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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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5~35
할아버지 시므온
아시다시피 오늘 이 자리는 지비티 이사장과 대표의 이취임 감사예배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우선 이 시대의 분위기가 <설교>를 기피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한다 싶으면 <설교 그만해>하고 서슴치 않고 내밷습니다. 그럼 신앙인은 다릅니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런 자리는 예배로 시작하지만, 권투선수 의무방어전처럼 기대도 없이 시작해서, 끝나기만 기다립니다. 그런데 왜 설교를 맡았냐구요? 그건 무서운 전통 때문이랍니다.
이 행사의 준비 위원장께서 어느날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 목사님께서 퇴임자에게 설교의 기회를 마지막으로 주는 고신의 전통대로 해 주십사하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이임사 겸… 허락하시겠지요?>
< . . . 그게 고신의 전통인가요? 끝까지 부려먹으려고 하네요 ㅋㅋ>
< 제가 들은 정통한 정보인데... 증경 총회장님 모르시는 전통인가요? ㅎㅎ 감사합니다!> 읽고나서 생각해 보니 총회 개회설교는 떠나는 ;전임총회장 몫이 맞더군요^^
하지만 문제는 설교에 대한 큰 기대도 없는 청중에게, 그것도 10분 내에 알아듣도록 설교하고,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바울도 예수님도 시도하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격입니다.
게다가 만 70에 정년은퇴를 하도록 별로 만난 적이 없는 계층이 바로 본문의 주인공 시므온 같은 노인계층 입니다. 게다가 제 자신이 이미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노인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면 <노인과 바다> 정도입니다. 성경에도 노아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수없이 등장하는 계층이지만 그동안 배려를 충분히 하지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시므온>은 우리가 함께 살필만한 좋은 신앙의 어르신임에 분명합니다. 사실 본문을 살펴보면 신앙의 3세대가 다 등장합니다. 1)태어난지 40일 된 아기, 그리고 2)그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3)할아버지 시므온이지요
신앙과 사역의 바통 첸지가 이루어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린 할아버지 시므온을 잠간 살피겠습니다. 우리 중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노년의 시기를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해 갈 것인지, 크리스천의 노년기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시므온에 관한 일반적인 묘사를 먼저하고, 그 다음 시므온과 성령과의 관계를, 마지막으론 노인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할아버지 시므온은 무엇보다 먼저 1 신앙이 아름답게 성숙한 사람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 당시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눅 2:25)
먼저 그의 삶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25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설명은 뒤에 나오는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와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시므온의 경우에는 그의 직책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 선지자라든지 제사장이라든지 내어 놓을만한 특정한 직업이 없었던 사람 같습니다. 그냥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만 합니다. 좋은 성도는 꼭 사람들에게 드러낼 만한 신분의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경건에 있어서는 언급 할만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표현은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게 대해서 정말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모범적인 신자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도리입니다. 이 근본적인 요구에 부합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특별한 점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수식어입니다. 그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산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무엇입니까? 25절에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38절에는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이나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렸다’는 것은 다 같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그의 신앙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뭔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바라는 대상이 무엇인가로 그 입장을 달리합니다. 게다가 다 같이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척도 역시 무엇을 기다리는가에 있습니다.
잠을 깨고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신앙인은 요행이나 대박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신앙인은 눈으로 보는 현실로 세상을 평가하지 아니하고, 약속된 구주 오심을 탄식하며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의가 통치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탄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노년에 어울리는 성숙한 성도입니다. 시므온처럼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수입니다. 남은 자의 후예이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할아버지 시므온은 두 번째로 2 성령이 함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25절, 우리말 성경) 25, 26, 27절을 보면 성령에 대한 언급이 세 번나옵니다. 구절마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백성 모두에게 있는 성령이 시므온에게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설명이 붙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의롭고 경건한 성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거처를 의롭고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하시길 즐겨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1)당신의 뜻을 미리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눅 2:26) 달리말해 할아버지 시므온은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2)당신의 종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달리 말해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날도 그는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려고 들어왔다.”(눅 2:27)
여기도 성령의 특별한 사역 중의 또 하나를 소개합니다. 여기 성령께서 시므온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게 인도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과 달리 특별한 임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날은 하나님께서 들리는 목소리로 지시하셨는지 아니면 그냥 성전에 올라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는지 본문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표현은 꼭 올라가야겠다는 내적인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날도 그는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려고 들어왔다.”(눅 2:27) 오늘 우리도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하나님의 뜻을 미리 깨닫고 적절한 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할아버지 시므온은 세 번째로 3 좋은 말을 하는(εὐλογέω)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의 마음은 성령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고, 신앙이 좋은 사람의 행동은 그 입으로 좋은 말을(εὐλογέω)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보면 “. . . 시므온이 아기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눅 2:28) “ . . .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눅 2:34)
헬라어 “좋은 말을 하다”(εὐλογέω)는 같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님을 향해서는 ‘찬양하다’로, 사람을 향해서는 ‘축복하다’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좋은 말은 바로 찬양하는 것이요 동료인생을 향해 하는 좋은 말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노년의 크리스찬의 언어는 찬송과 축복으로 특징지워져야 합니다.
할아버지 시므온은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체험하기 전에 그의 삶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 도리를 다하는 신앙의 사람에게 특별한 체험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십니다. 시므온이 체험한 성령의 특별한 지시와 인도하심은 이미 그 백성에게 주어진 일반계시의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미 알고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노년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개개인의 삶만 아니라, 앞으로의 지비티의 사역의 특징도 더욱 성령에 민감하여 방향을 설정하며, 지비티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이웃을 향한 축복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