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_하나님나라(6)_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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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44절의 말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45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내용들을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이에 넣어둡니다. 물론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사건과 의미를 연결하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듣는 제자들은 요즘 말로하면 ‘그 말이 거기서 왜 나와’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먼저 듣는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초기에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내용이 4장부터 시작해서 9장에서 마무리를 합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기억해야 하는 말이 무엇이나면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처럼 9장 후반부의 사역은 예루살렘을 향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9장의 시작을 살펴보면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라고 시작합니다. 이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에게 어떤 것을 주었는지 혹시 기억이 나시나요) 그리고 오천명을 먹이는 사건이 10-17절까지 나옵니다. 이 사건은 특히 (4복음에서 모두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어어지는 18-27절의 말씀에서 중요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가 고백을 하는 것이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을 기록하고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가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4복음서나 공관복음서에서 모두 나오는 이야기들의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잘 아시죠. 특히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가 그리스도이신가?’ 라는 물음은 대단히 중요하고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 아는거 아닙니까 하고 뭉퉁거리며 지나갈 질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8-36절까지의 사건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마치 앞선 베드로의 고백을 뒷바침하기라도 하듯,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변화된 모습을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경험하도록 하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역시 공관복음에도 같이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일까요? 퀴즈로 드려볼까요? 베드로는 주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고백했지만 그 진짜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인격을 가렸던 베일이 벗겨지고 변형되는 사건을 통해 스스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 주신 사건 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4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 등장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여기 변화산의 사건에서 등장합니다.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님의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오늘 제목처럼 ‘너희 귀에 담아 두라’는 말씀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떡해 말을 하나요. 그런 음성이 제자들에게 처럼 내게 들린다면 난 그렇게 할 것같은데 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5) 그리고
이런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떡해 말을 하나요. 그런 음성이 내게 들린다면 난 그렇게 할것같은데 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7절부터 43절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과 같은 부분을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7절부터 43절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앞에 나온 말씀과는 좀 격이 다른 것 같을 수 있습니다. 마치 좋은 일에 초를 친다는 느낌 같거나, 좋은 일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굳이 왜 말하고 있는지 의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구성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우상에 빠진 히브리인들을 목격한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정말 어제까지는 좋았습니다. 오천명을 먹이고 남는 엄청난 기적을, 베드로의 놀라운 고백은 어쩌면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장밋빛 미래를 알려주는 사건의 연속이었을지 모릅니다. 특히 이어지는 변화산의 사건의 경험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결정적 놀라운 영광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37절에 ‘이튿날’ 이라는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미 일어보았듯 사건의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럼 아까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죠.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어제까지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에게는 지난 주에 목사님께서 수요일 설교를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설교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는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사역을 하게되면 많이 해야할 일이라 벌써부터 안해도 된다고 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이런 일은 웃는 정도이겠지만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런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일들이죠.
먼저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디도미) -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 - 이미 주어진 상태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
그렇다면 37절 이하의 말씀은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제자들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본 것, 경험한 것이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볼까요? 좋은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시범을 보이고 따라합니다. 그럼 다 배운것과 같은 착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6절의 말씀처럼 ‘고치더라’ 그들이 나타낸 놀라운 일이 그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경험한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46절에서 48절까지 제자들의 모습은 누가 큰 지를 겨루는 내부 분란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로 들어갈 때 야고보와 요한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다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수요예배에 오신 분들은 삶의 많은 경험과 성경의 지식을 갖고 열심이 있는 분들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자로 교사로 기도자로 서있는 분들이시죠. 그래서 오늘 말씀을 잘 살피고 돌아가서 정말 그러한가? 다시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7절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외아들이 귀신에 붙잡혀있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1절에 ‘주시고’ 6절에 ‘고치더라’했던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실패했을까요. 앞선 놀라운 일들이 우리의 삶에 매일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영광만 보았지 영광을 향해 고난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떡해 구현되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7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만 칭찬을 들었습니다. 특히 서머나교회는 칭찬의 내용이 무엇이었냐면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2:9)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절) 칭찬을 들었으면 보상이나 이제는 좀 해결되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그런데 앞으로도 더 큰 고난이 있으니 ‘죽도록 충성하라’는 내용이 칭찬에 상응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길입니다. 6절에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고치더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이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변화산의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고선 더욱 견고해지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은 영적인 능력이 자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 아시죠 그에게 임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강권이 오히려 사울을 어떡해 했는지 지난 시간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가요? 41절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새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룬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할 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아비에게 주님은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난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잡아서 갑자기 부르짓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게 합니다. 거품을 흘리게 하거나 때론 우리의 상태를 몹시 상하게 하고서야 겨우 떠나는 상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갈아 먹기도 하고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배우자의 사별, 자녀들의 아픔이나 고통, 코로나 19 사태로 맞는 다양한 경제적 어려움도 그러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겪는 여러 병고나 어려움이 우리를 이 아이와 같은 상태를 만들고 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나요. 우리는 먼저 그런 일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상태가 ‘패역한 세대’의 특징적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패역한 세대에 살면서 우리도 패역한 모습 곧 믿음이 없는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여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받은 권위로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는 사명 곧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러한 능력을 받았고 그렇게 했던 자들 입니다. 위로를 주고 믿음으로 돌봐야하는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머리 속에는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전혀 다른 곳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우리가 첫째 자리 둘째 자리에 앉게 될 것인데 누가 그자리를 앉게 될까. 하는 사고가 바로 패역한 세상이 하는 사고입니다.
무리 속에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 입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간절한 일이 생길 때 주님 앞에 나옵니다. 주님의 필요는 우리 삶에 나타난 문제에 비례합니다. 순풍에 돛 단듯 아무일 없을 때는 가장 멀리서 주님을 바라보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편히 살고 넉넉하게 살만 할 때 그는 주님께 나왔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부유함을 불법 저지른 자에게 4배로 배상하고 또 절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이런 패역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주님은 받아 주십니다. 41절에 ‘이리로 데리고 오라’ 얼마나 위로가 되고 빠르게 반응하십니까. 아이를 낫게 했다고 누가는 전합니다. 마가는 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아비가 ‘내가 믿나이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좇을 뿐 아니라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면서 굳건하게 까지 하십니다. 아이를 향한 간절한 부모의 절규를 예수님은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없는 세대가 원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평안입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진정한 기독교가 되는 것,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을 막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면 마가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답이 마태와 마가가 서로 다른 건 가요?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인가요? 간혹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주옵소서…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런 건 ‘겨자씨 한 알’이면 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할 일은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일을 해야지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것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귀신을 내어 쫓는 것 그 자체의 능력을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잡고 있는 권세에서 놓이는 것은 그 영향력 아래에서 풀리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종류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면 귀신을 내어 좇는 것은 그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패역한 믿음없는 이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 당하는 자들이 붙잡힌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도록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좇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트에서 시식용 맛보기만 먹고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패역한 세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저 해결받고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해결한 ‘겨자씨 한 알’을 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현장을 맛보았지만 오히려 오병이어 기적의 맛,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기적의 맛에 마음을 빼앗겨 앞으로 예루살렘에서의 자신들의 삶과 지위에 대해 갈망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말씀이 히브리서 11장에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는데 특별히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믿음은 일종의 방향성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 바로 그곳을 향해 실제로 발을 딛는 행동입니다. 패역한 세대와 그 속에 사는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될거야…예수 믿으니 별 일 없을거야...
그럼 어떡해 해야 할까요? 눅17장에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답도 말씀해 주시니 말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하니 예수님은 ‘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 드린 것처럼 기도할 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을 주세요’라고 많은 분들이 해석합니다.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답이 무엇입니까? 7절에서 10절에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느 종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수고했으니 앉아서 먹으라고 하겠냐는 것이죠. 오히려 주인은 이젠 먹을거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 수종들고 그후에 먹으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렇게 했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하겠다는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요즘 우리에게는 좀 부딪히죠. (요즘에는 종과 노예의 관계가 없습니다. 각자의 인권이 보장받는 가운데 있기에 이런 경우는 이렇게 글이나 영화에서 볼 법한 이야기죠. ) 오히려 10절에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무익한 종처럼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을 따라가기를 거부하고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앞세워 기도하는 모습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우리 죄를 사해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말아달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가 오늘도 필요할까요? 우리는 종과 노예와 같은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그 분명한 의미를 되새길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의 사고로는 이런 종과 같은 삶의 사고는 도무지 가늠해보지 못하는 일이기에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가 바로 코로나 19와 같은 세대를 사는 우리교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해 결심을 하시고 떠나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철저하게 순종하시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보다 한참을 앞선 시대 이사라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고 고백합니다.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생명의 길’입니다. 시편 16: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2장28절에는 바로 시편 16:11절을 그대로 인용하며 베드로는 예수를 못박은 청중을 향해 설교합니다.
본문 44절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는 것입니다. 45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는 말씀과 상반됩니다. 예레미야 21장 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코로나 사태로 인한 우리의 길은 어쩌면 잘 모르는 길입니다. 목사님도 그래서 줌과 같은 방식도 도입해보고, 어떻게 해야할지 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수요예배에 참석한 저와 여러분 역시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이 ‘무익한 종과 같은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섬김을 통해 코로나 사태에 걱정하고 불안해하면서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 신자들을 위로하고 연약한 형제를 격려하고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라도 이것이다 하는 모델은 없습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레이스교회가 달려갈 길 생명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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