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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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그대가 죽어서 썩자마자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망각되어 버리고 싶지 않거든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쓰든가 또는 쓸 가치가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언젠가 곽씨라는 삼류 시인이 「소동파」를 찾아가서 자작한 시를 낭송하며 비평을 구했다고 합니다. 다 듣고 난 「소동파」는 “점수로 따지면 100점은 무난하군!”라고 평했습니다. 그러자 곽시인은 크게 만족해하면서 더 자세한 평을 구했습니다. 「소동파」는 침착한 태도로 하는 말이 ‘우선 자네 음성이 70점은 되고 나머지는 시의 점수라할만하지 뭐, 더 설명할 것 있나?’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창백한 곽시인의 얼굴 속에 또 다른 한 얼굴이 포개지는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부끄럼만이라도 덜어보려고 부목사에게 추천사를 의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냥 「다시스」로 도망치듯한 한국교회 흐름마저 외면할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이 책은 매끈한 문장도 아닙니다. 설교다운 글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선교의 사명을 망각한 채 잠들어 가는 교회를 깨워보고 싶어 했던 한 목사의 절규입니다. 비록 힘없는 소리이긴 해도 최소한 설교자 한 사람만은 깨울 수 있었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1987년 새해벽두에
광주은광교회 세제실에서
조재태
목차
목차
1.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 소명, 순종
2.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 순종, 충성
3.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 헌신, 순종
4.여호와께서 대풍을 내리시매 - 인도, 순종
5.네가 어떻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 사명, 전도
6.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 회개, 순종
7.요나가 고기뱃속에 있느니라 - 하나님의 섭리, 인도
8.환란과 요나의 회개 - 연단, 구원
9.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느니라 -순종, 회복
10.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 회개, 전도
11.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인도, 순종
12.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 은혜, 감사
1.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1.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요나1:1-3)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드헤벨이란 성읍의 시민이었습니다. 그로 여로보암II세의 통치 초기의 사람인데, 당시 왕국은 분열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대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엘리야 선지에 의해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나가 쓴 요나서는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 길이 전해질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로서 1,328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는 오직 유대인들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고립주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 번째로 이방국가에 파송된 선교자였습니다. 그가 쓴 요나서에 대하여 사람들은 많은 논란을 제기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요나서에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이적사건이 많고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요나서를 비유나 우화로 격하합니다.
①요나서는 전체로서 예언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②구약에서 어떤 다른 병행귀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③갑작스런 태풍, 하루 동안에 자란 박넝쿨, 큰 물고기에 관한 사건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④회개한 니느웨 왕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⑤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니느웨성은 직경이 60마일인데, 3일만에 그 성을 다 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BC 8세기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①요나서의 서술형식(Narritive form)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②요나는 역사적 인물인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③예수께서 요나서를 인용하실 때, 요나를 역사적인 인물로 소개하였습니다(마12:39-40,눅11:29-30).
④요나서의 이적사건은 신구약 66권 어디에서나 일어난 기적들과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이적의 요소를 빼버린다면 성경은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⑤니느웨 성이 3일 길이라는 것은 3일 동안의 선교활동을 말한 것이지 3일만에 그 성을 다 돌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여간 역사적인 인물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선교사업을 한 역사적인 사건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예수님의 역사적인 인용을 무효화 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전 8세기경에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1절).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히브리 본문에는 “임하다”(hayah)는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나와 있습니다. 선지자로서 요나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나의 소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크게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해 내개 위하여 부르십니다.
둘째는, 사명을 맡겨 일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한 일군들을 불러 사명과 직분을 맡겨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몇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①이 하나님의 소명은 무조건적 입니다. 이 소명은 외적인 조건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기인합니다(롬8 :29-30).
②하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우선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먼저 입니다(요일4:19).
③하나님의 소명은 불가항력적 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칠지라도 기어코 다시 니느웨성에 데려다 놓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핍박자 사울로 하여금 전도자 바울이 되게 하신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불가항력적 입니다.
그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2).
요나를 부르신 그 음성이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의논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어떤 행동의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너는 일어나라”하였습니다.
①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요나를 세웠습니다. 요나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책임감은 강해집니다.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일어나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주어진 일은 내가 할 일이지 다른 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 그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혹 그 일이 험한 일, 궂은 일일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내가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성실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사가 궁금하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21:21-22).
예수께 부름받은 한 서기관이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청원하였을 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였습니다(마8:21-22). 따라야 할 자는 부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요나 자신입니다.
②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요나를 불렀습니다. 그는 자기 생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를 얽매고 있는 환경과 죄악과 세상의 모든 것을 떨쳐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자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마26:46).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눅5:23).
예수님께서는 죽은 젊은이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눅7:14).
무엇 때문에 “일어나라”고 하였습니까?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요나는 이 때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방 전도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에게 들려지는 음성은 언제나 “너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라고 하였습니다(사60:1).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임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임인들 막으리까.:
(2) 하나님은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나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야했습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입니다. 그곳은 큰 성읍입니다. 그 큰 성읍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이 성은 홍수 직후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성입니다. 이 도시는 BC 900년경에 벌써 세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부터 이스라엘을 침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 나훔이 예언할 당시 니느웨는 지상의 여왕과 같은 도시로 매우 강력하고 잔인하였으며, 다른 나라의 노획물로 세워졌습니다.
요나가 12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대하여 언급한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그곳 인구는 대략 100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11).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바로 이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니느웨 성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입니다(1:2).
②니느웨 성은 그 죄로 말미암아 40일 후면 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4).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였습니다.
③그리고 거기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12). “이 큰 성읍 니느웨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12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는 이 절박한 이유 때문에 일어나야 했고, 니느웨로 가야 했습니다. 니느웨성은 지금 죄로 말미암아 멸망직전에 있습니다. 그 유예기간은 불과 40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12만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요나에게는 엄청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니느웨성 100만의 영혼이 그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40일 후면 망하느냐, 아니면 회개하여 구원 받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요나의 손에 달렸습니다.
요나는 이 엄청난 사명을 받고 니느웨로 가야했습니다.
(3)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성을 항하여 쳐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성을 항하여 쳐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2).
니느웨는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피의 성이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한 성이었습니다(나훔3:1).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사 보내신 곳은 바로 멸망 직전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안전한 곳도 아니요, 쉴만한 곳도 아닙니다. 40일후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문제 많고 할 일 많은 그 곳에 보냈습니다. 그만큼 요나의 사명은 중차대한 것입니다.
그 사명은 요나 아닌 다른 이가 대신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문제 많은 곳에 일꾼으로 세움 받은 자들입니다. 힘드는 일, 골치 아픈 일, 심방하는 일, 개척교회 세우는 일 등등,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할 일은 그 성을 쳐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쳐서 외치라는 말씀은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니느웨성의 죄악을 대적하여 외치라는 것입니다. 니느웨성이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너무나 무섭고 큰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쳐서 외쳐야 했습니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중얼거려서는 안되고, 니느웨성 거리에서 외치고, 공포하고, 절규해야 했습니다.
그는 전파하고, 설득하고, 경고해야 했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을 우리는 3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①요나는 그들에게 이 큰 성읍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기적적인 방법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②그 성은 곧 무너진다는 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 성은 불과 40일 뿐입니다. 그 기간은 유예기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만 기다릴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끝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나서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빛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상황은 절대로 요나의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세의 현상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녕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한 것 같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니느웨성의 멸망은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이같은 상황에서 요나를 부르사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여러분, 우리를 부르사 명을 주신 주님께 충성합시다. 세워 주신 자리를 잘 지킵시다. 일할 수 없는 밤은 속히 올 것입니다.
2.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2.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욘1:1-3,엡5:15-17)
“어리석다”는 말은 성경에 많이 쓰여진 말은 아닙니다. 다양하게 쓰여진 모든 말을 다 합해도 겨우 75번 정도 쓰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어리석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바보스럽다”(cakal), “미련한”(pethiy), “얼간이”(mords), “무분별하다”(aphron)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어리석다고 평가받은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욥의 아내는 어리석은 여자였습니다(욥2:10). 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마7:26). 기름을 준비치 못한 다섯 처녀도 미련한 자들이었습니다(마25:1-3).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둔 부자도 어리석은 자였습니다(눅12:16-21).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항하여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갈3:1,3). 남자의 유혹에 약한 여자를 어리석다고 하였고(딤후3:6),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딛3:3). 또한,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시14:1,53: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어리석은 자들은 어두움을 헤매고 다니며(전2:14),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떠들고(잠9:13), 방자하고(잠14:16), 조급하고(잠14:29),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하고(잠29:11), 표리부동하고(눅11:39-40), 따지고 변론하기를 좋아합니다(딤후2:2 3).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를 금하고 있습니다.
① “지혜 없는 자 같이 말라”고 합니다(5:15). 지혜 없는 자는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 하나님께 속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해 아무런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일, 심지어는 해로운 일까지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서,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②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5:17). 이 말은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지혜없는 자”보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성도들은 “반성이나 이해가 없는”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감각이 무딘”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망쳐놓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세 가지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①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고 합니다(5:15). 무분별한 행동은 만용에 불과합니다. 만용이 되지 않기 위하여 정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②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행해야 합니다.
③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하였습니다(17).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의 원리요, 방향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롬12:2).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최후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여야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도 여호와의 말씀을 받고도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라고 하였습니다(욘1:1-2). 망해가는 니느웨성을 구하기 위한 선지자로서 요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적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요1:3).
우리는 요나의 이 도피행각을 한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요나의 도피행각이 왜 어리석은 짓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 회개하는 기회로 삼기를 원합니다.
(1) 요나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요나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사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욘1:1-2). 그 다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요나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고 합니다(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그러나”입니다.
아멘이 아닙니다. “예”가 아니라 “그러나”입니다. 이 짧은 접속사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요나의 불순종과 반역을 여실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의 추한 등을 돌려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어리석은 모습니다. 그가 만일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성경은 “그러나”로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진실로 오늘 우리 본문의 “그러나”는 불행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그러나”로 부터 하나님의 명령은 외면당하고 요나의 의도대로 되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록 그 죄 많은 니느웨성 일지라도 요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은 그들이 망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니느웨성의 망하는 것을 보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4:1,3,5).
둘쨰로, 이 “그러나”는 요나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그러나”의 이유를 달기 마련입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그러나”의 구실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모세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이 말씀에 대한 모세의 태도를 봅시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출4:1). 여기 보면,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은 현대의 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러나”가 너무 많습니다. 불충성의 “그러나”가 너무 많습니다. 불신앙의 “그러나”가 너무나 많습니다. 변명하는 “그러나”가 너무 많습니다. 핑계하는 “그러나”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 “그러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서 “그러나”가 청산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나”는 축복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한 밤을 수고하여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에수님은 힘없이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로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러나”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선생님이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5:5).
그 결과로 큰 축복이 임했습니다. “그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다른 배의 도움을 청하여 엄청난 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나” 대신 “아멘”을 사용하기를 기뻐할 때, 이 큰 축복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2) 요나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2) 요나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욘1:3). 그는 니느웨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다시스로 가고자한 목적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스로 간다고 한들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 과연 그러합니다.
그런데도 역사상 요나의 시도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범죄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창3:8). 시날평야의 바벨탑도 하나님의 간섭과 지배로 부터 도피의 수단이었습니다(창11:3-4). 탕자가 먼 나라에 간 것도 하나님의 속박과 제한을 벗어나겠다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눅15:11-32).
인류의 역사도 하나님의 간섭과 지배로 부터 도피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많으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보증해 주신 분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일거일동은 다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약점과 비밀을 낱낱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도피의 수단으로,
①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혹 육지에서는 가능할런지 모르나 바다에 가면 모두가 무신론을 버립니다.
② 어떤 이는 또 불가지론을 내세웁니다.
③ 현대인들이 취하는 도피의 길로 자살을 택합니다.
④ 더러는 하나님 없이 살아 보겠다고 타락의 길을 갑니다. 모두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일 뿐입니다.
(3) 요나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점입니다.
어림도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이요, 착각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형벌이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쫓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11-28).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아의 손이 녀희 열조를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12:15).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죽음을 바로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온 것입니다(롬5:12-19).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19:26).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아의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제사하다가 망한 것입니다(레10:1-2).
노아 홍수 때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 받은 자들은 다 순종치 않은 자들입니다(벧3:20).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40년이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은 불신앙 때문입니다(민14:26-39)>
사울 왕이 버림받은 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삼상15:2-3,18-19),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선고했습니다(삼상15:23).
불순종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고집 센 인간을 싫어합니다. 사람의 말도 순종치 않으면 손해가 되거든, 하나님의 말씀임에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멀리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림도 없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 가는 요나의 길을 방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큰 풍랑을 일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도피할 길은 없습니다.
3.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3.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1-12,요나1: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경 첫 절의 말씀입니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습니다. 우주는 스스로 진화하여 이룩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성경의 첫 절 말씀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이 말씀은 무신론을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다윈(Darwin)의 진화론을 배척합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저절로 생겼거나 진화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유물론을 반박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한 분이기시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범신론을 반박합니다.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론을 물리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로 부터 분리되어 계시고 독립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만물은 확실히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전12:13).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로 부터 멀리멀리 도망치려는 시도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아담으로 부터 시작된 도피의 행각은(창3:8) 재림의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피의 수단으로 무신론을 내세웠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불가지론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살함으로써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을 해결 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방종의 길이요, 타락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본문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시55:8-9). 우리는 인간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간을 생각합니다.
그런즉 “내가 주이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한 다윗의 고백은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합니다.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십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요나의 의도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여호아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려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입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인류의 조상이요, 낙원의 축복을 받은 자였으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습니다(창3:10).
둘째는 요나입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니느웨 선교의 사명을 받고서도 어디론지 도망하여 숨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우리의 의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도 하나님께 범죄하고 어디론지 숨을 구멍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귀한 직분과 사명을 받고서도 내팽개쳐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기름진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순종입니다(삼상15:22).
범죄와 반역은 나쁜 의도의 발전에서 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번죄 행위는 악한 의도와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마7:16-20), 악한 마음에서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마15:18-19).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와는 이미 그의 마음을 선악과에게 빼앗기고 있었습니다(창3:6). 가인의 마음속에는 이미 아벨에 대한 복수로 가득차 있었습니다(창4:7). 그런즉, 그의 생각은 그의 실존의 진상입니다. 실존을 지배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생각함으로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골3:1).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그 율법을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시1:2 ).
악한 것은 생각하지 말고 선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하였습니다(롬8:6). 그런고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롬8:7). 우리는 이런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살전5:22).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일어났습니다. 요나가 일어난 것은 그의 의도대로 행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로 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과 반대로 방향으로 나가기 위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가 아니고, 요나의 뜻대로 인 것입니다. 그의 출발점과 목적지는 완전히 바뀌어졌고, 그의 행함의 알파와 오메가는 전도 되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고자한 목적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온 것은 도피를 강조한 말이고 이는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아의 면전을 떠난다 함은,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영역과 간섭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음부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바다 끝에도 계십니다. 이 세상에 여호아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 앞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전 의식(神前意識-Coram Deo)이라고 합니다. 이 신전의식은 성경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 누구와 함께 있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도피입니다.
요셉은 진실로 신전의식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창39:9).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몸은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멀리멀리 떠나버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름은 성도요 더러는 크고 작은 직분을 받고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먼 나라로 도망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연락의 다시스로 찾아갑니다. 이기주의의 나라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혼자만 평안해 보겠다고 숨어버립니다. 모르는 척하고 외면합니다.
될대로 되라고 합니다. 자기만족과 고집을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다시스의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라고 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버리고 도망가는 길, 떨어지는 길, 죽는 길입니다.
삼손도 딤나로 내려가서 이방 여자를 보았습니다(삿14:1). 가사로 내려가서 한 기생을 만났습니다(삿16:1). 소렉 골짜기로 내려가서 드릴라를 만났습니다(삿16:4). 삼손은 내려가고 또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큰일날뻔 하였습니다(창12:10-19 ).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에 내려갔다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룻1:1-6).
요나도 내려갔습니다.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배를 타려고 내려갔습니다. 배 밑창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다 밑으로 내려갔습니다(1:15). 나중에는 큰 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습니다(1:17). 마침내 스올에 까지 내려갔습니다(2:2). 내려가는 길은, 타락의 길입니다. 그 길은 곧 멸망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지옥에까지 떨어지는 길입니다. 요나는 생각하기를 도망치는 길이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런지 모릅니다만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올라가고 있습니까? 내려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숨어사는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사명 수행의 길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도피의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순조로움이 있는 것을 봅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순조로움이 있는 것을 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1:3). 요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쫓기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가야 합니다. 어딘지 마음은 편치 못합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욥바까지 왔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입니다. 요나의 도피행각은 순조롭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될 정도였습니다. 모든 일은 평안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때 요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손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일이 이렇게 순조로운 것을 보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가보다”라고 착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착각이 자유라 해도, 이같은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가끔 장애물이 없다고 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정당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당한 방법의 장사가 잘 된다고 하여 그것이 축복일 수는 없습니다. 주일에 문을 열어 사업을 함으로 돈을 번다고 하여 그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악인도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판 가롯 유다의 흥정도 순조로왔습니다. 종들이 말을 타고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걸어 다녀야 할 때가 있습니다(전10:7).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악한 자가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진 기업가가 재벌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군 장성이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축복도 아니며 하나님께 열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결과만을 가지고 모든 숨은 과정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한송이 꽃을 보았다고 하여 지금이 여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추수 때는 10월이 아닌 것처럼, 이시적인 어떤 현상이 전체를 잘못 판정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죄의 길에 있는 형통함은 축복이 아닙니다. 어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숨어서도 잘 살아왔다고 안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산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더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의도했습니다. 그의 이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생각이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버려야 할 생각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그 도망하는 길이 일시적으로 순조로왔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길은 망하는 길이요, 죽는 길이요, 지옥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피하는 것만큼 손해입니다. 피하려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니느웨길이 힘들고 싫을지라도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내리시매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내리시매
(시104:1-12,요나1:3-4)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 다윗의 고백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멀리 멀리 도망하려 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욘1:3). 하나님은 숨은 사람을 찾아내십니다(창3:9).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렘23:24). 은밀한 곳도 결국은 발각됩니다(민32: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26).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의 도피행각은 어리석은 시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니느웨성의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왜 요나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겠습니까? 요나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도피의 행각을 시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니느웨성 사람들을 두려워 한 때문일 것입니다. 니느웨성은 크고 강한 성입니다. 그 백성들은 포악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는 일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릅니다.
둘째는, 멀고 위험하고 알지도 못하는 초행 길에 쉽게 뛰어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요나의 적개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혈육의 소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들려오는 소명의 음성을 가리운 것입니다.
넷째는, 유대인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의식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기네들만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일찍부터 앗수르는 유대인의 원수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하여 금수처럼 생각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과 동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니느웨 성민들이 신적 계시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이방인들 중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으로 부터 다른 민족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요나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일입니다(욘4:2).
하여간 요나에게는 니느웨로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욥바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항구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모든 것은 순조로왔습니다. 비록 도망가는 길이기는 하여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스행 선표를 샀습니다. 그는 아무 일 없이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비용도 두둑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정말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어 그는 안심이 되었고, 풍세도 좋아 그의 도피행각은 성공한 듯 싶었습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맙시다. 죄의 길도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잠21:4). 악인의 길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렘12:1). 장애물이 없다하여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길에서도 순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수 때는 10월이 아닌 것처럼 다시스의 순풍을 부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요나는 뱃장 좋게도 잠을 잤습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피곤해서였는지 혹은 용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잠은 단잠이 아니었습니다(렘31:26).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새 일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잔잔하던 바다에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대풍(大風)을 바다위에”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다시스행 배가 욥바 항을 떠나기까지는 잔잔하던 바다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대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우연한 바람이 아닙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고간(庫間)에서 나온 것입니다(시135 :7). 바람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잠30:4). 그는 바람을 자기 주먹에 쥐고 계시다가 원하실 때면 아무데나 불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람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합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명령따라 움직입니다(시3 0:30,렘23:19).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욘1:4).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바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기록이 116번이나 있습니다.
1915년 4월 22일 오후 4시. “이-퍼레”에 주둔한 독일군이 사상 최초로 무방비 상태의 연합군을 향하여 독가스를 사용한 날입니다. 워낙 뜻밖의 일인데다 무방비 상태의 연합군은 그냥 그 앞에서 허무하게 쓰러질 운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시체더미를 넘고 넘어 영국 해협만 점령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세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실패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독일 정부의 기상 측후성은 “앞으로 36시간 동안은 풍향이 일정할 것이다”라는 군부에 알려왔습니다. 군부는 독가스 살포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각 일선지구 사령관들에게 통고하였습니다.
독가스는 지체없이 연합군을 향하여 퍼부어졌습니다.
연합군은 곧 쓰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별안간 풍향은 뒤바뀌어 살포된 독가스는 독일군 쪽으로 날아왔습니다. 숨통이 막히고, 눈이 돌아가고, 비틀거리면서 도리어 독일군 수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의 계획은 무참히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뉴마우스 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40년 이래 독일정부의 기상 일보를 들쳐보아도 풍향이 이처럼 괴상망측하게 바꾸어진 일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더욱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일부 지역에서만, 그와 같은 역풍이 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하나님께서는 그 바람으로 대풍(great wind)되게 하셨고, 폭풍(mighty tempest)되게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바다의 폭풍으로 영광 받으신 것을 219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탄 배 앞에 대풍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 때문입니다. 그것은 숨어 잠자고 있는 요나를 찾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요 방편이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를 색출해 내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 발동이었습니다. 요나가 풍랑을 만난 것은 그의 죄 때문입니다.
죄인은 이 세상에 숨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이 죄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풍랑이 동원된 것뿐입니다. 죄인 요나를 찾아내기까지 대풍은 계속되었습니다. 풍랑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 있는 곳에 풍랑이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의미의 많은 풍랑을 볼 수 있습니다.
부도덕한 남편들 때문에 많은 가정에 탄식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부정직한 정치가들 때문에 불신 풍조의 파고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방종하는 청소년들 때문에 죄의 오염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욕에 사로잡힌 아내들 때문에 가정이 파탄에 직면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도 큰 풍랑이 대작하였고, 악이 관영한 노아 때의 홍수 심판의 물결이 드높았으며, 범죄한 가정에 풍파가 일고, 범죄한 사회가 흉융하고 뒤숭숭합니다.
죄인이 있는 곳에 대풍이 임하고, 요나가 숨어 있는 곳에 폭풍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찾기 이하여 대풍을 내렸고, 요나를 찾아내기 위하여 폭풍을 대작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폭풍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면서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삼으십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내리신 것입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도망치는 요나를 찾아내기 위하여 바람을 쓰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큰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도망자 요나의 길을 막으셨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도망자 요나의 길을 막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순탄한 뱃길에 대풍을 내려 요나 앞에 장애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요나의 도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도망치고자 발버둥쳤으나,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생들을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깊숙이 숨긴 은금을 찾아내셨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은밀한 계획을 감지하셨고, 감쪽같은 다윗의 완전범죄를 들통나게 하셨고, 유다의 은밀한 일을 백주에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은 바로 하나님의 장중인 것입니다. 그런즉, 도피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드는 것이 더욱 좋은 일입니다.
(2)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2)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죄인은 요나 한 사람뿐인데, 죄 값은 여러 사람이 치르고 있습니다. 풍랑은 요나 때문에 임한 것인데, 배에 탄 모든 사람이 꼭 같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 때문에 사망이 찾아온 것입니다(롬5:12,17).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역사가 달라집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풍랑의 원인자는 되지 맙시다.
(3) 요나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3) 요나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2:24). 죄는 사람들이 범하고 욕은 예수님이 받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패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크리스챤입니다. 요나 때문에 하나님께 욕이 돌아갔습니다.
(4) 이 세상 그 어디에고 죄인이 숨을 곳은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4) 이 세상 그 어디에고 죄인이 숨을 곳은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허물도 못 본체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자복없이 간과되는 죄는 없습니다. 에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해 주십니다(요1:9).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할 때”에 한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마10:26).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쫓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5).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름받은 자리에 서 있으면서 도망치지 맙시다. 왜냐하면 대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으면 충성합시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광풍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광풍이 찾아옵니까? 죄 때문입니다. 회개합시다. 하나님의 장중에 아무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죄짓고 숨어 살 곳은 없습니다. 그런즉, 요나의 다시스행은 망하는 길입니다. 탕자의 먼 나라도 망하는 길입니다. 돌아서서 니느웨로 갑시다. 하나님께서 그 곳에 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5. 네가 어떻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5. 네가 어떻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요나1:4-10)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말할 때 7대 기적을 말합니다.
첫째는 그 형성의 기적입니다.
둘째는 그 통일성의 기적입니다.
셋째는 그 연대의 기적을 말합니다.
넷째는 그 판매고의 기적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그 흥미의 기적을 말합니다.
여섯째는 그 언어의 기적을 말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대부분의 저자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최고의 걸작들이라는 점입니다. 또 지구상에는 현재 160여개의 국가가 있으나, 성경은 무려 1,739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82년 현재). 이는 세계인구의 97%가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보존의 기적을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책들 중에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찢기고, 압수당하고, 불태워졌으나, 지금 온 세상에 반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35). 사단은 성경을 없애려고 갖은 모략을 다 하였으나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 중에는 사단으로 부터 특히 미움을 받는 세 개의 책이 있습니다. 그 세 책은 창세기, 다니엘, 요나서 입니다. 창세기는,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서 성육신 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15). 다니엘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하여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단7:9-12). 요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욘2장,마12:38-41). 요나서는 이렇게 중요한 성경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라는 점에 있어서도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니느웨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나에게 “너는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1:1-2).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하였습니다(1:3). 그는 어리석게도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도망치지 않으면 안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① 그는 겁쟁이인 것 같습니다.
② 이방인들의 멸망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③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설마 40일 후면 멸망시키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④ 자신처럼 약하고 무능한 자가 “어떻게 이렇게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 혹 반발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변명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같은 구차한 변명으로 영혼 구원을 등한히 하는 교우는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죄를 못본체 묵과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죄를 징계하기 위하여 대풍을 보내시매 “폭풍이 대작”하였습니다(1:4). 바람은 임의로 불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늘 고간에 예비된 것이며(시135:7)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잠30:4).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필요한 때 자기의 사자로 사용하여 풍랑이 되게 하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을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영혼에 대풍을 일으키며,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폭풍을 몰고 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죄는 요란하게 합니다. 죄는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죄는 불신을 조장합니다. 죄는 슬픔을 몰고 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죄 때문에 우는 자가 얼마입니까? 죄 때문에 망하는 자가 얼마입니까? 죄 때문에 죽는 자가 얼마입니까?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얼마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살전5:22).
갑자기 불어닥친 대풍으로 배 안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순탄하던 항해길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행여나 범죄하면서도 별일 없다고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도 아무 일 없다고 방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값은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풍랑을 면해 보려는 사공들의 필사적인 시도를 보게 됩니다.
(1) 풍랑을 면해 보려는 사공들의 필사적인 시도를 보게 됩니다.
풍랑을 만난 사공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①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신을 불렀습니다(1:5). 죽음앞에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임사호천(臨死乎天)은 만인의 경험입니다.
②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물건을 다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1:5). 바울이 탔던 배도 유라굴로의 광풍을 만났을 때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행27:18-19,38).
목숨을 위하여서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생에 대한 애착이란 이렇게도 강열한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제 생명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마16:26).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재물 때문에, 생명의 주님을 찾는 일을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눈을 돌려 이같은 위기의 때에 숨어 잠자는 요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선장에게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자는 자여, 어쩜이뇨?” 그러나 그가 만일 선지자로서 자기 위치만 제대로 지켰다면 지금쯤 니느웨의 왕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기의 의무의 길을 벗아났기 때문에, 일개 이방인 선장에게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사람을 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얼마나 천해졌습니까? 유다가 범죄했을 때, 얼마나 천해졌습니까? 여러분, 죄 짓지 맙시다. 범죄하면 우리도 천해 집니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죄인을 찾아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죄인을 찾아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사공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풍랑은 멎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흉융해 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풍랑의 원인이 다른데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던진 물건보다 더 무거운 것이 그 배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무거운 짐이라고 하였읍니다(마11:28). 요나의 죄값은 그 배 전체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공들은 부득불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①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1:7).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제비는 사람을 뽑으나 그 작정은 여호와께 있습니다(잠6:33). 죄는 주인을 알기 때문에 잘 찾아 냅니다(민32:23).
② 사공들은 요나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1:8).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을 장님으로 오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을 받지”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갈6:7).
기고만장한 하만 앞에 모르드개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전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하여 하만은 50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자기가 달릴 줄은 꿈에 몰랐습니다(에3:1-6,7:1-10).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략하였을 때, 아간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에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덩이 50세겔을 탐 낸 나머지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장막 땅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그것을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요나처럼 죄인으로 제비 뽑혀 죄가 탄로났을 뿐 아니라, 돌무덤 속에 묻혀 죽었습니다.
이름하여 아골 골짜기입니다(수7:1-26).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죄인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솜씨는 조금도 실수가 없으십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자백을 보게 됩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자백을 보게 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1:9-10).
그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란 말의 어근은 eber입니다. “건너편” “반대편”이란 뜻입니다. 강을 건너온 자란 의미라고 합니다.
그는 세상과 구별된 자입니다. 그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또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것은 큰 죄인임을 자백한 것입니다.
요나도 이 엄청난 재앙이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한 죄 때문에 임한 것이라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사는 길은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숨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고 자백하는 길 외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하였습니다(요1: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잠28:13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시32:5).
요나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규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죄를 자백할 줄 알았습니다.
(4)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를 향한 사공들의 책망을 보게 됩니다.
(4)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를 향한 사공들의 책망을 보게 됩니다.
사공들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1:10).
“하나님 경외한다는 자가 그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천부당만부당한 줄은 정말로 몰랐더냐”는 책임추궁입니다. “니느웨 성민을 구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명을 버리다니.... 도대체 정신이 돈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행했느냐”는 말입니다.
“죄는 네가 짓고, 우리로 하여금 이 고생을 하게 하다니...”라는 탄식입니다.
범죄하면 책망받습니다. 아브르함이 죄짓고 책망 받았습니다(창20:9). 베드로도 범죄하고 책망받았습니다(마16:23). 요나도 사명을 버리고 도망치다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욘1:10). 그는 구약에 있어서 최초로 이방 전도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도 되려 책망을 받았습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요나는 전도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수치스럽게 이방인에게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 말이 비록 선장의 말일지라도,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의 가슴을 치는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선교의 사명을 망각한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다시스 도피행각을 제지시켰습니다.
무서운 풍랑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는 꼼짝없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수치스럽게도 이방인 사공들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명을 버리면 풍랑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풍랑을 만납니다. 범죄하면 풍랑을 당합니다. 사명을 저버리면 풍랑을 만납니다. 전도하지 않고 도망치면 풍랑이 찾아옵니다. 풍랑만나 야속타 하지 말고, 그때 그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여호아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하였습니다(렘48:10). 그러나 감사하게도 풍랑을 인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첫째는 풍랑으로 인하여 요나가 회개한 사실입니다.
둘째는 풍랑 때문에 배를 탔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풍랑 때문에 요나와 선원들과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6.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6.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나1:11-16)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12소선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 니느웨를 구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큰 성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욘3:4).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1:3). 그는 욥바항에서 쉽게 다시스행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얼마 못가서 큰 풍랑을 만나 배는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폭풍은 여전히 대작하였습니다(1:4).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이 무서운 풍랑은 요나 때문에 온 재앙이었습니다(1:7).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바다가 점점 더 흉흉”해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1:11). 위험을 직감한 무리가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요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1:12).
그러나 선원들은 차마 그를 바다에 던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풍랑을 면할 수 있을까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시도한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하였습니다(13). 그러나 풍랑은 더욱 심하여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온 무리가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그를 바다에 던진다 할지라도 그의 죽음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마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그들은 마지막으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15). 정말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매, 그렇게도 요란스럽던 풍랑이 그쳤습니다. “바다에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5).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① 그 풍랑은 전적으로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②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갑자기 나타났고 선원들은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이한 현상을 보면서 엄위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며, 회개의 위력을 배우게 됩니다.
문제 많고 풍랑 많은 세상에서 그 풍랑을 잔잔케 하는 방법은 오로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값진 교훈을 터득하게 해줍니다.
(1)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의 경우입니다. 그는 니느웨성을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예배된 하나님의 선지자 입니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욥바에서 다시스행 배를 탔습니다. 그는 그 배 밑에 내려가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내렸습니다. 뱃사람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더러는 자기의 신들에게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그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규명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1:18). 요나는 사공들로 부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는 추궁을 받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12).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멀리멀리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우주는 그 어디나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십니다. 아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편재(篇在)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의 전 존재와 함께 공간의 모든 부분에 충만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혹은 무변성(無變性)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체적 의미에 있어서 편재를 말하는 범신론은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어디에나 계시는 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더더욱 죄인이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초의 죄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으나,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계셨습니다(창3:8-10). 시날 평아에 쌓아 올렸던 바벨탑은 하나님 도피의 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높은 탑을 쌓을 수는 없었습니다(창11:4-8).
아간은 아무도 모르게 전리품을 감추었으나, 하나님은 백주에 광포하고 계십니다(수7:11-15).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지모(智謀)가 아무리 뛰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행5:3). 왜냐하면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민32:23).
그런즉 하나님으로 부터 도피행각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선지자를 대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 부터 부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니느웨 성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요나는 그 사명을 하나님께로 부터 받았을 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결국 니느웨 성의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이와 같은 자신의 처신에 대하여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어떤 명분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 성민들의 포학성을 두려워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험을 경계했을 것도 같습니다.
혹은 대대로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 성민에 대한 적개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선민에 대한 자존심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일런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그는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멀리멀리 도망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도피행각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이 재앙의 원인이 되는 자를 색출하는 제비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더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선원들 앞에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9-10). 선원들은 두려워하면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안타까와 하였습니다(1:10). 그러나 산더미 같은 풍랑은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풍랑의 원인자인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1:1). 요나는 이제 더 이상 속일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도피행각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1 :12).
이는 요나의 자기 책임을 통감하는 말입니다. 책임을 이행치 못한 자의 수치스런 고백입니다. 죽음으로서 자기 책임을 지겠다는 슬픈 고백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것을 윈치 않았습니다. 도망자 요나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무고한 선원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기야 자기 책임을 회피한다 하여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롬14:10-12).
사람들은 잠시 도망칠 수는 있을런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은 회피할 수 없습니다. 개인이 져야할 책임이 있습니다(삼하12:1-15). 가족이 져야할 책임이 있습니다(수7:1-26). 민족이 져야할 책임이 있습니다(삼하24:1-17).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려 합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전가시켰습니다(창3:12). 아론은 자기의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렸습니다(출32:22-24). 빌라도는 예수님께 대한 정죄의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마27:24). 이것이 큰 잘못입니다.
한 때 요나는 도망자이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책임을 질 줄 알았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세요. 그것은 내가져야 할 책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업적에 대한 선전은 요란해도 실정에 대한 책임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한말 한일합방으로 조국이 일본의 속국이 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의 총독부에 아부하여 살 길을 찾거나, 이완용을 매국노라 하여 이를 갈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 선생만은 조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먹히게 된 것은 우리 한국민의 죄 값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조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이완용만은 아니야.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어. 우리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양반계급에 돌리고 조상에서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정치가에게 돌린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힘 있는 자였을 때 어찌 일본이 덤비며 이완용이가 어찌 매국문서에 도장을 함부로 찍겠는가? 그런즉 망국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나와 여러분에게 있다”면서 광복의 꿈을 불태웠다고 하였습니다.
뱁새는 작아도 알을 잘 낳는다고 합니다. 넙치는 작은 눈으로도 볼 것은 다 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에 대해 책임 있는 자이길 바랍니다.
(2)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모든 풍랑을 잔잔케 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2)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모든 풍랑을 잔잔케 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칠 줄 모르는 풍랑을 바라보면서 사공들은 요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요나는 대답하기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카일.델리취는 이 말씀에 대하여,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패역의 댓가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과 태풍에서 스스로 나타난 바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요나는 이제 회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범죄자로서 죽음을 자진하여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다에 던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 만난 사람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고 하였습니다(1:15).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한없는 영적교훈이 됩니다. 죄인이 있는 곳에는 풍랑이 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죄인 요나가 있는 곳에는 평안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는 곳은 평안이 없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을 때, 그 가정은 온통 비극의 풍랑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창27:34-45).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을 때 환란의 바람은 휘몰아쳐 왔습니다(룻1:3-5,20-21). 탕자가 아버지의 슬하를 떠났을 때,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눅15:11-17). 삼손이 가사로 내려갔을 때, 그는 무력해 졌습니다(삿16:1-20). 죄인 아간이 이스라엘 중에 숨어 있는 동안 그들은 아이성을 점령할 수가 없었습니다(수7:1-26). 그들은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재앙은 죄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잠13:21). 죄의 보응은 필연적입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이나 죄인이리요”라고 하였습니다(잠11:31).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작고 큰 풍랑을 많이 만납니다.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불순종 때문입니다(대하7:19-22). 요나의 경우가 그러하고, 사울 왕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때문입니다(대하36:16-17).
셋째는 우상숭배 때문입니다(렘7:30-34).
넷째는 죄 때문입니다(대하21:1-17).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신30:1-3).
둘째는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왕하19:1 4-36). 여호사밧 왕처럼 기도해야 합니다(대하20:5-30).
셋째는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렘7:3-7).
넷째는 심판의 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간이 숨어있는 한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수7:20-21). 다시스행의 배에 요나가 숨어있는 한 풍랑이 잔잔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1:15).
성도 여러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까? 아직도 회개할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까? 숨은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까? 회개해야 평안과 기쁨이 옵니다.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국가의 문제, 모든 문제는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증거 없이는 진정한 평안은 맛볼 수 없습니다. 회개만이 천상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인이 도망하여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도 선지자처럼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풍랑을 만남은 나의 연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회개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욥처럼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자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욥42:6). 우리는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고전15:31). 또한 삭개오 같은 과거의 청산이 있어야 합니다(눅19:8).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리라”는 축복에 동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죄의 불감증 때문에 풍랑 중에서 망하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아멘.
7. 요나가 고기뱃속에 있느니라
7. 요나가 고기뱃속에 있느니라
(요나1:17,2:10)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부르사 선지자를 삼으시고,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1:1-2).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부질없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요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그가 니느웨성 사람들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둘째는 니느웨성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요나의 앗수르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 때문입니다. 그는 극단적 민족주의 자였습니다. 아마도 이 마지막 이유가 논리에 맞는 대답처럼 여겨집니다.
역사상 당시는 앗수르가 일어나고, 많은 나라들이 그 앞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앗수르의 피로 물든 말발굽이 언제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다만 시간 문제였습니다. 앗수르의 잔인함을 고대역사에 유별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무수한 사람의 머리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산채로 각을 뜨거나 눈을 빼고 코를 상하게 하거나 여자와 아이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함락된 도시는 약탈당하거나 초토화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잔인하고 무서운 원수 나라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민의 자존심이 이방인 구원의 명령을 선뜻 순종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요나는 목을 곧게 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시스행의 배를 탄 것입니다.
요나의 이와같은 불순종을 아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불순종을 꺾기 위하여 그의 손을 드셨습니다(1:4-12). 하나님은 태풍을 보내사 바다에 큰 파도가 일게 하였습니다. 놀란 뱃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짐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왔는가를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제비는 기이하게도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은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33). 결국 요나는 자기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했으며 지금 만난 풍랑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한 잘못 때문이라고 고백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고 말했습니다(1:12). 뱃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1:13-17). 그러자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쳤습니다(1:15). 그러나 요나는 넓고 깊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제 요나의 생명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바다와 물고기와 이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먼저 요나가 던져진 바다에 대하여 생각합시다.
(1) 우리는 먼저 요나가 던져진 바다에 대하여 생각합시다.
이 바다는 “큰 바다”(Great Sea)로 불리우는 지중해 입니다( 민34:6,수1:4,겔47:10). 사람들은 이 바다를 서해라고도 부릅니다(신11:24,34:2,욜2:20). 구약에서는 그냥 바다라 통하기도 합니다(수16:8,왕상5:9,18:43,욘1:4).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이 바다 위에 풍덩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요. 요나는 지금 해수욕을 즐기기 위하여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때가 때인 만큼 어떤 이는 푸른 물결 파도치는 시원한 해수욕장을 연상할런지 모릅니다. 인어 떼가 우굴거리는 낭만적인 백사장을 연상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한 토막 추억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여름입니다. 그때 숙부님 밑에서 일을 도와 드리고 있었는데 돈을 두둑히 주시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엘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그래 반쯤은 들뜬 기분으로 그 곳에 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간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생각지도 않은 해수욕을 즐기게 되었으니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역사적인 사건일법 하였습니다. 가기는 갔으나 해수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까운 시간 다 보내버리고 바다 물 한번 몸에 바르지 못하고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부터 24년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가슴 두근거리던 해수욕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보수적이던 그녀가 요즈음에는 행여나 어디한번 안 가나하고 기다리는 것 같은 눈치가 보입니다. 그래서 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참으로 세상도 많이 변했구나”
제가 오늘 말씀들일 바다는 이같은 낭만이나 추억이 깃든 바다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무시무시한 바다 이야기입니다 풍랑이 인 바다입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 앞에 뱃사람들도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요나를 삼키기까지는 잔잔할 수 없는 그런 바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바다는 죄인 요나를 찾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요나가 거기에 던져졌을 때 바다는 금방 잔잔해졌습니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바된 바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하기도 합니다(욥26:12). “주께서는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도”하십니다(시89:9).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십니다(시107:25). 또한 주께서 명하시면 잔잔해 지기도 합니다(마8:24-27). 이렇게 “바다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시107:24).
인간은 이 바다에 비하여 창해일속에 불과합니다. 밀려오는 산더미같은 파도 앞에 무력한 자일 뿐입니다. 바다는 제 마음대로 출렁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파도칩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양 격언에 “참호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에만 가면 무신론자는 없어집니다. 육지에서는 큰 소리친 자도 바다에 가면 겸손해 집니다.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바루네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신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여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다가 바다 한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가 탄 배는 파선 직전에 있었습니다. 사방은 만경창파요, 무변대해였습니다.
그는 “이제는 별 수 없이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행이 바람은 자고 물결은 잔잔케 되었습니다. 그는 용하게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루네씨의 무신론은 육지에서는 훌륭하나 바다에 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바다는 하나님을 찾는 훈련소입니다. 신앙의 학교요 하나님을 보게하는 곳입니다. 만일 요나가 이 바다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다에서 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다는 하나님께로 데려다 준 안내자였습니다.
(2)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에 대하여 생각합시다.
(2)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에 대하여 생각합시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1:17).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그는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물고기에게 삼켰다고 하였습니다.
1) 이 큰 물고기는 어떤 고기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큰 물고기에 대하여 “고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큰 물고기”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마12:40). 카일 델리취는 고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지중해에는 고래가 지극히 희귀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고래는 사람을 삼키키에는 목구멍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대한 상어나 바다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① 더욱 이것들은 지중해에 매우 흔하고, ② 사람을 통채로 삼킬 수 있는 큰 목구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를 에비하셨다”는 점에 유의합니다. 그 물고기가 이미 있는 어떤 물고기였든지, 아니면 특별히 기적적으로 만드셨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보존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셨다면, 그 물고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2) 이 큰 물고기가 사람을 삼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셨다면 고래든 상어든 무슨 물고기든 간에 쓰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잡은 큰 상어의 뱃속에서 여자의 시체가 통채로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735년과 1771년에도 고래에게 삼키웠다가 곧 바로 약간의 상처만 입고 토해져 나온 두개의 사건이 있었다고 프린스톤 신학 평론지는 보고하였습니다.
1891년 2월 포경선 “샛별호”는 포클랜드 제도 근방에 있었는데 망을 보던 선원의 눈에 큰 고래가 발견되었습니다. 곧 두 척의 작은 보투가 바다에 뛰워졌고 오래지 않아서 작살 중의 하나가 목표물에 꽃혔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배가 고래의 꼬리에 맞아 보트는 뒤집혔고, 거기 타고 있던 선원 중 한사람은 익사하였고, 한사람은 실종되었습니다.
고래를 잡은 선원들은, 온종일 그 고래를 붙잡고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고래의 위장부분에 이상한 물체가 있어서 확인하여 보니 실종되었던 제임스 바틀린 선원이 의식을 잃은 채 등을 꾸부리고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바틀리를 갑판 위로 끌어내 눕히고 바닷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는 곧 회생되었고 3주가 지난 뒤 완전히 회복되어 전처럼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틀리는 자기가 정신을 잃은 것은 공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겁에 질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유사한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에서 성경의 신빙성을 증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을 줄 뿐입니다. 더더욱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기적에 있어서 불가능은 없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 기적적인 사건의 의의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합시다.
(3) 마지막으로 이 기적적인 사건의 의의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합시다.
오늘 우리 본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물고기는 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그 큰 물고기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요나는 사공들에게 던짐 받은 후, 그 물고기에게 삼켜 그 뱃속에서 3일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④ 그는 고기 뱃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회개하였습니다(2:1-9). ⑤ 큰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요나를 삼켰다가 다시 바닷가로 토해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적인 사건에 대하여 실지로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러는 신화로 취급하기도 하고 더러는 비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도 아니고 우화도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열왕기하는 요나를 역사적인 인물로 언급합니다(왕하14:25). 그의 고향과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나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12:38-41 ).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실로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이나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한번 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람은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금방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나는 이 사실을 기적이라고 밝히면서, 그 물고기는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나, 하나님께 마저 그러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넉넉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요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심판 중에서도 자비롭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고기밥이 되게 하기 위하여 바다에 던지도록 한 것이 아니라 경성케 하기 위하여 던지도록 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복수의 손 안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서 깨닫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식보다 못한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 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피조물을 쓰실 뿐 아니라 또한 간섭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도망자 요나를 찾아내게 하는데 제비를 이용케 하셨고(1:17), 또 풍랑을 일게 하였습니다(1:14,11). 하나님은 또한 물고기를 바다 밑에 대기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1:7). 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많은 피조물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심하게 간섭하였습니다.
요나는 비록 죽어 마땅한 존재였지만, 그를 죽도록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요나가 멸망당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큰 물고기는 요나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것 뿐입니다.
셋째로 이 이적은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어 성공적인 선지자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나는 이 경험을 통하여 완전히 새로와졌습니다. 그는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실패에서 성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요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임을 배우게 됩니다.
요나의 삼일 장사는 그리스도 장사의 예표였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무덤을 준비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묘지로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의 무덤이 새롭고 이상한 무덤이듯이 그리스도의 무덤도 그러합니다.
요나가 삼일 삼야를 거기 꼼짝 않고 있었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였습니다. 요나가 다시 세상에 토해 냄 받듯, 예수도 무덤이 토해내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일어나 이방선교의 사명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그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바다는 요나를 일깨우는 훈련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일깨우는데 물고기를 동원하였습니다. 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배부를 때 잊어버린 하나님을 배고플 때 기억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사명을 망각했던 도망자 요나는 새 일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8. 환란과 요나의 회개
8. 환란과 요나의 회개
(요나서2:1-9)
우리가 요나서를 읽노라면 무서운 풍랑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진게 된지라”(4). 이 무서운 풍랑의 원인은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1:3,12,1 5).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치려 한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1:14). 선원들은 풍랑의 원인을 가려내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고 과연 요나가 당첨되었습니다.
바다는 점점 더 흉용해지기 시작하였고 요나는 급기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풍랑은 잔잔하여졌습니다만,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삼키운 바 되었습니다(1:17).
요나서에서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니느웨 같은 큰 이방 성읍이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 전도자에게 의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적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 중에서도 유명하고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큰 물고기에서 삼키운 요나는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것입니다. 죄인을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의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칠 방법도 없을 뿐 아니라, 숨을 장소도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시139:1-12).
그러므로 오늘 우리 본문의 주인공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여기 큰 물고기는 그림자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부수적인 것은 고기 외에도 바다, 풍랑, 배, 니느웨 등입니다. 그러면 필수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요나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이는 맥기 박사(J.Vermom MeGee)의 견해입니다.
사실로 오늘 우리 본문의 내용은 인간 요나가 어떻게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요나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9). 이러한 믿음이 요나에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는 어렵고도 험한 환란을 통하여 배운 결론입니다. 요나는 그가 맛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자신을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 때문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다”고 하였습니다(2:2)>
여기 고난으로 번역된 말은 “짜라(tsarah)”인데 고난으로 번역된 말보다 환란으로 번역된 곳이 훨씬 많습니다(창35:3,시9: 9,50:15,단12:1). 느슨한 것을 잡아당긴다는 의미에서 온 말인데, 고통, 역경, 비탄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금슬금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앞에 무서운 환난들이 가로막았습니다. 무서운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가 탄 배는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재앙의 원인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책임추궁을 당했습니다.
바다에 던짐 받았습니다. 급기야는 고기 뱃속에 삼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별 수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재는 넘을수록 험하고 내는 건널수록 깊습니다. 가자니 태산(泰山)이요, 돌아서자니 숭산(崇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의 길이 고난의 흙과 환란의 돌멩이들로 깔려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뒤에는 시내가 있습니다. 걷기 좋은 평탄한 길만이 아니라 돌작밭 길이 있습니다. 먼 항해에 순풍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풍랑은 항해자의 벗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가는 길은 길기도 하지만, 어둡고 좁은 길이기도 합니다.
[돈키호테]로 유명한 [세르반테스]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24세 때 전쟁에 참가하여 왼쪽 팔에 상처를 입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28세 때는 말레이의 포로가 되어 5년간 고생했습니다. 그 동안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8세 때 몇 편의 작품을 썼으나 신통치 않았습니다. 세금 징수원이 되어 수금하러 다니다가 영수증을 잘못 발행하여 철창 신세가 되었습니다. 1605년 옥중에서 [돈키호테]의 전편을 썼으나 그때 나이 벌써 58세였습니다. 인생의 한 평생은 어쩌면 고난 속에서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환란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환란보다 더 좋은 교육장은 세상에 달리 없습니다. 온실 속의 교육은 사람을 해이하게 하나, 광야는 사람을 경성하게 합니다. 사람은 행복의 교실에서 보다 불행이 교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간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0).
그러나 우리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에 선뜻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폭풍우는 목적지로 향하는 배를 항구로 되돌아서게 합니다. 큰 물고기는 요나를 덮쳤습니다. 요나는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환란은 요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축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롬8:28). 하나님의 은혜 입은 성도들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이 진리는 요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환란을 통하여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축복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요나는 고난을 통하여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몇 가지 생각하고자합니다.
(1) 요나는 환란 중에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 요나는 환란 중에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2:1). 그는 평안할 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욥바]항으로 내려갔을 때 “마침”거기에 다시스행 배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왔습니다. 그는 잔잔한 항해의 갑판위에서 콧노래를 불렀을 법합니다.
그러다가 피곤하여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랑 속에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졌을 때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격언에 “전쟁에 나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라. 그러나 바다에 나갈 때엔 두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해는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루네]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심장도 풍랑중에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바루네의 무신론도 바다에 가면 소용 없다”는 말이 전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별 수 없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없습니까? 아직도 평안하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를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환란 속에 휩싸이면 기도는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이부자리 속에서는 참다운 기도를 배우기는 힘들 것입니다. 요나도 기도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환란의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고난은 기도의 학교입니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시50:15).
야고보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2)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2)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환란을 당하기 전에는 자기의 죄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다시스로 도망하면서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고 고난이 닥쳐왔을 때 자기의지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원들로 부터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게 속하였느냐”고 추궁을 받았을 때 자기의 이적 상황을 밝히면서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1:8).
또 무리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잔잔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푹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1:12). 그는 자신이 허물과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사람은 우둔하고 미련하여 자기의 잘못을 잘 알지 못하고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허물하고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자기의 실수나 죄에 대하여는 할 수 있는대로 변명하고 감추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징계를 받을 때에는 이 못된 습성을 고치게 됩니다.
그 중의 한사람이 바로 요나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성도들의 죄를 다 용서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1요1:9). 이는 회개한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욥22:23). 탕자로 회개하고 돌아갔을 때 한 없는 위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3)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발버둥쳤습니다. 그는 생사 결판의 처절한 최후의 순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 .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 이 모든 요나의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무능을 메어다는 고리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 매달려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본래부터 요나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신뢰는 그가 이 큰 환란의 도가니에서 배운 것이고 얻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한 것을 원합니다. 또 평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 하나님을 더 잘 믿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겨운 기도는 의지할 곳이 없을 때 하게 됩니다. 감격스런 찬송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 밖에 없을 때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115 :9). 또 다른 곳은 말하기를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니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직 하나님께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시146:3-5).
요나는 오늘 본문에 또 말하기를 “구원은 여호와게서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9). 이는 의지할 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그의 비참한 정황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환란은 불행한 것이지만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교사였습니다.
(4)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그 모습이 새로와졌다는 사실입니다.
(4) 요나는 환란을 통하여 그 모습이 새로와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하나님 내가 새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 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는 옛날의 요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기도할 줄 모르던 요나가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도망치던 사람이 그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한 때는 다윗도 자행자지하던 자였으나, 나단 선지 앞에서 돌아섰습니다.
사울도 고삐 풀어진 망아지처럼 날뛰던 자였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만난 뒤에 변화를 받은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란을 통하여 인생의 모습을 되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한 가정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모친 집사님은 서울에서 오셨습니다. 그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간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7남매 중 막내 아들의 불치의 병인 위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을 때라고 합니다. 친척 중의 한분이 그 아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대답이 “저의 마음은 그러하고 싶어도 우리 어머님이 불교에 너무나 지극하시니 그 반대를 뿌리치고 예수 믿기가 어렵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그 어머니가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걱정하지 말아라. 좋은 길이면 나도 가겠다”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그 아들은 예수를 영접한 후 23세의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 지극하던 불교신자 모친님도 그 아들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지금은 서울 도봉구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시고, 온 가정이 다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환란은 그 가정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갔으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온 가정이 예수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온 가정을 구원하고 세상을 떠난 복된 믿음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요나의 새 삶도 바로 이 환란을 통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 5:57-58). 아멘.
9.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요나서3:1-3)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천국 시민의 의무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소금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소금은 간을 맞추어 맛을 냅니다(마5:13). 소금은 더러운 것을 깨끗게 합니다(겔164). 소금은 해독제로도 쓰입니다(왕하2:21).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소금에 절여두면 음식물이 상하지 않습니다(레2:13). 이 외에도 소금의 용도를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상하지 않게 하는 두 가지 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천국 시민의 직분이요, 또한 의무입니다.
소금은 이렇게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쓰레기통에 버림을 받듯이 신자가 이 세상 사회로 부터 그 맛을 내지 못하고 그 부패를 막지 못할 때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버림받은 소금은 밖에 버리워 짓밟힐 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5:13). 맛을 잃은 소금의 운명은 길가에 버리워 밟힐 뿐입니다. 너무나 비참합니다.
우리는 자기 사명을 감당치 못한 요나를 통하여 그 비참한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요나도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포기했을 때 밖에 버리워 짓밟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당한 수치스러운 모습은 생각하기조차 민망합니다.
① 그는 불신 이방인들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욘1:6).
② 그는 이방 선원들에게 심문을 당했습니다(욘1:8-10).
③ 그는 불신자들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욘1:11).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이 말은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겠다는 암시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성도가 불신자의 수중에 붙잡힌 것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역발산 기개세의 천하장사 삼손도 드릴라의 손에 빠지게 되었을 때, 별 수 없이 불레셋 사람들을 위하여 웃음을 파는 재주꾼이 되어야 했습니다(삿16:23-27). 베드로도 예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했을 때 보잘 것 없는 계집종 앞에서도 쩔쩔 맸습니다(막14:66-7 1).
그래서 다윗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습니다(삼하24:12).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진실로 그러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장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근심이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내 주님만 따라가리”
④ 요나는 마침내 “스올의 뱃속”에 까지 떨어졌습니다(욘2:2) . “스올의 뱃속”은 음부와 지옥을 의미합니다. “스올(Sheol)”이라는 말을 이사야 선지는 목구멍이나 삼키는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시5:14). 시편기자는 죽음의 올무에 에워싸임을 말했습니다(시18:5). 이는 절망적인 형편을 표시한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요나는 곤두박질하여 음부에까지 내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결과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열매이며 불순종의 댓가입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떠나면 마귀에게 붙잡힙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면 탕자가 되기 마련입니다(눅15장). 하나님을 버리면 왕후같은 이스라엘도 창녀같은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게 됩니다(겔16장).
경성합시다. 범죄할 때 비극은 찾아옵니다. “범죄자들은 함께 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시37:38) .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의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하였습니다(대상10:13-14).
이 세상에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죄는 축복을 차단합니다. 죄는 은혜를 가로 막습니다. 죄는 천극의 문을 가로 막습니다. 요나도 범죄함으로 스올의 지옥 밑창에 처박히게 된 것입니다. 축복받은 선지자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사명을 저버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를 더하사 죄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이스라엘의 패역도 간과하십니다(민23:21). 하나님은 죄인을 오라고 하십니다(사1:18). 하나님은 손을 펴사 패역한 백성도 외면치 아니하시고 부르십니다(사65: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렘3:12).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지중한 죄도 죄로 갚지 아니하시고, 그를 스올의 뱃속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0). 이렇게 하여 요나는 죽음에서 건짐 받은 것입니다. 요나는 죽음 직전에 큰 물고기 뱃속으로 부터 건짐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니님께서는 요나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욘3:1).
하니님은 범죄한 인간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창3:9). 두 천사는 멸망할 소돔성을 찾아가서 롯을 이끌어 냈습니다(창19:17). 술람미 여인을 찾는 솔로몬 왕의 모습은 성도를 찾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는 남편을 배반한 아내 고멜을 다시 찾습니다.
호세아의 이 모습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대속하시고 찾으시는 십자가의 사랑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말씀을 못들은 체하고 멀리 도망친 요나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찾아 세상에 오신 종교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결코 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히 자기 백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세상 종교는 헛종교요, 기독교만이 참 종교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복됩니다. 우리가 참 바른 길에 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영접하는 태도입니다(계22:20). 둘쨰는 “산과 바위야 우리를 가리우라”면서 피하여 숨는 자세입니다(계6:15-16). 전자는 신앙의 자세이고, 후자는 불신앙의 자세입니다.
회개한 자는 영접하고 목이 곧은 자는 배척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그러나 생명의 주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요1:11).
물론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로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요3:36).
그러나 감사하게도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임했을 때, 요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첫 번째 임해 온 말씀을 거역하고 큰 일날뻔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제2의 기회를 주셨고, 요나는 그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2의 기회는 회개한 자에게 옵니다. 탕자에게도 제2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회개했을 떄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다(눅15:17-20).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 제2의 기회를 부여받고, 종내는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요21장). 다윗이 범죄하였으나, 나단 선지를 통하여 그에게 회개할 제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삼하12:1-15). 확실히 제2의 기회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다 축복의 기회인 것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가롯유다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에서는 그 귀한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기회가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축복스런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쨰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그런즉 요나는 그에게 주어진 제2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제2의 기회마저 놓치는 것은 하나님께 배은망덕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제2의 기회를 선용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제2의 기회를 선용하는 것입니까?
① 그것은 먼저 제2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요나에게 제2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서 명하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의 음부에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부담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30: 3-4).
② 그 다음은 지난 때 실패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가 실패한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순종이요, 둘째는 교만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고, 목을 곧게 하여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으며, 죄 가운데 망해가는 니느웨 성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③ 제2의 기회를 마지막 기회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2의 기회는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2의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기회인고로 생애를 걸고 전력투구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제2의 기회는 곧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쨰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1-2).
이 말씀은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보다 먼저 그에게 임했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1:2). 그러나 요나는 이 말씀을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첫 번째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실패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배반자 요나에게 두 번째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때문이요, 둘째는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성을 구원하고자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요나가 할 일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요나를 또 부르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 뜻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성취하시기 원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아멘하고 순종해야 옳습니다. 부르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교사의 자리, 찬양대원의 자리, 성도의 자리, 권찰의 자리, 안내의 자리, 집사의 자리 등등 여러 가지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부름 받은 자만이 지켜야 할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 정신이 하나님께 대한 사명감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 섭섭해 하십니다. 왜냐하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이기 때문입니다(고전4:1-2).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하신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먼저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먼저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는 먼저 불순종의 죄를 청산해야 했습니다. 도망치던 자리에서 되돌아서야 했습니다. 멀리 떠나 있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와야 했습니다.
이제 순종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나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요나는 첫 번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났습니다(1:3).
그러나 두 번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3:3).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순종, 이것이 개혁신앙입니다. 개혁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않습니다(계22:18-19).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고전4:6).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항상 살핍니다(갈4:30).
(2) 하나님께서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두 번째도 또 가라고 하신 것은, 첫 번째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꼭 같은 명령이 두 번쨰 임한 것은, 이 사명은 기어코 완수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여하신 사명은 기어코 완수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포기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하심 따라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3일 길이라”하였습니다(3:3). 그래도 아니갈 수 없습니다. 멀어도 가야했고, 위험해도 가야했고, 힘들어도 가야했습니다. 그곳이 아골 골짝일지라도 가야했고, 소돔 고모라 일지라도 가야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신 명령은 4절에 나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것입니다(3:4).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선포할 내용의 말씀은 임박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니느웨의 큰 성읍이 곧 망하게 되었다는 엄숙한 경고였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육신의 피곤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니느웨 성민의 여론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위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선포할 결과도 염려할 것 없었습니다. 다만, 40일 후면 망한다는 말을 담대히 선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두번째 받은 사명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축복의 말보다 책망의 말씀을 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위로의 말보다 징계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힘듭니다. 감싸 주는 말보다는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조심스럽습니다. 듣기 좋은 칭찬의 말보다는, 듣기 싫은 책망의 말하기가 더 신경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좋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뜻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고 말하면서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갈1:10).
전도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사실 결례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고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두 가지 큰 손해를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되고, 둘째는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요나는 첫 번쨰 말씀을 받은 대로 전하지 못한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말씀을 받고서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니느웨성이 구원받은 것은 요나의 순종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런 축복과 열매가 많이 맺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10.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3:3-10)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1:2).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요나는 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풍랑을 만났고(1:4), 이방 선원들의 심문을 받았고(1:8), 그는 이방인의 손에 넘기워졌으며(1:12), 마침내 바다에 던지워 큰 물고기에게 삼킨 바 되었습니다(1:17).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요나를 스올의 뱃속에서 영원히 망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를 살려 내셨습니다(2:10).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가 비록 범죄 하였을지라도 용서하시고, 두 번째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3:2).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제2의 기회까지 주신 것은 그를 사랑하심 때문이요, 또한 그를 통하여 니느웨성을 구원하기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 여러분 우리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망친 죄인일지라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찬양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의 뜻을 기어코 이루시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요나는 하나님께로 부터 제2기회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이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감된 성경은 말하기를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망령된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노라”(히12:17).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어리석은 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에서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자,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니느웨성의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요나의 태도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요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했습니다(1).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
두번째 임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이러합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3).
요나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 명령은 그에게 두번째 임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고집하고 도망쳤던 그였지만 이제는 순종하고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다가 큰 일 날뻔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2). 요나는 불순종으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스로 도망치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는 불순종으로 죽었던 자가 살아있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딤후1:6). 이 말씀은 뜨거워지라는 말입니다. 새 힘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재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낙심한 자가 있으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저앉아 있는 자가 있으면 힘을 얻어야 합니다. 넘어진 자가 있으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습니다(2).
니느웨는 요나가 가서 전도할 곳입니다. 그 곳은 요나의 일터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요나의 선교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 부터 니느웨라는 선교지로 부름 받은 선지자 입니다. 요나는 거기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3일 길이라”고 하였습니다(3).
이 성은 노아 홍수 직후에 니므롯이 창설한 성입니다(창10:1 1-12).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이 성은 BC 607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되기는 했으나, 고대 도시 중에서 바벨론 보다는 훨씬 큰 도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에 의하면, 여태껏 어떤 인간도 이만큼 큰 성은 건축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성에는 1,200개의 망대가 있었고, 망대와 망대 사이를 잇는 성벽의 높이는 100피트나 되었다고 합니다. 또 성벽의 넓이는 3대의 병거가 동시에 나란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고 합니다. 니느웨성 주위는 60마일이나 되었으며 이는 3일 길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큰 성은 새로 잡아온 노예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 성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이가 120,000명이나 된다고 말한 것을 보면(4:11), 인구는 100만 정도 가까울 것으로 추산합니다.
니느웨는 BC 900년 경에 세계적인 세력의 강국이 되었고, 이때부터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BC 721년에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계속 100년동안 세력이 커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선지자 나훔이 예언할 당시 니느웨는 지상의 여왕과 같은 도시로 매우 강하고 잔인하였으며, 피를 빨아 먹는 사자굴 같다고 하였습니다(나훔2:11-13). 요나도 말하기를 “이 성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1 :2).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신 곳은 바로 이러한 니느웨성입니다. 그는 이와같은 큰 성읍의 이방인들 앞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해야 했습니다. 만일 요나가 니느웨성민들에게 전하는 말씀이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면, 요나의 생명에 위험이 따르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가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마저도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니느웨성에 대한 요나의 증거 내용입니다.
(2) 니느웨성에 대한 요나의 증거 내용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고 하였습니다(3). 그가 간 것은 관광을 위하여 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너는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간 것입니다. 그가 가서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은 이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할 일입니다.
전도는 누구나 해야할 일입니다. 어디서든지 해야할 일입니다.
요나도 들어가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면 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전해야 합니다(계22:18-19).
전도자는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고전4:6).
요나도 꼭 그렇게 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것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위협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안전을 염려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 증거에 대한 결과의 여부에 집착할 것도 없었습니다. 초라한 자신과 거대한 니느웨 성을 비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일이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3) 요나의 니느웨 전도에 대한 결과입니다.
(3) 요나의 니느웨 전도에 대한 결과입니다.
니느웨 성민들은 요나의 경고를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굵은 베를 입었다”고 하였습니다(5). 그들은 깊이 빠진 죄에서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생명운동이 일어납니다. 즉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성의 회개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①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5).
그들의 회개는 하나님을 믿는데서 부터 출발했습니다. 회개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 없이는 진정한 죄책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신앙을 기뻐합니다(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합니다. 죄책감과 회개는 다릅니다. 가롯 유다는 죄책감으로 뉘우치기는 했으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믿었습니다.
② 그들은 “금식을 선포”했습니다(5,7).
사람으로 부터 시작하여 짐승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결사적 표시입니다. 이것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결의입니다.
③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5,6).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현 상태의 답습이 아니고 새 생활의 시작입니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서둘러야 합니다. 머뭇거리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노아 때에 머뭇거린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머뭇거리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거든 하나님을 섬기던지, 아모리 사람의 신을 섬기던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엘리야는 갈멜산 상의 결전을 앞에 두고 주저하는 백성들에게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고 책망했습니다(왕상18:21). 회개는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회개하고 사유함 받아야 합니다.
왕은 보좌에서 일어났습니다. 조복을 벗었습니다.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살 길입니다.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④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8).
이것이 회개 기도입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시편 51편 같은 다윗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왜 이렇게 회개해야 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1요1:9).
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8)
이는 개혁입니다. 이는 회개한 왕과 백성들에게 공포한 명령입니다. 회개는 자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옷을 갈아 입는 것입니다. 불의를 버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탕자의 회개는 돼지우리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삭게오의 회개는 부정축재에서 깨끗한 생활로 자리를 바꾸고 떠나는 것입니다.
방향전환, 변혁, 개혁, 변화 이것이 새 삶입니다.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9). 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하는 소망입니다.
소망 중에 기도하는 자는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발등상 앞에서 죽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전도는 엄청난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단순한 말씀은 100만의 영혼을 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나는 불과 수일간 전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엄청난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전도를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시작하여 왕까지 회개했습니다. 전 국민이 회개했습니다. 심지어는 짐승에게 까지 금식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니느웨성의 회개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근본원인은 요나의 회개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사람의 선지자가 깨어났을 때부터 니느웨성은 깨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개는 파급되어 갑니다. 영적각성은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1970녀의 대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의 회개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구주에 안지로라는 큰 무역회사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는 멀고 먼 만주로 도망쳤습니다. 육신은 만주에 와 있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선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는 선교사 앞에서 자기의 죄를 다 회개했습니다.
선교사는 그를 고맙게 여겨, 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성경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는 1년 동안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구원받은 감격에 기뻐하면서 고국을 구원할 심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심정을 선교사와 의논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구원하렵니다. 도망쳐 나온 고국으로 돌아가렵니다” 선교사는 그 말을 듣고 감동되었고, 그 아름다운 뜻을 이루기 위하여 동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 구주에 도착했습니다. 안지로는 먼저 경찰서에 찾아가 10년 전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감동이 된 법관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우리나라는 당신같은 청년이 필요합니다. 일본을 위해 마음대로 전도해도 좋습니다”라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의 유래는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안지로 한사람의 회개는 일본에 구원의 길을 열어 놓게 된 것입니다. 요나 한사람의 위대한 회개는 니느웨성을 구원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니느웨성의 100만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크리스챤이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문부호여서는 안되고 감탄부호여야 합니다. 요나는 처음에 의문부호였으나 나중에는 감탄부호가 되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성이 무너지리라”고 외쳤던 나의 음성은 확실히 감탄부호였음이 분명합니다.
똑같은 부름을 받은 우리들도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저 영적인 니느웨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전도자들이 됩시다. 루터의 말을 들으면 더욱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11.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11.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4:1-5)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큰 성 니느웨로 갔습니다. 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여기 “무너지다”(haphak)는 말은 “뒤집다”, “전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송두리째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무서운 경고를 들은 니느웨성 사람들은 무론대소하고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행히 니느웨성은 회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3장 마지막 절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하마터면, 영원히 망할 수 밖에 없었던 니느웨가 요나의 전도로 다행히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4장을 읽으면서 기뻤던 마음은 우울하고 불안해질 뿐입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요나의 죄와 그의 어리석음과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풍랑과 멸시와 스올의 뱃속의 환란을 맛보면서 두 번 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2:9). 그러던 그가 4장에 와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1장에서 요나의 불순종과 함께 그의 회개하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는 그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만 보일뿐 그의 회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요나는 그 후에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물리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섰다가 또 넘어지는 요나의 모습을 통하여 참 인생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또 요나를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니느웨성은 요나의 전도로 말미암아 모두가 회개하였습니다. 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죄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래 니느웨성에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 성민에게 내린 은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니느웨성이 입은 하나님의 자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니느웨성의 구원에 대한 요나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1) 요나는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 요나는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
이는 니느웨 성민의 구원을 불평하는 말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심히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요나의 이 불평은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너무나 소견이 좁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이방인 일지라도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서 전도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열 자녀가 다 소중한 것처럼 하나님께는 만 인간이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니느웨 성민도 귀한 자들입니다.
셋째, 그는 니느웨 성민들에 대한 아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즐겨 환대 하신다는 이유로 불평했습니다(마9:10-11).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넷째, 요나는 니느웨가 40일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일도 아니고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성민들은 요나의 전도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요나는 너무나 개성이 강한 자인 것 같습니다. 개성이 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큰 장점이 됩니다. 무골호인이라서 반드시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큰 일을 해낸 사람들은 다 개성이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일을 해낸 자들은 대부분 개성이 강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개성이 너무나 강한 것은 단점도 됩니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도 개성이 강한 인간이 된다면 그는 고집불통의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저도 고집에 세다는 것은 불신앙의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요나의 주관은 너무나 강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동편 성 밖에서 그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5).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니느웨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40일 후에 그 성은 무너졌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은 그 성을 멸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때때로 자녀들의 잘못 때문에 매를 듭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면 그냥 매를 거둡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녀들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한 이상,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재앙이 아니라 회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면 재앙을 면해 주십니다. 다윗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그도 하나님 손의 억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1요1:9).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사람의 회개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 잘못입니까?
(2) 요나는 지난 날 자기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정당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4:2).
(2) 요나는 지난 날 자기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정당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4:2).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1:3). 요나의 이 행동은 엄연한 죄요, 불순종입니다. 그는 이 죄 때문에 징계도 받고 책망도 받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렸기 때문에 풍랑도 환란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뻔뻔스럽게도 다시스로 도망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그런즉, 니느웨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가서 전하지 않는다 해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의 실수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친 죄를 하나님 때문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죄에 대하여 자기 아내 하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창3:12). 하와는 뱀이 꾀므로 먹었다고 했습니다(창3:13).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에 대하여 동생 야곱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창27:36,25:29-34).
아론은 송아지 우상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합니다. “이 백성이 악함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모세는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고 하기에 만들게 되었다고 변명합니다(출32:22-24).
빌라도는 예수를 죽인 죄에 대하여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면서 모든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렸습니다(마27: 23-26).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아무도 자기 책임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격언은 진리입니다. 요나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잘된 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요, 못된 것은 모두가 “조상” 탓입니다.
모두가 권리를 주장할 줄 알지만,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핑계하지 맙시다. 변명하지 맙시다. 그리고 원망하지 맙시다. 사실로 오늘 본문 말씀은 요나의 기도입니다. 그는 기도라고 하면서 변명하고, 핑계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불평하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잘못된 기도가 많습니다.
자랑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교훈조의 기도도 있습니다. 책망조의 기도도 있습니다. 설득조의 기도도 있습니다. 원망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분풀이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런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3) 요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죽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4:3).
(3) 요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죽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요나는 불평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감정이 폭발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정말로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선민인 유대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너무나 개성이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여의치 못할 때는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1장에서도 죽기를 바랐습니다(1:12 ). 그는 또 4장에서도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그가 죽음을 구한 것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한 말입니다.
하지만 4장에서의 그것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요나의 이 사고방식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비뚤어진 사상입니다. 버려야 할 생각입니다.
요나는 죽어서는 안 될자 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한창 일할 수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다투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화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무서운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죽을 준비가 도대체 되어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다투고 있으면서 어찌 감히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겠다는 것입니까?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마다 감정을 자제하는 훈련을 쌓읍시다. 우리가 만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것의 포로가 된다면 너무나 비참해지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1980년 이후 분신자살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1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아까운 생명이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합니까?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자살은 미화될 수 없습니다. 자살은 바보들의 짓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생명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너무나 귀한 존재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은 자살도 금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고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생명에 관한한 우리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왓손은 살인죄를 다섯 가지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① 그것은 하나님의 모욕하는 죄다.
② 그것은 호소하는 죄다.
③ 그것은 악마와 같은 죄다.
④ 그것은 저주받은 죄다.
⑤ 그것은 진노를 사는 죄다.”
성경은 자살을 금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5-6).
②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출20:1 3).
④ 주께서 때가 되면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4:6-8,18 ).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불원간에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우리의 생명을 아낍시다.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한번 뿐입니다. 오래 살지 못합니다. 잘못 살면 후회하게 됩니다. 이런 귀한 생명을 허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한 것입니다(엡5:16).
더군다나 죽고 싶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정말 앞에 캄캄하고 앞뒤가 꽉 막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다해도 죽는 셈치고 사십시다. 죽을만한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삽시다. 죽는 용기를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에 성공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죽고 싶다는 것은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4).
이 말씀은 흥분과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큰 일을 작은 일 때문에 그르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로 요나는 니느웨성의 구원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변명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요나는 한때 회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고기 뱃속에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역시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은혜 받은 인간도 그 은혜를 소멸하면 옛 성품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땅 위에서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죄입니다. 요나의 잘못은 곧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의 실수는 곧 우리의 실수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공의롭지 못한 분노를 보면서 혈과 육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을 기억합시다(약1:19-20)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면서 승리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12.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12.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욘4:5-11)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니느웨성은 온 성민이 다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욘3:5). 니느웨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회개하였습니다. 요나의 전도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망할뻔 했던 니느웨성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니느웨성의 회개를 보고 기뻐할 자는 요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서 전도한 결과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로 요나는 기뻐할만하고 자랑할만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태도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① 요나는 니느웨성이 재앙 대신 구원받은 것을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하였습니다(4:1).
②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항의하기를,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다고 말합니다.
③ 요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욘4:3). 왜냐하면 망하기를 바랬던 니느웨성이 오히려 구원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④ 요나는 “너의 성냄이 합당치 않다”는 하나님의 꾸중을 듣고, 성밖으로 나가서 거기에 초막을 지은 후 “니느웨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러”하였습니다(욘4:5).
요나가 성 밖으로 나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니느웨성이 회개한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요, 둘째는 행여나 어떤 재앙이 임하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요나의 이 옳지 못한 태도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의 못된 마음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못 돼먹은 심보입니다. 요나의 니느웨 전도는 옳지 못한 동기임을 알게 됩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망하기를 기대하면서 전도한 것입니다.
그의 전도는 사명감에 불타서가 아니라 마지 못해서 외치고 다닌 것 뿐입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한 것입니다.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택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망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엔가는 이런 못된 심보가 숨어 있습니다. 나는 잘 되고 남은 망해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우연히 생겨난 말이 아닙니다.
단테의 신곡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의 복보다는 훨씬 기쁘다” “사람이란 남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버어크의 말입니다.
입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짐승들은 면종복배(面從腹背)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마음이요,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요나에게도 은혜 베푸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책망대신 그에게 은혜 베푸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그에게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하였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하심 이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6).
여러분 우리는 본문에서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고,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고 한 점입니다.
하박국 선지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의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3:18). 다윗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 구원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시35 :9). 마리아는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1:47).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박넝쿨을 기뻐하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박넝쿨만 보였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살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요나는 배은망덕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행복하게 살게 해주신 하나님은 잊어 버립니다 우리는 건강을 뽐내면서 건강을 주신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자랑하면서도, 성공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척 합니다. 우리는 좋은 집에 살면서도, 그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 때문에 기뻐하고 자랑하면서도 그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것은 마치 요나가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박넝쿨 때문에 기뻐한 것과 같이 흡사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니느웨성 밖에 초막을 쳤던 요나에게 있어서 박넝쿨은 좋은 그늘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늘 밑에 앉아서 니느웨성이 어찌되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두터운 박넝쿨 그늘은 요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해버렸습니다.
①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하시매 곧 시드니라” 7절 말씀입니다.
② 또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였습니다(8). 그렇게도 싱싱했던 박넝쿨은 어느 새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벌레가 갉아 먹었고 뜨거운 동풍에 말라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박넝쿨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넝쿨의 기쁨은 한 평생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박넝쿨 그들은 잠시 잠깐의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것치고 오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박넝쿨은 벌레가 갉아먹고, 또 뜨거운 동풍이 불어 시들게 한 것처럼 이 세상 연락치고 오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금은 보화가 주는 기쁨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부귀영화도 쉬 날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처럼 높은 권세도 믿을 것을 못됩니다.
허사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적막한 공동묘지 절 기다린다” 교불삼년 권불십년(驕不三年 權不十年)은 만 사람이 긍정하는 경험입니다.
요나의 기쁨을 앗아간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작은 벌레였습니다. 이 작은 벌레가 요나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절세미인 클레오 파트라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작은 독사 한 마리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헤롯 아그립바는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행12:23). 작은 벌레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요나의 기쁨을 앗아간 것은 작은 벌레였습니다. 이 작은 벌레는 박넝쿨을 갉아먹어 버렸습니다. 요나는 이제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초막에는 햇볕이 쨍쨍 내려 쪼였습니다. 요나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불평했습니다(8). 못살겠다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 요나는 박넝쿨을 시들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는 않았으나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성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요나의 행동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이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심은 요나를 깨우치기 위함 입니다. 요나의 관심은 오로지 박넝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가치한 박넝쿨에 연연하고 있는 요나의 관심을 돌려 놓기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루 밤에 났다고 하루 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10-11)>
이 말씀은 요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나가 아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박넝쿨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니느웨성에 살고 있었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무죄한 12만명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또한 요나서의 교훈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설교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는 요나가 아꼈던 것과 하나님이 아끼셨던 것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요나가 아꼈던 것은 “박넝쿨”이라고 말해줍니다. 요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박넝쿨이었습니다.
요나가 그렇게도 아꼈던 그 박넝쿨을 어떤 것입니까?
(1) 그것은 무가치한 식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1) 그것은 무가치한 식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요나에게 있어서의 박넝쿨은 그늘이 되어 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방주를 짓는데 쓰인 잣나무도 아닙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심기웠던 생명나무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포도나무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에 특선된 백향목도 아닙니다. 그것은 번영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박넝쿨일 뿐입니다.
이 박넝쿨은 하나님이 아끼신 니느웨에 비하여 정말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요나는 그 무가치한 것을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1967년에 있었던 여수시가 입은 홍수 피해는 컸습니다. 그 당시 어떤 아주머니의 시체를 인양해 보니 그의 손에 돈 50,000원이 쥐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 돈 때문에 다른 것을 붙잡지 못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그녀는 그 돈을 붙잡고 익사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가치한 것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녀는 무가치한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2) 박넝쿨은 요나의 것이 아닙니다.
(2) 박넝쿨은 요나의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자신의 소유도 아닌 박넝쿨을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박넝쿨은 하나님이 나게 하셨고, 자라게 하셨고, 배양하신 것입니다. 박넝쿨은 하나님이 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고 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요나가 그 박넝쿨을 위하여 일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박넝쿨을 자기 것인 것처럼 아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가 직접 창조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니느웨 성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겠습니까?
(3) 그것은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3) 그것은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다”고 10절은 말합니다. 그 박넝쿨은 하룻밤 동안에 자랐습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벌레가 먹었습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시들어 버렸습니다. 요나가 아낀 것은 허망한 박넝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낀 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들입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은 온 천하보다 귀한 자들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이 한 영혼은 박넝쿨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허망한 박넝쿨을 아끼는 요나에 비하여 제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고 사랑하신 하나님은 정말 너무나 위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은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10-11).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아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3:16-17).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아끼십니다(대하36:15,겔20:17).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인 인생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욥14-15). 그들이 비록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일자리도 아낍니다(욘4:11).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그의 관심은 니느웨성이 아니라 박넝쿨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망해가는 니느웨성이 아니라, 더위를 가려 줄 박넝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아끼는 것과 내가 아끼는 것이 왜 이렇게 엄청나게 다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네가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부동산 투기입니까? 아니면 저금통장입니까? 증권시세입니까? 희귀종 우표입니까? 기기묘묘한 수석입니까?
이런 것들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낄 것이 못됩니다. 이런 것들은 박넝쿨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요나의 관심사요 요나가 아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니느웨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에 집중되었습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우리의 관심을 인간에게 집중케 합니다. 요나서의 교훈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요나서는 우리에게 영혼 구원을 일깨워 줍니다. 요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관심을 전도에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집시다.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이 이루어지기 축원합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