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23.주일새벽기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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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79장
사도신경(천천히)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광고 : 있을경우(헌금)
말씀봉독(짧을 경우 혼자) : 갈 5:5-6 (신약 307페이지)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샬롬찬양대 찬양드리겠습니다.
설교
서론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이 어떤 소망인지, 또한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효력이 있는 것, 다른 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며 함께 나누어보기를 바랍니다.
본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몇 번이나 들었겠지만 끝나지 않는 갈등속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복음에 새롭게 태어났지만 그들의 환경과 사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과도 부딛혔고 내부적으로 그리스도인끼리도 부딛혔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그들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은 감격의 순간은 너무나 벅찼지만, 그 구원의 감격이 지나간 후 그들이 직면해야 한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의 부딛힘과 갈등뿐만 아니라 믿는 자와의 갈등역시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갈등과 시련을 겪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에게, 또한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일까요. 그 믿음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안에서 싸우는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연결될 것을 믿었습니다.
오히려 재림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지금보다 그당시가 더욱 컸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믿음은 약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닙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능력을 비유하시며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크기도 능력도 아닌 얼마나 확실한 믿음이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씨앗이 될만한 믿음이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겨자씨가 볼품없어 보이지만, 땅에 심으면 자라듯이, 그 믿음 안에 생명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면 생명있는 믿음을 따라 행할 때 우리에게 의의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생명있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생명있는 믿음, 진정한 믿음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믿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변화합니다. 우리의 육신도 계속 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육신도 바뀝니다. 습관은 바꾸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꿀수 있습니다. 요요현상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다이어트를 하고 하고자 결심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 성령께서 불같은 은혜를 주셔서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이 흐르듯이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믿음의 스타일도 다릅니다. 사람마다 기도하는 스타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르짖지 않으면 기도가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용히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역시도 바뀝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우리의 믿음도 바뀝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그때 경험한 하나님이 전부인줄 알지만, 신앙생활을 함에 따라 점점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알아가며 우리의 믿음의 지평을 넓혀가게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뜨거운 믿음이 있었지만 차가운 현실속에서 식어져서 밍밍해질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도 계속해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은 성령을 통해 변하고 만들어지고 변하고 있는가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 계십니까. 기도하고 계십니까. 말씀 속에서 은혜를 구하고 계십니까. 언제나 이 3가지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고 아름답게 변화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뜻하신대로 발전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6절을 참고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할례든지 무할례이든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믿음안에서 굳어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형식이나 형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지키는지는 중요합니다. 즉, 예배의 형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가 아니라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바꾸면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입니다. 일하고 움직이고 만들어가는 믿음입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 일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일하고 움직이고 만들어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살아있을 때만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의미가 있고 실질적인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의 역사와 수고를 이루어나가고 있습니까. 교회는 그리고 우리 한명 한명은 그 어느때보다 지혜와 순결함, 사랑이 필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교회는 이제 이단이나 다름없이 찍히고 있습니다. 지난 신천지때는 그나마 이단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말도 꺼낼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왜이렇게 핍박받게 되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할 우리가 왜이렇게 예배 드리기 힘들게 된 것입니까.
혹시 그동안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움직이는 믿음이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지켰던 율법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롬 7:8-10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생명을 주는 계명이 죄 때문에 오히려 죽는 것이 되었다라고 바울 스스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굳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마다 사랑의 방식조차 다릅니다. 그래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이 한때 엄청나게 유행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굳어져 버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만이 내게 편안하고 좋고 옳은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교회에게 익숙하고 좋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의 방식을 요구하든지 상관없이, 그래서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방식, 우리만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할례와 무할례가 효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방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방식으로 사랑이 흘러나갈 때, 그 방식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 이전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까.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변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을 만나 태어난 아기같은 믿음에 비교할 때 어떻게 변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 5:1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모든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앞에 마음껏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유로운 사랑과 자유로운 믿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사랑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일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서로의 눈높이에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며 일하시기 바랍니다. 의견을 나누기 바랍니다. 그 말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의 진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이 코로나라는 위기가 사랑으로 전진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실 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오늘과 모든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 기도할 때, '주님, 주여'는 하지말자.
주기도문(천천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기도제목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첫째는 원로목사님과 새로 오실 담임목사님을 위해서
예배를 위해서
코로나19가 빠르게 진정되도록
이때에 타국에서 고초를 겪고있을 김진리, 박종휘 선교사님들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여 일창하신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