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6)- 그래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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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같은 삶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9:37-45)
우효동 전도사(20180129)
저는 몇 차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4복음서를 중심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먼저 맛보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설교는 어쩌면 훈련의 강도를 조금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훈련은 경기를 앞두고 선수에게 코치가 훈련한 내용을 무한 반복함으로써 자세를 교정하고 실전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실수를 줄여 훈련한 대로 그 성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전에서 훈련한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야지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즉각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배운 것을 실천해서 기쁨을 얻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이들은 한 손을 들고 건넙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간혹 부모가 차로의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건너려면 아이들이 안 된다고 합니다. 다음 상황은 말 안 해도 아실 겁니다. ‘엄마랑 건너면 괜찮아’. 아이들은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내가 이것을 지켰다, 배운 것을 실천했다’하는 기쁨을 느끼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자기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상황이 그러면 그냥 건너도 된다고 하거나, 아빠나 엄마 손을 붙잡고 건너면 괜찮다는 자기식의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은 바로 이것과 같아서 저와 여러분이 실천할 때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19장 1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보면, 가정주부가 레시피를 보고 그것을 실천할 때 먼저는 해냈다는 자신에게 기특해서, 그리고 남편이나 아이들이 ‘맛있다’는 반응을 보일 때 맛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으로 끝나면 자기의 실력이 되지 않습니다. 한 번 해본 것입니다. 좀 실력이 없어도 남편과 아이들은 좀 기다려야 합니다. 계속 같은 음식이 나오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은 매주 듣는 설교만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만나는 가까운 가족과 이웃, 직장의 동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체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배운대로 써먹을 기회를 눈여겨보다가 그런 순간이 될 때 ‘바로 이때야 하면서’ 실행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가 더 필요합니다. 탁구나 배드민턴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치고는 생각보다 어려운 운동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할 정도를 가지고는 재미 곧 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그중에 어려운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강습을 해주시는 코치에게 일정한 폼이 몸에 배이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하면 어떻습니까? 배운 자세가 경기 중 한 번을 올바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좌절하지 마시고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오늘 배운 자세를 한 주간 어느 시간 어디에서 어떤 사람에게 사용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잘 대접함의 훈련이 천사를 대접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는 신탁을 듣게 되고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실천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 훈련을 하고 2) 자신의 주변을 눈여겨보다가 기회를 포착해서 3) 비록 실패할지라도 훈련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단하게 내용을 살펴보면 제자 몇은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화의 모습을 경험하고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귀신에게 붙잡힌 아이하나를 구원 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을 살펴본다면 저와 여러분이 다시 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앞 선 말씀은 마가복음, 마태복음, 그리고 오늘 누가복음에 모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가복음 9장 2-8절에서는 변화산에서의 엄청난 기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살고 싶은 천상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산에서 내려오면 현실의 세계는 귀신에게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를 쳐다보며 고통 받는 부모의 상황이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귀신을 좇아내고 싶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나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셨는데 귀신이 좇김을 당하고 그 아버지와 아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귀신에게 명하시면서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영향 아래 살지 않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러니 해석해보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면 넉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가복음 보다 더 세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더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듯 마태복음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하는 일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변화산 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간혹 캠핑을 하거나, 좋은 곳으로 여행을 하면 마음에 드는 생각이 ‘여기다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빼어난 자연의 풍광이나 환경에 대한 생각이 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환경에서 벗어남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면 내가 살던 곳에서의 집세 문제, 아이들 문제, 옆집 이 아무개랑 주차문제로 싸우는 것, 윗집 아랫집 층간 소음으로 신경쇄약이 될 것 같은 상황들에서 떠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위 곧 천상의 모습과 이 땅 곧 아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배치하여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말 그대로 거기서 살면 이런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까요.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믿음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사는 이 땅의 고통을 생각하니 그것만이라도 없어진다면 여기가 천국이겠구나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오늘 귀신들린 아이의 고통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비를 본다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잘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무단 횡단을 하면서 괜찮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부모가 없더라도 신호를 지켜 사고의 위험을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들이 100키로가 넘는데 내 눈에는 이뻐보이기만 해요. 물론 그 어머니는 아이가 건강을 위해서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쩌면 어머니가 믿는 그것에 부딪혀 오히려 건강을 잃어가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더 늦기 전에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 아이가 굳어진 삶이되기 전에 함께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죠.
변화산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자들은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뒤에도 이 땅에서 더 많은 고난과 인내를 하며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자 했습니다. 산을 명하여 옮기는 일이 우리에게는 커 보이는 일이고 믿음이 있어보이는 일인데요 주님은 그건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얘들아 그건 겨자씨 한 알이면 되는 일이야.’ 아마도 우리는 이 말에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런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좀 쉬운 말로 바꿔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돈만 있으면 됩니까?’ 아마도 젊은 분들은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말할 것이고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돈으로 할 수 없는 게 많지 라고 할 것입니다. 젊은 층의 사고는 사뭇 다릅니다. 어느 조사에서 10억을 벌수 있다면 감옥에 몇 년까지 살 수 있냐는 질문에 대부분 10년은 살 수 있고 몇몇은 20년도 살 수 있다고 답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능력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패역한 세대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하는 시대를 두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조사에서처럼 사고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문제 제기보다 어쩌면 어른들이 그렇게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 아닙니까? 집을 사는 것이 제일 목적이고 거기에 부동산 불패는 신화가 아니라 전설이 된 시대를 살게 했습니다. 건물주가 되어서 살고 싶어하고 아이들에게도 그것만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에게서 물려받은 세대 아닌가요? 요즘 유튜버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정보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든 구독자를 늘리는 것에 그래서 돈을 버는 것에 특화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세대를 향해 패역한 세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사도 요한이 활동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돌아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7교회를 향해 그런 사회에 저항하라고 말합니다. 사회를 개혁해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대항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로 섬김으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전투에서 좇겨난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회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결국 마귀뿐만 아니라 이런 일에 가담한 10짐승 곧 동조해서 살아가는 세상권력도 심판을 받게 되며 무엇보다 동화되어 따라 사는 거짓 성도들 역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큰 성장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도 언젠가는 큰 교회가 되는 것을 꿈꾸며 성장 세미나와 각종 프로그램을 무분별하게 교회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도 각종 투자 플랜을 세우는 플래너들에 의해 정해진 코스처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나이에는 저축을 해야 하고 아프고 병 들면 보험이 필요하니 거기에 맞춰서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은 실손 보험 하나 없으면 세상사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 간의 교제는 어떠합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식사 테이블에서 배제됩니다. 주변에 변호사라도 한 명 알아야 하고 종합병원에 의사 한명즘 알아야 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렇게 준비하고 사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갑자기 부르짓게’ 됩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를 일에 ‘경련을 일으키며’힘들어 합니다. 돈이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삶에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즘 떠들석한 뉴스를 보십시오. 헤어진 자식의 죽음을 아파하기 보다는 부모의 권리로써 상속금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닌것처럼 돌팔매질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도 안되는 경우와 상황을 우리가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편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똑바로 서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부를수록 한 편으로 기울고 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한 주의 힘들고 고통당하고 어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이 한 시간이 귀하고 귀하다 찬양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이 여기서 맛보는 잠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잠시 맛보는 이것도 귀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아니 전도사님 제가 선수도 아닌데 굳이 더 열심히 배워야 할 필요가 무엇이라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소아시아 7교회는 나름대로 살만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을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칭찬을 들었으니 이제 되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은 오히려 더한 요구였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데 그래서 칭찬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더 죽도록 충성하란 말인가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겨자씨 한 알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에서 계시를 받고도 그들은 200년 이상을 더해지는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짧게는 36년 길게는 41년을 보기도 하는데 어째든 50년이 안되는 시간을 말도 안되는 박해를 받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도 그 여파로 인해 아직도 국론이 분열된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에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고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따논당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했다는 교회에는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까지 죽이는 사탄의 권세가 우리 삶 깊숙히 아주 멋진 모양을 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우리를 미혹하여 삼키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는 미혹하려는 짐승이 묶인 짐승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방법대로 그 짐승을 피하려고 하면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하는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있는데 누가복음 17장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겨자씨 한 알’이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잘 보면 제자들이 겨자씨 한 알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믿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이어서 나오는 비유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무익한 종에 대한 비유입니다. 설명은 간단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 온 종은 자신의 일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은 내일 일도 준비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그렇게 주인이 말한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하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히려 종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에 입장도 생각해줘야 하는것 아닌가요?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한 설교의 기회가 되면 답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종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종의 비유가 답이 될까요? 바로 종과 같은 섬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질 믿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고 없음을 교회에 대한 충성과 물질의 충성으로 바꾸어 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모든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향해서 그리고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그럼 그런 열심을 안해도 되겠네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의 마음에도 바로 이 종의 모습과 같은 자세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서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꾸 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뜨리거나, 뽕 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이 믿음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종류의 것은 주님 보시기에 하찮은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섬김은 쉽게 생각하거나 그 과정은 패스하고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마나 교회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풀리캅이라는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그가 86세에 순교에 이를 때 그의 명성을 알았기에 주님만 부인한다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주님께서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느냐’고 답하고 화형을 당해서 순교했습니다. 이미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바로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돌덩이가 변하여 떡 덩이가 되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우리 생각에 없으니 한 번 해봤으면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보여준 것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20:29) 하신 것은 바로 본 것의 약점은 자꾸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초보의 신앙 때는 본 것에 의지해 믿음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믿음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행적 맛봄이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들은 ‘무익한 종’과 같이 섬김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을 맛보는 일이요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선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에서 끝나지 않고 확장되어 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라고 했습니다. 죽은 행실을 따라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옳은 것이라 여기는 외식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을 잘 표현한 바울의 고백인데요.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6절부터 13절이 그 내용인데요. 특별히 9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무익한 종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개선장군의 끝에 선 자로 자신을 여깁니다 . 자신은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럼에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오히려 끄트머리에 두셨고 구경거리가 되고 더 나아가 왕의 개선이 끝나면 ‘죽이기로 작정된 자’곧 포로와 같은 전리품의 상태로 인정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말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을 종과 같이 그보다 못한 끄트머리에 선 자와 같이 여기는 자가 받는 나라입니다. 아니 이미 받은 하나님 나라를 맛본 자는 종과 같은 삶을 열매로 맺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