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0.금요기도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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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
통성기도 마무리 반드시 헌금기도
구역연합예배x
(헌금)
본문읽기 : 오늘의 말씀은 갈 3:26-28절 말씀입니다. 신약306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특송 : 5교구 특송있겠습니다. x
설교
서론
오늘은 구역공과 18과인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28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갈등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 갈등이란 전통적인 율법, 모세의 율법과 유대인들이 제정해온 율법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왜냐면 이방인들이 많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었냐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개종하고 싶은 이방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리던 그들은, 다른 모든 것보다 할례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이미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선례가 있었고, 유대기독교인들은 평생을 율법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믿는 자들은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의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로마서도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26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율법을 지키든지 말든지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26절처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큰 정체성입니다. 26절에서 ‘너희’라고 표현한 것을 꼭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 한명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내 옆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함께 한 교회에 오래 있다보면 참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어느정도’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습니다. 옆의 형제 자매와 일거수 일투족을 같이 한다고 해도 다는 모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험으로 알게된 그사람의 ‘어느정도’에 우리의 기준과 가치를 두게 됩니다. 그 ‘어느정도’로 형제와 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만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20년 30년을 산 부모자식이지만 서로의 모습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깁니다. 학교에서 자식이 사고를 쳤는데, 다른 아이를 왕따시켰다등, 가해자가 되었다고 하면, 부모는 그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본, 내가 아는 내 자식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직장과 다른 모임에서의 모습이 어떻는지 자녀는 알수가 없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평판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자신에게 하는 행동과 말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으로 서로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갈라디아교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방식, 풍습인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헬라인이나 기타 외국인으로서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런 삶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 불꽃같은 눈으로 다 보고 알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에 있는 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이 가장 정확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 지식, 내 판단, 내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철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기 위해, 또한 고백했으면 그 결과인 행동은 어떻게 나와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27절입니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기념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세례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우리가 행하는 세례보다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을 형제자매들 앞에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를 받고 모인 우리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 있다라고 바울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세례때 믿음을 고백하고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밖에서 옷입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옷 한 벌로 만족이 됩니까. 안됩니다. 장소, 시간, 목적에 따라 우리는 여러 가지 옷을 입게 됩니다.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어야 합니다. 수영하러 가면 수영복을 입어야 합니다. 공식적인 만찬이나 예배의 자리에 가면 정장이나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편한 옷을 입고 다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 다니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입고 싶은 옷도 많고, 내 편한대로 다니고 싶을 때도 많은데, 옷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무슨 옷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밖에 없지 않습니까.
겨울에도 예수 그리스도 여름에도 예수 그리스도 옷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진짜 옷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무슨옷이 있었습니까. 유대인이라는 옷, 이방인이라는 옷, 율법이라는 옷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는 옷, 아들이라는 옷, 직장의 직원이라는 옷, 교회의 직분자라는 옷, 여러 가지 옷이 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옷 위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덧입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갑갑해집니다. 어떤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뚫고 자존심이라는 옷이 튀어나기도 합니다. 내 이득, 내 편함이라는 옷은 수시로 튀어나옵니다. 욕망이라는 옷도 너무 쉽게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뚫고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어느새 그리스도라는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입고 있는지, 넝마를 입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구멍뚫린 자리에 세파들이 밀려닥치기 시작하니까요. 이제 내가 분노할 때 그 분노를 진정시켜주는 옷은 효력이 없습니다. 내가 거부했으니까요. 어떤때는 뚫는 것을 넘어 잠시 벗어던지고 분노를 발산한 다음에야 다시 입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로 우리와 하나되었는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를 마치 입었다 벗었다 하는 옷처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넝마만 있고, 그 자리는 다른 옷으로 채워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들을 훈계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다시 입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애초에 벗을수 없게 만드시고, 애초에 아무리 우리가 다른 것으로 뚫으려고 해도 뚫리지 않게 만들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주고 산 그 옷을 그렇게 연약하게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입을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가득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옷이라면, 그런 영광의 옷이라면 우리는 결코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처럼 고난당하고 우리처럼 상처받고, 우리처럼 눈물흘리고 우리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의 옷이 될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옷을 너무나 쉽게 벗어던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옷,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옷,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옷을 귀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맨날 입고 다니는 옷은 작업복입니다.
저도 양복 중에 작업복처럼 입는 양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디에서나 입고 다닐수 있고, 매일 입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옷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무시당할 분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서 신이 낡아지지 않은 것을 뛰어넘어 입으면 입을수록 새로워지고 아름다워 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마무리기도
기도제목(간단하게)
말씀을 기억하며
새롭게 오실 담임목사님을 위해
코로나19를 위해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환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여 일창하신후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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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개인제목을 가지고 주여삼창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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