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서 데려오라
전도, 복음, 지상명령, 전도자, 개척, 유산, 구원, 배교자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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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데려 오라
책나가서 데려 오라
책나가서 데려 오라
책머리에
책머리에
복음 전파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요 유언이자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l:35). 이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 남은 일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막16:15).
구원받은 성도의 우선적인 과계는 복음 전파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의 최대 최상의 사명도 선교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성도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우리 교회들은 이일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 아니라 증거해야 할 복음에 대하여 슬프게도 외면하거나 함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졸고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울 수 있도록 소리 높여 영적각성을 촉구해야 합니다. 한 선지자가 깨면 온 백성을 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집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 내고 싶어 했던 무능한 목사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상권에는 교인들에게 "나가서 데려오라"고 외친 설교 30편을 모았고, 하권에는 이끌려 나온 불신 영혼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호소한 설교 28편을 모았습니다. 엉성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눈물로 쓰여진 글이요, 다듬어진 글은 아닐런지 몰라도 주님의 보좌를 붙잡고 증거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힘을 얻은 자가 부지기수이며, 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이 무수함을 주님은 아십니다. 똑같은 구원의 역사가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강단위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 작은 설교집은 광주은광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여러 직원들의 노고와 특별히 김수천 강도사님과 박은영 양의 헌신적인 수고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위에 하나님의 영은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1993.7.10.
무등산 밑에서 조재태
차 례
차 례
1.내 집을 채우라(전도 복음)
2.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전도 지상명령)
3.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수고 기쁨)
4.나가서 데려오라(전도 초청)
5.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부흥 성장)
6.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충성 전도주일)
7.내 증인이 되라(증인 권능 전도주일)
8.가서 고하라(전도 구원)
9.복음을 어떻게 전할까?(복음 전도)
10.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전도자 일꾼)
11.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전도 복음)
12.안디옥 교회(교회 이방전도)
13.눈을 들어 밭을 보라(전도자 일꾼)
14.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잃은 양 기쁨)
15:잃은 은전을 찾자(회개 죄인)
16.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사명자 복음전파)
17.파수꾼의 책임(파수꾼, 책임)
18.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전도 책임)
19.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양심 기쁜소식)
20.주는 자가 복이 있다(개척 유산)
21.우리 교회의 사명(사명 교회)
22.하나님의 전도 방법(전도 노력)
23.예수님의 제자들(제자 선교)
24.파수꾼으로 세웠노라(사명 파수꾼)
25.말씀에 붙잡힌 사람(사명자 용기)
26.매임 받은 사람들(인도 충성)
27.불 가운데서 끌어내라(구원 위험)
28.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배교자 구원)
29.초대교회를 본받자(교회 부흥)
30.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기도 명령)
1. 내 집을 채우라
1.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어떤 사람이 큰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청했습니다(16).
마태복음에 보면 이 잔치는 "혼인 잔치"이고 초청자도 임금입니다(22:2). 그러나 이 두 잔치가 다 천국 잔치를 가리키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큰잔치 또는 혼인 잔치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9:15,요3:29,계19:7-9).
본문 말씀 마지막 절에도 예수님은 이 "큰잔치"를 "내 잔치"로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24). 사랑의 하나님은 굶주린 영혼들을 위하여 천국의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18).
"하나는 가로되 나는 맡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8).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20)
이 잔치는 이미 선약이 된 잔치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큰 잔치에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천국의 복락에 동참시키기 위하여 기꺼이 큰 잔치를 마련하시고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일치했습니다. "가지 못하겠노라"
첫째 사람은 변명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변명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이같이 완악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쩌면 그렇게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이 흡사한지 놀랄만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현대인은 영약식으로 살이 포동포동 쪄 있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에 참석합니다. 너무나 잘 먹어서 비만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둔한 그들의 육체에 비하여 그들의 영혼은 메말라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은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106:15),
그들의 영혼이 메마른 이유를 아모스선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마4:4).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한 근성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한 근성 때문입니다.
둘째는, 다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선악과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기를 "하와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소를 사서 시험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또 장가를 들어서 못 간다고 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천국 잔치의 초청에 대한 변명은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피곤하여 쉬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몸이 아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선약이 있다 합니다. 어떤 이는 다른 모임에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너무나 바빠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에 불과 합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사입니다. 아담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였습니다. 데마의 관심은 바울과 함께하는 고난이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관심은 삼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이 아니라 은 30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관심은 성령 충만한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명예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실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이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 일입니까?
자나 깨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명심합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 성도들은 모든 변명을 극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노아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그렇고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이었습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들을 본받아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둡시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시다. 이 같은 뜨거움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성령께 의지합시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큰잔치를 마련해 놓고 그의 종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어 이렇게 청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
그러나 모두가 다 사양하면서 거절했습니다(18-20).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저런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
성도 여러분, 마음먹고 준비한 잔치에 손님들이 안 와 보세요.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또 꼭 와야 할 사람의 얼굴이 안보이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초청을 받았거든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만일 참석하지 않으려거든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집 경사가 있을 때 초청장을 안 보내야 합니다. 보내 보았자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량 많은 자선가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불참한다는 종들의 보고를 들은 하나님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아랍 사회에서는 이런 무례한 거절은 도전으로 간주했다 합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할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여기 "거리"는 사통팔달한 넓은 길을 의미하고, "골목"은 좁은 길을 말합니다. 전자는 부자들이 사는 곳이고, 후자는 서민층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를 말합니다. 복음은 빈부 귀천의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아무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주석가 벵겔은 이 부분에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 합니다.
"가난한 자는 연석에 초대되지 않은 자요, 병신은 결혼할 수 없는 자요, 소경은 밭을 보러 갈 수 없는 자요, 그리고 저는 자는 밭갈이를 못하는 자다. "
하나님은 몹시 화가 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종들의 보고는 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2).
여기 "오히려 자리가 있다"는 말은 아직도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빈자리가 많은 잔치는 잔치의 기쁨을 반감하고 맙니다. 텅 빈 예식장은 신혼의 기쁨을 앗아가고 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가 마련하신 천국 잔치가 가득 차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라는 것이 종들의 보고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헤아려봅시다.
첫째, 이 빈자리가 영원히 비어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첫째, 이 빈자리가 영원히 비어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들을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영원히 영원히 빈자리 그대로 비어 있다 할지라도 얼마 동안이나 비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식구들이나 이웃들 중에 어느 누구 하나라도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성도 여러분 서두릅시다. 열린 문은 닫힐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방심할 때가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둘째, 이 빈자리에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둘째, 이 빈자리에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배설하신 잔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슬픈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집안 교회가 비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예배당이 커서 빈자리가 있다고 핑게 대지 맙시다. 그 빈자리는 내가 지켜야 할 자리인데 지키지 못해서 생긴 자리입니다. 친구 집에는 날마다 찾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못 찾는 이가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직장에는 10년 개근, 20년 개근 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에는 1년 정근도 못하는 교인들이 있다면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밤 수요일밤 예배 시에는 왜 그렇게도 빈자리가 많습니까? 멀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합시다.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켜 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리는 내가 지켜야 합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비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초청장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한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빈자리가 구원받은 영혼들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전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연휴가 되면 유원지는 붐벼도 하나님의 교회는 빈자리가 더 많아집니다. 바캉스 철이 되면 명산대천은 발 디딜 틈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집은 텅텅 빈다고 합니다. 슬픈 현상입니다.
가출한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주일날 아버지의 집을 등진 교인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는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하다니 너무나 슬픈 현실입니다.
이런 불효자식들 때문에 하나님의 전은 빈자리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빈자리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합니다. 비어 있는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그 자리가 결석한 성도의 자리거나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생긴 자리거나 간에 말입니다. 아직도 빈자리가 있다는 종의 보고가 22절에 있습니다.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23절에 나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명심합시다.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자리를 채우라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비어 있는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집인 성전이 알곡들로 가득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집인 성전이 구원받은 성도들로 북적대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은 두 가지로만 가능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온 교회 성도들이다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전원 출석해야 합니다. 결석자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온 교회가 나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될 때 하나님의 전은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전에는 빈자리가 메꾸어질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겸손히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오늘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까지 제시해 주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여기 보면 하나님의 전을 채우기 위한 세 가지 과정이 제시됩니다.
첫째는, "길과 산울가로 나가라"고 합니다.
여기의 강조점은 나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길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이웃집으로 가야 합니다. 친구 집으로 친척 집으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방안퉁소가 아니라 길로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벼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나간 자에게 사람을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강권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사람을 강권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강한 의지와 설득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가 아니라 그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가 믿던지 안 믿던지 그것은 우리가 알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본 것과 받은 것과 믿는 것을 가지고 강권하는 종이 되는 것이 그 전부입니다. 법정에 선 증인은 증거를 제시해야 되지만 크리스천 증인은 내 자신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증인의 자세로 세상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증인의 자세로 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강권하는 증인이 됩시다.
셋째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셋째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여기 중요한 과정이 나옵니다. 그것은 데려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읍시다"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데나 가까운 교회로 나가십시오"가 아닙니다. 전도지 한 장 나누어 주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나가서 강권하여 내 집까지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성도 여러분, 분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비어 있는 하나님의 전을 채우기 위하여 일어서십시다. 졸고 있는 자도 일어섭시다. 앉은뱅이도 일어나야 합니다. 평생 방안통소도 일어나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나갑시다. 주님은 말이 없고, 입이 없고, 손이 없는 자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이 있으니 일어나라 했고, 입이 있으니 강권하라 했고, 손이 있으니 데려오라 한 것입니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잘리우게 되었는데, 그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서 두 손도 잘리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명은 구했으나, 팔도 다리도 없는 토막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드러누워 남의 도움 없이는 한 시간도 살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큰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는 중에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그날부터 그녀의 손을 자르고 갈라 조금 남은 팔뚝에 연필을 동여매고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드러누워 편지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먼저 자기와 안면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감사 편지를 썼고 안면은 있지만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전도 편지를 썼습니다.
기도와 눈물로 간절하게 쓴 편지여서 그의 전도 편지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다 감격해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나와서 함께 구원받았다는 실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성한 발이 있습니다. 두 손이 있습니다. 어디든지 갈 수도 있고 전할 수도 있고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문둥이들은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습니다(왕상7:9),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9:16).
기독교의 실제적인 문제는 무신론이나 회의론이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침묵만 하고 있는 비증언의 문제입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님의 명령에 아멘 해야 합니다.
2.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2.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고전9:16-23)
바울의 본명은 사울입니다. 그는 다소성 출신의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석학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후 바리새인이요 율법주의의 열심당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충성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교회를 무섭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처형에 가담하였습니다(행7:27-58,8:1,22:20), 교회를 진멸하고 그리스도인을 옥에 가두었습니다(행8:3).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여 죽게 했습니다(행22:4). 그리스도인을 매질했습니다(행22:19). 그리스도인을 죽이기로 서원했습니다(행26:10). 교회를 말할 수 없이 핍박하고 잔해했습니다(갈1:13).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고 다 자기 자신의 입으로 증거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극적인 개종을 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당연히 인생관마저 변한 것입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는 자기가 예수의 사도가 된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노라"(갈1:1).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름 받은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전도여행으로 한 평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했던 오직 한 가지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전파에 대한 신앙은 오늘 본문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여기 분명한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죄 값을 치릅니다. 또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 죄 값을 받습니다. 즉,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해도 복을 받지 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혹시 전도하지 않은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여튼 성경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은 범죄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같다는 말입니다.
전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그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 그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런데 이 큰 사랑과 받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모든 형제에 대한 사랑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9). 또 한 생명이 곧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귀한 생명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인간이 죄악에 빠져서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 때 아랍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 공략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큰 기근으로 부모가 자녀를 잡아먹는 비참한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때에 사마리아 성 밖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도 굶어죽고 거기 앉아 있어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원수지만 아랍군대의 진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갔더니 거기에는 은금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컷 먹고 숨겼습니다. 얼마 후 제 정신이 들었을 때 성안에는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왕하 7:9). 문둥이들은 성안에 들어가서 고해야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양식으로 배불러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대의 은금보화 때문입니다.
셋째, 성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만일 그들이 잠잠하고 있다면 오래지 않아 위험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바울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
사람들이 과목을 심는 것은 열매를 따먹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7:19). 농사를 짓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축산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사 신자 되게 하신 것도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지 못함은 하나님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내게 미친다"는 바울의 말은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1917년 10월에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희랍정교회가 국교였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어찌하여 공산주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까? 희랍정교회는 귀족 사회에만 존재하였을 뿐 자기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복음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레닌이라는 혁명의 천재가 그 노동자 농민에게 가서 혁명의 바람을 불어넣었을 때, 제정 러시아의 희랍정교회는 무너지고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화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기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신자들이 화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란 곧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최대의 목적도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일입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친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낮에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병을 고쳤으며, 천국의 비밀을 가르쳤으며, 밤에는 감람산에 올라가 찬이슬 맞으며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열두 제자를 부르사 훈련시켰습니다.
또 70인 제자를 둘 씩 둘 씩 작을 지어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외치기를 친국이 가까웠다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6-8)
예수님은 세상 사역을 다 마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이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바울은 이러한 거역하지 못할 명령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때문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치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화가 미칠 것임이로다! "
이 말은 강력한 사명감을 표시 합니다. 절대 절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는 말입니다. 이 강력한 사명감이 전도에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업 때문에 고민 합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안절부절 합니다. 어떤 때는 두통약을 먹고 신경안정제를 먹습니다. 그러나 전도 때문에 스트레스에 싸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득불 해야 할 일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16).
여기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은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습니다(행 9:1-9). 그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였고 복음 전파의 명령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산 포로요 노예였습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바울의 자세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신혜숙이라는 간호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엄청난 타박상을 입은 여자 환자가 의식이 몽롱한 채 입원했습니다. 아마 어느 기도원에서 충격요법으로 매를 많이 맞았는지 전신에 명이 들고 터진 자국 투성이었습니다. 환자는 아무런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혜숙양은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최성림씨, 여기는 당신의 병을 고치는 병원입니다. 당신의 병이 낫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나을 것입니다. "라고 환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물론 환자는 그 말소리를 들을 턱이 없었지만 하루에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주일이 지나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몽롱한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입원한지 6주쯤이나 되었습니다. 하루는 출근하였더니 그가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습니다. 간호원은 너무나 기뻐서 환자의 손을 잡고 축하한다고 하자 환자는 "당신이 신혜숙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만나고 싶었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는데도 이름도 알고 있었고 정성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간호원은 환자에게 소리 내여 말한 것이 환자의 마음에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실화는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믿는 자가 말씀전하는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귀를 닫아버린 세상일지라도 최선을 다합시다. 언젠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닫혀진 귀가열릴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의 좌에 대해 에스겔선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의 좌에 대해 에스겔선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겔 3:17-18)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여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은 곧 우리를 이 민족에 대한 파수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든지 안 듣든지,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안 듣고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아 그들이 망한다면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까? 바울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만일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 한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로 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만큼 큰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달란트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한 달란트를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장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만 받고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화가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바라기는 아무도 이 무서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5)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맡은 직분을 이행하지 않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17). 그가 맡은 직분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복음전파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교회의 책임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누가 뭐라 해도 선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영혼 구원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 책임을 등한히 할 때, 교회가 이 사명을 이행치 않을 때, 그때는 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제정 러시아 때 신자의 수는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 사업은 하지 않았습니다. 못살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간절한 권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큰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받은 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분명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가 이 큰 책임을 외면한다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사는 길은 복음의 전파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는 길도 복음의 전파입니다. 우리나라가 사는 길도 그러하고, 인류가 다 함께 사는 길도 전도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 배가전도는 물론, 갑절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이리 선교교회 이정건 목사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45,000원의 소액환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이 헌금은 저희 교회 집사님 아이들이 졸업식 시즌에 학교 앞에서 꽃을 팔아서 남긴 수입금 전액을 저에게 기탁해 왔기에 이 돈을 다른데 쓰는 것보다 새로 시작한 신학교에 헌금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줄 알고 적은 액수이지만 보내 드립니다"라는 사연이 쓰여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로서 이런 정신이 있는 분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어려우면서 매달 선교비를 정성스럽게 작정하여 봉헌하는 종들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은 있습니다. 복음전파와 개척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종들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은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말했습니다. "전도자를 길러내지 않는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그들을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교육이란 무엇 위해 있는가?
그들을 태워 운송하지 않는다면 상업이란 무엇 위해 있는가?
그들을 파송하지 않는다면 돈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전도의 목적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생 그 자체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
찰스 셀돈(Cha, les M. Sheld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교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선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달하기까지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음으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전도가 제자들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 하셨고, 그가 "가라"고 명하셨을 때 그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예수의 불복종의 종이 될 것이고, 만일 구원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내가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질 때까지는 내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항상 편협해지고 또 자기가 가진 세상의 이상을 상실하기 때문에, 선교사는 오늘날 세계의 현재 역사적 위기에 있어서 세계의 가장 위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
3. 씨를 뿌리려 나가는 자
3. 씨를 뿌리려 나가는 자
(시 126:1-5)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시편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스런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오늘 우리 본문 말씀 중에는 바벨론이란 잘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바벨론 포로가 가장 주목할 만한 포로였고, 또한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도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에스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 구원의 역사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해방된 그들은 꿈인가 생시인가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할 정도였습니다(1).
첫째, 그 구원이 너무나 크고 기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구원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인인 바사 왕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2) 이 일을 두고 열방 중에서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고 말했습니다(2).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신 것은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죄의 포로 중에서 구원하신 것도 큰일입니다. 우리를 회개하게 하신 것도 엄청난 일입니다. 죄 속에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사 하늘의 평화와 자유를 맛보며 살게 하신 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난 때 우리는 죄 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이 세상 풍속을 좇았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같은 대사를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요엘선지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땅이여 두려워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2:21)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의 전반부도 바로 이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포로 중에 남아있는 자들을 위하여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4).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격려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
성도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뿌듯한 격려입니까?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기 원하십니다.
(1)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남다른 고생과 슬픔이 따른다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합니다.
(1)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남다른 고생과 슬픔이 따른다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합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울어야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에게는 고생과 슬픔과 눈물과 괴로움이 많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삭을 거두는 일에 비하여 씨를 뿌리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파야하고, 돌과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수확하는 데는 불과 몇 시간만 소요가 되지만 파종에는 오랜 준비와 고되고 힘든 노동이 요구됩니다.
또 씨앗을 뿌리는 일은 이삭을 거두는 일에 비하여 외롭고 힘이 듭니다. 대개 수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밭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자는 외롭게 혼자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컨대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에게는 눈물겨운 고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다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8).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는 종종 눈물과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데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육신의 정욕과의 투쟁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2)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그 어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해 줍니다.
(2)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그 어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해 줍니다.
우리 함께 5절과 6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여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의 정황과 현실은 눈물과 불행입니다. 그는 씨를 뿌리면서 눈물 흘려야 하고 씨를 뿌리기 위하여 탄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눈물로 끝나지 아니하고, 수확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결코 울다가 지쳤다고 말하지 많습니다. 눈물로 탄식하다가 한평생을 마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괴롭고 답답한 인생 포기해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무 낙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은 눈물겨운 정황이지만, 그 어느 날엔가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처지는 울면서 씨를 뿌릴 수밖에 없지만, 어느 먼 훗날에는 기쁨의 단을 안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소망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수 없이 많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욱 있어야 할 것은 내일에 대한 꿈과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꿈이 없이는 못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 했습니다. 해석하면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꿈이 없으면 못사는 것이 인생이란 의미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국과 영국군의 포로 20,000명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중 8,000명의 포로가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영양실조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질병으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과로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조사보고서는 그들의 사망원인은 절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제2차 대전 중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지하감방에서 무서운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안했습니다. 그들은 지하 감방의 벽에다 손톱으로 이 같은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비록 태양빛이 우리에게 비취지는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
유대인들은 캄캄한 지하 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금 역사상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언젠가 기쁨의 단을 거두리라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데로 "인간은 희망에 기초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소유는 다 빼앗긴다 해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은 갖기 원한다. "
성도 여러분, 비록 고달픈 삶이 계속된다 해도 결코 이 소망을 잃지 않기 원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도 부요한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몸이 약하고 병들었어도 언젠가는 건강케 되리라는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지라도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신앙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나아가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언젠가 추수하는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3) 그러므로 나아가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언젠가 추수하는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5절과 6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읍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눈물의 파종과 수고 끝에는 반드시 축복의 보상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고난을 통과한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과정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눈물로 씨를 뿌린 후에는 반드시 기쁨의 추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눈앞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는 인간이 되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상의 축복과 그 약속을 믿는다면 현재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언제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축복의 때는 분명히 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하였습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둡니다. 죄를 심는 자는 죄를 거두고 축복을 심는 자는 축복을 거둡니다. 그런즉 축복의 씨앗은 많이 심어야 합니다.
미국 보스톤 시에 부자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바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스토로사라는 젊은 청년이 그 부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턴씨, 제가 위싱턴에 소매상 하나를 차리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2,000불만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 "담보물이 있는가? "고 거상 바델씨가 물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담보물로 제공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우리 회사 규정에 확실한 담보물 없이는 돈을 빌려줄 수는 없소. " 바턴씨의 말은 듣고 청년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거부 바턴씨는 그 청년에게 왠지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사업가인 흘 에이씨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토로사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는데 보기에 재능도 있어 보이고 인품도 좋고, 신념도 계획도 믿음직스런 사람이요, 돈을 담보 없이 빌려달라고 하는데, 빌려주어도 괜찮을까요? " 이 말을 들은 홀 에이씨는 "어리석은 일이요. 맨주먹의 젊은이에게 2,000불 씩이나 빌려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심중에 결심했습니다. "돈을 은행에 넣어 두는 것보다는 이 유망한 젊은이의 앞길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이 있을 것이다"라면서 무담보로 2,000불을 빌려주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재계에는 일대 공황이 왔습니다. 거상 바턴씨도, 홀 에이씨도 다 망했습니다. 그들은 재기불능의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토로사가 바턴씨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부채를 지고 있습니까?" "75,000달라요" "그러면 제가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 전에 선생님이 빌려준 돈으로 장사하여 큰돈을 벌었습니다. "
바턴씨는 놀라면서 "아니 그때 그 돈을 다 받았는데 또 뭘 준단 말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스토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빌렸던 돈은 다 갚았지만, 도와주신 은혜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얼마라도 도울 수 있다는 그것은 나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액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바턴씨는 그 돈을 받아들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도 후일 불행을 딛고 일어나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왕관은 가시면류관이었습니다. 그가 승리를 거두신 십자가는 죄인을 처벌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는 무덤조차 남의 무덤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사 영광의 왕이 되셨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로마의 카타콤에 뿌린 성도들의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박해자 네로에 의해 뿌려진 성도들의 순교의 피는 후일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울며 뿌린 믿음의 씨앗들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날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오실 때 흰옷입고, 손에 종려가지 들고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설 자들은 누구입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들"이 아닙니까?
4. 나가서 데려오라
4. 나가서 데려오라
(눅 15:14-24)
거룩한 성일에 우리 은광식구들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환절기에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큰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도 이 큰 잔치가 나오는데 거기는 "혼인잔치"로 나옵니다(마22:2) 사람들은 이 큰 잔치에 대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천국잔치라 부릅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큰 잔치" 혹은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61:10,62:5,마9:15,요3:29,계19:7-9).
오늘 우리 본문말씀에는 이 큰 잔치를 베푼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물론 그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푼 큰 잔치,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잔치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많고 많은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잔치입니다.
성도 여러분께서도 많은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잔치집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요사이는 세상이 많이 변해서 부담되는 잔치의 초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빈손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오늘 이 잔치는 전연 부담이 없는 잔치입니다.
마음 놓으시고 우리함께 이 잔치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1)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랑을 초청 했습니다.
(1)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랑을 초청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풍속에 의하면, 누군가가 잔치를 베풀고자 할 때, 그 일시를 미리 알리고 초청장을 사전에 발송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잔치 시간은 알리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 잔치날이 돌아와서 만반준비가 다 되면, 종들이 나가서 미리 초청된 손님들을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손님을 모십니다. 지금도 증동지방에서는 두 번째 종들이 전하는 초대의 말은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배설하신 큰 잔치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잔치이겠습니까? 거기에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미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구미에 맞는 최고급 요리가 준비되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침이 삼키울 정도의 맛있는 요리입니다.
아무런 부담이 없는 잔치입니다. 초대된 사람은 누구나 가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및진 천국잔치를 배설해 놓으시고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청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같은 잔치에 청함 받았다면 가시겠습니까? 거절하겠습니까? 물론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합시다. 우리는 천국잔치에 청함 받은 자들입니다. 천국의 축복과 기쁨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2)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2)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이러 합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18).
여기 사양하였다는 말은 거절했다는 것입니다(딤전4:7)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대표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그들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다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나는 밭을 믿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투기꾼이나 복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산 맡은 뒷날 가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소를 시험하는 것은 다른 날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셋째 번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잔치의 초청에 거절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아내와 함께 그 잔치에 참석했더라면, 정말 더 기쁜 잔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잔치집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면, 그 친절한 잔치집 주인은 "꼭 그녀와 함께 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 때문에 못 간다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중심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왜 핑게 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왜 천국잔치의 축복스런 초청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무지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잔치의 축복을 알았다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2) 우선순위의 착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문제에 대한 것만 생각했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가치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에만 주안점을 두었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3) 인간의 부패한 마음 때문입니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첫째 사람은 "불가불 나가 보아야겠다"면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은 변명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고, 세 번째 사람은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이렇게 완악합니다.
(4)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사양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가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잔치 따위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요2:15).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 세상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마취국"(Enchant land)이라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사람들을 유인하여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사랑하는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세상 사람들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눈을 감고, 세상 사람들의 죄 속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시1:1)
홍인종에게 전도했던 위대한 종 대비드 브레나드의 고백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된 세상아 잘 가거다. 나의 영혼은 너를 작별하노라.
구주 예수님은 날 가르치시기를 널 버리라 하신다.
네 매력은 정욕의 마음을 만족케 하나, 하나님의 영을
기쁘게 못하도다.
나를 미혹하기를 그쳐다. 내 영혼을 부르지 말아라.
이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결정
하였도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늘 영광을 보게 하시는 동안 네
아름다움은 스러지고, 내 마음에는 네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
성도 여러분, 천국의 아름다운 잔치에 초청을 받고서도 거절하는 저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그 초청을 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로 없는 죄인들에게까지 이 엄청난 사랑이 미치고 있다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이 축복을 거절한 저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하는 염려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면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할 일이 아닙니다
(3) 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초청자들에게 거절당하자 화가 났습니다. 주인은 증들에게 말했습니다.
(3) 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초청자들에게 거절당하자 화가 났습니다. 주인은 증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교훈은 "나가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되고 있음을 보아서입니다.
우리 함께 21절과 23절을 읽어 봅시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여기 보면, 두 절에 다 "나가서 데려오라"는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은 중요성과 강조성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큰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리고 초청자들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와주지 안했습니다.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종들에게 전해 듣고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말했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종각과 십자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종을 치면서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곳곳마다 전도자를 세워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천국잔치에 대한 초청장은 온 세계 방방곡곡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큰 잔치에 초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양했습니다. 이 핑게 저 구실을 대면서 잔치에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잔치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제 화가 나셨습니다.
그는 말씀 하셨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1) 왜 나가야합니까? 나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친국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잔치에 참여할 자를 찾으러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눅19:10)
(2) 그러면 어디로 찾아 나아갈 것입니까?
21절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라고 말합니다. 시내의 거리는 넓은 길이요, 골목은 좁은 길을 말합니다. 또한 전자는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요, 후자는 빈민층의 거리입니다. 23절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외의 거리를 말합니다. 거리와 골목은 시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길과 산울은 시외에 있습니다. 상징적으로는 전자는 유대인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말하고, 후자는 이방인을 가르칩니다.
요컨대 전도자는 도시나 농촌,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나가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로는 빈부귀천, 남여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우리의 전도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불쌍하고 의지 없는 자들입니다. 멸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석가 벵겔은, 이들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밭을 샀다고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병신들은 장가 못 가는 자들이니 장가갔다고 사양치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소경들은 맡을 보러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들은 밭갈이 하러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돈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의 초청장은 아무에게나 보내지지만 응답자는 주로 이 천한 자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은 교만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여 감사 합니다.
순종하는 성도들이여 찬양합시다. 천국은 바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자, 이제 사람을 데려오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합시다.
어떻게 데려올 것입니까?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했습니다. 여기 강권한다는 말은 강제나 폭력으로가 아닙니다. 강한 설득과 눈물겨운 호소와 정성어린 기도를 의미합니다. 왜 강권하여 데려와야 합니까?
1:이 세상에는 끄는 대로 따라다니는 부평초 같은 인생이 많기 때문입니다.
2:주저하고 망서리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3:더러는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4:아직도 빈자리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아직 빈자리가 많이 있고 우리 교회도 빈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지금뜸 천국도 만원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공동묘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오히려 자리가 비어있나이다"라는 종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부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껏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잔치에 "나가서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가서 데려와야 합니다. 나가야 합니다.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데려와야 합니다.
뉴헤브라이드즈 군도의 어느 장로교회에는 이런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존게디 목사가 1846년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이 섬에 그리스도인들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1872년 존게디 목사가 이곳을 떠났을 때에는 이곳에는 이교도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 섬의 인구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하여간 그는 26년 동안 복음전한 일에 헌신한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될 수는 없겠습니까?
"내가 믿기 전에는 우리 집은 모두가 불신자였다. 내가 믿고부터서 우리 집에는 불신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까?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는 말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는 우리의 무능과 우리의 불충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살며 존경을 받았던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앉았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장례식 때 목사는 한 번도 빈 적이 없는 그의 자리가 비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리고는 저 하늘 위를 가르치면서 "그러나 지금 저기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천국가신 성도들의 빈자리도 채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껏 채우지 못한 빈자리도 나가서 데려다가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기 때문입니다.
빈자리를 채우는 일에 열심 있는 성도를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가서 데려옵시다.
(88.11. 6)
5. 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
5. 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37-42)
전도 주일을 보름 앞두고 온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여러분의 수고를 주님께서 받으시고 큰 축복 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는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이 교회의 성장은 세 방면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양적 성장입니다. 물론 교회 회중의 증가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말씀에 보면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하였고(2:41), 다른 곳에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하였으니(행4:4), 이는 숫자의 증가 곧 양적 성장을 말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둘째는, 질적 성장입니다. 이는 신앙의 내적 성장을 말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어른스럽게 자란 것을 말하고,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자란 것을 의미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곧 질적인 평가를 의미합니다.
셋째는, 문화적인 성장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마28:19-20). 모든 족속에게 가서 가르치고 제자 삼는 것은, 모든 문화 모든 계층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라는 성장, 곧 이상적인 성장은 이 세 방면의 조화된 성장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부흥은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보편화된 교회 성장의 개념은 주로 양적 성장만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의 첫인사는 의례 "당신 교회는 몇 명이나 모이느냐?"입니다. 그리고 "많이 모인다"고 자랑하면 "부흥했다"면서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적 성장 없는 교회의 부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양적 성장도 그 형태에 따라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이 양적 성장은 주로 세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방법입니다. 이는 출생으로 말미암은 교회성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생물학적 방법에 의한 성장은 현저히 둔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첫째 이유는 출산의 둔화입니다. 이는 산아제한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자녀를 바로 가르치지 못하여 그들을 교회 밖으로 빼앗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의 둘째 방법은, 이전(이동)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는 전입에 의한 성장입니다. 이는 교인의 이동에 불과 합니다. 특히 도시 교회나 개발지역에서 많이 보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성장의 셋째 방법은, 회심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는 개종에 의한 방법을 말합니다. 불신자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출산과 이동과 개종이외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세 방법 중에서도 출산은 소망스런 방법이기는 하나, 장기간을 요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 다음, 이동에 의한 교회 성장은 가장 쉬운 방법이기는 하나, 그런 경우가 흔하지 많습니다. 더러는 또 이사가 기도합니다.
개종에 의한 교회성장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또한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방법이요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전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교회가 힘써야 할 일입니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고 있고 예수님이 취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주일을 정하여 이 일에 힘쓰는 것도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교회성장과 그 모범을 배우기로 합시다.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행적에 관한 책입니다.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행적에 관한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쓰여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핵심적인 구절은 1:8절입니다. 그리고 핵심적인 단어는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에 증인이라는 말은 39회에 불과하지만 소수의 증인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증인이란 본래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증거하는 선지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복음을 증거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석가 벵겔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증인에 의해 확장된다"고 말했습니다.
주께 구속함을 받은 예수의 증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이런 충성스런 증인들로 말미암아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면서 유대인 사회에 전파되었습니다(2:5-11). 그리고 헬라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6:8-7:60) 두터운 사회적인 장벽을 뛰어넘어 사마리아로 넘어갔습니다(8:4-5). 그리고는 에디오피아로 건너갔습니다(8:36-38). 종족을 초월하여 흑인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그 후에는 로마인인 고넬료에게까지 전파되었고(10:1-11:18), 이방 사회를 거쳐(11:19 -20)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28:30-31).
복음은 또한 충성스런 증인들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복음의 센타였습니다. 복음은 거기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뻗어 나갔고,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거기서 예배소로, 거기서 다시 로마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다시 로마에서 영국으로 전파되어 갔고, 그 복음은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의 충성스런 선교사들은 한국에까지 그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복음의 센타가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복음이 한국교회에 의해 중국에 전파되고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면, 이때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영적인 상태를 보면, 유럽의 교회는 깊은 잠에 빠져있고, 미국의 교회는 졸고 있고, 한국교회는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의 아침 7시는, 미국 뉴욕은 피곤해 지쳐서 졸음이 오는 오후 5시이고, 파리는 밤 10시, 런던은 밤 11시로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국교회의 세계적인 선교의 사명을 말해 줍니다.
이제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거기 보면 열심 있는 증인들에 의해 구원받은 수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수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1:15). 며칠 후 그 수는 3,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2:41). 구원받은 수는 날마다 증가했으며(2:47), 비록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었음에도 또 불구하고,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남자만 5,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4:4). 뿐만 아니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하였고(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6:1,7).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설립되어 견고하여 졌고(9:31), 유대인 중에 만도 믿는 자가 수만이나 되었습니다(21:20).
초대 교회는 이렇게 급성장하여 갔습니다.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새 신자들로 가득가득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무리는 벌떼처럼 구름떼처럼 일어났습니다.
(2) 초대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초대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대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성장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 합니다.
(1) 성령의 역사입니다.
(2) 교회의 열열하고도 담대했던 전도활동입니다.
(3) 또한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인 여건입니다. 당시는 문화의 장벽이 심각하지 않았으며, 지금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장벽이 높지 않았으며, 지중해 세계에 통용되는 공통어가 형성되어 있어서 언어의 장벽이 없었습니다. 또한 로마로 말미암은 정치적인 통일로 교회성장의 큰 장애가 없었습니다.
(4) 성령 받은 성도들은 열심히 모였고, 기도에 힘썼습니다(2:42,46).
(5) 한 가지만 더 추가 한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1).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 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교회의 열열한 전도 없이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렇게도 급성장 했던 이유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다 평신도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성령 받고, 모두가 다 길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를 쏘아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강점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열하고도 간절한 전도에 이교도들이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끌려나오자마자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루 몇 천 명씩 구원받는 수가 더해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의 그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들을 본받으면 됩니다. 그들처럼 모여 기도하고, 그들처럼 나가서 담대하게 전도하면 그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처럼 살려고는 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축복을 바라고만 있다는데 문제는 있습니다.
나무를 심으려는 수고는 하지 않으면서, 열매를 따를 즐거움만 누리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둡니다. 기도하는 자는 응답 받고, 전도하는 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데 오늘의 비극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정신만 차린다면 우리 교회의 부흥은 물론 우리 조국의 복음화는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한국에는 천만 신자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만일 이들이 한 해에 한 사람씩만 주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한다면, 1년이면 2,000만이 되고, 2년이면 4,000만이 되어 조국의 복음화는 2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한국에 1사람의 교인만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한사람이 1년에 한 사람씩 믿게 하고, 믿은 그 사람이 1년에 또 한사람씩 구원받게 한다면, 전국의 복음화는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한 번 계산해 봅시다. 1년이면 두 사람입니다. 2년이면 네 사람입니다. 3년이면 8인입니다. 4년이면 16인입니다. 5년이면 16인입니다. 6년이면 64인입니다. 7년이면 128인입니다. 10년이면 4,096인이 됩니다. 20년이면 1,048,576인에 이릅니다. 그러나 26년이면 67,108,864명이나 됩니다.
다시 말하면, 26년 만에 남북한을 다 복음화 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사실 한 해에 한 사람씩 예수 믿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또 전연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 사람이 한사람 인도하면 일천 교인 이천 된다"는 표어를 언제까지 내걸어야합니까? 왜 이 일을 성취 못합니까? 그 이유는 "당회장목사가 무능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사실 저는 무능합니다. 그 다음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목사가 무능해서입니까? 그 다음은 전도사가 무능해서입니까? 그 다음은 또 누가 무능해서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정직합시다.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1천 교인 모두가 한 사람씩만 구원받게 했다면 우리교회는 벌써 2천 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금년에도 배장 좋게 그대로 지내시렵니까? 오늘부터 전도주일 준비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배장 좋게 그대로 주무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렘48:10).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도를 게을리 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는 성경말씀을 듣지 못했습니까? (고전9:16).
축복을 받아야 할 우리가 왜 저주를 받아야합니까? 은혜를 받아야 할 우리가 왜 화를 받아야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72년 6월 1일 세상을 떠난 부흥사요 저술가인 윗치만 니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폐 영리하고 명석해서 항상 교만했다 합니다. 그는 동급생들을 주께 인도하려했으나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 미스 그로스(Miss Grose)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일 년 동안에 몇 사람이나 인도했느냐? " 그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했지만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전도하기 전에 자기의 죄를 다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0명의 동급생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매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간증했습니다. 또기회 주시는 대로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했을 때 더러는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전도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그의 명단에 기록된 70명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간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정합시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찾아가서 전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우리에게 붙여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춰리라"(단12:3). 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8.11.13)
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9-14)
성경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 충성스런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잠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2513).
엘리야야 말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 얼음냉수 같은 자일 것입니다.
A. W 핑크라는 분은, 구약성경을 다 읽은 후 책을 덮으면서 기억에 떠오르는 인물 두 분을 말하는데 모세와 엘리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세가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한 구국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와 암흑 속에 헤매는 조국과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 기독교뿐 아니라 구교는 물론, 심지어는 유대교와 마호메트교까지도 숭배하는 죽지 않고 승천한 자요,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고 기대되는 인물입니다.
1) 우리 기독교에서는 모세와 비교하는 위인이요, 정신산맥으로 평가합니다.
2) 유대교의 탈무드(Talmud)에는 엘리야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는 어질고 선한 랍비들에게 자주 나타났고 어린이 할례시에나, 유월절 행사시에는 그의 좌석이 마련된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집 문을 열어 놓으며 그가 와서 메시야를 선포하도록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3) 희랍에서는 그를 산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시고 높은 곳에서 숭배했다고 합니다.
4) 동방교회(희랍정교회)에서는 7월 20일을 엘리야의 날로 정하고 그가 태어났다고 믿는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중간에 수도원을 지어 기념한다고 합니다.
5) 서방교회(로마교회)에서도 갈멜산에 수도원을 지어 기념해 오고 있으며,
6) 마호메트교에서는 스가랴, 세례 요한과 함께 위대한 선지자로 믿고, 그가 영원한 샘물을 발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엘리야선지가 만인의 추앙과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증거합니다. 엘리야(Elijah)란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는 "길르앗에 사는 디셉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왕상17:1). 그는 B.C 9C의 북왕조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나타나 아하시야 왕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예언활동을 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행한 역사는 놀랄만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합에게 선언한 말입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왕상17:1).
둘째는, 사르밧 땅 가난한 과부의 생활을 보장하였습니다.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가뭄이 다할 때까지 계속 나오게 하였고 과부의 아들이 중병으로 죽었을 때 살려주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17:21-22).
셋째는, 엘리야는 감히 아합 앞에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이 도탄에 헤메이게 된 원인은 두 가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고 2) 바알을 좇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입니다.
넷째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을 갈멜산에 모으게 하여 참 하나님을 보여줌으로 통쾌하게 그들을 숙청한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습니다(약5:17-18).
다섯째로, 그는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에 비를 내리게 하여 그 백성을 살게 하였습니다(약5:17-18).
여섯째,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이 순순히 허락하지 않자 그는 병까지 들었습니다. 사악한 그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아합의 살인을 비난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예언하였습니다(21:1-25).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은 후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한 자입니다(왕하2:8-11). 과연 엘리야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불의 선지자요, 능력의 사람이요, 병거타고 승천한 엘리야였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천사도 아니고, 수퍼맨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잔인무도한 이세벨의 도전을 받고는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루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19:4). 그리고는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다시 호렙산에 이르렀으나 그곳 굴에 들어가서 피신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지난주에 이어 두어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뜻은 아주 쉽습니다.
(1) 그것은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회피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1) 그것은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회피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서야 할 자리가 있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고 하신 것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한 자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선지자보다 더 오래되고 중요한 직책은 제사장직입니다. 제사장은 성소를 맡은 자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요, 제물을 맡은 자입니다(대상24:5). 이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중재하기 위하여 임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이 조직될 무렵 제사장직은 매우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 제사장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자들로 임명되었으나, 그들은 세습되는 제도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가장 악한 자들도 그 중에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선생이었으나 백성들의 죄를 규탄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죄에 빠져 죄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장과 왕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학교를 세워 선지생도들을 양성하게 된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송아지 우상과 바알 우상을 섬기게 되고, 남왕국 유다에서도 바알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이 활동한 선지시대는 B.C 800-B.C 400년여 간의 400년간입니다. 주로 16명의 선지자가 활동했었습니다. 이 선지시대의 중심사건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해가는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습니다.
이들 선지자들은 1)정치적 부패를 탄핵하였습니다. 2)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무감각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3)그리고 민족적 압력과 도덕적 부패를 염려하였고 4)우상과 죄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5)그리고 다윗의 계보에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수난과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습니다.
메시야의 선지라고 불리우는 이사야선지는 므낫세의 우상적 법령을 반대하다가 두 장의 판자사이에 끼여 톱으로 살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상으로 망해가는 조국을 위하여 골고다 아래 있는 예레미야 동굴에서눈물을 흘리며 애가를 했고, 또 투옥당하고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들 선지자들은 악한 왕과 싸웠습니다. 우상과 싸줬습니다. 죄와 싸웠습니다. 그러자니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멸시당하고 갇히고 조롱받았습니다.
아합왕의 횡포와 간악한 이세벨이 핍박은 너무나 무섭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붙잡히기만 하면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바알신당과 아세라의 신당은 곳곳마다 세워지고 있었고 여호와의 성전은 가는 곳마다 훼파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한 사람 두 사람 바알과 아세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준 자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은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하나이다"(19:10).
그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양어깨에 맨 선지자요, 기둥이요, 보루요, 파수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지자의 직책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렙산 깊숙한 굴속에 피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신 것입니다.
너를 세우신 하나님을 실망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짊어진 책임만은 감당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켜야할 진리만은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처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2) 그것은 사명 망각을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2) 그것은 사명 망각을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네가 여기와 있다면 네가 받은 사명을 어찌되겠는가? "고 걱정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 굴속에 있느냐?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이곳에 숨어 있어도 괜찮은가? 지금 같은 위기에 너 같은 선지자가 은신할 때인가? 지금은 너 같은 선지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파수꾼(Tsaphah)은 앞을 내다보는 자입니다(seer). 그들은 또 죄악에서 돌아서도록 외쳐야할 선지자입니다(prephet). 그리고 그들은 지키는 자요, 망을 보는 자입니다(watchman). 그런데 이 같은 사명을 받았으면서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 이사야선지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다. 능히 보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사56:10). 모두가 다 받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저버린 엘리야에게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는가?"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 앞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이 해야 할 바 책임을 이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를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유대인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이 온 국민을 불러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음식은 왕이 마련하고 참석자 모두는 포도주 한 병씩만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잔치날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다포도주 한 병씩만 가지고 왔고 그것은 큰 동이에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그 포도주를 잔에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술은 맹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포도주를 가지고 올 것이니 자기 한 사람쯤은 술 대신 물을 가져와도 모르겠거니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가 다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려면, 모두가 다 포도주를 가져와야 합니다. 정말로 멋있는 잔치가 되기 원한다면 모두가 다 잔치를 위하여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및진 잔치를 즐길수 있는 것입니다. 家貧에 恩賢妻 하고, 國難에 思賢相이라는 글귀가 더욱 절실해집니다.
오는 10월 23일 주일은 총력전도 주일입니다 이날에 맹물을 가져오는 이는 한 분도 없을 줄 믿습니다. 이 날의 멋진 잔치를 위하여 모두가 맛있는 포도주를 준비합시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책망을 받는 자는 아무도 없기 원합니다! 아멘.
(83.9)
7. 내 증인이 되라.
7. 내 증인이 되라.
(행1:6-11)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가슴 떨리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요절이요, 요약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직접적인 위임 명령으로써 승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유언적 지상명령입니다.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위에 내려진 하나의 사명이며 또 그것은 교회의 선교에 관한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곧 승천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1:9).
예수님은 이후에 지상에 남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말씀은 가장 뜻 깊은 유언인 것입니다.
유언이란 어떤 사람이 사후에 법률적 관계를 발생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독적이요, 자발적인 의사 표시를 말합니다. 유언은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략 상속분의 지정, 유산의 분할 방법, 후견인의 지정, 유언집행자의 지정 등 내용의 다양성에는 한이 없습니다.
유언을 하는 방식에는 1) 자필증서, 2) 녹음, 3) 공정증서, 4) 비밀증서, 5) 구수증거 등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언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유언은 범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언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을 건 최후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집 세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청개구리는 어찌나 성격이 비뚤어지고 괴팍했던지 어머니의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어머니가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그는 왼쪽으로 갑니다.
또 왼쪽으로 가라하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그는 웃어야할 때이면 울고 울어야할 때는 웃는, 철저하게 심술궂고 불순종 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자랑으로 삼는 그런 청개구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못난 아들에게 시달려 심장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어미 청개구리는 죽은 후 무덤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청개구리의 평소의 소행으로 보아서 산에 묻어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그 반대로 물가에 묻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지막 유언으로 "나의 무덤을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유언을 들은 아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유언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대한 자신의 불효와 불순종을 뉘우치면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순종하여 생전의 불효를 씻기 위하여 어머니 말씀대로 냇가에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습니다. 물은 넘쳐흘렀고 어머니의 무덤은 흔적조차 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것을 청개구리는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 생각이 나서 울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깊은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못난 자식도 유언만은 불순종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언은 법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유언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성전을 지으라"는 다윗의 유언은 그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실히 지켜졌습니다. 야곱의 유언과(창49:29), 가나안 땅에 해골만이라도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요셉의 소망은(창50:24-26), 그 자녀들에 의하여 이행되었고(창50:12-14), 모세에 의해 어김없이 지켜졌습니다(출13:18-19,수24:32). 방탕아 어거스틴도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섬기던 제단에서 네 어머니를 기억해 달라"는 그 어머니 모니카의 최후 유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돌아와 성 어거스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언은 이처럼 심각하고 범할 수 없는 법적 효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을 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는 예수님의 장엄한 유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주님의 유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또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16:15-16).
누가복음에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24:48).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주님의 마지막 교훈들입니다. 즉 유언들입니다. 그것은 곧 전도임을 거듭거듭 강조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한 말씀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막1:38). 사도 바울도 최후의 말로서 그가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임을 강조 합니다(행20:24). 그는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하면서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딤후4:2,5).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유언만은 아닙니다. 그의 첫 음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고(마4:7), 세례 요한의 첫 음성도 그것이었고(마3:2), 70인 전도인들도 그렇게 외쳤습니다(막6:12).
예수님의 전 생애는 복음전파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알파와 오메가도 전도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은 그의 공생애의 시작과 끝을 전도로 삼았습니다. 주님은자신이 그 복음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애를 걸고 이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주님이 하신 그것을 본받는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은광교회의 존재 의의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점사업도, 지상과업도 이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엡1:22,5:23)
그런즉 예수의 교회로서 이 일을 등한히 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의의를 망각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발 벗고 나서서 전도 대상자를 찾아 그들을 주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유언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거기에는 축복스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1)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1)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례하시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기뻐하십니다. 봉사와 충성과 희생과 기도와 순종과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시고 받기 원합니다.
둘째는 전도의 결과로 얻어지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봅니다. 잃은 양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와 잃은 아들(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의 공통된 주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것입니다(눅15:7).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는 죄인을 또한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녀들이 우리 아버지를 더욱 기쁘시게 해드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쁨과 감사는 더욱 넘칩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쁨과 감사는 더욱 넘칩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설립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모하고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빌4:1).
우리가 전도할 때 믿겠다는 말을 들으면 기쁩니다. 그가 약속대로 교회에 찾아오면 정말 기쁩니다. 교회를 봉사하는 중에 괴로운 일이 많고 힘 잃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신자가 잘 믿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신앙이 장성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3서1:4). 70인의 전도보고에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눅10:17-20). 예수님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려운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3) 우리가 영화로운 복음을 선포할 예 우리교회의 빈자리가 매꾸어진다는 사실입니다.
(3) 우리가 영화로운 복음을 선포할 예 우리교회의 빈자리가 매꾸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빈자리를 섭섭해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강권하여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빈자리는 없애야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1)빈자리는 쓸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2)빈자리는 은혜 없는 결과처럼 보입니다. 3)빈자리는 힘을 잃게 합니다. 4)빈자리는 처음 찾아온 이에게 다시와 보고 싶은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5)빈자리는 뜨거워지려는 성도들의 마음속 열기를 식혀 버립니다.
교회집회 인원의 최상의 상태는 빈자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시간 지나서 온 분들이 서서 예배드리는 상태입니다. 안내 집사님들이 자리로 안내할 수 없어서 쩔쩔매는 상태입니다. 우리교회의 당면 목표는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숫자로 표시한다면 1,200여명의 집회 인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빈자리가 메꿔지는 길은 오직 세 길 밖에 없습니다.
1) 이사 온 교인이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전입자에 의한 증가입니다(Transfer in growth). 이것은 항상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2) 교인들이 자녀를 많이 낳는 길입니다(Biological growth). 이것은 생물학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더디기도 하고, 현 상황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3) 제일 좋은 방법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심자에 의한 성장이라 합니다(Conversion growth). 예수께서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신 것도 바로 이 방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성장한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고난을 무릎 쓰고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한 초대교회는 제자의 수가 날마다 증가했습니다(행2:47). 많이 거두려면 많이 뿌려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면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 예수님의 이 유언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우리는 이 유언에 지배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교회 그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시다!
(83.9.18)
8. 가서 고하라!
8. 가서 고하라!
(왕상 19:9-14)
"우리가 전쟁의 위기에서 이 세상을 구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전쟁이 우리에게 종말을 선사할 것입니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입니다.
전쟁이란 정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 몇 가지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사 이래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B.C 3600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평화가 유지된 것은 292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사는 곧 전쟁사라고 할만 합니다. 대소 전쟁은 그만두고 기록상에 남아있는 전쟁만도 14,513회나 된다고 하며 전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은 사람은 자그마치 37억으로 지금까지 지상에 생존했던 인구의 약 4분의 1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조억$에 이르고 많은 고아와 불구자와 과부와 이산가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 규모는 적지만 오늘 우리 본문에도 전쟁의 비참함을 엿볼 수 있는 한 예가 있습니다. 아랍 나라는 본래 셈의 아들로그 후손은 유목민이었습니다. 후에 그들은 부족을 이루어 북(타우로스산맥), 동(카볼강), 남(아라비아사막), 서(팔레스틴 레바논산맥)를 경계로 하는 강대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왕하 5장에 보면 나아만은 이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요, 구국공신입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아람나라의 왕은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에게 글을 써 보내면서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여호람 왕은 전전 긍긍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 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함 인줄 알라"(왕하5:7).
우리는 이 말씀만 보아도 당시아람나라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였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아람나라의 벤하닷이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 국토를 유린한 후 여호람 왕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사마리아 성의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성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고 날이 감에 따라 식량은 떨어져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하여 왕하6:24-33절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몇날 며칠을 굶은 여인이 견디다 못하여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먹자"고 제의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함께 자기의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튿날에 일어났습니다. 어제는 남의 자식을 삶아먹기는 했으나 막상 자기자식을 삶아먹을 수 없어서 숨겨버린 것입니다.
사기당한 부인은 이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고소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처절하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이 같은 비극은 또 있었습니다.
1316년 영국에서도 얼마나 무서운 흉년이 들었던지 부모가 자식을 삶아 먹은 일이 있었고, 내용은 좀 다르나, 의령에서는 자식이 노모친을 그렇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전쟁의 와중에 네 사람의 문둥이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버림당한 문둥이들이긴 해도 그들의 생명도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러나 호구지책이 막연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앉아 있어도 죽고, 움직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 자식도 잡아먹는 비극적인 막판에 문둥이에게 올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으로 들어가도 죽고, 아람군에게 항복해도 죽을 운명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서 아람군 진영으로 기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군량미가 있고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람군 진영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조심조심 앞에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찌된 일인지 아랍대군은 온데 간 데가 없고 산더미처럼 쌓인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그대로 두고 어디론지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문둥이들은 우선 실컷 먹었습니다. 배가 부르자 제 정신이 났습니다. 좋은 것은 모조리 훔쳤습니다.
그러고 나니 지금 성안에서 굵어 죽어가고 있는 백성들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면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성 중에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이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아사 직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백성을 살린 문둥이들은 될 수 없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문둥이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 그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 때문입니다.
(1) 그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 때문입니다.
어제만 해도 죽을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산더미 같은 양식과 옷과 은금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숨 쉬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배불리 있고 은금보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배고파 죽어가는 자들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을 수밖에 없는 비극에서 구할 수 있는 양식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9). 당연한 말입니다.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잠잠해서도 안 됩니다. 어서 가서 전해야 합니다. "여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무진장하게 있습니다"라고 알려야할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 구원받은 것만 기뻐하면서 성중의 죽어가는 자들을 내버려둔다면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문둥이들은 어서 가서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고 살 수 있는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믿지 않고 죽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는 영생할 양식이 필요합니다(요6:55). 그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도 생명이 필요합니다.
없는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사는 예수는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잠잠해서는 안 될 이유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살 길은 오직 그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이 잠잠해서는 안 될 이유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살 길은 오직 그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부모님에게 잡혀 먹히고 있습니다. 그 수만의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지금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앉아 있으면 굶어죽고 성문을 박차고 나간다 할지라도 원수에게 죽습니다.
그런데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살 길이 있다는 소식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다름 아닌 네 사람의 문둥이들입니다. 성안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소식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 이들 뿐입니다. 그 소식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소식입니다. 자신들은 배불리 있고 원수는 다 물러가 버렸다는 생명의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성안 사람들에게 필요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알고 있어야 할 소식이 아니고, 필요한 이에게 전해야 할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신 복음은 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만인에게 전해져야할 구원의 도입니다. 이 구원의 도를 몰라서 죽어가는 자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이 소식을 전해줄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복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어서 가서 전해야 할 것인데 잠잠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스코틀랜드에 한 교사가 살았습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찾아와서 중국의 선교사로 가겠으니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왜 불구로 선교사가 되려느냐?"고 묻자 "두 다리가 성한 자들이 가지 않으려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한다는 죄 때문에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간수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밖에 나가 전도만 하지 않는다면 오늘이라도 출옥시켜 주겠다"
번연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오늘 나를 놓아주면 오늘부터 나가서 복음을 전하겠다" 우리 모두의 입에서 이 증거가 있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 교회는 큰 부흥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그들이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이유는 다가오는 위험 때문입니다.
(3) 그들이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이유는 다가오는 위험 때문입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하였습니다(9).
문둥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아람군을 물리친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이 기쁜 소식,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 책임을 이행치 않았을 때의 위험을 직감한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는 바울의 고백도 같은 의미입니다(고전9:16).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예수님의 경고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입니다(눅19:40).
월리엄 부으드(William Booth)는 본래 열심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나 불쌍한 자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하여 불타는 열심을 가진 것은 환상 중 천국에 다녀온 후부터라고 합니다. 저는 그의 긴 간증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에 갔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할 수만 있다면 지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의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천국에 온 자입니다.
그의 독자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전도했는지요? 곧 믿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부으드는 그 청년을 알고 있었으나 버린 자식이라고 전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번째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소식이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내 딸은 당신의 집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전도했습니까? 한 번만 잘 권면하면 믿을 아이입니다"
부스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것이 천국입니까? 괴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다시 세상으로 보내주세요. 한 번만 더 보내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두 번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지금 살아있는 때입니다. 가서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합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복음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복음이 지금 죽어가는 저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만 있으면 우리에게 위험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책망 받는다는 말입니다. 화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합시다. "
(83.10.2)
9.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9.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고전9:14-23)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마다하시고 육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고자 원하는 뜻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눅19:10). 주님은 잃은 양을 찾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l:38). 주님의 공생애 3년은 복음전파였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시작하여(마3:17),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탁과 함께 그의 생애를 마치셨습니다(막16:15). 뿐만 아니라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기대를 피력하셨습니다(행1:8). 우리는 주님의 이 지상 명령에 따라 복음 전파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엄숙한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만에 하나 잘못된 동기로 이 사명을 감당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그릇된 동기로 평가받을 전도운동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에 대한 잘못된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전도가 하나의 취미라면 그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2) 전도에 대한관심도 바른 동기가 아닙니다. 3) 부모나 교회의 소원 때문에 전도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 어떤 이는 전도자가 되어 고난당하는 것을 전도의 동기로 삼습니다. 5) 어떤 이는 그 동기를 박애사상이나 자선에 두는 이도 있습니다.
6) 더러는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려고 전도합니다. 7) 어떤 이는 영광을 바라보고 전도합니다. 즉 이름을 내기 위하여 입니다. 8) 더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하기도 합니다. 9) 어떤 이는 생활문제(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전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에 열거한 모든 것은 다 잘못된 전도에 관한 동기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바른 동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전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고전1:21,마24:14,계7:3,롬10:13-15,막1:38).
2)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마28:19,막16:15,행1:8,요4:15,눅24:33,행8:4). 주님의 명령은 교회뿐 아니고,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3) 전도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고후5:14,마9:36,요21:15-17).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포괄적인 동기입니다.
4) 전도는 불가피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롬10:9-10,마10:33,고전9:16,눅19:40). 그것은 정말로 부득불 할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전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롬1:14). 또 오늘 우리 본문에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고도 하였습니다(16).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전도운동은 이 같은 동기에서 시작하고 진행되어야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전도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의당 해야 할 의무입니다. 둘째, 전도는 부득불 할 일입니다. 셋째, 전도하지 않으면 화를 당 합니다. 호불호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잠잠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은 각성이 없었음을 회개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몇 가지 방법을 개진하고자 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1)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것은 집중의 효과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인간의 힘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26). 수력 발전기를 돌리는 것은 흩어진 방울방울의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울방울이 함께 뭉쳐 쏟아지는 큰 물줄기입니다. 흩어진 기도에는 힘이 없습니다. 흩어진 관심은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영혼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 대상자를 정하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공을 바라는 자는 힘을 집중하라! " 이는 괴테의 말입니다. "사슴을 좇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콜롬부스는 어디엔가 또 다른 신대륙이 있다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항해 자금을 마련하려고 각국의 국왕에게 호소하였으나, 특히 스페인 왕비 이사벨라를 6년간이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는 기어코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하고, 홀로 산 요시다(吉轉太 )라는 일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여름 방학 때 고량전(高梁전)이라는 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그 마을의 유력한 사람인 도메오까라는 분이었습니다. 요시다는 매일 그 분을 찾아가서 안마도 해주고 신앙 간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반기독자였습니다. 예수 이야기 듣기 싫으니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또 그는 우표를 100장을 사서 매일 성구와 편지로 권했습니다. 그러나 도메오까씨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그가 보낸 편지는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시다씨는 낙심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신앙인들에게 부탁하여 도메오까씨에게 좋은 성구와 기도로 전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의 좋은 글을 받아보고 크게 감격하여 하는 말이 "이렇게 참되고 지성을 다하는 사람을 그저 돌려보낼 수 없다.
그는 예물을 받지 않을 것이요, 잔치를 차려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기뻐하는 것은 전도를 받는 일이니 사람들을 모아 그의 전도 강연을 듣자"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을 모으고 마을 사람들까지 모이게 하여 요시다씨의 전도 강연을 듣고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최선의 방법들을 동원합시다. 겨냥하지 않은 탄환은 명중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토끼를 잡으려고 좇는 자는 한 마리의 토끼도 못 잡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부모, 형제, 이웃, 친구는 좋은 전도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정성을 그들에게 집중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잠을 깨워 주실 것입니다.
(2)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2)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도움을 위하여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많은 교인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큰 예배당을 겁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큰 사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맥 빠진 성도들에 대하여 조금도 겁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 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성도를 볼 때 두려워 벌벌 떱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성도를 비웃습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교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전도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 없이 행하는 매사는 다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기도가 필요하지만 영혼을 구하는 전도에, 기도는 더욱 필요합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물러서지 말고 더욱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18:7-8).
우리가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는 때 빈자리는 하나둘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그들을 움직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3)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전도주일에 모든 성도가 다세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그날에 아무도 결석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아무도 혼자 올 수 없습니다. 셋째는, 선택하여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중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선택하여 돕는 일입니다. 1)철야기도 4일밤 참석하는 것과 2) 축호전도 4회 참석하는 것과 3) 새벽기도회 43일간 계속하는 것과 4) 전도지 제작 등 문서전도를 위하여 헌금으로 돕는 일과 5) 전도주일에 3명 이상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중에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이 협조하여 주시고 참여해 주실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중에 3명을 인도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였습니다. 지금 6명을 전도대상자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낙심 중에 있는 분들이고 두 분은 얼굴도 모르는 내외분이고, 두 분은 다른 교회 교인입니다. 마지막의 것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위한 비상수단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전도지와 함께 전도대상자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뒤에는 계속 전화할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이들을 움직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분부대로 그들을 강권할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눅14:23)
사람들은 제 발로 걸어서 예배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나섭시다. 그들을 눈물로 강권하여 인도합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 할 책임입니다.
바울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니라"(16)
주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과 힘을 주기기 원합니다. 아멘.
(83.10.9)
10.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
10.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
(마9:35-38)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사형수, 폭력배, 윤락여성, 비행청소년 등 그늘에서 숨어살던 불행한 사람들의 신앙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그들은 형무소를 이웃집 드나들듯이 한 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수년, 다른 이는 반평생을 형무소에서 보낸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더욱 닫혀져 있습니다. 그렇게도 완고하고, 무섭고, 비인간적인 그들이 어떻게 복음으로 구원받아 양처럼 순진하고, 배꽃처럼 순결해졌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 간증문을 읽노라면 복음의 생명력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요령껏 복음을 전해야 믿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말할 때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것과 둘째는, 어떻게 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중요 합니다. 그러나 신앙 간증을 듣다보면, 이 두 가지 문제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의 방법론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자의 태도는 전도의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결신자들의 대부분은, 복음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터득하여 믿기로 결심하였다기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진지함과, 그의 확신에 넘치는 자세를 보고, 감화와 감동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말을 잘해서 믿게 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또 뛰어난 전도의 방법 때문에 믿게 된 것도 극히 적습니다. 그것보다는 복음의 위력과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에 정복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우리 주님의 유언적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 앞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자랑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또 그들의 자랑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어도, 그를 메시야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의 자랑이 거치는 반석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세례요한은 유대인의 자랑을 여지없이 평가절하 시켰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그가 가진 유대인의 자랑을 미련 없이 포기하였습니다. 그가 포기한 인간적인 조건은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것들입니다(빌3:4-6).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함이라"(빌3:7-8).
바울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그 자랑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거치는 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렘9:23). 바울은 육체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3:21)
솔로몬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고(잠27:1), 이와 같이 자랑은 다 허탄한 자랑인데 그것은 곧 악이라고 하였습니다(약4:16)
자랑은 거치는 돌입니다. 자기자랑, 자긍, 자만, 교만, 자기절대화는 복음의 적입니다. 이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소개한 사람 중에 하나인데 그는 예수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3:16).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요1:27)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앞서 왔지만, 예수는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자라고 소개하고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바쳤고"(빌1: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갈6:14), 누구든지 자랑하고 싶거든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고후10:17)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을 자랑치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최봉석 목사님께서 "예수천당"을 외치며 다니신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고, 앞서간 순교자들이 예수자랑을 버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만을 자랑합시다.
이것이 곧 제일 좋은 전도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로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2)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36).
주님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회당에서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약한 자들을 고치시며 낫게 했습니다. 주님은 가는 곳곳마다에서 우글거리는 병자들을 보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셨을 때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기다"는 말은(Spagchnistheis)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사랑이나 동정 등 감정의 근원이라고 생각되고, 내장, 폐, 심장, 간장이 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의 심장이 감동되었다" "그의 간장이 녹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병자나 배고픈 자나 약한 자나 무능한 자나 지옥으로 향하는 자들을 보셨을 때 그의 가슴이 탔고 심장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유리하며 고생하는 목자 없는 양들을 보았을 때에 그의 간장은 메어지고 아팠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방황하는 양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고생한다는 말은(eskulmenoi) 갈기갈기 찢겨서 가죽이 벗겨진 시체를 의미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여 발은 아프고 털은 빠져 기진맥진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유리한다는 말은(errime noi)완전히 뻗어버린 상태, 녹초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의 불쌍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들을 보았을 때 유혈이 낭자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는 불쌍한 인간들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다보시며 우신 것도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신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들이 불쌍하여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국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도 열려 우리 주위에서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영혼들이 불쌍히 여겨져야 합니다.
(3)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추수꾼이라는 사실입니다.
(3)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추수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은" 이때에 추수꾼으로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70인의 제자들을 이 마을 저 마을로 전도하도록 파송하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눅10:2). 요한복음 4:3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 주님께서는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이 교회나 저 교회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꾼은 모자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두가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구경꾼은 많아도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고민입니다. 욥1:14절에 보면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은 영해하기를 "소처럼 열심히 맡을 갈며 일하는데 나귀처럼 풀만 먹고 놀며 구경하는 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이런 분은 없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손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협조와 충성과 마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귀한 역사에 동참합시다. 만일 여러분이 이 주님의 일에 외면한다면 언젠가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간절한 애원을 외면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그의 활동영역은 극히 적은 부분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틴 지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누가 갈 것입니까? 누가 예수 대신 산을 넘고 강을 건널 것입니까?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일에 있어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헌금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만으로 모자랍니다. 만일, 사람을 추수하여 거둬들이려 한다면 우리 모두는 추수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사람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니페이스(Boniface)는 영국이 남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가 73세의 고령일 때 주위에서는 전도를 그만 두고 여생을 편안히 지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계속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그는 계속하여 프리슬란드에 가서 전도하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74세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지금도 죄악의 물결 중에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저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보고 듣고 안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강과 산을 넘고 이집 저집 문전을 출입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다 복음의 빛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추수꾼입니다. 부지런히 전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입시다. 강권하여 구한 영혼 교회 부흥 천국경사입니다
(83.10.9)
11.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11.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바울사도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4).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힘써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때는 힘쓰다가도 쉬 힘을 잃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동안 몇 가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1) 전도하는 것이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전도는 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3) 전도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잘못 알고 있으며 믿지 않으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같이 믿기 어려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할 때가 많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전도의 어려움 때문에 더욱 값있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전도의 어려움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찾지 않으실까 하는 아쉬움과, 다른 하나는 천사에게 복음 전파의 책임일 맡겼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세상 사람들의 통상관념이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전도는 지혜로운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구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갈3:26-29)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잡은 자와 잡힌 자, 가해자와 피해자, 의인과 죄인, 유식자와 무식자, 권세자와 무력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우는 자, 피해자, 억울한 자, 의지 없는 자, 병든 자,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복음의 문은 더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의 대상을 이렇게 밝혀 줍니다.
1) "이방인,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에 그늘에 앉은 불우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4:15-16).
2)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눅4 18-19).
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마11:28).
4) "술을 즐기는 자와 세리와 죄인"(마11:19)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2:17) 또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도 하였습니다(마19: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시며 교만한 자에게는 베푸신 은혜마저도 거두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미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천대받은 사람들, 죄인의식을 가진 겸손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중요한 특징입니다.
유대나라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주로 병자, 귀신들린 자, 세리, 창녀, 죄인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자들, 유대 귀족들에게 압박받는 서민층 중에서 많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보더라도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멸시받는 세리 등 이름 없는 직업인들입니다.
그러하다 해도 이것 때문에 복음이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들에게나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기독교가 말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2-23).
십자가의 도가 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까?
1) 유대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신21:23).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2) 다른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거짓 메시아가나타나서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A.D 45년에 나타났던 드다나, A.D 54년에 애굽에서 왔던 자칭 선지자의 유혹은 유대인들의 구미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사기꾼들이 말하는 엄청난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인기를 끌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능자요, 섬기는 자요, 억울해도 말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가 구세주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무능력한 패배자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1) 십자가는 극악한 죄수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같이 무시무시한 형구에서 구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철학과 웅변과 변론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교양 없는 전도자들의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한 제자들의 전도는 그들의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과 경멸의 상대에 불과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미련한 처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요 승리의 표상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증거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전해야 합니다. 전도할 줄 모른다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자체로서 충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해진 복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 할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미련하다 하여 복음자체 마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무식하다 하여 복음마저 천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린아이라 하여 복음마저 멸시받을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하였습니다(27-28).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비록 미련하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전하지 않고 복음의 강함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입원한 병자가 불신의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빠 지옥가면 안돼요"라고 붙잡는 아이 때문에 구원받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고민하는 일 때문에 자살하려고 기웃거리다가 다리 밑에서 찬송하는 거지 가족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련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질그릇 속에는 보화가 담겨있듯이 우리는 미천해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하여 둔한 우리 입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미련한 사람들이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부르사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고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런지 모르나 구원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힘 있게 전합시다. 아멘.
(83:10:16)
12. 안디옥 교회
12. 안디옥 교회
(행11:19-30,13:1-3)
주후 1세기경 로마가 통치하던 영토 안에 안디옥(Antioch)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무려 16개소나 된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수리아 안디옥(행11:19,13:1)과 비시디아 안디옥(행13:14)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리아 안디옥은 지중 해안에서 동으로 27km지점의 오론테스(Oronter)산을 등지고 오론테스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로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로마 수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B.C 300년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하나인 셀레우커스니가톨(seleucus Nicator)이 건설하여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후에 로마의 직할시가 되었다고 하며 인구는 500,000에 이르렀고,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전합니다.
이 도시에는 대리석으로 된 큰 길이 있었다고 하며 로마제국 내에서는 가로등이 있는 유일한 도시로 알려졌으며, 도시의 외곽은 로마보다 장대하였기 때문에 흔히 『동방의 여왕』 또는 『동양의 로마』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니 수리아 안디옥의 규모나 위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루살렘이나 아덴, 로마와는 달리 이 도시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고고학자들의 작업을 통하여 겨우 알려질 정도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사방으로 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의 몇몇 무리들이 안디옥에 들어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많은 이방인들까지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초대 교회가 당한 핍박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전도는 생각 밖에 큰 축복을 받아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도 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에 접수되었을 때 그 정과를 시찰하고 새 신자를 굳게 할 목적으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한 것입니다.
바나바가 수리아 안디옥에 새로 개척 설립된 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그 교회의 규모가 예상 밖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충성하였고 새 교인들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소 근방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불렸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한 것입니다.
이 초청은 사심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그의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첫째는, 자기보다 유능한 인물을 서슴지 않고 받아 들였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사울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반역자로 몰렸으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의심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남다른 눈과, 사울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량으로 영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사울은 얼먀후 초대교회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을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믿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소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소개하고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자신은 사라졌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소개하고 그는 그의 그늘에 묻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점입니다. 그는 사울이 이룩한 업적의 절반은 나누어 가질만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아량과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사울은 거기서 처음으로 따뜻한 환영을 받은 곳입니다. 그곳은 처음으로 말씀을 전파한 곳이며, 가르친 곳입니다. 그의 유명한 3차에 이르는 전도여행도 이곳에서 출발하였으며 끝마친 곳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안디옥 교회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곳은 그의 활동의 본거지였으며 위대한 사도가 되도록 안수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곳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통하여 새 힘을 얻었으며 물질의 공급도 받았습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전도 활동의 본거지이자 또한 초대 교회의 선교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1세기 전체를 통하여 안디옥은 예루살렘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임을 쉽게 알게 됩니다. 그곳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라고 하였습니다(11:23).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 받았을 때 그 교회의 은혜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개종한 자들 간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목회자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11:24). 그러나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자요(9:1-5),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 관여한 배반자입니다(7:57-58,8:1). 니게로 시므온은 검둥이 개종자입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궁중의 고관으로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빈부귀천, 남녀노유은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낮선 자가 없었고 구경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좋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강점도 이러한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모두가 다 형님, 누님으로 통했습니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니 형제요, 모두가 예수의 피로 맺어졌으니 한 형제자매였습니다. 거기에는 불신도 없었고 상하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행11:26,26:28,벧전4:16)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Christ와 man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둘은 한 단어 즉 Christian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구주를 영접하고 구주께서는 죄인을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게 영광스런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비난과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멸시받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위협받는 이름이었습니다.
초창기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더러는 야수의 밥이 되기도 했고,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조롱당했습니다. 또 좁은 문과 제한된 길,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영광스런 이름은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불리워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이 이름을 얻은 것은 뜻이 있습니다.
1) 그것은 사도들의 교훈과 성도들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유대인이나 예루살렘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살아 있다면 여러분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중에는 크리스천 아닌 자가 더러 있습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믿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구원은 받는 것이지 힘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거듭남으로 크리스천이 됩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서 난 자들입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크리스천답게 살았습니다.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복음전도에는 파송하는 모체가 있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막16:15).
그러나 사도들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핍박을 내리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핍박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움직여 환경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방전도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이 약속은 가서 제자 삼고, 세례 주고, 모든 족속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이 약속을 따라 동서남북 어디든 갔습니다. 인종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교사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를 천거한 자는 바나바요, 그 인물을 키워낸 교회는 안디옥교회요, 그 전도 사업을 뒷받침해 준 교회도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선교사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진 교회도 안디옥 교회입니다(13 2).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그들의 전도 사업을 위하여 헌금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가 거쳤던 모든 도시마다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나셨을 때 그 범위는 더욱 넓어졌고 제3차 전도여행을 했을 때는 더욱 더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칠 때마다 어김없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힘을 새롭게 하였고 부족한 물질의 필요도 채울 수 있었으며 전도 사업에 필요한 후원과 보조와기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를 위하여 세운 교회요, 들어 쓰신 교회입니다. 오늘날 안디옥 교회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교회를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살아 있고 그 교회가 개척 설립한 교회는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본받는 일만큼 중요하고, 값지고, 우선해야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즉 안디옥 교회 설립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입니다.
1) 그것은 이방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입니다.
2) 이방전도의 본부가 마련된 것입니다.
3) 새 전도자가 부름 받았습니다.
4) 이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디옥 교회의 사명을 우리 은광교회 위에 다시 주셨다고 믿읍시다.
(84:1:15)
13. 눈을 들어 밭을 보라
13.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한복음4:27-38)
여름은 땀 흘리는 계절입니다. 불볕더위의 열기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납니다. 만물은 성장한다고 땀을 흘리고 농부들은 일손이 바빠 합을 흘립니다. 여름은 준비의 때요, 성숙을 위한 몸부림의 때요, 노동의 때입니다. 여름은 날고 싶고 뛰고 싶은 때입니다.
봄을 여성의 계절이라 하면 여름은 남성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봄을 웃음의 때라고 하면 여름은 힘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땀 때문에 여름을 싫어합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소동파의 다음 글귀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더위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여름 해가 긴 것을 좋아하노라"(人苦熱 我愛日長). 해가 길어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중 7월은 우리 은광교회로서는 바쁜 달에 속 합니다. 이 할에는 중요한 행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첫 주간에는 광주시찰회에서 주관하는 하기학교 교사 강습회가 은성교회에서모이고, 전국 어린이 교육 선교원에서 주관하는 강습회가 본교회당에서 모입니다. 둘째 주일은 제1청년회 헌신예배이며, 그 주간에는 전국대학생 대회가 덕유산 국립공원 야영장에서 모이는데 500여명의 대학생이 참가 합니다.
셋째 주일은 맥추감사절이요, 성경학교 교사 임명과 하기학교 교사 헌신예배와 자체강습회가, 넷째 주일은 각 기관의 월례회와 하기학교 개교예배와, 다섯째 주일에는 제2남전도회 헌신예배와 그 주간에 중고등부 수련회와 선교 100주년 교단 집회가 부산 고신대학캠퍼스에서 모입니다.
또 대학부와 청년회의 하기 봉사활동이 펼쳐집니다.
이 같은 행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서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다한 거룩한 교회로 빛을 말하는 영광스런 교회로 나타나려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들입니다.
이러한 행사는 결코 그 행사 자체로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겠기에 온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교우의 직접적으로 참여하심은 물론 기도와충고와 헌금과 협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때 온 교우들이 소속해 있는 각 기관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생동감이 있는 은광교회의 산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1)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1)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지금은 추수 때가 되었는데 추수 할 일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꾼을 찾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새 일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70인 전도단을 파송하면서(눅10:2), 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 무리를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사,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마9:37).
예수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보배로운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일꾼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스런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니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만일 들리지 않는다면, 그 음성이 왜 나에게 들리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드(Booth, William)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을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사실은 당신은 귀가 어두워서 그의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2)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하는 음성입니다.
(2)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하는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을 읽으면 추수할 일꾼들의 사명감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보여줍니다. 현대의 비극은 직업인들은 많아도 사명감에 사는 자가 적다는데 있습니다.
직업을 말할 때 조브(job)라고 합니다. 이는 미국인들아 즐겨 쓰는 속어입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한술의 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말도 있습니다. 보케이션(vocation)입니다. 이 말도 직업을 의미하지만 그 근본 뜻은 소명(召命)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일을 한다는 사명과 천직을 의미합니다. 막스 웨버의 말을 빌면 천직이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요,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즉, 천직이란 하나님의 부름으로 성실과 정직과 근면으로 일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자기 직업을 job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전전하거나 정개치고 맙니다. 한술의 밥을 위해 의리도 명에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기의 직업을 vocation으로 받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을 vocation으로 알고 힘쓰면 인생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의무로 생각하면 인생은 벌써 그 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죠지 워싱턴의 어머니 메리 부울은 현숙한 부인이었습니다. 워싱턴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인 마운트 바논으로 갔습니다. 다른 이 같았으면 주택도 깨끗이 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환영행사도 가졌을 법했습니다만, 어머니인 메리는 평소와 같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죠지 정말 잘 왔다 나는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는 참이란다. " 어머니는 빵가루 투성이의 손을 만지면서 분주히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행원들은 크게 놀랐으나 위싱턴 대통령은 더없이 기쁜 듯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어머니는 과자 만드는 솜씨가 참 좋으십니다.
사양 말고 함께 들어가 잡수십시다"
이윽고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위싱턴은 어머니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일일히 직접 일하시면 힘드시니 앞으로는 하인들을 데리시고 어머니는 그것을 감독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대통령인 아들의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폐를 입어서는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으니까 조금이라고 더 일한 수입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작정이다. 만약 네가 끝까지 나에게 일하기를 그만두라고 하면,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 따위는 언제라도 사직하겠다.
" 이 말을 들은 수행원 모두는 그 높은 기품과 정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귀천 간에 그 일이 사명인 줄 알고 충성하는 사람은 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도 없지만 마지못해 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합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추수꾼에게 이 사명감이 없다면 알곡은 어찌되겠습니까?
(3) 때가 절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 때가 절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이 말씀은 지금이 곧 일할 때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이 곧 추수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추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고 말하고 있었습니다(35). 사실로 시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이 말은 옳습니다.
보통 성지의 보리 파종은 10월 중순경에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는 4월 중순에 시작하여 5월에 마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12월 중순 쯤으로 추산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온 들에는 보리가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 때입니다.
마침 그 때 메시야를 만난 것을 전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갔던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푸른 보리 밭 사이를 흰옷 입은 수가성 사람들이 떼 지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저 밭을 보라! 지금 몰려오고 있는 러 사람들을 보아라 저 흰옷 입은 무리들은 추수할 때가 된 알곡들이다" 이는 H. V몰톤(Melton)의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여기에서 "복음의 추수"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추수 때가 임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람들은 곡식을 거두는 일은 미리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해서는 등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예수님은 영적 추수의 절박성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추수할 일꾼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절박한 때에 일꾼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추수꾼이 되겠습니다"면서 나설 분은 없습니까? 하기 성경학교는 좋은 영적 추수 때입니다.
각종 수양회는 좋은 추수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참여함은 물론, 추수하는 좋은 일꾼들이 많이 나와서 귀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보면(마20:1-16), 주님은 온 종일사람을 구하여 일터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제9시와 제12시와 제3시에도 사람을 일터로 보냈습니다. 그때는 어두워지는 시간입니다. 밤이 되면 신랑이 와서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일할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들어갈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리스도께서 일하라고 강권하시는 그 음성에 지체하지 말고 대답해야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은 하오 5시, 이제는 더 기다릴 수도 없고, 게으름 피울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이시기를 놓치면 영영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넉 달이 남았다"고 핑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는 따로 오지 않습니다. 일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일거리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생각지 않은 때에 가 버릴런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일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속을 먹으려하는 자는 껍질을 까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년을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짜는 베가 천국에서 우리가 입을 음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러나 다음 말씀은 더욱 중요 합니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 아멘
(84:7:1)
14.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14.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눅 15:1-7)
누가복음 15장에는 주옥같은 비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1-7), 잃어버린 은전 비유와(8-10),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가 그것입니다(11-32).
어떤 분은 누가복음 15장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 모두가 다 없어진다고 하여도, 이 한 장만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유명한 비유를 세 가지나 말씀하신 동기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 본문 1-2절에 보면, 예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말씀을 들으러 가까이나마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서 예수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원망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들이라고 불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이들 땅의 백성들과의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리새인(Pharisaios)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자들입니다(마12:2 빌3:5). 분리주의자, 배타주의자로 통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 Parsh에서 유래된 것인데, "분리하다. 구별하다. 조각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일체의 금전거래를 삼가 했고, 그들의 증언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으며, 그들과 밀담을 나누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세우는 것도 금지되었고, 자선금의 관리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여행 중 동행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님이 되는 것도, 그들을 영접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상거래도 삼가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들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피인물들과 교제하고 상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기뻐할 리가 없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죄인 중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말하지 아니했고, "죄인이 벌 받아 멸망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구원보다 그들의 멸망을 고소하게 생각하였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보다는 망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교인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길 잃은 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잃은 양인 죄인들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잃은 양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의 돌아옴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고,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육 동물인 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온순한 동물입니다(렘11:19).
둘째는, 공격적인 동물이 아닙니다(사53:7).
셋째는, 지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유리하고 방황 합니다(사53:6,렘50:6). 또한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벧전2:25,마18:12).
넷째는, 자기 방어력이 약합니다(미5:8). 소는 뿔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고, 맹수는 예리한 이발과 발톱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나, 양에게는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그는 목자의 보호함이 없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집을 찾아갈 줄 아는 지각이 있으나, 양은 우리를 찾아갈 수 있는 지각이 없습니다.
양은 본능으로 사는 동물에 불과 합니다. 양은 앞을 내다보는 지각이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풀만 바라보며, 그것을 뜯어먹으며 좇아 가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양은 좌우를 분별할 능력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주의하게 되고,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런즉, 양에게 있어서는 보호가 필요하고(욥30:1), 목자가 있어야 하고(요10:4,27), 양 우리가 있어야 하며(요10:1), 초장과(출3:1), 물과(창29:8-10), 휴식과(시23:2), 때마다 털을 깎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삼상25-2,11). 이와 같은 양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삼하24:17,렘31:10).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요10:2,21:6).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잃은 양이라고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1) 옛날에는 우리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즉, 낙심 중에 있는 앙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2) 우리 안에 있기는 하나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따르지 않고, 방황하는 양을 의미합니다.
3)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즉 길 잃은 양입니다. 곁길로 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렘50:6). 사망의 길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f6:25).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을 말합니다(마7:1-3).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전2-14). 불법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마13:14).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이 같은 길 잃은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살다가 길을 잃었고,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멀리 멀리 도망쳤으며,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뛰쳐나간 양도 있습니다. 세상 향락과 정욕을 따라 헤매다가 길을 잃었으며, 돈 그것이 무엇이 길래 의리도 신의도 팽개치고, 울 밖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의 인도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그 영혼은 파리하게 되었으며(시16:15), 황량한 광야에서 고적하고 쓸쓸하게 헤매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우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그 잃은 양을 찾아주는 목자가 없다면 그는 별수 없이 죽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헤매는 저 많은 길 잃은 양들을 어떻게 할까요? 저 행락 인파속에도 잃은 양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최루탄을 낫고, 보도 불록 조각을 던지는 저 군중들 중에도 잃은 양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집 안에도 그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대양의 고인 물은 그들의 눈물이요, 육대주에 부는 바람은 그들의 한숨입니다. 절규하는 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맙시다.
"눈을 들어 하늘보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에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4).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 양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한 마리 양보다 엄청나게 많고, 더욱 소중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를 더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남은 아흔아홉 마리도 역시 그 같은 한 마리의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잃은 양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을 찾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기억하여야할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찾아야 할 잃은 양은 누구인가? "를 성령의 인도따라, 인도할 대상자로 정합시다.
둘째는,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의 감화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셋째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인도하여 말씀을 듣게 합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성령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합시다.
(3)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5-6).
이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양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 "즐거워"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돌아왔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하면서 기뻐했습니다(눅19:9)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다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습니다(눅15:24).
2)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맨 이유는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요, 양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전설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양에 대한 애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3)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6).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보다 더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성도 여러분 잃은 양을 찾읍시다. 우리 집 안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우리 이웃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면 천국의 큰 기쁨이 됩니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아멘.
(84:10:14)
15. 잃은 은전을 찾자
15. 잃은 은전을 찾자
(눅 15:8-10)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와 잃은 아들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들 세 비유는 각각 독립된 비유라기보다는 하나의 연속된 비유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진 공통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 같이 "잃은 자"와 "찾은바 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이들 종교는 다 같이 사람이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신이신 하나님께서 잃은바 된 인간을 찾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셋째는, 잃어버린바 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15:9) 잃어버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15:22-24,32).
오늘 우리는 그 둘째 비유인 잃은 드라크마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 받도록 하십시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고 말합니다(8).
여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느 여자"로 가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여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신적 지혜일 것이라고 구체화하는 해석들이 있으나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하여간 은전을 잃은 자는 여자입니다. 모든 정황은 그녀의 가난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애지중지 아끼는 은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여인의 슬픔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한 드라크마입니다. 그가 본래 소유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10분지 1에 불과합니다. 드라크마(drac hne)는 헬라의 화페 단위인데, 로마의 데나리온(denarius)에 해당하는 정도로, 노동자의 하루의 임금에 비교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드라크마에 대하여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여인에게 있어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아상태에 헤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넉넉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식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열 드라크마는 은사슬에 열개의 은전을 꿰어 머리 장식으로 혼인한 여인의 표시로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혼반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보배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그 한 닢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다면, 결국은 열 닢 모두를 못 쓰게 된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중대한 손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받게 됩니다.
1) 적은 것에 대한 가치와 존재 의의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18: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마7:14).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사람에 비하여 소수였지만,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그들이었습니다(민14:30). 부패를 막는 소금의 양은 언제나 내용물보다 많지 않습니다.
큰 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초 한 자루에 불과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것은 사울 왕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삼상17:50). 블레셋 대군을 전멸시킨 것은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이었습니다(삼상14:1-l5).
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를 맡아보는 써비스 보이는 귀한 손님 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기대를 걸고 그 손님을 잘 모셨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이 자동차 왕이라고 부르는 포드였기 때문입니다. 써비스 보이는 후한 팁을 기대하면서 정성스럽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자동차 왕 포드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한 푼을 줄 뿐이었습니다.
성이 난 써비스 보이는 "감사 합니다. 그렇지만 이만한 돈은 제게도 있으니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면서 돈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포드는 그 돈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싫으면 그만 두어다. 그러나 너는 언젠가 반드시 이런 동전 한 푼 때문에 울 날이 있으리라" 포드는 그 동전을 받아서 호주머니에도로 넣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그 소년은 장성하여 위대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때 포드에게 받은 교훈으로 분발했다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고, 순간이 거듭하여 해가 됩니다. 성냥개비 한 개가 능히 아방궁을 불태울 수 있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집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은, 절대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2) 그리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드라크마의 의미입니다. 성경 난하 주에 의하면 그것은 "은전의 명칭"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드라크마, 곧 은전을 의미합니다.
은(銀)은 철이나 납처럼 천한 금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광(銀鑛)을 "왕실의 광산"이라 여겼습니다. 히브리말은(keceph) "사모하다. 열망하다. 탐내다"는 어근에서 온 "돈"을 의미합니다. 돈은 귀한 것입니다 돈은 만능입니다. 그것으로 행복 말고는 다 살 수 있고, 천국 말고는 어느 곳에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세계를 향하여 중요한 방송을 하기 위하여 택시를 불러 세운 후 "BBC 방송국까지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멀리는 갈수 없다면서 거절 하였습니다. 처칠 수상은 "왜 못 간다고 하는가?"라면서 따졌더니 "다른 때 같으면 얼마든지 갈수 있습니다만, 한 시간 후면 처칠 수상의 방송을 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거절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처칠 수상은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파운드의 돈을 더 주면서 가자고 했답니다. 못 간다고 하던 기사가 그 돈을 받고 무어라고 한줄 압니까?
"타세요, 아저씨.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부터 벌고 봅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은전에다 비유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은전이 귀한 것처럼 영혼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한 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영혼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은전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보배가 티끌 속에 묻혔습니다. 귀한 보배가 흙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귀한 인간의 영혼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티끌 속에 쳐 박혀 있는 영혼들이 허다합니다. 은전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여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죄악 속에 파묻히고 말면,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무용지물이 되고,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죄의 먼지, 죄의 티끌 속에 버려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지의 티끌, 불신의 티끌, 의심의 티끌, 허영의 티끌, 교만의 티끌, 정욕의 티끌, 죄의 티끌 속에 파묻혀 잃어버림을 당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내야 합니다. 죄의 티끌 속에 파묻히면 쓸모없는 인간이 됩니다. 무가치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냄새나는 인간이 됩니다. 썩어가는 인간이 됩니다.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영원한 지옥 자식이 되고 맙니다. 이들은, 우리의 가족 중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 구원해 내야 합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않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쓰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8).
이 비유에서는 은전을 찾는 여자의 지극한 정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켰습니다. 등불을 켠 후 문 뒤와 어두운 이곳저곳을 뒤졌습니다.
2) 그녀는 "비로 쓸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폈습니다.
3) 그리고 "부지런히"찾았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찾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요 행동입니다.
등불을 켜는 수고와 비로 쓰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열매는 나무를 심는 자만이 따기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정성스런 일꾼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마5:14).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혀줍니다. 빛은 뜨겁게 합니다. 빛은 살균작용을 합니다. 빛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빛은 선행을 의미합니다(마5:15-16)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 47).
둘째는, 성결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먼지나 너wmf한 것이 덮여있으면, 은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방안을 쓴 것처럼, 교회는 깨끗하고 평화롭고 질서정연해야 합니다.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추문은 교회의 부흥을 막습니다. 모처럼 믿어볼까 하고 교회에 나왔다가 싸우는 것 을보고는 머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회개의 역사가 세차게 일어났던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우리의 안과 밖을 깨끗하게 합시다(요15:2)
셋째는, 부지런히 찾읍시다. 샅샅이 뒤지면서 찾읍시다. 부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돈을 찾는 것뿐입니다. 왼손에는 등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방을 쓸었습니다. 눈으로는 두리번거리면서 머리로는 생각하였습니다. 온 정성을 집중하여 찾고 또 찾았습니다.
손, 발, 눈, 머리 그야말로 총동원하여 잃은 보배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실상입니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가 제일 힘썼던 일이 잃은 영혼을 찾는 일이었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이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찾아야 합니다. 계속 찾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찾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찾아야 합니다(딤후 4:2).
미국 다카다스라는 곳에는 넓고 넓은 밀 맡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해 추수 때, 수천의 추수꾼들이 그 넓은 밀 맡에 들어가서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넓어서 몇 날 며칠이 걸려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와서 놀고 있었습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황혼이 되어 일을 마쳤는데, 세 살 되는 어린아이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곳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습니다. 추수꾼 수천 명은 귀가하는 것을 미루고 밀밭 여기저기에 흩어져 찾았습니다. 밤새워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배는 고프고 밤은 어둡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다른 방법으로 찾아봅시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찾아봅시다" 얼마쯤 훑어 나가는데 "여기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잃은 아이를 찾은 것입니다.
그려나 어린 아이는 벌써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추수꾼들은 죽은 아이를 어머니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도 울면서 "여러분 수고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처음부터 손을 잡고 찾자고 제안했더라면, 사랑하는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잃어버린 한 영혼은 은전 한 닢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이 일은 몇 날 혹은 몇 달 힘쓰다가 그만둘 일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15년 동안이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권면하는 중에 기어코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은전을 기어코 찾아 반짝반짝 빛나는 성 어거스틴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신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은전을 찾음은 여인의 기쁨일 뿐 아니라 하늘의 기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갈 죄인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84:10:21)
16.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16.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19-23)
구약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섭리하신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또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요 찬송이며, 그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한 민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 "한 민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 "한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곧 예수십니다(요5:18,10:30,빌2:6). 예수는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모든 역사의 중심 사건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구약 성경은 그의 탄생, 그의 생애, 그의 고난, 그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예언된 대로 고난 그 것이었으나, 그는 위대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사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자,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느냐 혹은 배척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느냐 혹은 영원히 멸망 받느냐, 또는 천국에 가느냐 혹은 지옥에 가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1절 말씀은,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의 첫째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전도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
예수님은 임의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 받아 오셨습니다(요20:21,17:18).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일을 위하여 특정인을 보내신 것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왕에게로 보냈습니다(출3: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기드온을 보냈습니다(삿6:14).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기 위하여 사무엘을 보냈습니다(삼삼15: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선지자를 보냈습니다(렘7:25). 하나님께서는 그 경륜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보냈습니다(창45:5,7,8),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경륜을 위하여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그가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2)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마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23,마9:13) 세례 요한도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막1:4).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막1:15). 예수께서 파송하신 열두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전파 했습니다(막6:12).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행2:38). 위대한 설교가 바울 사도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다 명하사 회개하라"하고 선포했습니다(행17:30). 모두가 회개를 이렇게 외친 것은, 회개가 하늘나라의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자각만은 아닙니다. 죄의 자각이 회개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으나, 죄를 자각하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슬퍼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회개는 눈물 이상의 것입니다. 회개는 선한 삶에 대한 맹세나 결심과도 다릅니다.
입으로는 많이 맹세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생활이 회개한 자의 삶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헬라말 회개(metanoea)의 본래 뜻은, 그릇된 생각이나 관념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나 목표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인 과오에 대하여, 그 생각과 뜻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마11:28).
4)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5)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6)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함이니라"(요6:38-39).
7)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눅4 18-19).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신명을 다하여 이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뜻을 다 수행하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1930).
(2)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남은 일은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남은 일은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어떤 이는 여기 "보낸다"는 말을(apostello) "맡긴다"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임무는 전체 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엡4:ll, 고전12:1-31,마28:18-20).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열 한 제자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립니다. 모든 신자들을 다 망라한 말씀입니다.
예수는 승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전도사업의 계승을 위하여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위임 받은 권위는 동일한 권위입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워 복음을 전했습니다(눅10:1-2).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파송 하였습니다(행13:2-2), 요나는 니느웨로 파송 받았습니다(욘3:2). 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 신자들도 주님이 보낸 자들입니다(행8:4), 빌립 집사도 주님이 보낸 자입니다(행8:5). 아볼로도 보냄 받은 자입니다(행18:24).
그리고 우리들도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우리를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45:5,7,8). 하나님께서 불신 가정에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불신 남편을 위하여기도할 이는 아내된 여러분 외에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불신가정을 위하여 세움 받은 전도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그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다. 깨우치지 아니하여 그가 죄 중에 죽는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하였습니다(겔3:17-18).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는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발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떤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보니 자기가 천국에 와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문을 여시면서 저 밑을 내려다보게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가 내려다보니 거기는 옛날 자기가 살던 세상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소경이었는데 모두가 깊은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저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어서 가서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겠습니다. 저를 빨리 보내주세요"라고 소리치다가 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하겠습니다.
언젠가 켄터키의 루이스 빌에서 믿음 좋은 부인이 한 소년에게 전도했습니다. "너 주일학교에 가보지 않겠니? "라고 말하자 그 소년은 "네.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소년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은 "너 예수 믿지 않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또 "나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부인은 "너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준비해 보지 않겠니? "라고 물었더니"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장성하여 일본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일본에 와서 가가와 도요히꼬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였습니다. 신자가로 가가와는 수천의 동족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유명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고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명감입니다.
믿음 좋은 어머니에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예수를 거절하는 대신 훌륭한 법률가가 되어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학년을 마치기 위하여 학교로 떠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 호주머니 속에 쪽지 하나를 넣어 두었습니다.
후에 그가 기숙사에서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어머니의 서투른 글씨의 쪽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이 진리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결국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서투른 글씨의 쪽지 속에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과 정성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볼티모어 근처에 어떤 기관사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그가 운전하는 기차가 자기 집 앞을 지날 때에는 언제나 그의 어린 딸이 나와서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의 말뚝이 가리워서, 아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그 말뚝을 빼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딸은 하루도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일을 걸르는 일이 없었고, 아빠도 답례를 걸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어린 딸이 울타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직감하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딸은 이미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아빠에게 전하는 쪽지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께 가서 하늘나라 울타리에서 말뚝 하나를 뽑아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그 사이로 아빠가 오실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래요" 어린 딸의 쪽지를 보고 그 아버지는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어린 딸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이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음증거를 위해 보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이 일을 힘써야 합니다.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시카고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남자가 가로등 밑에 기대어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디는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무디를 노려보다가는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무디는 한대 얻어맞았습니다.
깜짝 놀란 무디는 변명했습니다. "기분을 상하셨다면 참으로 미안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을 물었을 뿐입니다. " 그랬더니 그 사나이는 무디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 하는 놈이야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어서 가서 네 일이나 하라"면서 소리를 꽥 질렸습니다.
이 말에 대한 무디의 대답이 무엇이라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실은 이것이 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일이 있은 지 석달 후 추운 겨울 새벽에 누군가가 무디의 집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가보니 가로등 밑에 서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번민해왔다는 것입니다. 지난밤에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무디의 전도한 한마디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4:10:28)
17. 파수꾼의 책임
17. 파수꾼의 책임
(겔3:15-21)
선지자 에스겔은 대제사장 사독의 자손입니다.
그는 B.C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언자적 재능을 부여 받았습니다(3:22-27).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도록 위임된 말씀의 주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다와 에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이방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선지는 본국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었고, 젊은 선지자 에스겔은 배교의 도시 바벨론에 잡혀가 있으면서 그들의 똑같은 운명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에스겔선지는 주로 포로된 자들에게 예언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포로 생활의 고난을 통하여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처음부분(2장-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섯 가지의 사명을 지웁니다.
1) 그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맡깁니다(2:1-10).
2) 그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모르는 고발자가 되게 합니다.
3) 추방자에 대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일하게 합니다.
4) 그에게 파수꾼의 임무를 지웁니다(3:16-21).
5) 충성스런 전령(he, ald)이 되게 합니다(3:22-27).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그 네 번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 "파수꾼"이란 밤에 불침번을 서는 사람이나 재산을 지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보초나 수위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맡과 포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은 보통 추수하는 동안만 배치됩니다.
그들은 더위를 막으려고 초막을 세웠으며, 또한 파수를 잘 보기 위하여 망대를 높이 세웠습니다(왕하17:9,대하20:24,욥기2 7:18). 성읍의 파수꾼은 밤에 적들로부터 성벽을 보호하였으며, 성음의 안전을 책임졌습니다(삼상14:16,삼하18:24,왕하9:17). 파수꾼은 포위공격을 받을 때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렘51:12).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도 허사라"고 하였습니다(시127:1). 이 말씀은 진짜 파수꾼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한 비유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시130:6).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파수꾼들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국가의 임박한 운명을 보았으며, 잠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무관심한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위험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렸습니다(호9:8),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파수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사21:6,렘6:17,겔3:17).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렘3:16). 이 사명들은 선지자들의 사명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에스겔선지가 하나님의 사신이었다면(겔1:1,2:1-6,3:1-3), 우리들도 또 하나님의 사신입니다(엡6:20) 그가 또한 파수꾼이었다면, 우리들로 틀림없는 파수꾼입니다(겔3: 17-20,히13:17).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은 파수꾼인 에스겔선지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은 오늘 우리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본문 말씀에서 파수꾼의 책임을 배웁시다
(1)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17).
파수꾼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강권적으로 "임해"왔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그에게 임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그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창15: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했습니다(삼상15:10).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에게 임했습니다(삼상24:1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왕상17:2,8)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은1:1).
이들은 다 그들에게 임해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듣자, 겸비하여 옷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왕하22:11,19). 히스기야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왕하19:1). 다윗은 하나님의 보낸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2-13).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쳤습니다(행2:37).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다 회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변화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행5:20).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시33:6)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골1:5).
그래서 사무엘선지는 사울 왕에게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권했습니다(삼상15:1). 이사야선지도 히스기야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왕하20: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라고 말했습니다(사1:10)
예레미야선지는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권했습니다(행10:1).
이 말씀은, 파수꾼도 들어야 합니다. 선지자도 들어야 합니다. 왕도 들어야 합니다. 백성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들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다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백성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하였습니다(창12:1). 선지자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신34:5),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였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왕상17:16).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2)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17).
여기 깨우친다(Zahar)는 말은, 훈계한다는 뜻입니다. 가르치고, 경고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파수꾼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은 영적 파수꾼들입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는 입이 될지언정,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에 대하여 볼 수 있는 눈이 될지언정 장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살아있는 음성을 전하는 나팔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우리가 깨우쳐야 할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의 책임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악인이 대한 경우이고(18-19), 둘째는 의인에 관한 경우입니다(20-21). 악한 자와 의로운 자는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고, 이들에게 경고되는 말씀의 내용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모두는 함께 경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첫째로, 악인에게는 어떻게 경고해야합니까? (18-19).
"어서 그 악한 행위를 계속하지 말고, 죄악에서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는 불신자에게 하는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은 가장 큰 악이요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1) 그가 만일 이 경고를 받고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거한다면, 그는 "정녕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는 그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그가 만일 이 경고를 받고 회개하면, 그는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러나 그가 악을 계속하면 죽을 것이요 회개하면 살 것입니다. 그런즉 회개 없이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고 경고하는 것이 파수꾼인 우리의 사명이요, 할 일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임할 죄악의 무서움을 경고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게 회개하는 자의 축복의 엄청난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즉 파수꾼의 사명은, 생사의 문제요 축복과저주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되고,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멸망 된다는 것입니다.
3) 만일 사역자들이 그들의 책임에 충실하지 않고, 무관심 때문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이렇게 크고 무섭습니다. 파수꾼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 살 사람도 있고, 죽을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깨우쳤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죽었다면 그 피 값은 파수꾼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책임 추궁입니다.
4) 만인 파수꾼들이 최선을 다 했는데도 그 악인이 회개하지 아니하여 죽었다면, 그것은 그 악인의 책임이지 파수꾼의 책임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요컨대 파수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파수꾼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영혼 구원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파수꾼의 특권이 엄청난 것처럼, 책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책임을 다할 때 칭찬이 적지 않은 것처럼, 영혼 구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들의 피 값은 우리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책임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파수꾼은 망을 보는 자들입니다. 파수꾼은 영적인 보초들입니다. 파수꾼은 죄악의 위험수위를 파악하여 경고해야 할 자들입니다.
둘째로, 의인에 대한 파수꾼의 책임은 어떤 것입니까? (20-21).
파수꾼은 의인들에게도 그들의 신앙을 저버리거나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대한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도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다.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함으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하였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의인에게도 중요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월리엄 부스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열심 있는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몇 시간 후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국은 너무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불안하고 괴로왔습니다.
그것은 이 좋은 천국에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주께 맡기고 "저희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는 죽었고 사람들은 자기의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이 찬송을 불렸습니다. 사람들은 울고, 기도하고, 친척들은 키쓰까지 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천국에 가 있었습니다. 천국의 즐거움은 일찍이 상상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롭기 한이 없었습니다.
혼자만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자신의 지상 생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싸우고, 속이고, 죄짓고, 추한 모습이 다 보였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괴로워서, 돌아가서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내방자가 그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의 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 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독자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의 소식이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아들을 회개시키지 못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얼마나 전도했습니까? 요즈음은 어떤 지 말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부스는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버린 자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도할 엄두도 내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고, 죽을 수만 있다면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자가 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 죽은 후 예수 믿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충성한 자입니다. 그녀의 자녀들은 다 믿었는데, 그중 하나가 안 믿은 것보고 죽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안 믿은 것,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내방자는 물었습니다. "내 말에게 전도해 보셨습니까? 그 아이는 한 번만 누가 믿자고 권하면 금방 믿을 아이인데····"
부스는 얼굴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기가 천국인가요? 차라리 땅에 돌아가 살고 싶습니다.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
세 번째 내방자가 찾아 왔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섬기다 온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교회, 많지 않은 교인을 붙잡고 섬기다 온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가수였습니다. 개심하여 충성하다가 불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두고 온 교회는 어려움당하는 개척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교회 좀 도와주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부스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는 어려운 교회 돕지 못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알고 있었으나 돕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구무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천국에 산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때,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님을 뵈옵게 된 것입니다. 천군 천사의 엄청난 광경이 털어졌습니다.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거기 주님이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선지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모여 섰습니다.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왕은 부스를 쳐다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님을 이렇게 말씀 하였습니다.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재차 기회를 네게 주노다. 저 많이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고, 네 싸움을 마친 후 이리로 오니다. 그리하면, 나의 승리자들 사이에 네 자리를 주겠고, 너는 내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1. 영혼 구원에 힘쓰지 않으면, 부끄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2.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기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는 일입니다.
그런즉, 파수꾼의 책임을 다합시다. 파수꾼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85:10:6)
18.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18.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막16:14-18)
우리는 지금 악의 세력이 주위를 두르고,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기막힌 세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앞잡이인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멸절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벌벌 떨게 하는 핵무기의 위력은 문명의 흥망을 한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단의 무리는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홍수나 가뭄 등 천재지변은 심심참게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최후 심판의 일대 재난은 가까이에 다가 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바야흐로 절망적인 상황의 전개가 예견되는 때문입니다.
더 더욱 불행한 것은, 이 세대의 유일한 희망인 기독교마저 무서운 배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표방하는 교회마저도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수천수만의 교회가 참다운 복음의 진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증거의 도구가 아니라, 세찬 도전에 대한 방어에 전전긍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것만 같습니다(눅18:8).
복음은 특권의 타이틀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간수하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명을 짊어진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마가복음의 결론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한 제자가 한곳에 모여 음식을 먹을 때에 거기 오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15-16).
여기 보면 믿음과 믿지 않음, 구원과 정죄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늘이 생기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16).
여기,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구별은, 15절의 복음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 ·불신은, 전파되는 복음에 대하여 믿느냐 믿지 않느냐,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는 이러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9).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이 구원과 정죄, 영생과 진노는 전파된 복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 복음(evangelion)은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을 의미하였으나, 후에 보답이라는 의미는 없어지고 "좋은 소식"(good news) 그 자체를 뜻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에 있어서의 gospel이란 단어는 앵글로 색슨어 godspell,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식, 하나님께 관한 이야기"의 현대어형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사49:9,52:7,눅2:10), 혹은 "기쁜 소식"(롬10:15)으로 이해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뜻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복음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의 장사지냄과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을 말합니다.
구원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요3: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베드로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행2:21).
인생은 본래부터 이와 같은 죄악과 불행과 질병과 사망 중에 허덕이며 버림받도록 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입은 피조물이었습니다. 천지와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 입은 인생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다스리면서 에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생은 죄를 짓게 되었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한없이 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불행과 슬픔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4:12). 그런즉 구원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까?
정말로 답답한 것은, 아직도 이 대답을 확실히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 그 분은 쉽게 교회에 나왔습니다. 한동안 열심히 출석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뒤부터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찾아가서 출석을 독려하였더니 그분의 말이 이렇더랍니다.
"구원받으러 갔다가 십 원 빼앗길 뻔 하였습니다.
"옛날에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원(Salvation)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잠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헤아려보십시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요1:12).
2) 그것은 거듭나는 것 곧 중생을 의미합니다.
이는 "위에서 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로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사람은 죄 중에서 죄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즉,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요3:6-7).
3) 중생은 영적 새 생명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생기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새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요10:10).
4) 중생된 자는 하나님의 평강과 위로를 받습니다(요14:27,16:33)
범죄한 인생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하였습니다(롬8:1).
5) 구원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벧후1:4).
6)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의미합니다(눅10:20,빌4:3). 다시 말하면 천국 시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이 하늘 백성 되었고, 죽을 사람이 영생 얻은 자 되었다는 뜻입니다.
백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무신론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아메리칸 인디안"에게 신앙생활의 허무함을 역설하다가 지친 나머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컨대, 예수가 무슨 일을 당신에게 해주었단 말이요? " 토인은 펄쩍 뛰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날 구원해 주셨단 발입니다!" 백인은 "그래 그게 어했단 말이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토인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잠시 밖으로 나가실까요? 그러면 똑똑히 아시게 될꺼요" 이리하여 그는 백인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마당에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금어 모으더니, 그것으로 동그랗게 원을 만들었습니다. 다음에 그 좁은 원안에다 벌레 한 마리를 잡아다 던져 넣고는 그 북대기에 성냥불을 그어했습니다.
사방에서 불타고 있는 그 한 가운데는 불쌍한 벌레 한마리가 미친 듯이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 했으나, 뜨거운 불길에 고통만 더할 뿐 살아 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토인이 자기 손을 그 벌레에게 갔다 대니 이 벌레는 결사적으로 타고 올라 왔습니다. 토인은 손등에 붙은 그 벌레를 그대로 옮겨다가 시원한 풀밭으로 튕겨주었습니다.
백인은 이 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토인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며 백인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보시구려. 예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도 꼭 이와 같답니다. 나는 원래 지옥 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꼭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형편에 있는 불쌍한 벌레 같은 나를 불 속에서 건져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신 것이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인 앞에서 잘난 체 하던 백인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이 구원입니다. 또한 이것이 죽어가는 죄인들에게는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듣고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깊이 묻어 두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전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 가서 전도해야 할 것이냐 하는 장소 문제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행1 8). 여기 "온 천하"나 "땅 끝까지"는 같은 의미인데,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야 할 곳은 이렇게 넓고 광활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그 순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전파의 대상을 말해 줍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모든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28:19,눅24:47). 복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만민"입니다. "모든 족속"이 다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명인과 함께 야만인들도 들어야 합니다.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의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였습니다(딤전5:8). 천사는 롯에게 말하기를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하였습니다(창19:12).
셋째는, 복음 전파의 결과를 말해 줍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엄청난 결과입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마25:34,41). 또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축복과 저주입니다. 하늘나라와 지옥입니다. 영생과 영벌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차이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유식자와 무식자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귀인과 천인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는 차미입니다. 신. 불신의 차이입니다 순종,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복음을 받고 안 받는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책임입니다. 그러나 믿고 안 믿고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것입니다.
이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간절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려하면서, 복음 전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구령에 관한 다음 몇 가지를 제안 합니다.
1) 모든 신자는 다 예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행1:8). 모든 사람이다 목사나 전도사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이면 누구나 다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하여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3)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하여 그들을 구원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가 구령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겔3:8).
4)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롬10:17,1:18). 씨 뿌리는 농부는 집을 나설 때 먼저 종자를 가지고 가야함과 같습니다.
5) 우리의 간증은 좋은 전도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전후에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행13:3,7:60,16:25 ).
6) 개인 전도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행8:29,16:6-10). 아무쪼록,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85. 10. 20)
19.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19.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왕하7:3-20)
우리는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양심에 가책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는 양심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그 반대로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면서 욕을 하기도 합니다. 요사이는 전에 듣지 못했던 "양심선언(良心宣言)"이니, "양심수(良心囚)"니 하는 말도 더러 듣습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것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에 처할 위험 때문에, 자신의 학설을 취소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었던지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 양심이라는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란 죄를 꾸짖는 인간 내부의 증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보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2:15). 죄악을 깨달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8:9,히10:22)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벧전2:31).
그러나 성경에 표현된 양심의 종류는 허다합니다.
선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딤전1:5,19,히13:18,벧전3:21). 깨끗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딤전3:9,딤후1:3,히9:14). 또 빛된 양심도 있습니다(잠20 27).
그러나 부정적인 양심의 종류는 더 많습니다. 약한 양심이 있습니다(고전 8:7,12). 더러운 양심도 있습니다(딛1:15). 죽은 양심도 있습니다(렘6:15). 잘못된 양심도 있습니다(요16:2,3). 바리새인들의 그것은 위선자의 양심이라 하였습니다(요19:31). 회개하기 전의 바울의 양심은 타락한 양심입니다(행26:9-11). 벨사살의 그것은 두려워하는 양심입니다(단5:5-6).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문둥이들의 뉘우치는 양심을 봅니다.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하였습니다(8-9).
여기 보면, 네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위(所爲, asah)'는 그들의 소행을 말합니다. 그들이 행한 일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말합니다. 그 소위가 선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선치 못하다'는 말은 히브리말 Ken입니다. 본래의 뜻은 세운다는 의미인데, 상징적인 형용사로서 "정당한, 옳은, 잘된, 참된"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지금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말이 종종 회개와 혼동되기도 합니다만, 회개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네 문둥이들이 고백한 이 양심의 가책을 통하여 우리도 꼭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받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양심의 가책은 무엇입니까?
(1) 그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1) 그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이라고 하였습니다(9). 그"아름다운 소식"이란 "여기 먹고 살 수 있는 곡식이 무진장하게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사 직전에 있는 사마리아 성민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사마리아 성은 아랍 나라의 벤하닷 왕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아사 직전에 있습니다. 더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마리아 성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하여, 지금 네 문둥이들에게는 무진장한 보화와 양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또 보화를 감추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문둥이들은 사마리아 성민들보다는 더 불행하고 비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별 수 었습니다. 앉아 있어도 죽습니다. 아람나라 군대에게 항복한다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4). 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기를 쓰면서 황혼 때에 살금살금 아람 진으로 기어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거기에 아랍 군대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론가 다 도망쳐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들의 장막에는 엄청난 군수품과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실컷 먹었습니다. 그리고 금은보화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이 장막 저 장막을 다니면서 마음껏 먹고, 있는 대로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이 같은 짓을 계속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둥이들은 이제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마셨는데, 지금도 배고파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민들 생각이 난 것입니다. 어서 그들에게 가서 "여기 먹을 것이 있습니다"라고 전해 주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민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문둥이는 사마리아 성민들의 생사에 관한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난 것만 생각하면서, 좋아할 뿐입니다. 아사 직전에 있는 사마리아 성민들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
"양심은 죄의 고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아는 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신(神)이요, 다른 하나는 양심이다. "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면서, 양심의 가책을 맛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네 문둥이들처럼 제 정신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처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2)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기근이 온 성을 휩싸고 있었습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4분 1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고 하였습니다(왕하6:25).
나귀는 더러운 동물입니다. 그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귀머리는 먹지 못할 부분입니다. 그것마저도 80세겔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합분태는 비둘기 똥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극한 상황에서는 죽지 않기 위하여 먹어야 했던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죽지 못해 사는 극히 참혹한 식물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아사 직전의 처절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비참함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성경을 보면, 얼마나 기근이 심했던지 견디다 못한 부모들이 자식을 삶아 먹은 이야기가 나옵니다(왕하6:26-30). 차마, 눈을 뜨고 읽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랍 진 중에 들어간 네 문둥이들은 어찌되었습니까? 그들 앞에는 산해진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껏 먹고 마셨습니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는 문둥이들의 행동을 눈여겨보면 재미있습니다.
"그 문둥이들이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8).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는, 그것도 한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장막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는,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 장막 저 장막을 드나들면서 금은보화를 훔쳐서 감추었습니다.
얼마 전까지의 그 문둥이들의 소원은 허기진 창자를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자를 채우고 나니, 금은보화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가지고 가서 감춘 것입니다. 그들은 한동안 훔쳐다가 감추는 일만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것을 훔쳐다가 감출 것은 없습니까?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6:8).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함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등따시고 배부르면 배은망덕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랍 진 중에 있는 네 문둥이들도 자기들의 배가 부르니, 성 중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자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훔치고 숨기고 하다가 보니 사마리아 성의 비참한 정경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터이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9).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 이 '복음'은 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벌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자들의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겔3:18).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심각하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3) 그것은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3) 그것은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지금 문둥이들에게는 덕을 것이 있습니다. 옷이 있습니다. 금은보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배불러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많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들은 살 길을 찾아갔고,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얻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먼저 발견한 것뿐입니다. 가진 자는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누린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남달리 많이 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는, 가난하여 고생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 때, 그 나라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나라가 되었고, 마귀의 소굴이 되어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무서운 사란의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가 무려 40,0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일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화란, 스웨덴 등이 파견한 선교사가 20,000여명인데, 이들 나라들도 선진문명국가들로서 잘 사는 나라입니다.
선교하는 나라는 복을 받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나 가정은 분명히 복을 받습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오늘 날의 신자들이 이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분명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였습니다(고전9:16). 최권능 목사님은 평양거리에서 '예수 천당'소리가 그치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20:35),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서 레닌이 공산주의 혁명의 기치를 들고 일어셨을 때, 그 혁명의 지지자는 불과 40,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상에는 10억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지 2,000년이나 되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는 아직 10억도 복음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유명한 칼럼이스트인 월터 리프먼(Lippmann)은, 현대사를 분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두 종류의 인간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헌신한 예수의 제자요,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제자이다"
불란서의 공산주의 이론가. 로져 개로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결국 세계에는 두 개의 세력이 남을 것이다. 하나는 진짜 공산주의자요,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제자이다"
모스크바의 어떤 대학생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비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지만, 우리 공산당은 기독교가 2,000년 동안에 해놓은 일을 우리는 불과 50년 동안에 그보다 더 큰일을 해놓았다"
언젠가 후르시초프는 말하기를 "공산주의자는 무슨 일에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인들을 향하여 "여러분의 손자들 대에 가서는 공산주의 정부 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얼마나 위협적인 말입니까? 그는 지금 우리가 할 말을 다 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방관자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 책임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축복을 모두가 다 같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5:10:27)
20. 주는 자자 복이 있다
20. 주는 자자 복이 있다
(행 20:31-35)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 받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평생소원인 로마 전도를 위하여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여정에 급한 바울은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에베소 교회를 방문할 시간이 없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이 설교 말씀을 읽는다면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도 35절 말씀을 중심으로, "주는 자는 복이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인용으로 밝혀진 말씀입니다. 오늘날처럼 세상이 각박한 때에 더욱 빛을 말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그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주고받는 일은 동시에 축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받는 편에만 관심이 크고, 주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Athenaeus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자는 어리석고 받는 자는 행운아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습니다. 도와주고 도움을 받습니다. 있는 것을 주고 없는 것을 받습니다. 남는 것을 주고 모자라는 것을 받습니다.
이 주고받는 일이 단절 된다면 지구는 당장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중동이 석유공급을 중단하다면 온 세계는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을 것입니다. 만일 미국이 곡물 수출을 중단한다면 배고파 죽을 자가 비단 방글라데시뿐이겠습니까?
"옳소"의 함성과 함께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똑같이 중요 합니다. 이 조화의 단절은 비극입니다. 받고 주는 것은 동시에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많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그것은 서로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5) 그것은 우리가 지난 때에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갚는 것은 축복입니다. 생각 할수록 우리에게는 받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부정모혈을 받았습니다. 양육과 사랑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웃과 사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국가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받은 것이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값없이 물과 공기와 태양빛과 주거환경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받지 않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지식, 재산, 지위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는 다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선인들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울면서도 거울을 쳐다본다"고 합니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것은 비단 여자들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든 적성들이 이정도의 고운 얼굴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재너가 종두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에 더러는 흉한 곰보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아크라이트 덕분입니다. 그가 무엇인가 연구하다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그의 부인은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혼해 가버렸습니다. 그는 인생의 파산자였습니다. 그는 아내 없는 쓸쓸함을 이겨야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찬바람 이는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기어코 방직기계를 발명하여 오늘 우리에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뢴트겐은 X-Ray를 주고 갔습니다. 에디슨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고 귀한 것을 주고 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받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자가 그 은혜를 갚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준다"는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기로 합시다.
(2) 이제 "준다"는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기로 합시다.
여기 "주다"(didomi)란 말은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단순히 구제금을 내는 정도의 좁은 의미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내는 자선금이나 기부금은 피차에 유익되지 않습니다. 마지못하여 내는 자선금은 오히려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바치는 헌금이라면 그것은 정성스런 헌금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 준다는 말은 거룩한 감화의 시여를 의미합니다. 자기희생이 전제된 시여를 의미합니다. 정성스럽게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떤 이는 고기국 대신 된장국을 먹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일반미 대신 정부미를 먹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 때문에 새 차 대신 헌 차를 탑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위하여 새옷 대신 헌옷을 입습니다. 다른이는 택시 대신 버스를 탑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 더 많이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의미도 있습니다.
"주다"는 말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즉 우리의 언행심사 기거동작은 중요 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무언의 전도자입니다 변화 받은 성도는 세상의 몇이요, 소금이 됩니다. 그러나 이름만의 성도는 거치는 돌이 됩니다. 거짓된 신자는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어느 곳에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좋은 것을 알고,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어느 날 깨끗한 새 신을 사서 신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려했을 때 새 신이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형편없는 헌신이 한 켤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다음 주일날 잘못 신고 간 사람이 가져 왔으려니 기대하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새 신은 몇 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너무나 기대가 어긋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정직하고 진실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양심 나쁜 사람도 있구나"생각하면서 교회출석을 그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장로님이 담임목사 욕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사님들까지도 주일헌금을 안하니 헌금합시다. 하고 강조했더니, 헌금 강조한다면서 신앙생활을 그만둔 초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경우는, 먼저 믿는 사람들이 나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쁜 것을 주었습니다.
또 "준다"는 말은 무엇인가 남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게는 위대한 이름과 업적을 남가고, 작게는 발자국을 남깁니다. 후세 사람들은 선인들이 무엇을 남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 합니다. 그런즉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무엇을 주고 갔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람은 매일매일 무엇인가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적부를 남깁니다. 출석부를 남깁니다. 성적부를 남깁니다. 회사의 사원들도 매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사무소에 가면 주민등록표가 있습니다. 상점에 가면 외상 장부가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자 명단이 있고, 동창들끼리 사이에는 동창회원 명단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무엇인가 주고받으며 사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무엇인가 뿌렸다가는 거두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갈6:7).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둡니다(욥4:8). 방종자가 회개하였다 할지라도, 그 상처는 남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주는 것입니다.
남기는 것도 주는 것이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많은 것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우리가 이 세상에 주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에 주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우리에게 주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순종과 죄입니다. 가인도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는 형식적인 예배와 첫 살인자라는 이름입니다. 가롯 유다도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저주받을 배은망덕자란 이름입니다.
물론, 우리가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길 수 있는 것, 주고 갈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납니다.
교육사업, 자선사업, 사회사업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사업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귀한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많은 유산을 남기고 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기업가 굴드(Jay Couldj)와 같은 이는, 가난해서 자란 것이 한이 되어서였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는 금을 매점매석하기도 하였고, 부정주식 발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돈이 4천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돈 때문에 친구 네 명을 자살케 하였고, 이 회사 저 회사를 끌어들여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자선사업을 위하여 돈뭉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 많은 돈만 모아 놓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굴드와는 달리지라드(Stephen Girad)같은 이는, 자녀도 없었고 아내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낙은 없었으나 평생소원은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고아원을 세우고 싶다" 이것이 그의 생의 전부요 낙이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때에 평생을 들여 200만 불을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펜실바니아 주에 땅을 사놓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이 돈으로 두 개의 고아원을 세워라 하나는 나를 키워준 뉴올리언즈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살던 펜실바니아에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 놓은 산이, 오늘에 와서는 석탄과 철이 나는 광산이 되어, 세계에서 제일 큰 고아원은 몇 천만 불의 재산이 되어, 아무리 사업을 확충해도 돈이 모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같은 돈이라 할지라도 굴드가 물려준 돈과 지라드가 물려준 돈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죽이고 간 돈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리고 간 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이나 사상을 주고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다 사업가는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다 돈을 주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다른 사상은 가질 수 있습니다 몽테스큐(Montesquie)는 법의 정신을 남기고 갔습니다. 모세는 조국애에 대한 큰 경륜을 남기고 갔습니다.
례오날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명화를 남기고 갔습니다. 헨델(G. Handel)은 명곡을 남기고 갔습니다. 스데반은 순교의 모범을 남기고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남기고 갔습니다.
지금부터 4반세기 전, 영국의 어두컴컴한 뒷골목에는 키가 작고 여위고 병골인 학자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별로 인기를 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크고 위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사상이란 "인간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이다.
또 개인이란 국가보다도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그의 이 사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태리,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모든 나라는 국가지상주의였기 때문에 "개인이 국가보다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자는 뒷골목 집에 틀어 박혀 가난과 싸우면서도 그의 사상을 책으로 출판 하였습니다. 이분이 누군지 여러분은 대략 짐작할 것입니다. 그이가 바로 죤 로크(John Locke)입니다. 그가 쓴 책은 "인간 오성론(人間悟性論, Essay on Human Understanding)"입니다.
그 후 이 책은 프랑스로 건너가서 룻소가 읽었습니다. 또 몽테스큐가 읽었습니다. 미라보가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이 프랑스 전국에 퍼졌습니다. 마침내 1790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2,800만 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전 유럽이 흔들린 것입니다
이 영향으로부터 미합중국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프랑스 공화국이 생겨났습니다. 그로부터 헝가리의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태리가 독립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가 남기고 간 그의 사상은 지금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1704년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사상은 오늘 우리 중에 살아 있습니다. 그는 몸도 약하고 지위도 없었지만, 실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정말 아름답고 귀한 것을 남겨 주고 간 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주고 간 자들도 있습니다.
사업도 줄 것이 없고, 재산도 남길 것이 없고, 사상도 정신도 없다면, 우리의 몸을 주고 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 "너희 지체를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지금부터 15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서 낮 예배 때 선교 사업을 위하여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목사님의 설교는 간절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개한 곳입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하여 세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가는 길입니다.
2)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습니다.
3) 간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정성스럽게 선교헌금을 바쳤습니다. 맨 뒤에 서 있던 어린아이는 헌금궤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년을 꾸짖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바칠 돈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아프리카를 위하여 몽땅 바치겠습니다. "
목사는 눈물 흘리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저는 리빙스톤입니다" "지금 몇 살이냐? " "열두 살입니다" 그가 바로 "검은 대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리빙스톤입니다. 그는 약속대로 아프리카를 위하여 몸을 바친 후 죽은 유해로 고국에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교회당 묘지에 안장된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예수님,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전체시여, 나는 다시 한 번 내 생애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이런 분들을 성공자라 합니다. 위대한 자라도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옮은 말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그러나 나의 말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큰일입니다. 정신을 주고 가는 것은 더 큰일입니다. 몸을 바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실하고 더 축복스런 것은, 믿음을 전해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였고(마3:1-2), 예수님께서도 공사역의 첫 음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4:17).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하면 재산도, 사업도, 사상도, 헌신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생명과 바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요 멸망입니다.
돈이 귀하지만 생명보다는 못합니다. 사업이 귀하지만 구원에 비교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 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입니다. 교회가 설립된 목적은 바로 이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해 무리를 해가면서 신가에, 곡성에, 무안에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성탄은 흐뭇한 성탄이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헌신과 선교를 다짐하는 결의가 새롭기를 당부합니다.
(85:12:22)
21. 우리 교회의 사명
21. 우리 교회의 사명
(요1:35-42)
우리 은광교회는 1947년 3월 10일 누문교회를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교회설립 39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연혁이 말하는 우리 교회의 처음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합니다.
우리 교회의 첫 예배는 개인의 가정 방을 빌려드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칠균 집사의 사가에서 박승문 장로님을 중심한 몇몇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때로부터 도청 관사 1동을 구입하여 첫 예배당으로 사용하기까지에는 1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그곳 누문동 185번지로부터 오늘 이 자리인 누문동 166번지로 옮겨오기까지는 또 20년이란 지루한 기간이 지나야 했고, 또 다른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 대지 770평, 연건평 670평의 큰 예배당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 할수록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첫 예배를 드리던 10여명 안팎의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교회는 많은 식구를 거느린 대 교회로 자랐습니다. 생각해보면 39년 전 몇몇 사람이 조그마한 방에서 시작한 그 교회가 오늘 호남에서 우수한 대 교회로 성장한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겨자씨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자리에 깃들이니라"(마13:32).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은광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온 교회성도들의 정성어린 섬김으로 대 교회로 성장하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교회설립 40주년을 앞두고 온 교회가 다짐하고 새롭게 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은광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 우리 은광 교회는 그 사명을 지금껏 잘 감당해 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교회설립 39주년에 즈음하여,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우리 교회가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보는 것이 유익한 일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은 최초로 설립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상 첫 교회를 설립한 설립 멤버들의 활동상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첫 교회의 설립과정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영은으로 충만하게 입혀주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줍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기초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최초의 선지자가 사무엘이었다면,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요한입니다. 최초의 선지자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소개했다면(삼상 10장),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소개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참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요1:27).
그는 또 말하기를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3:30). 이렇게 말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9).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으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증거는 허공을 치는 것 같았고 이렇다 할 결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낙심하지 않고 증거하고 또 증거하였습니다. 몇날 며칠이고 그는 광야에 나가서 외치고 외쳤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얼마 후에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37).
"듣고" "좇는"것은 신앙의 예비적 행동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10:17). 또 듣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10:14). 그런즉 우리는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여기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따른 "두 제자"는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최초의 제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설립하신 첫 교회의 설립 멤버들입니다 그들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믿은 자들입니다.
여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어린양입니다. 그는 겸손한 어린양입니다. 그는 어린 아이 일지라도, 아무 두려움 없이 목을 껴안는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순수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움을 지닌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 많고 더러운 세상에 살았으나 그는 거룩했고 깨끗하였으며, 악의가 없었으며, 죄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롭고 인자하신 구세주였습니다.
그는 원수들에게도 온화했으며, 그를 찾는 자들에게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안전한 도피성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요한과 안드레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믿고 따른 최초의 교인이자 두 제자였습니다.
지상에 있어서 첫 교회는 이들을 통하여 설립되었고, 그들은 자랑스럽게도 첫 교회의 설립멤버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교회설립의 기본요건입니다. 그런즉 예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는 곧 교회의 설립자이자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한 것입니다(마16:16-18).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최초의 교회도 이 예수를 기초로 하여 세워졌고, 우리 은광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우리 교회의 기초입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예수의 교회입니다. 예수만 믿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위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높이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오직 예수로만 사는 교회입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힘쓸 일이 무엇이냐를 보여 줍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힘쓸 일이 무엇이냐를 보여 줍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10시까지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예수께서 계셨던 곳은 화려한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곳은 아마 어떤 어둠침침한 동굴이었거나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집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두 제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구주이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초라한 숙소를 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흑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집에 갔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거기서 예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참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보배는 왕왕 허술한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사실로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었고 풍채도 없없습니다(사53:2).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세로 깃들일 곳이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마8:20) 그래서 그는 멸시를 받았고,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긴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사53:4).
그러나 요한과 안드레는 그 예수가 참 메시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했습니다(41). 이 메시야는 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자입니다. 이스라엘을 압박에서 해방시키시고, 천년왕국의 주가 되어 세상을 다스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유대역사 4,000년대의 대 발견이었습니다. 정말로 엄청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기형제 시몬에게 찾아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찻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41).
안드레는 먼저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여기 "먼저"라는 말이 성경에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첫째라는 의미의 Proton입니다(first) 다른 하나는, 이른 아침이라는 Proi라는 말입니다(early in the morning). 어느 것이든지 의미는 통합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보다 더 우선 할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우선적인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보다 더 앞세워야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교인인 안드레의 언행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오순절 이후에 탄생된 초대교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도는 교회사업의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설도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목사도 이름 있는 목사가 아닙니다. 교인들 중에도 내로라하는 이 별로 없습니다. 혹 오늘 우리 중에 처음 오신이가 계신다면, 이런 것만 보지마시고 우리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을 꼭 만나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가시기 바랍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만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은광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쓸 일은 이 일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이름은 없어도 예수님 전도에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교회가 됩시다. 빛나는 예배당은 못 갖었어도 예수 열심히 전하는 교회가 됩시다. 교회가 할 일 중에 이일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를 암시해 줍니다.
(3)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를 암시해 줍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라고 하였습니다(42).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구원받은 성도의 할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만 값진 일입니다. 예수교회의 첫 설립 멤버중의 하나인 안드레는 이 일을 힘쓴 자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데리고 왔었습니다(요6:89). 이 일 때문에 벳세다 들녘은 얼마나 풍성해졌습니까?
한 번은 또 헬라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요12:22),
오늘 우리 본문에는 시몬을 데리고 왔습니다(42).
그는 데리고 갈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항상 두리번거리면서 찾은 것 같습니다 그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1) 그는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찾아 간 사람입니다. 전도는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죄인 찾아 세상에 오셨습니다.
2) 그는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구주를 만났다"라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기다리던 그 분을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3) 안드레는 시몬에게 메시야이신 예수를 증거하다가 말문이 막히자 "그럴 것이 아니라 가보자"라면서 "예수께로 데리고"왔습니다. 여기 "데리고 온다"는 말은 "인도해 낸다. 데리고 나간다. 이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포함된 의미입니다. 적극성이 포함된 말입니다.
열성과 간절성이 포함된 말입니다. 그는 시몬을 끌다시피 밀치다시피 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나중에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외칠 때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만큼이나 위대하지 못했으나, 그는 위대한 베드로를 인도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보람되고 장한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 주위에서 베드로 같은 사람을 찾읍시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입니다. 힘쓰는 자는 이를 것이요, 땀 흘리는 자에게는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6:3:16)
22. 하나님의 전도 방법
22. 하나님의 전도 방법
(고전1:18-29)
위대한 전도자 바울사도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바울사도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4).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힘써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때는 힘쓰다가도 쉬 힘을 잃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동안 몇 가지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있습니다.
1) 전도하는 것이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전도는 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3) 전도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잘못 알고 있으며, 믿지 않으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같이 믿기 어려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할 때가 많습니다. 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전도의 어려움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찾지 않으실까 하는 아쉬움과,
2) 다른 하나는 천사에게 복음전파의 책임을 맡겼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 사람들의 통상관념이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전도는 지혜로운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 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 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구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갈3:26-29).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잡은 자와 잡힌 자, 가해자와 피해자, 의인과 죄인, 유식자와 무식자, 권세자와 무력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우는 자, 피해자, 억울한 자, 의지 없는 자, 병든 자,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복음의 문은 더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의 대상을 이렇게 밝혀줍니다.
1) "이방인,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불우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4:15-16).
2)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눅4:18-19).
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마11:28).
4) "술을 즐기는 자와 세리와 죄인"(마11:19)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2:17) 또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도 하였습니다(마19: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시며, 교만한 자에게는 베푸신 은혜마저도 거두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미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죄인의식을 가진 겸손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 중요한 특징입니다.
유대나라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주로 병자, 귀신들린 자, 세리, 창녀, 죄인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자들, 유대귀족들에게 압박받는 서민층 중에서 많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보더라도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멸시받는 세리 등 이름 없는 직업인들입니다.
그러하다 해도 이것 때문에 복음이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들에게나,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기독교가 말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하였습니다(22-23).
십자가의 도가 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까?
1) 유대인들은 십자가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신21:23).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2) 다른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거짓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A.D 45년에 나타났던 드다나, A. D 54년에 애굽으서 왔던 자칭 선지자의 유혹은 유대인들의 구미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사기꾼들이 말하는 엄청난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인기를 끌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능자요 섬기는 자요 억울해도 말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가 구세주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무능력한 패배자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1) 십자가는 극악한 죄수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같이 무시무시한 형구에서 구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철학과 웅변과 변론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교양 없는 전도자들의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한 제자들의 전도는 그들의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과 경멸의 상대에 불과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미련한 처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요 승리의 표상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증거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전해야 합니다. 전도할 줄 모른다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자체로서 충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해진 복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미련하다고 하여 복음자체마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무식하다 하여 복음마저 천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린아이라 하여 복음마저 멸시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신다"(27-28).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비록 미련하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자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약함을 전하지 않고 복음의 강함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입원한 병자가 불신의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빠, 지옥가면 안돼요"라고 하면서 붙잡는 아이 때문에 구원받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고민하는 일 때문에 자살하려고 기웃거리다가, 다리 밑에서 찬송하는 거지 가족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련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질그릇 속에는 보화가 담겨있듯이 우리는 미천해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하여, 둔한 우리 입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미련한 사람들이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부르사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으시고,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수단인 우리의 약함 때문에, 복음자체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십것으로 보일런지 모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빈부귀천 남여노유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는 듯 보입니다. 또 복음은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미련한 인간들을 통하여 전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비록 이방법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5:10:26)
23. 예수님의 제자들
23. 예수님의 제자들
(막3:13-19)
독일제국의 초대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다음의 세 마디 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 옳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힘써 일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출20:9,전9:10).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도 말합니다(살후3:10). 왜냐하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열심히 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츄우크는 말하기를 "성공의 지름길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언제 시작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셋째는, 그 일을 어디서 하느냐는 장소문제입니다.
넷째는, 그 일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적당한 때에 착수하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갈4:4) 하나님께서는 제상에 복음전파의 준비가 다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복음전파를 위한 준비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준비입니다.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 의해 온 세계는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곳곳마다 로마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고 세계는 한 이웃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는 복음이 나타남에 있어서 공헌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1) 세계의 평화였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모든 나라는 쇄국주의로 문들을 굳게 닫고 있었고 한 세기 후였다면 야만문화와 싸워야 했습니다.
2) 교통이 편리한 때였습니다.
로마의 군용도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편리하였습니다.
3) 언어의 통일이었습니다.
온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언어의 장벽은 미리 무너져 있었습니다.
둘째는, 경제적인 준비입니다.
전쟁의 여파와 헤롯대왕의 사치와 과중한 세금과 종교적인 부담금과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을 때, 갈릴리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셋째는, 도덕적인 준비입니다.
온 세계는 밝고 타락한 시대에 처해 있었습니다.
넷째는, 종교적인 준비입니다.
로마의 신들은 다 낡고 죽어 있었으며 가이사 황제를 신으로 섬기게 하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공허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충족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조금도 이르거나 늦지 않은 때에 그는 오신 것입니다.
그는 오셔서 갈릴리에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였습니다(막1:14). 예수께서는 천국복음전파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갈릴리는 예수께서 자라난 곳입니다.
그는 그곳 회당에서 예배하였고, 그곳 목공소에서 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배우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곳이 잘 아는 지방인 때문일 것입니다.
2) 또 그곳 갈릴리는 가장 인구가 많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많은 청중을 모을 수 있는 곳으로, 당시에 갈릴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한때 팔레스틴의 군정장관을 지낸 오세퍼스에 의하면, 갈릴리에는 작은 도시와 마을이 204곳이나 있었는데 인구가 15,000명 정도씩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 계산대로라면 그곳에는 적어도 3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3) 또한 갈릴리 사람들의 성격과 기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진취성이 있었고,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사상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혁신을 좋아하고, 충동적인무사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은, 새로운 종교 이해에 있어서 갈릴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지상에서 제일 먼저 복음을 들은 축복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도민들은 오만한 유대도민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빌립은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의 기록한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요1:45).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리라"(요7:41,52).
이것이 당시의 유대인의 관념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멸시를 받은 것은 무식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멋없는 사투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우고 천대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노라 하는 유대도를 찾아가지 않으시고, 그늘진 사람들이 우굴거리며 사는 갈릴리를 찾아와 거기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서 전도와 이적의 태반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를 천대했어도, 하나님은 그 땅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3).
오늘 우리 중에 가난하여 삶에 지치고 시달리며, 가난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는 분이 있다면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명문거족과 오만한 유대도민들보다는, 가난하고 고단한 갈릴리도민을 찾은 것을 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의 구원사역을 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신 곳은 갈릴리에서였습니다. 주님은 공생에 3년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가르쳤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였습니다.
길지 않은 공생애 3년은 쉬 지나갔습니다. 낮과 밤이 오고갔고, 춘하추동 시절 따라 때도 바뀌었습니다. 어떤 때는 산위에서 어떤 때는 바닷가에서, 어떤 때는 집안에서, 어떤 때는 들녘에서, 장소도 바뀌었습니다.
접촉한 인물들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유식자도 만나고 무식자도 만났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만나고 병자도 만났습니다. 어른도 만나고 아이도 만났습니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났습니다. 부자도 만나고 가난한 자도 만났습니다. 유대인도 만나고 사마리아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1) 때와 장소와 상대하는 사람에 관계없이 항상 천국복음을 전파했습니다.
2)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나, 그가 뽑으신 12제자는 항상 예수의 곁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안드레,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 이 열두 사람은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 그들은 예수께서 가신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녔습니다.
2) 또한 그들도 주님이 전하신 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14,16). 예수에게 있어서 12제자는 너무나 귀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통하여 교훈을 받기로 합시다.
(1)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14,16).
마태는 "그 열두제자를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10:1,11:1).
예수님의 이 열두제자의 선택은, 그의 공생에의 중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공생에 3년은, 열두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시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들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패 12인이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수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합한 7을 좋아하고, 또 그것을 곱한 12를 좋아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면류관에 붙은 별도 열둘이고, 천상 예루살렘의 주초도 열둘이며, 하늘나라의 문도 열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구약 교회의 시작이었고, 열두 제자는 신약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숫자를 합한 24장로들은 영광 중에 있는 전체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봅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선교활동의 계속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운동마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죽어도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자기 사람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제자들은 남아 있어서 예수가 전한 복음을 계속 전파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 선교활동의 계속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운 것입니다.
2) 그의 복음전파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몸입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하는 곳도 많았고 가야할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일도 태산같이 많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음성은 한정된 사람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고성능 확성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라디오 신문 TV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떤 소식을 전하려면 사람을 시켜서 전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친피 가실 수 없는 곳에 제자들을 파견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줬고, 자신이 직접 가서 전할 수 없는 곳에 자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로만 끝났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어찌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지옥자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복음을 그 제자들이 이어받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해주어서, 한국 땅 이곳까지 전파되어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한 복음 받아 믿고 구원 얻은 것입니다.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잘사는 나라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은데, 멸시받고, 천대받고 눈물 흘리며 한숨 쉬는 우리가 구원받게 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즉 이 복음은 우리도 대대로 전하고, 멀리멀리 퍼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월터 월슨 박사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곳에 청년 한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깡패였습니다. 그는 당구장과 술집에서 살았습니다. 욕도 잘하고 주먹도 무서웠습니다. 어떤 분이 그 무서운 깡패 청년에게 전도하여 부흥집회에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그 집회에 시간마다 참석하는 중에 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당에서 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침대머리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지난날 지었던 모든 죄를 하나하나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죄 사함 받은 감격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사방은 캄캄하고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옆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깜짝 놀란 주인이 나와서 "무슨 일인가? "고 물었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악한 놈을 구원하여 천국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
그는 또 옆집으로 뛰어갔습니다. 가서는 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주인은 눈을 부비면서 나왔습니다. "이 밤에 웬일입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말갛게 씻어주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이 감격스런 이야기를 이웃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날이 밝아오는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또 길 건너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이집 저집 다니면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밝아오는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면서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증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구원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은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대한 의문부호여서는 안 되고, 감탄부호여야 한다! "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이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전할 사람은 이 제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어떤 자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떤 자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열두제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1) 오늘 우리 본문에는 열두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개성을 가진 자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마10:4,막3:18). 열심 당원은 이른바 극우파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하여서는 살인 방화 암살까지도 서슴지 않겠다고 맹세한 철저한 국수주의자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제자들 중에는 세리 마태가 있습니다. 그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 규탄 받았을 법 합니다.
민족주의자 시몬과 매국노 세리마태는 서로 조화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정력가요 활동가입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는 칭찬도 많이 듣고 책망 또한 받은 자입니다. 그는 죽기까지 예수 따르겠다고 장담도 했지만 또한 예수 부인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담대한 성품인가하면, 계집 아이 앞에서도 쩔쩔매는 겁쟁이입니다.
그가 어떻게 명상적이요 사색의 사람이며 기도의 용장인 요한과 함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안드레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사교성이 있었는지 몇 번이고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어찌 의심 잘하고 찬찬한 성격의 소유자인 도마와 함께 일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예수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각이한 성격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된 후부터 아무도 자기를 주장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두는 다 예수중심이었지 자기중심인 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서로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서로 존경하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용납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참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 중에 험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비협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원망 불평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사로운 일 때문에 개인 행동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서로 입장이 다른 분들을 이해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2) 우리 본문은 또 말하기를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제자로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13).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님께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요한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마태도 있어야 하고, 야고보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마태도 있어야 하고, 시몬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안드레도 도마도 다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원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본문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하였습니다(13).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일군들을 뽑음에 있어서 아무나 세우지 안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제자로 뽑힘 받은 기준은 학력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신장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었습니다. 유력자도 아니고 자원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기준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자기가 원하는 자를 뽑아 제자로 세웠습니다.
그런즉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1:5).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였습니다(엡2:8).
만일 구원의 조건이 선행이라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구원의 조건이 돈이라면 구원받은 자는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받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원하는 자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제자된 것을 감사합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상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삼았으나, 그의 제자로 선택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없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마10:37).
둘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마16:2:l).
셋째는, 주의 제자들은 말씀 안에 거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요8:31).
넷째는, 제자들은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요15:8).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우리도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예수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많은 열매를 맺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무슨 목적 때문에 제자를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3) 예수님은 무슨 목적 때문에 제자를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라 하심이니라"(14,15)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14).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째 목적입니다. 예수는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피곤했습니다. 외로왔습니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경원했고 기피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친형제들마저도 이해하려 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8:20,눅9:58).
군중들은 모였다가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왔다가는 떠나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때 날마다 함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은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니라"(눅22:28). 이것이 동고동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신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섬김을 받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고,
셋째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면서 그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시고, 그 음성 듣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네 얼굴 보게 하라" "나로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아2:14).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주시기 때문입니다(마1:23)
친구도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부모도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부부도 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 20).
믿으시고 힘 있게 살아갑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더라"(15).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둘째 목적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본래 그리스도의 권능이었습니다(막1:26,3:12). 그런데 그 권능을 이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이적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그들의 이름을 높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들의 자랑이 되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복음전도에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남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목소리가 고운 사람은 찬송을 불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축구선수는 골인 시킬 때마다 감사 기도함으로 관중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맞을 때 하나님을 전할수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홈런을 친 야구선수가 기도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재물을 사용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남다른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에게 한말은 뜻이 있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4:24). "이때"가 지나가기 전에 복음전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을 전도자로 파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하였습니다(14).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시켜 보내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여기 "보낸다"는 동사가(apostello) "사도"란 명사의 어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apostolos). 우리는 사도를 "그리스도가 보낸 자"로 해석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도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최대의 목적이요 제자들을 선택하신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꼭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셨고, 그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16:15) 또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과연 예수의 제자들은 주가 말씀하신대로 주님께 배운 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전파하기위하여 무수한 고난과 박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통치자나 관원들 앞에서도 무서워하거나 비굴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공공장소에서나,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나, 죽음이 기다리는 위태한 곳에서도 그들의 증거는 한결같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 했습니다(행15:26).
한때 계집 종 앞에서 마저 비굴했던 베드로는 얼마나 당당한 자로 변했습니까? 그들은 가는 곳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도전했습니다(행4:20).
모름지기,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앞서 간 성도들은 피를 흘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건만, 오늘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안일을 추구하면서 하품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지옥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있는데 우리는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가 다 순교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우세비어스에 의하면, 제자들의 순교를 이렇게 전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 당해 순교하였고, 빌립은 소아시아 브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순교하였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 베임 당하여 순교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꼭대기에서 떨어트려 순교 당했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고, 가나안사람 시몬은 유대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기서 순교했고, 안드레는 헬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롯 유다만 비참하게 죄 값으로 저주스럽게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딴으로 맡을 사고 그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 성경은 그의 종말에 대하여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합니다(행11:25). 그곳이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부름 받은 자들은 다 순교자로 천국에 갔는데, 유다만은 배교자가 되어 지옥에 갔으니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사람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셋째, 제자들은 복음 때문에 죽었으나,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90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살아 있어서 우리의 귀에 들려지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죽어서조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11:4). 그들은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그들이 쓴 글속에 지금도 살아 있어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도처에 많은 대학과 도시이름이 그들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많은 교회와 병원 자선단체, 고아원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 속에 그들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1950년 Elson. C. Smith가 쓴 "우리들의 이름이야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는 당시 미국인의 보편적인 이름의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거기 보면 요한(John)이 5,837,000명, 야고보(James)가 2,998,000명, 도마(Thomas)가 1,910,000명 등 제자들 모두가 다 10만 명이 넘습니다.
기원후 1세기에 무명한 제자들의 이름이 미국 내에서만도 이렇게 엄청납니다. 마태는 마테복음에만 아니라 Hendel의 수난곡 속에 살아 있습니다. 네오날드 다 빈치는 그의 최후의 만찬에 사도들의 얼굴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갔으나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단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의 제자 열둘을 세웠습니다. 그가 제자를 세운 이유는 선교활동의 계속과 그 복음을 사방에 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를 부르실 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택했습니다.
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복음전할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꼭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딤후4:2). 왜냐하면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9:16).
충성스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6:11:2)
24. 파수꾼으로 세웠노라
24. 파수꾼으로 세웠노라
(겔33:7-12,3:16-21)
파수꾼(把守軍, Watchman)은 주로 밤에 불침번을 서서 사람이나 재산을 지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문을 지키는 보초나 수위를 지칭하기도합니다. 맡과 포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은 보통 추수하는 동안만 배치됩니다. 그들은 더위를 피하려고 초막을 세줬으며, 파수를 잘 보기 위하여 망대를 세우기도 합니다(왕하17:9,대하20:24,욥27:18).
성읍의 파수꾼은 밤에 적들로부터 성벽을 보호하였으며, 보초처럼 성읍의 안전을 도모하였습니다(삼상14:16,삼하18:24).
파수꾼은 성읍이 적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을 때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램51:12). 그러나 그것은 파수꾼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고, 성읍의 안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시편기자의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성경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사모하는 경건한 성도들을 파수꾼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0).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파수꾼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위기와 임박한 운명을 보았으며, 잠자고 있거나 무관심한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호9:8) 선지자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파수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시21:6,겔3:17). 그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즘은 의미에 있어서의 파수꾼의 책임은 선지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파수꾼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민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곧 하나님을 증거하는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두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의에 있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파수꾼들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의 불침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16-17).
여기 "세운다"(nathan)는 말은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지정하다. 시키다. 수여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파수꾼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본문 말씀은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33:7). 여기 "삼음"이란 말도 "세웠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파수꾼으로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파수꾼은 되고 싶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파수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많게 하였느니라"(사62:6)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파수꾼으로 임명하지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임무가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파수꾼에게 주어진 임무를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습니다.
(1) 파수꾼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1) 파수꾼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남의 형편을 멀리서 살피는 것을 "망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적국의 형편과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의 파수꾼들이 베냐민 기브아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무너지는 것과 흩어지는 것을 살폈습니다(삼상14:16). 다윗의 파수꾼들은 압살롬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삼하13:34). 그들은 또한 왕에게 소식을 가지고 오는 구스사람과 아히마아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삼하18:25-27).
이처럼 파수꾼들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2) 파수꾼은 감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2) 파수꾼은 감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딴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밤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계속 사방을 주의 깊게 감시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했을 때 파수대를 세웠습니다(느4:9,7:3) 유대인들은 들판에 파수대를 쌓아 그곳에 파수꾼을 두어 도둑이나 여우나 곰이 과일이나 곡식을 헤치는 것을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시80:13,아2:15). 파수대 외부에는 돌계단이 있었고, 내부는 음식물을 저장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왕하17:9,18:8,대상27:25,사5:2). 파수대 꼭대기에는 초막을 지어 추수 때에는 파수꾼의 가족 전부가 거기서 함께 살도록 하였습니다(사1:8,암9:11). 성경은 이 같은 초막은 보호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시2?:5).
(3) 파수꾼들은 성읍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3) 파수꾼들은 성읍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성벽위에서 망을 보거나 거리를 순찰하면서 성읍 이곳저곳을 살폈습니다. 이들 파수꾼들은 도둑의 준동을 막고 원수의 침투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구석구석을 순찰함으로 성읍을 지켰습니다.
(4) 파수꾼들은 야경하는 일을 했습니다.
(4) 파수꾼들은 야경하는 일을 했습니다.
야경은 밤사이에 별일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소원은 어서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시130:6). 파수꾼을 영어로는 Watchman이라고 합니다. 야경은 nightwatch라고 합니다. 본래는 파수꾼 한 사람에게 정해진 근무시간을 watch라 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군사목적상 밤을 3개의 파수단위로 나누었습니다. 제1파수(파수)는 해질 때부터 10시까지를 말합니다(렘애2:19), 제2파수(심야파수)는 10시부터 새벽 두시까지를 말합니다(삿7:1 9). 제3파수(새벽파수)는 새벽 두시부터 해 뜰 때까지를 말합니다(출14:24,삼상11:ll).
로마 통치하에서는 밤을 네게의 파수 단위로 나누었는데 유대인들도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e3:35). 그것은 "초저녁, 심야, 계명(鷄嗚), 아침"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시간으로 표시하면, 9시, 자정, 3시, 6시로 구분됩니다(마14:25,마13:35,눅12:38,행12 4).
우리나라도 하루 밤을 경(更)으로 5등분하여 일컬었습니다. 초경(初更, 8-10시), 이경(二更, 10-12시), 삼경(三更, 12-2시), 사경(四更, 2-4시), 오경(五更, 4-6시)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파수꾼의 근무시간을 watch라 하였는데 시계를 의미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수꾼들에게 물었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파수꾼은 대답하기를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고 했습니다(사21:11-12). 파수꾼들은 함의 시간을 외치며 알려주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영적인 파수꾼들도 영계의 시간을 알려줄 임무가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5) 파수꾼은 깨우치는 일을 했습니다.
(5) 파수꾼은 깨우치는 일을 했습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네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겔3:17). 여기 "깨우치다"(zahar)는 말은 "번쩍이다"는 의미입니다. 상징적으로는 "계몽하여 훈계하다 가르치다"뜻으로 사용됩니다.
영적인 파수꾼들인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그 본분이 귀하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만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즉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가르쳐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은 전도서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본분이란 마땅히 행해야 할 직분 즉 의무(du)를 말합니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본분을 모른다는 것은 사람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제1본분을 망각한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을 죄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잘못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 값은 사망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는 말씀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행4: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의 임무요 다른 말로하면 곧 전도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깨우쳐야 할 자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겔3:18절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그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하였습니다(겔3:19).
요컨대, 우리가 전도할 자를 전도하면, 그가 신 불신 간에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첫째 그들은 죄 중에서 죽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 피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불신자에 대한 전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의 책임이요 교회의 의무입니다. 교회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으나 이 책임보다 우선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 큰 책임을 망각하고 "교회 자체만을 붙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교회는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 도중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타락을 막지 못하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서 제상을 구원하지 못하면 세상이 교회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서 이 파수꾼의 임무를 잘 감당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구령운동입니다.
알렉산더 더프(Allexander Duff)박사는 영국 스콧트랜드의 목사로서 오랫동안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늙고 나이가 많아서 고향 땅에 그 뼈를 묻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 가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의사의 치료를 받고 얼마 후 깨어났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나의 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다시 단상에 세워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단상에 다시 서서 백발이 성성한 흰머리를 숙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할 때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이 전도자를 보내고자 하는데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다니 정말로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내 고향 스코트랜드에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인도로 돌아가서 스코트랜드의 마지막 한 사람이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백골을 인도의 갠지스강변에 묻으러 왔다고 말해야 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에 전도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들고 나서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너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입니다. 이 민족을 위한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동태를 살피는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악의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은 야경들입니다. 우리는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파수꾼들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망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깨우치는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깨우치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 합니다. 그러나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들은 죄 중에 죽습니다. 그리나 그 무서운 피 값은 내가 지불해야 합니다. 성실한 파수꾼이 됨으로 무서운 책임을 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 파수꾼은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자입니다.
(6) 파수꾼은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경고하다"(zahar)는 말은 "깨우치다"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저 멀리에 위험이 막아오고 있다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입니다. 불신의 종말은 비극이라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입니다.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주는 것이 곧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곧 인생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현대를 위기라 합니다.
사실로 현대는 위기입니다. 지구촌에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인 위기이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잔잔한 나라가 없고 평안한 나라가 없습니다.
군사적인 위기입니다. 도덕적인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AIDS는 우연한 질병이라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성도덕과 윤리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위기입니다. 사상적인 위기가 다가 왔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은 세계도처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망을 잘 보고 감시를 잘 합시다.
성읍을 잘 지키고 야경을 잘 합시다.
깨우치는 일도 잘하고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합시다.
하나님은 이런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충성스런 영적 파수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7 3:15)
25. 말씀에 붙잡힌 사람
25. 말씀에 붙잡힌 사람
(행1:5-11)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에 붙잡힌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다른 이가 아닌 사도바울을 말합니다. 그는 제2차 전도여행 시에, 당시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로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아덴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별로 신통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헬라의 대도시 고린도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아덴에 비하여 상업과 무역이 성한 신흥도시였으며 또한 도덕적으로 부패한 죄악의 소굴이었습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온 바울은, 거기서 1년 반 남짓 머물면서 많은 신자를 얻어 교회까지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 전도를 시작한 무렵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고린도 전도는 아덴 전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전도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습니다(5).
물론 고린도 전도에도 훼방과 핍박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에 붙잡힌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사람들은 바울을 전도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1) 사람들은 바울을 전도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전도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普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유대인들은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그. 들은 오로지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온 민족입니다. 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구약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풍부하고 그 약속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그것을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후푸만(J. A. Huffman)은 18가지로 요약 합니다.
1) 여인의 후손으로, 2)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3) 유다지파의 자손으로, 4)별로, 5) 여러 가지 구약의 제도와 의식의 예표로, 6) 모세의 뒤로 장차오실 "그 선지자"로, 7) 다윗의 사존으로, 8) 왕이요 또 제사장으로, 9) 열국의 심판자로, 10) 이방인들의 소원이요 또 빛으로, 11)
동정녀의 아들로, 12) 기름부음 받은 자로, 13) 베들레헴에서 날 자로, 14) 팔리울 자로, 15) 찔리울 자로, 16) 열린 샘으로, 17) 정화시킬 자로, 18) 의의 태양으로 약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메시야 예언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구약에 있는 메시야 예언은 무려 456회나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의 성취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요1:29)
시몬의 형제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요1:41).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요 전무후무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그 메시야가 자기 앞에 서 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요4:25).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 아무도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지도 못했고, 영접하지도 안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요1:10-11).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장차오실 메시야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왔습니다. 그 메시야 예수가 오셨는데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영접하지도 안했습니다. 더더욱 놀란 사실은 그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명을 씌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무서운 죄 값 때문에 유리방황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유대인들의 과오를 알고 있는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면서 혀가 닳도록 의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5).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행17:3)
또한 베드로도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증거하기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외쳤습니다(행2:36).
이 은혜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하였습니다(행5:42).
사도행전은 바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두개의 위대한 전도운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를 주축으로 한 예루살렘 전도운동과(1-12장), 바울을 주축으로 한 세계 전도운동이 그것입니다(13-28장). 베드로는 요한과 빌립과 스데반으로 더불어 성지전도에 정성을 쏟았고, 바울은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로 더불어 세계전도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을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이는 정말로 축복의 소식이요 위로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저희가 대적하고 훼방"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5).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전도자들을 원수로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알고 욕하고 훼방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 좋은 천국에 당신이나 가시오" "이제는 지옥도 만원이라고 합디다" "차라리 나는 내 주먹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더러는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고 욕하고 멸시 합니다. 더러는 대적하고 훼방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 바울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본문 말씀 6절을 봅시다.
첫째, 옷을 떨었습니다. 이는 나는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리"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터를 옮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바울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할 수는 없을까? 한없이 부럽습니다.
(2) 바울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랐습니다.
(2) 바울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었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꽁꽁 묶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묶이운 자는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묶이운 자는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묶이운 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묶이운 자는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사베앙이라는 대위도 나폴레옹을 따라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폴레옹 군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할 때 사베앙 대위는 러시아군에게 붙잡혀 사라토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정부는 그를 조국으로 송환하지 않았고, 프랑스정부도 무관심하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60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억류생활을 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수용소 소장의 특별지시로 수용소 안 한 모퉁이에 집을 짓고 40년을 살면서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1912년, 그러니까 포로된 지 꼭 100년 하루만에 144세란 엄청난 나이로 수용소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붙잡힌 자의 가련한 모습입니다.
거지에게 붙잡히면 거지가 됩니다. 그는 거지의 수족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도둑에게 붙잡히면 도둑을 따라 다니면서 도둑질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사탄에게 붙잡히면 사탄의 하수인이 됩니다. 간첩에게 붙잡히면 세뇌교육을 받고 그 간첩의 손발이 됩니다. 이것들은 다 망할 것들입니다.
붙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께 붙잡힌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는 아세아전도를 막으시는 성령의 인도를 거역하지 않았습니다(행16:6).
그는 또 비두니아로 가고자 원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을 때 그 길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행16:7). 그는 드로아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야로 내려갔습니다(행16:10),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는 핍박을 피하며 멀리 이방인에게로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고 바로 회당 옆집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이것도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평생소원 로마행도 하나님의 허락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그는 꼼짝도 않고 기다렸습니다(행23:11).
성도 여러분,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허락하시기까지 우리는 주님이 세워지신 그 자리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를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메워주신 직분은 액서사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메어야 할 짐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주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의 터전입니다. 기분 따라 철새처럼 옮겨 다닐 수 없습니다.
영국 런던 위커 미술관에는 콘트티라는 미술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온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온 성의 사람들은 물밀듯이 피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문을 지키는 군인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성문파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뜨거운 용암을 맞으면서 굳게 서 있는 모습 그대로 화석 속에서 발견된 것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상관으로부터 그 자리를 떠나도 좋다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의 군병들은 그보다 더 충성스러워야 할 것 아닙니까?
(3)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담대했습니다.
(3)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담대했습니다.
그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합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9).
유대인들에게 박해받는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10절의 말씀도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부귀나 영화나 백만 대군보다 더 귀한 축복은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마28:20)
영국의 선교사로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 들어가서 고독과 독충과 기아와 맹수와 싸우다가 1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글라스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간을 살 수 있었습니까? " 리빙스톤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두 마디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이고(요14:18), 두 번째 약속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28:20).
성도 여러분, 이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살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두려워말라는 말씀이 365차례나 나옵니다. 어떤 이는 이 사실은 매일 두려움 없이 살라는 교훈일거라고 말합니다. 앞서간 전도자들이다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던 것은, 그들이 말씀에 붙잡혀 담대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최후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최후의 행동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최후의 명령도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최후의 기도도 범죄한 영혼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뻔합니다.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정말기 평양에서 순교하신 최봉석 목사님은 정말 귀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곳곳에 다니시면서 "예수 예수" "예수 믿고 천당"이라고 의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는 입이 있어도 이렇게 전도할 줄 모르는 자들을 벙어리라 하였습니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전합시다.
만일 우리가 대리석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다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놋쇠를 문지르면 시간이 그것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큰 성전을 짓는다면, 언젠가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은 허물어져 먼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영생하는 영혼을 위하여 일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는 담대한 축복을 받읍시다.
이제는 늙어서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Ohio) 어느 교회 주일학교 한반의 수업을 마치고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열심히 한 일은 주일학교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오하이오의 한 부락에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낮선 사람이었습니다. 첫 주일 아침에 나는 주일학교에 찾아가서 한반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길 반이 없다면서, '만일 당신이 반을 맡고 싶거든 나가서 한 반을 전도하여 만드시오'라고 그 교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길거리에 나가서 공기놀이하는 소년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주일학교반이 되어달라고 말했더니 그들은 찬성했습니다. 나는 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많은 시간들을 그들과 보냈습니다. 함께 놀고 함께 자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매년 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편지를 축하를 해옵니다.
그들 중에 세 소년이 있습니다.
한 소년은 찰스 콘웨이(Charles conway)인데 그는 인도선교사입니다. 또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의 비서가 되었고, 또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입니다. 그가 바로 하딩(Warren. C. Hardine)대통령입니다. "
성도 여러분,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공기놀이 하면서 놀던 아이들을 데려다가 가르쳐서 이렇게 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지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가르친 결과는 잊을 수 없다" 우리도 같은 축복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87,11 1)
26. 매임 받은 사람들
26. 매임 받은 사람들
(행 16:5-10)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유일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곧 성부성자 성령을 말합니다. 그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속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을 감동하사 믿어지게 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또 성경으로 삼위의 사역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39권이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들은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신약 중에서도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도행전은 성령에게 매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대한 놀라운 전도기사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도행전의 외적양상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내적 사실은 곳곳마다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시작하여 계속하여 성령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도 "성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도 성령에게 매임 받은 사람들의 행적입니다. 바울 일행의 전조 여행은 바울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성령님의 인도대로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20:22).
여기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회개한 이후의 바울의 생애는 오로지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것도 성령의 인도였고(행13:4), 가지 않는 것도 그러했습니다(16:6).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성령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실로 그는 그곳에 가서 어떤 위험을 당할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시로 인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에 의해 매인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매이다"(deo)는 말은 "묶이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그는 성령에게 붙잡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에게 붙잡힌 사도 바울의 움직임을 보게 됩니다. 성령에 의해 매인바 된 그의 움직임은 곧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본문 말씀은 유익한 교훈이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성령에게 매인바 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본문은 매임 받은 사람에 있어서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진로가 막혔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진로가 막혔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제 제2차 전도여행에 올랐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할 때, 이미 설립한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그 교회들을 돌아보려는 목회적 여행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말씀하기를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하였다고 합니다(6). 바울은 아시아 곳곳에서 복음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의 북쪽 비두니아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7). 아시아 전도를 막으신 성령께서는 다시 비두니마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이 길도 막히고 저 길도 막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한 아시아 넓은 천지를 전도 구역삼고, 복음을 들고 발 벗고 나셨으나, 성령은 그 길을 막았으며, 또 비두니아 지방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했으나 흐 길마저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은 바울의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할 수 없이 두 번이나 그의 여정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그는 부득불 아시아 전도와 비두니아 전도를 단념해야 했습니다.
그는 비두니아 전도를 위하여 무척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왜 이렇게 바울의 길을 막으셨을까요? 성령께서는 무엇 때문에 번번히 아시아 전도를 가로막았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의 바울은 이 하나님의 숨은 뜻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겠습니까?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낙심했을 뻔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갈 길이 막혀 애타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길이 열리지 않아 고민해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전후좌우가 막히곤 합니까? 이리가도 막히고, 저리가도 막혀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셨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혹 하나님께서 비밀스런 섭리 때문에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그의 아시아 전도와 비두니아 전도를 막으신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어떤 섭리가 계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로를 딴 데로 돌려놓기 위한 하나님의 어떤 뜻 때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바울은 아시아에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보다 더 큰 유럽이라는 황금어장으로 바울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그의 길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 길도 막히고 저 길도 막혔을 때, 조금은 당황했은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위한 잠간의 아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앞길이 캄캄하고 전후좌우가 막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범죄하고 불순종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길을 막으십니다. 이때는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요나처럼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더 큰 뜻과 축복을 위하여서입니다.
이때는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가난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갈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 하루는 사진기술을 배워 사진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진술을 읽어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기법에 관한 책이 아닌, 음악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 소년은 너무나 가난하여 그 책을 반송할 만한 우송료도 없었습니다.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나 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할 수 없이 그 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차리 apr카시였습니다.
길이 막혔다고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죄 때문이냐 하나님의 선한 뜻 때문이냐입니다.
(2) 우리는 본문에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본문에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자로 세움 받은 사도입니다. 그런데 아시아 전도의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비두니아로 갔습니다만, 그 길도 막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무시야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8)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9). 그 밤에 바울은 심란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안타까운 사정을 주 앞에 아뢰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를 위해 발 벗고 나셨으나 전후좌우가 막혔습니다. 나는 갈 길을 모릅니다. 나의 진로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바울은 울적한 심정으로 드로아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밤에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9).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사실입니까? 바울 일행은 그들이 두 번이나 겪었던 불가사의한 방해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아시아 전도가 아니라 유럽전도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환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과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환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습니까? 있다면 지금 애절하게 오라고 손짓하는 마게도냐 사람이 보입니까? 여러분에게 신령한 귀가 있다면,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 그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까?
그 마게도냐 사람은 바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부르짖음은 파멸해 가는 죄인들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어서 가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구조의 요청은 지금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이는 바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요 우리 교회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이방인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장려하고 전도주일을 설정하는 것은 이 부르짖음을 듣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교회가영적인 장님되었고 귀머리가 되어 버렸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만이라도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이방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대답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를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더라"(10),
우리는 여기서 매임 받은 사람들의 생활 원리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그들은 이 환상을 본 후 머뭇거리지 않고 곧 마게도냐를 떠나기로 힘썼습니다.
둘째는 소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 일입니다. 순종은 아름답습니다. 순종의 열매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교우가 일심으로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구원받은 무리들은 날마다 더해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의 급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와 오늘의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의 증인되는데 순종했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이다"는 말은 사로잡히다는 말입니다. 사로잡힌 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합시다. 순종하는 예수의 손발이 됩시다.
지금부터 한 세대 전에 한 중국인이 미국에 가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쟁쟁한 학위를 여러 개 소유한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고국에서 보수 좋은 관직이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였습니다.
그는 결국 주님께 헌신하기로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태평양 바다위에서 그 모든 졸업증과 학위증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대만과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에는 그가 전도해서 설립한 교회와 회심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종의 결단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매임 받은 사람으로서의 순종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니면 이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령의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데리고 가서 천국문을 열더니 저 밑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가 그 밑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살던 세상이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았더니, 그 세상 사람들은 다 소경이었고 그들은 다 깊은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금방 떨어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물었습니다. "나와 함께 이 낙원에서 살겠느냐? "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거기 가서 저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안내자가 되겠습니다. 저를 빨리 보내주세요"라고 소리를 치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복음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께 매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외면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전할 자로 부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충성하여 전도주일에 많은 열매를 거두는 축복에 동참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87:11:8)
27.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
27.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
(유다서 1:17-23)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교회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시대의 종말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하고 있는 유다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다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기독교에 임할 엄청난 배교행위를 다루고 있는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유다서를 "배교자행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모두 25절로 된 짤막한 이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이 유다서에는 적어도 16차례 이상의 격렬하고도 준엄한 말로 배교의 추악한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치 못한"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꾼 자들입니다(4).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훼방합니다(4:15). 그들은 육체를 더럽힙니다(8). 그들은 인간적인 권위와 신적권위를 둘 다 거부합니다(8). 그들은 천사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여깁니다(8).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비웃고 조롱합니다(10).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행동 합니다(10). 그들은 원망하여 불만을 토합니다(16).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대로 행합니다(16). 그들은 오만합니다(16). 그들은 이득을 얻기 위하여 아름다운 말들로서 사람들에게 아부합니다(16). 그들은 당을 짓는 자들입니다(19).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19).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19).
유다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배교를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에 대해 말합니다(20-23).
1)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일입니다(20)
2) 성령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20).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입니다(21).
4)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21).
5)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22:23).
"또 어떤 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도주일을 앞두고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불의 용도는 다양 합니다.
난방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요18:18). 요리를 위하여서도 쓰여 졌습니다(출16:23,요21:9). 정련을 위하여서도 필요했습니다(시12:6,단3:6) 삼손은 방화하는데 썼습니다(삿15:4,5,삼하14:30,왕f6:28). 화형시키는 데도 쓰였고(렘29:22,겔23:25,47), 제사 드리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창8:20,21).
사람들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화합하여 빛과 열을 내면서 타는 현상을 불이라 합니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불은 전기 불처럼 화학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열과 빛만을 내는 현상이나, 혹은 인광 형광과 같이 전혀 열을 내지 않고 빛만을 내는 현상도 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불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더러는 번개 불에 의해 생겼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성(流星)에 의하여, 또는 화산의 용암에 의하여, 나무나 돌들이 서로 충돌함으로, 그 밖의 다른 자연적인 현상에 의하여 생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 합니다. 하여튼 이와 같은 불은 인류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은 그 맹렬한 파괴력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은 좋은 종이지만, 그러나 나쁜 주인이다"고 말한 영국 사람들의 격언은 의미가 깊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고계십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하라" 우리 모두는 엄숙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죄의 무서운 성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죄의 무서운 성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 가운데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여기 불로 비유된 말은 곧 죄를 의미합니다.
죄는 불처럼 무섭다는 말입니다. 불은 뜨거운 것이 그 특징입니다. 잘못하면 화상을 입습니다. 화상은 즘처럼 잘 낫지 않습니다. 낫는다 할지라도 그 상처는 무섭습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죄의 자국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은 자국은 성형수술이라도 하여 감출 수 있지만 죄의 자국은 감출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혼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 뜨거움을 수 없이 맛보게 됩니다. 경찰만 보아도 놀랍니다. 죄인의 맛보는 불안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불은 잘 퍼집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합니다(약3:5). 성냥개비 하나가 온 세계를 태울 수 있습니다. 한 점포에서 불이나면 삽시간에 전후좌우로 옮겨갑니다. 소망서의 관심은 불을 발리 끄는 데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느냐 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은 잘 번집니다. 담배 개피 하나의 불이 큰 산을 태워버리고 맙니다. 가공한 것이 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는 가정을 파괴합니다. 국가를 파괴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은 다름 아닌 죄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한 가정이 순식간에 망한 것도 죄 때문입니다.
5.16때 박정희씨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12.12사태 때 군인들이 개입하지만 않았다면, 이 나라에는 지금 민주주의 꽃이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그 한 많은 광주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군인들이 27년간 집권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무서운 지역감정도 없을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2) 오늘 우리 설교제목은 죄인의 큰 위험을 말해줍니다.
(2) 오늘 우리 설교제목은 죄인의 큰 위험을 말해줍니다.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곧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큰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같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물에 빠져죽은 사람의 모습은 깨끗합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조금 더 비참합니다. 5:18때 죽은 어떤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 합니다. 큰소리치던 한 인간이 시커먼 숯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비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와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조만간 다 그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위험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일깨워 우리는 그들을 건져내야한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없이 죽어가는 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지금 큰 위험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물에 빠져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불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3)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구원의 역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3)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구원의 역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를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하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불을 끄는 일입니다.
둘째는,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을 안전지대로 끌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의 불을 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불 가운데서 끌어내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 가운데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부름 받은 구조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위한 하나님의 소방대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망각하고 있을 때, 교회는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실리 경은 말했습니다. "잃은 자를 회복함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우리 교회는 이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전도주일을 지킵니다. 작년에는 11월 9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맺은 열매는 적지 않습니다. 전도주일에 시상하기 위하여 조사하다 보니 지난 한 해동안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자가 두 명이요, 두서너 번 한자가 10명이요, 너댓 번 한 자가 열두 명 모두 25명을 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의 믿음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끌어낸다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믿어 구원받고자 하면 비웃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거절합니다. 다른 종교가 있다고 핑계합니다. 찾아가면 도망칩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지옥 불에서 그들을 끌어내기를 원했던 많은 성도들의 수고로 안전지대인 교회로 나와 구원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일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평생 계속할 일입니다.
바라기는 이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를 끌어내라". 아멘.
(87:11:22)
28.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28.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유다1:17-23)
유다서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한 분인 유다가 기록했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와 친숙한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서로 생각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유다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후서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함께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시대의 시작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 교회시대의 종말은 유다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하고, 유다서를 배교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서가 교회 안에 임한 배교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서가 비록 25절로 된 간단한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러 유다서를 신약의 사사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유다서를 읽어보면, 어떤 배교의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은 가만히 몰래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은 없을까?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되 교회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교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함께 있으되 성도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으되 우리에게 속한 자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침입자들은 교회 안에서 거짓된 이단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악의 누룩은 성도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유다서를 쓴 목적은 바로 이런 사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3-4).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 그들은 경건치 못한 사람들입니다(4).
2.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입니다(4).
3.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자들입니다(4,15)
4. 그들은 무법한 자들입니다(8).
5. 그들은 비평적인 자들입니다(15).
6. 그들은 작당했습니다(19)
7.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은 없는 자들입니다(19).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배교자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유다는 이와 같은 배교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20).
둘째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0).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21)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21).
다섯째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3).
오늘 우리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급하면 "불이야! "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은 "강도야!"라고 소리치면 모두가 숨어버리지만, "불이야!"라고 소리치면 모두가 모여듭니다.
그리고 불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재난입니다. 화채는 시간을 다툽니다.
1903년 12월 30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이로쿠오이스 극장에서 화채가 났습니다. 순식간에 불은 번져 극장 안에 있던 600여명이 떼죽음을 당한 화재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입니까?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전파의 당위성과 화급성을 동시에 표현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것은 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잠언 6:27-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정욕뿐 아니라 모든 죄는 불처럼 인생을 사르고 맙니다.
불은 그 무게를 달수도 없고, 그 길이를 잴 수도 없고, 그 양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죄가 작용하는 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능력과 그 결과는 불처럼 엄청나고 무섭습니다. 불과 마찬가지로 죄의 성질도 강력 합니다. 불도 죄처럼 닥치는 대로 손상시키고 파괴시킵니다.
죄는 사람이 끌 수 없는 불입니다. 가만히 두면 다 탈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그 죄의 불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불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2)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창19:24,25)
하나님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불로 심판하였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레10:1-2).
나답과 아비후가 심판 받은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제사했기 때문이요(레9:24). 둘째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이며(레16:12). 셋째는 거룩한 봉사를 경솔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 고라의 무리 250명을 불로 심판했습니다(민16:35). 이렇게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심판 앞에 놓여 있는 자들을 구원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3) 불은 영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3) 불은 영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여기 영원한 불은 곧 지옥을 의미합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라"고 했습니다(마3:10).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도 말씀했는데, 여기 꺼지지 않는 불은 곧 지옥을 말합니다(마3:12).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를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
성경 다른 곳에는 지옥에 대하여 불 못이라 했습니다(계20:15). 지옥은 뜨거운 곳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1) 지옥은 마귀가 가는 곳입니다(계19:20,20:10)
2) 타락한 천사도 지옥에 갑니다(벧후2:4,유1:6).
3) 악인도 지옥에 갑니다(시9:17).
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도 다 지옥에 갑니다(계10:15).
5) 지옥은 믿지 않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계21:8,요3:16).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것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믿지 않고 지옥 가서 이 불 속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정한 이웃을 저 무서운 불속에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예수의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일입니다.
죤 실리 경은 "잃은 자를 회복함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교회 자체만을 붙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교회는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 도중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아세아에는 세계인구의 50%이상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 2%만이 예수를 믿고 98%가 불신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세군의 창설자인 월리엄 부드(William Booth)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충실한 교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무척 활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주일날 결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병자를 심방했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모범적인 교인이었고 나무랄 데 없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교회일만 했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틀에 박힌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대단히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했습니다. 약을 사왔습니다 의사를 불렸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천국에 와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음악, 향기, 기쁨, 강물, 물소리, 무성한 나뭇잎, 천사들, 정말로 행복하고 축복스런 세계였습니다.
그는 이런 아름다운 세계에 있었는데도 적막과 비애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왔다 갔다 하는 천사는 많았으나 그에게 찾아와 말을 거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왔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홀몸이었습니다. 그는 천국백성과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한 평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데만 바빴습니다. 지옥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데는 도무지 무관심이었습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땅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만일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 귀한 천국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구원받은 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천국에 온 것은 다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땅위에서 충성되게 사는 성도들의 소식이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소중한 한 영혼에 대해서 듣고 싶어 왔습니다. 그는 당신 집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독자 아들입니다. 어릴 때 나쁜 버릇이 들어 불손해졌습니다. 나는 그 아이의 이야기가 듣고 싶소. 나는 불의의 사고로 그 아들을 건지지 못하고 먼저 여기 왔습니다.
그 애는 당신과 종종 만났는데, 그 애는 지금 구원받았습니까? "
부드는 그이의 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바빠서 그와 함께 영혼 문제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야기 할 것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내방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도 구원받고 천국에 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 예수 믿었습니다. 믿은 후 충성했고, 자녀들을 다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 중에 하나를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딸은 아름답게 자랐고 온 동네의 귀염둥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길을 잘못 들어 비참해지고 만 것입니다. 부드는 땅에 사는 동안 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곧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딸은 당신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딸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딸에게 몇 번이나 복음을 전했습니까? 누군가가 열심히 권면하기만 했으면 돌아올 아이입니다. 네 딸은 어찌되었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부드는 너무나 괴로와서 얼굴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천국입니까? 언제까지 이런 괴로운 질문이 계속될 것입니까? 전도 안한 것 때문에 이처럼 괴로워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더 살 수는 없습니까? 나는 괴로워서 죽고 싶습니다. "
그때 세 번째 내방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본래 가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여기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려든 참에 바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그마한 개척교회에 다니다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소식이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부스의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너무나 어려워 교회 식구들이 너무나 고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개척교회 위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영혼 구원을 위하여 왜 협조하지 많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부드는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정말 유구무언이었습니다.
부드는 지금 분명히 천국에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너무나 괴롭고 부끄럽고 괴로와 도망치고 싶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은 못했구나, 일중의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천지가 진동하며 청아한 음악소리와 함께 주 예수님이 그의 곁으로 오시고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 곁에는 사도들, 선지자들, 순교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런 주님 앞에 서 있으려하니, 도무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환란 중에 동참했고, 내게 존귀를 돌리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버린 자들 틈에서, 그대는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
그는 예수님의 눈길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청천벽력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두 번째 기회를 주리라! 내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 후에 다시 오라! 그때는 너도 승리자들 사이에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라! "
그가 깜작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부드 장군의 생애의 변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교인들과 모든 교회의 초대의 관심사는 영혼 구원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 일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과로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은 덩컨 베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숱한 심령이 길을 잃고 있는 한 나는 쉴 수 없습니다. 대신 나는 죽은 후에는 영원 속에서 휴식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게으르지 않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합시다.
(89:4:19)
29. 초대교회를 본받자
29. 초대교회를 본받자
(행2:43-47)
신약성경 중 많은 성경을 기록한 대 저자는 세 사람입니다. 열세 편의 서신을 기록한 바울과 복음서와 서신과 계시록 등 요한문학 다섯 권의 저자인 사도요한과,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입니다.
이들 중에서 성경기록의 분량으로 본다면 누가가 기록한 저술이 가장 깁니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는데, 그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의 자취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사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그 성격으로 볼때 물론 교회의 역사서에 해당됩니다. 동시에 그 내용은 성도들의 신앙체험이요 변증론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그리스도의 전기라 한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발전사입니다. 사도행전 1:8절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경로를 설명해 주는 교회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세상에 계셨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
예루살렘은 우리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대교와 회교 등 세계 삼대 종교의 성지입니다. 여기에 솔로몬 성전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약의 터전이 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끝까지 소망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대한 소망과 신앙적 환상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 나섰고, 예루살렘에까지 온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때문에 주님께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저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위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똘똘 뭉쳐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다면 교회는 설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미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보내실 것이었습니다(요7:39,14:16,15:26,16:7-11).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는 120명의 성도들이 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 성령강림은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성화가 켜지는 순간입니다
즉 최초의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는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자가 하루에 삼천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행2:41).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벽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여기에 나타난 교회생활의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물질적 교제입니다.
셋째는, 모두가 함께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전교인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데서 시작되었고 또 부흥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이 뜨거운 기도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부흥이 없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기도하지 않는 목사, 기도하지 않는 장로, 기도하지 않는 집사·권사들이 져야할 것입니다.
수요일 기도회에서는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중직자들이 많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면 되는 금요기도회는 아예 외면합니다. 내일 새벽부터 모이게 될 특별새벽기도회는 얼마나 모일까요.
여러분 이 정도했으면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급증하는 개종자들로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1) 초대교회는 경건한 교회였습니다.
(1) 초대교회는 경건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공경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도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그 임재는 사도들이 행사한 기사와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영적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초대교회는 서로 도우면서 더불어 산 교회였습니다.
(2) 초대교회는 서로 도우면서 더불어 산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44,45)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첫째, 이는 신앙의 열정에서 나온 것이고, 공산주의는 정치적인 이념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둘째, 이는 내적이며 자발적이나 저는 외적이며 강제적입니다.
셋째,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순교했으나 저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양자 다 같이 붉은 피로 상징됩니다. 전자는 대속의 보혈이요, 후자는 혁명의 붉은 피입니다. 또 다 같이 궁극적 복락을 주장합니다. 전자는 천년왕국이요, 후자는 공산왕국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과 양태는 정반대요, 대조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지만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순수한 신앙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고도의 이상이요 친국생활의 한 그림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는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서로 유무상통하면서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더불어 사늘 믿음이 있었고, 상호간에 타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이웃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데 혼자서만 남아 넘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사람은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만 편안히 쉬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성도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만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함께 져야할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교회입니다.
(3)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교회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교회의 생명은 모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개인이아니라 단체요, 단수가 아니라 복수요,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나의 빛은 많은 곳을 밝게 비출 수 없습니다. 여러 개의 빛이 함께 비출 때 그곳은 밝은 것입니다.
우리교회 낮 예배에 참석한 교인이 오늘밤에 다 나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질 것입니다.
숯불은 모을수록 더 뜨겁게 더 활활 탑니다. 그러나 한 덩이 한 덩이를 여기저기 흩어놓아 보세요. 오래지 않아서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좀 모입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모입시다.
밤 예배 때, 수요기도회 때, 금요기도회 때, 새벽기도회 때, 중직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힘이 쪽 빠지고 맙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예수님을 위하여 사업 좀 덜 합시다.
예수님의 위하여 돈 좀 덜 법시다.
다른 교인들을 위하여 예배시간에 기도회에 빠지지 맙시다.
(4)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4)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필 때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주께로 돌아오는 회심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더라"(행1:15).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2:41).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7).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도에 복종하니라"(6:7).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1:20)
진실로 초대교회의 성장은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첫째,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1:5,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둘째, 모두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4:29-31).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기도했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셋째, 그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2:46).
넷째, 그들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2:42).
다섯째,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외에도 많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가 아니라 그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모든 교회 모든 성도가 모든 시대에 걸쳐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관한 의문부호여서는 안 되고 마땅히 감탄부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냥갑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냥은 한 개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촛불도 켜야 하고, 난로도 피워야하고, 물도 끓여 커피도 타서 먹어야 하고, 물도 데워 목욕도 해야 하고, 또 출불 밑에서 책도 읽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기 원한다면 맨 먼저 어디에 불을 붙여야 할까요?
물론 제일 먼저 초에 불을 붙인 뒤, 그것가지고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다음 물도 끓이고 어쩌고 하면 IQ가 별로인 사람입니다.
제일 먼저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은 성냥개비 그 자체입니다.
세상 일이 다 이러합니다. 자신이 불타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께 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뜨거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뜨겁게 할 수 없습니다. 성냥개비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 목욕물을 끓이려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먼저 내 자신이 뜨거워지기 위하여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먼저 내 자신이 권능을 받기 위하여 주님께 매달립시다.
전도 대상자를 작정하기 위하여 먼저 기도하고, 작정한 후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어떤 성도가 낚시질을 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배웠답니다.
첫째, 고기는 절대로 스스로 바구니에 뛰어들지 않는다.
둘째, 낚시질을 하려면 고기가 있는 곳에로 찾아가야 한다.
셋째, 고기는 미끼를 찾아온다.
넷째, 고기를 낚기에는 적당한 때와 시기가 있다.
다섯째, 어떤 장소에는 고기가 많이 있다.
여섯째,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고기를 낚기에 적당한 때와 시기가 이번 전도주일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찾아갑시다. 좋은 곳만 찾아가면 많이 잡을 수도 있고 월척을 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잡은 고기는 반드시 바구니인 교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증거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30.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30.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2-14)
사도행전은 그 성격으로 볼 때 역사의 책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초대교인들의 체험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시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변증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여기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둘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셋째,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12).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돌아와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13).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다락방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말합니다. 다락방 앞에 관사가 있는 것을 보면 잘 알려진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이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고(눅22:12), 부활하신 후에도 두 번이나 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요20:19-20,26-28). 이런 기록 외에도 예수님은 이곳에 자주 오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 마가의 다락방은 초대교회의 요람이자 산실이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터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뿐 아니라 우리교회의 시작도 개인 가정집에서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였고(16:40),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의 집이었습니다(고전16:19).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골4:15). 이들의 집이 교회의 시작으로 제공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그곳에 모인 무리는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15).
그들은 거기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합심기도를 응답하사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모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그 기도를 본받고자 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이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받기로 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기도하여 은혜를 받았습니까?
(1) 그들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1) 그들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기도했다고 말합니다(13,14).
이 명단에 보면 가룟 유다를 뺀 열한 사도 모두가 다 참여했습니다. 사도들 중에 빠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기도한 자의 수가 120명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15)
그런데 거기 명단에 이름이 나타난 자는 열한 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직분과 위치 때문입니다. 성경은 중직자들을 평신도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심적인 인물들인 사도들과 마리아가 참석했다는 것을 기명함으로 밝혔습니다.
100여명이 넘는 평신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면서도 최소한 열한 사도들의 이름을 일일히 기록한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직자의 책임과 위치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허전합니다.
기도회 시간에 장로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사람들이 적게 모인 때 일수록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의 빈자리가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락방 기도회 때 열한 사도는 "다 거기 있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기도했다고 증거 합니다.
여기 "더불어"라는 말은 "함께" "같이"라는 뜻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온 교회 성도가 다 함께 모였습니다. 당시 신자 전부가 모인 것입니다. 아마 120명은 빠진 사람 없이 다 모인 수인 듯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이처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기도한다면 분명코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더불어 기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는 곳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보는 것이 한 사람이 보는 것보다 확실히 낫습니다. 여러 손이 모이면 일이 쉬워집니다.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거기에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사도들 외에도 "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예수의 아우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믿지 않았던 자들입니다(요7:5).
성도 여러분, 이들은 따로따로 모이지 않고 다 함께 모였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회에 빠진 자는 아무도 없었던 듯 합니다. 얼마나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여기 한 사람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다입니다. 그는 다락방 만찬 때 참석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분명한 것은 참석한 사도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바라기는 전도자의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 참석자 명단에 여러분의 귀한 이름이 유다처럼 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더불어" 기도하기 위해 모인 성도의 명단에는 반드시 여러분의 귀한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2)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2)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같은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일심동체를 의미합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마음을 모아"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런 합심기도는 교회를 힘 있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120명이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안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같이하여 한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 제자의 수가 120명이라는 것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한 집안 식구들끼리도 마음을 모으지 못한 예가 허다합니다. 어떤 경우는 각개약진입니다. 그야말로 동서남북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그들 모두는 다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들 모두는 다 주님을 위하여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만, 열 한 사도들만 해도 그들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여 조화불가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이란 극우파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서라면 살인, 방화, 암살 등등 무슨 짓도 서슴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누구입니까? 그는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압재비요 사회의 지탄을 받는 배교자요 매국노입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여 로마제국에 바치면서 치부하는 탐관오리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것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정력가요 활동가요 성격이 급하고 불같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신앙고백으로 하늘까지 오르는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지옥에까지 떨어지는 책망도 받았으며,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으나 계집종 앞에서마저 예수 모른다고 부인한 배반자입니다.
그런가하면 요한은 명상가요 사색의 사람이요 기도의 용장입니다. 너무나 개성이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도 똑같이 제자가 되어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안드레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의심 잘하고 판판하고 차디찬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를 감추고 마음을 비워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같이한 것은 "내가"아니라 "예수"때문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들 모두는 다 자기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합심하는 곳에 배가 합니다. 서로 다투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성도 여러분, 120문도 중에 아무도 자기주장이나 고집을 부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같은 제목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따로따로입니다. 전도하자 해도 꿈적도 않습니다. 기도하자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일어나서 기도운동에 동참합시다. 전도운동에 협조합시다
(3) 그들은 모두가 "힘써" 기도했습니다.
(3) 그들은 모두가 "힘써"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여기 "전혀"라는 말은 "오로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끝까지 잘 참으면서 힘써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열한 사도가 거기 있었고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14).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서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다락방 기도회는 금방 끝난 짧은 기도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기도회는 모두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기도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입을 벌려 하나님께 아뢰는 분명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 기도회는 정적이 흐르는 듯한 조용한 분위기는 아닌 듯 합니다. 힘써 기도했다는 말을 보면 머리를 쳐 박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줄고 있었던 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도 이런 기도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교역자와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평신도들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중직자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진 사람 없는 기도회 말입니다.
복음전도와 교회부흥을 위하여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회 말입니다. 모두가 깨어 전혀 기도에 힘쓰는 기도회 말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중직자나 평신도나, 먼데 산이나 가까운데 산이나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열심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머리만 쳐 박고 졸고 있는 형식적인 기도는 집어치웠으면 합니다. 짧지만 뜨거운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제목이 분명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값비싼 고급 옷이 아니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운 믿음의 옷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세상 재산의 공개가 아니라 영적재산의 공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제상에서는 엄청난 부자들인데도 하나님 앞에는 인색했던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음 있는 척 했어도 영적인 가난뱅이들이 수 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상재산은 별것 없어도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적재산을 정직하게 공개한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가난행이들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한평생 전도 한 번 못해본 가난뱅이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한평생 새벽 기도회 한 번 못해본 이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한평생 수요예배, 구역예배 참석 못한 이도 있을런지?
아마 평생에 성경한 번 읽지도 못한 이들이 수두룩 할거요.
세상에서는 일등인데 신앙생활에는 엉망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이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로부터 새롭게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도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막1:35). 본받읍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진액을 짜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면 비천한 우리들이야말로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기도 않고도 잘 살수 있다는 우리의 건방지고 교만한 마음을 슬퍼하실 것입니다. 기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덤비는 것을 주님은 가소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바운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기도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꼭 있어야할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우리 교회에 필요한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 많이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발전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릎을 잘 꿇는 자만이 가장 잘 서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삼상12:23).
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은혜의 불을 끄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여 사자의 입을 봉했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원수마귀에게 삼키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함으로 감옥의 벽을 헐었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죄짓고 감옥에 갇히고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기도함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는데 오늘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교회를 냉냉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변명하지 맙시다. 회개합시다.
우리 다 같이 우리의 고운 옷을 벗어던지고 간구의 방석을 깝시다. 그리고 그곳이 천국의 이슬로 흠뻑 젖을 때까지 기도합시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태한 우리가 열심있는 성도로 변해야 합니다. 말 많은 성도가 잠잠하는 양으로 변해야 합니다.
전도 못하는 벙어리 신자가 담대한 신자로 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씁니다."
우리 모두가 이 축복을 받아 초대교회를 닮읍시다. 아멘. 머리에
복음 전파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요 유언이자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l:35). 이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 남은 일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막16:15).
구원받은 성도의 우선적인 과계는 복음 전파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의 최대 최상의 사명도 선교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성도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우리 교회들은 이일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 아니라 증거해야 할 복음에 대하여 슬프게도 외면하거나 함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졸고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울 수 있도록 소리 높여 영적각성을 촉구해야 합니다. 한 선지자가 깨면 온 백성을 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집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 내고 싶어 했던 무능한 목사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상권에는 교인들에게 "나가서 데려오라"고 외친 설교 30편을 모았고, 하권에는 이끌려 나온 불신 영혼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호소한 설교 28편을 모았습니다. 엉성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눈물로 쓰여진 글이요, 다듬어진 글은 아닐런지 몰라도 주님의 보좌를 붙잡고 증거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힘을 얻은 자가 부지기수이며, 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이 무수함을 주님은 아십니다. 똑같은 구원의 역사가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강단위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 작은 설교집은 광주은광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여러 직원들의 노고와 특별히 김수천 강도사님과 박은영 양의 헌신적인 수고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위에 하나님의 영은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1993.7.10.
무등산 밑에서 조재태
차 례
차 례
1.내 집을 채우라(전도 복음)
2.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전도 지상명령)
3.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수고 기쁨)
4.나가서 데려오라(전도 초청)
5.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부흥 성장)
6.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충성 전도주일)
7.내 증인이 되라(증인 권능 전도주일)
8.가서 고하라(전도 구원)
9.복음을 어떻게 전할까?(복음 전도)
10.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전도자 일꾼)
11.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전도 복음)
12.안디옥 교회(교회 이방전도)
13.눈을 들어 밭을 보라(전도자 일꾼)
14.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잃은 양 기쁨)
15:잃은 은전을 찾자(회개 죄인)
16.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사명자 복음전파)
17.파수꾼의 책임(파수꾼, 책임)
18.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전도 책임)
19.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양심 기쁜소식)
20.주는 자가 복이 있다(개척 유산)
21.우리 교회의 사명(사명 교회)
22.하나님의 전도 방법(전도 노력)
23.예수님의 제자들(제자 선교)
24.파수꾼으로 세웠노라(사명 파수꾼)
25.말씀에 붙잡힌 사람(사명자 용기)
26.매임 받은 사람들(인도 충성)
27.불 가운데서 끌어내라(구원 위험)
28.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배교자 구원)
29.초대교회를 본받자(교회 부흥)
30.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기도 명령)
1. 내 집을 채우라
1.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어떤 사람이 큰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청했습니다(16).
마태복음에 보면 이 잔치는 "혼인 잔치"이고 초청자도 임금입니다(22:2). 그러나 이 두 잔치가 다 천국 잔치를 가리키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큰잔치 또는 혼인 잔치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9:15,요3:29,계19:7-9).
본문 말씀 마지막 절에도 예수님은 이 "큰잔치"를 "내 잔치"로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24). 사랑의 하나님은 굶주린 영혼들을 위하여 천국의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18).
"하나는 가로되 나는 맡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8).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20)
이 잔치는 이미 선약이 된 잔치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큰 잔치에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천국의 복락에 동참시키기 위하여 기꺼이 큰 잔치를 마련하시고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일치했습니다. "가지 못하겠노라"
첫째 사람은 변명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변명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이같이 완악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쩌면 그렇게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이 흡사한지 놀랄만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현대인은 영약식으로 살이 포동포동 쪄 있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에 참석합니다. 너무나 잘 먹어서 비만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둔한 그들의 육체에 비하여 그들의 영혼은 메말라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은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106:15),
그들의 영혼이 메마른 이유를 아모스선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마4:4).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한 근성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한 근성 때문입니다.
둘째는, 다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선악과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기를 "하와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소를 사서 시험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또 장가를 들어서 못 간다고 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천국 잔치의 초청에 대한 변명은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피곤하여 쉬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몸이 아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선약이 있다 합니다. 어떤 이는 다른 모임에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너무나 바빠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에 불과 합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사입니다. 아담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였습니다. 데마의 관심은 바울과 함께하는 고난이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관심은 삼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이 아니라 은 30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관심은 성령 충만한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명예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실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이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 일입니까?
자나 깨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명심합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 성도들은 모든 변명을 극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노아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그렇고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이었습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들을 본받아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둡시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시다. 이 같은 뜨거움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성령께 의지합시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큰잔치를 마련해 놓고 그의 종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어 이렇게 청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
그러나 모두가 다 사양하면서 거절했습니다(18-20).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저런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
성도 여러분, 마음먹고 준비한 잔치에 손님들이 안 와 보세요.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또 꼭 와야 할 사람의 얼굴이 안보이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초청을 받았거든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만일 참석하지 않으려거든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집 경사가 있을 때 초청장을 안 보내야 합니다. 보내 보았자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량 많은 자선가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불참한다는 종들의 보고를 들은 하나님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아랍 사회에서는 이런 무례한 거절은 도전으로 간주했다 합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할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여기 "거리"는 사통팔달한 넓은 길을 의미하고, "골목"은 좁은 길을 말합니다. 전자는 부자들이 사는 곳이고, 후자는 서민층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를 말합니다. 복음은 빈부 귀천의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아무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주석가 벵겔은 이 부분에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 합니다.
"가난한 자는 연석에 초대되지 않은 자요, 병신은 결혼할 수 없는 자요, 소경은 밭을 보러 갈 수 없는 자요, 그리고 저는 자는 밭갈이를 못하는 자다. "
하나님은 몹시 화가 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종들의 보고는 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2).
여기 "오히려 자리가 있다"는 말은 아직도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빈자리가 많은 잔치는 잔치의 기쁨을 반감하고 맙니다. 텅 빈 예식장은 신혼의 기쁨을 앗아가고 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가 마련하신 천국 잔치가 가득 차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라는 것이 종들의 보고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헤아려봅시다.
첫째, 이 빈자리가 영원히 비어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첫째, 이 빈자리가 영원히 비어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들을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영원히 영원히 빈자리 그대로 비어 있다 할지라도 얼마 동안이나 비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식구들이나 이웃들 중에 어느 누구 하나라도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성도 여러분 서두릅시다. 열린 문은 닫힐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방심할 때가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둘째, 이 빈자리에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둘째, 이 빈자리에 대한 책임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배설하신 잔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슬픈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집안 교회가 비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예배당이 커서 빈자리가 있다고 핑게 대지 맙시다. 그 빈자리는 내가 지켜야 할 자리인데 지키지 못해서 생긴 자리입니다. 친구 집에는 날마다 찾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못 찾는 이가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직장에는 10년 개근, 20년 개근 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에는 1년 정근도 못하는 교인들이 있다면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밤 수요일밤 예배 시에는 왜 그렇게도 빈자리가 많습니까? 멀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합시다.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켜 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리는 내가 지켜야 합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비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초청장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한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빈자리가 구원받은 영혼들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전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연휴가 되면 유원지는 붐벼도 하나님의 교회는 빈자리가 더 많아집니다. 바캉스 철이 되면 명산대천은 발 디딜 틈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집은 텅텅 빈다고 합니다. 슬픈 현상입니다.
가출한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주일날 아버지의 집을 등진 교인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는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하다니 너무나 슬픈 현실입니다.
이런 불효자식들 때문에 하나님의 전은 빈자리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빈자리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합니다. 비어 있는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그 자리가 결석한 성도의 자리거나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생긴 자리거나 간에 말입니다. 아직도 빈자리가 있다는 종의 보고가 22절에 있습니다.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23절에 나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명심합시다.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자리를 채우라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비어 있는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집인 성전이 알곡들로 가득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집인 성전이 구원받은 성도들로 북적대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은 두 가지로만 가능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온 교회 성도들이다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전원 출석해야 합니다. 결석자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온 교회가 나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될 때 하나님의 전은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전에는 빈자리가 메꾸어질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겸손히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오늘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까지 제시해 주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여기 보면 하나님의 전을 채우기 위한 세 가지 과정이 제시됩니다.
첫째는, "길과 산울가로 나가라"고 합니다.
여기의 강조점은 나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길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이웃집으로 가야 합니다. 친구 집으로 친척 집으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방안퉁소가 아니라 길로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벼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나간 자에게 사람을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강권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사람을 강권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강한 의지와 설득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가 아니라 그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가 믿던지 안 믿던지 그것은 우리가 알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본 것과 받은 것과 믿는 것을 가지고 강권하는 종이 되는 것이 그 전부입니다. 법정에 선 증인은 증거를 제시해야 되지만 크리스천 증인은 내 자신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증인의 자세로 세상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증인의 자세로 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강권하는 증인이 됩시다.
셋째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셋째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여기 중요한 과정이 나옵니다. 그것은 데려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읍시다"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데나 가까운 교회로 나가십시오"가 아닙니다. 전도지 한 장 나누어 주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나가서 강권하여 내 집까지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성도 여러분, 분명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비어 있는 하나님의 전을 채우기 위하여 일어서십시다. 졸고 있는 자도 일어섭시다. 앉은뱅이도 일어나야 합니다. 평생 방안통소도 일어나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나갑시다. 주님은 말이 없고, 입이 없고, 손이 없는 자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이 있으니 일어나라 했고, 입이 있으니 강권하라 했고, 손이 있으니 데려오라 한 것입니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잘리우게 되었는데, 그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서 두 손도 잘리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명은 구했으나, 팔도 다리도 없는 토막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드러누워 남의 도움 없이는 한 시간도 살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큰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는 중에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그날부터 그녀의 손을 자르고 갈라 조금 남은 팔뚝에 연필을 동여매고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드러누워 편지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먼저 자기와 안면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감사 편지를 썼고 안면은 있지만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전도 편지를 썼습니다.
기도와 눈물로 간절하게 쓴 편지여서 그의 전도 편지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다 감격해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나와서 함께 구원받았다는 실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성한 발이 있습니다. 두 손이 있습니다. 어디든지 갈 수도 있고 전할 수도 있고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문둥이들은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습니다(왕상7:9),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9:16).
기독교의 실제적인 문제는 무신론이나 회의론이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침묵만 하고 있는 비증언의 문제입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님의 명령에 아멘 해야 합니다.
2.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2.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고전9:16-23)
바울의 본명은 사울입니다. 그는 다소성 출신의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석학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후 바리새인이요 율법주의의 열심당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충성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교회를 무섭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처형에 가담하였습니다(행7:27-58,8:1,22:20), 교회를 진멸하고 그리스도인을 옥에 가두었습니다(행8:3).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여 죽게 했습니다(행22:4). 그리스도인을 매질했습니다(행22:19). 그리스도인을 죽이기로 서원했습니다(행26:10). 교회를 말할 수 없이 핍박하고 잔해했습니다(갈1:13).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고 다 자기 자신의 입으로 증거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극적인 개종을 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당연히 인생관마저 변한 것입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는 자기가 예수의 사도가 된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노라"(갈1:1).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름 받은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전도여행으로 한 평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했던 오직 한 가지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전파에 대한 신앙은 오늘 본문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여기 분명한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죄 값을 치릅니다. 또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 죄 값을 받습니다. 즉, 전해야 할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해도 복을 받지 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혹시 전도하지 않은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여튼 성경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은 범죄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같다는 말입니다.
전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그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 그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런데 이 큰 사랑과 받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모든 형제에 대한 사랑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9). 또 한 생명이 곧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귀한 생명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인간이 죄악에 빠져서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 때 아랍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 공략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큰 기근으로 부모가 자녀를 잡아먹는 비참한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때에 사마리아 성 밖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도 굶어죽고 거기 앉아 있어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원수지만 아랍군대의 진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갔더니 거기에는 은금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컷 먹고 숨겼습니다. 얼마 후 제 정신이 들었을 때 성안에는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왕하 7:9). 문둥이들은 성안에 들어가서 고해야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양식으로 배불러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대의 은금보화 때문입니다.
셋째, 성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만일 그들이 잠잠하고 있다면 오래지 않아 위험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바울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
사람들이 과목을 심는 것은 열매를 따먹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7:19). 농사를 짓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축산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사 신자 되게 하신 것도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지 못함은 하나님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내게 미친다"는 바울의 말은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1917년 10월에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희랍정교회가 국교였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어찌하여 공산주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까? 희랍정교회는 귀족 사회에만 존재하였을 뿐 자기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복음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레닌이라는 혁명의 천재가 그 노동자 농민에게 가서 혁명의 바람을 불어넣었을 때, 제정 러시아의 희랍정교회는 무너지고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화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기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신자들이 화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란 곧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최대의 목적도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일입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친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낮에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병을 고쳤으며, 천국의 비밀을 가르쳤으며, 밤에는 감람산에 올라가 찬이슬 맞으며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열두 제자를 부르사 훈련시켰습니다.
또 70인 제자를 둘 씩 둘 씩 작을 지어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외치기를 친국이 가까웠다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6-8)
예수님은 세상 사역을 다 마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이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바울은 이러한 거역하지 못할 명령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때문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치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화가 미칠 것임이로다! "
이 말은 강력한 사명감을 표시 합니다. 절대 절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는 말입니다. 이 강력한 사명감이 전도에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업 때문에 고민 합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안절부절 합니다. 어떤 때는 두통약을 먹고 신경안정제를 먹습니다. 그러나 전도 때문에 스트레스에 싸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득불 해야 할 일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16).
여기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은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습니다(행 9:1-9). 그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였고 복음 전파의 명령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산 포로요 노예였습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바울의 자세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신혜숙이라는 간호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엄청난 타박상을 입은 여자 환자가 의식이 몽롱한 채 입원했습니다. 아마 어느 기도원에서 충격요법으로 매를 많이 맞았는지 전신에 명이 들고 터진 자국 투성이었습니다. 환자는 아무런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혜숙양은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최성림씨, 여기는 당신의 병을 고치는 병원입니다. 당신의 병이 낫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나을 것입니다. "라고 환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물론 환자는 그 말소리를 들을 턱이 없었지만 하루에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주일이 지나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몽롱한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입원한지 6주쯤이나 되었습니다. 하루는 출근하였더니 그가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습니다. 간호원은 너무나 기뻐서 환자의 손을 잡고 축하한다고 하자 환자는 "당신이 신혜숙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만나고 싶었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는데도 이름도 알고 있었고 정성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간호원은 환자에게 소리 내여 말한 것이 환자의 마음에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실화는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믿는 자가 말씀전하는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귀를 닫아버린 세상일지라도 최선을 다합시다. 언젠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닫혀진 귀가열릴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의 좌에 대해 에스겔선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의 좌에 대해 에스겔선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겔 3:17-18)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여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은 곧 우리를 이 민족에 대한 파수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든지 안 듣든지,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안 듣고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아 그들이 망한다면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까? 바울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만일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 한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로 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만큼 큰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달란트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한 달란트를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장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만 받고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화가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바라기는 아무도 이 무서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5)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있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맡은 직분을 이행하지 않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17). 그가 맡은 직분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복음전파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교회의 책임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누가 뭐라 해도 선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영혼 구원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 책임을 등한히 할 때, 교회가 이 사명을 이행치 않을 때, 그때는 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제정 러시아 때 신자의 수는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 사업은 하지 않았습니다. 못살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간절한 권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큰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받은 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분명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가 이 큰 책임을 외면한다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사는 길은 복음의 전파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는 길도 복음의 전파입니다. 우리나라가 사는 길도 그러하고, 인류가 다 함께 사는 길도 전도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 배가전도는 물론, 갑절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이리 선교교회 이정건 목사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45,000원의 소액환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이 헌금은 저희 교회 집사님 아이들이 졸업식 시즌에 학교 앞에서 꽃을 팔아서 남긴 수입금 전액을 저에게 기탁해 왔기에 이 돈을 다른데 쓰는 것보다 새로 시작한 신학교에 헌금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줄 알고 적은 액수이지만 보내 드립니다"라는 사연이 쓰여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로서 이런 정신이 있는 분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어려우면서 매달 선교비를 정성스럽게 작정하여 봉헌하는 종들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은 있습니다. 복음전파와 개척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종들이 있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은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말했습니다. "전도자를 길러내지 않는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그들을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교육이란 무엇 위해 있는가?
그들을 태워 운송하지 않는다면 상업이란 무엇 위해 있는가?
그들을 파송하지 않는다면 돈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전도의 목적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생 그 자체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
찰스 셀돈(Cha, les M. Sheld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교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선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달하기까지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음으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전도가 제자들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 하셨고, 그가 "가라"고 명하셨을 때 그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예수의 불복종의 종이 될 것이고, 만일 구원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내가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질 때까지는 내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항상 편협해지고 또 자기가 가진 세상의 이상을 상실하기 때문에, 선교사는 오늘날 세계의 현재 역사적 위기에 있어서 세계의 가장 위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
3. 씨를 뿌리려 나가는 자
3. 씨를 뿌리려 나가는 자
(시 126:1-5)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시편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스런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오늘 우리 본문 말씀 중에는 바벨론이란 잘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바벨론 포로가 가장 주목할 만한 포로였고, 또한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도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에스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 구원의 역사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해방된 그들은 꿈인가 생시인가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할 정도였습니다(1).
첫째, 그 구원이 너무나 크고 기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구원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인인 바사 왕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2) 이 일을 두고 열방 중에서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고 말했습니다(2).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신 것은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죄의 포로 중에서 구원하신 것도 큰일입니다. 우리를 회개하게 하신 것도 엄청난 일입니다. 죄 속에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사 하늘의 평화와 자유를 맛보며 살게 하신 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난 때 우리는 죄 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이 세상 풍속을 좇았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같은 대사를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요엘선지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땅이여 두려워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2:21)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의 전반부도 바로 이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포로 중에 남아있는 자들을 위하여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4).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격려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
성도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뿌듯한 격려입니까?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기 원하십니다.
(1)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남다른 고생과 슬픔이 따른다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합니다.
(1)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남다른 고생과 슬픔이 따른다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합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울어야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에게는 고생과 슬픔과 눈물과 괴로움이 많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삭을 거두는 일에 비하여 씨를 뿌리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파야하고, 돌과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수확하는 데는 불과 몇 시간만 소요가 되지만 파종에는 오랜 준비와 고되고 힘든 노동이 요구됩니다.
또 씨앗을 뿌리는 일은 이삭을 거두는 일에 비하여 외롭고 힘이 듭니다. 대개 수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밭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자는 외롭게 혼자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컨대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에게는 눈물겨운 고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다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8).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는 종종 눈물과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데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육신의 정욕과의 투쟁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2)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그 어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해 줍니다.
(2)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에게는 그 어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해 줍니다.
우리 함께 5절과 6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여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의 정황과 현실은 눈물과 불행입니다. 그는 씨를 뿌리면서 눈물 흘려야 하고 씨를 뿌리기 위하여 탄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눈물로 끝나지 아니하고, 수확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결코 울다가 지쳤다고 말하지 많습니다. 눈물로 탄식하다가 한평생을 마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괴롭고 답답한 인생 포기해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무 낙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은 눈물겨운 정황이지만, 그 어느 날엔가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처지는 울면서 씨를 뿌릴 수밖에 없지만, 어느 먼 훗날에는 기쁨의 단을 안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소망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수 없이 많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욱 있어야 할 것은 내일에 대한 꿈과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꿈이 없이는 못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 했습니다. 해석하면 희망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꿈이 없으면 못사는 것이 인생이란 의미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국과 영국군의 포로 20,000명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중 8,000명의 포로가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영양실조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질병으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과로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조사보고서는 그들의 사망원인은 절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제2차 대전 중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지하감방에서 무서운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안했습니다. 그들은 지하 감방의 벽에다 손톱으로 이 같은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비록 태양빛이 우리에게 비취지는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
유대인들은 캄캄한 지하 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금 역사상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언젠가 기쁨의 단을 거두리라는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데로 "인간은 희망에 기초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소유는 다 빼앗긴다 해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은 갖기 원한다. "
성도 여러분, 비록 고달픈 삶이 계속된다 해도 결코 이 소망을 잃지 않기 원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도 부요한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몸이 약하고 병들었어도 언젠가는 건강케 되리라는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지라도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신앙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나아가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언젠가 추수하는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3) 그러므로 나아가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언젠가 추수하는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5절과 6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읍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눈물의 파종과 수고 끝에는 반드시 축복의 보상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고난을 통과한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과정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눈물로 씨를 뿌린 후에는 반드시 기쁨의 추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눈앞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는 인간이 되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상의 축복과 그 약속을 믿는다면 현재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언제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축복의 때는 분명히 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하였습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둡니다. 죄를 심는 자는 죄를 거두고 축복을 심는 자는 축복을 거둡니다. 그런즉 축복의 씨앗은 많이 심어야 합니다.
미국 보스톤 시에 부자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바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스토로사라는 젊은 청년이 그 부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턴씨, 제가 위싱턴에 소매상 하나를 차리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2,000불만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 "담보물이 있는가? "고 거상 바델씨가 물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담보물로 제공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우리 회사 규정에 확실한 담보물 없이는 돈을 빌려줄 수는 없소. " 바턴씨의 말은 듣고 청년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거부 바턴씨는 그 청년에게 왠지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사업가인 흘 에이씨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토로사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는데 보기에 재능도 있어 보이고 인품도 좋고, 신념도 계획도 믿음직스런 사람이요, 돈을 담보 없이 빌려달라고 하는데, 빌려주어도 괜찮을까요? " 이 말을 들은 홀 에이씨는 "어리석은 일이요. 맨주먹의 젊은이에게 2,000불 씩이나 빌려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심중에 결심했습니다. "돈을 은행에 넣어 두는 것보다는 이 유망한 젊은이의 앞길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이 있을 것이다"라면서 무담보로 2,000불을 빌려주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재계에는 일대 공황이 왔습니다. 거상 바턴씨도, 홀 에이씨도 다 망했습니다. 그들은 재기불능의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토로사가 바턴씨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부채를 지고 있습니까?" "75,000달라요" "그러면 제가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 전에 선생님이 빌려준 돈으로 장사하여 큰돈을 벌었습니다. "
바턴씨는 놀라면서 "아니 그때 그 돈을 다 받았는데 또 뭘 준단 말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스토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빌렸던 돈은 다 갚았지만, 도와주신 은혜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당하고 있는 불행의 얼마라도 도울 수 있다는 그것은 나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액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바턴씨는 그 돈을 받아들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도 후일 불행을 딛고 일어나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왕관은 가시면류관이었습니다. 그가 승리를 거두신 십자가는 죄인을 처벌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는 무덤조차 남의 무덤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사 영광의 왕이 되셨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로마의 카타콤에 뿌린 성도들의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박해자 네로에 의해 뿌려진 성도들의 순교의 피는 후일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울며 뿌린 믿음의 씨앗들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날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오실 때 흰옷입고, 손에 종려가지 들고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설 자들은 누구입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들"이 아닙니까?
4. 나가서 데려오라
4. 나가서 데려오라
(눅 15:14-24)
거룩한 성일에 우리 은광식구들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환절기에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큰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도 이 큰 잔치가 나오는데 거기는 "혼인잔치"로 나옵니다(마22:2) 사람들은 이 큰 잔치에 대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천국잔치라 부릅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큰 잔치" 혹은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61:10,62:5,마9:15,요3:29,계19:7-9).
오늘 우리 본문말씀에는 이 큰 잔치를 베푼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물론 그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푼 큰 잔치,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국잔치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많고 많은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잔치입니다.
성도 여러분께서도 많은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잔치집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요사이는 세상이 많이 변해서 부담되는 잔치의 초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빈손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오늘 이 잔치는 전연 부담이 없는 잔치입니다.
마음 놓으시고 우리함께 이 잔치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1)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랑을 초청 했습니다.
(1)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랑을 초청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풍속에 의하면, 누군가가 잔치를 베풀고자 할 때, 그 일시를 미리 알리고 초청장을 사전에 발송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잔치 시간은 알리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 잔치날이 돌아와서 만반준비가 다 되면, 종들이 나가서 미리 초청된 손님들을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손님을 모십니다. 지금도 증동지방에서는 두 번째 종들이 전하는 초대의 말은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배설하신 큰 잔치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잔치이겠습니까? 거기에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미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구미에 맞는 최고급 요리가 준비되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침이 삼키울 정도의 맛있는 요리입니다.
아무런 부담이 없는 잔치입니다. 초대된 사람은 누구나 가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및진 천국잔치를 배설해 놓으시고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청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같은 잔치에 청함 받았다면 가시겠습니까? 거절하겠습니까? 물론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합시다. 우리는 천국잔치에 청함 받은 자들입니다. 천국의 축복과 기쁨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2)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2)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이러 합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18).
여기 사양하였다는 말은 거절했다는 것입니다(딤전4:7)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대표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그들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다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나는 밭을 믿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투기꾼이나 복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산 맡은 뒷날 가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소를 시험하는 것은 다른 날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셋째 번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잔치의 초청에 거절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아내와 함께 그 잔치에 참석했더라면, 정말 더 기쁜 잔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잔치집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면, 그 친절한 잔치집 주인은 "꼭 그녀와 함께 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 때문에 못 간다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중심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왜 핑게 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왜 천국잔치의 축복스런 초청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무지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잔치의 축복을 알았다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2) 우선순위의 착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문제에 대한 것만 생각했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가치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에만 주안점을 두었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3) 인간의 부패한 마음 때문입니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첫째 사람은 "불가불 나가 보아야겠다"면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은 변명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고, 세 번째 사람은 변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이렇게 완악합니다.
(4)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사양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가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잔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잔치 따위는 그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요2:15).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 세상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마취국"(Enchant land)이라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사람들을 유인하여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사랑하는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세상 사람들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눈을 감고, 세상 사람들의 죄 속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시1:1)
홍인종에게 전도했던 위대한 종 대비드 브레나드의 고백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된 세상아 잘 가거다. 나의 영혼은 너를 작별하노라.
구주 예수님은 날 가르치시기를 널 버리라 하신다.
네 매력은 정욕의 마음을 만족케 하나, 하나님의 영을
기쁘게 못하도다.
나를 미혹하기를 그쳐다. 내 영혼을 부르지 말아라.
이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결정
하였도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늘 영광을 보게 하시는 동안 네
아름다움은 스러지고, 내 마음에는 네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
성도 여러분, 천국의 아름다운 잔치에 초청을 받고서도 거절하는 저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그 초청을 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로 없는 죄인들에게까지 이 엄청난 사랑이 미치고 있다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이 축복을 거절한 저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하는 염려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면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할 일이 아닙니다
(3) 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초청자들에게 거절당하자 화가 났습니다. 주인은 증들에게 말했습니다.
(3) 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초청자들에게 거절당하자 화가 났습니다. 주인은 증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교훈은 "나가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되고 있음을 보아서입니다.
우리 함께 21절과 23절을 읽어 봅시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여기 보면, 두 절에 다 "나가서 데려오라"는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은 중요성과 강조성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큰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리고 초청자들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와주지 안했습니다.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종들에게 전해 듣고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말했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종각과 십자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종을 치면서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곳곳마다 전도자를 세워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천국잔치에 대한 초청장은 온 세계 방방곡곡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큰 잔치에 초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양했습니다. 이 핑게 저 구실을 대면서 잔치에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잔치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제 화가 나셨습니다.
그는 말씀 하셨습니다. "나가서 데려오다."
(1) 왜 나가야합니까? 나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친국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잔치에 참여할 자를 찾으러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눅19:10)
(2) 그러면 어디로 찾아 나아갈 것입니까?
21절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라고 말합니다. 시내의 거리는 넓은 길이요, 골목은 좁은 길을 말합니다. 또한 전자는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요, 후자는 빈민층의 거리입니다. 23절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외의 거리를 말합니다. 거리와 골목은 시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길과 산울은 시외에 있습니다. 상징적으로는 전자는 유대인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말하고, 후자는 이방인을 가르칩니다.
요컨대 전도자는 도시나 농촌,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나가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로는 빈부귀천, 남여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우리의 전도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불쌍하고 의지 없는 자들입니다. 멸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석가 벵겔은, 이들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밭을 샀다고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병신들은 장가 못 가는 자들이니 장가갔다고 사양치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소경들은 맡을 보러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들은 밭갈이 하러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돈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의 초청장은 아무에게나 보내지지만 응답자는 주로 이 천한 자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은 교만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여 감사 합니다.
순종하는 성도들이여 찬양합시다. 천국은 바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자, 이제 사람을 데려오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합시다.
어떻게 데려올 것입니까?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했습니다. 여기 강권한다는 말은 강제나 폭력으로가 아닙니다. 강한 설득과 눈물겨운 호소와 정성어린 기도를 의미합니다. 왜 강권하여 데려와야 합니까?
1:이 세상에는 끄는 대로 따라다니는 부평초 같은 인생이 많기 때문입니다.
2:주저하고 망서리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3:더러는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4:아직도 빈자리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아직 빈자리가 많이 있고 우리 교회도 빈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지금뜸 천국도 만원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공동묘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오히려 자리가 비어있나이다"라는 종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부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껏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잔치에 "나가서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가서 데려와야 합니다. 나가야 합니다.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데려와야 합니다.
뉴헤브라이드즈 군도의 어느 장로교회에는 이런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존게디 목사가 1846년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이 섬에 그리스도인들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1872년 존게디 목사가 이곳을 떠났을 때에는 이곳에는 이교도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 섬의 인구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하여간 그는 26년 동안 복음전한 일에 헌신한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될 수는 없겠습니까?
"내가 믿기 전에는 우리 집은 모두가 불신자였다. 내가 믿고부터서 우리 집에는 불신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까?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는 말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는 우리의 무능과 우리의 불충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살며 존경을 받았던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앉았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장례식 때 목사는 한 번도 빈 적이 없는 그의 자리가 비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리고는 저 하늘 위를 가르치면서 "그러나 지금 저기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천국가신 성도들의 빈자리도 채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껏 채우지 못한 빈자리도 나가서 데려다가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기 때문입니다.
빈자리를 채우는 일에 열심 있는 성도를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가서 데려옵시다.
(88.11. 6)
5. 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
5. 그 날에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37-42)
전도 주일을 보름 앞두고 온 교회가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여러분의 수고를 주님께서 받으시고 큰 축복 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는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이 교회의 성장은 세 방면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양적 성장입니다. 물론 교회 회중의 증가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말씀에 보면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하였고(2:41), 다른 곳에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하였으니(행4:4), 이는 숫자의 증가 곧 양적 성장을 말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둘째는, 질적 성장입니다. 이는 신앙의 내적 성장을 말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어른스럽게 자란 것을 말하고,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자란 것을 의미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곧 질적인 평가를 의미합니다.
셋째는, 문화적인 성장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마28:19-20). 모든 족속에게 가서 가르치고 제자 삼는 것은, 모든 문화 모든 계층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라는 성장, 곧 이상적인 성장은 이 세 방면의 조화된 성장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부흥은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보편화된 교회 성장의 개념은 주로 양적 성장만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의 첫인사는 의례 "당신 교회는 몇 명이나 모이느냐?"입니다. 그리고 "많이 모인다"고 자랑하면 "부흥했다"면서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적 성장 없는 교회의 부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양적 성장도 그 형태에 따라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이 양적 성장은 주로 세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방법입니다. 이는 출생으로 말미암은 교회성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생물학적 방법에 의한 성장은 현저히 둔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첫째 이유는 출산의 둔화입니다. 이는 산아제한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자녀를 바로 가르치지 못하여 그들을 교회 밖으로 빼앗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의 둘째 방법은, 이전(이동)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는 전입에 의한 성장입니다. 이는 교인의 이동에 불과 합니다. 특히 도시 교회나 개발지역에서 많이 보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성장의 셋째 방법은, 회심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는 개종에 의한 방법을 말합니다. 불신자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출산과 이동과 개종이외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세 방법 중에서도 출산은 소망스런 방법이기는 하나, 장기간을 요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 다음, 이동에 의한 교회 성장은 가장 쉬운 방법이기는 하나, 그런 경우가 흔하지 많습니다. 더러는 또 이사가 기도합니다.
개종에 의한 교회성장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또한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방법이요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전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교회가 힘써야 할 일입니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고 있고 예수님이 취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주일을 정하여 이 일에 힘쓰는 것도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교회성장과 그 모범을 배우기로 합시다.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행적에 관한 책입니다.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행적에 관한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쓰여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핵심적인 구절은 1:8절입니다. 그리고 핵심적인 단어는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에 증인이라는 말은 39회에 불과하지만 소수의 증인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증인이란 본래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증거하는 선지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복음을 증거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석가 벵겔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증인에 의해 확장된다"고 말했습니다.
주께 구속함을 받은 예수의 증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이런 충성스런 증인들로 말미암아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면서 유대인 사회에 전파되었습니다(2:5-11). 그리고 헬라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6:8-7:60) 두터운 사회적인 장벽을 뛰어넘어 사마리아로 넘어갔습니다(8:4-5). 그리고는 에디오피아로 건너갔습니다(8:36-38). 종족을 초월하여 흑인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그 후에는 로마인인 고넬료에게까지 전파되었고(10:1-11:18), 이방 사회를 거쳐(11:19 -20)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28:30-31).
복음은 또한 충성스런 증인들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복음의 센타였습니다. 복음은 거기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뻗어 나갔고,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거기서 예배소로, 거기서 다시 로마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다시 로마에서 영국으로 전파되어 갔고, 그 복음은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의 충성스런 선교사들은 한국에까지 그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복음의 센타가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복음이 한국교회에 의해 중국에 전파되고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면, 이때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영적인 상태를 보면, 유럽의 교회는 깊은 잠에 빠져있고, 미국의 교회는 졸고 있고, 한국교회는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의 아침 7시는, 미국 뉴욕은 피곤해 지쳐서 졸음이 오는 오후 5시이고, 파리는 밤 10시, 런던은 밤 11시로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국교회의 세계적인 선교의 사명을 말해 줍니다.
이제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거기 보면 열심 있는 증인들에 의해 구원받은 수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수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1:15). 며칠 후 그 수는 3,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2:41). 구원받은 수는 날마다 증가했으며(2:47), 비록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었음에도 또 불구하고,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남자만 5,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4:4). 뿐만 아니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하였고(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6:1,7).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설립되어 견고하여 졌고(9:31), 유대인 중에 만도 믿는 자가 수만이나 되었습니다(21:20).
초대 교회는 이렇게 급성장하여 갔습니다.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새 신자들로 가득가득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무리는 벌떼처럼 구름떼처럼 일어났습니다.
(2) 초대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초대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대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성장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 합니다.
(1) 성령의 역사입니다.
(2) 교회의 열열하고도 담대했던 전도활동입니다.
(3) 또한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인 여건입니다. 당시는 문화의 장벽이 심각하지 않았으며, 지금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장벽이 높지 않았으며, 지중해 세계에 통용되는 공통어가 형성되어 있어서 언어의 장벽이 없었습니다. 또한 로마로 말미암은 정치적인 통일로 교회성장의 큰 장애가 없었습니다.
(4) 성령 받은 성도들은 열심히 모였고, 기도에 힘썼습니다(2:42,46).
(5) 한 가지만 더 추가 한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1).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 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교회는 성장할 수 없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교회의 열열한 전도 없이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렇게도 급성장 했던 이유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전도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다 평신도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성령 받고, 모두가 다 길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를 쏘아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강점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열하고도 간절한 전도에 이교도들이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끌려나오자마자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루 몇 천 명씩 구원받는 수가 더해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의 그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들을 본받으면 됩니다. 그들처럼 모여 기도하고, 그들처럼 나가서 담대하게 전도하면 그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처럼 살려고는 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축복을 바라고만 있다는데 문제는 있습니다.
나무를 심으려는 수고는 하지 않으면서, 열매를 따를 즐거움만 누리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둡니다. 기도하는 자는 응답 받고, 전도하는 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데 오늘의 비극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정신만 차린다면 우리 교회의 부흥은 물론 우리 조국의 복음화는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한국에는 천만 신자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만일 이들이 한 해에 한 사람씩만 주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한다면, 1년이면 2,000만이 되고, 2년이면 4,000만이 되어 조국의 복음화는 2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한국에 1사람의 교인만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한사람이 1년에 한 사람씩 믿게 하고, 믿은 그 사람이 1년에 또 한사람씩 구원받게 한다면, 전국의 복음화는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한 번 계산해 봅시다. 1년이면 두 사람입니다. 2년이면 네 사람입니다. 3년이면 8인입니다. 4년이면 16인입니다. 5년이면 16인입니다. 6년이면 64인입니다. 7년이면 128인입니다. 10년이면 4,096인이 됩니다. 20년이면 1,048,576인에 이릅니다. 그러나 26년이면 67,108,864명이나 됩니다.
다시 말하면, 26년 만에 남북한을 다 복음화 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사실 한 해에 한 사람씩 예수 믿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또 전연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 사람이 한사람 인도하면 일천 교인 이천 된다"는 표어를 언제까지 내걸어야합니까? 왜 이 일을 성취 못합니까? 그 이유는 "당회장목사가 무능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사실 저는 무능합니다. 그 다음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목사가 무능해서입니까? 그 다음은 전도사가 무능해서입니까? 그 다음은 또 누가 무능해서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정직합시다. 그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1천 교인 모두가 한 사람씩만 구원받게 했다면 우리교회는 벌써 2천 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금년에도 배장 좋게 그대로 지내시렵니까? 오늘부터 전도주일 준비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배장 좋게 그대로 주무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렘48:10).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도를 게을리 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는 성경말씀을 듣지 못했습니까? (고전9:16).
축복을 받아야 할 우리가 왜 저주를 받아야합니까? 은혜를 받아야 할 우리가 왜 화를 받아야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72년 6월 1일 세상을 떠난 부흥사요 저술가인 윗치만 니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폐 영리하고 명석해서 항상 교만했다 합니다. 그는 동급생들을 주께 인도하려했으나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 미스 그로스(Miss Grose)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일 년 동안에 몇 사람이나 인도했느냐? " 그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했지만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전도하기 전에 자기의 죄를 다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0명의 동급생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매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간증했습니다. 또기회 주시는 대로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했을 때 더러는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전도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그의 명단에 기록된 70명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간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정합시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찾아가서 전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우리에게 붙여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춰리라"(단12:3). 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8.11.13)
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9-14)
성경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 충성스런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잠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2513).
엘리야야 말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 얼음냉수 같은 자일 것입니다.
A. W 핑크라는 분은, 구약성경을 다 읽은 후 책을 덮으면서 기억에 떠오르는 인물 두 분을 말하는데 모세와 엘리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세가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한 구국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와 암흑 속에 헤매는 조국과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 기독교뿐 아니라 구교는 물론, 심지어는 유대교와 마호메트교까지도 숭배하는 죽지 않고 승천한 자요,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고 기대되는 인물입니다.
1) 우리 기독교에서는 모세와 비교하는 위인이요, 정신산맥으로 평가합니다.
2) 유대교의 탈무드(Talmud)에는 엘리야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는 어질고 선한 랍비들에게 자주 나타났고 어린이 할례시에나, 유월절 행사시에는 그의 좌석이 마련된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집 문을 열어 놓으며 그가 와서 메시야를 선포하도록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3) 희랍에서는 그를 산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시고 높은 곳에서 숭배했다고 합니다.
4) 동방교회(희랍정교회)에서는 7월 20일을 엘리야의 날로 정하고 그가 태어났다고 믿는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중간에 수도원을 지어 기념한다고 합니다.
5) 서방교회(로마교회)에서도 갈멜산에 수도원을 지어 기념해 오고 있으며,
6) 마호메트교에서는 스가랴, 세례 요한과 함께 위대한 선지자로 믿고, 그가 영원한 샘물을 발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엘리야선지가 만인의 추앙과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증거합니다. 엘리야(Elijah)란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는 "길르앗에 사는 디셉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왕상17:1). 그는 B.C 9C의 북왕조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나타나 아하시야 왕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예언활동을 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행한 역사는 놀랄만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합에게 선언한 말입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왕상17:1).
둘째는, 사르밧 땅 가난한 과부의 생활을 보장하였습니다.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가뭄이 다할 때까지 계속 나오게 하였고 과부의 아들이 중병으로 죽었을 때 살려주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17:21-22).
셋째는, 엘리야는 감히 아합 앞에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이 도탄에 헤메이게 된 원인은 두 가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고 2) 바알을 좇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입니다.
넷째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을 갈멜산에 모으게 하여 참 하나님을 보여줌으로 통쾌하게 그들을 숙청한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습니다(약5:17-18).
다섯째로, 그는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에 비를 내리게 하여 그 백성을 살게 하였습니다(약5:17-18).
여섯째,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이 순순히 허락하지 않자 그는 병까지 들었습니다. 사악한 그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아합의 살인을 비난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예언하였습니다(21:1-25).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은 후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한 자입니다(왕하2:8-11). 과연 엘리야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불의 선지자요, 능력의 사람이요, 병거타고 승천한 엘리야였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천사도 아니고, 수퍼맨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잔인무도한 이세벨의 도전을 받고는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루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19:4). 그리고는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다시 호렙산에 이르렀으나 그곳 굴에 들어가서 피신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지난주에 이어 두어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뜻은 아주 쉽습니다.
(1) 그것은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회피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1) 그것은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회피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서야 할 자리가 있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고 하신 것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한 자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선지자보다 더 오래되고 중요한 직책은 제사장직입니다. 제사장은 성소를 맡은 자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요, 제물을 맡은 자입니다(대상24:5). 이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중재하기 위하여 임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이 조직될 무렵 제사장직은 매우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 제사장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자들로 임명되었으나, 그들은 세습되는 제도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가장 악한 자들도 그 중에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선생이었으나 백성들의 죄를 규탄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죄에 빠져 죄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장과 왕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학교를 세워 선지생도들을 양성하게 된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송아지 우상과 바알 우상을 섬기게 되고, 남왕국 유다에서도 바알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이 활동한 선지시대는 B.C 800-B.C 400년여 간의 400년간입니다. 주로 16명의 선지자가 활동했었습니다. 이 선지시대의 중심사건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해가는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습니다.
이들 선지자들은 1)정치적 부패를 탄핵하였습니다. 2)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무감각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3)그리고 민족적 압력과 도덕적 부패를 염려하였고 4)우상과 죄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5)그리고 다윗의 계보에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수난과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습니다.
메시야의 선지라고 불리우는 이사야선지는 므낫세의 우상적 법령을 반대하다가 두 장의 판자사이에 끼여 톱으로 살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상으로 망해가는 조국을 위하여 골고다 아래 있는 예레미야 동굴에서눈물을 흘리며 애가를 했고, 또 투옥당하고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들 선지자들은 악한 왕과 싸웠습니다. 우상과 싸줬습니다. 죄와 싸웠습니다. 그러자니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멸시당하고 갇히고 조롱받았습니다.
아합왕의 횡포와 간악한 이세벨이 핍박은 너무나 무섭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붙잡히기만 하면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바알신당과 아세라의 신당은 곳곳마다 세워지고 있었고 여호와의 성전은 가는 곳마다 훼파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한 사람 두 사람 바알과 아세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준 자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은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하나이다"(19:10).
그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양어깨에 맨 선지자요, 기둥이요, 보루요, 파수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지자의 직책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렙산 깊숙한 굴속에 피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신 것입니다.
너를 세우신 하나님을 실망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짊어진 책임만은 감당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지켜야할 진리만은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처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2) 그것은 사명 망각을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2) 그것은 사명 망각을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네가 여기와 있다면 네가 받은 사명을 어찌되겠는가? "고 걱정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 굴속에 있느냐?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이곳에 숨어 있어도 괜찮은가? 지금 같은 위기에 너 같은 선지자가 은신할 때인가? 지금은 너 같은 선지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파수꾼(Tsaphah)은 앞을 내다보는 자입니다(seer). 그들은 또 죄악에서 돌아서도록 외쳐야할 선지자입니다(prephet). 그리고 그들은 지키는 자요, 망을 보는 자입니다(watchman). 그런데 이 같은 사명을 받았으면서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 이사야선지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다. 능히 보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사56:10). 모두가 다 받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저버린 엘리야에게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는가?"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 앞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이 해야 할 바 책임을 이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를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유대인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이 온 국민을 불러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음식은 왕이 마련하고 참석자 모두는 포도주 한 병씩만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잔치날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다포도주 한 병씩만 가지고 왔고 그것은 큰 동이에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그 포도주를 잔에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술은 맹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포도주를 가지고 올 것이니 자기 한 사람쯤은 술 대신 물을 가져와도 모르겠거니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가 다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려면, 모두가 다 포도주를 가져와야 합니다. 정말로 멋있는 잔치가 되기 원한다면 모두가 다 잔치를 위하여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및진 잔치를 즐길수 있는 것입니다. 家貧에 恩賢妻 하고, 國難에 思賢相이라는 글귀가 더욱 절실해집니다.
오는 10월 23일 주일은 총력전도 주일입니다 이날에 맹물을 가져오는 이는 한 분도 없을 줄 믿습니다. 이 날의 멋진 잔치를 위하여 모두가 맛있는 포도주를 준비합시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책망을 받는 자는 아무도 없기 원합니다! 아멘.
(83.9)
7. 내 증인이 되라.
7. 내 증인이 되라.
(행1:6-11)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가슴 떨리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요절이요, 요약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직접적인 위임 명령으로써 승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유언적 지상명령입니다.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위에 내려진 하나의 사명이며 또 그것은 교회의 선교에 관한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곧 승천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1:9).
예수님은 이후에 지상에 남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말씀은 가장 뜻 깊은 유언인 것입니다.
유언이란 어떤 사람이 사후에 법률적 관계를 발생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독적이요, 자발적인 의사 표시를 말합니다. 유언은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략 상속분의 지정, 유산의 분할 방법, 후견인의 지정, 유언집행자의 지정 등 내용의 다양성에는 한이 없습니다.
유언을 하는 방식에는 1) 자필증서, 2) 녹음, 3) 공정증서, 4) 비밀증서, 5) 구수증거 등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언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유언은 범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언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을 건 최후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집 세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청개구리는 어찌나 성격이 비뚤어지고 괴팍했던지 어머니의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어머니가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그는 왼쪽으로 갑니다.
또 왼쪽으로 가라하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그는 웃어야할 때이면 울고 울어야할 때는 웃는, 철저하게 심술궂고 불순종 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자랑으로 삼는 그런 청개구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못난 아들에게 시달려 심장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어미 청개구리는 죽은 후 무덤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청개구리의 평소의 소행으로 보아서 산에 묻어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그 반대로 물가에 묻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지막 유언으로 "나의 무덤을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유언을 들은 아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유언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대한 자신의 불효와 불순종을 뉘우치면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순종하여 생전의 불효를 씻기 위하여 어머니 말씀대로 냇가에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왔습니다. 물은 넘쳐흘렀고 어머니의 무덤은 흔적조차 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이것을 청개구리는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 생각이 나서 울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깊은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못난 자식도 유언만은 불순종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언은 법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유언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성전을 지으라"는 다윗의 유언은 그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실히 지켜졌습니다. 야곱의 유언과(창49:29), 가나안 땅에 해골만이라도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요셉의 소망은(창50:24-26), 그 자녀들에 의하여 이행되었고(창50:12-14), 모세에 의해 어김없이 지켜졌습니다(출13:18-19,수24:32). 방탕아 어거스틴도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섬기던 제단에서 네 어머니를 기억해 달라"는 그 어머니 모니카의 최후 유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돌아와 성 어거스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언은 이처럼 심각하고 범할 수 없는 법적 효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을 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는 예수님의 장엄한 유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주님의 유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또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16:15-16).
누가복음에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24:48).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주님의 마지막 교훈들입니다. 즉 유언들입니다. 그것은 곧 전도임을 거듭거듭 강조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한 말씀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막1:38). 사도 바울도 최후의 말로서 그가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임을 강조 합니다(행20:24). 그는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하면서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딤후4:2,5).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유언만은 아닙니다. 그의 첫 음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고(마4:7), 세례 요한의 첫 음성도 그것이었고(마3:2), 70인 전도인들도 그렇게 외쳤습니다(막6:12).
예수님의 전 생애는 복음전파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알파와 오메가도 전도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은 그의 공생애의 시작과 끝을 전도로 삼았습니다. 주님은자신이 그 복음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애를 걸고 이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주님이 하신 그것을 본받는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은광교회의 존재 의의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점사업도, 지상과업도 이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엡1:22,5:23)
그런즉 예수의 교회로서 이 일을 등한히 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의의를 망각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발 벗고 나서서 전도 대상자를 찾아 그들을 주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유언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거기에는 축복스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1)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1)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례하시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기뻐하십니다. 봉사와 충성과 희생과 기도와 순종과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시고 받기 원합니다.
둘째는 전도의 결과로 얻어지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봅니다. 잃은 양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와 잃은 아들(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의 공통된 주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것입니다(눅15:7).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는 죄인을 또한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녀들이 우리 아버지를 더욱 기쁘시게 해드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쁨과 감사는 더욱 넘칩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기쁨과 감사는 더욱 넘칩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설립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모하고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빌4:1).
우리가 전도할 때 믿겠다는 말을 들으면 기쁩니다. 그가 약속대로 교회에 찾아오면 정말 기쁩니다. 교회를 봉사하는 중에 괴로운 일이 많고 힘 잃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신자가 잘 믿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신앙이 장성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3서1:4). 70인의 전도보고에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눅10:17-20). 예수님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려운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3) 우리가 영화로운 복음을 선포할 예 우리교회의 빈자리가 매꾸어진다는 사실입니다.
(3) 우리가 영화로운 복음을 선포할 예 우리교회의 빈자리가 매꾸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빈자리를 섭섭해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강권하여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빈자리는 없애야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1)빈자리는 쓸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2)빈자리는 은혜 없는 결과처럼 보입니다. 3)빈자리는 힘을 잃게 합니다. 4)빈자리는 처음 찾아온 이에게 다시와 보고 싶은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5)빈자리는 뜨거워지려는 성도들의 마음속 열기를 식혀 버립니다.
교회집회 인원의 최상의 상태는 빈자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시간 지나서 온 분들이 서서 예배드리는 상태입니다. 안내 집사님들이 자리로 안내할 수 없어서 쩔쩔매는 상태입니다. 우리교회의 당면 목표는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숫자로 표시한다면 1,200여명의 집회 인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빈자리가 메꿔지는 길은 오직 세 길 밖에 없습니다.
1) 이사 온 교인이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전입자에 의한 증가입니다(Transfer in growth). 이것은 항상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2) 교인들이 자녀를 많이 낳는 길입니다(Biological growth). 이것은 생물학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더디기도 하고, 현 상황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3) 제일 좋은 방법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심자에 의한 성장이라 합니다(Conversion growth). 예수께서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신 것도 바로 이 방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성장한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고난을 무릎 쓰고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한 초대교회는 제자의 수가 날마다 증가했습니다(행2:47). 많이 거두려면 많이 뿌려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면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 예수님의 이 유언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우리는 이 유언에 지배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교회 그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시다!
(83.9.18)
8. 가서 고하라!
8. 가서 고하라!
(왕상 19:9-14)
"우리가 전쟁의 위기에서 이 세상을 구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전쟁이 우리에게 종말을 선사할 것입니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입니다.
전쟁이란 정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컴퓨터는 우리에게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 몇 가지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사 이래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B.C 3600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평화가 유지된 것은 292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사는 곧 전쟁사라고 할만 합니다. 대소 전쟁은 그만두고 기록상에 남아있는 전쟁만도 14,513회나 된다고 하며 전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은 사람은 자그마치 37억으로 지금까지 지상에 생존했던 인구의 약 4분의 1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조억$에 이르고 많은 고아와 불구자와 과부와 이산가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 규모는 적지만 오늘 우리 본문에도 전쟁의 비참함을 엿볼 수 있는 한 예가 있습니다. 아랍 나라는 본래 셈의 아들로그 후손은 유목민이었습니다. 후에 그들은 부족을 이루어 북(타우로스산맥), 동(카볼강), 남(아라비아사막), 서(팔레스틴 레바논산맥)를 경계로 하는 강대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메섹을 수도로 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왕하 5장에 보면 나아만은 이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요, 구국공신입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아람나라의 왕은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에게 글을 써 보내면서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여호람 왕은 전전 긍긍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 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함 인줄 알라"(왕하5:7).
우리는 이 말씀만 보아도 당시아람나라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였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아람나라의 벤하닷이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 국토를 유린한 후 여호람 왕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사마리아 성의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성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고 날이 감에 따라 식량은 떨어져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하여 왕하6:24-33절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몇날 며칠을 굶은 여인이 견디다 못하여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먹자"고 제의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 함께 자기의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튿날에 일어났습니다. 어제는 남의 자식을 삶아먹기는 했으나 막상 자기자식을 삶아먹을 수 없어서 숨겨버린 것입니다.
사기당한 부인은 이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고소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처절하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이 같은 비극은 또 있었습니다.
1316년 영국에서도 얼마나 무서운 흉년이 들었던지 부모가 자식을 삶아 먹은 일이 있었고, 내용은 좀 다르나, 의령에서는 자식이 노모친을 그렇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전쟁의 와중에 네 사람의 문둥이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버림당한 문둥이들이긴 해도 그들의 생명도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러나 호구지책이 막연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앉아 있어도 죽고, 움직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 자식도 잡아먹는 비극적인 막판에 문둥이에게 올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으로 들어가도 죽고, 아람군에게 항복해도 죽을 운명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서 아람군 진영으로 기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군량미가 있고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람군 진영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조심조심 앞에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찌된 일인지 아랍대군은 온데 간 데가 없고 산더미처럼 쌓인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그대로 두고 어디론지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문둥이들은 우선 실컷 먹었습니다. 배가 부르자 제 정신이 났습니다. 좋은 것은 모조리 훔쳤습니다.
그러고 나니 지금 성안에서 굵어 죽어가고 있는 백성들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면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성 중에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이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아사 직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백성을 살린 문둥이들은 될 수 없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문둥이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 그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 때문입니다.
(1) 그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 때문입니다.
어제만 해도 죽을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산더미 같은 양식과 옷과 은금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숨 쉬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배불리 있고 은금보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배고파 죽어가는 자들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을 수밖에 없는 비극에서 구할 수 있는 양식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9). 당연한 말입니다.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잠잠해서도 안 됩니다. 어서 가서 전해야 합니다. "여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무진장하게 있습니다"라고 알려야할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 구원받은 것만 기뻐하면서 성중의 죽어가는 자들을 내버려둔다면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문둥이들은 어서 가서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고 살 수 있는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믿지 않고 죽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는 영생할 양식이 필요합니다(요6:55). 그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도 생명이 필요합니다.
없는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사는 예수는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잠잠해서는 안 될 이유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살 길은 오직 그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이 잠잠해서는 안 될 이유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살 길은 오직 그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부모님에게 잡혀 먹히고 있습니다. 그 수만의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지금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앉아 있으면 굶어죽고 성문을 박차고 나간다 할지라도 원수에게 죽습니다.
그런데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살 길이 있다는 소식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다름 아닌 네 사람의 문둥이들입니다. 성안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소식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 이들 뿐입니다. 그 소식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소식입니다. 자신들은 배불리 있고 원수는 다 물러가 버렸다는 생명의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성안 사람들에게 필요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알고 있어야 할 소식이 아니고, 필요한 이에게 전해야 할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신 복음은 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만인에게 전해져야할 구원의 도입니다. 이 구원의 도를 몰라서 죽어가는 자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이 소식을 전해줄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복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어서 가서 전해야 할 것인데 잠잠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스코틀랜드에 한 교사가 살았습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찾아와서 중국의 선교사로 가겠으니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왜 불구로 선교사가 되려느냐?"고 묻자 "두 다리가 성한 자들이 가지 않으려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한다는 죄 때문에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간수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밖에 나가 전도만 하지 않는다면 오늘이라도 출옥시켜 주겠다"
번연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오늘 나를 놓아주면 오늘부터 나가서 복음을 전하겠다" 우리 모두의 입에서 이 증거가 있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 교회는 큰 부흥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그들이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이유는 다가오는 위험 때문입니다.
(3) 그들이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이유는 다가오는 위험 때문입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하였습니다(9).
문둥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아람군을 물리친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이 기쁜 소식,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묻어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 책임을 이행치 않았을 때의 위험을 직감한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는 바울의 고백도 같은 의미입니다(고전9:16).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예수님의 경고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입니다(눅19:40).
월리엄 부으드(William Booth)는 본래 열심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나 불쌍한 자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하여 불타는 열심을 가진 것은 환상 중 천국에 다녀온 후부터라고 합니다. 저는 그의 긴 간증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에 갔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할 수만 있다면 지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의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천국에 온 자입니다.
그의 독자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전도했는지요? 곧 믿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부으드는 그 청년을 알고 있었으나 버린 자식이라고 전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번째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소식이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내 딸은 당신의 집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전도했습니까? 한 번만 잘 권면하면 믿을 아이입니다"
부스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것이 천국입니까? 괴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다시 세상으로 보내주세요. 한 번만 더 보내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두 번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지금 살아있는 때입니다. 가서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합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복음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복음이 지금 죽어가는 저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만 있으면 우리에게 위험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책망 받는다는 말입니다. 화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합시다. "
(83.10.2)
9.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9.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고전9:14-23)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마다하시고 육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고자 원하는 뜻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눅19:10). 주님은 잃은 양을 찾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l:38). 주님의 공생애 3년은 복음전파였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시작하여(마3:17),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탁과 함께 그의 생애를 마치셨습니다(막16:15). 뿐만 아니라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기대를 피력하셨습니다(행1:8). 우리는 주님의 이 지상 명령에 따라 복음 전파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엄숙한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만에 하나 잘못된 동기로 이 사명을 감당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그릇된 동기로 평가받을 전도운동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에 대한 잘못된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전도가 하나의 취미라면 그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2) 전도에 대한관심도 바른 동기가 아닙니다. 3) 부모나 교회의 소원 때문에 전도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 어떤 이는 전도자가 되어 고난당하는 것을 전도의 동기로 삼습니다. 5) 어떤 이는 그 동기를 박애사상이나 자선에 두는 이도 있습니다.
6) 더러는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려고 전도합니다. 7) 어떤 이는 영광을 바라보고 전도합니다. 즉 이름을 내기 위하여 입니다. 8) 더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하기도 합니다. 9) 어떤 이는 생활문제(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전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에 열거한 모든 것은 다 잘못된 전도에 관한 동기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바른 동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전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고전1:21,마24:14,계7:3,롬10:13-15,막1:38).
2)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마28:19,막16:15,행1:8,요4:15,눅24:33,행8:4). 주님의 명령은 교회뿐 아니고,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3) 전도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고후5:14,마9:36,요21:15-17).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포괄적인 동기입니다.
4) 전도는 불가피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롬10:9-10,마10:33,고전9:16,눅19:40). 그것은 정말로 부득불 할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전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롬1:14). 또 오늘 우리 본문에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고도 하였습니다(16).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전도운동은 이 같은 동기에서 시작하고 진행되어야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전도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의당 해야 할 의무입니다. 둘째, 전도는 부득불 할 일입니다. 셋째, 전도하지 않으면 화를 당 합니다. 호불호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잠잠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은 각성이 없었음을 회개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몇 가지 방법을 개진하고자 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1)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것은 집중의 효과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인간의 힘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26). 수력 발전기를 돌리는 것은 흩어진 방울방울의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울방울이 함께 뭉쳐 쏟아지는 큰 물줄기입니다. 흩어진 기도에는 힘이 없습니다. 흩어진 관심은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영혼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 대상자를 정하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공을 바라는 자는 힘을 집중하라! " 이는 괴테의 말입니다. "사슴을 좇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콜롬부스는 어디엔가 또 다른 신대륙이 있다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항해 자금을 마련하려고 각국의 국왕에게 호소하였으나, 특히 스페인 왕비 이사벨라를 6년간이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는 기어코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하고, 홀로 산 요시다(吉轉太 )라는 일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여름 방학 때 고량전(高梁전)이라는 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그 마을의 유력한 사람인 도메오까라는 분이었습니다. 요시다는 매일 그 분을 찾아가서 안마도 해주고 신앙 간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반기독자였습니다. 예수 이야기 듣기 싫으니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또 그는 우표를 100장을 사서 매일 성구와 편지로 권했습니다. 그러나 도메오까씨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그가 보낸 편지는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시다씨는 낙심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신앙인들에게 부탁하여 도메오까씨에게 좋은 성구와 기도로 전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의 좋은 글을 받아보고 크게 감격하여 하는 말이 "이렇게 참되고 지성을 다하는 사람을 그저 돌려보낼 수 없다.
그는 예물을 받지 않을 것이요, 잔치를 차려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기뻐하는 것은 전도를 받는 일이니 사람들을 모아 그의 전도 강연을 듣자"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을 모으고 마을 사람들까지 모이게 하여 요시다씨의 전도 강연을 듣고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최선의 방법들을 동원합시다. 겨냥하지 않은 탄환은 명중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토끼를 잡으려고 좇는 자는 한 마리의 토끼도 못 잡습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부모, 형제, 이웃, 친구는 좋은 전도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정성을 그들에게 집중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잠을 깨워 주실 것입니다.
(2)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2)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도움을 위하여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많은 교인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큰 예배당을 겁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큰 사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맥 빠진 성도들에 대하여 조금도 겁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 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성도를 볼 때 두려워 벌벌 떱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성도를 비웃습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교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전도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 없이 행하는 매사는 다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기도가 필요하지만 영혼을 구하는 전도에, 기도는 더욱 필요합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물러서지 말고 더욱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18:7-8).
우리가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는 때 빈자리는 하나둘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그들을 움직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3)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전도주일에 모든 성도가 다세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그날에 아무도 결석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아무도 혼자 올 수 없습니다. 셋째는, 선택하여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중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선택하여 돕는 일입니다. 1)철야기도 4일밤 참석하는 것과 2) 축호전도 4회 참석하는 것과 3) 새벽기도회 43일간 계속하는 것과 4) 전도지 제작 등 문서전도를 위하여 헌금으로 돕는 일과 5) 전도주일에 3명 이상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중에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이 협조하여 주시고 참여해 주실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중에 3명을 인도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였습니다. 지금 6명을 전도대상자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낙심 중에 있는 분들이고 두 분은 얼굴도 모르는 내외분이고, 두 분은 다른 교회 교인입니다. 마지막의 것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위한 비상수단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전도지와 함께 전도대상자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뒤에는 계속 전화할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이들을 움직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분부대로 그들을 강권할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눅14:23)
사람들은 제 발로 걸어서 예배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나섭시다. 그들을 눈물로 강권하여 인도합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 할 책임입니다.
바울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니라"(16)
주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과 힘을 주기기 원합니다. 아멘.
(83.10.9)
10.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
10.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
(마9:35-38)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사형수, 폭력배, 윤락여성, 비행청소년 등 그늘에서 숨어살던 불행한 사람들의 신앙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그들은 형무소를 이웃집 드나들듯이 한 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수년, 다른 이는 반평생을 형무소에서 보낸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더욱 닫혀져 있습니다. 그렇게도 완고하고, 무섭고, 비인간적인 그들이 어떻게 복음으로 구원받아 양처럼 순진하고, 배꽃처럼 순결해졌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 간증문을 읽노라면 복음의 생명력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요령껏 복음을 전해야 믿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말할 때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것과 둘째는, 어떻게 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중요 합니다. 그러나 신앙 간증을 듣다보면, 이 두 가지 문제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의 방법론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자의 태도는 전도의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결신자들의 대부분은, 복음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터득하여 믿기로 결심하였다기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진지함과, 그의 확신에 넘치는 자세를 보고, 감화와 감동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말을 잘해서 믿게 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또 뛰어난 전도의 방법 때문에 믿게 된 것도 극히 적습니다. 그것보다는 복음의 위력과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에 정복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우리 주님의 유언적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 앞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자랑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또 그들의 자랑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어도, 그를 메시야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의 자랑이 거치는 반석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세례요한은 유대인의 자랑을 여지없이 평가절하 시켰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그가 가진 유대인의 자랑을 미련 없이 포기하였습니다. 그가 포기한 인간적인 조건은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것들입니다(빌3:4-6).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함이라"(빌3:7-8).
바울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그 자랑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거치는 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렘9:23). 바울은 육체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3:21)
솔로몬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고(잠27:1), 이와 같이 자랑은 다 허탄한 자랑인데 그것은 곧 악이라고 하였습니다(약4:16)
자랑은 거치는 돌입니다. 자기자랑, 자긍, 자만, 교만, 자기절대화는 복음의 적입니다. 이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소개한 사람 중에 하나인데 그는 예수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3:16).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요1:27)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앞서 왔지만, 예수는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자라고 소개하고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바쳤고"(빌1: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갈6:14), 누구든지 자랑하고 싶거든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고후10:17)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을 자랑치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최봉석 목사님께서 "예수천당"을 외치며 다니신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고, 앞서간 순교자들이 예수자랑을 버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만을 자랑합시다.
이것이 곧 제일 좋은 전도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로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2)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오늘 우리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36).
주님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회당에서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약한 자들을 고치시며 낫게 했습니다. 주님은 가는 곳곳마다에서 우글거리는 병자들을 보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셨을 때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기다"는 말은(Spagchnistheis)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사랑이나 동정 등 감정의 근원이라고 생각되고, 내장, 폐, 심장, 간장이 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의 심장이 감동되었다" "그의 간장이 녹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병자나 배고픈 자나 약한 자나 무능한 자나 지옥으로 향하는 자들을 보셨을 때 그의 가슴이 탔고 심장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유리하며 고생하는 목자 없는 양들을 보았을 때에 그의 간장은 메어지고 아팠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방황하는 양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고생한다는 말은(eskulmenoi) 갈기갈기 찢겨서 가죽이 벗겨진 시체를 의미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여 발은 아프고 털은 빠져 기진맥진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유리한다는 말은(errime noi)완전히 뻗어버린 상태, 녹초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의 불쌍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들을 보았을 때 유혈이 낭자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는 불쌍한 인간들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다보시며 우신 것도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신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들이 불쌍하여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국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도 열려 우리 주위에서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영혼들이 불쌍히 여겨져야 합니다.
(3)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추수꾼이라는 사실입니다.
(3)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추수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은" 이때에 추수꾼으로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70인의 제자들을 이 마을 저 마을로 전도하도록 파송하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눅10:2). 요한복음 4:3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 주님께서는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이 교회나 저 교회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꾼은 모자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두가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구경꾼은 많아도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고민입니다. 욥1:14절에 보면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은 영해하기를 "소처럼 열심히 맡을 갈며 일하는데 나귀처럼 풀만 먹고 놀며 구경하는 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이런 분은 없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손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협조와 충성과 마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귀한 역사에 동참합시다. 만일 여러분이 이 주님의 일에 외면한다면 언젠가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간절한 애원을 외면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그의 활동영역은 극히 적은 부분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틴 지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누가 갈 것입니까? 누가 예수 대신 산을 넘고 강을 건널 것입니까?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일에 있어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헌금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만으로 모자랍니다. 만일, 사람을 추수하여 거둬들이려 한다면 우리 모두는 추수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사람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니페이스(Boniface)는 영국이 남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가 73세의 고령일 때 주위에서는 전도를 그만 두고 여생을 편안히 지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계속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그는 계속하여 프리슬란드에 가서 전도하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74세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지금도 죄악의 물결 중에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저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보고 듣고 안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강과 산을 넘고 이집 저집 문전을 출입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다 복음의 빛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추수꾼입니다. 부지런히 전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기로 작정하신 영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입시다. 강권하여 구한 영혼 교회 부흥 천국경사입니다
(83.10.9)
11.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11.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바울사도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4).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힘써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때는 힘쓰다가도 쉬 힘을 잃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동안 몇 가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1) 전도하는 것이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전도는 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3) 전도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잘못 알고 있으며 믿지 않으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같이 믿기 어려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할 때가 많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전도의 어려움 때문에 더욱 값있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전도의 어려움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찾지 않으실까 하는 아쉬움과, 다른 하나는 천사에게 복음 전파의 책임일 맡겼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세상 사람들의 통상관념이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전도는 지혜로운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구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갈3:26-29)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잡은 자와 잡힌 자, 가해자와 피해자, 의인과 죄인, 유식자와 무식자, 권세자와 무력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우는 자, 피해자, 억울한 자, 의지 없는 자, 병든 자,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복음의 문은 더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의 대상을 이렇게 밝혀 줍니다.
1) "이방인,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에 그늘에 앉은 불우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4:15-16).
2)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눅4 18-19).
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마11:28).
4) "술을 즐기는 자와 세리와 죄인"(마11:19)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2:17) 또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도 하였습니다(마19: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시며 교만한 자에게는 베푸신 은혜마저도 거두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미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천대받은 사람들, 죄인의식을 가진 겸손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중요한 특징입니다.
유대나라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주로 병자, 귀신들린 자, 세리, 창녀, 죄인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자들, 유대 귀족들에게 압박받는 서민층 중에서 많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보더라도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멸시받는 세리 등 이름 없는 직업인들입니다.
그러하다 해도 이것 때문에 복음이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들에게나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기독교가 말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2-23).
십자가의 도가 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까?
1) 유대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신21:23).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2) 다른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거짓 메시아가나타나서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A.D 45년에 나타났던 드다나, A.D 54년에 애굽에서 왔던 자칭 선지자의 유혹은 유대인들의 구미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사기꾼들이 말하는 엄청난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인기를 끌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능자요, 섬기는 자요, 억울해도 말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가 구세주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무능력한 패배자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1) 십자가는 극악한 죄수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같이 무시무시한 형구에서 구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철학과 웅변과 변론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교양 없는 전도자들의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한 제자들의 전도는 그들의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과 경멸의 상대에 불과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미련한 처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요 승리의 표상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증거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전해야 합니다. 전도할 줄 모른다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자체로서 충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해진 복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 할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미련하다 하여 복음자체 마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무식하다 하여 복음마저 천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린아이라 하여 복음마저 멸시받을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하였습니다(27-28).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비록 미련하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전하지 않고 복음의 강함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입원한 병자가 불신의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빠 지옥가면 안돼요"라고 붙잡는 아이 때문에 구원받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고민하는 일 때문에 자살하려고 기웃거리다가 다리 밑에서 찬송하는 거지 가족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련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질그릇 속에는 보화가 담겨있듯이 우리는 미천해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하여 둔한 우리 입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미련한 사람들이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부르사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고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런지 모르나 구원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힘 있게 전합시다. 아멘.
(83:10:16)
12. 안디옥 교회
12. 안디옥 교회
(행11:19-30,13:1-3)
주후 1세기경 로마가 통치하던 영토 안에 안디옥(Antioch)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무려 16개소나 된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수리아 안디옥(행11:19,13:1)과 비시디아 안디옥(행13:14)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리아 안디옥은 지중 해안에서 동으로 27km지점의 오론테스(Oronter)산을 등지고 오론테스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로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로마 수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B.C 300년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하나인 셀레우커스니가톨(seleucus Nicator)이 건설하여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후에 로마의 직할시가 되었다고 하며 인구는 500,000에 이르렀고,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전합니다.
이 도시에는 대리석으로 된 큰 길이 있었다고 하며 로마제국 내에서는 가로등이 있는 유일한 도시로 알려졌으며, 도시의 외곽은 로마보다 장대하였기 때문에 흔히 『동방의 여왕』 또는 『동양의 로마』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니 수리아 안디옥의 규모나 위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루살렘이나 아덴, 로마와는 달리 이 도시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고고학자들의 작업을 통하여 겨우 알려질 정도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사방으로 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의 몇몇 무리들이 안디옥에 들어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많은 이방인들까지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초대 교회가 당한 핍박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전도는 생각 밖에 큰 축복을 받아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도 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에 접수되었을 때 그 정과를 시찰하고 새 신자를 굳게 할 목적으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한 것입니다.
바나바가 수리아 안디옥에 새로 개척 설립된 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그 교회의 규모가 예상 밖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충성하였고 새 교인들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소 근방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불렸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한 것입니다.
이 초청은 사심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그의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첫째는, 자기보다 유능한 인물을 서슴지 않고 받아 들였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사울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반역자로 몰렸으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의심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남다른 눈과, 사울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량으로 영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사울은 얼먀후 초대교회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을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믿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소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소개하고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자신은 사라졌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소개하고 그는 그의 그늘에 묻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점입니다. 그는 사울이 이룩한 업적의 절반은 나누어 가질만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아량과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사울은 거기서 처음으로 따뜻한 환영을 받은 곳입니다. 그곳은 처음으로 말씀을 전파한 곳이며, 가르친 곳입니다. 그의 유명한 3차에 이르는 전도여행도 이곳에서 출발하였으며 끝마친 곳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안디옥 교회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곳은 그의 활동의 본거지였으며 위대한 사도가 되도록 안수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곳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통하여 새 힘을 얻었으며 물질의 공급도 받았습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전도 활동의 본거지이자 또한 초대 교회의 선교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1세기 전체를 통하여 안디옥은 예루살렘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임을 쉽게 알게 됩니다. 그곳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라고 하였습니다(11:23).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 받았을 때 그 교회의 은혜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개종한 자들 간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목회자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11:24). 그러나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자요(9:1-5),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 관여한 배반자입니다(7:57-58,8:1). 니게로 시므온은 검둥이 개종자입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궁중의 고관으로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빈부귀천, 남녀노유은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낮선 자가 없었고 구경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좋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강점도 이러한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모두가 다 형님, 누님으로 통했습니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니 형제요, 모두가 예수의 피로 맺어졌으니 한 형제자매였습니다. 거기에는 불신도 없었고 상하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행11:26,26:28,벧전4:16)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Christ와 man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둘은 한 단어 즉 Christian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구주를 영접하고 구주께서는 죄인을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게 영광스런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비난과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멸시받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위협받는 이름이었습니다.
초창기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더러는 야수의 밥이 되기도 했고,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조롱당했습니다. 또 좁은 문과 제한된 길,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영광스런 이름은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불리워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이 이름을 얻은 것은 뜻이 있습니다.
1) 그것은 사도들의 교훈과 성도들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유대인이나 예루살렘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살아 있다면 여러분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중에는 크리스천 아닌 자가 더러 있습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믿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구원은 받는 것이지 힘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거듭남으로 크리스천이 됩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서 난 자들입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크리스천답게 살았습니다.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복음전도에는 파송하는 모체가 있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막16:15).
그러나 사도들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핍박을 내리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핍박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움직여 환경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방전도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이 약속은 가서 제자 삼고, 세례 주고, 모든 족속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이 약속을 따라 동서남북 어디든 갔습니다. 인종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교사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를 천거한 자는 바나바요, 그 인물을 키워낸 교회는 안디옥교회요, 그 전도 사업을 뒷받침해 준 교회도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선교사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진 교회도 안디옥 교회입니다(13 2).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그들의 전도 사업을 위하여 헌금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가 거쳤던 모든 도시마다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나셨을 때 그 범위는 더욱 넓어졌고 제3차 전도여행을 했을 때는 더욱 더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칠 때마다 어김없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힘을 새롭게 하였고 부족한 물질의 필요도 채울 수 있었으며 전도 사업에 필요한 후원과 보조와기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를 위하여 세운 교회요, 들어 쓰신 교회입니다. 오늘날 안디옥 교회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교회를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살아 있고 그 교회가 개척 설립한 교회는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본받는 일만큼 중요하고, 값지고, 우선해야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즉 안디옥 교회 설립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입니다.
1) 그것은 이방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입니다.
2) 이방전도의 본부가 마련된 것입니다.
3) 새 전도자가 부름 받았습니다.
4) 이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디옥 교회의 사명을 우리 은광교회 위에 다시 주셨다고 믿읍시다.
(84:1:15)
13. 눈을 들어 밭을 보라
13.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한복음4:27-38)
여름은 땀 흘리는 계절입니다. 불볕더위의 열기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납니다. 만물은 성장한다고 땀을 흘리고 농부들은 일손이 바빠 합을 흘립니다. 여름은 준비의 때요, 성숙을 위한 몸부림의 때요, 노동의 때입니다. 여름은 날고 싶고 뛰고 싶은 때입니다.
봄을 여성의 계절이라 하면 여름은 남성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봄을 웃음의 때라고 하면 여름은 힘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땀 때문에 여름을 싫어합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소동파의 다음 글귀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더위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여름 해가 긴 것을 좋아하노라"(人苦熱 我愛日長). 해가 길어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중 7월은 우리 은광교회로서는 바쁜 달에 속 합니다. 이 할에는 중요한 행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첫 주간에는 광주시찰회에서 주관하는 하기학교 교사 강습회가 은성교회에서모이고, 전국 어린이 교육 선교원에서 주관하는 강습회가 본교회당에서 모입니다. 둘째 주일은 제1청년회 헌신예배이며, 그 주간에는 전국대학생 대회가 덕유산 국립공원 야영장에서 모이는데 500여명의 대학생이 참가 합니다.
셋째 주일은 맥추감사절이요, 성경학교 교사 임명과 하기학교 교사 헌신예배와 자체강습회가, 넷째 주일은 각 기관의 월례회와 하기학교 개교예배와, 다섯째 주일에는 제2남전도회 헌신예배와 그 주간에 중고등부 수련회와 선교 100주년 교단 집회가 부산 고신대학캠퍼스에서 모입니다.
또 대학부와 청년회의 하기 봉사활동이 펼쳐집니다.
이 같은 행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서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다한 거룩한 교회로 빛을 말하는 영광스런 교회로 나타나려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들입니다.
이러한 행사는 결코 그 행사 자체로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겠기에 온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교우의 직접적으로 참여하심은 물론 기도와충고와 헌금과 협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때 온 교우들이 소속해 있는 각 기관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생동감이 있는 은광교회의 산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1)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1)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지금은 추수 때가 되었는데 추수 할 일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꾼을 찾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새 일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70인 전도단을 파송하면서(눅10:2), 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 무리를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사,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마9:37).
예수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보배로운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일꾼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스런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니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만일 들리지 않는다면, 그 음성이 왜 나에게 들리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드(Booth, William)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을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사실은 당신은 귀가 어두워서 그의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2)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하는 음성입니다.
(2)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하는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을 읽으면 추수할 일꾼들의 사명감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보여줍니다. 현대의 비극은 직업인들은 많아도 사명감에 사는 자가 적다는데 있습니다.
직업을 말할 때 조브(job)라고 합니다. 이는 미국인들아 즐겨 쓰는 속어입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한술의 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말도 있습니다. 보케이션(vocation)입니다. 이 말도 직업을 의미하지만 그 근본 뜻은 소명(召命)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일을 한다는 사명과 천직을 의미합니다. 막스 웨버의 말을 빌면 천직이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요,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즉, 천직이란 하나님의 부름으로 성실과 정직과 근면으로 일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자기 직업을 job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전전하거나 정개치고 맙니다. 한술의 밥을 위해 의리도 명에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기의 직업을 vocation으로 받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을 vocation으로 알고 힘쓰면 인생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의무로 생각하면 인생은 벌써 그 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죠지 워싱턴의 어머니 메리 부울은 현숙한 부인이었습니다. 워싱턴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인 마운트 바논으로 갔습니다. 다른 이 같았으면 주택도 깨끗이 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환영행사도 가졌을 법했습니다만, 어머니인 메리는 평소와 같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죠지 정말 잘 왔다 나는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는 참이란다. " 어머니는 빵가루 투성이의 손을 만지면서 분주히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행원들은 크게 놀랐으나 위싱턴 대통령은 더없이 기쁜 듯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어머니는 과자 만드는 솜씨가 참 좋으십니다.
사양 말고 함께 들어가 잡수십시다"
이윽고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위싱턴은 어머니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일일히 직접 일하시면 힘드시니 앞으로는 하인들을 데리시고 어머니는 그것을 감독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대통령인 아들의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폐를 입어서는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으니까 조금이라고 더 일한 수입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작정이다. 만약 네가 끝까지 나에게 일하기를 그만두라고 하면,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 따위는 언제라도 사직하겠다.
" 이 말을 들은 수행원 모두는 그 높은 기품과 정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귀천 간에 그 일이 사명인 줄 알고 충성하는 사람은 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도 없지만 마지못해 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합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추수꾼에게 이 사명감이 없다면 알곡은 어찌되겠습니까?
(3) 때가 절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 때가 절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이 말씀은 지금이 곧 일할 때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이 곧 추수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추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고 말하고 있었습니다(35). 사실로 시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이 말은 옳습니다.
보통 성지의 보리 파종은 10월 중순경에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는 4월 중순에 시작하여 5월에 마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12월 중순 쯤으로 추산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온 들에는 보리가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 때입니다.
마침 그 때 메시야를 만난 것을 전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갔던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푸른 보리 밭 사이를 흰옷 입은 수가성 사람들이 떼 지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저 밭을 보라! 지금 몰려오고 있는 러 사람들을 보아라 저 흰옷 입은 무리들은 추수할 때가 된 알곡들이다" 이는 H. V몰톤(Melton)의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여기에서 "복음의 추수"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추수 때가 임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람들은 곡식을 거두는 일은 미리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해서는 등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예수님은 영적 추수의 절박성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추수할 일꾼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절박한 때에 일꾼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추수꾼이 되겠습니다"면서 나설 분은 없습니까? 하기 성경학교는 좋은 영적 추수 때입니다.
각종 수양회는 좋은 추수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참여함은 물론, 추수하는 좋은 일꾼들이 많이 나와서 귀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보면(마20:1-16), 주님은 온 종일사람을 구하여 일터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제9시와 제12시와 제3시에도 사람을 일터로 보냈습니다. 그때는 어두워지는 시간입니다. 밤이 되면 신랑이 와서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일할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들어갈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리스도께서 일하라고 강권하시는 그 음성에 지체하지 말고 대답해야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은 하오 5시, 이제는 더 기다릴 수도 없고, 게으름 피울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이시기를 놓치면 영영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맡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넉 달이 남았다"고 핑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는 따로 오지 않습니다. 일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일거리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생각지 않은 때에 가 버릴런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일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속을 먹으려하는 자는 껍질을 까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년을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짜는 베가 천국에서 우리가 입을 음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러나 다음 말씀은 더욱 중요 합니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 아멘
(84:7:1)
14.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14.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눅 15:1-7)
누가복음 15장에는 주옥같은 비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1-7), 잃어버린 은전 비유와(8-10),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가 그것입니다(11-32).
어떤 분은 누가복음 15장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 모두가 다 없어진다고 하여도, 이 한 장만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유명한 비유를 세 가지나 말씀하신 동기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 본문 1-2절에 보면, 예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말씀을 들으러 가까이나마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서 예수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원망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들이라고 불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이들 땅의 백성들과의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리새인(Pharisaios)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자들입니다(마12:2 빌3:5). 분리주의자, 배타주의자로 통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 Parsh에서 유래된 것인데, "분리하다. 구별하다. 조각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일체의 금전거래를 삼가 했고, 그들의 증언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으며, 그들과 밀담을 나누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세우는 것도 금지되었고, 자선금의 관리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여행 중 동행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님이 되는 것도, 그들을 영접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상거래도 삼가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들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피인물들과 교제하고 상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기뻐할 리가 없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죄인 중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말하지 아니했고, "죄인이 벌 받아 멸망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구원보다 그들의 멸망을 고소하게 생각하였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보다는 망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교인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길 잃은 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잃은 양인 죄인들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잃은 양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의 돌아옴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고,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육 동물인 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온순한 동물입니다(렘11:19).
둘째는, 공격적인 동물이 아닙니다(사53:7).
셋째는, 지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유리하고 방황 합니다(사53:6,렘50:6). 또한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벧전2:25,마18:12).
넷째는, 자기 방어력이 약합니다(미5:8). 소는 뿔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고, 맹수는 예리한 이발과 발톱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나, 양에게는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그는 목자의 보호함이 없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집을 찾아갈 줄 아는 지각이 있으나, 양은 우리를 찾아갈 수 있는 지각이 없습니다.
양은 본능으로 사는 동물에 불과 합니다. 양은 앞을 내다보는 지각이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풀만 바라보며, 그것을 뜯어먹으며 좇아 가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양은 좌우를 분별할 능력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주의하게 되고,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런즉, 양에게 있어서는 보호가 필요하고(욥30:1), 목자가 있어야 하고(요10:4,27), 양 우리가 있어야 하며(요10:1), 초장과(출3:1), 물과(창29:8-10), 휴식과(시23:2), 때마다 털을 깎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삼상25-2,11). 이와 같은 양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삼하24:17,렘31:10).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요10:2,21:6).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잃은 양이라고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1) 옛날에는 우리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즉, 낙심 중에 있는 앙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2) 우리 안에 있기는 하나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따르지 않고, 방황하는 양을 의미합니다.
3)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즉 길 잃은 양입니다. 곁길로 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렘50:6). 사망의 길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f6:25).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을 말합니다(마7:1-3).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전2-14). 불법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마13:14).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이 같은 길 잃은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살다가 길을 잃었고,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멀리 멀리 도망쳤으며,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뛰쳐나간 양도 있습니다. 세상 향락과 정욕을 따라 헤매다가 길을 잃었으며, 돈 그것이 무엇이 길래 의리도 신의도 팽개치고, 울 밖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의 인도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그 영혼은 파리하게 되었으며(시16:15), 황량한 광야에서 고적하고 쓸쓸하게 헤매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우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그 잃은 양을 찾아주는 목자가 없다면 그는 별수 없이 죽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헤매는 저 많은 길 잃은 양들을 어떻게 할까요? 저 행락 인파속에도 잃은 양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최루탄을 낫고, 보도 불록 조각을 던지는 저 군중들 중에도 잃은 양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집 안에도 그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대양의 고인 물은 그들의 눈물이요, 육대주에 부는 바람은 그들의 한숨입니다. 절규하는 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맙시다.
"눈을 들어 하늘보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에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4).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 양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한 마리 양보다 엄청나게 많고, 더욱 소중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를 더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남은 아흔아홉 마리도 역시 그 같은 한 마리의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잃은 양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을 찾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기억하여야할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찾아야 할 잃은 양은 누구인가? "를 성령의 인도따라, 인도할 대상자로 정합시다.
둘째는,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의 감화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셋째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인도하여 말씀을 듣게 합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성령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합시다.
(3)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5-6).
이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양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 "즐거워"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돌아왔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하면서 기뻐했습니다(눅19:9)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다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습니다(눅15:24).
2)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맨 이유는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요, 양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전설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양에 대한 애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3)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6).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보다 더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성도 여러분 잃은 양을 찾읍시다. 우리 집 안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우리 이웃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면 천국의 큰 기쁨이 됩니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아멘.
(84:10:14)
15. 잃은 은전을 찾자
15. 잃은 은전을 찾자
(눅 15:8-10)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와 잃은 아들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들 세 비유는 각각 독립된 비유라기보다는 하나의 연속된 비유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진 공통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 같이 "잃은 자"와 "찾은바 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이들 종교는 다 같이 사람이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신이신 하나님께서 잃은바 된 인간을 찾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셋째는, 잃어버린바 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15:9) 잃어버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15:22-24,32).
오늘 우리는 그 둘째 비유인 잃은 드라크마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 받도록 하십시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고 말합니다(8).
여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느 여자"로 가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여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신적 지혜일 것이라고 구체화하는 해석들이 있으나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하여간 은전을 잃은 자는 여자입니다. 모든 정황은 그녀의 가난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애지중지 아끼는 은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여인의 슬픔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한 드라크마입니다. 그가 본래 소유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10분지 1에 불과합니다. 드라크마(drac hne)는 헬라의 화페 단위인데, 로마의 데나리온(denarius)에 해당하는 정도로, 노동자의 하루의 임금에 비교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드라크마에 대하여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여인에게 있어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아상태에 헤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넉넉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식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열 드라크마는 은사슬에 열개의 은전을 꿰어 머리 장식으로 혼인한 여인의 표시로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혼반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보배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그 한 닢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다면, 결국은 열 닢 모두를 못 쓰게 된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중대한 손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받게 됩니다.
1) 적은 것에 대한 가치와 존재 의의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18: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마7:14).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사람에 비하여 소수였지만,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그들이었습니다(민14:30). 부패를 막는 소금의 양은 언제나 내용물보다 많지 않습니다.
큰 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초 한 자루에 불과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것은 사울 왕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삼상17:50). 블레셋 대군을 전멸시킨 것은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이었습니다(삼상14:1-l5).
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를 맡아보는 써비스 보이는 귀한 손님 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기대를 걸고 그 손님을 잘 모셨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이 자동차 왕이라고 부르는 포드였기 때문입니다. 써비스 보이는 후한 팁을 기대하면서 정성스럽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자동차 왕 포드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한 푼을 줄 뿐이었습니다.
성이 난 써비스 보이는 "감사 합니다. 그렇지만 이만한 돈은 제게도 있으니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면서 돈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포드는 그 돈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싫으면 그만 두어다. 그러나 너는 언젠가 반드시 이런 동전 한 푼 때문에 울 날이 있으리라" 포드는 그 동전을 받아서 호주머니에도로 넣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그 소년은 장성하여 위대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때 포드에게 받은 교훈으로 분발했다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고, 순간이 거듭하여 해가 됩니다. 성냥개비 한 개가 능히 아방궁을 불태울 수 있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집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은, 절대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2) 그리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드라크마의 의미입니다. 성경 난하 주에 의하면 그것은 "은전의 명칭"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드라크마, 곧 은전을 의미합니다.
은(銀)은 철이나 납처럼 천한 금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광(銀鑛)을 "왕실의 광산"이라 여겼습니다. 히브리말은(keceph) "사모하다. 열망하다. 탐내다"는 어근에서 온 "돈"을 의미합니다. 돈은 귀한 것입니다 돈은 만능입니다. 그것으로 행복 말고는 다 살 수 있고, 천국 말고는 어느 곳에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세계를 향하여 중요한 방송을 하기 위하여 택시를 불러 세운 후 "BBC 방송국까지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멀리는 갈수 없다면서 거절 하였습니다. 처칠 수상은 "왜 못 간다고 하는가?"라면서 따졌더니 "다른 때 같으면 얼마든지 갈수 있습니다만, 한 시간 후면 처칠 수상의 방송을 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거절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처칠 수상은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파운드의 돈을 더 주면서 가자고 했답니다. 못 간다고 하던 기사가 그 돈을 받고 무어라고 한줄 압니까?
"타세요, 아저씨.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부터 벌고 봅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은전에다 비유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은전이 귀한 것처럼 영혼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한 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영혼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은전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보배가 티끌 속에 묻혔습니다. 귀한 보배가 흙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귀한 인간의 영혼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티끌 속에 쳐 박혀 있는 영혼들이 허다합니다. 은전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여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죄악 속에 파묻히고 말면,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무용지물이 되고,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죄의 먼지, 죄의 티끌 속에 버려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지의 티끌, 불신의 티끌, 의심의 티끌, 허영의 티끌, 교만의 티끌, 정욕의 티끌, 죄의 티끌 속에 파묻혀 잃어버림을 당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내야 합니다. 죄의 티끌 속에 파묻히면 쓸모없는 인간이 됩니다. 무가치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냄새나는 인간이 됩니다. 썩어가는 인간이 됩니다.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영원한 지옥 자식이 되고 맙니다. 이들은, 우리의 가족 중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 구원해 내야 합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않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쓰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8).
이 비유에서는 은전을 찾는 여자의 지극한 정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켰습니다. 등불을 켠 후 문 뒤와 어두운 이곳저곳을 뒤졌습니다.
2) 그녀는 "비로 쓸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폈습니다.
3) 그리고 "부지런히"찾았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찾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요 행동입니다.
등불을 켜는 수고와 비로 쓰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열매는 나무를 심는 자만이 따기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정성스런 일꾼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마5:14).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혀줍니다. 빛은 뜨겁게 합니다. 빛은 살균작용을 합니다. 빛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빛은 선행을 의미합니다(마5:15-16)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 47).
둘째는, 성결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먼지나 너wmf한 것이 덮여있으면, 은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방안을 쓴 것처럼, 교회는 깨끗하고 평화롭고 질서정연해야 합니다.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추문은 교회의 부흥을 막습니다. 모처럼 믿어볼까 하고 교회에 나왔다가 싸우는 것 을보고는 머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회개의 역사가 세차게 일어났던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우리의 안과 밖을 깨끗하게 합시다(요15:2)
셋째는, 부지런히 찾읍시다. 샅샅이 뒤지면서 찾읍시다. 부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돈을 찾는 것뿐입니다. 왼손에는 등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방을 쓸었습니다. 눈으로는 두리번거리면서 머리로는 생각하였습니다. 온 정성을 집중하여 찾고 또 찾았습니다.
손, 발, 눈, 머리 그야말로 총동원하여 잃은 보배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실상입니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가 제일 힘썼던 일이 잃은 영혼을 찾는 일이었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이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찾아야 합니다. 계속 찾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찾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찾아야 합니다(딤후 4:2).
미국 다카다스라는 곳에는 넓고 넓은 밀 맡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해 추수 때, 수천의 추수꾼들이 그 넓은 밀 맡에 들어가서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넓어서 몇 날 며칠이 걸려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와서 놀고 있었습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황혼이 되어 일을 마쳤는데, 세 살 되는 어린아이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곳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습니다. 추수꾼 수천 명은 귀가하는 것을 미루고 밀밭 여기저기에 흩어져 찾았습니다. 밤새워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배는 고프고 밤은 어둡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다른 방법으로 찾아봅시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찾아봅시다" 얼마쯤 훑어 나가는데 "여기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잃은 아이를 찾은 것입니다.
그려나 어린 아이는 벌써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추수꾼들은 죽은 아이를 어머니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도 울면서 "여러분 수고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처음부터 손을 잡고 찾자고 제안했더라면, 사랑하는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잃어버린 한 영혼은 은전 한 닢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이 일은 몇 날 혹은 몇 달 힘쓰다가 그만둘 일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15년 동안이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권면하는 중에 기어코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은전을 기어코 찾아 반짝반짝 빛나는 성 어거스틴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신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은전을 찾음은 여인의 기쁨일 뿐 아니라 하늘의 기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갈 죄인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84:10:21)
16.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16.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19-23)
구약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섭리하신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또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요 찬송이며, 그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한 민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 "한 민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 "한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곧 예수십니다(요5:18,10:30,빌2:6). 예수는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모든 역사의 중심 사건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구약 성경은 그의 탄생, 그의 생애, 그의 고난, 그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예언된 대로 고난 그 것이었으나, 그는 위대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사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자,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느냐 혹은 배척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느냐 혹은 영원히 멸망 받느냐, 또는 천국에 가느냐 혹은 지옥에 가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1절 말씀은,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의 첫째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전도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
예수님은 임의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 받아 오셨습니다(요20:21,17:18).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일을 위하여 특정인을 보내신 것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왕에게로 보냈습니다(출3: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기드온을 보냈습니다(삿6:14).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기 위하여 사무엘을 보냈습니다(삼삼15: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선지자를 보냈습니다(렘7:25). 하나님께서는 그 경륜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보냈습니다(창45:5,7,8),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경륜을 위하여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그가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2)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마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23,마9:13) 세례 요한도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막1:4).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막1:15). 예수께서 파송하신 열두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전파 했습니다(막6:12).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행2:38). 위대한 설교가 바울 사도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다 명하사 회개하라"하고 선포했습니다(행17:30). 모두가 회개를 이렇게 외친 것은, 회개가 하늘나라의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자각만은 아닙니다. 죄의 자각이 회개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으나, 죄를 자각하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슬퍼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회개는 눈물 이상의 것입니다. 회개는 선한 삶에 대한 맹세나 결심과도 다릅니다.
입으로는 많이 맹세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생활이 회개한 자의 삶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헬라말 회개(metanoea)의 본래 뜻은, 그릇된 생각이나 관념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나 목표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인 과오에 대하여, 그 생각과 뜻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마11:28).
4)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5)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6)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함이니라"(요6:38-39).
7)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눅4 18-19).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신명을 다하여 이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뜻을 다 수행하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1930).
(2)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남은 일은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남은 일은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어떤 이는 여기 "보낸다"는 말을(apostello) "맡긴다"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임무는 전체 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엡4:ll, 고전12:1-31,마28:18-20).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열 한 제자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립니다. 모든 신자들을 다 망라한 말씀입니다.
예수는 승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전도사업의 계승을 위하여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위임 받은 권위는 동일한 권위입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워 복음을 전했습니다(눅10:1-2).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파송 하였습니다(행13:2-2), 요나는 니느웨로 파송 받았습니다(욘3:2). 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 신자들도 주님이 보낸 자들입니다(행8:4), 빌립 집사도 주님이 보낸 자입니다(행8:5). 아볼로도 보냄 받은 자입니다(행18:24).
그리고 우리들도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우리를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45:5,7,8). 하나님께서 불신 가정에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불신 남편을 위하여기도할 이는 아내된 여러분 외에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불신가정을 위하여 세움 받은 전도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그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다. 깨우치지 아니하여 그가 죄 중에 죽는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하였습니다(겔3:17-18).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는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발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떤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보니 자기가 천국에 와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문을 여시면서 저 밑을 내려다보게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가 내려다보니 거기는 옛날 자기가 살던 세상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소경이었는데 모두가 깊은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저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어서 가서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겠습니다. 저를 빨리 보내주세요"라고 소리치다가 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하겠습니다.
언젠가 켄터키의 루이스 빌에서 믿음 좋은 부인이 한 소년에게 전도했습니다. "너 주일학교에 가보지 않겠니? "라고 말하자 그 소년은 "네.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소년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은 "너 예수 믿지 않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또 "나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부인은 "너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준비해 보지 않겠니? "라고 물었더니"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장성하여 일본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일본에 와서 가가와 도요히꼬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였습니다. 신자가로 가가와는 수천의 동족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유명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고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명감입니다.
믿음 좋은 어머니에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예수를 거절하는 대신 훌륭한 법률가가 되어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학년을 마치기 위하여 학교로 떠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 호주머니 속에 쪽지 하나를 넣어 두었습니다.
후에 그가 기숙사에서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어머니의 서투른 글씨의 쪽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이 진리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결국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서투른 글씨의 쪽지 속에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과 정성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볼티모어 근처에 어떤 기관사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그가 운전하는 기차가 자기 집 앞을 지날 때에는 언제나 그의 어린 딸이 나와서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의 말뚝이 가리워서, 아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그 말뚝을 빼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딸은 하루도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일을 걸르는 일이 없었고, 아빠도 답례를 걸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어린 딸이 울타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직감하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딸은 이미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아빠에게 전하는 쪽지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께 가서 하늘나라 울타리에서 말뚝 하나를 뽑아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그 사이로 아빠가 오실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래요" 어린 딸의 쪽지를 보고 그 아버지는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어린 딸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이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음증거를 위해 보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이 일을 힘써야 합니다.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시카고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남자가 가로등 밑에 기대어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디는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무디를 노려보다가는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무디는 한대 얻어맞았습니다.
깜짝 놀란 무디는 변명했습니다. "기분을 상하셨다면 참으로 미안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을 물었을 뿐입니다. " 그랬더니 그 사나이는 무디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 하는 놈이야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어서 가서 네 일이나 하라"면서 소리를 꽥 질렸습니다.
이 말에 대한 무디의 대답이 무엇이라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실은 이것이 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일이 있은 지 석달 후 추운 겨울 새벽에 누군가가 무디의 집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가보니 가로등 밑에 서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번민해왔다는 것입니다. 지난밤에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무디의 전도한 한마디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4:10:28)
17. 파수꾼의 책임
17. 파수꾼의 책임
(겔3:15-21)
선지자 에스겔은 대제사장 사독의 자손입니다.
그는 B.C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언자적 재능을 부여 받았습니다(3:22-27).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도록 위임된 말씀의 주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다와 에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이방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선지는 본국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었고, 젊은 선지자 에스겔은 배교의 도시 바벨론에 잡혀가 있으면서 그들의 똑같은 운명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에스겔선지는 주로 포로된 자들에게 예언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포로 생활의 고난을 통하여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처음부분(2장-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섯 가지의 사명을 지웁니다.
1) 그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맡깁니다(2:1-10).
2) 그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모르는 고발자가 되게 합니다.
3) 추방자에 대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일하게 합니다.
4) 그에게 파수꾼의 임무를 지웁니다(3:16-21).
5) 충성스런 전령(he, ald)이 되게 합니다(3:22-27).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그 네 번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 "파수꾼"이란 밤에 불침번을 서는 사람이나 재산을 지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보초나 수위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맡과 포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은 보통 추수하는 동안만 배치됩니다.
그들은 더위를 막으려고 초막을 세웠으며, 또한 파수를 잘 보기 위하여 망대를 높이 세웠습니다(왕하17:9,대하20:24,욥기2 7:18). 성읍의 파수꾼은 밤에 적들로부터 성벽을 보호하였으며, 성음의 안전을 책임졌습니다(삼상14:16,삼하18:24,왕하9:17). 파수꾼은 포위공격을 받을 때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렘51:12).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도 허사라"고 하였습니다(시127:1). 이 말씀은 진짜 파수꾼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한 비유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시130:6).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파수꾼들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국가의 임박한 운명을 보았으며, 잠자고 있는 사람들이나 무관심한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위험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렸습니다(호9:8),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파수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사21:6,렘6:17,겔3:17).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렘3:16). 이 사명들은 선지자들의 사명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에스겔선지가 하나님의 사신이었다면(겔1:1,2:1-6,3:1-3), 우리들도 또 하나님의 사신입니다(엡6:20) 그가 또한 파수꾼이었다면, 우리들로 틀림없는 파수꾼입니다(겔3: 17-20,히13:17).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은 파수꾼인 에스겔선지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은 오늘 우리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본문 말씀에서 파수꾼의 책임을 배웁시다
(1)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17).
파수꾼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강권적으로 "임해"왔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그에게 임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그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창15: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했습니다(삼상15:10).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에게 임했습니다(삼상24:1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왕상17:2,8)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은1:1).
이들은 다 그들에게 임해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듣자, 겸비하여 옷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왕하22:11,19). 히스기야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왕하19:1). 다윗은 하나님의 보낸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2-13).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쳤습니다(행2:37).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다 회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변화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행5:20).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시33:6)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골1:5).
그래서 사무엘선지는 사울 왕에게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권했습니다(삼상15:1). 이사야선지도 히스기야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왕하20: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라고 말했습니다(사1:10)
예레미야선지는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권했습니다(행10:1).
이 말씀은, 파수꾼도 들어야 합니다. 선지자도 들어야 합니다. 왕도 들어야 합니다. 백성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들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다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백성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하였습니다(창12:1). 선지자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신34:5),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였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왕상17:16).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2)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의 책임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17).
여기 깨우친다(Zahar)는 말은, 훈계한다는 뜻입니다. 가르치고, 경고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파수꾼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은 영적 파수꾼들입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는 입이 될지언정,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에 대하여 볼 수 있는 눈이 될지언정 장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살아있는 음성을 전하는 나팔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우리가 깨우쳐야 할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의 책임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악인이 대한 경우이고(18-19), 둘째는 의인에 관한 경우입니다(20-21). 악한 자와 의로운 자는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고, 이들에게 경고되는 말씀의 내용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모두는 함께 경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첫째로, 악인에게는 어떻게 경고해야합니까? (18-19).
"어서 그 악한 행위를 계속하지 말고, 죄악에서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는 불신자에게 하는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은 가장 큰 악이요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1) 그가 만일 이 경고를 받고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거한다면, 그는 "정녕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는 그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그가 만일 이 경고를 받고 회개하면, 그는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러나 그가 악을 계속하면 죽을 것이요 회개하면 살 것입니다. 그런즉 회개 없이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고 경고하는 것이 파수꾼인 우리의 사명이요, 할 일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임할 죄악의 무서움을 경고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게 회개하는 자의 축복의 엄청난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즉 파수꾼의 사명은, 생사의 문제요 축복과저주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되고,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멸망 된다는 것입니다.
3) 만일 사역자들이 그들의 책임에 충실하지 않고, 무관심 때문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이렇게 크고 무섭습니다. 파수꾼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 살 사람도 있고, 죽을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깨우쳤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죽었다면 그 피 값은 파수꾼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책임 추궁입니다.
4) 만인 파수꾼들이 최선을 다 했는데도 그 악인이 회개하지 아니하여 죽었다면, 그것은 그 악인의 책임이지 파수꾼의 책임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요컨대 파수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파수꾼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영혼 구원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파수꾼의 특권이 엄청난 것처럼, 책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책임을 다할 때 칭찬이 적지 않은 것처럼, 영혼 구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들의 피 값은 우리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책임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파수꾼은 망을 보는 자들입니다. 파수꾼은 영적인 보초들입니다. 파수꾼은 죄악의 위험수위를 파악하여 경고해야 할 자들입니다.
둘째로, 의인에 대한 파수꾼의 책임은 어떤 것입니까? (20-21).
파수꾼은 의인들에게도 그들의 신앙을 저버리거나 그들의 의에서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대한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도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다.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함으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하였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의인에게도 중요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월리엄 부스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열심 있는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몇 시간 후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국은 너무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불안하고 괴로왔습니다.
그것은 이 좋은 천국에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주께 맡기고 "저희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는 죽었고 사람들은 자기의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이 찬송을 불렸습니다. 사람들은 울고, 기도하고, 친척들은 키쓰까지 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천국에 가 있었습니다. 천국의 즐거움은 일찍이 상상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롭기 한이 없었습니다.
혼자만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자신의 지상 생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싸우고, 속이고, 죄짓고, 추한 모습이 다 보였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괴로워서, 돌아가서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내방자가 그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의 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 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독자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의 소식이 듣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아들을 회개시키지 못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얼마나 전도했습니까? 요즈음은 어떤 지 말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부스는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버린 자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도할 엄두도 내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고, 죽을 수만 있다면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자가 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 죽은 후 예수 믿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충성한 자입니다. 그녀의 자녀들은 다 믿었는데, 그중 하나가 안 믿은 것보고 죽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안 믿은 것,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내방자는 물었습니다. "내 말에게 전도해 보셨습니까? 그 아이는 한 번만 누가 믿자고 권하면 금방 믿을 아이인데····"
부스는 얼굴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기가 천국인가요? 차라리 땅에 돌아가 살고 싶습니다.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
세 번째 내방자가 찾아 왔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섬기다 온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교회, 많지 않은 교인을 붙잡고 섬기다 온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가수였습니다. 개심하여 충성하다가 불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두고 온 교회는 어려움당하는 개척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교회 좀 도와주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부스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는 어려운 교회 돕지 못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알고 있었으나 돕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구무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천국에 산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때,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님을 뵈옵게 된 것입니다. 천군 천사의 엄청난 광경이 털어졌습니다.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거기 주님이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선지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모여 섰습니다.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왕은 부스를 쳐다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님을 이렇게 말씀 하였습니다.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재차 기회를 네게 주노다. 저 많이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고, 네 싸움을 마친 후 이리로 오니다. 그리하면, 나의 승리자들 사이에 네 자리를 주겠고, 너는 내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1. 영혼 구원에 힘쓰지 않으면, 부끄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2.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기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는 일입니다.
그런즉, 파수꾼의 책임을 다합시다. 파수꾼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85:10:6)
18.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18.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막16:14-18)
우리는 지금 악의 세력이 주위를 두르고,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기막힌 세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앞잡이인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멸절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벌벌 떨게 하는 핵무기의 위력은 문명의 흥망을 한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단의 무리는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홍수나 가뭄 등 천재지변은 심심참게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최후 심판의 일대 재난은 가까이에 다가 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바야흐로 절망적인 상황의 전개가 예견되는 때문입니다.
더 더욱 불행한 것은, 이 세대의 유일한 희망인 기독교마저 무서운 배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표방하는 교회마저도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수천수만의 교회가 참다운 복음의 진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증거의 도구가 아니라, 세찬 도전에 대한 방어에 전전긍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것만 같습니다(눅18:8).
복음은 특권의 타이틀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간수하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명을 짊어진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마가복음의 결론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한 제자가 한곳에 모여 음식을 먹을 때에 거기 오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15-16).
여기 보면 믿음과 믿지 않음, 구원과 정죄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늘이 생기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16).
여기,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구별은, 15절의 복음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 ·불신은, 전파되는 복음에 대하여 믿느냐 믿지 않느냐,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는 이러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9).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이 구원과 정죄, 영생과 진노는 전파된 복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 복음(evangelion)은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을 의미하였으나, 후에 보답이라는 의미는 없어지고 "좋은 소식"(good news) 그 자체를 뜻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에 있어서의 gospel이란 단어는 앵글로 색슨어 godspell,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식, 하나님께 관한 이야기"의 현대어형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사49:9,52:7,눅2:10), 혹은 "기쁜 소식"(롬10:15)으로 이해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뜻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복음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의 장사지냄과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을 말합니다.
구원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요3: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베드로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행2:21).
인생은 본래부터 이와 같은 죄악과 불행과 질병과 사망 중에 허덕이며 버림받도록 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입은 피조물이었습니다. 천지와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 입은 인생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다스리면서 에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생은 죄를 짓게 되었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한없이 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불행과 슬픔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4:12). 그런즉 구원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까?
정말로 답답한 것은, 아직도 이 대답을 확실히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 그 분은 쉽게 교회에 나왔습니다. 한동안 열심히 출석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뒤부터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찾아가서 출석을 독려하였더니 그분의 말이 이렇더랍니다.
"구원받으러 갔다가 십 원 빼앗길 뻔 하였습니다.
"옛날에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원(Salvation)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잠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헤아려보십시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요1:12).
2) 그것은 거듭나는 것 곧 중생을 의미합니다.
이는 "위에서 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로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사람은 죄 중에서 죄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즉,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요3:6-7).
3) 중생은 영적 새 생명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생기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새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요10:10).
4) 중생된 자는 하나님의 평강과 위로를 받습니다(요14:27,16:33)
범죄한 인생은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하였습니다(롬8:1).
5) 구원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벧후1:4).
6)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의미합니다(눅10:20,빌4:3). 다시 말하면 천국 시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이 하늘 백성 되었고, 죽을 사람이 영생 얻은 자 되었다는 뜻입니다.
백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무신론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아메리칸 인디안"에게 신앙생활의 허무함을 역설하다가 지친 나머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컨대, 예수가 무슨 일을 당신에게 해주었단 말이요? " 토인은 펄쩍 뛰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날 구원해 주셨단 발입니다!" 백인은 "그래 그게 어했단 말이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토인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잠시 밖으로 나가실까요? 그러면 똑똑히 아시게 될꺼요" 이리하여 그는 백인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마당에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금어 모으더니, 그것으로 동그랗게 원을 만들었습니다. 다음에 그 좁은 원안에다 벌레 한 마리를 잡아다 던져 넣고는 그 북대기에 성냥불을 그어했습니다.
사방에서 불타고 있는 그 한 가운데는 불쌍한 벌레 한마리가 미친 듯이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 했으나, 뜨거운 불길에 고통만 더할 뿐 살아 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 토인이 자기 손을 그 벌레에게 갔다 대니 이 벌레는 결사적으로 타고 올라 왔습니다. 토인은 손등에 붙은 그 벌레를 그대로 옮겨다가 시원한 풀밭으로 튕겨주었습니다.
백인은 이 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토인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며 백인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보시구려. 예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도 꼭 이와 같답니다. 나는 원래 지옥 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꼭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형편에 있는 불쌍한 벌레 같은 나를 불 속에서 건져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신 것이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인 앞에서 잘난 체 하던 백인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이 구원입니다. 또한 이것이 죽어가는 죄인들에게는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듣고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깊이 묻어 두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전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 가서 전도해야 할 것이냐 하는 장소 문제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행1 8). 여기 "온 천하"나 "땅 끝까지"는 같은 의미인데,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야 할 곳은 이렇게 넓고 광활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그 순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전파의 대상을 말해 줍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모든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28:19,눅24:47). 복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만민"입니다. "모든 족속"이 다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명인과 함께 야만인들도 들어야 합니다.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의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였습니다(딤전5:8). 천사는 롯에게 말하기를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하였습니다(창19:12).
셋째는, 복음 전파의 결과를 말해 줍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엄청난 결과입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마25:34,41). 또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축복과 저주입니다. 하늘나라와 지옥입니다. 영생과 영벌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차이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유식자와 무식자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귀인과 천인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는 차미입니다. 신. 불신의 차이입니다 순종,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복음을 받고 안 받는 차이일 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책임입니다. 그러나 믿고 안 믿고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것입니다.
이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간절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려하면서, 복음 전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구령에 관한 다음 몇 가지를 제안 합니다.
1) 모든 신자는 다 예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행1:8). 모든 사람이다 목사나 전도사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이면 누구나 다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하여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3)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하여 그들을 구원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가 구령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겔3:8).
4)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롬10:17,1:18). 씨 뿌리는 농부는 집을 나설 때 먼저 종자를 가지고 가야함과 같습니다.
5) 우리의 간증은 좋은 전도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전후에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행13:3,7:60,16:25 ).
6) 개인 전도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행8:29,16:6-10). 아무쪼록,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85. 10. 20)
19.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19.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왕하7:3-20)
우리는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양심에 가책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는 양심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그 반대로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면서 욕을 하기도 합니다. 요사이는 전에 듣지 못했던 "양심선언(良心宣言)"이니, "양심수(良心囚)"니 하는 말도 더러 듣습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것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에 처할 위험 때문에, 자신의 학설을 취소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었던지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 양심이라는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란 죄를 꾸짖는 인간 내부의 증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보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2:15). 죄악을 깨달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8:9,히10:22)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벧전2:31).
그러나 성경에 표현된 양심의 종류는 허다합니다.
선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딤전1:5,19,히13:18,벧전3:21). 깨끗한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딤전3:9,딤후1:3,히9:14). 또 빛된 양심도 있습니다(잠20 27).
그러나 부정적인 양심의 종류는 더 많습니다. 약한 양심이 있습니다(고전 8:7,12). 더러운 양심도 있습니다(딛1:15). 죽은 양심도 있습니다(렘6:15). 잘못된 양심도 있습니다(요16:2,3). 바리새인들의 그것은 위선자의 양심이라 하였습니다(요19:31). 회개하기 전의 바울의 양심은 타락한 양심입니다(행26:9-11). 벨사살의 그것은 두려워하는 양심입니다(단5:5-6).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문둥이들의 뉘우치는 양심을 봅니다.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하였습니다(8-9).
여기 보면, 네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위(所爲, asah)'는 그들의 소행을 말합니다. 그들이 행한 일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말합니다. 그 소위가 선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선치 못하다'는 말은 히브리말 Ken입니다. 본래의 뜻은 세운다는 의미인데, 상징적인 형용사로서 "정당한, 옳은, 잘된, 참된"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지금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말이 종종 회개와 혼동되기도 합니다만, 회개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네 문둥이들이 고백한 이 양심의 가책을 통하여 우리도 꼭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받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그들이 받고 있는 양심의 가책은 무엇입니까?
(1) 그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1) 그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이라고 하였습니다(9). 그"아름다운 소식"이란 "여기 먹고 살 수 있는 곡식이 무진장하게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사 직전에 있는 사마리아 성민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사마리아 성은 아랍 나라의 벤하닷 왕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아사 직전에 있습니다. 더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마리아 성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하여, 지금 네 문둥이들에게는 무진장한 보화와 양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또 보화를 감추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문둥이들은 사마리아 성민들보다는 더 불행하고 비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별 수 었습니다. 앉아 있어도 죽습니다. 아람나라 군대에게 항복한다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4). 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기를 쓰면서 황혼 때에 살금살금 아람 진으로 기어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거기에 아랍 군대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론가 다 도망쳐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들의 장막에는 엄청난 군수품과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실컷 먹었습니다. 그리고 금은보화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이 장막 저 장막을 다니면서 마음껏 먹고, 있는 대로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이 같은 짓을 계속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둥이들은 이제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이렇게 배부르게 먹고 마셨는데, 지금도 배고파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민들 생각이 난 것입니다. 어서 그들에게 가서 "여기 먹을 것이 있습니다"라고 전해 주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민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문둥이는 사마리아 성민들의 생사에 관한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난 것만 생각하면서, 좋아할 뿐입니다. 아사 직전에 있는 사마리아 성민들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
"양심은 죄의 고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아는 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신(神)이요, 다른 하나는 양심이다. "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전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다면서, 양심의 가책을 맛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네 문둥이들처럼 제 정신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처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2)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성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기근이 온 성을 휩싸고 있었습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4분 1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고 하였습니다(왕하6:25).
나귀는 더러운 동물입니다. 그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귀머리는 먹지 못할 부분입니다. 그것마저도 80세겔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합분태는 비둘기 똥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극한 상황에서는 죽지 않기 위하여 먹어야 했던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죽지 못해 사는 극히 참혹한 식물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아사 직전의 처절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의 비참함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성경을 보면, 얼마나 기근이 심했던지 견디다 못한 부모들이 자식을 삶아 먹은 이야기가 나옵니다(왕하6:26-30). 차마, 눈을 뜨고 읽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랍 진 중에 들어간 네 문둥이들은 어찌되었습니까? 그들 앞에는 산해진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껏 먹고 마셨습니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는 문둥이들의 행동을 눈여겨보면 재미있습니다.
"그 문둥이들이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8).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는, 그것도 한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장막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는,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 장막 저 장막을 드나들면서 금은보화를 훔쳐서 감추었습니다.
얼마 전까지의 그 문둥이들의 소원은 허기진 창자를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자를 채우고 나니, 금은보화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가지고 가서 감춘 것입니다. 그들은 한동안 훔쳐다가 감추는 일만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것을 훔쳐다가 감출 것은 없습니까?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6:8).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함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등따시고 배부르면 배은망덕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랍 진 중에 있는 네 문둥이들도 자기들의 배가 부르니, 성 중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자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훔치고 숨기고 하다가 보니 사마리아 성의 비참한 정경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터이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9).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 이 '복음'은 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벌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자들의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겔3:18).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심각하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3) 그것은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3) 그것은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지금 문둥이들에게는 덕을 것이 있습니다. 옷이 있습니다. 금은보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배불러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많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들은 살 길을 찾아갔고,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얻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먼저 발견한 것뿐입니다. 가진 자는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누린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남달리 많이 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는, 가난하여 고생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 때, 그 나라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나라가 되었고, 마귀의 소굴이 되어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무서운 사란의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가 무려 40,0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일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화란, 스웨덴 등이 파견한 선교사가 20,000여명인데, 이들 나라들도 선진문명국가들로서 잘 사는 나라입니다.
선교하는 나라는 복을 받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나 가정은 분명히 복을 받습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오늘 날의 신자들이 이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분명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였습니다(고전9:16). 최권능 목사님은 평양거리에서 '예수 천당'소리가 그치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20:35),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서 레닌이 공산주의 혁명의 기치를 들고 일어셨을 때, 그 혁명의 지지자는 불과 40,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상에는 10억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지 2,000년이나 되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는 아직 10억도 복음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유명한 칼럼이스트인 월터 리프먼(Lippmann)은, 현대사를 분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두 종류의 인간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헌신한 예수의 제자요,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제자이다"
불란서의 공산주의 이론가. 로져 개로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결국 세계에는 두 개의 세력이 남을 것이다. 하나는 진짜 공산주의자요,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제자이다"
모스크바의 어떤 대학생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비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지만, 우리 공산당은 기독교가 2,000년 동안에 해놓은 일을 우리는 불과 50년 동안에 그보다 더 큰일을 해놓았다"
언젠가 후르시초프는 말하기를 "공산주의자는 무슨 일에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인들을 향하여 "여러분의 손자들 대에 가서는 공산주의 정부 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얼마나 위협적인 말입니까? 그는 지금 우리가 할 말을 다 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방관자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 책임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축복을 모두가 다 같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5:10:27)
20. 주는 자자 복이 있다
20. 주는 자자 복이 있다
(행 20:31-35)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 받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평생소원인 로마 전도를 위하여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여정에 급한 바울은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에베소 교회를 방문할 시간이 없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이 설교 말씀을 읽는다면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도 35절 말씀을 중심으로, "주는 자는 복이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인용으로 밝혀진 말씀입니다. 오늘날처럼 세상이 각박한 때에 더욱 빛을 말하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그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주고받는 일은 동시에 축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받는 편에만 관심이 크고, 주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Athenaeus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자는 어리석고 받는 자는 행운아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습니다. 도와주고 도움을 받습니다. 있는 것을 주고 없는 것을 받습니다. 남는 것을 주고 모자라는 것을 받습니다.
이 주고받는 일이 단절 된다면 지구는 당장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중동이 석유공급을 중단하다면 온 세계는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을 것입니다. 만일 미국이 곡물 수출을 중단한다면 배고파 죽을 자가 비단 방글라데시뿐이겠습니까?
"옳소"의 함성과 함께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똑같이 중요 합니다. 이 조화의 단절은 비극입니다. 받고 주는 것은 동시에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많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그것은 서로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5) 그것은 우리가 지난 때에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갚는 것은 축복입니다. 생각 할수록 우리에게는 받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부정모혈을 받았습니다. 양육과 사랑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웃과 사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국가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받은 것이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값없이 물과 공기와 태양빛과 주거환경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받지 않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지식, 재산, 지위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는 다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선인들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울면서도 거울을 쳐다본다"고 합니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것은 비단 여자들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든 적성들이 이정도의 고운 얼굴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재너가 종두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에 더러는 흉한 곰보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아크라이트 덕분입니다. 그가 무엇인가 연구하다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그의 부인은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혼해 가버렸습니다. 그는 인생의 파산자였습니다. 그는 아내 없는 쓸쓸함을 이겨야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찬바람 이는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기어코 방직기계를 발명하여 오늘 우리에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뢴트겐은 X-Ray를 주고 갔습니다. 에디슨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고 귀한 것을 주고 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받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자가 그 은혜를 갚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준다"는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기로 합시다.
(2) 이제 "준다"는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기로 합시다.
여기 "주다"(didomi)란 말은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단순히 구제금을 내는 정도의 좁은 의미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내는 자선금이나 기부금은 피차에 유익되지 않습니다. 마지못하여 내는 자선금은 오히려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바치는 헌금이라면 그것은 정성스런 헌금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 준다는 말은 거룩한 감화의 시여를 의미합니다. 자기희생이 전제된 시여를 의미합니다. 정성스럽게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떤 이는 고기국 대신 된장국을 먹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일반미 대신 정부미를 먹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 때문에 새 차 대신 헌 차를 탑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위하여 새옷 대신 헌옷을 입습니다. 다른이는 택시 대신 버스를 탑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 더 많이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의미도 있습니다.
"주다"는 말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즉 우리의 언행심사 기거동작은 중요 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무언의 전도자입니다 변화 받은 성도는 세상의 몇이요, 소금이 됩니다. 그러나 이름만의 성도는 거치는 돌이 됩니다. 거짓된 신자는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어느 곳에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좋은 것을 알고,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어느 날 깨끗한 새 신을 사서 신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려했을 때 새 신이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형편없는 헌신이 한 켤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다음 주일날 잘못 신고 간 사람이 가져 왔으려니 기대하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새 신은 몇 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너무나 기대가 어긋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정직하고 진실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양심 나쁜 사람도 있구나"생각하면서 교회출석을 그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장로님이 담임목사 욕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사님들까지도 주일헌금을 안하니 헌금합시다. 하고 강조했더니, 헌금 강조한다면서 신앙생활을 그만둔 초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경우는, 먼저 믿는 사람들이 나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쁜 것을 주었습니다.
또 "준다"는 말은 무엇인가 남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게는 위대한 이름과 업적을 남가고, 작게는 발자국을 남깁니다. 후세 사람들은 선인들이 무엇을 남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 합니다. 그런즉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무엇을 주고 갔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람은 매일매일 무엇인가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적부를 남깁니다. 출석부를 남깁니다. 성적부를 남깁니다. 회사의 사원들도 매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사무소에 가면 주민등록표가 있습니다. 상점에 가면 외상 장부가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자 명단이 있고, 동창들끼리 사이에는 동창회원 명단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무엇인가 주고받으며 사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무엇인가 뿌렸다가는 거두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갈6:7).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둡니다(욥4:8). 방종자가 회개하였다 할지라도, 그 상처는 남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주는 것입니다.
남기는 것도 주는 것이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많은 것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우리가 이 세상에 주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에 주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우리에게 주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순종과 죄입니다. 가인도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는 형식적인 예배와 첫 살인자라는 이름입니다. 가롯 유다도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저주받을 배은망덕자란 이름입니다.
물론, 우리가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길 수 있는 것, 주고 갈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납니다.
교육사업, 자선사업, 사회사업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사업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귀한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많은 유산을 남기고 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기업가 굴드(Jay Couldj)와 같은 이는, 가난해서 자란 것이 한이 되어서였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는 금을 매점매석하기도 하였고, 부정주식 발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돈이 4천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돈 때문에 친구 네 명을 자살케 하였고, 이 회사 저 회사를 끌어들여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자선사업을 위하여 돈뭉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 많은 돈만 모아 놓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굴드와는 달리지라드(Stephen Girad)같은 이는, 자녀도 없었고 아내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낙은 없었으나 평생소원은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고아원을 세우고 싶다" 이것이 그의 생의 전부요 낙이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때에 평생을 들여 200만 불을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펜실바니아 주에 땅을 사놓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이 돈으로 두 개의 고아원을 세워라 하나는 나를 키워준 뉴올리언즈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살던 펜실바니아에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 놓은 산이, 오늘에 와서는 석탄과 철이 나는 광산이 되어, 세계에서 제일 큰 고아원은 몇 천만 불의 재산이 되어, 아무리 사업을 확충해도 돈이 모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같은 돈이라 할지라도 굴드가 물려준 돈과 지라드가 물려준 돈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죽이고 간 돈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리고 간 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이나 사상을 주고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다 사업가는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다 돈을 주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다른 사상은 가질 수 있습니다 몽테스큐(Montesquie)는 법의 정신을 남기고 갔습니다. 모세는 조국애에 대한 큰 경륜을 남기고 갔습니다.
례오날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명화를 남기고 갔습니다. 헨델(G. Handel)은 명곡을 남기고 갔습니다. 스데반은 순교의 모범을 남기고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남기고 갔습니다.
지금부터 4반세기 전, 영국의 어두컴컴한 뒷골목에는 키가 작고 여위고 병골인 학자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별로 인기를 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크고 위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사상이란 "인간은 매우 가치 있는 존재이다.
또 개인이란 국가보다도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그의 이 사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태리,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모든 나라는 국가지상주의였기 때문에 "개인이 국가보다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자는 뒷골목 집에 틀어 박혀 가난과 싸우면서도 그의 사상을 책으로 출판 하였습니다. 이분이 누군지 여러분은 대략 짐작할 것입니다. 그이가 바로 죤 로크(John Locke)입니다. 그가 쓴 책은 "인간 오성론(人間悟性論, Essay on Human Understanding)"입니다.
그 후 이 책은 프랑스로 건너가서 룻소가 읽었습니다. 또 몽테스큐가 읽었습니다. 미라보가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이 프랑스 전국에 퍼졌습니다. 마침내 1790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2,800만 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전 유럽이 흔들린 것입니다
이 영향으로부터 미합중국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프랑스 공화국이 생겨났습니다. 그로부터 헝가리의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태리가 독립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가 남기고 간 그의 사상은 지금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1704년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사상은 오늘 우리 중에 살아 있습니다. 그는 몸도 약하고 지위도 없었지만, 실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정말 아름답고 귀한 것을 남겨 주고 간 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주고 간 자들도 있습니다.
사업도 줄 것이 없고, 재산도 남길 것이 없고, 사상도 정신도 없다면, 우리의 몸을 주고 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 "너희 지체를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지금부터 15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서 낮 예배 때 선교 사업을 위하여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목사님의 설교는 간절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개한 곳입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하여 세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가는 길입니다.
2)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습니다.
3) 간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정성스럽게 선교헌금을 바쳤습니다. 맨 뒤에 서 있던 어린아이는 헌금궤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년을 꾸짖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바칠 돈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아프리카를 위하여 몽땅 바치겠습니다. "
목사는 눈물 흘리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저는 리빙스톤입니다" "지금 몇 살이냐? " "열두 살입니다" 그가 바로 "검은 대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리빙스톤입니다. 그는 약속대로 아프리카를 위하여 몸을 바친 후 죽은 유해로 고국에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교회당 묘지에 안장된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예수님,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전체시여, 나는 다시 한 번 내 생애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이런 분들을 성공자라 합니다. 위대한 자라도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옮은 말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그러나 나의 말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큰일입니다. 정신을 주고 가는 것은 더 큰일입니다. 몸을 바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실하고 더 축복스런 것은, 믿음을 전해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였고(마3:1-2), 예수님께서도 공사역의 첫 음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4:17).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하면 재산도, 사업도, 사상도, 헌신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생명과 바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요 멸망입니다.
돈이 귀하지만 생명보다는 못합니다. 사업이 귀하지만 구원에 비교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 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입니다. 교회가 설립된 목적은 바로 이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해 무리를 해가면서 신가에, 곡성에, 무안에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성탄은 흐뭇한 성탄이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헌신과 선교를 다짐하는 결의가 새롭기를 당부합니다.
(85:12:22)
21. 우리 교회의 사명
21. 우리 교회의 사명
(요1:35-42)
우리 은광교회는 1947년 3월 10일 누문교회를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교회설립 39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연혁이 말하는 우리 교회의 처음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합니다.
우리 교회의 첫 예배는 개인의 가정 방을 빌려드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칠균 집사의 사가에서 박승문 장로님을 중심한 몇몇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때로부터 도청 관사 1동을 구입하여 첫 예배당으로 사용하기까지에는 1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그곳 누문동 185번지로부터 오늘 이 자리인 누문동 166번지로 옮겨오기까지는 또 20년이란 지루한 기간이 지나야 했고, 또 다른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 대지 770평, 연건평 670평의 큰 예배당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 할수록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첫 예배를 드리던 10여명 안팎의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교회는 많은 식구를 거느린 대 교회로 자랐습니다. 생각해보면 39년 전 몇몇 사람이 조그마한 방에서 시작한 그 교회가 오늘 호남에서 우수한 대 교회로 성장한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겨자씨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자리에 깃들이니라"(마13:32).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은광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온 교회성도들의 정성어린 섬김으로 대 교회로 성장하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교회설립 40주년을 앞두고 온 교회가 다짐하고 새롭게 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은광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 우리 은광 교회는 그 사명을 지금껏 잘 감당해 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교회설립 39주년에 즈음하여,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우리 교회가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보는 것이 유익한 일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은 최초로 설립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상 첫 교회를 설립한 설립 멤버들의 활동상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첫 교회의 설립과정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영은으로 충만하게 입혀주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줍니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기초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최초의 선지자가 사무엘이었다면,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요한입니다. 최초의 선지자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소개했다면(삼상 10장),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소개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참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요1:27).
그는 또 말하기를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3:30). 이렇게 말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9).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으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증거는 허공을 치는 것 같았고 이렇다 할 결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낙심하지 않고 증거하고 또 증거하였습니다. 몇날 며칠이고 그는 광야에 나가서 외치고 외쳤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얼마 후에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37).
"듣고" "좇는"것은 신앙의 예비적 행동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10:17). 또 듣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10:14). 그런즉 우리는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여기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따른 "두 제자"는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최초의 제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설립하신 첫 교회의 설립 멤버들입니다 그들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믿은 자들입니다.
여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어린양입니다. 그는 겸손한 어린양입니다. 그는 어린 아이 일지라도, 아무 두려움 없이 목을 껴안는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순수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움을 지닌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 많고 더러운 세상에 살았으나 그는 거룩했고 깨끗하였으며, 악의가 없었으며, 죄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롭고 인자하신 구세주였습니다.
그는 원수들에게도 온화했으며, 그를 찾는 자들에게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안전한 도피성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요한과 안드레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믿고 따른 최초의 교인이자 두 제자였습니다.
지상에 있어서 첫 교회는 이들을 통하여 설립되었고, 그들은 자랑스럽게도 첫 교회의 설립멤버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교회설립의 기본요건입니다. 그런즉 예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는 곧 교회의 설립자이자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한 것입니다(마16:16-18).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최초의 교회도 이 예수를 기초로 하여 세워졌고, 우리 은광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우리 교회의 기초입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예수의 교회입니다. 예수만 믿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위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높이는 교회입니다. 예수만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오직 예수로만 사는 교회입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힘쓸 일이 무엇이냐를 보여 줍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힘쓸 일이 무엇이냐를 보여 줍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10시까지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예수께서 계셨던 곳은 화려한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곳은 아마 어떤 어둠침침한 동굴이었거나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집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두 제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구주이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초라한 숙소를 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흑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집에 갔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거기서 예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참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보배는 왕왕 허술한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사실로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었고 풍채도 없없습니다(사53:2).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세로 깃들일 곳이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마8:20) 그래서 그는 멸시를 받았고,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긴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사53:4).
그러나 요한과 안드레는 그 예수가 참 메시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했습니다(41). 이 메시야는 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자입니다. 이스라엘을 압박에서 해방시키시고, 천년왕국의 주가 되어 세상을 다스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유대역사 4,000년대의 대 발견이었습니다. 정말로 엄청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기형제 시몬에게 찾아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찻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41).
안드레는 먼저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여기 "먼저"라는 말이 성경에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첫째라는 의미의 Proton입니다(first) 다른 하나는, 이른 아침이라는 Proi라는 말입니다(early in the morning). 어느 것이든지 의미는 통합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보다 더 우선 할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우선적인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보다 더 앞세워야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교인인 안드레의 언행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오순절 이후에 탄생된 초대교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도는 교회사업의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설도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목사도 이름 있는 목사가 아닙니다. 교인들 중에도 내로라하는 이 별로 없습니다. 혹 오늘 우리 중에 처음 오신이가 계신다면, 이런 것만 보지마시고 우리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을 꼭 만나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가시기 바랍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만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은광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쓸 일은 이 일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이름은 없어도 예수님 전도에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교회가 됩시다. 빛나는 예배당은 못 갖었어도 예수 열심히 전하는 교회가 됩시다. 교회가 할 일 중에 이일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를 암시해 줍니다.
(3)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를 암시해 줍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라고 하였습니다(42).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구원받은 성도의 할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만 값진 일입니다. 예수교회의 첫 설립 멤버중의 하나인 안드레는 이 일을 힘쓴 자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데리고 왔었습니다(요6:89). 이 일 때문에 벳세다 들녘은 얼마나 풍성해졌습니까?
한 번은 또 헬라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해 왔습니다(요12:22),
오늘 우리 본문에는 시몬을 데리고 왔습니다(42).
그는 데리고 갈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항상 두리번거리면서 찾은 것 같습니다 그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1) 그는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찾아 간 사람입니다. 전도는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죄인 찾아 세상에 오셨습니다.
2) 그는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구주를 만났다"라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기다리던 그 분을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3) 안드레는 시몬에게 메시야이신 예수를 증거하다가 말문이 막히자 "그럴 것이 아니라 가보자"라면서 "예수께로 데리고"왔습니다. 여기 "데리고 온다"는 말은 "인도해 낸다. 데리고 나간다. 이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포함된 의미입니다. 적극성이 포함된 말입니다.
열성과 간절성이 포함된 말입니다. 그는 시몬을 끌다시피 밀치다시피 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나중에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외칠 때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만큼이나 위대하지 못했으나, 그는 위대한 베드로를 인도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보람되고 장한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 주위에서 베드로 같은 사람을 찾읍시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입니다. 힘쓰는 자는 이를 것이요, 땀 흘리는 자에게는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6:3:16)
22. 하나님의 전도 방법
22. 하나님의 전도 방법
(고전1:18-29)
위대한 전도자 바울사도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엄히 명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바울사도는 복음을 열심히 전파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잘 받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4).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힘써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때는 힘쓰다가도 쉬 힘을 잃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동안 몇 가지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있습니다.
1) 전도하는 것이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전도는 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3) 전도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하여 잘못 알고 있으며, 믿지 않으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같이 믿기 어려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격할 때가 많습니다. 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전도의 어려움은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찾지 않으실까 하는 아쉬움과,
2) 다른 하나는 천사에게 복음전파의 책임을 맡겼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 사람들의 통상관념이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전도는 지혜로운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 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고 있는 듯 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6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구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갈3:26-29).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잡은 자와 잡힌 자, 가해자와 피해자, 의인과 죄인, 유식자와 무식자, 권세자와 무력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우는 자, 피해자, 억울한 자, 의지 없는 자, 병든 자,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복음의 문은 더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의 대상을 이렇게 밝혀줍니다.
1) "이방인,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불우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4:15-16).
2)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눅4:18-19).
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마11:28).
4) "술을 즐기는 자와 세리와 죄인"(마11:19)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2:17) 또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도 하였습니다(마19: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시며, 교만한 자에게는 베푸신 은혜마저도 거두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미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죄인의식을 가진 겸손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 중요한 특징입니다.
유대나라에서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주로 병자, 귀신들린 자, 세리, 창녀, 죄인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자들, 유대귀족들에게 압박받는 서민층 중에서 많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보더라도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멸시받는 세리 등 이름 없는 직업인들입니다.
그러하다 해도 이것 때문에 복음이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습니다.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들에게나,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기독교가 말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하였습니다(22-23).
십자가의 도가 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까?
1) 유대인들은 십자가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신21:23).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2) 다른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거짓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A.D 45년에 나타났던 드다나, A. D 54년에 애굽으서 왔던 자칭 선지자의 유혹은 유대인들의 구미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사기꾼들이 말하는 엄청난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인기를 끌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능자요 섬기는 자요 억울해도 말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가 구세주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무능력한 패배자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1) 십자가는 극악한 죄수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같이 무시무시한 형구에서 구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지혜와 철학과 웅변과 변론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교양 없는 전도자들의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한 제자들의 전도는 그들의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과 경멸의 상대에 불과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미련한 처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요 승리의 표상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증거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전해야 합니다. 전도할 줄 모른다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자체로서 충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해진 복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미련하다고 하여 복음자체마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무식하다 하여 복음마저 천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린아이라 하여 복음마저 멸시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신다"(27-28).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비록 미련하고 천하고 약하고 가난한자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약함을 전하지 않고 복음의 강함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입원한 병자가 불신의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빠, 지옥가면 안돼요"라고 하면서 붙잡는 아이 때문에 구원받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고민하는 일 때문에 자살하려고 기웃거리다가, 다리 밑에서 찬송하는 거지 가족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련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질그릇 속에는 보화가 담겨있듯이 우리는 미천해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하여, 둔한 우리 입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미련한 사람들이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지만,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부르사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으시고, 미련한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수단인 우리의 약함 때문에, 복음자체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십것으로 보일런지 모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빈부귀천 남여노유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치중하는 듯 보입니다. 또 복음은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미련한 인간들을 통하여 전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비록 이방법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85:10:26)
23. 예수님의 제자들
23. 예수님의 제자들
(막3:13-19)
독일제국의 초대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다음의 세 마디 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 옳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힘써 일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출20:9,전9:10).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도 말합니다(살후3:10). 왜냐하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열심히 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츄우크는 말하기를 "성공의 지름길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언제 시작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셋째는, 그 일을 어디서 하느냐는 장소문제입니다.
넷째는, 그 일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적당한 때에 착수하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갈4:4) 하나님께서는 제상에 복음전파의 준비가 다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복음전파를 위한 준비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준비입니다.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 의해 온 세계는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곳곳마다 로마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고 세계는 한 이웃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는 복음이 나타남에 있어서 공헌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1) 세계의 평화였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모든 나라는 쇄국주의로 문들을 굳게 닫고 있었고 한 세기 후였다면 야만문화와 싸워야 했습니다.
2) 교통이 편리한 때였습니다.
로마의 군용도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편리하였습니다.
3) 언어의 통일이었습니다.
온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언어의 장벽은 미리 무너져 있었습니다.
둘째는, 경제적인 준비입니다.
전쟁의 여파와 헤롯대왕의 사치와 과중한 세금과 종교적인 부담금과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을 때, 갈릴리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셋째는, 도덕적인 준비입니다.
온 세계는 밝고 타락한 시대에 처해 있었습니다.
넷째는, 종교적인 준비입니다.
로마의 신들은 다 낡고 죽어 있었으며 가이사 황제를 신으로 섬기게 하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공허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충족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조금도 이르거나 늦지 않은 때에 그는 오신 것입니다.
그는 오셔서 갈릴리에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였습니다(막1:14). 예수께서는 천국복음전파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갈릴리는 예수께서 자라난 곳입니다.
그는 그곳 회당에서 예배하였고, 그곳 목공소에서 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배우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곳이 잘 아는 지방인 때문일 것입니다.
2) 또 그곳 갈릴리는 가장 인구가 많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많은 청중을 모을 수 있는 곳으로, 당시에 갈릴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한때 팔레스틴의 군정장관을 지낸 오세퍼스에 의하면, 갈릴리에는 작은 도시와 마을이 204곳이나 있었는데 인구가 15,000명 정도씩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 계산대로라면 그곳에는 적어도 3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3) 또한 갈릴리 사람들의 성격과 기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진취성이 있었고,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사상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혁신을 좋아하고, 충동적인무사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은, 새로운 종교 이해에 있어서 갈릴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지상에서 제일 먼저 복음을 들은 축복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도민들은 오만한 유대도민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빌립은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의 기록한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요1:45).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리라"(요7:41,52).
이것이 당시의 유대인의 관념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멸시를 받은 것은 무식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멋없는 사투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우고 천대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노라 하는 유대도를 찾아가지 않으시고, 그늘진 사람들이 우굴거리며 사는 갈릴리를 찾아와 거기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서 전도와 이적의 태반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를 천대했어도, 하나님은 그 땅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3).
오늘 우리 중에 가난하여 삶에 지치고 시달리며, 가난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는 분이 있다면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명문거족과 오만한 유대도민들보다는, 가난하고 고단한 갈릴리도민을 찾은 것을 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의 구원사역을 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신 곳은 갈릴리에서였습니다. 주님은 공생에 3년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가르쳤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였습니다.
길지 않은 공생애 3년은 쉬 지나갔습니다. 낮과 밤이 오고갔고, 춘하추동 시절 따라 때도 바뀌었습니다. 어떤 때는 산위에서 어떤 때는 바닷가에서, 어떤 때는 집안에서, 어떤 때는 들녘에서, 장소도 바뀌었습니다.
접촉한 인물들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유식자도 만나고 무식자도 만났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만나고 병자도 만났습니다. 어른도 만나고 아이도 만났습니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났습니다. 부자도 만나고 가난한 자도 만났습니다. 유대인도 만나고 사마리아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1) 때와 장소와 상대하는 사람에 관계없이 항상 천국복음을 전파했습니다.
2)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나, 그가 뽑으신 12제자는 항상 예수의 곁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안드레,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 이 열두 사람은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 그들은 예수께서 가신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녔습니다.
2) 또한 그들도 주님이 전하신 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14,16). 예수에게 있어서 12제자는 너무나 귀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통하여 교훈을 받기로 합시다.
(1)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세우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14,16).
마태는 "그 열두제자를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10:1,11:1).
예수님의 이 열두제자의 선택은, 그의 공생에의 중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공생에 3년은, 열두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시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들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패 12인이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수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합한 7을 좋아하고, 또 그것을 곱한 12를 좋아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면류관에 붙은 별도 열둘이고, 천상 예루살렘의 주초도 열둘이며, 하늘나라의 문도 열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구약 교회의 시작이었고, 열두 제자는 신약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숫자를 합한 24장로들은 영광 중에 있는 전체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봅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선교활동의 계속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운동마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죽어도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자기 사람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제자들은 남아 있어서 예수가 전한 복음을 계속 전파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 선교활동의 계속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운 것입니다.
2) 그의 복음전파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몸입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하는 곳도 많았고 가야할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일도 태산같이 많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음성은 한정된 사람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고성능 확성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라디오 신문 TV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떤 소식을 전하려면 사람을 시켜서 전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친피 가실 수 없는 곳에 제자들을 파견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줬고, 자신이 직접 가서 전할 수 없는 곳에 자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로만 끝났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어찌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지옥자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복음을 그 제자들이 이어받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해주어서, 한국 땅 이곳까지 전파되어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한 복음 받아 믿고 구원 얻은 것입니다.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잘사는 나라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은데, 멸시받고, 천대받고 눈물 흘리며 한숨 쉬는 우리가 구원받게 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즉 이 복음은 우리도 대대로 전하고, 멀리멀리 퍼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월터 월슨 박사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곳에 청년 한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깡패였습니다. 그는 당구장과 술집에서 살았습니다. 욕도 잘하고 주먹도 무서웠습니다. 어떤 분이 그 무서운 깡패 청년에게 전도하여 부흥집회에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그 집회에 시간마다 참석하는 중에 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당에서 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침대머리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지난날 지었던 모든 죄를 하나하나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죄 사함 받은 감격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사방은 캄캄하고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옆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깜짝 놀란 주인이 나와서 "무슨 일인가? "고 물었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악한 놈을 구원하여 천국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
그는 또 옆집으로 뛰어갔습니다. 가서는 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주인은 눈을 부비면서 나왔습니다. "이 밤에 웬일입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말갛게 씻어주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이 감격스런 이야기를 이웃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날이 밝아오는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또 길 건너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이집 저집 다니면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밝아오는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면서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증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구원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은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대한 의문부호여서는 안 되고, 감탄부호여야 한다! "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이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전할 사람은 이 제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어떤 자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떤 자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열두제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1) 오늘 우리 본문에는 열두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개성을 가진 자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마10:4,막3:18). 열심 당원은 이른바 극우파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하여서는 살인 방화 암살까지도 서슴지 않겠다고 맹세한 철저한 국수주의자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제자들 중에는 세리 마태가 있습니다. 그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 규탄 받았을 법 합니다.
민족주의자 시몬과 매국노 세리마태는 서로 조화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정력가요 활동가입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는 칭찬도 많이 듣고 책망 또한 받은 자입니다. 그는 죽기까지 예수 따르겠다고 장담도 했지만 또한 예수 부인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담대한 성품인가하면, 계집 아이 앞에서도 쩔쩔매는 겁쟁이입니다.
그가 어떻게 명상적이요 사색의 사람이며 기도의 용장인 요한과 함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안드레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사교성이 있었는지 몇 번이고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어찌 의심 잘하고 찬찬한 성격의 소유자인 도마와 함께 일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예수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각이한 성격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된 후부터 아무도 자기를 주장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두는 다 예수중심이었지 자기중심인 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서로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서로 존경하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용납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참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 중에 험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비협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원망 불평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사로운 일 때문에 개인 행동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서로 입장이 다른 분들을 이해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2) 우리 본문은 또 말하기를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제자로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13).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님께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요한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마태도 있어야 하고, 야고보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마태도 있어야 하고, 시몬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안드레도 도마도 다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원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본문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하였습니다(13).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일군들을 뽑음에 있어서 아무나 세우지 안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제자로 뽑힘 받은 기준은 학력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신장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었습니다. 유력자도 아니고 자원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기준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자기가 원하는 자를 뽑아 제자로 세웠습니다.
그런즉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1:5).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하였습니다(엡2:8).
만일 구원의 조건이 선행이라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구원의 조건이 돈이라면 구원받은 자는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받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원하는 자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제자된 것을 감사합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상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자들을 제자로 삼았으나, 그의 제자로 선택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없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마10:37).
둘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마16:2:l).
셋째는, 주의 제자들은 말씀 안에 거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요8:31).
넷째는, 제자들은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요15:8).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우리도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예수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많은 열매를 맺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무슨 목적 때문에 제자를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3) 예수님은 무슨 목적 때문에 제자를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라 하심이니라"(14,15)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14).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째 목적입니다. 예수는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피곤했습니다. 외로왔습니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경원했고 기피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친형제들마저도 이해하려 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8:20,눅9:58).
군중들은 모였다가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왔다가는 떠나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때 날마다 함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은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니라"(눅22:28). 이것이 동고동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신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섬김을 받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고,
셋째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면서 그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시고, 그 음성 듣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네 얼굴 보게 하라" "나로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아2:14).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주시기 때문입니다(마1:23)
친구도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부모도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부부도 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 20).
믿으시고 힘 있게 살아갑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더라"(15).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둘째 목적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본래 그리스도의 권능이었습니다(막1:26,3:12). 그런데 그 권능을 이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이적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그들의 이름을 높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들의 자랑이 되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복음전도에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남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목소리가 고운 사람은 찬송을 불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축구선수는 골인 시킬 때마다 감사 기도함으로 관중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맞을 때 하나님을 전할수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홈런을 친 야구선수가 기도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재물을 사용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남다른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에게 한말은 뜻이 있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4:24). "이때"가 지나가기 전에 복음전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을 전도자로 파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하였습니다(14).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시켜 보내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여기 "보낸다"는 동사가(apostello) "사도"란 명사의 어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apostolos). 우리는 사도를 "그리스도가 보낸 자"로 해석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도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최대의 목적이요 제자들을 선택하신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꼭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셨고, 그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16:15) 또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과연 예수의 제자들은 주가 말씀하신대로 주님께 배운 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전파하기위하여 무수한 고난과 박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통치자나 관원들 앞에서도 무서워하거나 비굴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공공장소에서나,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나, 죽음이 기다리는 위태한 곳에서도 그들의 증거는 한결같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 했습니다(행15:26).
한때 계집 종 앞에서 마저 비굴했던 베드로는 얼마나 당당한 자로 변했습니까? 그들은 가는 곳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도전했습니다(행4:20).
모름지기,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앞서 간 성도들은 피를 흘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건만, 오늘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안일을 추구하면서 하품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지옥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있는데 우리는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가 다 순교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우세비어스에 의하면, 제자들의 순교를 이렇게 전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 당해 순교하였고, 빌립은 소아시아 브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순교하였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 베임 당하여 순교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꼭대기에서 떨어트려 순교 당했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고, 가나안사람 시몬은 유대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기서 순교했고, 안드레는 헬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롯 유다만 비참하게 죄 값으로 저주스럽게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딴으로 맡을 사고 그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 성경은 그의 종말에 대하여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합니다(행11:25). 그곳이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부름 받은 자들은 다 순교자로 천국에 갔는데, 유다만은 배교자가 되어 지옥에 갔으니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사람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셋째, 제자들은 복음 때문에 죽었으나,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90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살아 있어서 우리의 귀에 들려지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죽어서조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11:4). 그들은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그들이 쓴 글속에 지금도 살아 있어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도처에 많은 대학과 도시이름이 그들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많은 교회와 병원 자선단체, 고아원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 속에 그들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1950년 Elson. C. Smith가 쓴 "우리들의 이름이야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는 당시 미국인의 보편적인 이름의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거기 보면 요한(John)이 5,837,000명, 야고보(James)가 2,998,000명, 도마(Thomas)가 1,910,000명 등 제자들 모두가 다 10만 명이 넘습니다.
기원후 1세기에 무명한 제자들의 이름이 미국 내에서만도 이렇게 엄청납니다. 마태는 마테복음에만 아니라 Hendel의 수난곡 속에 살아 있습니다. 네오날드 다 빈치는 그의 최후의 만찬에 사도들의 얼굴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갔으나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단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의 제자 열둘을 세웠습니다. 그가 제자를 세운 이유는 선교활동의 계속과 그 복음을 사방에 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를 부르실 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택했습니다.
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복음전할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꼭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딤후4:2). 왜냐하면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9:16).
충성스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6:11:2)
24. 파수꾼으로 세웠노라
24. 파수꾼으로 세웠노라
(겔33:7-12,3:16-21)
파수꾼(把守軍, Watchman)은 주로 밤에 불침번을 서서 사람이나 재산을 지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문을 지키는 보초나 수위를 지칭하기도합니다. 맡과 포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은 보통 추수하는 동안만 배치됩니다. 그들은 더위를 피하려고 초막을 세줬으며, 파수를 잘 보기 위하여 망대를 세우기도 합니다(왕하17:9,대하20:24,욥27:18).
성읍의 파수꾼은 밤에 적들로부터 성벽을 보호하였으며, 보초처럼 성읍의 안전을 도모하였습니다(삼상14:16,삼하18:24).
파수꾼은 성읍이 적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을 때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램51:12). 그러나 그것은 파수꾼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고, 성읍의 안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시편기자의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성경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사모하는 경건한 성도들을 파수꾼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0).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파수꾼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위기와 임박한 운명을 보았으며, 잠자고 있거나 무관심한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호9:8) 선지자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파수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시21:6,겔3:17). 그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즘은 의미에 있어서의 파수꾼의 책임은 선지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파수꾼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민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곧 하나님을 증거하는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두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의에 있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파수꾼들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의 불침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16-17).
여기 "세운다"(nathan)는 말은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지정하다. 시키다. 수여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파수꾼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본문 말씀은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33:7). 여기 "삼음"이란 말도 "세웠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파수꾼으로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파수꾼은 되고 싶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파수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많게 하였느니라"(사62:6)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파수꾼으로 임명하지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임무가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파수꾼에게 주어진 임무를 몇 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습니다.
(1) 파수꾼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1) 파수꾼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남의 형편을 멀리서 살피는 것을 "망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적국의 형편과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의 파수꾼들이 베냐민 기브아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무너지는 것과 흩어지는 것을 살폈습니다(삼상14:16). 다윗의 파수꾼들은 압살롬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삼하13:34). 그들은 또한 왕에게 소식을 가지고 오는 구스사람과 아히마아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삼하18:25-27).
이처럼 파수꾼들은 망을 보는 일을 했습니다.
(2) 파수꾼은 감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2) 파수꾼은 감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딴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밤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계속 사방을 주의 깊게 감시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했을 때 파수대를 세웠습니다(느4:9,7:3) 유대인들은 들판에 파수대를 쌓아 그곳에 파수꾼을 두어 도둑이나 여우나 곰이 과일이나 곡식을 헤치는 것을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시80:13,아2:15). 파수대 외부에는 돌계단이 있었고, 내부는 음식물을 저장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왕하17:9,18:8,대상27:25,사5:2). 파수대 꼭대기에는 초막을 지어 추수 때에는 파수꾼의 가족 전부가 거기서 함께 살도록 하였습니다(사1:8,암9:11). 성경은 이 같은 초막은 보호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시2?:5).
(3) 파수꾼들은 성읍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3) 파수꾼들은 성읍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성벽위에서 망을 보거나 거리를 순찰하면서 성읍 이곳저곳을 살폈습니다. 이들 파수꾼들은 도둑의 준동을 막고 원수의 침투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구석구석을 순찰함으로 성읍을 지켰습니다.
(4) 파수꾼들은 야경하는 일을 했습니다.
(4) 파수꾼들은 야경하는 일을 했습니다.
야경은 밤사이에 별일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소원은 어서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시130:6). 파수꾼을 영어로는 Watchman이라고 합니다. 야경은 nightwatch라고 합니다. 본래는 파수꾼 한 사람에게 정해진 근무시간을 watch라 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군사목적상 밤을 3개의 파수단위로 나누었습니다. 제1파수(파수)는 해질 때부터 10시까지를 말합니다(렘애2:19), 제2파수(심야파수)는 10시부터 새벽 두시까지를 말합니다(삿7:1 9). 제3파수(새벽파수)는 새벽 두시부터 해 뜰 때까지를 말합니다(출14:24,삼상11:ll).
로마 통치하에서는 밤을 네게의 파수 단위로 나누었는데 유대인들도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e3:35). 그것은 "초저녁, 심야, 계명(鷄嗚), 아침"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시간으로 표시하면, 9시, 자정, 3시, 6시로 구분됩니다(마14:25,마13:35,눅12:38,행12 4).
우리나라도 하루 밤을 경(更)으로 5등분하여 일컬었습니다. 초경(初更, 8-10시), 이경(二更, 10-12시), 삼경(三更, 12-2시), 사경(四更, 2-4시), 오경(五更, 4-6시)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파수꾼의 근무시간을 watch라 하였는데 시계를 의미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수꾼들에게 물었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파수꾼은 대답하기를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고 했습니다(사21:11-12). 파수꾼들은 함의 시간을 외치며 알려주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영적인 파수꾼들도 영계의 시간을 알려줄 임무가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5) 파수꾼은 깨우치는 일을 했습니다.
(5) 파수꾼은 깨우치는 일을 했습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네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겔3:17). 여기 "깨우치다"(zahar)는 말은 "번쩍이다"는 의미입니다. 상징적으로는 "계몽하여 훈계하다 가르치다"뜻으로 사용됩니다.
영적인 파수꾼들인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그 본분이 귀하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만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즉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가르쳐 깨우쳐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은 전도서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본분이란 마땅히 행해야 할 직분 즉 의무(du)를 말합니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본분을 모른다는 것은 사람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제1본분을 망각한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을 죄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잘못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 값은 사망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는 말씀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행4: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의 임무요 다른 말로하면 곧 전도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깨우쳐야 할 자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겔3:18절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그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하였습니다(겔3:19).
요컨대, 우리가 전도할 자를 전도하면, 그가 신 불신 간에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첫째 그들은 죄 중에서 죽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 피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불신자에 대한 전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의 책임이요 교회의 의무입니다. 교회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으나 이 책임보다 우선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 큰 책임을 망각하고 "교회 자체만을 붙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교회는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 도중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타락을 막지 못하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서 제상을 구원하지 못하면 세상이 교회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서 이 파수꾼의 임무를 잘 감당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구령운동입니다.
알렉산더 더프(Allexander Duff)박사는 영국 스콧트랜드의 목사로서 오랫동안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늙고 나이가 많아서 고향 땅에 그 뼈를 묻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 가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의사의 치료를 받고 얼마 후 깨어났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나의 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다시 단상에 세워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단상에 다시 서서 백발이 성성한 흰머리를 숙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할 때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이 전도자를 보내고자 하는데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다니 정말로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내 고향 스코트랜드에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인도로 돌아가서 스코트랜드의 마지막 한 사람이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백골을 인도의 갠지스강변에 묻으러 왔다고 말해야 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에 전도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잠자는 심령을 깨우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들고 나서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너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입니다. 이 민족을 위한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동태를 살피는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악의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세움 받은 야경들입니다. 우리는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파수꾼들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망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깨우치는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깨우치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 합니다. 그러나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들은 죄 중에 죽습니다. 그리나 그 무서운 피 값은 내가 지불해야 합니다. 성실한 파수꾼이 됨으로 무서운 책임을 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 파수꾼은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자입니다.
(6) 파수꾼은 나팔을 불어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경고하다"(zahar)는 말은 "깨우치다"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저 멀리에 위험이 막아오고 있다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입니다. 불신의 종말은 비극이라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입니다.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주는 것이 곧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곧 인생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는 것이 경고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현대를 위기라 합니다.
사실로 현대는 위기입니다. 지구촌에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인 위기이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잔잔한 나라가 없고 평안한 나라가 없습니다.
군사적인 위기입니다. 도덕적인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AIDS는 우연한 질병이라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성도덕과 윤리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위기입니다. 사상적인 위기가 다가 왔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은 세계도처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망을 잘 보고 감시를 잘 합시다.
성읍을 잘 지키고 야경을 잘 합시다.
깨우치는 일도 잘하고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합시다.
하나님은 이런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충성스런 영적 파수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7 3:15)
25. 말씀에 붙잡힌 사람
25. 말씀에 붙잡힌 사람
(행1:5-11)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에 붙잡힌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다른 이가 아닌 사도바울을 말합니다. 그는 제2차 전도여행 시에, 당시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로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아덴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별로 신통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헬라의 대도시 고린도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아덴에 비하여 상업과 무역이 성한 신흥도시였으며 또한 도덕적으로 부패한 죄악의 소굴이었습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온 바울은, 거기서 1년 반 남짓 머물면서 많은 신자를 얻어 교회까지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 전도를 시작한 무렵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고린도 전도는 아덴 전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전도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습니다(5).
물론 고린도 전도에도 훼방과 핍박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에 붙잡힌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사람들은 바울을 전도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1) 사람들은 바울을 전도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전도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普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유대인들은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그. 들은 오로지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온 민족입니다. 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구약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풍부하고 그 약속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그것을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후푸만(J. A. Huffman)은 18가지로 요약 합니다.
1) 여인의 후손으로, 2)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3) 유다지파의 자손으로, 4)별로, 5) 여러 가지 구약의 제도와 의식의 예표로, 6) 모세의 뒤로 장차오실 "그 선지자"로, 7) 다윗의 사존으로, 8) 왕이요 또 제사장으로, 9) 열국의 심판자로, 10) 이방인들의 소원이요 또 빛으로, 11)
동정녀의 아들로, 12) 기름부음 받은 자로, 13) 베들레헴에서 날 자로, 14) 팔리울 자로, 15) 찔리울 자로, 16) 열린 샘으로, 17) 정화시킬 자로, 18) 의의 태양으로 약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메시야 예언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구약에 있는 메시야 예언은 무려 456회나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의 성취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예수님께 대하여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요1:29)
시몬의 형제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요1:41).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요 전무후무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그 메시야가 자기 앞에 서 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요4:25).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 아무도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지도 못했고, 영접하지도 안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요1:10-11).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장차오실 메시야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왔습니다. 그 메시야 예수가 오셨는데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영접하지도 안했습니다. 더더욱 놀란 사실은 그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명을 씌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무서운 죄 값 때문에 유리방황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유대인들의 과오를 알고 있는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면서 혀가 닳도록 의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5).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행17:3)
또한 베드로도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증거하기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외쳤습니다(행2:36).
이 은혜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하였습니다(행5:42).
사도행전은 바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두개의 위대한 전도운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를 주축으로 한 예루살렘 전도운동과(1-12장), 바울을 주축으로 한 세계 전도운동이 그것입니다(13-28장). 베드로는 요한과 빌립과 스데반으로 더불어 성지전도에 정성을 쏟았고, 바울은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로 더불어 세계전도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을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이는 정말로 축복의 소식이요 위로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저희가 대적하고 훼방"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5).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전도자들을 원수로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알고 욕하고 훼방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 좋은 천국에 당신이나 가시오" "이제는 지옥도 만원이라고 합디다" "차라리 나는 내 주먹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더러는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고 욕하고 멸시 합니다. 더러는 대적하고 훼방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 바울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본문 말씀 6절을 봅시다.
첫째, 옷을 떨었습니다. 이는 나는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리"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터를 옮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바울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할 수는 없을까? 한없이 부럽습니다.
(2) 바울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랐습니다.
(2) 바울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었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꽁꽁 묶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묶이운 자는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묶이운 자는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묶이운 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묶이운 자는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사베앙이라는 대위도 나폴레옹을 따라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폴레옹 군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할 때 사베앙 대위는 러시아군에게 붙잡혀 사라토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정부는 그를 조국으로 송환하지 않았고, 프랑스정부도 무관심하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60년에 걸친 지긋지긋한 억류생활을 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수용소 소장의 특별지시로 수용소 안 한 모퉁이에 집을 짓고 40년을 살면서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1912년, 그러니까 포로된 지 꼭 100년 하루만에 144세란 엄청난 나이로 수용소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붙잡힌 자의 가련한 모습입니다.
거지에게 붙잡히면 거지가 됩니다. 그는 거지의 수족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도둑에게 붙잡히면 도둑을 따라 다니면서 도둑질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사탄에게 붙잡히면 사탄의 하수인이 됩니다. 간첩에게 붙잡히면 세뇌교육을 받고 그 간첩의 손발이 됩니다. 이것들은 다 망할 것들입니다.
붙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께 붙잡힌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는 아세아전도를 막으시는 성령의 인도를 거역하지 않았습니다(행16:6).
그는 또 비두니아로 가고자 원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을 때 그 길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행16:7). 그는 드로아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야로 내려갔습니다(행16:10),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는 핍박을 피하며 멀리 이방인에게로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고 바로 회당 옆집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이것도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평생소원 로마행도 하나님의 허락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그는 꼼짝도 않고 기다렸습니다(행23:11).
성도 여러분,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허락하시기까지 우리는 주님이 세워지신 그 자리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를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서 메워주신 직분은 액서사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메어야 할 짐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주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의 터전입니다. 기분 따라 철새처럼 옮겨 다닐 수 없습니다.
영국 런던 위커 미술관에는 콘트티라는 미술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온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온 성의 사람들은 물밀듯이 피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문을 지키는 군인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성문파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뜨거운 용암을 맞으면서 굳게 서 있는 모습 그대로 화석 속에서 발견된 것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상관으로부터 그 자리를 떠나도 좋다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의 군병들은 그보다 더 충성스러워야 할 것 아닙니까?
(3)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담대했습니다.
(3)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담대했습니다.
그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합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9).
유대인들에게 박해받는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10절의 말씀도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부귀나 영화나 백만 대군보다 더 귀한 축복은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마28:20)
영국의 선교사로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 들어가서 고독과 독충과 기아와 맹수와 싸우다가 1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글라스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간을 살 수 있었습니까? " 리빙스톤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두 마디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이고(요14:18), 두 번째 약속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28:20).
성도 여러분, 이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살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두려워말라는 말씀이 365차례나 나옵니다. 어떤 이는 이 사실은 매일 두려움 없이 살라는 교훈일거라고 말합니다. 앞서간 전도자들이다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던 것은, 그들이 말씀에 붙잡혀 담대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최후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최후의 행동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최후의 명령도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최후의 기도도 범죄한 영혼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뻔합니다.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정말기 평양에서 순교하신 최봉석 목사님은 정말 귀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곳곳에 다니시면서 "예수 예수" "예수 믿고 천당"이라고 의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는 입이 있어도 이렇게 전도할 줄 모르는 자들을 벙어리라 하였습니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전합시다.
만일 우리가 대리석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다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놋쇠를 문지르면 시간이 그것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큰 성전을 짓는다면, 언젠가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은 허물어져 먼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영생하는 영혼을 위하여 일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는 담대한 축복을 받읍시다.
이제는 늙어서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Ohio) 어느 교회 주일학교 한반의 수업을 마치고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열심히 한 일은 주일학교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오하이오의 한 부락에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낮선 사람이었습니다. 첫 주일 아침에 나는 주일학교에 찾아가서 한반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길 반이 없다면서, '만일 당신이 반을 맡고 싶거든 나가서 한 반을 전도하여 만드시오'라고 그 교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길거리에 나가서 공기놀이하는 소년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주일학교반이 되어달라고 말했더니 그들은 찬성했습니다. 나는 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많은 시간들을 그들과 보냈습니다. 함께 놀고 함께 자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매년 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편지를 축하를 해옵니다.
그들 중에 세 소년이 있습니다.
한 소년은 찰스 콘웨이(Charles conway)인데 그는 인도선교사입니다. 또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의 비서가 되었고, 또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입니다. 그가 바로 하딩(Warren. C. Hardine)대통령입니다. "
성도 여러분,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공기놀이 하면서 놀던 아이들을 데려다가 가르쳐서 이렇게 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지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가르친 결과는 잊을 수 없다" 우리도 같은 축복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87,11 1)
26. 매임 받은 사람들
26. 매임 받은 사람들
(행 16:5-10)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유일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곧 성부성자 성령을 말합니다. 그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죄인을 구속하시고 속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을 감동하사 믿어지게 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또 성경으로 삼위의 사역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39권이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들은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신약 중에서도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도행전은 성령에게 매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대한 놀라운 전도기사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도행전의 외적양상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내적 사실은 곳곳마다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시작하여 계속하여 성령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도 "성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도 성령에게 매임 받은 사람들의 행적입니다. 바울 일행의 전조 여행은 바울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성령님의 인도대로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20:22).
여기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회개한 이후의 바울의 생애는 오로지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것도 성령의 인도였고(행13:4), 가지 않는 것도 그러했습니다(16:6).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성령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실로 그는 그곳에 가서 어떤 위험을 당할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시로 인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에 의해 매인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매이다"(deo)는 말은 "묶이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그는 성령에게 붙잡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에게 붙잡힌 사도 바울의 움직임을 보게 됩니다. 성령에 의해 매인바 된 그의 움직임은 곧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본문 말씀은 유익한 교훈이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성령에게 매인바 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본문은 매임 받은 사람에 있어서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진로가 막혔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진로가 막혔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제 제2차 전도여행에 올랐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할 때, 이미 설립한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그 교회들을 돌아보려는 목회적 여행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말씀하기를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하였다고 합니다(6). 바울은 아시아 곳곳에서 복음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의 북쪽 비두니아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7). 아시아 전도를 막으신 성령께서는 다시 비두니마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이 길도 막히고 저 길도 막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한 아시아 넓은 천지를 전도 구역삼고, 복음을 들고 발 벗고 나셨으나, 성령은 그 길을 막았으며, 또 비두니아 지방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했으나 흐 길마저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은 바울의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할 수 없이 두 번이나 그의 여정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그는 부득불 아시아 전도와 비두니아 전도를 단념해야 했습니다.
그는 비두니아 전도를 위하여 무척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왜 이렇게 바울의 길을 막으셨을까요? 성령께서는 무엇 때문에 번번히 아시아 전도를 가로막았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의 바울은 이 하나님의 숨은 뜻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겠습니까?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낙심했을 뻔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갈 길이 막혀 애타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길이 열리지 않아 고민해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전후좌우가 막히곤 합니까? 이리가도 막히고, 저리가도 막혀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셨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혹 하나님께서 비밀스런 섭리 때문에 우리의 길을 막으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그의 아시아 전도와 비두니아 전도를 막으신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어떤 섭리가 계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로를 딴 데로 돌려놓기 위한 하나님의 어떤 뜻 때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바울은 아시아에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보다 더 큰 유럽이라는 황금어장으로 바울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그의 길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 길도 막히고 저 길도 막혔을 때, 조금은 당황했은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위한 잠간의 아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앞길이 캄캄하고 전후좌우가 막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범죄하고 불순종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길을 막으십니다. 이때는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요나처럼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더 큰 뜻과 축복을 위하여서입니다.
이때는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가난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갈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 하루는 사진기술을 배워 사진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진술을 읽어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기법에 관한 책이 아닌, 음악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 소년은 너무나 가난하여 그 책을 반송할 만한 우송료도 없었습니다.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나 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할 수 없이 그 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차리 apr카시였습니다.
길이 막혔다고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죄 때문이냐 하나님의 선한 뜻 때문이냐입니다.
(2) 우리는 본문에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우리는 본문에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자로 세움 받은 사도입니다. 그런데 아시아 전도의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비두니아로 갔습니다만, 그 길도 막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무시야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8)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9). 그 밤에 바울은 심란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안타까운 사정을 주 앞에 아뢰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를 위해 발 벗고 나셨으나 전후좌우가 막혔습니다. 나는 갈 길을 모릅니다. 나의 진로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바울은 울적한 심정으로 드로아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밤에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9).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사실입니까? 바울 일행은 그들이 두 번이나 겪었던 불가사의한 방해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아시아 전도가 아니라 유럽전도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환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과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환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습니까? 있다면 지금 애절하게 오라고 손짓하는 마게도냐 사람이 보입니까? 여러분에게 신령한 귀가 있다면,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 그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까?
그 마게도냐 사람은 바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부르짖음은 파멸해 가는 죄인들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어서 가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구조의 요청은 지금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이는 바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요 우리 교회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이방인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장려하고 전도주일을 설정하는 것은 이 부르짖음을 듣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교회가영적인 장님되었고 귀머리가 되어 버렸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만이라도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이방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매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대답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를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더라"(10),
우리는 여기서 매임 받은 사람들의 생활 원리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그들은 이 환상을 본 후 머뭇거리지 않고 곧 마게도냐를 떠나기로 힘썼습니다.
둘째는 소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 일입니다. 순종은 아름답습니다. 순종의 열매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교우가 일심으로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구원받은 무리들은 날마다 더해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의 급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와 오늘의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의 증인되는데 순종했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이다"는 말은 사로잡히다는 말입니다. 사로잡힌 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합시다. 순종하는 예수의 손발이 됩시다.
지금부터 한 세대 전에 한 중국인이 미국에 가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쟁쟁한 학위를 여러 개 소유한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고국에서 보수 좋은 관직이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였습니다.
그는 결국 주님께 헌신하기로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태평양 바다위에서 그 모든 졸업증과 학위증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대만과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에는 그가 전도해서 설립한 교회와 회심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종의 결단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매임 받은 사람으로서의 순종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니면 이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령의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데리고 가서 천국문을 열더니 저 밑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가 그 밑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살던 세상이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았더니, 그 세상 사람들은 다 소경이었고 그들은 다 깊은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금방 떨어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물었습니다. "나와 함께 이 낙원에서 살겠느냐? "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거기 가서 저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안내자가 되겠습니다. 저를 빨리 보내주세요"라고 소리를 치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복음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께 매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외면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전할 자로 부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충성하여 전도주일에 많은 열매를 거두는 축복에 동참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87:11:8)
27.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
27.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
(유다서 1:17-23)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교회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시대의 종말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하고 있는 유다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다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기독교에 임할 엄청난 배교행위를 다루고 있는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유다서를 "배교자행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모두 25절로 된 짤막한 이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이 유다서에는 적어도 16차례 이상의 격렬하고도 준엄한 말로 배교의 추악한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치 못한"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꾼 자들입니다(4).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훼방합니다(4:15). 그들은 육체를 더럽힙니다(8). 그들은 인간적인 권위와 신적권위를 둘 다 거부합니다(8). 그들은 천사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여깁니다(8).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비웃고 조롱합니다(10).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행동 합니다(10). 그들은 원망하여 불만을 토합니다(16).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대로 행합니다(16). 그들은 오만합니다(16). 그들은 이득을 얻기 위하여 아름다운 말들로서 사람들에게 아부합니다(16). 그들은 당을 짓는 자들입니다(19).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19).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19).
유다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배교를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에 대해 말합니다(20-23).
1)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일입니다(20)
2) 성령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20).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일입니다(21).
4)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21).
5)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22:23).
"또 어떤 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도주일을 앞두고 "불 가운데서 끌어내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불의 용도는 다양 합니다.
난방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요18:18). 요리를 위하여서도 쓰여 졌습니다(출16:23,요21:9). 정련을 위하여서도 필요했습니다(시12:6,단3:6) 삼손은 방화하는데 썼습니다(삿15:4,5,삼하14:30,왕f6:28). 화형시키는 데도 쓰였고(렘29:22,겔23:25,47), 제사 드리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창8:20,21).
사람들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화합하여 빛과 열을 내면서 타는 현상을 불이라 합니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불은 전기 불처럼 화학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열과 빛만을 내는 현상이나, 혹은 인광 형광과 같이 전혀 열을 내지 않고 빛만을 내는 현상도 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불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더러는 번개 불에 의해 생겼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성(流星)에 의하여, 또는 화산의 용암에 의하여, 나무나 돌들이 서로 충돌함으로, 그 밖의 다른 자연적인 현상에 의하여 생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 합니다. 하여튼 이와 같은 불은 인류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은 그 맹렬한 파괴력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은 좋은 종이지만, 그러나 나쁜 주인이다"고 말한 영국 사람들의 격언은 의미가 깊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고계십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하라" 우리 모두는 엄숙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죄의 무서운 성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죄의 무서운 성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 가운데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여기 불로 비유된 말은 곧 죄를 의미합니다.
죄는 불처럼 무섭다는 말입니다. 불은 뜨거운 것이 그 특징입니다. 잘못하면 화상을 입습니다. 화상은 즘처럼 잘 낫지 않습니다. 낫는다 할지라도 그 상처는 무섭습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죄의 자국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은 자국은 성형수술이라도 하여 감출 수 있지만 죄의 자국은 감출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혼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 뜨거움을 수 없이 맛보게 됩니다. 경찰만 보아도 놀랍니다. 죄인의 맛보는 불안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불은 잘 퍼집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합니다(약3:5). 성냥개비 하나가 온 세계를 태울 수 있습니다. 한 점포에서 불이나면 삽시간에 전후좌우로 옮겨갑니다. 소망서의 관심은 불을 발리 끄는 데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느냐 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은 잘 번집니다. 담배 개피 하나의 불이 큰 산을 태워버리고 맙니다. 가공한 것이 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는 가정을 파괴합니다. 국가를 파괴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은 다름 아닌 죄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한 가정이 순식간에 망한 것도 죄 때문입니다.
5.16때 박정희씨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12.12사태 때 군인들이 개입하지만 않았다면, 이 나라에는 지금 민주주의 꽃이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그 한 많은 광주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군인들이 27년간 집권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무서운 지역감정도 없을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2) 오늘 우리 설교제목은 죄인의 큰 위험을 말해줍니다.
(2) 오늘 우리 설교제목은 죄인의 큰 위험을 말해줍니다.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이 불 가운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곧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큰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같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물에 빠져죽은 사람의 모습은 깨끗합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조금 더 비참합니다. 5:18때 죽은 어떤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 합니다. 큰소리치던 한 인간이 시커먼 숯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비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와 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조만간 다 그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위험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일깨워 우리는 그들을 건져내야한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없이 죽어가는 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지금 큰 위험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물에 빠져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불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3)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구원의 역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3)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은 구원의 역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를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하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불을 끄는 일입니다.
둘째는,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을 안전지대로 끌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의 불을 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불 가운데서 끌어내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 가운데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부름 받은 구조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위한 하나님의 소방대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망각하고 있을 때, 교회는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실리 경은 말했습니다. "잃은 자를 회복함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우리 교회는 이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전도주일을 지킵니다. 작년에는 11월 9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맺은 열매는 적지 않습니다. 전도주일에 시상하기 위하여 조사하다 보니 지난 한 해동안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자가 두 명이요, 두서너 번 한자가 10명이요, 너댓 번 한 자가 열두 명 모두 25명을 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의 믿음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끌어낸다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믿어 구원받고자 하면 비웃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거절합니다. 다른 종교가 있다고 핑계합니다. 찾아가면 도망칩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지옥 불에서 그들을 끌어내기를 원했던 많은 성도들의 수고로 안전지대인 교회로 나와 구원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일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평생 계속할 일입니다.
바라기는 이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를 끌어내라". 아멘.
(87:11:22)
28.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28.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유다1:17-23)
유다서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한 분인 유다가 기록했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와 친숙한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서로 생각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유다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후서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함께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시대의 시작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 교회시대의 종말은 유다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하고, 유다서를 배교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서가 교회 안에 임한 배교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서가 비록 25절로 된 간단한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러 유다서를 신약의 사사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유다서를 읽어보면, 어떤 배교의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은 가만히 몰래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은 없을까?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되 교회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교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함께 있으되 성도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으되 우리에게 속한 자는 아닙니다. 이와 같은 침입자들은 교회 안에서 거짓된 이단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악의 누룩은 성도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유다서를 쓴 목적은 바로 이런 사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3-4).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 그들은 경건치 못한 사람들입니다(4).
2.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입니다(4).
3.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자들입니다(4,15)
4. 그들은 무법한 자들입니다(8).
5. 그들은 비평적인 자들입니다(15).
6. 그들은 작당했습니다(19)
7.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은 없는 자들입니다(19).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배교자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유다는 이와 같은 배교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20).
둘째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0).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21)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21).
다섯째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3).
오늘 우리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급하면 "불이야! "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은 "강도야!"라고 소리치면 모두가 숨어버리지만, "불이야!"라고 소리치면 모두가 모여듭니다.
그리고 불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재난입니다. 화채는 시간을 다툽니다.
1903년 12월 30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이로쿠오이스 극장에서 화채가 났습니다. 순식간에 불은 번져 극장 안에 있던 600여명이 떼죽음을 당한 화재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입니까?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전파의 당위성과 화급성을 동시에 표현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것은 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잠언 6:27-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정욕뿐 아니라 모든 죄는 불처럼 인생을 사르고 맙니다.
불은 그 무게를 달수도 없고, 그 길이를 잴 수도 없고, 그 양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죄가 작용하는 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능력과 그 결과는 불처럼 엄청나고 무섭습니다. 불과 마찬가지로 죄의 성질도 강력 합니다. 불도 죄처럼 닥치는 대로 손상시키고 파괴시킵니다.
죄는 사람이 끌 수 없는 불입니다. 가만히 두면 다 탈 수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그 죄의 불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불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는 자들을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2)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창19:24,25)
하나님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불로 심판하였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레10:1-2).
나답과 아비후가 심판 받은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제사했기 때문이요(레9:24). 둘째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이며(레16:12). 셋째는 거룩한 봉사를 경솔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 고라의 무리 250명을 불로 심판했습니다(민16:35). 이렇게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심판 앞에 놓여 있는 자들을 구원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3) 불은 영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3) 불은 영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여기 영원한 불은 곧 지옥을 의미합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라"고 했습니다(마3:10).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도 말씀했는데, 여기 꺼지지 않는 불은 곧 지옥을 말합니다(마3:12).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를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
성경 다른 곳에는 지옥에 대하여 불 못이라 했습니다(계20:15). 지옥은 뜨거운 곳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1) 지옥은 마귀가 가는 곳입니다(계19:20,20:10)
2) 타락한 천사도 지옥에 갑니다(벧후2:4,유1:6).
3) 악인도 지옥에 갑니다(시9:17).
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도 다 지옥에 갑니다(계10:15).
5) 지옥은 믿지 않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계21:8,요3:16).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것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믿지 않고 지옥 가서 이 불 속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정한 이웃을 저 무서운 불속에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예수의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일입니다.
죤 실리 경은 "잃은 자를 회복함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교회 자체만을 붙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교회는 공동묘지로 가고 있는 도중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아세아에는 세계인구의 50%이상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 2%만이 예수를 믿고 98%가 불신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세군의 창설자인 월리엄 부드(William Booth)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충실한 교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무척 활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주일날 결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병자를 심방했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모범적인 교인이었고 나무랄 데 없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교회일만 했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틀에 박힌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대단히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했습니다. 약을 사왔습니다 의사를 불렸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천국에 와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음악, 향기, 기쁨, 강물, 물소리, 무성한 나뭇잎, 천사들, 정말로 행복하고 축복스런 세계였습니다.
그는 이런 아름다운 세계에 있었는데도 적막과 비애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왔다 갔다 하는 천사는 많았으나 그에게 찾아와 말을 거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외로왔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홀몸이었습니다. 그는 천국백성과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한 평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데만 바빴습니다. 지옥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데는 도무지 무관심이었습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땅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만일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 귀한 천국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구원받은 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천국에 온 것은 다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땅위에서 충성되게 사는 성도들의 소식이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소중한 한 영혼에 대해서 듣고 싶어 왔습니다. 그는 당신 집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독자 아들입니다. 어릴 때 나쁜 버릇이 들어 불손해졌습니다. 나는 그 아이의 이야기가 듣고 싶소. 나는 불의의 사고로 그 아들을 건지지 못하고 먼저 여기 왔습니다.
그 애는 당신과 종종 만났는데, 그 애는 지금 구원받았습니까? "
부드는 그이의 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바빠서 그와 함께 영혼 문제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야기 할 것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내방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도 구원받고 천국에 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 예수 믿었습니다. 믿은 후 충성했고, 자녀들을 다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 중에 하나를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딸은 아름답게 자랐고 온 동네의 귀염둥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길을 잘못 들어 비참해지고 만 것입니다. 부드는 땅에 사는 동안 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곧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딸은 당신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딸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딸에게 몇 번이나 복음을 전했습니까? 누군가가 열심히 권면하기만 했으면 돌아올 아이입니다. 네 딸은 어찌되었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부드는 너무나 괴로와서 얼굴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천국입니까? 언제까지 이런 괴로운 질문이 계속될 것입니까? 전도 안한 것 때문에 이처럼 괴로워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더 살 수는 없습니까? 나는 괴로워서 죽고 싶습니다. "
그때 세 번째 내방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본래 가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여기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려든 참에 바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그마한 개척교회에 다니다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소식이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부스의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너무나 어려워 교회 식구들이 너무나 고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개척교회 위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영혼 구원을 위하여 왜 협조하지 많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부드는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정말 유구무언이었습니다.
부드는 지금 분명히 천국에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너무나 괴롭고 부끄럽고 괴로와 도망치고 싶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은 못했구나, 일중의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천지가 진동하며 청아한 음악소리와 함께 주 예수님이 그의 곁으로 오시고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 곁에는 사도들, 선지자들, 순교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런 주님 앞에 서 있으려하니, 도무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환란 중에 동참했고, 내게 존귀를 돌리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버린 자들 틈에서, 그대는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
그는 예수님의 눈길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청천벽력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두 번째 기회를 주리라! 내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 후에 다시 오라! 그때는 너도 승리자들 사이에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라! "
그가 깜작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부드 장군의 생애의 변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교인들과 모든 교회의 초대의 관심사는 영혼 구원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 일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과로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은 덩컨 베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숱한 심령이 길을 잃고 있는 한 나는 쉴 수 없습니다. 대신 나는 죽은 후에는 영원 속에서 휴식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게으르지 않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합시다.
(89:4:19)
29. 초대교회를 본받자
29. 초대교회를 본받자
(행2:43-47)
신약성경 중 많은 성경을 기록한 대 저자는 세 사람입니다. 열세 편의 서신을 기록한 바울과 복음서와 서신과 계시록 등 요한문학 다섯 권의 저자인 사도요한과,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입니다.
이들 중에서 성경기록의 분량으로 본다면 누가가 기록한 저술이 가장 깁니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는데, 그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의 자취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사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그 성격으로 볼때 물론 교회의 역사서에 해당됩니다. 동시에 그 내용은 성도들의 신앙체험이요 변증론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그리스도의 전기라 한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발전사입니다. 사도행전 1:8절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경로를 설명해 주는 교회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세상에 계셨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4).
예루살렘은 우리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대교와 회교 등 세계 삼대 종교의 성지입니다. 여기에 솔로몬 성전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약의 터전이 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끝까지 소망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대한 소망과 신앙적 환상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 나섰고, 예루살렘에까지 온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때문에 주님께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저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위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똘똘 뭉쳐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다면 교회는 설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이미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보내실 것이었습니다(요7:39,14:16,15:26,16:7-11).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는 120명의 성도들이 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 성령강림은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성화가 켜지는 순간입니다
즉 최초의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는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자가 하루에 삼천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행2:41).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벽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여기에 나타난 교회생활의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물질적 교제입니다.
셋째는, 모두가 함께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전교인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데서 시작되었고 또 부흥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이 뜨거운 기도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부흥이 없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기도하지 않는 목사, 기도하지 않는 장로, 기도하지 않는 집사·권사들이 져야할 것입니다.
수요일 기도회에서는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중직자들이 많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면 되는 금요기도회는 아예 외면합니다. 내일 새벽부터 모이게 될 특별새벽기도회는 얼마나 모일까요.
여러분 이 정도했으면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급증하는 개종자들로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1) 초대교회는 경건한 교회였습니다.
(1) 초대교회는 경건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공경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도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그 임재는 사도들이 행사한 기사와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영적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초대교회는 서로 도우면서 더불어 산 교회였습니다.
(2) 초대교회는 서로 도우면서 더불어 산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44,45)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첫째, 이는 신앙의 열정에서 나온 것이고, 공산주의는 정치적인 이념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둘째, 이는 내적이며 자발적이나 저는 외적이며 강제적입니다.
셋째,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순교했으나 저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양자 다 같이 붉은 피로 상징됩니다. 전자는 대속의 보혈이요, 후자는 혁명의 붉은 피입니다. 또 다 같이 궁극적 복락을 주장합니다. 전자는 천년왕국이요, 후자는 공산왕국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과 양태는 정반대요, 대조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지만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순수한 신앙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고도의 이상이요 친국생활의 한 그림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는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서로 유무상통하면서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더불어 사늘 믿음이 있었고, 상호간에 타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이웃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데 혼자서만 남아 넘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사람은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만 편안히 쉬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다른 성도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만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함께 져야할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교회입니다.
(3)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교회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교회의 생명은 모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개인이아니라 단체요, 단수가 아니라 복수요,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나의 빛은 많은 곳을 밝게 비출 수 없습니다. 여러 개의 빛이 함께 비출 때 그곳은 밝은 것입니다.
우리교회 낮 예배에 참석한 교인이 오늘밤에 다 나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질 것입니다.
숯불은 모을수록 더 뜨겁게 더 활활 탑니다. 그러나 한 덩이 한 덩이를 여기저기 흩어놓아 보세요. 오래지 않아서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좀 모입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모입시다.
밤 예배 때, 수요기도회 때, 금요기도회 때, 새벽기도회 때, 중직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힘이 쪽 빠지고 맙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예수님을 위하여 사업 좀 덜 합시다.
예수님의 위하여 돈 좀 덜 법시다.
다른 교인들을 위하여 예배시간에 기도회에 빠지지 맙시다.
(4)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4)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필 때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주께로 돌아오는 회심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더라"(행1:15).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2:41).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7).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도에 복종하니라"(6:7).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1:20)
진실로 초대교회의 성장은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첫째,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1:5,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둘째, 모두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4:29-31).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기도했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셋째, 그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2:46).
넷째, 그들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2:42).
다섯째,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외에도 많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가 아니라 그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모든 교회 모든 성도가 모든 시대에 걸쳐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관한 의문부호여서는 안 되고 마땅히 감탄부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냥갑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냥은 한 개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촛불도 켜야 하고, 난로도 피워야하고, 물도 끓여 커피도 타서 먹어야 하고, 물도 데워 목욕도 해야 하고, 또 출불 밑에서 책도 읽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기 원한다면 맨 먼저 어디에 불을 붙여야 할까요?
물론 제일 먼저 초에 불을 붙인 뒤, 그것가지고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다음 물도 끓이고 어쩌고 하면 IQ가 별로인 사람입니다.
제일 먼저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은 성냥개비 그 자체입니다.
세상 일이 다 이러합니다. 자신이 불타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께 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뜨거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뜨겁게 할 수 없습니다. 성냥개비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 목욕물을 끓이려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먼저 내 자신이 뜨거워지기 위하여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먼저 내 자신이 권능을 받기 위하여 주님께 매달립시다.
전도 대상자를 작정하기 위하여 먼저 기도하고, 작정한 후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어떤 성도가 낚시질을 하면서 몇 가지 교훈을 배웠답니다.
첫째, 고기는 절대로 스스로 바구니에 뛰어들지 않는다.
둘째, 낚시질을 하려면 고기가 있는 곳에로 찾아가야 한다.
셋째, 고기는 미끼를 찾아온다.
넷째, 고기를 낚기에는 적당한 때와 시기가 있다.
다섯째, 어떤 장소에는 고기가 많이 있다.
여섯째,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고기를 낚기에 적당한 때와 시기가 이번 전도주일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찾아갑시다. 좋은 곳만 찾아가면 많이 잡을 수도 있고 월척을 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잡은 고기는 반드시 바구니인 교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증거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30.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30.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2-14)
사도행전은 그 성격으로 볼 때 역사의 책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초대교인들의 체험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시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변증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여기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둘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셋째,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12).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돌아와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13).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다락방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말합니다. 다락방 앞에 관사가 있는 것을 보면 잘 알려진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이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고(눅22:12), 부활하신 후에도 두 번이나 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요20:19-20,26-28). 이런 기록 외에도 예수님은 이곳에 자주 오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 마가의 다락방은 초대교회의 요람이자 산실이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터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뿐 아니라 우리교회의 시작도 개인 가정집에서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였고(16:40),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의 집이었습니다(고전16:19).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골4:15). 이들의 집이 교회의 시작으로 제공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그곳에 모인 무리는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15).
그들은 거기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합심기도를 응답하사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모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그 기도를 본받고자 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이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받기로 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기도하여 은혜를 받았습니까?
(1) 그들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1) 그들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기도했다고 말합니다(13,14).
이 명단에 보면 가룟 유다를 뺀 열한 사도 모두가 다 참여했습니다. 사도들 중에 빠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기도한 자의 수가 120명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15)
그런데 거기 명단에 이름이 나타난 자는 열한 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직분과 위치 때문입니다. 성경은 중직자들을 평신도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심적인 인물들인 사도들과 마리아가 참석했다는 것을 기명함으로 밝혔습니다.
100여명이 넘는 평신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면서도 최소한 열한 사도들의 이름을 일일히 기록한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직자의 책임과 위치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허전합니다.
기도회 시간에 장로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사람들이 적게 모인 때 일수록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의 빈자리가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락방 기도회 때 열한 사도는 "다 거기 있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기도했다고 증거 합니다.
여기 "더불어"라는 말은 "함께" "같이"라는 뜻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온 교회 성도가 다 함께 모였습니다. 당시 신자 전부가 모인 것입니다. 아마 120명은 빠진 사람 없이 다 모인 수인 듯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이처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기도한다면 분명코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더불어 기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는 곳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보는 것이 한 사람이 보는 것보다 확실히 낫습니다. 여러 손이 모이면 일이 쉬워집니다.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거기에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사도들 외에도 "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예수의 아우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믿지 않았던 자들입니다(요7:5).
성도 여러분, 이들은 따로따로 모이지 않고 다 함께 모였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회에 빠진 자는 아무도 없었던 듯 합니다. 얼마나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여기 한 사람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다입니다. 그는 다락방 만찬 때 참석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분명한 것은 참석한 사도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바라기는 전도자의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 참석자 명단에 여러분의 귀한 이름이 유다처럼 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더불어" 기도하기 위해 모인 성도의 명단에는 반드시 여러분의 귀한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2)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2)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같은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일심동체를 의미합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마음을 모아"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런 합심기도는 교회를 힘 있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120명이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안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같이하여 한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 제자의 수가 120명이라는 것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한 집안 식구들끼리도 마음을 모으지 못한 예가 허다합니다. 어떤 경우는 각개약진입니다. 그야말로 동서남북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그들 모두는 다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들 모두는 다 주님을 위하여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만, 열 한 사도들만 해도 그들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여 조화불가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이란 극우파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서라면 살인, 방화, 암살 등등 무슨 짓도 서슴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누구입니까? 그는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압재비요 사회의 지탄을 받는 배교자요 매국노입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여 로마제국에 바치면서 치부하는 탐관오리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것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정력가요 활동가요 성격이 급하고 불같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신앙고백으로 하늘까지 오르는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지옥에까지 떨어지는 책망도 받았으며,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으나 계집종 앞에서마저 예수 모른다고 부인한 배반자입니다.
그런가하면 요한은 명상가요 사색의 사람이요 기도의 용장입니다. 너무나 개성이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도 똑같이 제자가 되어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안드레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의심 잘하고 판판하고 차디찬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를 감추고 마음을 비워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같이한 것은 "내가"아니라 "예수"때문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들 모두는 다 자기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합심하는 곳에 배가 합니다. 서로 다투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성도 여러분, 120문도 중에 아무도 자기주장이나 고집을 부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같은 제목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따로따로입니다. 전도하자 해도 꿈적도 않습니다. 기도하자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일어나서 기도운동에 동참합시다. 전도운동에 협조합시다
(3) 그들은 모두가 "힘써" 기도했습니다.
(3) 그들은 모두가 "힘써"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여기 "전혀"라는 말은 "오로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끝까지 잘 참으면서 힘써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열한 사도가 거기 있었고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14).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서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다락방 기도회는 금방 끝난 짧은 기도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기도회는 모두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기도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입을 벌려 하나님께 아뢰는 분명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 기도회는 정적이 흐르는 듯한 조용한 분위기는 아닌 듯 합니다. 힘써 기도했다는 말을 보면 머리를 쳐 박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줄고 있었던 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도 이런 기도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교역자와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평신도들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중직자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진 사람 없는 기도회 말입니다.
복음전도와 교회부흥을 위하여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회 말입니다. 모두가 깨어 전혀 기도에 힘쓰는 기도회 말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중직자나 평신도나, 먼데 산이나 가까운데 산이나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열심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머리만 쳐 박고 졸고 있는 형식적인 기도는 집어치웠으면 합니다. 짧지만 뜨거운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제목이 분명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값비싼 고급 옷이 아니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운 믿음의 옷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세상 재산의 공개가 아니라 영적재산의 공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제상에서는 엄청난 부자들인데도 하나님 앞에는 인색했던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음 있는 척 했어도 영적인 가난뱅이들이 수 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상재산은 별것 없어도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적재산을 정직하게 공개한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가난행이들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한평생 전도 한 번 못해본 가난뱅이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한평생 새벽 기도회 한 번 못해본 이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한평생 수요예배, 구역예배 참석 못한 이도 있을런지?
아마 평생에 성경한 번 읽지도 못한 이들이 수두룩 할거요.
세상에서는 일등인데 신앙생활에는 엉망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이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로부터 새롭게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도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막1:35). 본받읍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진액을 짜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면 비천한 우리들이야말로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기도 않고도 잘 살수 있다는 우리의 건방지고 교만한 마음을 슬퍼하실 것입니다. 기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덤비는 것을 주님은 가소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바운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기도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꼭 있어야할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우리 교회에 필요한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 많이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발전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릎을 잘 꿇는 자만이 가장 잘 서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삼상12:23).
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은혜의 불을 끄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여 사자의 입을 봉했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원수마귀에게 삼키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함으로 감옥의 벽을 헐었는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죄짓고 감옥에 갇히고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기도함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는데 오늘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교회를 냉냉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변명하지 맙시다. 회개합시다.
우리 다 같이 우리의 고운 옷을 벗어던지고 간구의 방석을 깝시다. 그리고 그곳이 천국의 이슬로 흠뻑 젖을 때까지 기도합시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태한 우리가 열심있는 성도로 변해야 합니다. 말 많은 성도가 잠잠하는 양으로 변해야 합니다.
전도 못하는 벙어리 신자가 담대한 신자로 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씁니다."
우리 모두가 이 축복을 받아 초대교회를 닮읍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