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사닥다리
안디옥 교회, 요셉,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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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사닥다리
머리말
머리말
언젠가 곽씨라는 삼류 시인이 소동파를 찾아가서 자작한 시를 낭송하며 비평을 구했다 합니다. 다 듣고 난 소동파는 "점수로 따지면 100점은 무난하군"라고 평했습니다. 그러자 곽시인은 크게 만족해하면서 더 자세한 평을 구했습니다. 「소동파」는 침착한 태도로 하는 말이 "우선 자네 음성이 70점은 되고 나머지는 시의 점수라 할 만하지 뭐, 더 설명할 것 있나?"라고 반문했다는 것입니다.
창백해진 곽 시인의 얼굴 속에 또 다른 한 얼굴이 포개지는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얼굴은 바로 저자의 얼굴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집 "꿈에 본 사닥다리"도 그런 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위대한 구원의 복음이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의 선포는 목사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또한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이 복음의 선포를 위한 설교 준비일 것입니다.
주말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할 때가 혹 있습니다. 초침소리에 들기면서 허둥대야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갈급한 영혼들에게 시원스런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설교자만이 경험하는 고충과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강단을 내려 설 때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일 때도 없지 않습니다.
이 설교 때문에 고민하는 무능한 설교자가 설교집을 펴 낸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감히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자 원하는 심정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둠지도 바로 잡지도 못한 글입니다. 엉성한 그대로 이지만 은광제단에서 선포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미숙한 부분은 뜻을 헤아리며 읽어 달라는 부담을 독자들에게 지우게 됨을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와주신 은광교회 성도들과 교회직원들에게 감사하고, 출판을 주선해 주신 김종환 집사님과 전일출판국 직원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교제하게 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기를 빕니다.
1991.6. 11
무등산 밑에서
차 례
차 례
1.안디옥 교회(교회 사명)
2. 신실하신 예수님의 약속(신앙 약속)
3.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은혜 믿음)
4.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신앙 승리)
5.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조 형상)
6. 우리 교회의 소망(교회 소망)
7. 앞으로 나아가자(믿은 소망)
8. 교회는 부흥되어야만 한다(교회 부흥)
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조 환경)
10. 내 교회를 세우리니(교회 신앙)
11. 성공적인 인생건축의 비결(신앙 인생)
12.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교회 헌시)
13. 사랑스런 사람들(성도 사랑)
14.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신앙 경배)
15. 눈을 들어 밭을 보라(사명 전도)
16.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사명 헌신)
17.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리라(보호 섭리)
18. 계절은 바뀔 것이다(약속 소망)
19.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은혜 회개)
20. 내 고향으로 가게 하소서(소망 믿음)
21.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감사 믿음)
22. 꿈에 본 사닥다리(축복 꿈)
23. 잃은 양을 찾았노라(전도 사명)
24. 잃은 은전을 찾자(전도 열심)
25.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전도 사명)
26. 죽음을 삶보다 더 중요하다(신앙 소망)
27. 불우한 생애를 바꾸자(소망 승리)
28. 교회 일을 함께 염려하자(교회 사명)
29. 순전한 믿음(믿음 축복)
30.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소망 신앙)
31.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믿음 사명)
1. 안디옥 교회
1. 안디옥 교회
(행11:19-30, 13:1-3)
주후 1세기경 로마가 통치하던 영토 안에 안디옥(Antioch)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무려 16개소나 된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수리아 안디옥(행11:19, 13:1)과 비시디아 안디옥(행13:14)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리아 안디옥은 지중해안에서 동으로 27km지점의 오론테스(Orontes)산을 등지고 오론테스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로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로마 수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BC 300년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하나인 셀레우커스 니가톨(seleucus Nicator)이 건설하여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Antiockus). 이 도시는 후에 로마의 직할시가 되었다고 하며 인구는 500,000에 이르렀고,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전합니다.
이 도시에는 대리석으로 된 큰 길이 있었다고 하며 로마제국 내에서는 가로등이 있는 유일한 도시로 알려졌으며, 도시의 외곽은 로마보다 장대하였기 때문에 흔히「동방의 여왕」 또는 「동양의 로마」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니 수리아 안디옥의 규모나 위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루살렘이나 아덴, 로마와는 달리 이 도시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고고학자들의 작업을 통하여 겨우 알려질 정도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의 몇몇 무리들이 안디옥에 들어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많은 이방인들까지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초대 교회가 당한 핍박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곳곳에서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전도는 생각 밖에 큰 축복을 받아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도 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에 접수되었을 때 그 경과를 시찰하고 새 신자를 굳게 할 목적으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한 것입니다. 바나바가 수리아 안디옥에 새로 개척 설립된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그 교회의 규모가 예상 밖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충성하였고 새 교인들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전도 사업은 크게 확장되려는 기미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소 근방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한 것입니다.
이 초청은 사심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그의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첫째는, 자기보다 유능한 인물을 서슴지 않고 받아 들였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사울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반역자로 몰렸으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의심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남다른 눈과,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량으로 영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사울은 얼마 후 초대 교회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또한 사람을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믿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소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소개하고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자신은 사라졌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소개하고 그는 그의 그늘에 묻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위대한 점을 바로 이 점입니다. 그는 사울이 이룩한 업적의 절반은 나누어 가질만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아량과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사울은 거기서 처음으로 따뜻한 환영을 받은 곳입니다. 그곳은 처음으로 말씀을 전파한 곳이며, 가르친 곳입니다. 그의 유명한 3차에 이르는 전도여행도 이곳에서 출발하였으며 끝마친 곳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안디옥 교회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곳은 그의 활동의 본거지였으며 위대한 사도가 되도록 안수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곳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통하여 새 힘을 얻었으며 물질의 공급도 받았습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전도 활동의 본거지이자 또한 초대 교회의 선교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1세기 전체를 통하여 안디옥은 예루살렘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임을 쉽게 알게 됩니다. 그곳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11:23).
(1)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 받았을 때 그 교회의 은혜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모두가 하나의 회중으로 굳게 뭉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부터 개종한 자들 간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목회자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11:24). 그러나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자요(9:1-5), 스데반집사의 순교에 관여한 배반자입니다(7:57-58, 8:1). 니게르 시므온은 검둥이 개종자입니다.
구레네사람 루기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궁중의 고관으로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빈부귀천, 남녀노유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낯선 자가 없었고 구경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좋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의 강점도 이러한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모두가 다 형님, 누님으로 통했습니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니 형제요, 모두가 예수의 피로 맺어졌으니 한 형제 자매였습니다. 거기에는 불신도 없었고 상하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3)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얻어진 교회입니다(11:26).
'그리스도인' 이란 '그리스도의 것' 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행11:26, 26:28, 벧전4:16).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은 Christ와 man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둘은 한 단어 즉 Christian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죄인이 구주를 영접하고 구주께서는 죄인을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게 영광스런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비난과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멸시받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위협받는 이름이었습니다.
초창기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더러는 야수의 밥이 되기도 했고,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조롱당했습니다. 또 좁은 문과 제한된 길,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영광스런 이름은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불리워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이 이름을 얻은 것은 뜻이 있습니다.
① 그것은 사도들의 교훈과 성도들의 생활이 그리스도 중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교회는 유대인이나 예루살렘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살아 있다면 여러분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중에는 크리스천 아닌 자가 더러 있습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믿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구원은 받는 것이지 힘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거듭남으로 크리스천이 됩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서 난 자들입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크리스천답게 살았습니다.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4)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3:2-3).
복음전도에는 전도자를 파송하는 모체가 있어야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 예수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막16:15).
그러나 사도들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핍박을 내리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핍박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움직여 환경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방전도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이 약속은 가서 제자 삼고, 세례 주고, 모든 족속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이 약속을 따라 동서남북 어디든 갔습니다. 인종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교사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를 천거한 자는 바나바요, 그 인물을 키워낸 교회는 안디옥교회요, 그 전도 사업을 뒷받침해 준 교회도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선교사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 진 교회도 안디옥교회입니다(13. 2),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그들의 전도 사업을 위하여 헌금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가 거쳤던 모든 도시마다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나셨을 때 그 범위는 더욱 넓어졌고 제3차 전도여행을 했을 때는 더욱 더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칠 때마다 어김없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힘을 새롭게 하였고 부족한 물질의 필요도 채울 수 있었으며 전도 사업에 필요한 후원과 보조와기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전도를 위하여 세운 교회요, 들어 쓰신 교회입니다. 오늘날 안디옥 교회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교회를 통하여 전해진 복음은 살아 있고 그 교회가 개척 설립한 교회는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본받는 일만큼 중요하고, 값지고, 우선해야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즉 안디옥 교회 설립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입니다.
① 그것은 이방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입니다.
② 이방전도의 본부가 마련된 것입니다.
③ 새 전도자가 부름 받았습니다.
④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디옥 교회의 사명을 우리 은광교회 위에 다시 주셨다고 믿읍시다.
(84. 1. 15)
2. 신실하선 예수님의 약속
2. 신실하선 예수님의 약속
(히10:21-25)
옛날에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홍수에 익사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직하게 약속을 굳게 지킨다는 의미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고 고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불신의 세대에는 거리감이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약속은 많이 하나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됩니다.
나폴레옹(Na멜leon)의 다음 말은 유의할만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결코 약속하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건망증이 있습니다. 또 약속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약속 이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A. Hitler)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좋다"고 큰 소리쳤지만 그는 얼마나 많이 백성을 속였으며 우롱했습니까?
인간의 약속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속해놓고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결국은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약속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만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굽니까? 그 분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은 성경 중에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들 중 몇 가지는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또 이루어지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장차 또 다른 약속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고 사람들은 믿을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15:29).
오늘 우리 본문 23절에 보면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미쁘다"는 말은 Pistos 인데 믿음(Pistis)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새 번역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신 분이시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도 신실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의 세대 중에 살고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고 격 려를 받도록 하십니다.
(1) 예수님의 약속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요 6:37절입니다.
(1) 예수님의 약속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요 6:3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을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죄인들을 영접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죄가 비록 주흥 같을지라도, 혹은 먹장같이 검을지라도 우리가 구주 예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사1:18).
세상의 모임이나 단체나 조직체에는 반드시 특별한 자격이 논의되고 특별한 제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제한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 하십니다(사55:1). 병약한 자도 좋다고 하십니다. 직장이나, 성별이나, 나이나, 도덕적으로 성결의 여부에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배척하거나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우리를 위한 축복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시고 오라 하십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오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도망치는 자가 아니고 주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지 강도도, 창녀도, 살인자도, 병자도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눅5:32). 죄인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축복스런 복음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2) 마태복음 16:18절에는 또 다른 약속이 우리를 가슴 설레이게 합니다.
(2) 마태복음 16:18절에는 또 다른 약속이 우리를 가슴 설레이게 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운 것도 아니고 세울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가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엡1:22, 4:15, 5:23,골1:18,19). 그런즉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그런즉 음부의 권세가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이 악의 세력이 수 세기를 통하여 교회를 박해하고 무너뜨리려고 애썼지만 교회는 결코 넘어지지 아니하고 굳건히 서 있습니다. 선민을 박해하던 바벨론도 망했습니다. 메대 바사도 온데 간데가 없습니다. 성도들을 카타콤으로 몰아넣었던 로마도 이름만 겨우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박해하던 교회는 지금까지도 굳건히 서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도 범죄한 영혼에게 죄 사함을 주고 고통 받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줍니다. 교회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며 장차 올 삶에 대한 복된 소망을 줍니다. 교회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2000년 동안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음부의 권세도, 어떤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3) 우리에게는 보다 더 좋은 약속이 또 있습니다.
(3) 우리에게는 보다 더 좋은 약속이 또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 달리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박해자의 칼을 피하여 동굴 속에 있다 하여도 결코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병상에 있을지라도 나 혼자만은 아닙니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다음 고백은 우리 모두의 간증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4)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복스런 소망의 약속이 또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복스런 소망의 약속이 또 있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40일 만에 승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은 지금 풍랑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복된 소망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계22:20).
바울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빌3:20).
신앙생활이란 하나의 기다림입니다.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림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농부는 추수날을 기다립니다(약5:7). 부모는 집나간 방탕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눅15:20).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행1:4). 아낙네들은 남편의 월급봉투를 기다립니다. 연인들은 토요일 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학수고대하여 기다립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작사로 되어있는 '주님 고대가'는 사무치게 기다리는 성도의 간증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가 임박하였습니다. 심판 주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구별하기 위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겠다"는 주님의 언약은 신실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 성경에 456번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 예수님은 과연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무려 1,518번이나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초림의 주님은 우리의 죄 짐 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제 재림의 주님은 우리를 영화로운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주시고 셋방살이 고달픈 성도들에게 하늘 집주시고 질병에 지친 자에게 영화로운 몸 주시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빌3:21). 죄 된 세상을 바로 잡고,공해로 얼룩진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돌맹이를 금강석 되게 하시고 죄인을 천국의 영생자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잡초는 장미꽃이 되고 엉겅퀴는 성전 기둥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붙드시고 꺼져가는 심지는 성령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차디찬 요셉의 옥중의 마루바닥을 대왕의 보좌로 바꾸실 것이며 욥의 고난의 자리를 축복의 시상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스데반을 때린 피 묻은 돌맹이가 다 금 면류관으로 바뀔 것이며 야곱의 목을 자른 박해의 칼을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심으면서 예수를 기다리지 맙시다. 그는 심판주이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질레를 심으면서 장미꽃을 기대하지 마세요. 엉겅퀴는 면류관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되새겨 간직합시다. 주인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런즉 아무도 흔들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신실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 위에 굳게 섭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84. 2. 5)
3.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삼하19:31-39)
우리 인생과 물질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물질로 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육체를 보존하고 지탱하기 위하여 먹고 마시고 옷을 입습니다. 육체는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굴의 잠언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언30:7-9).
성경은 물질을 정죄한다든지 혹은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3세기의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자체로서는 선이다. 그리고 악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선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가장 큰 선으로 또는 가장 좋은 선으로 생각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도 주어진다.
"
물질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마온에 사는 사람으로 갈멜에 큰 목장을 가지고 있는 나발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양이 3천이요, 염소가 1천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아비가일이었는데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난을 피하여 다닐 때 나발의 목장 근처에 피난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나발의 목장의 울이 되었고 담이 되었습니다.
이때 나발은 양털을 깎고 있었는데 다윗은 너무나 어려워서 나발에게 열 소년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는 왕의 잔치 같은 큰 잔치에 대취하면서도 다윗을 도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발은 이 일 때문에 급작스런 병으로 말미암아 10일 후에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상 25장1-4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발은 그 아까운 돈을 값있게 써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돈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위의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많고 돈도 많은 거부였습니다. 다윗과 그 군대가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 다니고 있을 때 바르실래는 소비와 마길로 더불어 다윗과 그 군대를 위하여 식량을 제공하였습니다(삼하17:27-29).
뿐만 아니라 압살롬 일당이 무너진 뒤 다윗은 승리하여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바르실래는 요단강까지 다윗 일행을 호위하여 전송하였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은혜 받을 제목이면서 또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중심하여 세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사람의 한 평생은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1) 사람의 한 평생은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이새의 10남매 자녀 중 막내아들입니다(삼상16:10-11, 대상2:13-16).
다윗의 생애에는 수없는 어려움이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어려운 고비를 위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한 개인에 있어서 영적 육적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극한상황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극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쳐버리거나 우울병 환자가 되거나 정신 이상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기인 것입니다.
그런즉 사람들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위기는 대멸하여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발달적 위기라고 하는데, 이는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생기는 위기입니다. 사람은 장성해가는 중에 여러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면 하나의 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릭슨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8단계의 발달적 위기가 있다고 합니다. ①신뢰성 시기(1-18개월) ②자율성의 시기(18개월-3세) ③자발성의 시기(3-6세) ④활동성의 시기(6-12세) ⑤주체성의 시기(12-20세) ⑥발달의 시기(20-25세) ⑦생산성의 시기(25-30세) ⑧성숙의 시기(30세 이상)가 그것입니다.
생후 1개월-18개월을 신뢰성의 시기라 합니다. 이때에 신뢰감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뢰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아이들은 엄마만 믿고, 엄마에게 맡기고 자랍니다. 만일 이때에 신뢰성이 형성되지 못하면 이 아이에게는 큰 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안정성이 없고, 고립증, 의처증 우울증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황적인 위기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실의 위기라고도 하는데, 이는 주위환경으로부터 오는 위기입니다 부모를 잃거나, 명예를 잃어버리거나, 재산, 자녀, 애인, 건강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만일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포자기 하거나, 생을 저주하거나, 자살하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런즉, 사람이 위기를 잘 극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에게는 이 상황적인 위기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위기였는데 그런대로 잘 극복하였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압살롬에게 배반당한 일입니다.
그때 그는 왕좌를 잃었습니다. 자식을 잃었습니다. 평안을 잃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자식에게 당한이 수모는 그를 미치게 하는 위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배은망덕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위기가 있는 법입니다.
(2)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생각할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일조일석에 10남매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건강하던 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둘도 없는 아내마저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 절박한 위기에도 그는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② 눈앞의 슬픈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욥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믿었고 그 하나님을 보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욥19:25-26),
③ 나보다 더 어려운 자가, 세상에 더 많이 있음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④ 이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⑤ 왜 이 같은 고난이 임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회개할 것입니다(욥22:21-28).
⑥ 하나님께서 면케 해주실 때를 잠잠히 참아 기다릴 것입니다(약5:7-8).
⑦ 주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13:6).
캄캄하고 위험한 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까이 온줄 알고 굳세게 버티고 있어야할 때입니다. 어두울수록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⑧ 쉬지 말고 기도할 것입니다(시107:17-20).
⑨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살려 주실 줄 믿고 모리아 산을 올라갔습니다(히11:19). 밝은 빛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하여 준 것을 어둠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⑩ 하나님은 어디엔가 나를 도와주실 자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바르실래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한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80고령이었습니다. "왕이 마하나님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삼하19:32, 17:27-29). 망명객들을 돕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공궤는 한 번이 아니라 계속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상, 대야, 콩, 꿀, 치즈, 밀, 보리 등 14개 품목이나 제공하였습니다. 정성스런 공궤입니다.
(3) 바르실래의 공궤와 충성은 오래지 않아서 보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바르실래의 공궤와 충성은 오래지 않아서 보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진맥진해 있었을 때 바르실래의 공궤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의 도움과 격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쓰러졌고 압살롬도 넘어져 버렸습니다. 다윗은 승리자가 되었고 몽매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도 환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바르실래의 정성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요단강까지 바르실래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입니까?
하나님은 진정 살아 계십니까?
바울은 외쳤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바르실래 공궤는, 공궤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결단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마10:42).
우리가 주님 위해 흘리는 땀은 생명수로 보상될 것이고 주님 위해 애탐은 하늘 위로와 평강으로 보상될 것입니다. 적은 충성도 큰 상으로 갚아줄 것이고, 오른손이 모르게 한 숨은 봉사도 만인의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 위해 배고픈 자가 배부르게 될 것이며, 주님 위해 운 자가 많이 웃을 것이며, 주님 위해 헐벗은 자가 하늘 천으로 판 의의 옷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린 자로서 영생 받지 못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눅18:29-30).
왕의 보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마나하임에서의 공궤를 예루살렘에서 보상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과 바르실래와 이멸하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왕이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빌었더라"(39)
여러분의 충성에 대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이와 같은 보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은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좌초되는 위기가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은 여간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머리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눅21:25-28). 보상되지 않은 충성은 없습니다. "낮에 대왕을 맞으려면 밤에 과객을 받으라"는 말을 기억합시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음성이 들려오도록 하게 합시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에 옷을 입 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1-36).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삼하19:33),
이 보상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84. 3. 12)
4.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
4.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
(창41:14-45)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두 번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얼마나 여유가 있겠습니까? 한 번뿐인 삶을 의미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인생은 그 삶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실패했을 때 재기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항로에는 실패의 잔해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조건과 환경가운데 살았으면서도, 성공한 이가 있고, 더러는 실패한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만점의 환경 중에서도 실패한 이가 있고, 어떤 이는 불행한 가운데서도 성공한 이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공적인 생애를 산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물론 장애물은 있었습니다. 사실로 이 세상에 장애물 없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난관이나 불행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① 어떤 이는 믿음과 인내로써 잘 극복합니다. 물론 이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② 어떤 이는 반항심과 부정적인 태도로 밀려가다가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③ 어떤 이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원망하거나 부모를 원망합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 많은 슬한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훌륭한 생을 마쳤습니다. 다윗도 고난과 역경 가운에서 곱게 핀 아름다운 한 송이 신앙의 꽃입니다. 바울도 광야를 옥토로 일구어 샘물이 솟게 한 행복의 창작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못하지 않은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요셉입니다. 요셉이 만인의 눈에 돋보이는 삶을 산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애를 점검하였으면 합니다.
(1) 요셉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수없이 밀어닥친 불행 속에서도 한 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1) 요셉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수없이 밀어닥친 불행 속에서도 한 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사람의 한평생에 있어서 요셉만큼 불행한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부친 야곱이 처가살이할 때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는 방랑객 야곱의 만득자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기뻐해주는 할아버지도 없었고 안아주는 할머니도 없었습니다. 그는 엄마의 얼굴도 익히기 전에 사랑의 보금자리인 그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없이 자란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야곱은 어미 잃은 어린것이 너무나 가여워 채색 옷을 입혀주며 귀여워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이복형들의미움을 샀습니다(창37:4). 요셉은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께 말씀 드림으로 형들은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스러웠습니다(창37:2, 4).
요셉은 두 번이나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그의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37:7).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37:9). 이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그를 더욱 시기하여(창37:11), 이렇게 모의하였습니다(창37:20).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다행히 르우벤의 만류로 죽음은 면할 수 있었으나, 옷벗겨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창37:24). "개도 형제의 귀는 물지 않는다"지만 요셉의 형들에게는 눈물도 없었는 듯합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는 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 조식을 제거할 구실을 찾기 위하여 칠보시(七步詩)를 요구하였습니다. 조식이 형에게 지어 바쳤다는 칠보시는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콩깍지는 솥 밑에서 불타고, 같은 뿌리에서 생긴 콩은 솥 안에서 운다" 현대판 조비 때문에 교회 안이 평안치 못함은 불행한 일입니다.
아직도 요셉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디안 장사꾼들에게 팔려 종이 되어 애굽에 갔습니다(창37:28). 그는 또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일하다가 강간미수죄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창39:7-20). 그는 그 차디찬 감옥에서 2년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생각하면 요셉이라는 한 인간의 역사는 정말 슬픈 사연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았고, 한숨 쉬며 통곡하는 대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그는 복받쳐오는 설움을 억제치 못하고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이 같은 억울한 일을 외면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그렇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납니다.
산불이 지난 뒤에 돋아난 풀은 더더욱 윤기가 나는 법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한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갑절의 축복은 인내한 욥이 받았습니다(약5:11,욥42:10).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가 요셉의 성공을 부러워한다면 그의 인내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2) 요셉에게는 남다른 꿈과 크고 높은 이상이 있었습니다.
(2) 요셉에게는 남다른 꿈과 크고 높은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의 치리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그 꿈 때문입니다. 물론 그 꿈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는 그 계시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가 꿈을 두 번 꾼 것은 확실한 보장의 의미가 있습니다(창37:5-7,9). 또 그는 투옥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창40:9-23),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해 주었습니다(창41:25-36).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혜에 의한 것이 분명합니다(창40:8,41:16). 요셉은 확실히 꿈으로 축복받은 자입니다.
그는 비록 숨 막히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꿈이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꿈 때문에 가지가지의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이겨내고서 낙심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의 꿈을 이루어간 것입니다.
만일 요셉에게 이 꿈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득합니다. 그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때, 그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 웅덩이에 버림 받았을 때에도, 형들의 곡식단이 일어나서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디안 장사꾼들의 손에 팔려가면서도, 열한 별이 그를 둘러 서던 꿈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투옥되어 캄캄한 영어의 몸이 되었음에도 그의 어두운 환경을 밝혀준 그 꿈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꿈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는 꿈을 키우며 산 것입니다.
꿈은 현실을 초월합니다. 꿈은 고난과 역경도 극복합니다. 꿈은 눈물과 불행을 축복으로 바꾸고야합니다. 요셉에게는 이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폭풍우를 몰고 온 검은 구름을 야속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때 묻고 오염된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잔잔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요행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랑 저 너머 안전한 포구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전한 항해를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안전한 상륙은 보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였습니다(눅21:20-28). 바울사도는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빌3:20).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요셉이 가졌던 그 꿈입니다. 내일에의 영광을 위한 그의 인내입니다. 열매를 따는 즐거움이 아니라 나무를 심는 수고입니다.
꿈을 가집시다. 고난을 무서워하지 맙시다.
온실 속에서 피는 꽃은 아름다운 향기가 없습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위대한 선원이 나지 못합니다. 바위가 없는 개울에서는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진 페니실린은 곰팡이 속에서 양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에 오르도록 부름 받은 것은 감옥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녹슬도록 아무데나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는 가슴 설레이는 말은 죄수로 갇혀 있는 감옥에서 들은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썩을 때 새 생명으로 탄생됩니다. 소망으로 사는 사람은 음악이 없어도 춤을 춘다고 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는 이 꿈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3) 요셉이 크게 성공한 것은 그의 깊은 신앙 때문입니다.
(3) 요셉이 크게 성공한 것은 그의 깊은 신앙 때문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남다른 신앙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산 요셉에게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창41:40).
요셉의 신앙이 얼마나 신실했던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와 함께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하였습니다(창39:25).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창39:22).
요셉의 신앙은 남 다른 점이 있습니다.
① 외부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았습니다.
②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하게 믿었습니다(창45:5,7, 8, 9).
③ 신전의식이 투철하였습니다(창39'9).
④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잘 참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입니다.
그가 애굽의 치리자가 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이 같은 신앙 때문입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무능을 전능에다 매는 고리"라고 어느 분인가 말하였습니다. 옥에 갇힌 요셉은 무능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조일석에 애굽의 치리자가 된 것입니다.
안일한 처지에서 신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요셉이 받은 축복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한 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큰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가 성공하고, 축복 받은 것은 이와 같은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여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 당신은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차게 걸을 수 있는데도 절룩거리지는 않습니까? 휘파람을 불면서 살 수 있는데도 한숨 쉬는 자는 아닙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꿈을 키웁시다.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낙조의 빛 잃은 태양도 내일에는 찬란한 해로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벌거숭이 갯펄은 오래지 않아 만수가 되어 출렁댈 것입니다. 수레바퀴의 축은 언제나 위아래가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하여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을 것입니다.
불행을 고치는 약은 오직 소망밖에 없습니다. 어두운 밤도 오래 가지만은 않습니다. 과연 어두컴컴한 지하 감방은 일순간에 총리의 보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노동으로 굳어진 손에는 왕실의 금지환이 끼워졌고, 고통스럽게 채워졌던 착고 대신 금목걸이가 걸려 졌으며, 검푸른 수의 대신 세마포 고운 옷이 입혀졌고, 조소받던 죄수가 일약 만인 위에 우뚝 선 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 같은 신앙의 거인들은 모두 애굽의 치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 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아멘.
(84. 2. 14)
5.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5.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24-31,시133:1-3)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꽃 시샘 추위도 없을 것 같습니다. 두텁고 무겁던 옷들이 밝고 가벼워겼습니다. 웃는 모습도 한없이 환해 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기저기에 슬픈 사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밝고 아름다운 일들이 적은 것도 아닙니다. 새봄과 함께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활이 풀잎처럼 부드럽고 꽃처럼 아름다웠으면 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성경에는 아름답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내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에 치중합니다. 외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은 적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 반대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몸치장에 신경을 쓰는 것을 봅니다.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 모두의 공통된 욕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엔 없던 정형외과나 성형외과의 신세를 많이 집니다. 거기에 가면 오목코를 뾰족하게 만들어 주고, 눈에 쌍꺼풀을 만들어 주며, 얼굴을 둥그스럼하게 다듬어 준다고 합니다. 화장품이라는 게 있어서 얼굴을 곱게 꾸며주고, 미장원에서는 철따라 개성에 맞는 고상한 헤어스타일로 매만져줍니다.
언제부터인가 미녀학교(Charming School)라는 곳이 있고, 헬스클럽(Health Club)이라는 곳이 있어서 각선미와 손발의미는 물론 걸음걸이의미와 고상한 몸매를 갖도록 교정해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어 합니다. 살결은 우유 빛처럼 하얗고, 새까만 머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흰 이를 가진 사람을 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검은머리가 자랑이던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화장품을 늘어놓고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본능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름다움이란,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현재의 주어진 상태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셋째는 상실해버린 아름다움을 회복하고자하는 열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났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그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고자 열망합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상실해 버린 이 미는 외형의 변화나 꾸밈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칠한 무덤은 스며나오는 송장의 썩은 냄새를 막지 못합니다. 외식은 언젠가 실상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움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고,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속사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심성과 종교심과 신앙과 그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아름다움 없이 곁 사람만의아름다움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여기 좋다(tob)는 말과 아름답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것이 최선의미요, 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무엇을 그렇게 아름답게 보셨을까? 하나님의미적 관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1) 창조된 세계가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것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1) 창조된 세계가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것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하신대로 하나님의 소원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한 가지의 잘못도 없었고 한 가지의 빠진 것도 없었고 미흡한 것도 없었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았습니다. 흡족했습니다. 지나친 것도 없었고, 모자란 것도 없었습니다. 큰 것도 없었고, 작은 것도 없었습니다. 많지도 않았고 적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것도 없었고 추한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했고 모든 것이 흡족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는"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생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칭송했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에 부응했습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성호를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공중에 나는 새와, 바다 속의 고기까지도 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거기에 자기중심대로 사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만족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태어날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 주면서 "이 그림 중에서 무엇이 제일 돋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이 컵이다" 이 말을 들은 다빈치는 "나의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보다 더 주의를 끌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붓으로 그 컵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작품에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다시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는 "심히 좋았습니다"(It was very good),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창1:8,9, 11, 15, 24, 30)
아름답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대로 되니라"(It Was so)‥‥‥‥"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that it was good)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최상의미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산 종은 칭찬을 받습니다(마25:21, 23). 아버지 품에 안기는 자녀는 그 부모의 기쁨입니다(눅16:22-24).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시133:1).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마26:39).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일 겁니다.
(2) 창조된 세계가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것은 거기에 인간의 창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창조된 세계가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것은 거기에 인간의 창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in the image of God)창조하셨습니다. 이점이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지음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엡4:24).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를 보시면서 "심히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거기에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의한 진리와 거룩이 있었기에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를 닮은 자녀들을 더 귀여워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의가 이루어 질 때 그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진리가 충만할 때 그것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거룩이 성도들의 생활에 나타날 때 그것을 심히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름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죄 속에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런즉,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입니다. 불의한 자가 의로워지고, 진리를 거스리던 자가 진리 안에서 살게 되고, 더럽고 추한 자가 예수의 공로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한3서1:4).
예수님은 삭개오의 인간성 회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했다"고 기뻐하셨습니다(눅19:9). 십자가의 한 강도가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했을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축복했습니다(눅23:43).
요한복음 8장을 보면, 현장에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습니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을 것인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온 몸은 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치스런 죄인입니다.
진실로 그에게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면 주님은 그를 아름답게 보셨을 것입니다(요8:1-11).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었으나 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웠습니다. 얼굴이 고와서가 아닙니다. 미장원에 다녀와서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은 아름답지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늙어서 미워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의 옷을 벗었기 때문이요, 진리와 거룩의 옷이 얼룩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 가시와 엉겅퀴와 땀과 고통과 해산의 수고가 찾아왔었습니다. 아름다움은 갈기갈기 찢겼고, 온데 간 데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성형외과를 찾아가도 소용없습니다. 거울 앞에 앉아있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아모레, 피어리스, 쥬단학, 라미‥‥ 다 헛된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유의하세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이 아름다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 인간 창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형상을 회복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84. 2. 26)
6. 우리 교회의 소망
6. 우리 교회의 소망
(골로새서3:1-4)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살고, 다시 오실 그를 대망하면서 살자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순간적인 것이나 현세적인 것에 있지 않고, 위대한 소망의 삶이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일컬어「꿈을 잃어버린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은 현실주의와 찰라주의가 이상주의를 추방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꿈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꿈의 망각지대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없다고 함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며, 삶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가 어떠한 꿈과 희망을 지니고 사는가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18세기 사람들은 인간을 homo sapiens(이성인)라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반대로 homo faber(공작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유태계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특징을 homo esperans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은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옛날 희랍사람들은 사람을 anthropos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모든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고 먹이를 찾으며 살아가지만, 유독 우리 인간들만은 두 눈을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높은 차원을 소망하며 꿈꾸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꿈이 없이는 갑갑해서 못삽니다.
우리교회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1) 우리 교회는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우리 교회는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말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딤전4:12). 특히 직분을 받을 때의 그 감격과 각오를 잊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었습니다(딤전4:14). 전심전력(全心全力)이라는 말은 "생각한 것에 몰두하라. 네 자신을 전부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요컨데 충성스런 헌신을 의미합니다.
온 교회가 열심히 일하다 보면 거기에는 두드러진 결과가 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보입니다. 진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딤전4:15). 진보란 말은 prokope입니다. 이 말은 채찍질하여 앞으로 몰고 가는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주마가편이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전진, 양의 증가, 장성 등의 의미도 있습니다(눅2:52).
성도 여러분, 평안하게만 살려고 하지 맙시다. 쉽게 믿으려고만 하지 합시다.
채찍질 합시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합시다. 거기에는 반드시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몰라보게 믿음의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빌1:25).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나타날 것입니다(빌1:12). 전심전력 하는 자는 믿음의 진보가 현저합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믿는 분의 신앙은 진보와 향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의 성적 부진을 꾸짖지나 않습니까? 하나님은 웃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교회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롬12:11).
(2)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아졌으면 합니다.
(2)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아졌으면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기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고 그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①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2:41).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정말로 부러운 교회입니다.
② 초대 교회는"기도에 전혀 힘쓰는"교회였습니다(행2:42).
③ 초대교회는 유무상통, 상부상조하는 교회였습니다(행2:44-45).
④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 중에 낮선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사랑하였습니다. 형제애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불행은 함께 예배하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④ 초대교회는 한마음 한뜻이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였다"고 합니다. "흙이 기름지면 풀이 무성하고 일가가 화목하면 복이 생겨 번영한다"
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⑥ 초대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초대교회를 많았으면 하는 것이 꿈이요, 소망입니다.
(3) 우리 교회는 영육 간에 부자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꿈입니다.
(3) 우리 교회는 영육 간에 부자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꿈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가정들을 심방하면서 고생하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겹도록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활이 궁한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건강치 못한 형제들을 보았습니다. 초라한 오두막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굴이 고생에 찌든 것을 보았습니다.
헤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장을 얻지 못해 애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양실조로 힘을 잃고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교우들이 생활의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어서 부자가 되어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들보다도 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이 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두 주일도 출석하지 못하는 영혼의 가난뱅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분은 받았으면서도 아무 일도 못하는 영혼의 난쟁이들을 보았습니다. 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줄 모르는 영적인 장님들을 더러 보았습니다.
육은 번들번들하면서도 영은 빼빼 말라붙은 파리 한 몰골들을 보았습니다. 더러는 영적인 불구자들이 있었습니다. 더러는 기도할 줄 모르는 영적 심장병자들이 있어보였습니다.
저는 이들이 언제나 믿음의 부자가 될 수 있을른지 기다려집니다. 어서 믿음의 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우리 은광교회의 꿈이었으면 합니다. 저도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1:2).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믿음의 부자는 욥의 인내를 가집니다. 요나단의 우정을 잃지 않습니다. 요셉의 소망을 가집니다. 아브라함의 꿈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영육 간에 이와 같은 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4)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4)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주님은 자존자이 십니다(출3:14). 주님은 살아계십니다(눅24:5).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런즉, 주님은 무덤이 없습니다(마28:6). 그리고 교회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주님의 지체인 교회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땅히 살아있어야 할 교회가 죽어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아있다고 말합니다(히11:4), 그러나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습니다(계3:1).
확실히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은 교회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죽은 자들도 있고, 혹 죽은 교회도 있을 법합니다. 정말로 염려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죽은 교회입니까?
①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②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음성보다 사람들의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교회는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보다 사람들이 앞선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③ 생명체인 교회는 자라야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진전이 없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탄의 세력과 악의 세력에 도전할만한 힘이 없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지 않은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말씀을 떠난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습니다. 그 말씀 앞에 아멘하고 엎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삽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꿈이요, 소망입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3월8일 유명한 워싱톤 대행진 때의 연설 "나는 꿈을 가진다"를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곤란은 첩첩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꿈을 갖는다. 언젠가는 미시시피주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고. 나는 꿈을 갖는다. 나의 사 남매가 피부의 색깔로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꽉 차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무서운 고난을 당하던 한 지하 감방의 벽에서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별은 수감자들이 그들의 손톱으로 벽에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빛이 우리에게 비춰오고 있지는 않지만, 저기 진실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노라" 그들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멎고 난 뒤의 찬란한 태양빛에 대한 확신과 꿈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설립 37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맡은 일을 위하여 전심전력 하여 진보를 나타낼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에의 꿈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육 간에 아울러 부자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우리 은광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로서 전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힘찬 전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84. 3. 11)
7. 앞으로 나갑시다
7. 앞으로 나갑시다
(출14:10-20)
하나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백성인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12: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 년 동안 귀중한 인권을 상실하고 애굽에서 노예로 큰 고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부르사 그들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강퍅한 바로도 열 재앙을 당하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남부여대 60만 대군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로 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노인은 울고, 젊은이는 춤을 추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변한 바로는, 곧 이스라엘의 뒤를 특별 기동대를 동원하여 추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로 위기입니다. 뒤에는 애굽사람의 군대가 좇아오고 있습니다. 또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큰 야단이 났습니다. 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로 이끌어 내어 죽게 합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낭패를 당하게 합니까?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무어라고 합디까?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디까?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14:11-12).
이스라엘의 원망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때, 모세는 당황하지 않고 두 가지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① 당황한 백성들을 안정시키며 격려하였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②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14:15).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즉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본문의 내용이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제목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슬한 난관을 극복하게 한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과 꼭 같이 난관과 어려움으로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앞으로 나아갑시다.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1) 목표가 분명할 때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한 것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홍해에 수장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가나안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에게는 이 같은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원망하고 방황한 것입니다. 목표가 없이는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없이는 전진이 없고, 전진이 없이는 성장이 없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대한 꿈과 목표가 분명했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목표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태어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표를 정한 후 그 목표를 지향하여 일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성공할 사람이다. 성공을 원한다면 겨냥을 해야 한다. 먼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일할 것인가를 분명히 이해하고, 다음에 개가 고양이를 좇듯이 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망률도 결혼식이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나 그 전 날에는 훨씬 감소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앞에 어떤 꿈과 목표가 있을 때에는 비상한 힘도 생겨,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목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삶의 목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크로닌이라는 의사는, 의사가 되어 병원을 개업하면서 큰 돈 버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돈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돈은 벌려지지 않았습니다. 개업할 때의 포부와 꿈은 온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디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크로닌아, 돈 벌기를 원하거든 너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나를 위하여 일하거라." 크로닌은 무릎을 치며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의 건강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문난 병원이 되었습니다. 환자들은 그치지 않았고, 드디어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그는 그 많은 돈을 선교비에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1946년 9월 10일 테레사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테레사야, 칼타코에 가게 되면 수많은 거지와,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길거리에서 나서,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데, 너는 그들에게 가서 살았을 때는 잠자리를 주고, 죽어서는 무덤을 주거라" 테레사는 이 음성을 들은 후 1948년 8월 8일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그는 수녀복을 벗고 떠나면서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주여, 나는 오늘 밤 어디서 잘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나는 내일 아침 어디서 먹을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나는 이 한 벌의 옷이 헤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주께서 떠나라고 하여 떠나나이다. 주께서 내 일생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빈 몸으로 떠난 그녀는 30년이 지나, 드디어 세계에 100군데나 되는 고아원을 지었습니다.
그녀는 빈민촌의 성녀가 되었고, 노벨평화상을 받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목표와 그 일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푯대가 분명하면 전진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2)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앞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면 밭이랑이 굽게 됩니다. 일을 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다른 어떤 관심사에 눈을 팔면, 그는 다만 절반만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란한 마음과 미온적인 태도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삶의 원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한다"는 것입니다(빌3:13).
그의 관심사는 앞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과거지사를 되돌아 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잘한 것이나 성공한 것을 돌아다보면 자만에 빠지기 쉽고,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돌아보면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입니다(히12'2).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진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이 상황에서 애굽의 노예생활에 연연하는 것은 정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롯의 처를 보세요. 그는 뒤를 돌아다 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6). 그는 소돔성의 것에 연연하다가 천추의 한이 되는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3) 믿음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16).
인생은 순경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후좌우가 막힐 때도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한 발자국의 전진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 설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바로의 기병대가 추격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진퇴양난입니다.
모세는 이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15-16).
자연적인 이 성으로는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입니다.
마테복음 12:9-13에 보면 예수님은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히브리인의 복음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석공이라고 합니다. 석공의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6:6에 의하면, 그 손은 더군다나 오른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손을 내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손이 말라버린 사람이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저가 손을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장애물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제거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 하신대로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 결과는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출14:21). 이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진 했을 때, 바다가 열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 신앙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애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장애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은 극복하는 자만이 전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실패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처음부터 실패자로 운명 지워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실패한 것은 실패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바람 속에서 어떤 돛단배는 동쪽으로 가고, 다른 돛단배는 서쪽으로 갑니다. 이는 키의 방향의 차이 때문입니다. 같은 장미를 보면서도, 어떤 이는 장미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만 다른 이는 장미의 가시를 보면서 불평합니다. 같은 소아마비에 걸렸으면서도 하나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되고, 다른 이는 자기 운명을 비관한 나머지 거지가 되거나 자결해 버리고 맙니다.
같은 시간에 꼭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떤 이는 상처를 받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가슴에 멍든 상처가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마음의 자세의 차이로 귀결됩니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장애물 앞에 주저앉고 맙니다. 여기에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있고 여기에서 한 인간의 생애는 결정됩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84. 3. 25)
8. 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
8. 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
(대하7:11-18)
부흥은 모든 교회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에는 언제나 교회의 부흥에 관한 애절한 소원이 따릅니다. 교회를 부흥시킨 목회자는 기고만장하기 마련이고, 그렇지 못한 교회의 목사는 비난과 함께 무능력자란 낙인이 찍혀 그가 설 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국 교회로서 배가운동이니, 총동원 전도운동의 물결을 타지 않은 교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들 운동들은 부흥을 열망하는 목회자들의 몸부림의 한 단면이라 하여도 그렇게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이 부흥이라는 말이 단 한 곳에만 쓰여져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합3:2). 이는 하박국선지의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이 말은(Chayah-revival), 쇠잔한 것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은 재생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으로 충만한 영적상태를 말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엄위하신 임재 앞에서, 뭇 심령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높이며 그 뜻을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 부흥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흥의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당시, 미스바에서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삼상7:5-6).엘리야선지 때의 갈멜산 사건은 엄청난 부흥입니다(왕상18:21-40). 히스기야 왕 때에도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대하30:1-27). 그들은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겸손해졌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희락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30:26).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부흥은, 에스라 때에도(스10:1-44), 세례요한 당시 에도(눅3:2-1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에도(요4:28-42), 오순절 날에도(행2:1-47), 빌립이 사마리아에 있었을 때에도(행9:35), 바울이 안디옥에 갔을 때에도(행11:21, 13:48),그가 또 에베소에 갔을 때에도(행19:18-20)
거기에 부흥은 일어났습니다.
부흥은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흥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부흥은 아닙니다. 그것은 부흥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부흥의 축복이 임할 때, 모두는 하나님을 높입니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반 만의 신자들이 온전한 신자로 변화를 받습니다. 나태하던 자들이 충성스러워 집니다. 비난의 말 대신 찬송과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 부흥의 모습입니다.
정말로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부흥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 때문입니다. 이 장애물을 헐어야 부흥의 물줄기는 터져 나을 것입니다.
그 장애물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1)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죄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전능하심과 영광으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거처를 얻으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사람들 중에서도 기뻐하실 수도 없고, 만족하실 수도 없습니다. 부정한 것은 마땅히 성결케 되고, 깨끗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고로, 그의 몸된 성전도 성결해야 합니다. 죄 있는 곳 부정한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은,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지"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악한 길"은, 곧 죄요, 죄의 길입니다.
죄는 하늘의 은혜를 가로막는 담이 됩니다. 죄는 은혜의 역사를 가로막는 담이 됩니다. 죄는 하늘의 축복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죄는 은혜의 문을 차단합니다. 이 죄의 담 때문에 부흥이 없습니다. 이 죄의 장애물 때문에 축복의 통로가 끊깁니다. 그런즉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없는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습니다.
죄를 통회하는 기도와 눈물이 없는 곳에, 은혜의 단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 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초대교회에서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2:38).
이것이 곧 부흥입니다. 부흥은 변화가 있는 곳에 찾아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의인이요, 위대한 방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티끌과 재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욥42:6).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곤경에서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욥42:10). 여기에 갑절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복하였을 때였습니다(삼하12:13).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다윗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낱낱이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과 거지가 따로 있지 아니합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이 죄의 장애물이 제거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가슴들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인 부흥인 것입니다.
1907년 정초에, 평양에서는 연합 부흥집회를 가졌습니다. 성도들은 이 기간에 특별한 은혜를 주실 줄 알고 힘써 기도하며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8일째인 마지막 날인데도, 1500여 명이 모인 집회는 냉냉 했습니다. "이처럼 사모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은혜를 주시지 않을까?" 의심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때에 돌연 길선주 장로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아간이요, 나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를 안 주십니다"라면서 통회자복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이러합니다. 일 년 전에 친구가 죽으면서 자신의 사후를 부탁하였습니다. "아내는 힘이 없으니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보아주면서 100$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그 돈을 과부에게 갔다가 갚겠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구름은 걷히고 담은 헐리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회중은 통회 자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내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일밤 7시에 시작한 집회는 새벽 2시에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부록이라 할 만큼 놀라운 한국교회의 부흥은, 이로 말미암아 확대된 것입니다. 그날 아침으로 끝나려던 집회는, 계속 모이게 된 것입니다.
죄는 부흥을 가로막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웁니다. 죄는 뜨거운 가슴을 냉냉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차단해 버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걸리는 죄는 없습니까? 숨은 죄는 없습니까? 죄를 숨기고 있는 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는 토해내야 합니다. 아간이 범죄했을 때, 이스라엘의 전진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22:23).
~(2)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교회는 부흥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라"고 합니다. 여기 '겸비'란 말은 Kana인데, '무릎을 굽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낮추다 엎드러지다. 항복하다. 겸손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은혜의 문은 높지 않습니다. 부흥과 축복의 문도 그러합니다. 그런즉 머리를 높이 드는 자는 그리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누리기 원하거든, 먼저 무릎 꿇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데서 비롯됩니다(단5:20-23). 그것은 또한 악한 생각에서 나옵니다(막7:21-22), 그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데서 비롯됩니다(눅18:l1-12). 히브리어의 교만이란 말의 근본 뜻은 "올라가다, 오르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부흥되기가 힘듭니다. 이 교만은 부흥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합니다(눅18. 13-14). 자신의 무가치함을 잘 압니다(눅15:17-21). 솔로몬처럼 자신의 무능을 압니다(왕상3:6-14).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과연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과연 아버지는, 회개하는 탕자를 위해 잔치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능을 자백한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부흥은 우글거리는 사람들 속에 있지 않고, 가슴을 치는 손 가까이에 있고, 흥건히 젖은 손수건 곁에 있으며, 통통 부어오른 눈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교만을 멀리합시다. 그것은 교회 부흥의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3)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기도의 부족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성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난 절박성이 부족하고, 심각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기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도 기도에 의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틀거리고 있는 것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에 실패하는 것도, 기도가 없기 때문이요, 우리가 방황하고 있는 것도 기도의 부족 때문이요, 우리가 무력한 것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더욱 어려운 때는, 더욱 기도할 때인 것입니다. 사탄은, 가장 연약한 크리스천이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벌벌 떨며 제일 무서워 한다고 합니다.
사실로 교회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였고, 하나님의 큰일은 기도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모세가 기도했을 때 홍해는 갈라졌고 이스라엘은 절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하였을 때 태양은 머물렀고, 그의 대적들은 골짜기와 언덕에서 쓰러졌습니다. 엘리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불과 함께 비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을 때, 도르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자비를 얻기 위하여 기도했던 강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를 그쳤을 때에, 소돔성은 그들의 죄와 함께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기도했을 때, 로마교의 사제들과 교황이 벌벌 떨었습니다. 죤 낙스가 기도했을 때, 영국의 메리여왕은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하기를 계속하였을 때, 성령이 임하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확신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가득 찼을 때, 3,000명의 영혼이 새로 거듭났습니다.
부흥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흥은 항상 기도의 응답으로 오는 결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흥은 여성도들이 거울 앞에 서는 시간만큼 기도할 때 올 것입니다.
부흥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기도할 때 올 것입니다. 부흥은 십자가의 사람들이 하늘 보좌를 붙잡고 기도할 때 찾아 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흥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부흥되지 못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흥을 차단하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만 때문입니다.
셋째는 기도의 부족 때문입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함으로 교회가 부흥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아멘.
(84. 4. 1)
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창세기1:1-5, 시30: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실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없었다면 아무도 우주 만물의 근원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첫 절인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해 줍니다. 천지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진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은, 다윈(Darwin)의 진화론을 배척하고,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론을 물리칩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진화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성경의, 첫 절의 말씀은 우주와 만물의 시작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또한, 언젠가는 우주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시작이 있는 곳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은 처음과 나중이십니다(계1:8,21:6, 22:13). 이 세상을 내시고 펼치신 하나님께서는 펼친 것을 거두시고, 내신 것을 정리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1:3-5).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빛은 우주의 첫 날에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② 그 빛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③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으로, 어두움을 밤으로 하여 하루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루는 빛과 어두움을 포괄하고 있으며, 낮과 밤으로 구성되었고, 아침과 저녁으로 연속되고 있습니다.
이 빛과 어두움,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의 구분은, 최초의 날에 되어진 것입니다. 이 낮과 밤은 광명이 주장합니다(창1:16,시136:8, 렘31:35). 이 낮과 밤은 서로 대조되는 시간입니다(창1:5). 이 낮과 밤은 땅이 있을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창8:22).
낮은 일할 때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일할 수 없습니다(요9:4). 낮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깰 때입니다. 그러나 밤은 죄악의 잠이 들 때입니다(롬13:11-12). 성도들은 다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어두움에 속한 자입니다(살전5:5), 하늘에는 밤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계22:5, 유다1:15).
성경은 낮과 아침과 빛을 아름다운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낮에 속한 자입니다(살전5:8). 성도들은 다윗의 자녀입니다(살전5:8). 빛이 있는 낮에는 방종할 수 없습니다(롬13:13), 아침은 경건의 때입니다(시5:3, 88:13), 빛은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요일1:5).
그러나 성경에, 어두움과 밤은 죄와 불행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고통을 상징합니다(욥30:30, 애5:10). 어두움은 슬픔을 상징합니다(렘8:21). 밤은 무지와 죄를 의미합니다(계21:25). 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미3:6). 밤은 죽음을 의미합니다(요9:4). 즉, 밤은 불행과 눈물을 의미합니다.
흑암은 지옥을 의미합니다(마22:13). 밤은 죄의 길을 의미합니다(엡5:ll).
요컨대 여기 낮과 밤을 우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낮은 성공과 번영과 위로와 축복과 행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은 그 반대로 병고와 재난과 죽음과 불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여기 보면 태초로부터 빛과 어두움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최초의 날에, 벌써 낮과 밤은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날에 벌써 희망에 찬 아침과, 슬픔이 저녁은 정해진 것입니다. 그때에 벌써 눈물 나는 밤과, 슬픔의 구름이 걷히는 아침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이 진리는 천지창조 후 오늘까지도 계속됩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 인간 세계는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의 진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즉 나의 환경이 변하고, 성공의 낮에서 실패의 밤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놀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고 해도 겁낼 것 없습니다. 축복이 변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순경이 변하여 좌초되는 역경이 임한다 할지라도 낙심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낮과 밤의 질서는 태초로부터 있어온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밤을 축복의 낮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행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생각함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게 하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낮과 함께 밤도 똑같이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하루하루는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이 교대로 엮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그러합니다. 낮과 밤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도 일반입니다.
만일 어두움 속에서 슬퍼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면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물의 밤이 지나면 태양은 동녘을 찬란하게 비추어 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녁이 지나면 아침이 된다는 이 말씀 속에는, 앞으로 다가올 기쁨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그러나 만일 지금 대낮의 번영과 축복 속에서 눈물을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가 있다면, 이 말씀 속에서 큰 경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역사를 시작하신 첫날에, 벌써 빛과 어두움의 변화를 규정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마지막 때는, 믿음이 없는 때입니다(눅18:8). 믿음이 없는 때는 어두운 때입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사21:11-12).
~(2)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낮과 밤의 질서 속에서 만족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낮을 내신 하나님께서 밤도 내셨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이 법칙은, 인간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낮과 밤의 질서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스 땅의 족장 욥은 주의 손으로 부터 오는 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즐겨 받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욥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욥의 이 말들은 기막힌 환란 중에 한 말들입니다. 그는 환란의 밤에도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폭풍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재물 잃고, 한꺼번에 열 자녀까지 잃고, 몸에 병까지 들었어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입을 열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즐거운 태양이 돋는 때에도, 황혼이 깃드는 어둔 밤에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욥의 밝은 낮은, 만인의 부러운 바였습니다. 그 낮은 아름다운 낮이었습니다. 욥이 누리던 부귀영화는 동방의 제일이었습니다. 그의 지위는 우스 땅의 족장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홍포에 감기웠으며, 진수성찬 속에 파묻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밤은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 밤은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오래고, 너무나 고단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어두운 밤에도 입을 열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어두움이 깃드는 저녁노을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일출의 기쁨은 물론 일몰의 아름다움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신선한 아침노을뿐만 아니라, 황혼이 깃드는 저녁때에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낮과 밤에 대한 욥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것이라면 좋거나 나쁘거나 즐겨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쓰거나 달거나 간에 불평 없이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찾아온 것이라면, 밝거나 어둡거나 간에 노래하였습니다. 이 신앙이야 말로 욥의 재산이었고 이 태도야말로 갑절의 축복을 받은 요소였습니다.
욥은 이 신앙으로 어둠을 밝혀 재물 잃고 감사하고 자녀 잃어도 노래한 것입니다.
그에게도 밤은 찾아 왔으나 믿음의 등불로 밝히며 낮같이 산 것입니다.
~(3) 아침과 저녁으로 짜여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아침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저적이 가면 아침이 오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설탕 그릇과 함께 소금 접시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최상의 메뉴를 '아멘' 하면서 받아먹자는 것입니다."내가 비천에 처 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바울의 정신을 갖자는 것입니다(빌4:12).
100세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가정의 기쁨을 상상해 보세요. 정녕 그의 가정에는, 아름다운 태양이 돋는 축복스런 아침이었습니다. 만득자를 얻은 기쁨의 낮입니다. 평생 소원이 성취된 행복한 낮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낮은 길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찾아온 어두운 밤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창22:2). 천지가 무너지는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기대와 소망이 산산조각 나는 밤입니다. 통곡해도 시원치 않은 밤입니다.
너무나 원망스런 밤인 것입니다. "100세에 주시고는 달라 하시다니‥‥.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 하시다니‥‥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하나님 무정하십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오래가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이었습니다. 폭풍우가 개이면 밝은 날이 오듯이, 여호와이레의 밝은 아침은 곧 왔습니다. 모리아산의 깊은 밤은 오래지 않아서 축복의 대낮으로 바꿔 것입니다. 모리아산은 슬픔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은 눈물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은 오히려 축복의 산이요, 여호와이레의 산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참을 수 없는 밤도 없고, 손해되는 밤도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밤과 낮은 고루고루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즉 아침이 와도 순종하고 밤이 와도 싫어하지 합시다. 해 뜨는 일출에도 감사하고 해지는 일물에도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밤도 필요하고 낮도 필요합니다.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욥에게 그 시련의 밤이 없었다면, 갑절의 축복을 받는 낮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의 저녁이 없었다면, 믿음의 조상되는 아침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요셉에게 노예의 몸되는 어둠이 없었다면 애굽의 총리되는 빛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정코 슬픔의 밤에야말로 은혜의 이슬은 풍성히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는 고통이 없었다면, 옥사장이 구원 받는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씨앗을 뿌리는 손해가 없이는 추수하는 즐거움 또한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십자가 지는 눈물의 밤이 없다면, 면류관 쓰는 영광의 낮도 없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밤도 낮도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슬픔의 밤을 인하여, 기쁨의 낮이 오는 법입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하늘 문 열린 것을 보았고, 요한은 밧모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욥은 완전히 망한 뒤에 구속자가 살아계심을 보았고, 번연은 옥중에서 하늘가는 길을 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돛단배는 빨리 갑니다.
밤이 어두워야 별빛은 더 빛나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환경이 변한다고 놀라지 맙시다.
낮과 밤은 교대로 옵니다. 낮과 밤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입니다. 낮과 밤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셔서 내신 것입니다. 아무리 밤이 어둡다하여도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울만큼 캄캄한 밤은 없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클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의 대로는 열려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성도여, 슬픔의 밤을 인하여 낙심하지 합시다.
하나님의 자녀여, 가시밭길을 개척하여, 시온의 아침이 되게 합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ll).잘 참고 기다립시다. 우리 주님의 나라에는 밤이 없습니다(계21:25).
(84. 4. 8)
10. 내 교회를 세우리니
10.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복음 16:13-20)
낙후된 광주지역 시가지의 포장이 새롭게 단장되고, 거리가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의 옥외 미사 집전 장소로 예정된 무등경기장 주위를 잘 경계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천만번 옳은 일입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나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여 학교를 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국적인지 광주시내의 일부 지역인지 나는 모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진실로 비통함을 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심한 모욕과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정중한 예우는 우리 모두의 갖추어야 할 상식입니다만 로마교 수반인 교황의 방한에 대한 지나친 국가적인 준비는, 주권국가로서의 긍지에 손해면 손해였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과 함께, 방한하는 본인에게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로마교를 잘 모르는데서 온 결과이다"
로마교는 도대체 어떤 종교입니까?
~(1) 로마교는, 잘못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로마교는 성경에 대하여, "신앙의 제1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무서운 함정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신앙의 제2,제3의 기준 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로 그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권위 있는 기준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소위, '가경' 혹은 '외경'입니다. 구약의 원문 히브리 성경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된 70인역(Septuagint)에는, 히브리 성경에 없던 것이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로마교에서는 1546년에 모인 트렌트 공회의에서 이것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여 정경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기준으로, 성경과 함께 교회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성전(聖傳)'을 믿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보다는 성전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 결과로 성경에 없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선행에 의한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없는 연옥설이 중요한 교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를 주장하고, 그 마리아를 숭배하며, 그 마리아에게 더 많이 기도합니다.
이 외에도, 비적, 미사, 7성례, 고행주의, 성체 등 잘못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이, 우리의 신앙의 정확무오한 표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교황을 머리로 하는 고위 성직자로 대표하는 교회가, 성경의 그릇됨이 없는 해석자라고합니다. 성경의 해석권은 성경보다 먼저 있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성경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황 힐데브란트는, 성경을 읽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사람들이 자기나라 글로 성경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레고리 9세는, 평신도들이 성경 가지는 것을 금했고, 성경 번역을 억압했습니다. 그는 번역된 성경을 거두어 불태웠고, 이 번역 성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화형시켰습니다.
바울4세는, 종교재판의 허가 없이 번역 성경 가지는 것을 금했습니다.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 16세, 비오 9세는 모두 성서공회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도들이 성경에 눈 뜨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그들은 단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교회의 절대권위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보다도 종교회의의 결정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교는,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유일의 기준"으로 믿습니다. 성경보다 우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에다 최고의 권위를 두셨습니다(요5:39, 마22:29, 눅24:27) 사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벧후1:21, 행15:16-18, 롬4:).그러나 로마교는, 성경을 평가절하 시키고, 교회를 성경 위에 올려놓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는 여기서부터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로마교는 잘못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종파입니다.
구교와 신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기독교의 권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입니다.
신교에서는 그 권위를 성경에 둡니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그 권위를 교회에 둡니다. 구교에서는 교회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기 때문에, 교황이 선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어리석게도 '교황무오설'도 나오고, '교회지상권위설'도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 로마교만이 유일한 교회이며, 참된 교회라고 망령된 주장을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속성을 말할 때 ①교회의 통일성 ③교회의 거룩성(堅性) ③교회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여기에다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합니다. 그 이유로써 그들은, 이 교회의 기원을 사도들에게서 찾기 때문이며, 그것의 교리는 사도적 전통에 기초한 때문이며, 또 교황과 감독들은 사도들의 법적 계승자인 때문이라고 억설을 주장합니다.
마16: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베드로를 반석이라 주장하고, 예수님께서 반석인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곧 로마교회요, 로마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역대의 교황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베드로(인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① 베드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러 번 실패한 자입니다(마14:29-30, 26:72). 그런즉 베드로 자신은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16:23절에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했다하여, 그가 사단은 아님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② 마16:18절에 '반석'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는 남성명사로 사용되었고(Petros), 두 번째는 여성명사가 사용되었습니다(Petra), 만일에 그 반석이 베드로라면 두 번 다 남성명사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③ 사도행전 10:26절에 보면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반석이라고 말하지 않고,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반석이 아닙니다.
④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회가 모여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가지고 토의할 때, 베드로의 발언이 아닌 야고보의 발언으로 결정했습니다(행15장). 또 베드로는 외식하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갈2:11),
이상의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보다 특정한 인물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반석이란,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그 신앙고백이란 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은, 진정 아름답기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같은 신앙고백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는 의미도, 로마교는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① 이 말의 뜻은 사도들에게 복음 전파의 권리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권리를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Calvin).
② 이 말은 사도들에게 교회의 치리권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치리권도 영혼의 지배권을 말함이 아니고, 영혼의 성결과 교회 전체의 성결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즉 천국 열쇠는 베드로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엄청난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로마교는 종교와 정치의 두 얼굴을 가진 어딘가 잘못된 집단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종교이면서, 또 하나의 국가 행세를 하는 이상한 집단입니다. 바티칸을 통치하는 교황은 왕과 같이 처신합니다. 그는 바티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천주교 신자를 다스립니다. 바티칸은 전 세계 80여국과 더불어 대사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종교가 어떻게 대사를 파견할 수 있을까? 이것을 보면 하나의 정치단체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또 종교로 자처합니다. 하여간 두 얼굴을 가진 이상한 집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생길 때, 그 나라의 정치에 간섭합니다. 또 그 나라의 위정자가 로마교인일 때, 국법에 따르기보다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야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메사츄세츠주에서는 로마교 신자가 지사로 당선되어, 주의 법대로 취임선서를 한 뒤에 지사실로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던 신부에게 그 선서를 취소하는 순서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4) 로마교의 교황제도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하는 로마교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로마교의 교황일람표는 1세기의 로마 감독으로부터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500년 동안의 로마 감독은 교황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감독이 모든 교회에 대한 권위를 가져야한다는 생각은, 심한 논쟁을 받았으며 전체적으로 승인된 적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었다는 로마교의 전설은 단순히 꾸며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을 지냈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에 없으며, 역사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그는 로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 같은 권위를 말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
교황 중에 어떤 이는 좋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형편없이 나빴습니다. 대부분의 교황들은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였습니다. 셀기우스 3세는 "음녀통치"라고 불리우는 시대의 교황입니다. 그에게는 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의자를 그들의 간부와 사생아로 채우고, 교황의 궁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보니파이스 7세는, 요한 14세를 죽이고 "훔친 돈을 아낌없이 써서 피로 물든 교황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며, 올리안스(Orleans)주교는 요한 12세, 레오 8세, 보니파이스 7세를 "피로 더렵혀진 악마, 하나님의 성전에 앉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요한 15세, 그레고리 5세, 실베스터 2세, 요한 17세, 요한 18세, 셀기우스 4세, 베네덕트 8세는 공공연하게 교황권을 돈으로 산 자들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성직매매(Simony)라고 합니다. 교황 베네딕트 9세는, 돈으로 12세에 교황이 되었는데 "요한 12세를 능가하는 악인으로, 낮에도 살인과 간음을 행하고, 순교자의 무덤을 순례하는 사람들의 돈을 훔치고, 끔찍스런 죄를 짓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황제 헨리 3세는, 클레맨트 2세를 교황으로 임명했는데, 황제가 교황을 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성직자 중에는 성직매매와 간음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이나 하늘이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속해 있다" 그는 화체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라틴말이 아닌 다른 말로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는 신교도들을 피 흘려 죽게 한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교황권은 종교재판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이 종교재판소는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설립하였고, 그 다음 교황인 그레고리 9세가 완성했습니다. 소송절차는 비밀이었습니다. 재판장이 선고하면, 관헌에게 인도되어 무기형이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피해자의 재산은 박탈하여 교회와 국가가 나누어 가졌습니다. 1540년부터 1570년까지 30년 동안 사형당한 신교도는 무려 900,000명이나 됩니다.
무죄한 남녀가 고문당하고 화형 당했습니다. 이 종교재판은 역사상 가장 악랄한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이 제도를 500년 동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교황이 부인할 것인가?
보니파이스 8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구원받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 이태리의 시인 단테가 보니파이스 교황 재직 중에 로마를 방문하였었는데, 그가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그는 바티칸을 "부패의 소굴"이라 부르고, 니콜라 3세와 클레벤트 5세와 함께 지옥의 맨 아래에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15세기의 교황 비오 2세에게는 사생아가 많았다고 합니다. 교황 바울 2세는 첩으로 그 집을 채웠다고 합니다. 교황 식스터스 4세는 돈으로 영혼을 연옥에서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황권을 이용하여 자신과 친척들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조카 8명을 아직 어린데도 추기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황 인노센트 8세는 여러 부인으로부터 1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성직을 늘려 팔았습니다. 교황의 면죄부는 매우 수지 맞는 것으로, 돈벌이가 좋았던지 도매 소매의 제도까지 생겼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회개나 고행이나 신부의 사면이 필요 없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고, 이미 지옥에 가있는 불쌍한 영혼도 천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 항의문을 씨 붙이고 종교개혁의 불씨를 붙인 것은 이렇게 타락하고 썩어빠진 미신에게서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520년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면서 "60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이단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루터는 이 파문장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1520년 12월 10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때로부터 교황의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루터의 지지자들은 교황에게 항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신교의 대명사처럼 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말이 쓰여진 것입니다.
1600년대 보헤미아는 전인구의 80%가 신교였으나 거의 전부 학살당하고, 지금 보헤미아 국민은 그 당시에 살아남은 20%의 천주교 교인들의 자손들입니다. 그때쯤의 오스트리아, 항가리 둥지의 신교인도 거의 전부가 학살당했습니다. 화란에서도 100,000이상의 신교인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교황직속 종교재판장인 도케마다에 의해 18년 동안에 10,200명이 화형 당했고, 97,000명이 종신징역을 당했습니다.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100,000명이 순교당하고, 1,500,000명이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태리나 스페인 같은 천주교 국에서는 신교의 선교사 입국이 불가능합니다. 콜름비아나 아일랜드 같은 천주교국에서는 신교의 교회당 건축, 서점 경영, 병원, 학교운영의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신교 지도자가 학살당하고 무서운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아는 이는 압니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책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주교는, 소수일 때는 어진 양과 같고, 동수일 때는 여우와 같으며, 다수가 될 때에는 호랑이가 된다."
이 천주교의 우두머리 교황이 5월 3일 우리나라에 온다고 합니다. 천주교가 환영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으나, 국가가 앞장서서 막대한 공금으로 준비하며, 국빈 대우를 하기 위하여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반체제인사, 신교 목사들은 말 한 마디 없이 잡아 가두기도 잘하면서 미문화원 사건과 관계된 최기식 신부를 검속할 때는 주한교황청 대사에게 사전 통보하는 친절을 베풀었다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천주교국입니까? 성도여러분,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홍반식 박사님의 다음 말씀을 결론으로 드립니다."현대 기독교 신자에게 가장 큰 위협의 대상이 되는 두 단체가 있으니 하나는 공산주의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 세력이다"(84. 4. 29)
11. 성공적 인 인생건축의 비결
11. 성공적 인 인생건축의 비결
(마7:24-27)
성경에는 곳곳에서 건축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바벨탑을 세우고(창11:3-4), 제단을 쌓고(창13:18), 성읍을 건축하고(출1:ll, 수24:13), 집을 짓고(창33:17, 신8:12), 성전을 건축하고(왕상6:2-36), 산당을 세우고(왕상14:23, 왕하17:9), 망대를 세우고(대하26:9-10), 회당을 건축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나옵니다(눅7:5).
그리고 많은 건축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도성(창4:17), 제단(창8:20), 탑(창11:4), 집(창33:17), 가축우리(민32:16), 요새(겔4:2), 성전(스4:1), 산당(왕상11:7), 성벽(느4:6), 회당(눅7:2-5)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의 비유적인 의미를 여기저기에 말씀하고 있습니다(마7:24-27, 16:18,26. 61, 요2:19, 갈2:16-20, 엡2:19-22, 행20:32, 골2:7, 벧전2:5).
성경은 우리 인간을 집짓는 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건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골2:7). 필립 폴 블리스(Philip Paul Bliss)작사 작곡으로 되어있는 찬송가 379장은 이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해줍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주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성공적인 인생건축의 비결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기로 했으면 합니다.
~(1)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설계는 건축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건축공사 등의 목적으로, 공비나 부지, 구조 등에 관한 계획을 도면에 명시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건축공사는 이 설계에 의해 허가되고 또한 진행이 됩니다. 그런즉 건축물의 견고성 여부와 쓰임새와 좋고 나쁨은 오로지 설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계는 이만큼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 전체를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할 때 거기에 필수적인 것은 설계입니다. 설계 없이 건축물이 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계 없는 공사가 부실공사라면, 설계 없는 인간은 부실인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건축을 위한 설계도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말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4).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보이신 설계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창6:14-16, 22, 7:5). 모세는 성막 건축에 관한 설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출25:8-9, 40, 27:8, 행7:44).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성막을 건축하였습니다(출39:1,5,7,21,26,29,31,32,42,43. 40:16,19,21,23,25,26,29,32, 민8:4).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약1:18, 시119:160). 성령의 집입니다(엡6:17). 살아있는 말씀입니다(히4:12). 거듭나게 하는 말씀입니다(벧전1:23).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딤후3:15). 생명을 얻게 합니다(요20:31), 갈 길을 인도합니다(시119:105). 범죄치 않게 합니다(시119:9,11).
이 말씀대로 산 노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축복스런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창3:23-24). 가룟 유다는 파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마27:5, 행1:18).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6-27).
~(2) 건축에 있어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기초가 어디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이가 있고, 반석 위에 짓는 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집은 기초에 따라서 그 견고성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다 할지라도 그 기초가 좋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는 목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곳에 집을 지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지로 가나안 땅에는 여름철에 보면 집을 지을만한 곳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에는 내내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급류가 휩쓴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집을 짓기 원하는 자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 그 기초도 문제가 됩니다. 견고한 기초위에 세워지지 않은 건축물은 항상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건축에 있어서 그 기초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미국 뉴욕의 이스트(East)강을 가로지른 부르크린(Brooklyn)다리는 그 길이와 조교(弔橋)로서 유명합니다. 그러나 알려져 있기로는, 그 기초가 좋지 않아 다리 전체가 조금씩 낮아져 간다고 합니다. 또 세일론의 콜롬보(Colombo)는 본래 바다 밑이 수렁인 것을 인공 항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반이 견고하지 못하여 항구 전체가 조금씩 가라앉아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의 고베시 같은 곳은, 본래는 지반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16년간이나 기초공사를 하였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하며, 미국 뉴욕 맨하탄(manhatan)주는 천연적으로 반석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한때 세계 제일인 102충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UN본부, 록펠러 센타, 크리이슬러 빌딩 등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이 즐비합니다.
이 건물들은 구름 속을 뚫고 서 있는데, 강풍이 부는 날에는 1m 진폭으로 움직인다고 하나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견고한 암반 위에 이 건물들이 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건물들이 모래 위에나 견고하지 못한 지반 위에 세워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지러워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건축에 대한 이치는, 우리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반석 위에 세운 인간은 무너지지 않고, 모래 위에 세운 인간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 기초가 반석이냐 모래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흥망성쇠가 무상합니다. 나라는 흥했다가 또 멸망하고, 백성은 성했다가 쇠하고, 위인열사는 천하를 호령하였다가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시대는 변하고 역사는 흘러가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뚝 서 있습니다. 만물이다 영락하고 만대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합니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퇴색케 하지 못합니다. 예수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또한 인생의 기초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고전4:11,요14:6). 그는 인생이 의지하여 설 유일의 반석이요, 토대요, 기초요, 모퉁이 돌입니다(엡2:20).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는 견고히 설 수 없습니다. 그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석이신 예수 위에 굳게 선 인간은, 창수가 나고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쳐 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시험이 와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수가 나고 비바람이 몰아쳐 올 때 무너지는 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가룟 유다는 모래 위에 인생 집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돈이라는 유혹의 바람 앞에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반석 위에 그의 집을 짓지 못했습니다. 사울왕도 그러하였습니다. 골리앗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의 집이 무너진 것은, 반석 위에 짓지 못한 때문입니다.
잘 지어야 할 인생 집을 모래 위에 지은 부실건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7). "날림공사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 집을 지은 자는 파산하는 법이 없습니다.
~(3) 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인생 집을 짓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건축에는 재료가 중요합니다. 무슨 재료를 쓰느냐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바울은 여섯 가지 재료를 나열합니다(고전3:10-15). 그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 열거된 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 삼자는 영속하는 것이고 후 삼자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 재료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① 어떤 이는 교인들이라고 합니다.
② 어떤 이는 전도자에 의해 전파된 교리들이라고 합니다.
③ 다른 이들은 종교적인 또는 도적적인 여러 가지 열매들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이 재료들로 지어진 집이 잘 지어졌느냐 잘못 지어졌느냐는 "그날"에 나타날 것입니다(고전3:13). "그날"은 정해진 날이요(빌3:17), 주의 날이요(살전5:2). 심판의 날입니다(마12:36).
그 재림의 날에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사실로 주님은 재림의 날에 모든 것을 불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마13:24-30, 살후1:18) 그래서 바울은 생사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인생의 집은 정직을 재료로 삼고 성실과 진실을 더해야 합니다 거기에 피와 땀과 눈물을 추가해야 합니다. 요셉이라는 고층건물은 이렇게 하여 지어졌고, 아브라함이라는 거대한 빌딩도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건축물 모세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하였습니다(민12:7). 하나님은, 노아라는 웅장한 건물에 대하여 이렇게 자랑하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9). 신앙인의 황금동판인 히브리 11장에는 더 많은 이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끝맺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집 짓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을 다 지은 사람들, 잘 지은 사람들에게 모두 가(家)자를 붙입니다. 음악가(音樂家), 정치가(政治家), 교육가(敎育家),종교가(宗敎家), 작가(作家), 사업가(事業家), 법률가(法律家)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파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제의 위인이 오늘 몰락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존경받던 이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어 무너져 버림은 웬일입니까?
그것은 모래 위에 그들의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계료로 그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파산 당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부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부실 인간은 그 무너짐이 심합니다.
인간 집은 두 번 지을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 집을 잘 지읍시다.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삽시다. 그리고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위에 인생 집을 지읍시다.
(84. 5. 27)
12.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2.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고전16:15-18)
꽤 오래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10세 소년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가 연필로 또박또박 써서 남긴 유서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머니의 호주머니에서 130원을 몰래 꺼냈습니다. 그 돈으로 스승의 날에 담임선생님께 콜라 한 병과 빵 다섯 개를 사다드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그 반의 한 아이가 돈 500원을 잃어버린 일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선생님께 콜라와 빵을 사다드린 소년이 그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 소년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든 상황에 대하여 동정을 금치 못합니다. 그는 결국 얼굴을 들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자살을 결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급료도 못 받고 오히려 매만 맞았습니다.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부모님께 이런 유서를 남겨놓고 15세의 어린 직공이 음독자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공장의 주인이 매질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 맞고 쫓겨나는 그를 보는 동료들의 눈초리가 조금만 동정적이었어도 그는 그처럼 최후수단에 호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15세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과격파 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광주사태 에 대한 책임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극단적인 수단에 대하여 옳다던가 두호할 생각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산당이 아닌 것만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이 과격한 것에 대하여는 이해를 같이 하는 것처럼, 그들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직접 간접으로 커다란 도움을 주어온 미국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에 추호의 변함이 없다"
그런데 TV방송은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운다면서 그들을 악질적인 공산주의자들과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건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국민총화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자제하고 여유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작게는 개인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가정의 문제, 이웃 간의 문제,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어려운 숱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은 그 기본 인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문제이든지 인식과 이해 없이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은 의미 깊은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뜻이 없을 때 일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됩니다.
경영주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조금만 이해하려 한다면 그 많은 노동 쟁의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의 고달픔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들도 윗사람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성령께서 주신 음성을 아멘으로 화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들을 알아 주어야 합니까?
~(1) 오늘 우리 본문은 교회 위한 헌신 봉사자들을 알아주라고 합니다(15).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이 같은 부탁을 한 것을 보면 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스데바나의 집을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축하게 됩니다. 이는 메어(W. Harold Mare)의 해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남에게 무례하게 대할 가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스데바나의 집은 존경받을만합니다. ① 그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세례 받은 몇 사람 가운데 들어있는 한 사람입니다(고전1:16). ②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들은 바울이 아가야 전도에서 얻은 첫 열매입니다(고전16:15). ③ 그는 교회를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친 사람입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이러합니다. "그들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이는 그의 헌신적인 봉사가 지극하고 남다른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이유가 됩니다.
스데바나는 섬기는 자 되기를 원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놀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까운 세월을 허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솔선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가 교회 직분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은 교회가 그를 지명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생활이나 활동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은 다 존경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때문입니다.
존경은 직책이 아니라 충성스럽게 봉사한 일 때문입니다. 많이 일하고 많이 수고한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교회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직책을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일합니다. 보이는 데서도 일하고, 보이지 않은데서 일합니다. 알게 일하고 모르게 일합니다.
일한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고, 전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열매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빛이 날 때도 있고, 없는 때도 있습니다. 칭찬을 듣는 때도 있고, 꾸중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수고하고 애써도 아무런 보람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힘이 날 때도 있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껏 일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체면만 세우는 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고와 정성은 다 같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겨웁게 땀 흘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바라보면서 충성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정말 귀한 일꾼들입니다. 정말 보배 같은 일꾼들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자들을 "알아주라"고 한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그들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마25:21).
그러나 불충한 자들에게는 엄한 책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하여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5:30).
잘 잘못은 심판 때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한 일만 들추어내어 정죄할 것만은 아닙니다. 잘한 일도 인정하고 알아주어야 마땅합니다. 스데바나의 헌신 봉사는 알아 줄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2) 스데바나와 "함께 일하며 수고한 모든 자"들을 알아 주라고합니다(16).
스데바나의 가족들은 선한 일에 정성스러웠습니다. 그들을 알아준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바나를 협조하여 "함께 일하며 수고한 자"들도 똑같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수고하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부모 없는 자식이 없듯이 홀로 우뚝 선 자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다리를 붙잡고 서 있는 아내 없이 성공한 남자는 없습니다.
솔로몬의 다음 말은 확실히 진리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으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끓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들과 싸울 때에 모세의 손이 높이 들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제 이 전쟁의 승패는 문제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의 손이 피곤해져서 계속 들고 있지 못하게 된데 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치든 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온 종일 높이 들고 있게 하여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모세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손을 붙든 아론과 훌 때문이라고 말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출17:8-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시133:1). 전쟁에의 승리는 "하나 같이 합심"하는데 있습니다(삿20:11),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마18:19),
랍비 문서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교훈집입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거지가 한 번은 랍비의 집 담에 등을 대고 부비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그를 불쌍히 여겨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부부 거지가 있었는데 그 이튿날 역시 같은 장소에 와서 담에 등을 부비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어제와는 달리 욕을 하면서 매를 때려 쫓아내 버렸습니다. 부부 거지는 하루 사이에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겠는가 항의하였더니 랍비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지난번 거지는 혼자였으니까 담에 등을 대고 부빌 수밖에 없었겠지만 너희들은 둘이 아니냐?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가 아니냐?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 줄 것이지 남의 집 담에 등을 부비는 것은 옳지 않다"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로 돕고 협조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남의 흉내나 내고 약삭빠른 꾀로 살아가려는 것은 오히려 미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벌들은 협동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사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돕기 위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발이 그러하고, 손이 그러하며, 눈꺼플이 그러합니다. 두 사람의 머리는 한 사람의 머리보다 났습니다.
위인과 소인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엄마 없는 가정이 허전하듯 아이들이 없는 가정도 쓸쓸합니다. 가정에는 잔소리 많이 하는 엄마도 있어야 하고, 돈 쓰는 아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스데바나 뿐 아니라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도 그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족을 보충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손이 모이면 일이 가벼워집니다.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구석구석에 절대로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신 손이요 발입니다.
서로는 협력자들입니다. 서로는 조력자들입니다. 서로는 함께 일할 자들입니다. 서로는 없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3) 오늘 우리 본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충성된 자들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18).
"저희가 나와 너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시원케 한다"는 말은(anapauo), 편히 쉬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1:28). 또 피곤한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였습니다(마26:45).
걱정스런 일은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히 쉬게 하는 것은 "시원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충성입니다. 잠언 25: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는 것은 충성된 사자입니다.
그는 무더운 여름날의 얼음냉수 같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충성된 사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충성을 알아주어야합니다.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어야합니다. 교회 각 기관 각 부서에서 말없이 충성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을 시원케 해드리는 여름철의 얼음냉수입니다. 여러분의 땀과 눈물은 마땅히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혹시 간과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님은 알아주십니다. 주님은 상금과 축복을 하늘나라에 에비하고 계십니다. 충성된 사자가 되어 그 상금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칼럼 니스트인 월터 리프먼은 현대사를 분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두 종류의 인간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데 하나는 충성된 예수의 제자요, 다른 하나는 헌신한 마르크스의 제자이다"
언젠가 미국의 크리스천 한 사람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습니다. 모스크바 대학의 어느 학생이 이렇게 자랑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공산당은 기독교가 2000년 동안에 해 놓은 일을 우리는 불과 50년 동안에 그보다 더 큰일을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 인가?"고 크리스천이 물었더니 "기독교인은 몸 바쳐 일하지 않고 우리는 몸 바쳐 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뉴 헤브라이즈 군도(New Hebrides)에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원주민들이 돼지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돼지를 잡으면서 돼지 꼬리만 잘라내어 모으더라는 것입니다. 그 꼬리를 무엇에 쓰려고 모으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고기는 우리가 먹고, 이 꼬리는 우리의 신들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이와 같이 어리석고 인색한 자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취하고 혹 남는 것이 있으면 그 찌꺼기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것은 옳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걱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알아주어야 할 일꾼들이 많습니다.
첫째로, 교회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일꾼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들째는, 여기저기 숨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고 애쓰는 협조자들을 알아주어야합니다. 셋째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충성된 사자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같은 일꾼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내일 또 장로 5명, 안수집사 12명, 권사 12명의 임직식을 갖게 됩니다. 충성스런 일꾼들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하였습니다.
(84. 5. 13)
13. 사랑스런 사람들
13. 사랑스런 사람들
(빌4:1-3)
사랑은 우리 기독교의 으뜸가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특색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를 말할 때 사랑의 종교라고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중심입니다(I요4:8,16, 고후13:11). 이 하나님의 사랑은 agape인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시하는 특수한 낱말입니다.
이는 분별 있는 깊은 사랑이며, 순결 무후한 고귀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요( I요4:7),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요(요3:16),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I요4:19).
즉 신앙의 요소를 가진 거룩한 사랑으로, 부자 친구 형제간의 자연애를 가르치는 Philia와는 그 성질을 달리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대답한 말은 Phileo였습니다(요21:15-17). 이 말은 인정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를 붙들고 십자가에서 죽지 말라 한 것도(마16:22), 동산에서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친 것도(요18:10), 그의 풍성한 인정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표시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으로,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행위의 4대 법칙을 말합니다.
첫째는, 철칙(鐵則)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마5:38)
둘째는, 은칙(銀則)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마5:39).
셋째는, 금칙(金則)입니다.
"무릇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라"(눅6:30).
넷째는 다이아몬드법칙(diamond則)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마5:44).
사랑은 삶의 최고의 법입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옛 계명과 대조가 됩니다(레 19:18).
구약의 계명은 문자적이요, 형식적인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애를 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새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새 계명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사람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상대한다면 그들 중에 미워해야 할 사람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는 좋은 이웃이요, 정말로 사랑스런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금강산 만물상은 보는데 따라서 달리 보인다고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대장으로도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아이로도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사자같이도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물상이라 한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눈이 만물상인 것입니다.
고슴도치는 새끼 털을 곱다고 생각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꼬집을 때 어머니는 웃습니다. 그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모두가 사랑스런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1) 우리의 이음들은 다 사랑스런 자들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 닢 주고 집 사고,천 냥 주고 이웃 산다" 주택보다는 이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웃은 사촌입니다. 좋은 이웃 사람은 멀리있는 형제보다 더 나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친구는 없어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은 이웃을 차단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① 높은 담장과 철조망 때문입니다.
② 아파트 생활방식의 영향 때문입니다.
③ 빈부의 격차로 말미암아 가까운 이웃들은 낮선 이국인들처럼 서로 얼굴을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④ 프라이버시(privacy)의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요.
⑤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⑥ 날뛰는 강력범들 때문에 대문들은 더욱 굳게 잠겨 지고 있습니다.
⑦ 우리의 사회현실입니다. 험상궂게 생긴 낯선 사람을 대하면 마음을 열기보다는 현상 붙은 사나이가 아닌가 일단은 의심하게 되고, 돈 잘 쓰는 사람을 보면, 간첩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5,000만원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슬픈 현실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좋은 우리의 이웃들은, 본의 아닌 피해자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좋은 이웃들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좋은 전도의 대상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사랑스런 친구들인 것입니다.
이웃집에 불이 나면 우리의 재산도 위험해 집니다. 이웃은 우리의 안전을 위한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좋은 저택을 사기보다 좋은 이웃을 얻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은 서로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이들 이웃들은 다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2)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은 다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더러는 낮선 분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처음 나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더러는 서로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얼굴만 아는 정도의 성도들도 없지 않습니다. 더러는 눈인사 정도로 지내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합니다(1),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바울의 마음 두 가지를 보게됩니다. 첫째는, 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지극한 정성과 관심이요, 둘째는, 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염려입니다. 거기 보면 "사랑하는 자"란 말이 처음과 나중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또 "사모한다"는 말과 "형제들"이란 말과 "기쁨"이란 말과 "면류관"이란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 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이 말들을 보면,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서로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됩니다.
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요13:24). 사도 요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였습니다(I요3:11, 4:7).
② 우리는 서로 사모해야합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정을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예배자의 십계명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네 이웃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낮선 사람이 있거든 친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찍 와서 늦게 가라"는 것입니다.
오래 만에 만난 성도와 손잡고 인사를 나누다 보면 얼마의 시간은 보내게 될 것입니다.
③ 우리는 서로가 남이 아닙니다.
서로 형제입니다. 어떻게 하여 서로 형제가 됩니까? 첫째는, 아버지가 같습니다(마6:9, 벧전1:17). 둘째는, 혈통이 같습니다(엡1:7, 2:13), 셋째는 먹고 사는 양식이 같습니다(요6:55). 넷째는, 장차 가서 살 집이 같습니다(요14:2-3). 다섯째는, 출생 방법이 같습니다(고전4:15). 우리는 복음의 자녀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출생된 자들입니다(약1:18). 우리는 사랑스런 형제요, 자매입니다. 부르는 노래가 같고, 사용하는 언어가 같습니다. 천국방언은 어느 곳에서나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④ 그런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기쁨입니다.
함께 일하니 기쁨입니다. 서로 힘이 되니 기쁨입니다. 서로 도움이 되니 기쁨입니다. 함께 영생복락 누릴 것이니 영원한 기쁨입니다.
⑤ 뿐만 아니라, 면류관도 됩니다.
약할 때 밀어주고, 힘 있을 때 끌어주면, 하나님 앞에 설 때 그것이 상이 되고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믿도록 인도한 자들은 우리 때문에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은 다 사랑스런 자들입니다. 여기에는 미운 자가 따로 없습니다.
서로 마음 상할 자도 없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다 같이 하늘백성이요, 주님의 구원 받은 자요, 함께 일하여 상 받을 자들입니다.
유오디아도 순두게도 같이 한 목적을 위하여 같은 일에 동참하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는 유오디아도 필요하고 순두게도 필요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할 자들"입니다(4:2). 그리고 서로는 주님께 필요한 성도들입니다. 그런즉 서로는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봉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용기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은 의심은 더디 하고 믿기는 빨리합니다. 사랑은 정죄는 더디 하고, 용서는 빨리합니다. 사랑은 폭로는 더디 하고, 덮어주는 데는 빠릅니다.
사랑은 불평은 더디 하고 감사는 빠릅니다. 사랑은 요구는 더디 하고, 주는 데는 빠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스런 자들이 됩니다.
~(3) 우리 가정 식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을 지낸 비스마르크(Bismark)는 많은 단어들 중에서 가장 부러운 두 개를 지적하기를 그 하나는 신사(gentleman)이며, 다른 하나는 가정이라(home)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두 가지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결혼 제도요. 둘째는 이 결혼으로 말미암은 가정제도입니다.
이 가정은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이 가정은 어머니의 세계요, 아버지의 왕국이요, 자녀들의 낙원입니다.
사람들의 가슴을 설fp이게 하는 엄숙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고향, 어머니, 가정 같은 말은 우리의 가슴을 살레이게 합니다. 고향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가정이야기도 그러합니다. 눈만 감으면 부모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 민족은 그토록 무서운 시련을 당하면서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 된 가정은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과 장래는 이 가정을 통하여 이어져 온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몹시 거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세 번째 결혼했는데 그와 이혼한 둘째 남편은 그녀에게 매맞기가 싫어서 이혼했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먹고 살기에 바빠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13세 때의 담임교사는 "이 소년은 사랑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것 같다"고 카드에 평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자주 싸웠습니다. IQ는 높았으나 성적은 낙제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입대하였으나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은 외국에 가서 사생아인 어느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미국으로 돌아와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내쫓았습니다. 나중에는 부인 앞에 빌면서 함께 살자고 하였으나 부인은 그의 고약한 성격 때문에 끝내 거절했습니다.
오기에 찬 청년은 돈 벌 결심으로 이들 날부터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작심삼일이었습니다. 1963. 11. 22일 숨겨두었던 총을 들고 나와서 평화스럽게 행진하던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 살해 하였습니다. 이는 오즈왈드(L.H. Oswald)의 비극적인 24년간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 후 포로 교환 때, 21명의 미군이 고국에 돌아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의 배후를 조사했더니 그중 19명이 가정적 파탄으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청년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는 못삽니다.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의 영양실조에 걸리면 마음의 병이 듭니다. 화초에 햇빛이 필요하듯이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프랑스의 문인 위고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돌이 되려거든 자석이 되고, 초목이 되려거든 지수초가 되라. 그리고 사람이 되려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의 이웃들은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우리 곁의 성도들은 다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식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아멘.
(84. 5. 20)
14.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14.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이사야33:1-6)
이사야선지는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시대에 기울어져 가는 선민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그들의 경성과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과 도덕적인 부패에서 되돌아서라고 그들의 영적 타락을 통렬히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본문에서는 침략자 앗수르의 패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1). 그들은 "화 있을"것입니다. 앗수르에게 화가 임할 것은 그들이 "학대를 당치 않고도 학대"하였고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였기"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다를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왕하18:14-16). 그리고도 침략하였으니 속인 것입니다.
그 죄 값은 곧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고 하였습니다(1). 이스라엘에게 애매하게 못살게 군 앗수르는 때가 이르매 그 죄 값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선지는 이방 앗수르의 패망을 경고한 후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2).
그리고는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위로 격려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여,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삽시다. 이것이 당신들의 보배입니다. 그리하면 당신들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고 구원과 자식이 풍성할 것입니다(5-6).
이 같은 유다 백성들의 모든 상황은 오늘 우리들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또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보배란 귀하고 중한 물건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배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보배는 역시 보석류를 말합니다.
그러나 반짝인다고 하여 다 보석은 아닙니다.
보석이란 이름을 가지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은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것. 둘째는 변하지 않을 것(不變의 耐久性). 셋째는 희소가치성입니다.
우리는 보석을 말하면서 세익스피어의 다음 말도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 못하는 보석이 살아 있는 인간의 말보다 더 힘 있게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여튼 보석은 사람들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암거래되는 연간 거래량은 자그마치 2,500억은 될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보배를 갖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① 그것이 신분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② 그것은 사람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아름답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③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재산 증식의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온 세계는 통화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금값은 15%정도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다이어먼드 값은 30% 이상이나 올랐습니다. 보석 값은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인플레와 불경기로 불안한 때에도 보석만큼은 안전합니다. 부동산은 자리가 납니다.
예금도 표가 납니다. 또 세금으로 많은 돈을 뜯깁니다. 그러나 보석만은 아무리 모아놓아도 눈에 띄거나 표가 나지 않습니다. 세금도 없고 또 불에 탈 염려도 없습니다. 이래서 보석은 인기가 있고 재산 증식의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석 부인이니 영자의 전성시대니 하는 말과 함께 보석 밀수는 꼬리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배가 그렇게 귀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위험과 사고가 뒤따르는 골치 덩어리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귀중품을 보면 시기하는 사람도 생기고 또 욕심내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귀중한 보배를 지닌 사람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이 따릅니다.
귀중품은 항상 도난의 위험과 불안의 요소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행복이 아니라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이 쓴 작품 중에 "진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 키노는 인디안입니다. 그는 어부입니다만 부지런하고 착했으며 가난하기는 했지만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 쥬안나가 있었고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셋이서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애가 전갈에게 물렸습니다. 열이 오르고 고통당하는 아이를 데리고 도시의 의사를 찾아 갑니다.
그러나 비정한 의사들은 가난한 인디안 아이의 치료를 거부합니다.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안고 돌아온 그들 부부는 원망과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선 재래의 방법으로 응급치료를 하고 나서 진주를 캐러 갑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진주를 캐게 해주소서. 죽어가는 우리 아이를 치료해야 되겠나이다"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내 키노는 갈매기 알만큼이나 큰 진주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오막살이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문은 온 시가에 퍼져서 모두가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치료를 거부했던 의사는 키노의 아이는 자기 환자라고 말합니다. 거지 떼들은 자선을 기대하며 키노의 문전에 우굴 거립니다. 그들 부부도 그 빛나는 진주만큼이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괴한이 침입하기 시작합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쥬안나는 진주가 복이 아니라 화근임을 느낍니다. 순박한 쥬안나는 남편 몰래 그 진주를 바다에 던져버리려고 나잡니다. 남편은 부인을 좇아가서 겨우 말려 가지고집으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괴한의 습격을 받게 되어 격투가 벌어지고 결국은 괴한을 죽이게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서 그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갈 통통배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그들의 집은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산으로 피하여 도망칩니다. 세 명의 괴한이 그들을 추적하여 왔습니다.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키노는 사력을 다하여 그 괴한들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격투 중에 오발로 말미암아 아들도 죽고 맙니다. 넋을 잃은 부부는 그 진주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번쩍번쩍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으나 무서웠습니다. 키노는 결국 그 진주를 멀리멀리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고 맙니다.
자식을 살리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 버리자고 캐낸 진주가 만인의 탐욕의 불꽃을 튕기게 했고 자식과 몇 사람을 죽였고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주를 던져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키노의 진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황금의 진주를 캐려합니다. 과학자들은 발명의 진주를 캐려 애쓰고, 고3 학생들은 오로지 대학이라는 진주를 캐려고 무거운 책가방과 도시락 두 개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은 권세라는 진주를 캐려 권모술수를 다하고 있고,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말단 공무원들은 영전과 진급이라는 진주를 캐려고 몸부림치고 있고, 뭇 여성들은 오늘도 거울 앞에서 미의 진주를 캐려고 눈물겨운 수고를 그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키노의 진주는 그에게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진주가 없었던 키노의 집은 비록 고생스럽기는 하였으나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주라는 엄청난 돈이 있고부터 서는 불행해졌던 것입니다. 돈, 재산, 보석, 명예, 권세가 좋고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배로는 삼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숙질간이었습니다만 재산 때문에 서로 헤어져야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생명의 주님을 만나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만 은 30에 눈이 어두워져 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순절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 있었으나 재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재물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보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욥22:24-25).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는 무엇입니까? 정직하게 대답하십시다. 그것이 오빌의 금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토에 버리고 강가의 돌에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참 축복과 행복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보배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 전능자가 참 보배라고 하였습니다(욥22:24-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 신다"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가슴 설레이는 말씀입니다.
~(2) 지혜로운 입술이라고 하였습니다(잠2:4),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3) 복음과 그리스도가 참 보배라고 하였습니다(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4)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 참 보배입니다(사33:6).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찬송을 열심히 부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
천국의 귀한 영생복 믿음이 얻겠네"(376장).
믿음이 우리의 참 보배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재벌가, 믿음 없는 미인, 믿음 없는 권세자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도하는 어린 아이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가난한 성도의 식탁에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병약한 성도의 병상에 찾아 가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신자 곁에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아 천국가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못가는 천국, 믿음으로 갑니다. 권세로도 못가는 천국, 믿음으로는 갑니다. 우리의 인간 나그네 생활 잠깐 지나면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그 집은 황금보석으로 지은 집입니다. 우리가 다닐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황금 길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 보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참 보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보배에 정신 팔면 참 보배를 잃게 됩니다.
성도의 보배는 은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배는 전능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아멘!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참 보배는 예수뿐입니다.
(84. 6. 17)
15. 눈을 들어 밭을 보라
15.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한복음4:27-38)
여름은 땀 흘리는 계절입니다. 불볕더위의 열기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납니다. 만물은 성장한다고 땀을 흘리고 농부들은 일손이 바빠 땀을 흘립니다. 여름은 준비의 때요, 성숙을 위한 몸부림의 때요, 노동의 때입니다. 여름은 날고 싶고 뛰고 싶은 때입니다.
봄을 여성의 계절이라 하면 여름은 남성의 계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봄을 웃음의 때라고 하면 여름은 힘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땀 때문에 여름을 싫어합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소동파의 다음 글귀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더위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여름 해가 긴 것을 좋아하노라"(人皆苦炎熱 我愛日長), 해가 길어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증 7월은 우리 은광교회로서는 바쁜 달에 속합니다. 이달에는 중요한 행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첫 주간에는 광주시찰회에서 주관하는 하기학교 교사 강습회가 은성교회에서 모이고, 전국 어린이 교육 선교원에서 주관하는 강습회가 본 교회당에서 모입니다. 둘째 주일은 제1청년회 헌신예배이며, 그 주간에는 전국대학생 대회가 덕유산 국립공원 야영장에서 모이는데 500여명의 대학생이 참가합니다.
셋째 주일은 맥추 감사절이요, 성경학교 교사 임명과 하기학교 교사 헌신예배와 자체강습회가, 넷째 주일은 각 기관의 월례회와 하기학교 개교예배와, 다섯째 주일에는 제2남전도회 헌신예배와 그 주간에 중고등부 수련회와 선교 100주년 교단 집회가 부산 고신대학캠퍼스에서 모입니다.
또 대학부와 청년회의 하기 봉사활동이 펼쳐집니다.
이 같은 행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서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다한 거룩한 교회로 빛을 발하는 영광스런 교회로 나타나려 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들입니다.
이러한 행사는 결코 그 행사 자체로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겠기에 온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교우의 직접적으로 참여하심은 물론 기도와 충고와 헌금과 협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때 온 교우들이 소속해 있는 각 기관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생동감 있는 은광교회의 산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중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1)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일군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지금은 추수 때가 되었는데 추수 할 일군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군을 찾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새 일군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70인 전도단을 파송하면서(눅10:2), 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 무리를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사,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며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마9:37).
예수님은 지금도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보배로운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얼굴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스런 일군들을 찾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니 일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일군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만일 들리지 않는다면, 그 음성이 왜 나에게 들리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드(Booth, William)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을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사실은 당신은 귀가 어두워서 그의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2) 일군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하는 음성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읽으면 추수할 일군들의 사명감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보여줍니다. 현대의 비극은 직업인들은 많아도 사명감에 사는 자가 적다는데 있습니다.
직업을 말할 때 조브(job)라고 합니다. 이는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속어입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한술의 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말도 있습니다. 보케이선(vocation)입니다. 이 말도 직업을 의미하지만 그 근본 뜻은 소명(召命)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일을 한다는 사명과 천직을 의미합니다. 막스 웨버의 말을 빌면 천직이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요,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즉, 천직이란 하나님의 부름으로 성실과 정직과 근면으로 일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자기 직업을 job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전전하거나 팽개치고 합니다. 한술의 밥을 위해 의리도 명예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기의 직업을 vocation으로 받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을 vocation으로 알고 힘쓰면 인생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의무로 생각하면 인생은 벌써 그 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죠지 워싱턴의 어머니 메리 부울은 현숙한 부인이었습니다. 워싱턴은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인 마운트 바논으로 갔습니다. 다른 이 같았으면 주택도 깨끗이 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환영행사도 가졌을 법했습니다만 어머니인 메리는 평소와 같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죠지 정말 잘 왔다. 나는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는 참이란다" 어머니는 빵가루 투성이의 손을 만지면서 분주히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행원들은 크게 놀랐으나 워싱턴 대통령은 더없이 기쁜 듯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어머니는 과자 만드는 솜씨가 참 좋으십시다.
사양 말고 함께 들어가 잡수십시다."
이윽고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워싱턴은 어머니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일일이 직접 일하시면 힘드시니 앞으로는 하인들을 데리시고 어머니는 그것을 감독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통령인 아들의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폐를 입어서는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일한 수입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작정이다. 만약 네가 끝까지 나에게 일하기를 그만두라고 하면,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 따위는 언제라도 사직하겠다" 이 말을 들은 수행원 모두는 그 높은 기품과 정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귀천 간에 그 일이 사명인 줄 알고, 충성하는 사람은 더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도 없지만 마지못해 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합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추수군에게 이 사명감이 없다면 알곡은 어찌되겠습니까?
~(3) 때가 절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지금이 곧 일할 때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이 곧 추수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결에 있던 사람들은 추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35) 사실로 시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이 말은 옳습니다.
보통 성지의 보리 파종은 10월 중순 경에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는 4월 중순에 시작하여 5월에 마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12월 중순 쯤으로 추산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온 들에는 보리가 푸릇푸롯 자라고 있는 때입니다. 마침그때 메시아를 만난 것을 전하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갔던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푸른 보리 밭 사이를 횐 옷 입은 수가성 사람들이 떼 지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저 밭을 보라! 지금 몰려오고 있는 저 사람들을 보아라 저 흰 읏 입은 무리들은 추수할 때가 된 알곡들이다" 이는 H. V 몰톤(Morton)의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여기에서 "복음의 추수"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추수 때가 임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람들은 곡식을 거두는 일은 미리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추수에 대해서는 등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예수님은 영적추수의 절박성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세요.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추수할 일군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절박한 때에 일군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추수군이 되겠습니다"면서 나설 분은 없습니까? 하기 성경학교는 좋은 영적 추수 때입니다.
각종 수양회는 좋은 추수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참여함은 물론, 추수하는 좋은 일군들이 많이 나와서 귀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답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보면(마20:1-16), 주님은 온 종일 사람을 구하여 일터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제9시와 제12시와 제3시에도 사람을 일터로 보냈습니다. 해질 때가 가까운 하오 5시에도 나갔습니다. 6시가 되면 일을 마치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그때는 어두워지는 시간입니다. 밤이 되면 신랑이 와서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일할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리스도께서 일하라고 강권하시는 그 음성에 지체하지 말고 대답해야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은 하오 5시, 이제는 더 기다릴 수도 없고, 게으름 피울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넉 달이 남았다"고 핑게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는 따로 오지 않습니다. 일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일거리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생각지 않을 때에 가 버릴런지 모릅니다.
성도여러분! 일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속을 먹으려 하는 자는 껍질을 까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년을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짜는 베가 천국에서 우리가 입을 옷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러나 다음 말씀은 더욱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 아멘.
(84. 7, 1)
16.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16.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살후3:6-15)
히브리 속담에 "부모가 자녀에게 일을 가르치지 않으면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을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을 훈련받지 아니하면, 커서는 나태한 사람이 되어 남의 덕을 입고자하는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옛날 유대 나라에서는 일하지 않는 무직자는 랍비의 자격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무직자는 어느 사회에서나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만, 특히 무직자가 가장 미움을 받는 사회가 유대 사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일할 것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일하셨습니다(요5:17). 또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에 주사 일하게 하셨고, 그들이 범죄한 후에는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게 하셨습니다(창3:17-17). 뿐만 아니라 제4계명에도 엿새 동안 힘써 일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우리 본문에서 일과 관련하여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방관자 혹은 구경꾼을 의미합니다. 무관심한 자들을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키거나 맡기면 회피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합니다.
둘째는 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일을 만든다는 말은 "두루 다니며 일한다"는 뜻입니다. 즉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여 일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일군들 중에는 일을 방해하는 일군들이 혹 있습니다. 일을 지연시키는 일군들도 더러 있습니다. 일을 돕기는커녕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일군들도 있습니다.
일을 더 지연시키는 일군들도 있습니다. 손으로가 아니고 말로만 일하는 일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군들은 하나님의 걱정과 근심이 됩니다.
셋째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보배들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들의 나태에 물들지 않습니다. 일만 만드는 자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아니합니다. 다만 주께서 맡겨 주신 자신의 직분을 말없이 성실히 수행하고,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다가 결코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살후3:13). 심은 대로 거둘 것을 확신하면서 성령으로 심고 성령으로 거둡니다(갈6:6). 일하다가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이 있어도 겁내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만 위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이들에 의하여 발전되고, 이들에 의하여 지켜집니다. 이와 같은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요 축복 받은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일하는 성도들이 되라고 권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노동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golden rule of labour)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교훈 받기를 원하십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1) 일이란 신성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합니다(요5:17),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신 후 안식하셨습니다(창2:1-3). 그러나 이것은 외면적인 것이고, 내적으로는 계속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의 것을 창조라 하고, 뒤의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6일로써 완료하셨으나, 섭리의 사역은 쉬임없이 계속됩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이신 성자 예수님은 섭리의 대리자로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신성한 것이고 또한 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노동자였습니다. 노동으로 생업을 삼으셨고, 노동으로 하나님을 봉사하였습니다. 주님의 손바닥에는 굳은 못자리가 있었고, 이마에서는 늘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주님은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였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열심히 일한 자들입니다. 모세와 다윗은 양을 쳤고, 엘리사는 농사군이었으며 바울은 장막을 지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사람들은 일에 대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에 대하여 괴로움으로 생각하고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소일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이도더러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손쉽게 돈을 벌어서 남은 여생을 놀면서 평안히 지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노동을 하나의 짐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은 부모로 노동하지 않도록 하여 편케 해 드리는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식모를 두어 아내의 일을 덜고 그에게 보다 편하게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큰 착오입니다.
일은 결코 괴로움이 아닙니다.
밀레는 프랑스가 낳은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잘 알려진 만종(晩鍾)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농촌의 생활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아 농부의 일을 가장 신성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린 그림입니다. 본래는 70달러 밖에 안 되는 종이와 물감으로 그린 것인데, 나중에 어느 미국인이 125,000달러에 사갔습니다.
얼마 후 프랑스 사람들이 이 명화를 다시 본국으로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125,000달러를 주고 사다가 르불 미술관에 수장해 놓았다고 합니다.
밀레의 만종은 어느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예배당 종소리 따라 삽과 괭이를 놓고,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명화 속에는 세 가지의 신성함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가정의 신성함이요, 둘째는 노동의 신성함이요, 셋째는 종교의 신성함이라고 합니다.
일은 이렇게 신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 가운데 평화가 깃들고, 노고 가운데 안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그것은 결코 짐이 아닙니다.
~(2) 오늘 우리 제목은 일하는 사람만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노동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이란 수치가 아닙니다.
일은 떳떳한 것입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축복입니다. 부정부패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막는 한 톨의 소금 구실이라도 하고 있다는 기쁨은 값진 것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독립한다는 자부심은 고귀한 것입니다. 말을 끄는 자와 타고 가는 자중 어느 누가 높은지는 정의에 입각해서 보아야 합니다.
부정부패한 사회 제도로서 평가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직 봉사의 척도로 고하와 경중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옛날 로마는 일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예를 잡아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로마의 독재관 슐러(Sulla, Lucius Cornelius)는 소아세아로 노예사냥을 와서 하루에 2만 수천 명의 노예를 잡아 로마로 끌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전쟁에는 강했습니다.
로마의 자유시민은 60만 명이었으나 잡혀온 노예는 24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 노예 때문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만, 이 노예들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꿀은 달아도 벌은 쏩니다. 좋은 것은 수고함이 없이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이반의 바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을 부지런히 하여서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사람은 식탁의 제일 상좌에 앉아서 따뜻한 밥을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아무 일도 아니하고 빈둥빈둥 놀아서 손에 굳은 살이 박히지 않는 사람은 식탁의 제일 하좌에 앉아서 남이 먹다 남은 찌꺼기의 찬밥을 맨 나중에 먹어야 한다.
이것이 이반이 사는 사회의 법률이요, 종교요, 도덕이요, 철학이다"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손과 한 개의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두 개는 일하기 위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식사를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만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3) 오늘 우리 제목은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하였습니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욱 깊은 뜻은 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하나님, 즉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일하시니 그의 몸된 교회도 일해야 합니다.
그의 몸이 살아 있듯이 그의 몸된 교회도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의 지체들도 살아서 활동해야 마땅합니다. 활동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문제도 많고 어려움도 없지 않으나 활동하는 자가 일을 이루어갑니다. 교회는 무사 안일주의를 배격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 야하고 일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문제도 없고,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고, 시행착오도 없습니다. 피곤함도 없고, 책망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처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합니다(잠6:6-11). 개미는 여름 동안 부지 런히 일합니다. 누가 시키지 아니해도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힘껏 일합니다. 좀 더 눕자 좀 더 놀자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 빈궁이 강도같이 온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한 말은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습니다. 건강한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성장하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는 열심히 일합니다. 땀 흘리면서 일합니다. 한가한 사람에게는 땀이 두려운 것일런지 모르지만, 부지런한 일군에게는 다정한 벗입니다. 땀은 교회성장의 밑거름입니다. 땀을 많이 흘린다는 것은 여러모로 명예스러운 일입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땀은 고등 동물만이 흘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한선이 200-500만 개나 있습니다. 개나 닭이나 호랑이나 사자는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입을 벌려 헐떡입니다. 이른바 "팬팅"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사회학적 견지에 보면 일하는 사람일수록 땀을 많이 흘립니다. 땀은 노동하는 이의 특권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대개 행복하게 삽니다. 게으름장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수확의 기쁨은 그 흘린 땀에 정비례하는 법입니다.
1940.5.13일 전시 내각 수상이 된 영국 수상 처칠은(Winstoon, Churchill) 의회의 첫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피와 고통과 눈물과 땀을 제외하고는···"
이때 의회와 국민들은 그에게 진정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no sweat, no sweet라는 말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명언은 사뮤엘 스마일의 "자조른(自助論)"에 있는 말입니다. 이 책은 대영 제국의 번영을 약속해 준 근로의 복음서였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국의 국력이 천하에 떨쳐져 세계 상공계의 패권이 온통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 영광은 오로지 땀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쓰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훈련 중에 땀을 많이 흘린 자는 전쟁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 하나님의 보좌는 눈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역사는 땀으로 움직입니다.
연일 3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위를 피하려는 자에게 더위는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는 자에게 함은 축복의 물방울이 됩니다.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도 no sweat, no sweet의 명언을 잊지 맙시다. 주님을 위한 이 세상에서의 땀방울은 천국에서 구슬덩이로 보상될 것입니다.
(84. 7. 29)
17.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리라
17.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리라
(시121:1-8)
비발디의 바이얼린 협주곡 "사계(四季)"를 듣고 있으면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난조를 이루는 대목이 나옵니다. 불길한 천둥소리, 하늘이 찢어질 듯한 비바람이 몰아칩니다. 여기가 바로 제2번 "여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름마다 이 같은 날씨를 경험하며 삽니다.
그러나 여름은 가난한 농부들의 계절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그들은 더위를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소박한 소망에 기대를 걸며 살지언정 평안한 사람들의 고급범죄(white collar crime)를 모릅니다. 일하다가 더우면 시원한 물 속에서 땀을 씻습니다.
피곤하면 나무그늘에서 쉽니다. 냉수와 풋고추와 된장과 젓갈뿐인 식탁은 비후스테이크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닥불 곁에서 별을 보며 축축하게 내리는 밤이슬을 맞으며 하루를 지냅니다.
여름은 개방적이어서 더욱 좋습니다. 집들마다 창을 열어 놉니다. 수줍은 소녀들도 여름의 더위 앞에는 흉한 우두 자국을 감추지 않습니다. 고독을 취미로 삼는 우울한 철학도라 할지라도 밀실의 어둠을 버립니다. 여름의 숲은 푸른 생명의 색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숲속에는 벌레들의 노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은폐가 없고 침묵이 없는 여름의 자연은 하늘의 궁전처럼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합니다. 외식과 꾸밈의 옷을 벗고 은혜의 옷을 덧입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더위지면 걷는 속도가 늦어집니다. 그 이유는, 더위에 온 몸이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활동은 더위와 반비례합니다. 머리의 회전 속도도 반비례합니다. 정신도, 생각도 몽롱해 집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름을 망실의 계절(忘失季節)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목숨 다음으로 아낀다는 핸드백을 잃고, 남자는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휴가 가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타서 즐깁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독일인을 욕할 때 "바캉스도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답니다. 바캉스(Vacance)란, 원래 프랑스 말입니다. 영어의 Vacate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바캉스 철이 되면 주택가는 조용해지고 터미날과 역두는 붐빕니다. 원색의 사람 물결은 산과 바다 그 어디에나 시원한 곳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름은 유혹받기 쉬운 계절입니다. 범죄 하기 쉬운 계절입니다. 젊은이들끼리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은 아무리 선의로 보아주어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캉스 철이 지나면 산부인과가 바빠진다고 합니다.
여름휴가는 가족적이라야 합니다. 믿을만한 어른들의 지도가 바람직합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이면 더욱 좋고,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에서 조용하게 명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시편 121편은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의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확신합니다(1-2).
둘째로,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될 것을 말합니다(3-8).
오늘 우리 본문은 둘째 부분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항상 함께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 받으십시다.
~(1)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5).
여기"지킨다"는 말은 Shamar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호하다, 잠복하여 기다린다, 망 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담이요, 울타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들에게 자기 백성을 지키라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91:11).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
다니엘은 총리들과 방백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사자굴에 던짐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에게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해치지 아니하였습니다"(단6:22).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엘리사를 지키시기 위하여 아람왕의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였고(왕하6:18). 그들의 귀에 큰 병거 소리와 말 소리를 듣게 하여 도망치게 하였습니다(왕하:6-7),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처한 베드로를 천사로 하여금 구출케 하였습니다(행12:7-10). 하나님께서는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지켜 보호하셨습니다(단3:24-27).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31:5).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실족치 않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여기 "실족"이란 말은 mowt인데 "흔들리다, 미끄러지다, 떨어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발이 움직이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이 말은, Skandalon인데(마18:6) "덫, 올가미, 함정, 죄짓게 하는 것"등을 의미합니다. 악의 세력은 항상 넘어지게 합니다. 굳게 서 있지 못하게 합니다. 흔들리게 합니다. 덫에 걸리게 하고, 함정에 빠지게 하고, 범죄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실족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죄의 길을 걸을 때 막으시고, 시험을 받을 때 피할 길을 주십니다.
②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피곤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잠을 자는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면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7),
환난의 원인은 죄입니다(창3:16-17, 레26:14).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히9: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서 회개하게 하시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사 도우십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시27:5),구원하십니다(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하나님은 환난 당한 자와 함께 하시고(시91:15), 소성케 하십니다(시138:7). 그러나 이 환난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마6:14). 난리의 소문과 기근과 시험과 미혹과 불법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첫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이요(요6:33), 둘째는 우리의 영원한 나라, 천국에는 환난이 없기 때문입니다(계7:14-17). 거기에는 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눈물을 씻김 받고, 생명수 샘에서 시원한 물을 마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지키실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입을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출입은 들고 남을 말합니다(going out and coming in). 일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쉬기 위하여 들어옵니다. 여행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마치고 돌아옵니다. 해상과 육로에서 크고 작은 일을 통하여 집의 안팎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거느릴 것이며 무덤 에서도 함께 하실 것이며 하늘에서도 지키실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그늘이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나니"(5).
성경에는 그늘(tsel)이란 말이 48번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늘은 은혜로우신 주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시121:5, 아2:3)
첫째로, 그늘은 햇빛이 쨍쨍 내려쬐일 때 더욱 확실히 나타납니다. 둘째로, 그늘은 실체와 항상 함께 따라다닙니다. 셋째로, 그늘은 햇빛을 차단하여 뜨거운 열기를 피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몬순(monsoon)계절풍의 영향을 받습니다. 전기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여름 더위는 살인적인 더위라고 합니다. 1942년 6월에는 티람 세비(Tirat Zevi)와 벧산(Beth-shean)에서는 54℃를 기록한 적이 있고 사해에서는 51.5℃, 해안지방에서는 45℃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온도는 45℃ 정도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 정도에서 의식을 잃는다고 합니다. 40℃의 더위도 30분 이상 견디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더위는,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해와 달은 본래 인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슬픈 변화가 생겼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둘째는, 그것들로 우리를 치기도 하고, 셋째는, 살인적인 더위나 인체에 병을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6).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그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무한한 축복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사25:4).
둘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는 꺼져가는 불을 끄지 않으실 것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입니다(사42:3).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는 그늘이요,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는 위로자이십니다.
"주께서 고아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눅7:1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요14:18).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66:13)" 진실로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이십니다(고후1:3).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쉴 곳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주님의 품은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고달픈 영혼의 쉬는 곳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가슴 속입니다. 죄악 세상에서 빠져나와 위로받는 곳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무더위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늘이 되시면 시원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우편의 그늘이 되십니다"
그런즉 "낮의 해가 우리를 상치 못할 것입니다" 무더운 계절이지만 주님의 그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84. 8. 5)
18. 계절은 바뀔 것이다
18. 계절은 바뀔 것이다
(창8:20-22)
계절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계절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도 크게 달라집니다.
어떤 이는 사계절을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봄은 사람의 기분을 방탕에 흐르게 하고, 여름은 사람의 활동을 게으르게 하고,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음침하게 하고, 가을은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폴랜드 사람들은 사계절을 여인에게 비교하였습니다. "봄은 처녀, 여름은 어머니, 가을은 미망인, 겨울은 계모"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처녀는 봄처럼 화창하고, 어머니는 여름처럼 완숙하고, 미망인은 가을처럼 청순하고, 계모는 겨울처럼 모질다는 의미의 말인 것 같습니다. 중국의 장자는 사계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과 낮은 생사와 같고, 봄·여름·가을·겨울은 사람의 일생과 같아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오늘 우리 본문도 계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본문의 매경은 홍수의 물결이 잔잔해졌던 떼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여시고 노아와 그 가족을, 심판받은 세계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방주에서 나온 세계는 어지러웠습니다. 계절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의 구별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약속하였습니다. 첫째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 하리니"라고 하였으며, 셋째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감사해야합니다. 이제는 온 땅을 덮는 흥수도 없고 모든 생물을 멸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낮과 밤과 사계절과 심음과 거둠의 적당한 질서를 보장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두 번 다시 홍수심판 같은 무질서나 파괴적인 혼란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폭풍우가 몰아쳐 흥수가 넘친다고 할지라도 두 번 다시 홍수의 심판은 없을 것입니다. 무더위가 계속되어 생활에 지친다 할지라도 염려할 것이 없음은 곧 가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일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오늘 참고 기다리는 지혜를 배웠으면 합니다. 오늘의 더위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불황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여러 가지 어려움은 언젠가 끝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진 추위와 겨울도 오래도록 방치함이 없으시고 무더운 여름도 영원히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시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또 무질서하고 혼란된 세계의 계속도 용납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와 같이 은혜로운 약속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6:5-6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흥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들을 엄히 다스렸으나 별 수가 없구나. 노아의 족속도 별 수가 없구나. 불신앙, 불순종의 요소도 여전하구나. 기다려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구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경고를 받게 됩니다.
22절 말씀을 조심스럽게 읽어 봅시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땅이 있을 동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얼마동안 땅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땅은 영원히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땅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땅은 얼마동안 존재할 것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없어질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언젠가 끝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시작의 때가 있었던 것처럼 우주와 만물의 결산의 때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종지부(period)를 적어야할 때가 온다는 경고입니다.
그때는 반드시 옵니다. 회개하기를 참아 기다리는 은혜의 때는 멀지 않아 끝나버릴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뿌리에 도끼가 이미 놓였습니다. 추수의 낫은 지금 번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는 사랑의 음성은 지금도 도처에 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 원하는 애처로운 음성은 아직도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음성도 끝날 때가 옵니다.
지금 은혜의 끝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강림은 멀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땅이 있을 동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지금 문 밖에 서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것에 대하여 애착을 가질 때가 아닙니다. 의지하지도 맙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그런즉, 이 세상은 곧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불타버릴 것입니다.
불의 홍수가 내릴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황의 불비는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불비일지 인간들이 만든 유황불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재가 될 세상입니다. 소망 없는 세상입니다. 금고가 녹아버리고 고급주택이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황금이 빛을 잃을 것이고 고층건물은 먼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때문입니다(벧후3:13).
죄로 오염된 이 땅은 영원세계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염되고 더러워진 이 땅을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때는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오래가지 않을 땅에 사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2)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봅니다.
그 약속은 이러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 약속은 흥수심판 직후에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오래된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이 약속을 어기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도 지금껏 심고 거두고 있습니다. 옛 선인들처럼 사람들은 지금도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낮과 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가지입니다.
그런즉, 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밭에 씨를 뿌립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낮에 잠을 자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밤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읍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쌍한 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지 않았다가 얼마나 불행해졌습니까. 아간도, 하나님의 사자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다가 큰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롯의 아내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믿었고 그의 딸들과 사위들도 농담으로 여기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히13:8).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것입니다(벧전1:2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24:35).
사람의 감언이설에 쉬 속으면서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을 더디 믿는 자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들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약속도 믿을 수 있습니다
~(3)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신령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들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무것도 계속되는 것이 없습니다. 심었다가는 거둡니다. 추웠다가는 덥습니다. 여름이 왔다가는 겨울이 옵니다. 밝았다가는 어둡습니다. 왔다가는 또 갑니다. 바뀌고 또 변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가는 없어지고 없다가는 또 생깁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인생은 이 변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다가도 기뻐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영원한 슬픔도, 영원한 기쁨도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웃다가는 웁니다. 일하다가는 쉽니다. 고생하다가는 평안해 집니다. 우리는 항상 광주에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 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가난하란 법도 없습니다. 부자로 사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승리의 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노래 부르며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도 혹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할 때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평생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으란 법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승리할 수도 있고 떼로는 실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되는 것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이 세상사는 변화무쌍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긴다고 하여도 놀라지 맙시다. 원치 않는 어떤 불행이 엄습해 온다고 할지라도 겁내지 맙시다. 낮이 밤이 되고, 여름이 겨울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법입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할 수도 있고 낮은 자리에 있다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땅이 있을 동안 계속될 원리들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히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즉,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신앙의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셋째는 변화무쌍한 세상사 때문에 울고 웃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즉, "땅이 있을 동안에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하나님이 내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심음과 거움은 하나님 내신 법입니다. 추위도 더위도 하나님이 내신 질서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여름과 겨울은 계속될 것입니다 낮과 밤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내신 것입니다.
이 모든 질서는 "땅이 있을 동안에"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재강림하실 때 이 질서는 무너지고 영원세계의 새 질서로 정립될 것입니다. 소망 중에 그 날을 기다립시다.
(84. 8. 19)
19.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19.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시5l:1-19)
우리는 성경 로마서 7장을 읽게 될 떼 한없이 서글퍼짐을 느낍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4-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고 부르짖으면서 탄식합니다(롬: 24). 실로 불쌍한 한 인간의 고백이요, 탄식이며 패배자의 눈물겨운 간증입니다.
이 절규는 저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성장한 다소 사람 바울의 탄식입니다. 그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며,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이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분토처럼 버리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물이 되어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친 사도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명문거족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학문을 이수한 자로서 장래가 촉망되고 기대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 선인데 그가 행하는 것은 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이 이중성이 그를 괴롭혔고, 그로 하여금 슬퍼하며 탄식하게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선한 바울과 함께 악한 바울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영의 바울과 함께 육의 바울이 도사리고 있었고 속사람인 바울과 함께 겉 사람이 숨어 있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바울과 함께 죄의 법을 좋아하는 바울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바울과 함께 사울의 성품이 공존하고 있었고 새사람과 함께 옛 사람도 함께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된 바울과 함께 다떼섹 이전의 겉 사람 사울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면서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민하며 탄식 하는 이유는 무엇 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죄 속에 파묻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도인데, 연약하여 넘어지고 범죄하는 이중적인 자신의 무력 때문입니다.
바울의 연대표를 본다면 이때가 그가 다메섹에서 회개한지 23년 중 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바울사도는 사람이 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이 시편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로 더불어 범죄한 사건에 대하여 회개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범한 이 죄는 그의 인격에 큰 오점이었습니다. 그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를 삼아 버렸습니다.
그는 이 죄 때문에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았습니다(삼하12:7).
다윗은 이 한 사건 때문에 연쇄적으로 여러 가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인 간접 살인자입니다 그는우리아의 아내 랄세바를 법했습니다. 그는 딴세바를 빼앗아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그 죄를 숨기려고 거짓증거를 도모했습니다. 이 모든 죄들은 다윗의 탐심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다윗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탄식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이 심히 떨리나이다"(시6:2-3).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6:6-7).
시편 중에는 회개의 시로 불리우는 시편이 7편 정도 됩니다. 6, 32, 38, 51, 102, 103, 130, 143편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눈물없이 이 시편들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시편은 거의가 다 다윗의 시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회개한 것은 그의 죄가 켰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상을 적시면서 운 것입니다. 그는 요가 썩도록 원통하게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렀습니다. 물론 다윗이 죄 짓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바울처럼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바 악은 행한 것입니다.
다윗은 두려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설교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기도는 회개한 자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이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자의 기도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도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렸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다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치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왕상8: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시143:2).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20). 의인은 하나도 없고(롬3:10).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롬3:23).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② 죄는 절대로 모방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부터서의 상속물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까. 하나도 없나이다" 이는 욥의 고백입니다(욥14:4). "육으로 난 것은 육에"불과합니다(요3:6).
그런즉,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습니다.
③ 죽음은 범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즉, 죄의 형별로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히9:27). 세상에 죽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정죄 됩니다.
그런즉, 정죄되어 영별을 받을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죄를 받아야합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다 죄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죄요, 손으로 만지는 것이 죄요, 먹고 마시는 것이다 죄입니다.
알게 모르게 범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세리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눅18:13). 회개한 자만이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면서 회개합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긍휼을 빌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범한 최에 대하여 용서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말은 Chanan인데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 은혜를 베풀다"는 뜻과 함께 사역동사로 쓰일 때에는 "애걸하다. 긍휼히 여기다, 기원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 때문에 애타며 고민하고 있다가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2).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51:7). "내 모든 죄악을 도말 하소서"(51:9).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애원하고 있습니다. 씻어달라고 합니다. 깨끗이 제해 달라고 합니다. 도말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없애 달라, 지워 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질병 때문에 고통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돈 때문에, 빛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당할 일이 아닙니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습니다.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미쳐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집을 뛰쳐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세상이 싫다고 제 갈 길로 가기도 합니다. 정말 당할 짓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그저 귀찮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그 사정을 알아주겠습니까? 지나가는 바람이나 알고, 산천초목이나 알고, 산새들이나 알아주려는지‥‥?
죄도 그러합니다. 죄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죄는 기쁨을 앗아 갑니다. 죄는 떨리게 합니다. 그 영혼이 살아 있다면 범죄하고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은혜로우십니다. 하나님만이 만인간의 죄의 속량자이십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자가 참 복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잘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용서해 달라고 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비밀을 폭로합니다. 사람들은 약점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 하셔서 통회 자복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사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1요1:9).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신 분입니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십니다. 깨끗케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추한 죄인도 내물지 않으십니다.
영국 런던에 한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 고아원의 경영자는 Dr. 바나도우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아원이나 양로원의 문은 항상 비좁습니다.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추천인이 있어야하고 증명서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고 소년이 찾아와서 고아원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원장 바나도우 박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누가 너를 이 고아원에 추천했지? 우리는 너를 모르잖니?" 그 때 그 소년은 그 헤어지고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원장님에게 내보이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원장님, 저를 이 고아원에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날 추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말을 들은 바나도우 박사는 그 소년을 얼싸안고 영접하여 그를 그 고아원에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있다면 헌옷과 같은 것뿐입니다. 우리를 추천하고, 증명해 줄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인이 누구의 신임 얻으며, 누구의 추천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예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거절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검고 붉은 추한 죄가 예수께 나아가는 추천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성도 여러분! 주의 긍휼을 힘입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긍휼을 힘입고 보좌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84. 8. 26)
20. 내 고향으로 가게 하소서
20. 내 고향으로 가게 하소서
(창30:22-27)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의 둘째아들입니다. 그는 에서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으나, 조금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에서의 동생이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을 때 이삭의 나이는 60세였습니다. 이삭의 가정에는 이 두 아들 때문에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에 대하여 생각하고자합니다.
한 마디로 야곱은 불가해한 사람이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자입니다. 그는 착하면서도 불량했으며, 일어섰다가는 넘어졌습니다. 그는 알다가도 모를 자였고, 실수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 하셨습니다.
그는 교활한 자였지만,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중성격의 소유자요, 모순투성이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초기의 생애는 선악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야곱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 때문에 희생이 된 자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지나치게 편애 하였습니다(창25:28) 이 어머니는 편애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으로 하여금 속이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배가 고파 창백한 얼굴로 들에서 돌아왔을 때, 맛있는 핕죽으로 형을 유혹 하였습니다. 그는 형의 배고픔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이용 하였습니다.
셋째로, 야곱은 본래 교활하고 기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모친이 그에게 아버지를 속이자고 제안 하였을 때 그것을 허락함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영적인 축복을 얻기 위하여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장자권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창25:29-34)
결국 그는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창27:1-29), 또한 형 에서를 기만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형 에서의 노여움을 사서멀리 멀리 도망쳐야 했습니다(창27:43). 동생에게 속은 줄 안 에서는,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창27:41).
일이 이쯤 되자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니,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리거든 내가 너를 거기서 불러 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27:42-45).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에게로 보내면서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있으라"고 위로하면서 야곱을 피신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몇 날이(a few days), 춘풍춘우 20년이란 긴 세월로 바뀔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몇 날이, 한에 사무치는 이산가족이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참으로 사람의 일이란 모를 일입니다. 몇 날 후면 데리려 가겠다던 철석같은 어머니의 약속이, 해지고 달뜨는 사이에 어느새 20년이 지났으니 말입니다.
20년, 말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서 20년의 하루하루의 날들은 눈물과 한숨과 탄식의 날들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정든 집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눈에 선한 고향 산천이 그리워 달을 보며 눈물짓고, 바람 따라 한숨 쉬었을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산 것이 20년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외롭고 쓸쓸한 타향에서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그동안 그는 가정을 이를 수 있었고, 자녀도 얻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상당한 재산도 모았습니다(창30:43). 또 외삼촌 라반의 집을 복되게 했습니다(창30:30). 그러나 생각하면 그는 정처 없는 방랑객이었고, 나그네였습니다. 얼마의 재산은 얻었으나, 부모와 고향은 잃었습니다. 야곱의 가출 속에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내 고향 내 본토로 보내 달라"면서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그는 형에게 쫓겨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고향에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은 잊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에게 자녀도 주셨고, 재산도 주셨습니다. 20년 세월도 흘렀으나 야곱은 첫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신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닥터 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는 한때 망명과 침묵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그는 말하기를 "제발 내 고향에서 물아 내지만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합니다.
하인리 만(Mann, Heinrich)은 토마스만(Mann, Thomas)의 동생입니다. 그는 형만큼은 못해도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과 싸우다가 미국으로 망명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 못 견디다가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만 가지 병에는 약이 있어도, 향수병(homesick)에는 약이 없습니다. 사람이 가진 본능 중에 가장 큰 본능 중의 하나는 고향을 사모하는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지키지 못하고, 앗수르와 바벨론 등 강국의 포로가 되어 이국 땅에서 살면서 고향 잃은 비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거기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고기도 저 놀던 물을 좋아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우도 죽을 때에는 그 머리를 그가 태어난 곳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합니다(首丘初心). 항차 사람들에게 있어서라?
미국인의 아내가 되어 이민 간 어떤 부인이 고국을 떠난 지 14개월 만에 분신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외신은 전하기를, 그 이유는 향수병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6 25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분단된 이 땅에는 아직도 1000만의 이산가족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불러댄 그 많은 고향노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조 선조 때의 대정치가이며 대학자였던 이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읊었다는 "고향은 천리만리"란 시가 있습니다.
"고향은 천리만리 산이 덮이고/오락가락 꿈속에 뵈는 옛 마을/한송정엔 외론 달 누를 비 치며/바람은 경포대를 싸고 돌으리/모래밭엔 휘도는 갈매기무리/동서로 고깃배는 드나들으리/언제나 다시/한 번 고향갈꼬/예전 입은 채색옷 못내 그립네"/
한나라 고조를 도와 중국천하를 통일한 장지방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초패왕의 10만 대군을 포위해 놓고, 어느 밝은 가을밤, 옥퉁소로 구슬픈 가락을 불어, 고향을 떠나 야전에서 스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항우의 군대로 하여금 고향 생각 사무치게 하여 군영을 도망치도록 유인하여 대승하였다는 전사가 있습니다.
고향은 그리운 곳입니다.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곳입니다. 고향은 언제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입니다. 모아 놓은 재산 없고, 이루어 놓은 업적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이 고향입니다. 항차 금의환향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가고 싶겠습니까?
20년 세월이 야곱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그 고향을 지워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잊을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또한 자식이 부모님을 잊지 못하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형님을 속인 것이 미안스러웠습니다. 어머님께 염려를 끼친 것이 죄스러웠습니다. 이제 불현듯 부모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만에게 "내 고향 본토로 보내 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고향은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고향은 가고 싶은 곳입니다. 우리는 고향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에는 옛 친구들이 있고, 부모님이 계십니다. 야곱이 사무치도록 고향을 그리 워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소서"라고 애원하는 야곱의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육신의 고향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고향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유대인은 시온이 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회교도들은 메카에 그들의 마음을 둡니다. 로마교는 바티칸을 사모하며 그리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본향은 땅 위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본향, 영원한 안식처는 저 천국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빌3:20). 히브리서 기자는"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히11:16). 이 말씀은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천국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우리 성도의 고향은 저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옛 어른들도 우리 인생의 한 평생을 역려과객(逆流過客)이라 하였고, 생은 기요, 사는 귀라 하였습니다(生은奇, 死는歸). 그런즉 언젠가 사람들은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진실로 인생은 고향 떠난 나그네입니다(히11:13, 벧전1:17, 창47:9). 언젠가는 찾아야할 고향이 있습니다.
그 고향 천국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만 가지 식물은 햇빛을 바라는 향일성(向日性)인 것처럼,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그 본능을 사모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빌1:21). 욥은 이 세상 고생이 너무나 막심하였을 때에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라고 하면서 어서 본향 찾아가기를 바랐습니다(욥19:27).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maranatha)라는 한 마디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았습니다(계22:10)
한국교회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일본의 박해가 극에 이르렀을 때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고대가"를 지어서 부르면서 그 본향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여러분, 야곱이"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해 달라"는 것 잘못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늘 본향을 그리워 사모하며 바라는 것, 그것은 본능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코끼리도 제가 살던 숲속을 그리워하며 그를 잡아 매 두면 먹이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통신용 비둘기는 눈을 감기워 먼 곳에 데려다 놓아도 영락없이 제 보금자리로 찾아간다고 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아무리 먼 거리일지라도 본향 찾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연어의 회귀본능(回歸本能)은 불가사의한 신비입니다. 연어는 범수어로서 가을에 강에서 산란합니다. 부화된 새끼는 북태평앙 베링해까지 가서 3-5년간 자라 어미고기가 되면(70cm-lm)죽기 전에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옛 강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왕복거리만도 3만 리가 넘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들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우리 모두도 육의 고향이 아닌 영의 고향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의 순간에 하늘을 쳐다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고향을 생각하고 또 고향을 찾는 이 계절에 우리의 하늘 본향을 생각함은 당연합니다. 그 하늘 집에 거처를 마련해 놓은 성도는 진정 복 있는 자입니다.
그 하늘 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비합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84. 9. 9)
21.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21.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행21:7-14)
바울은 교회 역사상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입니다.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습니다(행21:39).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롬11:1),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빌3:5).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행22:3), 바리새파였고 바리새인의 아들이었습니다(행23:6).
그는 율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으며(빌3:6),모든 일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빌3:6), 그가 교회를 핍박한 것은 무지한 소치였습니다(딤전1:3).
그렇다고 하여도, 그가 교회를 박해한 막대한 죄에 대하여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자들의 옷을 보관한 자였고, 그의 처형을 좋게 여겼습니다(행7:57-58, 8:1-2, 22:20). 그는 교회를 사정없이 박해하였습니다(행8:3). 그는 기독교인들의 가정에 침입하여 그들을 색출하여 투옥시켰습니다(행8:3).그는 여러 도시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며(행22:5), 그들에게 매질하였습니다(행22:19). 그는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에 맹세하였습니다(행26:10).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고문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행26:ll).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를 핍박하였고, 잔해 하였습니다(갈1:13).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신령한 빛을 보고 실명하게 되었고(행9:2),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행9:4), 또한 그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행9:17, 27, 22:14, 26:16, 고전9:1, 15:8).그는 이때에 거꾸러졌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사람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새사람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에게 있었던 다메섹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중생의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새 사람으로 거듭났느냐 말입니다. "구원 받았느냐? 거듭났느냐?"말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롬8:9).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입니다(요3:6).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후 완전히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지극한 정성으로 로마 제국의 국도를 오르내리며,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부활하셨다"고 외치며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었습니다(롬9:21, 23) 그는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부를 받은 자였습니다(행13:47, 딤후1:11).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종으로 세움 받은 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만큼 고난당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처음에 성도들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행9:26). 그는 성도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빌1:14-18). 그는 곳곳에서 많은 위협을 당했습니다(행9:23-25, 고후11:32-33, 행9:29, 20:3, 21.30-31, 23:10, 23:12-22, 25:3). 그의 사역은 동족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반대를 받았습니다.
안디옥에서도(행13:45,50), 이고니온에서도(행14:2-5), 데살로니가에서도(행17:5, 살전2:2, 14-16), 베뢰아에서도(행17:13), 고린도에서도(행18:6:12), 에베소에서도(행19:26)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탄의 압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행13:8, 16:16-18, 살전2:18, 고후12:7). 그는 빌립보에서 매 맞고 투옥되었습니다(행16:19-24). 그는 아덴에서, 가이사랴에서 조롱당했습니다(행17:18-32, 26:24). 그는 때때로 고소도 당했습니다(행24:5-9,25:7). 그는 사납게 몰아치는 태풍도 만났습니다(행27:14-20). 그는 독사에게 물리기도 하였습니다(행28:3-4). 그는 감옥에 갇했습니다(행24:27, 딤후1:8, 2:9, 엡6:20, 빌1:13).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딤후4:10, 16). 그러다가 그는 결국 네로의 박해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사도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려는 무렵의 기록입니다. 바울은 그때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전도자 빌립의 집을 방문 하였습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선지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여러 날 묵었습니다. 마침 그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의 수족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이 예언은 바울에게 불길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을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권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바울은 성도들의 눈물의 만류를 받고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만류가 바울의 각오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벌써 예루살렘에서의 순교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무거운 짐도 각오가 된 자에게는 가벼운 법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의지는 반석 같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저들의 권함과 만류를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아무리 권해도 소용없음을 알게 된 빌립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만류를 포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21:14).
이 말씀은, 주기도문의 아름다운 응용입니다.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상기시켜 줍니다(눅22:42),
사도 요한의 제자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Poly Carp)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주겠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고, 그는 나를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구주이신 주님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결국 폴리갑은 화형 당한 것입니다. 그가 순교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한 말씀이 곧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많은 직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중요한 일을 앞에 놓고 함께할 말이 있다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우쭐대거나, 자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무거운 사명감을 통감하게 됩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낙심하거나 실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성하게 됩니다. 이 말씀 앞에서는 아무도 투털거리거나 시험에 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살피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도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뜻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창17:1, 출6:3, 렘32:17),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147:5).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떤 개인도, 국가도, 지상이나 천상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적 성지(聖旨)를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을 측량치 못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3,34).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기 때문입니다(사28:29). 마치 어린이가 그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음과 같습니다.
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진정 위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완전합니다. 실수가 없으시고 변역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은 가장 고상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훌륭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깊고 오묘합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 장래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걸 모양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까지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현실 세계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의 세계까지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중심입니다.
그 하나님은 고상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뜻은 가장 고상한 뜻입니다
이사야선지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하나님의 뜻은 완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잘못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인생의 생사화복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는 전후좌우가 다 막혀버린 절벽 앞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는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벤쟈인 슈몰크(Benjamin Schmolck)목사가 1704년에 지은 것인데, 본래는 11절로 된 시였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어떤 처지에서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산다는 뜻인데, 마가복음 14:36절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찬송이 나오기까지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벤쟈민 슈몰크목사 내외분이 함께 전도하러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불이 났습니다. 불행하게도 집에 있던 사랑하는 두 아들 형제가 미처 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죽어 있었습니다. 슈몰크목사 내외분은 새까맣게 불에 탄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무릎을 끓어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후에 기도한 것을 시로 옮긴 것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부르는 찬송이 된 것입니다.
불에 탄 두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 찬송은 생기지 않았을런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찬송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고, 불행을 이기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과연 그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들을 외면하거나 손해되게 행치 않으심을 믿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롬8:28).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꾼다면, "전화위복"된다는 말씀입니다.
1929년 어느 날 미국의 뉴욕에서는 권투시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합에 출전한 선수 중에 "다니 론돈"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벙어리였습니다. 그는 시합 도중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는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K.0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돌연 귀가 열려 말도 하고, 들을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화위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손해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유익되게 하십니다. 지금은 손해처럼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일을 통하여 종내에는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부흥자였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뜻대로! 어느 때든지 뜻대로! 어디든지 뜻대로!"
빌립집사 일행은, 바울사도의 예루살렘 행을 염려하여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가진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는 성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어진 지난날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뿐이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에 대해서는 아멘 할 수 있습니다."(To all that has been Thank! to all that shall be yes! ).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언제나 아멘 합시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나의 원대로 마음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아멘.
(84. 9. 16)
22. 꿈에 본 사학다리
22. 꿈에 본 사학다리
(창28:10-2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창15:5, 18:10), 권고하심에 따라(창21:1-2), 그는 노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창21:3-7). 그가 곧 이삭입니다. 이삭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21:4). 불행하게도 이 일 외에 이삭의 초기 생애에 관한 기록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삭은 노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장성한 것 같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이삭의 나이 25세가 될 무렵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 산의 번제물로 바쳐진 것 같습니다(창22:1-19)
이삭의 나이 36세 되던 해에 그의 모친 사라는 1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창23:1). 아브라함은 이삭의 성혼을 위하여 늙은 종 엘리에셀로 하여금 옛 고향을 방문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인도 따라 리브가를 자부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창24).
이삭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내 리브가를 맞이함으로,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여(창25:20)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족장들과는 달리 오직 한명의 아내를 거느린 족장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자녀 갖기를 기도했습니다(창25:21).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가에게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를 주셨습니다. 이 쌍둥이 형제를 낳을 때 이삭의 나이 60세였으니(창25:26), 결혼 후 20년만의 경사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삭은 50세경 장님처럼 눈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 속였으며 에서를 더 사랑하는 편애와 맛좋은 음식을 좋아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허물입니다. 이 때문에 펼쳐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입니다. 그는 쌍둥이 형제인 야곱보다 30분 먼저 태어난 것 때문에 이삭의 후계자가 되었고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의 을보다 두 배나 더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문의 우두머리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법과 관습에 의해 부여 받은 자입니다.
그는 참으로 행운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특권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사냥 나갔다가 배고파 돌아왔을 때 야곱은 맛있는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끓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창25:30). 동생 야곱은 형 에서에게 요구했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면서 야곱에게 팔기로 맹세하고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창25:33).
이렇게 하여,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의 상속권을 샀습니다(창25:31-34), 그리고 그는 또 그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창27:1-29),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의 이 처사는 도덕적으로 평가할 때 많은 문제가 야기 됩니다.
① 이 일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종용에 인한 것입니다(창27:5-10).
② 야곱은 온 세계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통로인 장자의 상속권을 열망하였습니다.
③ 그는 다른 방법으로는 이것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공모하여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④ 다른 또 한 가지 사실은, 에서의 장자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창25:34) 여기 경홀히 여긴다는 말은(bazah),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얕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어찌하여 당연히 상속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축복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과소평가했을까? 세상적인 것에 비중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에 대하여 장님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에서는 얼마 후 자신의 경솔한 처신에 대하여 후회하고, "아버지여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울면서 부르짖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창27:36-38).
그는 엄청난 장자권의 특권을 등한히 여기다가 이렇게 슬피 울게 된 것입니다. 에서의 장자권 흥정사건은 히브리 기자의 다음 말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2:3).
⑤ 야곱은 부정한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목적은 달성했으나, 그 죄에 대한 큰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이 가로챈 장자권과 축복 때문에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창27:41). 일이 이쯤 되자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밪단 아람의 외가 집으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야곱이 정처 없는 길을 떠나려할 때, 아버지 이삭은 그를 불러 축복하고, 세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
①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② 전능하신 하나님 이 너를 축복하여 생육하고 번성케 되기를 바란다.
③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땅을 유업으로 받기를 원한다.
야곱은 부모 형제를 뒤에 두고 브엘세바를 떠났습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쫓겨 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낯선 길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형 에서의 분노가 빗발치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그를 반기며 기다리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렇게 서럽고 외로운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정처 없는 길에 밤이 왔습니다. 그는 어둠 속의 방랑자가 된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있어서 어두운 밤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28:ll). 사람들은 종종 이와 같은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후좌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어두워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려고"하였습니다(창28:11).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외로왔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부모형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세상에는 믿을 것이 없었습니다. 공포와 절망 뿐입이다. 이것이 죄인이 경험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지쳐 쓰러져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창28:12-15).
우리는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하늘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라고 하였습니다(12).
그 사닥다리의 하부는 "땅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땅은 브엘세바와 하란 사이의 루스라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보다는 야곱이 쓰러져 있는 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쫓겨난 한 인생이 불안과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인생이 쓰러진 장소입니다.
밤공기 싸늘하고 맹수가 울부짖는 어두운 밤입니다. 바로 거기에 사닥다리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닥다리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사닥다리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즉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사는 세상에는 그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하늘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쓰러져 잠든 곳은 절망적인 장소입니다.
죄짓고 도망치다가 잠든 곳입니다. 형제도부모도 없는 외로운 곳입니다. 밤은 어둡고 어디에선가 맹수가 나타날 법한 곳입니다. 한숨 쉬며 불안해 하다가 잠든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도 하늘문은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있었습니다. 야곱은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처한 환경이나 불행을 탓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절망의 상황에도 하늘로 통하는 길은 있고, 사고무친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혼자 버림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극한 상황은 하나님께 기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하늘 영광을 본 것은 더블베드 위에서가 아니고, 돌무더기 속에서였습니다. 요한이 장차 되어질 계시를 받은 것은 영화의 때가 아니라, 추방당한 유배지에서였습니다. 견고한 수목은 상하(常夏)의 나라에서가 아니고, 눈보라 치는 한대지방에서 얻어집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순풍에서가 아니고, 태풍이 불때마다 깊이 뻗습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의 환상은 부모 슬하에서가 아니라, 외로운 광야에서였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아골 골짜기는 소망의 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호2:15).
~(2) 야곱은 사닥다리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과 한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닥다리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고,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였습니다.
①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13).
② "네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다"(14).
③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4)
④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있겠다(15).
⑥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15).이 엄청난 축복과 약속은 방랑자 야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는 방랑자였으나, 하늘의 부자였으며, 세상에서는 혼자 헤매이고 있었으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3) 야곱은 사닥다리의 환상을 본 후 변화를 받았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그는 이 환상을 통하여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된 모습을 살펴봅시다.
①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부모 그늘에서 늦잠 자던 버릇이 고쳐졌습니다.
②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이라고 외쳤습니다.
③ 그는 무의미한 장소를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곳은 삭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④ 그는 베개하고 잠들었던 돌을 취하여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파괴하던 자가 세우는 자가 되었고, 훔치던 자가 바치는 자로 변한 것입니다. 하늘 영광을 본 자는 다 변화 받습니다. 사울이 바울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⑤ 루스가 벧엘이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무 이름에 불과한 루스가 하나님의 집으로 바꿔 것입니다. 야곱이 만일 그의 부모 품에 안주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고생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야곱은 행복할 때 못 만난 하나님을, 불행해 진 때 만났습니다.
여러분 중에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 분을 영접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는 하늘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환상을 본 후 변화를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는 하늘가는 길입니다(요14:6).
예수는 우리의 위로입니다(고후1:3-4).
예수를 만나면 변화를 받습니다(고후5:17)
"그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축복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84. 9. 30)
23.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23.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눅15:1-7)
누가복음 15장에는 주옥같은 비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I-7), 잃어버린 은전 비유와(B-10),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가 그것입니다(lI-32).
어떤 분은 누가복음 15장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 모두가 다 없어진다고 하여도, 이 한 장만 남아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유명한 비유를 세 가지나 말씀하신 동기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 본문 1-2절에 보면, 예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서 예수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원망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賤民)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이들 땅의 백성들과의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리새인(Pharisaios)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자들입니다(마12:2, 빌3:5). 분리주의자, 배타주의자로 통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 Parsh에서 유래된 것인데, "분리하다. 구별하다. 조각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일체의 금전거래를 삼가 했고, 그들의 증언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으며, 그들과 밀담을 나누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세우는 것도 금지되었고, 자선금의 관리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여행 중 동행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님이 되는 것도, 그들을 영접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상거래도 삼가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들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피인물들과 교제하고 상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기뻐할 리가 없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죄인 중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말하지 아니했고, "죄인이 벌 받아 멸망하면 하늘의 기쁨이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구원보다 그들의 멸망을 고소하게 생각하였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보다는 망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바리새교인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길 잃은 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잃은 양인 죄인들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을 불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잃은 양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돌아옴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고,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1)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육 동물인 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온순한 동물입니다(렘11:19),
둘째는, 공격적인 동물이 아닙니다(사53:7).
셋째는, 지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유리하고 방황합니다(사53:6, 렘50:6). 또한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벧전2:25, 마18:12).
넷째는, 자기 방어력이 약합니다(미5:8). 소는 뿔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고, 맹수는 예리한 이빨과 발들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나, 양에게는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그는 목자의 보호함이 없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집을 찾아갈 줄 아는 지각이 있으나, 양은 우리를 찾아갈 수 있는 지각이 없습니다.
양은 본능으로 사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양은 앞을 내다보는 지각이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풀만 바라보며, 그것을 뜯어먹으며 좇아 가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양은 좌우를 분별할 능력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주의하게 되고,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런즉, 양에게 있어서는 보호가 필요하고(욥30:1), 목자가 있어야 하고(요10:4, 27), 양 우리가 있어야 하며(요10:1), 초장과(출3:1), 물과(창29:8-10), 휴식과(시23:2), 때마다 털을 깎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삼상25-2, 11).이와 같은 양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삼하24:17, 렘31:10). 그리고 신약 성경은 성도들을 상징합니다(요10: 2, 21:6).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 한 마리 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잃은 양이라고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① 옛날에는 우리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 있는 양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즉 낙심 중에 있는 양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② 우리 안에 있기는 하나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따르지 않고, 방황하는 양을 의미합니다. ③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즉 길 잃은 양입니다. 곁길로 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렘50:6). 사망의 길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잠16:25).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을 말합니다(마7:13).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전2-14). 불법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마13:14).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이 같은 길 잃은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살다가 길을 잃었고,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멀리 멀리 도망쳤으며, 목자의 음성이 싫어서 뛰쳐나간 양도 있습니다. 세상 향락과 정욕을 따라 헤매다가 길을 잃었으며, 돈 그것이 무엇이길래 의리도 신의도 팽개치고, 울 밖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의 인도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그 영혼은 파리하게 되었으며(시16:15), 황량한 광야에서 고적하고 쓸쓸하게 헤매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우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그 잃은 양을 찾아주는 목자가 없다면 그는 별 수 없이 죽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헤매는 저 많은 길 잃은 양들을 어떻게 할까요? 저 행락 인파 속에도 잃은 양은 헤아릴 수없이 많고, 최루탄을 쏘고, 보도블록 조각을 딘지는 저 군중들 중에도 잃은 양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집 안에도 그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대양의 고인 물은 그들의 눈물이요, 육대주에 부는 바람은 그들의 한숨입니다. 절규하는 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합시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에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 하겠느냐"(4).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 양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한 마리 양보다 엄청나게 많고, 더욱 소중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아흔아흡 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를 더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남은 아흔아홉 마리도 역시 그 같은 한 마리의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잃은 양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그들을 찾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 말씀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을 찾기 우하여 다음 몇 가지를 기억하여야할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찾아야 할 잃은 양은 누구인가?"를 성령의 인도 따라, 인도할 대상자로 정합시다.
둘째는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의 감화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셋째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인도하여 말씀을 듣게 합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성령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합시다.
~(3) 마지막으로는 오늘 우리 본문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5-6).
이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양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① "즐거워"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돌아왔을 때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하면서 기뻐했습니다(눅23:43).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습니다(눅15:24).
②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멘 이유는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요 양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전설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양에 대한 애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③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6).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보다 더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재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성도 여러분 잃은 양을 찾읍시다. 우리 집 안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우리 이웃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면 천국의 큰 기쁨이 됩니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아멘.
(84. 10. 14)
24. 잃은 은전을 찾자
24. 잃은 은전을 찾자
(눅15:8-10)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와 잃은 아들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들 세 비유는 각각 독립된 비유라기보다는 하나의 연속된 비유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진 공통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같이 "잃은 자"와 "찾은바 된 자"를 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이들 종교는 다 같이 사람이 신을 찾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신이신 하나님께서 잃은바 된 인간을 찾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셋째는 잃어버린바 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15:9). 잃어버린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15:22-24,32).
오늘 우리는 그 둘째 비유인 잃은 드라크마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 받도록 하십시다.
~(1)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느 여자"로 가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여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신적 지혜 일 것이라고 구체화하는 해석들이 있으나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하여간 은전을 잃은 자는 여자입니다. 모든 정황은 그녀의 가난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애지증지 아끼는 은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여인의 슬픔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한 드라크마입니다. 그가 본래 소유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10분지 1에 불과합니다. 드라크마(drachne)는 헬라의 화폐단위인데, 로마의 데나리온(denarius)에 해당하는 정도로, 노동자의 하루의 임금에 비교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드라크마에 대하여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 가난한 여인에게 있어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아상태에 헤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넉넉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식품이었다고 합니다.이 열 드라크마는 은사슬에 열 개의 은전을 꿰어머리장식으로, 혼인한 여인의 표시로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혼 반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보배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그 한 닢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를 잃었다면, 결국은 열 닢 모두를 못 쓰게 된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중대한 손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교훈을 받게 됩니다.
① 적은 것에 대한 가치와 존재 의의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소자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마18: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마7:14),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사람에 비하여 소수였지만,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그들이었습니다(민14:30). 부패를 막는 소금의 양은 언제나 내용물보다 많지 않습니다.
큰 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초 한 자루에 불과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것은 사울 왕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삼상17:50). 블레셋 대군을 전멸시킨 것은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이었습니다(삼상14:1-15)
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를 맡아보는 서비스 보이는 귀한 손님 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기대를 걸고 그 손님을 잘 모셨습니다. 그 분은 온 세상 사람들이 자동차 왕이라고 부르는 포드였기 때문입니다. 서비스 보이는 후한 팁을 기대하면서 정성스럽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자동차 왕 포드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한 푼을 줄 뿐이었습니다.
성이 난 서비스보이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만한 돈은 제게도 있으니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면서 돈을 돌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포드는 그 돈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싫으면 그만 두어라. 그러나 너는 언젠가 반드시 이런 등전 한 푼 때문에 울 날이 있으리라" 포드는 그 동전을 받아서 호주머니 에 도로 넣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그 소년은 장성하여 위대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때 포드에게 받은 교훈으로 분발했다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고, 순간이 거듭하여 해가 됩니다. 성냥개비 한 개가 능히 아방궁을 불태울 수 있고,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집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은, 절대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② 그리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드라크마의 의미입니다. 성경 난하주에 의하면 그것은 "은전의 명칭"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드라크마, 곧 은전을 의미합니다.
은은 철이나 납처럼 천한 금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광(銀鑛)을 "왕실의 광산"이라 여겼습니다. 히브리 말은(keceph) "사모하다. 열망하다. 탐내다"는 어근에서 온 "돈"을 의미합니다. 돈은 귀한 것입니다. 돈은 만능입니다. 그것으로 행복 말고는 다 살 수 있고, 천국 말고는 어느 곳에나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레서 사람들은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세계를 향하여 중요한 방송을 하기 위하여 택시를 불러 세운 후 "BBC 방송국까지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멀리는 갈수 없다면서 거절 하였습니다. 처칠 수상은 "왜 못 간다고 하는가?"라면서 따졌더니 "다른 때 같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만, 한 시간 후면 처칠 수상의 방송을 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거절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처칠 수상은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파운드의 돈을 더 주면서 가자고 했답니다. 못 간다고 하던 기사가 그 돈을 받고 무어라고 한 줄 압니까? "타세요, 아저씨. 처칠인지 개떡인지‥‥돈부터 벌고 봅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은전에다 비유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은전이 귀한 것처럼, 영혼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한 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영혼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은전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보배가 티끌 속에 묻혔습니다. 귀한보배가 흙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귀한 인간의 영혼이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티끌 속에 쳐 박혀 있는 영혼들이 허다합니다. 은전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여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죄악 속에 파묻히고 말면,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무용지물이 되고,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죄의 먼지, 죄의 티끌 속에 버려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지의 티끌, 불신의 티끌, 의심의 티끌, 허영의 티끌, 교만의 티끌, 정욕의 티끌, 죄의 티끌 속에 파묻혀 잃어버림을 당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 내야합니다. 죄의 티끌 속에 파묻히면 쓸모없는 인간이 핍니다. 무가치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냄새나는 인간이 됩니다. 썩어가는 인간이 됩니다.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영원한 지옥 자식이 되고 맙니다. 이들은, 우리의 가족 중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 구원해 내야합니다.
~(2) 오늘 우리 본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비유에서는 은전을 찾는 여자의 지극한 정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① 그녀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켰습니다. 등불을 켠 후 문 뒤와 어두운 이곳저곳을 뒤졌습니다.
② 그녀는 "비로 쓸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폈습니다.
③ 그리고 "부지런히"찾았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찾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을 연구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요, 행동입니다.
등불을 켜는 수고와 비로 쓰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열매는 나무를 심는 자만이 따기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정성스런 일꾼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음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마5:14).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혀줍니다. 빛은 뜨겁게 합니다. 빛은 살균작용을 합니다. 빛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빛은 선행을 의미합니다(마5:15-16)."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13:47).
둘째는, 성결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먼지나 너줄한 것이 덮여있으면, 은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방 안을 쓴 것처럼, 교회가 깨끗하고 평화롭고, 질서정연해야 합니다.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추문은 교회의 부흥을 막습니다. 모처럼 믿어볼까 하고 교회에 나왔다가 싸우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회개의 역사가 세차게 일어났던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우리의 안과 밖을 깨끗하게 합시다(요15:2)
셋째는, 부지런히 찾읍시다. 샅샅이 뒤지면서 찾읍시다. 부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돈을 찾는 것뿐입니다. 왼손에는 등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방을 쓸었습니다. 눈으로는 두리번거리면서, 머리로는 생각하였습니다. 온 정성을 집중하여 찾고 또 찾았습니다.
손, 발, 눈, 머리 그야말로 총동원하여 잃은 보배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실상입니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가 제일 힘썼던 일이 잃은 영혼을 찾는 일이었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이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 찾아야 합니다. 계속 찾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찾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찾아야 합니다(딤후4:2).
미국 다카다스라는 곳에는 넓고 넓은 밀밭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해 추수 때, 수천의 추수꾼들이 그 넓은 밀밭에 들어가서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넓어서, 몇 날 며칠이 걸려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와서 놀고 있었습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황혼이 되어 일을 마쳤는데, 세 살 되는 어린아이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곳 어디 에도 아이는 없었습니다. 추수꾼 수천 명은 귀가하는 것을 미루고, 밀 밭 여기저기에 흩어져 찾았습니다. 밤새워 찾아 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이제는 포기 할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배는 고프고 밤은 어둡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다른 방법으로 찾아봅시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찾아봅시다." 얼마쯤 훑어 나가는데 "여기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잃은 아이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벌써 쓰러져 죽어있었습니다. 추수꾼들은 죽은 아이를 어머니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도 울면서 "여러분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처음부터 손을 잡고 찾자고 제안했더라면, 사랑하는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잃어버린 한 영혼은 은전 한 닢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이 일은 몇 날 혹은 몇 달 힘쓰다가 그만둘 일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15년 동안이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권면하는 줄에 기어코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은전을 기어코 찾아 반짝반짝 빛나는 성 어거스틴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녀의 기쁨이 얼마나 켰겠습니까?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외쳤습니다. 정발 신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재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은전을 찾음은 여인의 기쁨일 뿐 아니라 하늘의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갈 죄인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84. 10. 21)
25.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5.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19-23)
구약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섭리하신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또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요 찬송이며, 그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한 민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 "한 민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 "한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예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곧 예수십니다(요5:18, 10:30, 빌2:6). 예수는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모든 역사의 중심사건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구약 성경은 그의 탄생, 그의 생애, 그의 고난, 그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예언된 대로 고난 그것이었으나, 그는 위대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사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자,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느냐 혹은 배척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느냐 혹은 영원히 멸망하느냐, 또는 천국에 가느냐 혹은 지옥에 가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 21절 말씀은,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첫째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전도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은 임의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 받아 오셨습니다(요20:21, 17:18).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일을 위하여 특정인을 보내신 것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왕에게로 보냈습니다(출3: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기드온을 보냈습니다(삿6:14).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기위하여 사무엘을 보냈습니다(삼상15: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선지자를 보냈습니다(렘7:25).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륜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보냈습니다(창45:5,7,8).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경륜을 위하여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그가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 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②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23, 마9:13). 세례요한도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막1:4).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막1:15). 예수께서 파송하신 열두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막6:12).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행2:38). 위대한 설교가 바울 사도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다 명하사 회개하라"하고 선포했습니다(행17:30). 모두가 회개를 이렇게 외친 것은, 회개가 하늘나라의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자각만은 아닙니다. 죄의 자각이 회개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으나,죄를 자각하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슬퍼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회개는 눈물 이상의 것입니다. 회개는 선한 삶에 대한 맹세나, 결심과도 다릅니다.
입으로는 많이 맹세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생활이 회개한 자의 삶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헬라말 회개(metanoea)의 본래 뜻은, 그릇된 생각이나 관념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나 목표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인 과오에 대하여, 그 생각과 뜻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마11:28).
④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⑥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⑦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 19)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일을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신명을 다하여 이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뜻을 다 수행하겠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19:30).
~(2)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남은 일은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어떤 이는 여기"보낸다"는 말을(apostello) "맡긴다"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임무는 전체 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엡4:11, 고전12:1-31, 마28:18-20).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열한 제자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을 다 망라한 말씀입니다.
예수는 승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전도사업의 계승을 위하여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임 받은 권위는 동일한 권위입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워 복음을 전했습니다(눅10:I-2).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파송하였습니다(행13:2-2), 요나는 니느웨로 파송 받았습니다(욘3:2). 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 신자들도 주님이 보낸 자들입니다(행8:4). 빌립 집사도 주님이 보낸 자입니다(행8:5). 아볼로도 보냄 받은 자입니다(행18:24).
그리고 우리들도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우리를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45 5, 7, 8). 하나님께서 불신 가정에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불신 남편을 위하여 기도할 이는 아내된 여러분 외에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불신가정을 위하여 세움 받은 전도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그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깨우치지 아니하여 그가 죄 중에 죽는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하였습니다(겔3:17-18).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는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발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떤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보니 자기가 천국에 와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문을 여시면서 저 밑을 내려다보게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내려다보니 거기는 옛날 자기가 살던 세상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소경이었는데 모두가 깊은 낭떠러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저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어서 가서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겠습니다. 저를 빨리 보내주세요"라고 소리치다가 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도 주님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셋째는 그들을 강권하여 주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하겠습니다.
언젠가 켄터키의 루이스 빌 에서 믿음 좋은 부인이 한 소년에게 전도했습니다. "너 주일학교에 가보지 않겠니?"라고 말하자 그 소년은 "네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소년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은 "너 예수 믿지 않겠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또 "나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부인을 "너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준비해 보지 않겠니?"라고 물었더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장성하여 일본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일본에 와서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였습니다. 신자가 된 가가와는 수천의 동족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유명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고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믿음 좋은 어머니에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예수를 거절하는 대신 훌륭한 법률가가 되어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마지막학년을 마치기 위하여 학교로 떠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 호주머니 속에 쪽지 하나를 넣어 두었습니다.
후에 그가 기숙사에서 호주머니를 뒤 지다가 어머니의 서투른 글씨의 쪽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이 진리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결국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서투른 글씨의 쪽지 속에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과 정성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볼티모어 근처에 어떤 기관사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그가 운전하는 기차가 자기 집 앞을 지날 때에는 언제나 그의 어린 딸이 나와서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의 말뚝이 가리워서, 아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그 말뚝을 빼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딸은 하루도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일을 걸르는 일이 없었고, 아빠도 답례를 걸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어린 딸이 울타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직감하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딸은 이미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아빠에게 전하는 쪽지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께 가서 하늘나라 울타리에서 말뚝 하나를 뽑아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그 사이로 아빠가 오실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래요" 어린 딸의 이 쪽지를 보고 그 아버지는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어린 딸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를 믿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이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음증거를 위해 보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성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이 일을 힘써야 합니다.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시카고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남자가 가로등 밑에 기대어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디는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무디를 노려보다가는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무디는 한대 얻어맞았습니다.
깜짝 놀란 무디는 변명했습니다.
"기분을 상하셨다면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당연한 것을 물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나이는 무디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습니다."너는 도대체 무엇 하는 놈이야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어서 가서 네 일이나 하라"면서 소리를 꽥질렀습니다. 이 말에 대한 무디의 대답이 무엇이라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실은 이것이 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일이 있은 지 석달 후 추운 겨울 새벽에 누군가가 무디의 집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가보니 가로등 밑에 서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번민해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밤에는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무디의 전도한 한 마디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4. 10. 28)
26. 죽음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26. 죽음은 삶보다 더 중요하다
(눅12:16-21)
부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광작하는 농부였습니다. 어느 한 해에는 농사를 잘 지어 대 풍작을 거두었습니다. 농사를 얼마나 잘 지었는지 쌓아둘 곳이 없어서 걱정이었습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17).
염려와 걱정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걱정과 근심은 부자에게 더 많을 듯합니다.
부자는 창고가 작은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작은 창고를 헐어 버리고 큰 창고를 지어 거기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부자는 행복한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치밀하였고, 재산은 태산같이 쌓였고, 행운은 그에게 미소 짓는 듯하였고, 행복의 파랑새는 그에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장미꽃 길을 휘파람 불며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부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 봅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 그는 부자였습니다. 지혜도 있었습니다. 영농계획도 대단하였습니다.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를 어리석다고 하였습니까?
① 풍성한 소출에 대하여 자기 수완으로 오인하고 있습니다(신8:17).
② 자기 수중에 있다고 하여 자기 소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③ 인간의 영혼마저도 물질로 사는 줄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19).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4:4).
④ 물질로서 영혼의 평안을 도모하고자 것은 잘못입니다.
⑤ 부자의 어리석음은 천박한 인생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생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금수와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롬14:7)
⑥ 잠깐인 세상을 영원한 세상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⑦ 그의 자신의 계획과 포부는 대단하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리석다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알아야할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1)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인생이 조물주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십니다. 생명의 시여자십니다.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인류의 아버지십니다. 또한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인생의 생사와 화복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그래서 다윗은 무신론자를 어리석은 자라하였습니다(시14:1). 호세아선지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호4:6).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2)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나의 생명도 나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자요, 맡은 자일뿐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 놓으라"고할 때 거절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재산도 내놓아야 합니다. 생명도 내 놓아야 합니다. 자녀도 내 놓아야합니다. 그런데도, 부자는 말하기를 "내 곡식, 내 곡간, 내 영혼····"이라고 지껄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생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아야합니다. 차는 타기 위하여 있습니다. 집은 이피풍우하면서 살기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전등은 밝히기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의자는 앉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사람들 중에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삼다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먹다, 입다, 죽다"가 인생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인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요리문답 제1문에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4)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히9:27).
기네스북에 의하면 지상에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중국의 "리 ·청 ·년"을 꼽습니다. 그는 256세를 살았다고 합니다. 성경은 969세를 산 무드셀라를 일컫고 있습니다(창5:27).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도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대열에 끼어 그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의 행열은 급행열차처럼 달려가고 있는데, 그 차를 타기 위하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먹는 것도 죽기위하여 먹는 것만 같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은 수의를 입는 것만 같습니다.
자는 것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만 같고, 서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만 같고, 달리는 것은 죽으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생각하면, 거짓말만 같고, 꿈만 같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사이좋게 삽시다. 얼마나 살 것이라고 서로 싸웁니까? 정직하게 삽시다. 거짓되게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짧습니다. 예수 믿고 삽시다. 뒤로 뒤로 미루기에는 우리의 생명이 너무나 불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 날이 불원간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최후의 순간에 당신은 어떤 상태에 있을 것 같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밤에 당신의 영혼을 도로 찾는다면 당신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행여나 여러분 중에 지옥으로 가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당신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 오늘밤 당신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황하지 않고 결산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일했다고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인생의 본분을 다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늘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행4:12).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인생의 낙제생입니다. 인생대학에는 재수생이 없습니다. 인생의 낙제생은 지옥행일 뿐입니다. 지옥은 무서운 곳입니다. 지옥은 영벌입니다(마25:46). 영원히 불타는 곳입니다(마25:41) 어두운 곳입니다(마8:12). 영원한 멸망입니다(사후1:9). 유황불이 붙는 곳입니다(계19:20). 그곳은 영원한 불못입니다(계20:14-15)
이런 곳에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어떤 분이 지옥 구경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 모두가 지옥불 속에서 "껄, 껄"하더라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탄식인 것입니다. "전도할 때 믿을 껄‥‥‥데리러 왔을 때 따라 갈 껄‥‥‥낙심하지 말고, 예수 잘 믿을 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미룰 일이 아닙니다. 이 핑계 저 핑계 이 구실 저 구실 들러댈 것도 아닙니다. 예수 안 믿고, 하나님 부름 받아 죽는다면 철천지 한이 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미루지 맙시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오늘밤 당신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당신이 예비한 것은 뉘 것이 되겠습니까?
부자는 땀 흘려 일했습니다. 농사짓고, 창고 짓고,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돈도 많이 모아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영혼을 도로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에 모아 놓은 재물은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적게 먹으며 모은 돈입니다. 헌옷 입으며 늘린 재산입니다.
그러나 나 죽고 나면 소용없습니다.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것은 내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무익할지 유익할지, 고맙게 여길지 구두쇠였다고 저주할지도 모릅니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시49:17).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12:15).
결국은 남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돈 때문에, 예수 믿을 시간이 없어서 안 믿고 지옥에 간다면 이중 삼중의 한이 될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간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오늘밤 당신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당신의 갈 곳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죽는 순간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요.
둘째는 한 번 가면,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 믿어야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믿는 성도들이 "함께 믿고, 하늘나라에 가자"면서 여러분을 오늘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어 남 주는 것 아닙니다.
당신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영원한 천국입니까? 영원한 지옥입니까?"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James. D. Kennedy씨는 유명한 댄스 교사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onald Gray Barnhouse박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케네디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살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디오를 꺼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를 영접한 뒤 유명한 목사가 되어 지금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대 청년 때, 고향에서는 예수를 잘 믿었던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양반행세 한다면서 긴 수염에 술친구와 어울려 활쏘기, 골패하기, 주색잡기로 허송세월하고 60 고개에 이른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잠은 오지 않고 허탈감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느 교회의 새벽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뗑겅‥‥뗑겅···" 그런데 이 종소리가 이 분의 귀에는 이상하게도 "정지영 지옥가 정지영 지옥가···." 이렇게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30분후 재종 치는 소리 듣고 찾아간 곳이 제3영도 교회였고, 그때부터 회개하고 잘 믿어 그 해 연말인 1953.11. 29주일에 온 가족이 예수 믿고, 세례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크레이 F. 박스톤 목사님에게도 신앙 좋은 친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은 자기 친구를 인도하기 위하여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리고 비웃기만 했습니다. 더 이상 전도하지 말라고 막말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겠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허락을 받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종이에다 이렇게 써보게. '오늘밤 내가 죽는다면 지옥에 간다'라고 말일세"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에 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리하여 약속대로 그날 밤 자기 전에 종이에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밤 내가 죽는다면···" 이렇게 쓰고 있자하니, 어쩐지 기분이 엄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진짜로 죽으면 어찌하나 겁도 났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짐하고 계속하여 "지옥에 간다"라고 씨 버렸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는"이것은 사실이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반드시 지옥에 간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커다란 공포 속에서 괴로워하였습니다. 한 밤을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고통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고집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지옥은 무서운 곳입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어떤 이는 지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마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있는 지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이 귀한 생명을 아끼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염려하십시오.
신앙에는 위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죽음은 삶보다 더 중요합니다. 주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오늘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드린 모든 분들에게 구원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84. 11. 4)
27.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자
27.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자
(요9:1-12)
한 번은 어떤 부자 한 사람이, 누구든지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1만 불을 주겠다고 광고를 냈습니다. 지정한 날이 되자, 수백 명의 남녀가 이 부자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훌륭한 직업을 가졌으므로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훌륭한 부모와 아름다운 처가 있으니 더욱 만족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나에겐 아무 불평 거리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 개의 학위를 가졌고, 정부의 높은 직위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는 세 번째 사람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나름대로의 이유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중에 아무도 이 1만 불의 상금을 타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주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당선들의 말대로 당신들이 그렇게 행복하다면, 왜 내 돈 만 불을 타려고 합니까?
이 이야기는, 세상에는 아무도 참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 깊숙이 그 어떤 그리움과 아쉬움과 모자람과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 행복을 찾으려고 진지한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어떤 이는 쾌락이나 오락이나 사치나 정욕에 마음을 기울여 보지만, 그 결과는 슬픈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이는 돈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 하지만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또 어떤 이는 훌륭한 학문과 명예와 지위로서 그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사회사업으로 그것을 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참 행복은 언제나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서 그들을 희롱할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 장황한 이야기의 요점은, 이 세상에는 참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불행하다 할지라도 불행하게 살 수 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증거하려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얄궂은 운명으로 태어난 자신을 저주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했습니다. 듣기는 하나,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거지였습니다. 부모의 유산 없고, 일하여 벌 수 없었으니 거지를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얼마였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가 만일 젊은이였다면, 그의 고민과 슬픔은 더하였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그는 죽지 못해서 사는 불우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던 어느 날,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이 소경된 사람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으로는 신체적인 재난인 불구나, 고난이나, 질병이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도덕적인 원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① 그것은 아담의 죄라고 생각하였습니다(롬5:12-21).
②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출20:5, 34:7,민14:18, 신5:9, 28:32, 렘31. :29, 겔18:2).
③ 병자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신28:15-68, 렘31:30, 겔18:4). 대개의 경우, 모든 불행은 고통당하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난문제를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9:3).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죄 때문이 아닌 재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재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소경에게 명령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9:7).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불우한 소경이 축복스런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삶의 참 의미와, 보람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불우한 조건을 숙명적이라고 생각하여 체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자포자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더 더욱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고쳐야합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는 자신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한숨 쉬면서 살아야 할 생애였는데, 빛을 보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불우한 생애는 바꾸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은혜 되기를 원합니다.
~(1)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기 원한다면,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는, 부모의 기쁨이 아니라 걱정거리입니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자입니다. 그는 부모의 짐이요, 온 가정의 한숨거리입니다. 그는 구박받고 자랐을런지 모릅니다. 그는 친구도 없이 자랐을 것입니다. 그는 밝은 낮에 집에 쳐 박혀 있어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불행을 타고난 자입니다. 돈 없는 소경은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 그 부모나, 자신이나, 그 주위의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천대했을런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경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도 존재 가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비록 거지 소경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한 자는 아닙니다. 혹 불우한 조건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곧 축복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삽시다.
~(2)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기 원한다면, 우리 불행한 정황도 하나님께는 최선의 상태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불행일런지 모르나, 그 소경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손해도 아니요, 불행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감사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얻는 비결 중의 하나는, 현재의 우리의 처지를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모를 임의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남자가 되고 싶어서 남자로 태어난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나무는 영원히 소나무일 뿐입니다.
찔레꽃이 장미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우리가 원하여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능력이 모자라고 육신에 장애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필요한 사람이고, 주님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비오는 날도, 밝은 날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밝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에는 감사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는 아멘 합시다(To all that has been-Thank! To all that shall be-yes! ). 이것이 신앙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무명의 병사가 쓴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일을 위하여 건강을 요구하였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주어
더 좋은 일을 할수 있게 되었노라.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원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었노라.
한 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노라.
삶을 즐기기 위하여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랐지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주사, 온갖 것을 다 즐길 수 있게되었고,
내가 원하고 바란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 중 나는 희망찬 것을 다 얻었나니,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간구하지 않았던 더 좋은 것으로 다 응답되었도다."
감사합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생애는 바꾸어집니다.
~(3)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기 원한다면, 우리의 주관과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맡겨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소경은 자기 자신 전체를 예수께 맡겼습니다. 예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대로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은 거기 가서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밝아 졌습니다. 갑갑하던 세계가 환해 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경이던 그가 "밝은 눈으로"왔습니다(7).이 놀라운 사실을 본 사람들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10).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요5:18, 10:30). 그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창18:14, 렘32:17).그는 38년 된 병자도 고쳤습니다(요5:1-9). 그는 광풍도 잔잔케 하였습니다(눅8:22-25). 그는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막5:22-43, 눅7:l1-15, 요11:1-44). 그가 이 같은 기적을 행하심은,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쉽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일도, 예수님은 다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행복해 질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우울하게 사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께 삶 자체를 맡기세요. 그러하면 명랑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영육간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께 맡기세요. 그리하면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맡기면 감사의 생애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주 넘어지는 자가 있습니까? 예수를 의지하세요. 그가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는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요16. 33).
성도 여러분! 우리도 소경처럼,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꿉시다. 어둠 속에 서 헤매는 생애를 밝고 빛난 삶으로 바꿉시다. 원망과 불평 속의 삶을, 감사와 찬송의 삶으로 바꿉시다. 실패와 좌절의 생애를, 승리와 성공의 생애로 바꿉시다. 가난과 고달픈 삶을, 부요와 만족의 삶으로 바꿉시다.
더럽고 추한 삶을 청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꿉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불우한 생애를 축복으로 바꾸기 원한다면,
첫째는 우리 자신에게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쓸모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어진 환경 중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는 손해도 불행도 아닙니다. 그런즉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아멘!
(84. 11. 11)
28. 교회의 일을 함께 염려하자
28. 교회의 일을 함께 염려하자
(고후11:28-33)
성경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550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염려는 무익한 것이요,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행불행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생이 불행하다면, 우리는 그 괴로운 짐을 벗어 버리려고 애습니다. 반대로, 만약 인생이 행복하다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행복이고 불행이고 간에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일반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걱정과 근심은 어디를 가나 많은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모두가 걱정과 근심과 이생의 염려로 피곤에 지쳐 있고, 얼굴에는 웃음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으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상실한 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고(마11:28),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한 것입니다(벧전5: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어 떤 신문에서는 재미있는 통계를 조사하여 기사화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통계의 내용인즉, 대전 당시 일본군과 독일군을 대항하여 직접 싸운 자들 중에 전사한 자는 350,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전쟁에 보내놓고, 또는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염려와 근심으로 인한 심장마비 혹은 다른 질병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수효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총과 칼에 죽은 자보다 염려와 근심과 공포 때문에 죽은 자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도 염려와 근심 걱정 때문에, 아까운 생명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실로 우리는 염려는 염려와 근심과 공포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염려'라는 헬라 말(merimnao)은 "어수선한 마음"에서 생기는 걱정 근심을 의미합니다(merimna). 이 말은 "나누어진다. 찢긴다"는 의미의 merizo와 "마음"이라는 뜻의 nous의 합성어입니다. 그런즉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보고 갈라버리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여 인간을 약하게 만들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여 무력한 낙오자가 되게 해 버립니다. 그리고 염려는, 인간을 불행에 울도록 하는 무서운 악이요, 신앙을 저버리도록 조장하는 원수인 것입니다.
헬라 말에 있어서 '염려'라는 말은, 이미 계속되고 있는 어떤 행동을 중지해야 한다는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그런즉 염려란 "계속 걱정하는 것을 멈추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염려합니까?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믿음이 적기 때문에 염려합니다(마6'30). ②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염려하게 됩니다(마6:33). ③ 조심하지 아니하여 걱정거리가 생깁니다(눅21:34). ④ 사람들은 의식주 때문에 염려합니다(마6:25). ⑤ 두려움 때문에 염려합니다(창32:11). ⑥ 내일 일의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합니다(마6:34). ⑦ 서로의 책임 때문에 염려합니다(고전7:33-34). ⑧ 다윗은 불효한 아들의 반역 때문에 탄식하였습니다(삼하18:24-33). ⑨ 모르드개는 동족의 장래 때문에 걱정하였습니다(에4:1-14). ⑩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걱정하였습니다(눅2:48). ⑪ 사랑하는 아들의 질병 때문에 근심하였습니다(요4:46-49).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이것 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많은 일로"염려합니다(눅10:14).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약1:2).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렸어요 /봄바람이 내 시름 불어줄까 하고 /그러나 봄날은 길기만 해서 /나의 한은 더더우기 끝간 데를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성경의 많은 곳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6:25. 28. 31, 눅12:22, 요14:1). ② 염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마6:1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③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를 성도들마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마6:31-32). ④ 성령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0:19-20). ⑤주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 '권고하신다(melo)'는 말은 '관심 있게 돌보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자는 주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염려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⑥ 염려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빌4;6)."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죄 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⑦ 염려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마6:24-34). 걱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데서옵니다(시37:1-5, 사26:3-7). 예수님은 어떤 환경에 부딪히든지 침착하고 조용하셨습니다.
그는 풍랑 중에서도 조용히 주무셨습니다(막4:25-29). 이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⑧ 근심 걱정은 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생리학자이며 외과의사로서 노벨상을 받은 까렐박사는 "걱정근심을 정복하지 못하는 사업가는 빨리 죽는다"고 말했습니다(잠15:13, 딤전6:10). 그러나 요한 웨슬레는 85세가 되는 생일날에 "나는 걱정근심을 하지 안하므로 오래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⑨ 걱정근심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해친다고 합니다. "걱정 근심처럼 여자의 얼굴을 속히 늙게 하고, 빨리 상하게 하는 것은 없다. 걱정은, 얼굴 표정을 둔하게 한다. 걱정은 얼굴을 주그러뜨려 주름살이 잡히게 하고, 영원히 찌그러진 얼굴을 만들며, 머리를 희게 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피부병이 생기게 하며 여드름과 부스럼이 솟아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교육가인 D. 카네기의 말입니다.
사실로 염려와 근심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의 대소사를 주님께 맡기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을 받읍시다. 그리고 노래합시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라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찬송가 455장).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염려 하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들은 서로 상반되지만, 똑같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염려하라"고 말씀합니까?
~(1)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였습니다(히3:12).,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결합입니다. 블신앙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그런즉 신앙은 생명이요, 불신앙은 죽음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 붙어 있음은 영생이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있음은 곧 멸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적상태를 위하여 근심할 줄 알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때,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요6:66).
그러나 한 때 뱃세다 들녘에는 남자만 5,000명이 운집하였습니다(막6:44).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어디론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영생의 말씀을 떠난 자는 죽은 자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요15:4). 불행하게도 삼손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떠나신 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삿16:20). 사울 왕도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 그의 대적이 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삼상28:15-16).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창7:22-23). 하나님을 떠나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한 것입니다(시73:28).
여러분은 방주 안에 있습니까? 방주 밖에 있습니까? 주 안에 있습니까? 주 밖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멀리 떠나있습니까?
~(2) 아모스선지는 보다 더 엄숙한 것을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암5:6).
이 말씀은 언젠가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창18:25, 시50:6, 계16:7). 하나님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겔36:19). "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딤전1:17).
어느 묘비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사후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고, 그의 일생을 보냈다."
미국의 정치가 웹스터(D. Webster)는 "늘 경성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계(會計) 볼 때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염려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고 갈 깨끗한 예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3) 바울사도는 특별히 교회를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고후11:28).
오늘 우리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의 수난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이 엄청난 수난을 아름다운 황금동판에 기록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생각하면 눈물 없이 그의 수난의 기록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는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11:23, 고전 15:10). 그는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11:23, 행16:19-24).그는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11:23. 행16:23). 그는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1:9, 4:11. 6:9. 롬8:36)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하여, 성 밖에 버림받기도 하였습니다(행14:9), 풍랑으로 파선하여 고생했습니다(11:25. 행27:14-20,41) 그는 많은 위험을 당했습니다(11:26).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간증합니다(11:27). 이 고생이 얼마나 켰겠습니까? 세상의 부귀영화를 분토처럼 버리고 주 예수님을 위하여 이렇게 충성한 것입니다.
정녕 그의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11:28).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는 교회의 일에도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안 일 못지않게 교회 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기도합니다. 교회에 모자란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핍니다. 빈자리를 걱정합니다.
교회가 원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무거운 짐은 나누어지려고 힘씁니다. 일군이 모자라면 자신이 봉사합니다. 이런 것이 교회를 위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 성스러운 염려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과 이 정성이 있습니까? 없으시다면 이런 관심을 가지십시다.
미국의 어느 회사의 간부가, 한 번은 그 회사 사장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유달리 악천후여서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번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장은 비행기가 착륙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참으로 천우신조로 무사히 살아남게 되었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는'죽었구나,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회사는 어떻게 될까?' 계속하여 회사 일만 걱정했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간부직원은,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는 재인 문제, 가정문제만 생각하였는데,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회사 일을 정말 염려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회사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죠지아주에 있는 로얄 크라운 콜라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도 바꿉시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될까?"
좋은 성도에게는 네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 목자요, 둘째는 내 교회요, 셋째는 내 가정이요, 넷째는 내 사명이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내 교회 없이 떠돌아다니는 교인은 딱한 교인입니다. 내 사명도 모르고 제멋대로 사는 교인은 불참한 교인입니다. 그래서 찬양석이 비고, 그래서 제직회 참석자가 줄어들고, 그래서 주일도 모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맡은 일에 무관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고후7:10).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염려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염려는 사망을 이를 뿐입니다(고후7:10). 염려한다하여도 머리털 하나 희고 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염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셋째는 교회를 염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 걱정을 잘하면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부질없는 세상의 우수사려에서는 해방되는 성도가 되시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갖는 성도가 되시기 원합니다.
(84. 11. 25)
29. 순전한 믿음
29. 순전한 믿음
(욥기2:1-10)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당한 일들이 정당화되고, 불합리한 것들이 합리화 되는 것을 봅니다.
독재자가 영웅이 되는 경우도 그러하고, 정권 다툼에서 지는 자가 죄인이 되는 경우도 그러합니다. 종들이 방백들을 다스리는 것도 그러하고(잠19:10), 방백들이 종들처럼 걸어 다니는 것도 그러합니다(전10:7).
돈이 말하는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입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진리의 입을 봉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뒤죽박죽이 된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질서와 엉망은 현대를 표현하는 좋은 용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리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무질서는 가속화 되어가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큰 손들 때문에 경제계가 흔들리고 가짜들 때문에 진짜가 흔들리고 불콩 몇 알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OPEC가 큰 소리를 치면 온 세계가 감기 몸살에 시달리게 됩니다.
수은주가 내려가는 겨울철이 되면 신앙이 흔들리고 연휴가 겹치면 교인 출석률도 위험 수위에 이르고, 마음이 상하면 철새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 흔들리고 저래 흔들리고 성도들의 신앙도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스 땅에 살았던 욥은 정신 차릴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거지가 되었어도, 오히려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애지중지 양육한 보배 같은 10남매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진 병고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무서운 사탄의 시험도 잘 참아 이겼습니다.
아내의 배반에도 순전을 굳게 지켰으며, 친구들의 비방에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전무후무한 재난 가운데서도 조금도 동요 없이 신앙을 굳게 지킨 것은 그의 신앙이 순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2:3).
욥의 신앙은 순전한 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순전하다(tam, tummah)'는 말은 "경건하다"는 말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순결하다.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백하다. 무죄 하다"는 말입니다. 불순물이 혼합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욥은, 이 같은 순전한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는 여하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우리도 욥과 같은 순전한 신앙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굳게 서 있읍시다.
우리는 욥의 순전한 신앙이란 어 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으십시다.
~(1) 순전한 신앙이란, 번영의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옛 말에도 "등 따시고 배부르면 배은망덕한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염려하였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하노라"(신8:12-14).
사람이란 번영의 때에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배가 부르면 좋은 옷을 입고 싶어 합니다. 돈이 있고 좋은 옷이 있으면 세상 허영에 들뜨게 됩니다.
축복과 번영이 좋은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충성스런 신앙생활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름날의 하루는 겨울날의 열흘보다 더 많은 음식을 상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경의 때에 신앙을 잃어버린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경보다는 번영 때문에 신앙을 잃은 예가 훨씬 많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은 역시 진리입니다(마19:24).
그러나 욥은 축복과 번영의 때에도 한결 같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는 동방의 부자였습니다(욥1:3). 그에게는 양이 7,000이요, 약대가 3,000이며, 소와 암나귀가 각각 500이었고, 그 외에도 종들이 많았습니다. 번영과 축복은 욥의 일신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동서남북에 우글거리는 가축들은 욥을 흐뭇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많은 종들은 열심히 일하여, 그의 재산을 늘려 주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 천은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부가 반드시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랑할만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10남매의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만인의 추앙받는 우스 땅의 족장이었습니다.
그는 또 죄가 무서워 벌벌 떠는 자였습니다. 혹시 자녀들이 범죄 할까 항상 염려하였습니다(1:5). 행여나 하나님께 대하여 배은망덕할까 두려워하면서 자녀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욥은 영화와 번영의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잠자리에 깊이 빠져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지육림 속에서도 세상의 연락에 취하여신앙심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안하고, 행복할수록 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이것이 그의 구김살 없고, 순전한 욥의 신앙이었습니다.
~(2) 순전한 신앙이란, 역경의 때에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는 재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염려할 일은 많고(눅10:14), 시험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약1:2). 불행이나 우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수미상접합니다. 작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큰 문제가 뒤따르고, 겨우 한 고비를 넘고 나면 태산준령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개천을 건너고 나면 장강대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아침인가 했더니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방황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고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울고 살게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이기지 못하여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어떤 이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참한 역경의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번영의 때에도 우쭈대지 않았지만, 환난의 날에도 한결 같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욥의 신앙이 순전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한 환난은 너무나 크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장한 신앙입니다.
그 거부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둑맞고, 벼락 맞고, 약탈당했습니다. "재물과 보물의 주위에는 근심과 슬픔이 우글거리고 있다"더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돌고 도는 돈은 벌면 됩니다. 가난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남매를 한꺼번에 잃다니‥‥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았다면‥‥
만일 그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간증을 들어 보세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하면서 결코 범죄치 않았습니다(욥1:21).
욥의 환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몸에 악창(Shechiyn)이 만발했습니다(욥2:7). 이는 문둥병의 일종입니다. 곪고, 터지고, 아팠습니다.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죽지 못해 사는 처지였습니다. 욥은 철저하게 망한 것입니다.
영화의 날에 줄지어 찾던, 이웃도 친구도 일가친척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돈 없고, 자녀 없고, 병든 몸이 어디 간들 환영받겠습니까만, 욥의 경우는 너무나 슬픈 지경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살던 부인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였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이 보다도 서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욥이 누리던 부귀영화는 일장출몽이었습니다.
만군을 호령하던 족장의 몸이 어린아이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홍포에 감기웠던 옥체가 재무더기 속에서 살아야 했고, 호화롭던 귀인이 문둥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사탄은 욥을 넘어뜨리려고 두 번 세 번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욥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신앙이 순전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가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욥19:25-26).
그가 만일, 변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았다면 욥도 변하거나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만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욥은 이 신앙으로 재난을 이기고, 불행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등불은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지팡이는 가파른 산을 넘기 위하여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의 밤을 당해 기도의 불을 꺼버리고 험산준령을 당하여 신앙의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맙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빌1:29).
우리의 앞길이 순란하지 못하다할지라도 욥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십시다.
~(3) 순전한 신앙이란, 까닭 없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칭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몸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 욥의 신앙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고 붙잡아 주시니, 욥이 그것 때문에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푼 은혜를 그친다면, 욥의 신앙도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로 오늘 우리 주위에는 까닭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병이 나아서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믿는다고 합니다. 부모가 믿으니 따라서 믿는다고 합니다. 직장 때문에 예수 믿는 이도 있습니다. 장가 예수, 시집 예수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들 때문에 예수 믿는다면 그 신앙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 까닭이 사라질 때, 신앙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까닭 때문에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사탄의 고소를 더 들어 봅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루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사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1:9-ll),
하나님은, 욥의 신앙이 까닭 때문이 안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모든 소유물을 사탄에게 맡겼습니다. 사탄은 여지없이 재산과 자녀들을 쳤습니다. 그 결과로 거지가 되었고, 자녀들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같은 축복을 다 거두어 가버려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전보다도 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욥은 세상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축복은 그의 신앙의 까닭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가 세상의 번영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다면 그 번영이 사라졌을 때 그의 신앙도 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동기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버렸어도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재물도, 자녀도, 건강도, 부인도, 친구도, 다 가버렸으나 그의 신앙은 그대로였습니다.
욥의 신앙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 신앙이 귀합니다. 이기적인 동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변하는 세상의 것이 신앙의 뿌리라면, 그 신앙은 언젠가는 넘어지고 맙니다.
독일 태생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슈라이엘마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 교회에 나오는 군인들은 왜 교회에 나오느냐? 그것은 그 교회에 나오는 젊은 여자들 때문이라고. 젊은 여자들은 남자 대학생들 때문에 나오고, 남자 대학생들이 자기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자기가 교수이기 때문에 후한 학점을 얻으려는 까닭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 되씹어볼 만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까? 설마 까닭이 있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아무 까닭 없이 신앙 생활하는 순정파는 몇이나 될까요? 체면 때문입니까? 직분 때문입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서 입니까?
순전한 신앙은, 어떤 까닭 때문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좌우됩니다.
어떤 여성도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 손에 물통 들고, 한 손에 횃불 들고서, 지옥불은 물로 끄고 천국은 불로 태워 지옥 까닭도 아니요 천국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6:26).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번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역경 때문에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까닭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한 신앙입니다.
십리 길에도 굴곡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항차 사람의 한 평생에 희노애락의 요철이 없겠습니까만 이런 것 때문에 동하는 신앙은 순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까닭 때문에 웃고 우는 신앙도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욥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그 같은 신앙이 순전한 신앙입니다.
우리도 순전한 신앙을 가집시다. 아멘.
(84. 12. 2)
30.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30.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렘8:1-7)
이새의 아들 다윗은 초라한 목동에 불과했으나, 사울 왕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신하였고, 그의 사위였으며 둘도 없는 은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높아가는 다윗의 인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을 강등시켰습니다(삼상18:5, 13). 다윗의 생명을 노렸습니다(삼상18:11,21,25, 19:1,1015).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녔습니다(삼상23:15.26, 24:2,26. 2:17-20). 이와 같은 사울의 핍박을 받을 때, 지었으리라고 전해지는 다윗의 시편 중에 31편을 꼽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 생명은 슬픔 중에 살고, 나의 해는 탄식 중에 저문다"는 말이 있습니다(시31:10). 쫓기며 사는 자가 다윗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눈물을 벗 삼으며 한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에덴의 복락을 상실한 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지상 낙원을 시도하고 있으나,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세상은 더 불행해지고, 더 무서워지고, 탄식소리만 더 높아갑니다.
에디오피아에는 지금도 굶어서 죽어가는 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못 먹어 탄식이요, 못 입어 탄식이며, 못 살아 탄식입니다. 고아의 울부짖음도 그칠 줄 모르고, 과부의 슬픔도 멎지 않습니다. 재난의 불행도 전후좌우에 널려있고 병고의 슬픔도 멀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픈 탄식이요, 무섭고 처절한 탄식입니다. 생명만큼 귀중한 것이 이 세상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바꾸겠습니까?(마16:26),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더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이제는 그만 살고죽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합니다만, 그것은 참말 같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속지 마세요. 오죽하면, 갱 속에 갇힌 광부가 먼저 죽은 동료의 시체를 뜯어 먹으면서 가물거리는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본문에는 그와 정반대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하리라"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삶보다 죽기를 더 소원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중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선지는 바벨론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그 성에 내릴 것임을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다의 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습니다.
① 거룩한 물(生水)의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장해 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렘2:13). 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을 의미합니다. ② 유다는 본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순전한 백성이었는데 변질되어 범죄함으로, 도무지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렘2:21-22). ③ 지도자들은 무고하고 가난한 자들의 피로 그들의 옷을 얼룩지게 했습니다(렘2:23). ④ 그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창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렘3:3). ⑤ 그들은 모든 산 위에서와 푸른 나무 그늘 아래서 거짓 신들을 섬겼습니다(렘3:8). ⑥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렘2:30). ⑦ 그들은 놋처럼 무례하고, 철처럼 완악하였습니다(렘6:28). ⑧ 그들은 성전 안에다 우상을 세우고 이방 여신을 섬겼습니다(렘7:18,44:17). ⑨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녀들을 불살라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신당을 건축하여 놓고, 거기에 몰록상을 세운 후 자녀들을 불살라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습니다(렘7:31, 19:5).
이와 같은 무섭고 더러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렘7:31-34).
예레미야의 경고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엄청난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침략자 바벨론과 싸워 유다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앗수르도, 야곱도 유다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렘2:18, 36).
③ 그들은 해산하는 여인처럼 울부짖을 것이라 하였습니다(렘 4:31, 6:24, 13:21).
④ 예루살렘의 나무들이 잘리워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이용될 것이라 하였습니다(렘6:6).
⑤ 성전도 파괴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7:14).
⑥ 원수들이 독사처럼 물것이라 하였습니다(렘8:17).
⑦ 많은 사람들이 칼과(렘15:3), 질병과(렘16:3-4). 굶주림으로(렘21:9)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⑧ 시체들이 예루살렘 성 밖 골짜기에 즐비하여 들짐승과 새의 먹이가 될 뿐 아니라(렘7:23. 33, 9:22, 12:8-9), 매장지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비통스러웠든지,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고, 땅이 황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렘7:23).
⑨ 유다의 원수들이 유다의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거룩한 무덤을 파헤쳐서, 그들의 유골을 해와 달과 별들이 내려다 보는 땅 위로 끌어 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8:1-2).
원수들이 분묘를 도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원수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 때문이요, 둘째는 부장된 보물 때문이었습니다.
⑩ 수천 명이 바벨론으로 잡혀가 70년 동안이나 포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렘7:15, 25:11, 29. 10).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산 죄 값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배은망덕의 죄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백성들이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복해야할 백성들이 우상 앞에 절했습니다. 이는 마치 생명의 길을 저버리고 사망의 길을 자취하는 것과도 같고, 축복을 저버리고 저주를 자취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 배은망덕한 족속들이 받아야할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의 삶은 비극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말씀하시기를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남아 당하는 슬픔이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너무나 고통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기를 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기를 자청할 만큼 비참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돌아오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5).
엎드러진 사람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떠난 사람도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죄악 속에 넘어져서는 다시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여기 "떠난다"는 말과, "물러 간다"는 말은 어근이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shuwb인데 "일을 '행하다. 물러가다. 타락하다"는 등 다양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자들었으나, 배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해야할 자들이었으나,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전진이 아니라 후퇴요, 향상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교하고 있었고,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을 고집하면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냐?"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이사야선지도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사1:5).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면서 슬퍼하였습니다(사1:4),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라면서 한탄스러워 하였습니다(사5:4).
이들 선지자의 외침이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됩니까? 성장이 없었다면. 뒤로 물러간 것입니다. 열매가 없었다면 들포도를 맺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이 음성을 듣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앞에도 비극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맙시다. 더 가까이 합시다. 물러서지 맙시다. 되돌아서지 맙시다. 거짓을 고집하지 맙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거절하지 맙시다. 더욱 더욱 패역하면, 매를 더 많이 맞습니다(사1:5).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이 탄식과 경고소리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끝까지 배교를 고집하였습니다.
그 결과, 얼마 후인 BC 606년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의 얼마는 비참하게 죽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훼파되고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두려워 경성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서는 안 됩니다. 물러졌으면 빨리 되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기를 자청할 만큼 불행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6).
그들은 반성할 줄을 몰랐습니다. 뉘우칠 줄을 몰랐습니다. 부정직한 과거 생활에 대하여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나의 행한 것이 무엇 인가(What have a done?)"고, 되돌아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회개의 제 일보는, 지난 날에 대한 회고와 반성입니다. 불충성에 대한 각성입니다.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와 반성입니다. 참된 회개에는 진지하고도 객관적인 질문과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떻게 한 해를 살아왔는가?"
"나는 한평생을 어떻게 살아 왔는가?" 회개는 이와 같은 각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탕자가 회개하게 된 것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는 각성 때문이었습니다.(눅15:17).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 중에, 한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자입니다(눅23:41). 회개는 각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성찰은 회개의 제 일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생애에 대하여 반성하고 있습니까? 행여나 부족한 점에 대하여 이점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라고, 뉘우쳐 본적이 있습니까? 변명은 회개의 장애물입니다. 자기 정당화는 회개의 적입니다. 변명하지 말고 정직하게 지난날의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서 불충성된 것이나, 부족한 점에 대하여 회개합시다.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가?"고 철저하게 반성합시다. 그래야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과 같이 각각 그길로 향하도다"라고 말합니다(렘8:6). 되돌아 설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가는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회개할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사는 것보다 죽기를 자청하리만큼" 무서운 비극이 임한 것은, 회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은 자에게는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를 용서치 않으십니다. "자주 책망을 받고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그런즉, 우리는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가?"고, 살펴봅시다. 잘했나, 잘 못했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삶을 회고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불충한 것이 생각나거든 회개해야 합니다. 신실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아야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안합니다(시32:3). 죄의 짐 때문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시38:4). 고통이 따릅니다(시51:3). 하나님께서 심판을 칼을 갈으십니다.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갈으심이며,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2). 그보다도 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회개하지 않으면, 환난 가운데 던지고, 자녀를 죽이리라"(계2:21).
성도 여러분,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는 길은 회개뿐입니다. 생명의 길은 회개뿐입니다(겔18:21). 회개하면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사55:7). 애통하는 자를 위로 하십니다(마5:4). 고통과 환난을 면하는 길도 회개뿐입니다. 회개치 않고 당하는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합니다! 이 불행이 그들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본문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기를 자청한 이유는 무엇입니꺄?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범죄한 두 손을 들고 천부를 부르며 사시기 바랍니다.
(84. 12.16)
31.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31.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25:27-34)
에서는 이삭의 사랑 받는 아들입니다(창25:28).
그는 야곱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는데, 조금 앞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계를 이어갈 장자가 된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을 자입니다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장자의 명분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자의 명분'은 히브리말 bakowrah인데, 사람이나 짐승의초태생(初胎生)을 의미합니다.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자의 특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① 장자는 특별하게 하나님께 드려졌고, 봉헌되었습니다(출22:29). ② 장자는 그들 부모 다음가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창49:3). ③ 장자는 부모의 유산의 두 몫을 상속하였습니다(신21:17). ④ 장자는 가족이나 왕국의 통치권을 계승받았습니다(대하21:3). ⑤ 장자에게는 우선적인 지위가 부여되었습니다(렘31:9, 20). ⑦ 장자는 하나님께 대한 공식적인 예배의 직무를 수행하는 명예를 누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라는 말은 특별히 그의 아버지 곁에 있으며 그에게 사랑받는 자입니다(출4:22). 또한 그의 형제들보다 높은 자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시89:28). 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예수는 장자였습니다(골1:15, 18). 예수님의 장자권이 상징하는 것은 권위와(시89:27), 영광과(히1:6), 부활과(골1:18), 교회입니다(롬8:29). 장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아름답고, 축복스런 것입니다.
에서는 자랑스럽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장손이요, 이삭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아름다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동생 야곱에게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창25:29-34,롬9:12),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에서의 이 경망스러운 행동은 두고두고 천추에 한이 되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축복을 되찾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탄원했으나, 끝내 "회개할 기회를 얻지"못했습니다(히12:17).
에서는 어쩌다가 이와 같은 엄청난 큰 축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에서의 전철을 밝지 않기 위하여 그의 그릇된 심성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에서는 편의주의자 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사냥군이요, 들사람이었습니다(창25:27).
그날도 그는 들에서 돌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쏘다니다 돌아왔을 때 피곤하였을 법합니다. 그는 "내가 곤비하다"고 했습니다. 곤비(ayeph)하다는 말은 기운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를 참지 못하고 마침 야곱이 쑤고 있는 죽 한 그릇을 청했습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끓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30).
야곱은 에서의 청을 선뜻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 대신에 엄청난 것을 요구했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31).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면서 서슴지 않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32-33).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팥죽으로 배를 채우고는 나갔습니다(34). 그의 안중에는 장자의 명분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로지 견딜 수 없는 배고픔과 지친 몸에 대한 염려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청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냥해 온 토끼와 바꾸자고 제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집안에 있는 다른 음식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배고픔을 잠시 참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컨데 고생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배나 채우고 보자는 것입니다.
장자권이 문제가 아니라, 민생고 해결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타협주의자입니다. 뾰쪽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나게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에서의 편의주의가 번지고 있습니다. 편하게 믿자고 합니다. 적당하게 믿자고 합니다. 직분이 뭐 그렇게 대단한거냐는 것입니다.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그렇게 유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경계해야할 사고방식입니다.
~(2) 에서는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beblos)라고 하였습니다(히12:16). 이 말은 문지방 혹은 대문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대문간처럼 가깝다는 의미인데, 유대인의 개념으로 이방인이라는 의미도 있고, 경건치 않은 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딤전1:9). 즉 세속적인 사람이란 말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현재를 더 중요시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쏟습니다. 그는 개념적인 것보다는 확실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장래의 기업보다는 눈앞에 있는 팥죽 한 그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속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는 땅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숲속에 있는 두 마리 새보다는, 손 안의 한 마리 새가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가까이 있는 출불 하나가 멀리 있는 태양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태양이 촛불보다 못하다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는 장님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서는 내일의 금강석이 아니라, 오늘의 돌맹이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에서가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병들고,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이 현실주의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신앙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 에서가 선택한 것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요 현실입니다.
이 현실주의, 이 오늘 중심주의는 불신앙입니다. 이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날 때, 교회는 새로워지고 신령해 질 것입니다.
송나라에 저공(繼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숭이를 좋아하여 많은 원숭이를 기르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원숭이들에게,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씩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습니다. 저공은 말하기를,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씩 준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숭이들은 다 좋아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의 유래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조삼모사나 조사모삼이나 실질은 같은데도, 원숭이들은 조삼엔 화를 내고, 조사엔 기뻐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조삼이든 조사이든 간에 하루에 일곱 개씩 얻어먹는 것은 같습니다. 그렇지만, 조삼과 조사와는 엄청나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세계입니다. 먼저 배를 불리워 놓고 다음에 적게 먹는 것과 주린 다음에 배를 불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장 확실한 아침에 먹어 놓은 것과, 불확실한 저녁의 배부른 밥을 약속받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세상에는 원숭이들의 현실적인 선택이 지혜로운 삶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 할만을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들 때문에 이 세상은 날마다 삭막해져 가는 듯합니다.
나무를 심는 수고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면서도 열매를 따는 일에는 앞을 다툽니다. 보이지 않는 숨은 봉사에는 일꾼이 없고, 이름도 나고 빛이 나는 곳에는 줄을 섭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리석은 스피노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그 때문에 미래를 심는다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오늘의 만족, 오늘의 안전, 오늘만의 나를 생각하는 "오늘중심주의"의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오늘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가 '내일 상실증'에 걸려 있습니다. 아침에 던져주는 도토리 넷 때문에 웃는 원숭이들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승이가 아닙니다. 넷과 셋이 뒤바꿔다 하여도 그것이 무슨 큰 차이입니까?
~(3)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시한 자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34). "경홀히 여긴다"(bazah)는 말은 얕본다는 말입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입니다. 경멸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기자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짓밟았다는 의미입니다(히12:16).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경시한 자라는 말입니다.
에서는 족장 이삭의 장자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유일의 혈통입니다. 그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존경 받는 가문의 일원입니다. 그에게는 가나안 땅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로 인하여 축복을 받게 될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 같은 엄청난 축복들을 귀한 줄 몰랐습니다.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경멸했습니다. 에서는 그 장자권을 업신여겼을 뿐 아니라, 귀찮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획득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또 그 장자권의 귀중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형을 졸랐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파시오"(31). 그리하여 장자권 매매 협상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팔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이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속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세례교인들이 이 같은 팥죽 한 그릇에 그들의 신령한 하늘나라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직분자들이 그들의 하늘 특권들을 팥죽 한 그릇에 쉽게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평안을 구하여, 혹은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교회의 특권과 믿음의 유산들을 저버리며, 그들의 모든 미래를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 하나와 에덴의 축복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비싼 값으로 팥죽 한 그릇을 사는 우를 범했습니다. 이들은 둘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에서는 뒤늦게 후회하고 방성대곡하면서 아버지 앞에 매달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창27:34-35, 38-40).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히브리 기자의 경고를 들어봅시다. "한 그릇 음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6-17)
정말로 이보다 비참한 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첫째는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심사 때문입니다.
고생스럽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잘살아보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현실주의와 타협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직분의 귀중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해방직후 영도에서 있었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해녀가 바다 속에서 쇠붙이 하나를 건졌습니다. 마루 밑에 던져두었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으로 엿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엿장수는 이상히 여겨 금은방에 감정을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금괴였습니다. 금은방 주인은 수상한 엿장수를 경찰에 신고하였고, 조사결과 모든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금괴는 누구의 소유이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금괴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해녀도, 그 집 아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엿장수에게 던져주고 얼마의 엿과 바꾸고 만 것입니다.
행여나 꼭 같은 우를 우리는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84. 12.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