임시정부에 보내졌습니다.
그 후 1950년 뉴욕에서 6 · 25의 참상을 전하는 텔레비전을 보고 비로소 자기 작곡의 애국가가 불리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지휘하기로 되어있던 「뉴욕 필하머니」의 레퍼터리를 고집을 부리면서 바꾸어 애국가가 든 「코리아 환타지」를 넣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동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작곡가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뿐입니다"
그의 유해는 1977년 7월 6일에 돌아와 지금은 국립묘지의 국가유공자 제 2묘소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병석에서 마지막 쓴 편지를 보면, 애국가를 작곡한 뜨거운 충정을 보는 듯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내 조국을 한 시간도 잊지 않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병상에서 이 편지를 쓰는데 내가 아프다는 소문을 널리 알리지는 마십시오. 걱정할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애국가를 바꾸자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안익태선생을 기억합니다. 더더욱 오늘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애국가를 크게 부르면서 그분의 애국심을 되새깁니다.
(87. 9. 17)
41. "동인아 동신아, 아버지가 묻혔다! "
41. "동인아 동신아, 아버지가 묻혔다! "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사도라 부릅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중에서 6년 가까이 투쟁하신 분입니다. 또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믿음의 장부로 길러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1948년 10월20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긴 날입니다.
두 형제는 그날 폭도들의 손에 총살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군의 진격으로 반란군은 진압되었습니다. 사해는 반전되어 동인 동신 형제를 총살한 학생도 잡혔습니다. 손 목사님은 곧 계엄사령부로 달려가 두 아들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안재성을 간신히 구해다가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위하여 25년을 한결 같이 헌신하면서 6 · 25의 와중에도 피난가기를 거절했습니다.
"저 불쌍한 양들을 두고 어디로 가겠느냐?"는 것이 목사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9월 28일을 맞은 것입니다. 이날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기쁜 날입니다. 서울이 탈환되고 중앙청에 또다시 태극기가 펄럭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양원의 천여 명 성도들에게는 눈물이 날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순교 당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퇴로가 차단되어 발악하는 인민군에게 끌려가다가 미평에서 총살당하신 것입니다.
멀리 부산에까지도 이 슬픈 소식은 전해졌습니다. 10월 10일 고려신학교 학생 30여명과 박윤선 교장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오종택 목사 등이 배를 타고 여수 부두에 이르렀습니다. 양아들 안재성의 영접을 받은 그들은 너무나 가슴이 메어었습니다. "손 목사님 미평까지 끌려 가셨으니 우리도 순교자의 뒤를 따라 걸어갑시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맨발로 끌려갔으니 우리도 맨발로 걸읍시다" 일행은 미평 순교현장을 거쳐 애양원까지 걸었습니다. 먼 줄도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1950년 10월13일 가을 하늘은 티 없이 밝았으나 목사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이 무거웠습니다.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 오종덕 목사가 주례를 맡고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가 설교하고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찬양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고려신학교 총무로 수고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행렬은 동도(東島)의 동인 동신 묘 위 쪽에 이르렀습니다. 유택이 마련되어 시신마저 곁을 떠나려는 때 정양순 사모의 통곡소리는 가슴을 메이게 했습니다.
"동인아! 동신아! 아버지가 묻혔다. 오늘밤부터 너희 삼부자는 같이 지내게 되었구나, 나는 어찌할꼬?" 사모님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 손 목사님은 이미 천국의 위로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1950년 6월16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나의 주소는 주님의 품 안이며, 나의 생일은 중생된 그날이 온대 중생일자는 미상입니다. 고로 땅위에 사는 나는 장막생활이며 나의 생일의 기쁜 잔치는 친당에 들어가는 그날뿐입니다.
(87. 9. 24)
41. 여순반란사건
41. 여순반란사건
1948년10월19일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공산계열의 반란을「여순반란사건」이라 일컫습니다. 당시 여수에 주둔한 14연대는 제주도 공산폭도 소탕작전의 지원명령을 받고 출동직전에 있었습니다. 이때 이 연대 안에 숨어있던 공산 프락치인 김지회 소위, 지창수 상사 등 40여명이 주동이 되어 비상소집이라는 명목아래 사병들을 규합하여 탄약고와 무기고를 습격하여 점령한 다음 불과 수 시간 내에 여수시를 점령한 후 우익인사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들은 이튿날 순천으로 진입하여 경찰서를 점령하고 살인 방화 등 만행을 자행하면서 북진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고, 산으로 도주한 잔당들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는데 이때 희생된 수는 무려 1,200명에 달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6년을 옥살이하다가 출옥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붙잡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언제나 공산주의 결점을 폭로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숨어있는 공산 푸락치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들은 수천의 군중들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들은 예수 믿는 놈들이지? "
"예 우리는 예수교인입니다"
"네 에미 애비도 예수 믿는 놈이지?"
"예 아버지는 목사입니다"
"너희들은 언제나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비난하였다지?""나쁜 점을 좋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이 나쁘더냐? "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나쁩니다"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줄 터이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면 나는 정말로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겠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재판장은 괘씸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더니 군중들을 향하여 "이놈들의 죄를 변호할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공산 푸락치들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죄상을 모함하며 꾸며 댔습니다. 이윽고 재판장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들은 사형에 처한다! 누가 먼저 죽을테냐?"
이 말을 들은 동생 동신이는 재판장에게 "재판장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형님은 우리 집을 계승해야 할 장자입니다. 어서 나를 죽여주시고 형님만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때 형 되는 동인이 동생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를 죽여주십시오. 내 아우는 아직 나이 어립니다. 두 형제를 대표하여 형 되는 내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디 내 아우를 살려 주십시오"
두 형제는 이렇게 서로 죽음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눈물도 피도 없는 공산폭도들은 무죄한 어린 학생들을 그것도 형제를 한꺼번에 총살하고 말았습니다.
잔인한 빨갱이들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나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마저 빼앗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 두 형제의 영혼은 1948년 10월 20일 주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87. 10. 1)
43. 손양원목사의 감사
43. 손양원목사의 감사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양의 동서나 때의 고금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이 망난이거나 바보 일지라도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배은망덕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복형 암논을 죽인 자이며, 부왕을 반역하고 그 왕위를 빼앗으려 했던 반역자입니다. 그 압살롬이 거사에 실패하여 도망하다가 요압의 군대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이렇게 슬퍼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이것이 자녀들의 죽음 앞에 선 모든 부모님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한 아들도 아닌 두 아들의 시신 앞에서 이성과 슬픔을 억제하고 하나님 앞에 오히려 감사하는 위대한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1948년10월19일 일발의 총성을 신호로 여수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은 순식간에 온 시가지를 피바다로 만든 뒤 그 이튿날 순천 시가지를 짓밟았습니다. 그들과 합세한 전향학생들은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잡아다가 총살해 버렸습니다.
국군의 출동으로 반란사건은 진압되고 질서가 회복된 10월27일에는 동인과 동신의 장례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비통한 자리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열 가지를 감사했다고 안용준 목사가 쓴 '사랑의 원자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 느낀바 은혜 받은 감사의 조건을 들어 답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감사합니다.
셋째, 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란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순교 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으로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흡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마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오!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오며 영광 돌려마지 않나이다. 옛날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새벽마다 부르짖던 35.6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 형제자매들의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준 그 열매로 확신하오며 여러분에게도 감사하여마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시신 앞에서도 감사했던 그 믿음이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매질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87.10. 8)
44. 「유관순」의 옥사(獄死)
44. 「유관순」의 옥사(獄死)
지금부터 67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답고 감격스러워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920년 10월 12일, 이날에 순국처녀 유관순은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채 피어보지도 못 하고 옥사한 날입니다.
그녀는 1903년 3월 15일 충남 천원군 목천에서 유중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년 독립만세 소리가 이 땅 방방곡곡을 뒤 흔들던 때 그녀는 열여섯 살의 앳띤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었지만 3.1운동에 참가 선배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돕다가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유관순은 고향인 아내마을로 내려가 향리의 어른들과 군중들을 설득시킬 뿐 아니라 천안, 연기, 청주, 진천을 두루 돌며 궐기시켜 아내장터 만세사건을 일으키고 주모자로 피검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왜경들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녀는 왜경들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결국 3년형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왜놈들의 재판을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당신들 일본 놈들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검사는 "너희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냐?"면서 조롱하자, 유관순은 의자로 검사를 내리쳤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유관순은 7년형을 추가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날마다 주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어린 나이로 모진 고문과 시련을 한 몸에 받으면서 대한의 딸로 꿋꿋하게 버터다가 1920년 10월12일 꽃다운 나이 1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피살되었습니다.
석유궤짝에 담겨진 그녀의 유해는 여섯 토막이나 잘려져 있었고 손톱, 코, 귀가 없어졌으며, 머리카락이 다 뽑혀진 처참한 모습으로 뒤 엉켜져 있었습니다.
장한 대한의 딸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67년이 지났으나, 우리의 귀에는 아직도 카랑카랑한 그녀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고, 부르짖는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천관우(千寬宇)씨는 그의 신세시기(新歲時記)에 이렇게 써놓고 있습니다. "3.1만세는 피눈물이 맺힌 만세요. 부르면 잡혀가고 때로는 살상을 당하는 만세였다. 그리고 누가 시켜서 부른 만세가 아니라, 고을마다 동네마다 제각기 북받쳐 오르는 절규를 이 한 마디로 표현하여 13도 방방곡곡이 부르고 응해서 터져 나온 만세였다.
"
유관순은 이 만세를 부르다가 붙잡혔고 또 부르고 부르다가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그녀는 옥사한 것입니다. 67년 전의 그날을 여느 날처럼 보내기가 부끄러워. 그녀의 장한 모습을 회상해 봅니다.
(87.10.12)
45. 종교개혁(宗敎改革)(1)
45. 종교개혁(宗敎改革)(1)
한 젊은 학도가 고향을 떠나 「에르프르트」(Erfurt)에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오는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기 시작하더니 가까이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의 친구는 죽었고 이 젊은이도 이제 죽는가보다 생각하면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살려만 주신다면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했습니다. 그는 깨닫는 바가 있어서 법률 공부를 집어 치우고 신학을 공부해서 스물넷에 신부가 되고 스물아홉에 박사학위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 젊은이가 세계 역사를 뒤바꾸고 타락한 천주교를 개혁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였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걷는 규칙에도 익숙했습니다. 그는 웃음을 포기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마루도 닦고 동냥도 했습니다. 로마교회 교리도 다 외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로마도 순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었다는 밧줄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웬일입니까? 그렇게 하면 온다고 가르쳐진 "구원의 기쁨"은 끝내 그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 기도실에서 열심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오랫동안 숨겨졌던 기쁨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행함으로"가 아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는 중에 천주교회가 성경에서 이탈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면죄부 판매의 비성경적인 부당성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청은 이미 13세기부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면죄부를 사게 했습니다. 교황 「유리우스」 12세가 바티칸 궁내에 있는 유명한 성「베드로」사원을 건축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유리우스」 다음에는 「레오」 10세가 계속 했는데 그는 독일 내의 면죄부 판매권을 「마인쯔」의 대 감독「알브레히트」에게 위임했습니다.
「알브레히트」대 감독은 그 수하에 있는 능변가인 「존 테첼」을 시켜 면죄부를 판매하게 했습니다.「테첼」일행은 이 면죄부를 독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만일 당신이 지옥에 가 있는 남편의 영혼을 위한다면 여기 이 면죄부를 사고 그 돈을 이 돈궤에 넣을 때 그 돈의 떨어지는 "짤랑"소리와 함께 지옥에 있던 그 영혼은 친당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독일의 많은 우남우녀들은 떼를 지어 자기의 가산을 팔고 재산을 팔아 이 면죄부를 사기 위하여 줄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 일행이 「비텐 베르그」성에 까지 이른 것을 본 루터는 그것을 그대로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519년 10월 31일 그 유명한 95개 항의문을「비텐 베르그」교회 정문에 붙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경은 빛을 발하게 되었고, 어둠 속에 있던 교회는 개혁되어, 세계사의 큰 물줄기는 근세사의 새 장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87.10.19)
46. 종교개혁(宗敎改革)(2)
46. 종교개혁(宗敎改革)(2)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서 시작한 교회는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교회는 깊은 골방이나 동굴 속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키는 지하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카타콤」(Catacomb)입니다.
이 같은 박해는 「로마」황제 「데오클레틴」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들 「콘스탄틴」이 정권 다툼의 내란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싸울 때에 환상 중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아래 「라틴」말로 "너는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승리하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글귀를 보고 회개한 후 지금까지 박해 해오던 예수를 믿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황제로 즉위 하였습니다. 그 후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AD 359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어지면서 교회도 양분되어 동으로 갈린 희랍 정통교회와 서로마에 속한 천주교회로 갈린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천주교회는 정치와 야합하면서 점점 속화되어 부패하면서,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판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의식에 흐르게 되었고 교권주의는 성경위에 군립하게 됨으로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Norman Langford는 "지상에 떨어진 불"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중세교회의 타락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천당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지옥에는 회개하지 않고 죽은 죄인이나, 이단자나, 범죄자들이 가는 곳이다. 교회에 잘 나오고 미사에 잘 참석하고 신부의 말씀에 복종 잘하는 사람들은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천당에는 성자와 성직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평교인들은 죽으면 우선 연옥이라는 곳에 가게 된다. 이 연옥에서 그들은 지은 죄의 대가로서 고통과 징벌을 받아야한다. 그 고통은 지옥에 간 영혼이 워는 고통과 똑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연옥의 고통은 얼마동안이지만 지옥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다.
연옥에 간 영혼이 자기의 죄 값만큼 고통을 받고나면, 그는 고통으로 부터 풀리게 되며 낙원이라는 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이미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이나 또 장차 연옥에 갈 영혼들이 덜 고통 받는 길이 있다. 그것은 성자들이 한 것처럼 선행을 많이 하든가, 로마를 자주 순례하든가, 혹은 죄를 용서받는 면죄부라는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교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편리하도록 만들어 낼 교리입니다. 천주교회는 이 교리를 가지고 신자들을 위협하였고, 돈을 많이 거두어들이는 방편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빙자하여 구원의 교리를 사고파는 상거래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은 교회에서 멀어졌으며, 우매했던 신자들은 너도나도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기 위하여 모여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교황은 세계의 갑부가 되었고 성직자의 타락은 극도화 되었으며, 교회는 웅장한 형식만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둠 속에서도 「루터」로 하여금 말씀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살고 마틴은 죽게 하라" 하나님은 이 사람의 손을 빌어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 베르그」교회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을 써 붙이게 한 것입니다.
(87.10.26)
47. 종교개혁(宗敎改革)(3)
47. 종교개혁(宗敎改革)(3)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개혁이 「마틴 루터」로 부터 시작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 효시는 14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우고 모교의 교수가 되고 또 영국 국왕의 궁정사제가 되었던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확실히 종교개혁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성경은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고의 권위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성경을 보급하기 위하여 영역하였고 성경에 어긋난 종교가의 악덕을 책하고 또 화체설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천주교회의 미움을 사 대학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4년이 지난 후인데도 천주교회는 그가 번역한 성경과 저술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콘스탄틴」 종교회의는 결국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사후 44년에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뼈를 꺼내 불태운 후 그 재를 그가 살던 집이 있는 강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위클리프」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의 전사에 반드시 취급되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보헤미아의 「후스」(Jau Huss)입니다.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배운 후 모교의 교수가 되고 학장이 되었으며, 또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로서 성경은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강조하고 설교하였고, 성직자의 토지소유 및 세속화에 반대함으로 그도 역시 대학에서 축출되고 파문되었습니다.
그는 1414년 「콘스탄틴」 종교회의에 소환 되었는데, 변명할 기회도 허락됨이 없이 체포된 후, 드디어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박해자들은 그를 기둥에 잡아매고 나무와 짚을 그의 목에까지 쌓아올린 후 그의 믿는 바를 취소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나무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그를 둘러쌀 때 그는 큰소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에 복종한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이다. 나를 성경으로나 조리 있는 변론으로 수긍케 함이 없고서는 나로 하여금 내 소신을 취소하게 못할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나서 불길 속에 싸이고 말았습니다. 이 날이 1945년 7월 6일이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처형되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작은 새 한 마리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한 마리의 큰 황새가 나타날 것이고,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 황새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과연 「후스」가 이 예언을 한지 102년 만에 「마틴 루터」가 큰 황새가 되어 나타나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치켜들었던 것입니다.
(87,10.31)
48. 종교개혁(宗敎改革)(4)
48. 종교개혁(宗敎改革)(4)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 중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삼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리상의 발견과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입니다.
이 종교개혁은 1917. 10. 31일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문을「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중에 천주교회가 성경에서 이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곧 1천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교황권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공격하였고 모든 사람은 성경을 읽어야 하며 교회 안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루터」를 즉각 출교시켰고 그의 논문들을 압수하여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루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도 감히 교황에게 도전했습니다.
당시 교황의 세력은 굉장했습니다. 그는 각국의 황제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했으며, 그들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교황이 파문 선고를 내리면 황제는 따라야 했고 그를 체포하여 불태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파문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교황은 독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루터」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독일황제는 당시에 교황의 도움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황제는 로마 교황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루터」의 처형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중대한 일이어서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집된 회의가 1922년 봄, 독일의 「라인강」인 「웜스」(Worms)에서 모였습니다. 이 회의의 중요한 안건은 "루터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독일황제는 교황의 요구대로 「루터」를 처형할 결심이었으나, 의원들 중에는 아무리 교황의 요구라 할지라도 황제에게 속한 한 시민을 심문 한 번 없이 처형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니 그를 불러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황제의 소환에 따라 「윔스」로 가려했을 때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의회 출두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윔스의 기와장이 다 마귀로 변하여 대적해 온다할지라도 그곳에 가겠노라“
드디어 1921. 4. 18일, 그는 화형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2천명의 행렬의 호송을 받으며 독일 「윔스」국회에 호출당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겁 없이도 외쳤던 이 외롭고 초라한 「루터」의 생명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87. 10.31)
49. 종교개혁(宗敎改革)(5)
49. 종교개혁(宗敎改革)(5)
「루터」가 출두한 의회의 광경은 굉장했습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사방에서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국회 정면 옥좌에는 독일황제가 위엄 있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 밑에는 6명의 선거후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전후좌우에는 많은 귀족, 승려, 외국사절, 도시의 대표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회의장 안팎에는 방청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독일 제국의 모든 권력이 다 모여 있었고 그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교황의 세력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교황의 요구대로 한사람 「루터」를 사형시키기 위하여 공식적인 심문의 형식을 갖추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세력 앞에 끌려나온바 된「루터」는 어떤 자입니까? 그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일 뿐입니다. 그의 주위에는 한 사람의 자기편도 없었습니다. 그는 외롭고 측은하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었습니다. 거대한 교황권과 독일 황제 앞에 「루터」는 혼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루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숨 막히는 순간에 그는 서 있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루터」는 와야할 순간이 왔고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도리애우」의 「앳겐」은 「루터」에 대한 보고연설을 마치고 나서 「루터」를 향하여 물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책들은 모두 그대의 것으로 고백하는가? 이 책들에 쓴 것을 취소할 마음은 없는가?"
영국의 역사가 「칼라일」은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근세 역사상 가장 중대한 때였다. 이때의 「루터」의 답변여하로 말미암아 유럽은 혹은 망하고 혹은 구원되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는 세계역사의 한 중요한 분수령에 서 있었습니다. 만일 「루터」가 이 외로움과 위험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단 한 마디 "예"라고만 하면 모든 것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전적으로 그대로입니다. 내가 믿는 바를 고칠 수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고치지 않으렵니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오니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아멘"
그는 구차하게 생명을 위해 진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감히 세계의 대 권세 앞에 "아니오"했습니다. 그의 No! 이 한 마디에 "전 유럽은 동요되었다"고 시인 「로엘」은 말했습니다. 「칼라일」은 말하기를 "영국의 퓨리탄도, 프랑스의 대 혁명도, 미국의 건국도 「루터」의 No! 이 한 마디에서 생겨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를 변화시킨 이 한 마디는 어디서 왔는가?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이 말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루터」자신의 힘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그의 배후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돕고 격려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87.10.31)
50. 종교개혁(宗敎改革)(6)
50. 종교개혁(宗敎改革)(6)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세계 방방곡곡에서 애창되고 있는 이 찬송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지은 찬송입니다. 찬송가 해설가인 「에뮤리안(Ernest K. Emurian)은 이 찬송을 "투쟁적인 전가(戰歌)"라고 말합니다. 그럴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는 교황청의 집요한 위협 고군분투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승리를 확신하면서 이 찬송 속에 그의 신앙과 절개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1917. 10. 31일 95개조 항의문을 발표한 것은 교황청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비유컨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교황은 1521. 1 3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보냈습니다. 「엘프르트」대학과 「파리」 대학은 104가지 조항을 들어「루터」를 이단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황의 사주를 받은 독일 황제 「찰스」5세는 마침내 1921. 4 18일 「윔스」국회에 출두하도록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감금당했고 그의 추종자들도 쉴 사이 없이 소환되었습니다. 그가 45세가 되던 1529년 여름, 치열한 재판전이 벌어지기 전날 밤「루터」는 그의 동지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기어코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이 찬송을 지어 그날 밤에 불렀던 것입니다.
「루터」는 비상한 위험과 공포에 직면하여 기운 없이 멍청하게 앉아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비비트! 비비트!"(Vivit! Vivit! )(그는 살아 계신다! 그는 살아 계신다!)라고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절망하고 없을 때, 그의 부인은 대성통곡 하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루터」가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부인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죽다니?" 「루터」가 노하면서 반문하자,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그렇게 낙심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오직 믿음"만으로 살았던 신앙의 거장 「루터」는 믿음으로 승리한 후 그 믿음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부를 남겨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하신 하나님을 너희에게 남겨주노라" 위대한 개혁자 「루터」는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친 후 1546. 2. 22 「비텐베르그」성 교회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우리의 귓전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주님이여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87.10.31)
51. 범사에 감사하라
51. 범사에 감사하라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환절기에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여행할 기회가 있어서 어느 휴게실에 들렀었는데, 거기 "일상의 다섯 가지 마음"이라는, 새겨두고 싶은 글귀가 없어서 여기 옮겨 볼까합니다.
「첫째,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감사의 마음
둘째,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반성의 마음
셋째, "덕분입니다"라고 하는 겸허한 마음
넷째,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봉사의 마음
다섯째, "네 그렇습니다"라고 하는 유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정말로 우리 모두가 항상 지녀야할 "일상의 다섯 가지 마음" 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세미나에서 "천국방언" 다섯 마디를 소개하는 강사의 음성이 아직도 귓전에서 들려오고 없는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고마와요, 잘했어요, 사랑해요" 이 같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 같습니다.
함께 기억하고 싶은 말이 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살전5:16-18). 여기에 강조되고 있는 것은 "기뻐하고 기도하며 또 감사"하는 것이지만, 이 세 가지 미덕은 다같이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그 일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높은 미덕은, 모든 상황을 초월할 뿐 아니라 불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여의치 못한 세상에 살면서도 항상 감사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인도와 축복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출근하던 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녀는 23세였고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제 정신이 든 것은 병원에서였습니다.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치아가 부러지고 잇몸 전체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후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 이 꼴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살려두지 말았어야죠" 그녀는 울면서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 뿐이 아니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던 남편은 말없이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그는 이혼을 제기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다섯 달된 애기까지 순식간에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산다는 의미마저 없었습니다. 배신당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하나님, 하필이면 나만이 왜 이렇게 불행해야 합니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비통한 과정을 지켜보던 군의관 소령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지옥을 헤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어진 생명을 가꾸는 일입니다."
그 후 그녀는 7년 동안에 35번의 성형수술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완쾌되었습니다. 7년을 한결 같이 그 여인의 건강을 위하여 전념했던 그 의사는 어느 날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해 왔습니다.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원망하면서 울부짖었던 그녀는 이제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불행에 대한 해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실린 실화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87.11.15)
52.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1)
52.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1)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 학생운동을 우리는 광주학생사건이라 부릅니다. 이 사건은 우리학생운동사에 찬란한 금자탑으로 우뚝 선 광주학생독립운동입니다.
필자는 일전에 그 진원지인 광주일고를 방문하였습니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그 왼편에 높다란 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독립운동 기념탑은 1953년 월 3일 전국 학도들이 그들의 정성을 모아 이 운동의 발상지인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일고)에 건립한 것입니다.
그 탑 전면 밑에는 큰 글자로 이렇게 새겨져있습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탑 뒷면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단기 사천이백육십이년 십일월 삼일, 이날은 광주학생들이 일제의 탄압에 항쟁하며 일어선 민족정기의 날, 굴욕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의기로써, 너도 나도 뛰쳐나서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무릇 오만사천여명, 혹은 쇠사슬에 묶이어 철창아래 갇히었으며, 또 혹은 피를 물고 쓰러졌으되, 그날 그들이 높이 들었던 정의의 횃불은 그대로 역사위에 길이길이 타오르나니, 어허 여기 흐르듯 고인 그들의 피와 눈물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기 서린 채 깃들인 그들의 넋과 뜻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 비치리로다.
단기 사천이백팔십육 년 십일월 삼일
여기에 온 국민의 열화 같은 힘과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다.“
일본은 1905년에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아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10년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을 매수하여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케 한 후, 그들은 소위 4기 정복정책을 섰습니다. ①1920년대까지는 땅을 빼앗고, ②1930년대까지는 발을 빼앗고, ③1940년대 까지는 사람을 빼앗고, ④1950년대까지는 목숨을 빼앗아 한국을 멸절시키고자 했습니다.
어느새 전 국토는 측량되었고, 경작지의 절반 이상은 일인들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1929년만 해도 당시 쌀 총 수확량의 3분지 1인 500만석을 강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습니다. 농민은 모두가 농토를 빼앗긴 후 소작인이 되었고,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불쌍한 백성들은 수십만이 고국을 띠나 만주로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문전옥답을 빼앗긴 후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된 자만도 2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일에 온 겨레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어났고, 1926년에는 6.10만세 사건 같은 대 운동을 벌였지만 일본은 경제적, 정신적, 문화적 수탈을 강화하여 이 민족의 장래는 서산에 기우는 해처럼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못 먹고 멸시받은 "빛고을" 아이들은 잠잠하고 있지 안했습니다. 그들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의 통학 열차 안에서 당한 수모와 모욕을 못 본 체 할 바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민족적 감정과 자존심에 불을 지르는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해 11월 3일에 노도처럼 번진 것이 광주학생사건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그 58번째의 그날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87.11. 3)
53.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2)
53.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2)
티끌이 모아져서 태산이 되고 순간이 거듭하여 해가 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냥개비 한 개가 능히 아방궁을 불태우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개 커다란 사건의 가장 최초의 원인은 극히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는 예가 많습니다.
우리 학생운동사에 찬연한 금자탑으로 우뚝 선 광주학생독립운동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열여섯의 나이로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준채(朴準埰)」는 이제 고희(古稀)를 넘어선 노인이 되었지만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차가 「나주(羅州)역에 도착했는데 일본인 중학생 「후꾸다」 「스에요시」등 몇 명이 우리 누님 「박기옥」(朴己玉 당시 광주여고보 3년·18세)과 「이광춘」(李光春)등 한국인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며 놀렸습니다. 분이 치밀어 내가 「후꾸다」를 때려주었지요. 일본인 학생들이 「후꾸다」를 편들어 덤비고 우리 학생들도 나를 응원해 이에 맞서 편싸움이 됐어요. 이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입니다.
사소한 사건이 엄청난 역사적 거사를 유발한 셈이지만 그만큼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에 민족적 분노가 쌓여 있었던 겁니다."
이런 시비가 벌어진 것은 1929. 10. 30일이었습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왜경은 일방적으로 「박준채」에게만 호통을 쳐 보냈고 일본인 신문 광주일보는 편파적인 기사를 게재함으로 학생들의 분노를 들끓게 했습니다. 「광주」 「나주」간 통학열차 안에서는 매일 같이 충돌이 계속되었고 「광주」역전에서는 격투가 벌어지는 등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 11월 3일을 맞이했습니다.
이날 「광주」에서는 누에고치 600만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유난히 붐비고 있었고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어서 개천절에 해당하는 날이었뿐 아니라, 일제는 그들의 4대 경축일의 하나인 「명치절」(明治諦)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날이 국경일이었으나 한국민들에게는 또 한 번 민족적 울분을 느끼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소위 「명치절」행사를 마치고 나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마침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일인 「광주중학」생들과 「수기동」에서 충동하게 되었는데 「최상현」군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코가 찔렸습니다. 이때 다른 학생들은 「광주일보사」를 포위하고 왜곡 편파보도에 항의하면서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충돌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고보」학생들은 일인 학생들을 두들겨 주었고 그들은 광주역전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도선생을 앞세워 수백 명이 「광주고보」 타도를 외치면서 역전으로 운집했습니다. "급보에 접한 「광주고보」기숙사 학생들도 몽둥이와 베트를 들고 역전으로 달려갔고, 인근의 「광주농고」 그 밖의 한국인학교 학생들도 역전으로 쇄도 수백 명이 뒤엉켜 일대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경찰과 양교 교사들과 소방대등이 총동원돼 가까스로 싸움은 말려 일단 해산되었으나, 학교에 되돌아온 「광주고보」학생들은 강당에서 모임을 가진 후 다시 시내로 쏟아져 나갔습니다. 이때 이웃 「광주농고」, 「광주사범」,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등 남녀학생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온 광주시가지는 「대한독립만세」소리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박준채」씨의 증언입니다.
"굴욕으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엄을 택하겠다"면서 거리로 뛰쳐나가 당당하게 싸운 장한 그날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87.11. 3)
54.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3)
54. 광주학생 독립 운동사건(3)
1929. 11.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각 학교당국에서는 6일간의 임시 휴교를 선언하여 학생들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광주시가지는 마치 계엄령을 선포한 것처럼 살벌하였고, 검거 선풍이 불어 광주고보생 59명, 농업학교생 11명, 사범학교생 5명 등 75명이 검거되었으나, 일인 광중학생 8명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위결과가 이렇게 많은 학생이 검거되고 민족적인 차별과 편벽된 처사로 나타나자 민족적인 감정은 더욱 격앙되어, 이제는 광중학생들을 상대하지 않고 일제의 추출을 드높이 외치면서 거대한 독립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개학이 된 그 이튿날인 12일은 마침 장날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되자 일제히 교실을 뛰쳐나와 장작과 괭이 등을 들고 두 번째 데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뿌린 삐라와 외친 구호의 내용은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 "피압박민족 해방만세"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이었습니다.
이때 일인들은 타군에서 지원 나온 경찰까지 출동시켜 진압에 힘썼으나, 광주시내의 모든 학생은 물론 수천의 시민과 심지어는 보통학교생(국민학교)까지 가담하였습니다. 왜경은 이때 수백의 시위자들을 일시에 검거함으로 그들의 훈련장인 무덕전(武德殿)에까지 임시 수용하다가 이들 중 170여명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탄압은 오히려 한인 학생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마침내 목포로 서울로 비화되어 전국학생들의 항일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그해 12월 3일 새벽에 광주학생운동의 격문 수만 매가 서울의 각 학교에 뿌려지자 남녀 학생들은 일시에 호응하여 "광주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공부할 수 없다"면서 동맹휴학을 감행하고 날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시위는 이등해 4월까지 계속되었고 탄압을 받을수록 도시에서 농촌으로, 중등학교에서 보통학교로, 국내에서 국외로 퍼져 나갔습니다.
광주에서 시작된 이 항일학생운동은 민족운동이 되었고 그 규모도 엄청난 것이었음을 당시의 통계는 말해줍니다. 초등학교 54개교, 중등학교 136개교, 전문학교 4개교, 간도의 8개교 등 모두 202개교가 이 운동에 참가하였고, 참가학생만도 58,000여명이나 되었으며 이중 퇴학처분을 당한 학생이 무려 1,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의 도화선이 되었던 광주여고보 「박기옥」은 시위 때 붙들려가 2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고향인 나주에 내려왔으나, 바깥세상 출입도 못한 채 일경의 감시 속에 청춘도 다 빼앗긴 그녀는 34세를 일기로 병사, 한 맺힌 일생을 마쳐야했습니다.
1953년 10월 20일 대한민국 국회는 만장일치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고, 그 이듬해인 1954년 6월 10일에는 전국의 학생들이 그들의 정성을 모아 광주서중학교에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기념일마저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금남로를 누볐던 5.18도. 성난 아이들의 11.3의 함성도, "빛고을" 광주에 큰 빛 비치는 그날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빛을 잠시 가리울 수 있을른지는 몰라도 아무도 그 불을 끄지는 못할 것입니다.
(87.11. 3)
55. 대통령 선거
55. 대통령 선거
12월 16일 대통령선거를 앞둔 요즈음 세상은 신이 납니다. 유세장에 몰려든 청중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고, 지난날 터부시 했던 일들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어서 좋고, 베일 속에 감추어졌던 일들이 하나 둘 알려져 궁금증을 풀어주어서 좋습니다. 대권주자들의 그 풍성한 공약(公約)이 언젠가 공약(空約)이 될른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지만은 않습니다.
민중을 자기의 도구로 삼기 위하여 민중에게 아첨하는 것이 선거이련만 그래도 선거가 싫지만은 않습니다. 「남재희」씨는 총선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권력의 성은 총선거란 축제 때 문을 연다. 그때 비로소 성 밖에 웅성거리던 백성들은 성안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말 참견도 하고, 때로는 성주(城主)를 바꾸기도 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다시 성문은 굳게 닫히고 만다."
이 성주가 되는 길은 많지 않습니다. 첫째는 선거에 의한 당선입니다. 둘째는 구데타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성주가 되고나면 사람이 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은 신비스런 어떤 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간다」의 「이디아민」은 본래 헤비급 권투선수였는데 구데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우국충정의 애국자였습니다. "나로서는 조국이 황폐해 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조언자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여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잔인무도한 정신병자처럼 보였습니다. 5만 명의 아시아인을 국외로 추방시켰고, 영국인선교사 「힐즈」목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그의 특별 사면을 요청한 영국의 외무장관을 불러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77년 3월에는 영국 교회의 대주교를 사살하고 교통사고로 위장하였습니다.
그는 집권 5년 동안에 10만여 명을 처형하였다고 「국제사면위원회」는 발표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또 다른 구테타에 의해 망명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였습니다. "모든 권력은 붕괴하며,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한다"는 「액튼」의 말은 정말로 공감이가는 말입니다.
대권주자들은 한결 같이 자기가 당선이 되어야 국가가 안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륜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안정은 온갖 국민이 법 앞에 있어서 평등한 국가"라 하였습니다. 몬테스큐는 "국토는 그 비옥함에 비례해서 경작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비례해서 경작된다"고 했습니다.
군주국은 우수한 상선이지만 암초에 부딪히고, 공화국은 침몰하는 일이 없는 뗏목이지만 발은 언제나 물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권 주자들의 언행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87.12. 3)
56. 투표(投票)
56. 투표(投票)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전 국민의 지대한 관심 속에 대통령 선거일은 마침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전국이 온통 선거 분위기로 들끓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첫째는 온 국민이 쟁취하여 얻은 선거인 때문이요, 둘째는 16년 만에 되찾은 대통령 선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민의 주권을 기본전제로 합니다. 국민은 바로 나라의 주인이고, 모든 권력 창출의 원천입니다.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이 주권은 선거를 통하여 행사하게 됩니다. 이 주권은 곧 자유를 기초로 합니다. 자유가 없는 주권은 거짓된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제퍼슨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자유를 부여하셨다"고 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몇 가지 주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주권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할 수 있는 통치권을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치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생명을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에 대한 주권도 작고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취사선택의 영적자유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즉 자유 자체에 대한 주권도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을 포기한 국민에게는 주권이 있으나마나 하고 선거권을 포기한 유권자에게는 선거세도가 있으나마나 합니다.
문세는 어떻게 하여 이 고귀한 주권들을 계속 보존 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주권은 포기하거나, 남용하게 될 때 그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서는 그것을 올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주권을 보존한다는 것은 곧 자유를 올바로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유 없는 주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자유도 광범위합니다.
거기에는 양심의 자유, 법률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 도덕상의 자유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 밀턴은 주장하기를 "나에게 아는 자유, 생각하는 자유 ,믿는 자유, 그리고 양심을 좇아서 마음대로 발언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자유의 한계입니다. 첫째, 이 자유가 사회에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둘째, 이 자유가 방탕과 타락을 초래해서도 안 됩니다. 셋째, 이 자유가 충돌과 파괴를 가져와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모든 유권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투표장으로 나가 이 나라의 지도자 선출에 자기의 귀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할 것입니다.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가장 큰 참정권은 투표입니다. 우리의 깨끗한 한 표를 올바르게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87.12.10)
57. 그놈이 그놈이다.
57. 그놈이 그놈이다.
한 시골 중년부인이 서 있는 기차에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 안에는 중년 신사한 사람이 신문을 보고 앉아 없을 뿐이었습니다. 시골 부인은 의아해 하면서 신사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 그 신사는 담배를 피워 물더니 연기를 뿜어냈습니다. 속이 상한 부인은 소리쳤습니다. "여기는 금연석이지 않아요. 이런 무례한 사람이 다 있어! " 그러자 증년 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습니다. "부인 미안하오. 내가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차가 좀처럼 움직이질 않아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몇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경호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 옆에 앉아 있는 시골 부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 함부로 들어왔어요? 이 차는 대통령 전용 기차요 빨리나가시오" 부인은 부끄러워 허겁지겁 뛰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중년신사는 그 부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어느 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나라의 대통령과 평범한 시골 부인입니다.
그들의 우연한 만남은 오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렇게도 요란하던 선거전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은 그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어차피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국민들의 깨끗한 승복은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거의 과정을 지켜보아온 국민들이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의 과정은 선거의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수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개표원들이 열심히 개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표 도중 한 투표용지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00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 접혀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개표 종사원들은 호기심으로 그 투표용지를 펴 보았더니 모든 후보들에게 도장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이렇게 써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놈이 그놈이다. 개표하는 사람들만 불쌍하니 이 돈으로 포도주나 사서 드시오" 개표원들은 약간의 논의를 한 뒤에 그 돈으로 포도주를 사서 먹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국민은 지켜볼 것입니다. "그놈이 그놈인지 아닌지를····"
(87.12.17)
58. 세월을 아끼라
58. 세월을 아끼라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적은 시간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저무는 해를 멈추게 할 수는 없고 아무도 흐르는 세월을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정된 시간 이외의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도, 「프라스코」의 소설 「제8요일」도 그러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13월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 가도 막상 묻는 이가 있어 그것을 설명하려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송구영신의 계제에 와 있습니다. 이 해가 가면 우리는 또 다른 한해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순환은 언제까지나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원치 않는 종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천년만년 살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무릇 산자는 죽을 줄 알아야한다"고 했습니다(전9:5). 둘째는 우주의 종말입니다. 나는 살아있다 할지라도 우주의 종말이 오면 우리의 지상의 생애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24:42). 그 어느 날엔가 주님이 재림하시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가 가면 또 다른 한 해가 다시 온다는 순환이 계속되리라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세를 맞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나 시간으로 계산한 통계표를 내 놓았습니다. 그가 살아온 한평생은 대개 이렇게 소비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26년 동안 잠을 잤습니다. 그는 그가 산 3분지 1을 수면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는 21년 동안을 노동에 바쳤습니다. 그는 밥 먹는 시간으로 6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리는 시간으로 무려 5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5년을 혼자서 불안스럽게 걱정하면서 낭비했습니다.
그는 수염을 깎고 세면하는 일로 228일을 보냈으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노는 것에는 26일을 보냈고, 넥타이를 매는데 18일이 걸렸고, 담배 불을 붙이는데 12일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음속에 행복을 누렸던 가장 기쁜 시간들은 겨우 46시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한 노인의 시간 계산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우리는 다시금 사도 바울을 통하여 경고를 받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87.12.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