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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행함으로 나타나는 참된 기독교(1:19–2:26)
III. 행함으로 나타나는 참된 기독교(1:19–2:26)
야고보서의 첫 번째 주요 단락(1:2–18)이 시험/유혹이란 핵심 주제 하에 비교적 느슨하게 연결되었다면, 1:19–2:16은 1:22에 표현된 말씀, 즉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권고에 좀 더 긴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권고는 행함이야말로 참된 기독교가 갖추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하는 1:21–27의 핵심 주제이다. 2:1–13에서는 이러한 순종이 드러나야 할 구체적인 예로서 가난한 형제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이 도입된다. 그 다음에 이 순종과 믿음의 관계가 2:14–26에서 신학적으로 논의된다.
네 개의 주요 용어가 이 단락 전체의 내용을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말씀’(로고스, logos)은 1:21–27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1:25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율법’(노모스, nomos)은 2:8–13절에서 강조되며, ‘행함’(에르가, erga)과 ‘믿음’(피스티스, pistis)은 2:14–26에서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
1. 말과 분노에 대한 권면(1:19–20)
1. 말과 분노에 대한 권면(1:19–20)
〈19〉 성급한 말과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피하라는 야고보의 간결한 훈계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라는 친숙한 호칭으로 시작된다. 이 호칭은 서신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새로운 주제로 이동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 부분과 전후문맥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설정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말씀’이 19–20절의 이 권면 앞부분(18절)과 뒷부분(21절)에 나오기 때문에 야고보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빨리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는 더디하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야고보의 의도였다면, ‘말씀’을 왜 듣다와 말하다라는 두 동사의 목적어로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성내지 말라는 권면은 이러한 해석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서도 야고보는 갑작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자신의 관례를 따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1
대부분의 번역처럼, RSV 는 19절의 첫 단어를 이것을 알라(know this)는 명령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형태상으로 그 단어는 직설법(indicative)으로 간주하여, ‘너희는 그것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NEB ). 하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직접 호소할 때 명령형을 더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직설법 보다는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사람이 말(speech)을 조심해야 할필요성은 지혜 문헌에서 매우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잠 10:19; 15:1; 17:27–28; 집회서 5:9–6:1 참조). 특히 흥미로운 것은 허술한 말이 종종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직접 연결된다는 점이다. 잠언 17:27에는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사람은 조절되지 않는 분노 때문에 너무 성급하고, 너무 많이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모든 화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때로는 ‘의로운 분노’〈righteous indignation〉를 내야 할 상황도 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주 경솔하고 해로운,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초래하게 만드는 제어되지 않고 분별없이 폭발하는 기질을 금하고 있다(집회서 7:9 참조). 그는 3:1–12에서 이 주제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한다.
〈20〉 사람이 왜 성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20절에 나오는데,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의를 해석하는 세 가지 주요한 견해가 있다. 첫째, 이 말은 속격인 테우(theou, ‘하나님의’)를 주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의로운 지위(신분)’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의’ 이해는 바울서신에서 잘 입증되며(특히 빌 3:9), 야고보는 2:14–26에서 ‘의’라는 명사와 동족어인 ‘의롭게 하다’는 동사를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의’라는 단어를 ‘정의’(justice, NEB 참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신 심판의 수단이기 때문에 사람의 성냄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셈이다(이 경우에 속격 테우는 아마도 소유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 이해는 70인역에서 흔히 발견될 뿐만 아니라, ‘의를 이룬다’(행한다)는 말이 히브리서 11:33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RSV ). 셋째, 속격 테우를 목적격의 속격으로 해석하여, ‘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의를 ‘행한다’(포이에오, poieō) 또는 ‘이룬다’(에르가조마이, ergazomai)는 말은 성경 헬라어에서 늘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에르가조마이의 경우 시 15:2; 행 10:35; 히 11:33를 보라). 이들 중에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데, 특히 야고보가 ‘의’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앞에서 말한 첫째 견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용례가 창 15:6의 인용구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의를 행한다’는 말은 2:9의 ‘죄를 행한다’는 말과 정면으로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경솔하고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행위기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70인역에서 ‘행하다’(에르가조마이)와 ‘의’가 유일하게 함께 나오는 시편 15:2은 말(언어)의 죄와 연관된다.
2.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1:21–27)
2.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1:21–27)
〈21〉 21절은 보통 19–20절에 붙여 함께 해석된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앞의 두 구절과 연관되는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말씀이라는 주제를 통해 다음 단락에 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된다. 더욱이 ‘그러므로’(디오, dio)는 19–20절 보다는 21절 이하의 논의를 18절과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는 베드로전서 1:23–2:2이 야고보서 1:18 및 21절과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는 언급 뒤에 (디오로 도입되는) 악한 행동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는 명령이 나온다.2 베드로가 야고보를 인용했거나, 그 반대로 야고보가 베드로를 인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두 저자가 초기 기독교 설교 순서를 공통으로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 설교 순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통하여 은혜로 주신 영적 탄생을 상기시킨 후 옛 생활과 연관된 행동방식을 피하고 자신을 구원한 말씀의 기준에 따라 살라는 권면이 나온다.
또한 야고보가 내버리다(아포티테마이, apotithemai)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가 초기 교회 공통의 전승을 인용하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해 준다. 일반적으로 옷을 ‘벗다’의 의미(행 7:58 참조)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옛 생활방식을 벗어버린다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롬 13:12; 엡 4:22, 25; 골 3:8; 히 12:1; 벧전 2:1 참조). 야고보에 의하면, 벗어버려야 할 것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다. 더러운 것(filthiness)으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 뤼파리아(rhyparia)는 성경 헬라어에서 여기에서만 사용되지만, 그 형용사형 뤼파로스(rhyparos)는 2:2에서 가난한 사람의 옷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고, 또 스가랴 3:3–4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주의 천사가 입혀주는 아름다운 새 의복을 입기 전에 벗어야만 하는 옷을 수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에도 옷을 ‘벗다’ 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넘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 페리세이아(perisseia)는 본래 ‘잉여’ 또는 ‘넘침’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타스커는 그 단어가 여기에서 페리슈마(perisseuma)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악의 나머지’(the remainder of wickednes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서 5:17과 고린도후서 8:2에서 그 단어는 단순히 ‘넘침’(abundance)’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말은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다양하고도 만연된 죄를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NIV 는 ‘매우 만연된 죄’로 표현).
악을 ‘내버리다’(벗다)는 표현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으라’는 말과 나란히 사용된다. 호르트는 ‘심어진’(implanted)으로 번역된 헬라어 엠퓌토스(emphytos)가 ‘타고난’(이곳 외에 성경 헬라어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솔로몬의 지혜 12:10의 경우처럼)을 의미하고, 야고보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타고난’ 자연적 능력을 언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능력은 “창조 때에 사람이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된 본래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할뿐더러, ‘말씀’이 구원하고(21절), 새 생명을 낳는(18절) 능력을 가진 것으로 서술되는 문맥에서 볼 때 너무 막연하다. 오히려 이러한 언급들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특성이 아니라, 단순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경우에 엠퓌토스는 (후천적으로) 심겨진 어떤 것을 언급한다.3 그 단어의 주목할 만한 개념은 유명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31:33; 또한 1:25의 ‘자유롭게 하는 율법’에 대한 주석 부분과 본서 서론 부분의 ‘율법’ 단락 참조). 야고보가 이 단어를 이런 식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구원시킨 후에는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여 그의 삶에 지침을 주며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으라는 권고는 회심(개종)에 대한 권고가 아니라(‘말씀을 받으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말씀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려고 애쓰라는 권고이다. 진실로 ‘다시 태어난’(18절)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권위요 안내자로 삼음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들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리 주님 또한 비유를 통해 동일한 요점을 가르치신다. 즉 성도는 마음에 심겨진 말씀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마음속에 ‘옥토’를 준비해야만 한다(막 4:3–20).
야고보는 이러한 열매로 ‘영혼의 구원’을 제시한다. 구약성경의 용례에 따라, ‘영혼’은 여기에서 단순히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하고, 구원은 미래의 일로 간주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판 날에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22〉 야고보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해하지 않도록 22–27절에서 그의 의도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고보의 목회적 관심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 말씀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말씀을 참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말씀을 ‘듣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야고보가 말씀을 듣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일 것이다. 오히려 야고보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듣되 행함이 없는 태도이다. 이 점을 강조함으로써 야고보는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유대인의 믿음을 공유한다. 2세기의 한 랍비(Simeon b. Gamaliel in Mishnah, Abot. 1:17)는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울은 이 유대교의 전통을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반영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지니”(롬 2:13). 야고보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눅11:28)는 예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예수의 선포는 복음 안에서 죄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압도적이고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인 응답으로서의 철저한 순종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과 인간의 감사의 반응이라는 두 요인은 복음의 일부요, 한 쌍이다. 우리를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고(18절), 우리 안에 심어진 (21절) 말씀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자기기만의 죄를 짓게 된다. 복음이 본래 구원하는 능력과 순종에 대한 요청을 모두 포함한다면 한쪽으로만 관계를 맺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야고보가 밝힌 이유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거나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들음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실제(참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앎)의 어머니이다”.4
〈23–25〉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기도 하고 순종도 하는 사람을 직유를 통해 상세하게 대조시킨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지만 곧 바로 자기가 본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된다. 반면에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간직한다(perseveres). 즉 그는 실천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비교의 대상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야고보가 보는 태도(방식)를 비교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듣기만 하는’ 자는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급하고 부주의하게 응시하는 반면, 행하는 자는 주의 깊게 관찰한다(NEB ). 이 견해에 따르면, 23절의 거울이 25절의 온전한 율법과 비교된다. 그러나 거울이 고대 철학과 종교에서 종종 이러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긴 하지만, 야고보가 여기에서 거울을 그런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23–24절에 각각 나오는 카타노에오(katanoeō, 관찰하다)라는 동사를 ‘급하게’ 또는 ‘피상적으로 응시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 그 동사는 누가복음 12:27에서 예수가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한 경우처럼, 주로 사려 깊고, 주의 깊게 고려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점을 인정하고, 로즈(Laws)는 비유의 대상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녀는 야고보가 거울을 자세하게 들여다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만 남아있는 인상을 ‘온전한 율법’을 순간적으로 보지만 오래 지속되는 효과와 대조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25절에서 들여다보다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라퀴프토(parakyptō)가 빠르게 본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어근의 의미(파라〈para, ‘곁에서’〉+ 퀴프토 〈kyptō, ‘구부리다’〉)를 반영하여, 서서 어떤 것을 자세하게 보려는 신체적 노력을 언급하곤 한다(벧전 1:12을 보라). 그렇다면 야고보가 동사를 통해 어떤 중요한 대조를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야고보의 의도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본문을 볼 때, 24절의 ‘잊어버리는 것’과 25절의 ‘간직하다’(remaining) 간의 대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개역개정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율법을 들여다 본다’는 말 뒤 원문에는 ‘간직하다’라는 말이 있다-역자 주). 이러한 강조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와 대조되는 25절 끝 부분에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야고보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효력이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임을 설명하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은 고작 머리를 빗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도 밖에는 말씀으로부터 어떤 지속적인 효력을 얻지 못한다. 이와 달리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간직하는’(파라메이나스, parameinas) 자인데, 이 말은 말씀을 계속 행한다는 뜻이거나(NIV ) 또는 계속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GNB )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말씀을 행하는 자는 행동을 통해서 말씀이 자신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22절의 ‘말씀’이 25절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야고보서에서 ‘율법’(노모스, nomos)의 의미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본서 서론 부분의 ‘율법’ 단락 참조). 야고보와 같은 유대인에게 노모스는 보통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 율법은 빈번히 ‘온전하다’(시 19:7)고 표현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율법에 참된 자유를 주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Mishnah, Abot. 6:2). 그러나 문맥을 살펴볼 때,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구약성경의 율법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본문의 흐름 상 25절의 ‘온전한 율법’이 22절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또한 22절의 ‘말씀’은 18절의 영적 탄생을 중재한 ‘진리의 말씀’, 21절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오히려 복음과 긴밀하게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 야고보의 교훈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이 ‘율법’이 특별히 예수의 윤리적 요구와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구원의 ‘복음’(good news)이 동시에 온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를 엄중하고도 불가피하게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기독교 ‘말씀’의 이러한 요구적인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 ‘율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후대 신학의 ‘율법/복음’ 구분을 미리 예견한다). 이 ‘율법’은 2:8–11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구약의 계명들을 포함하지만, 야고보가 그 율법을 ‘온전한 것’으로 특징짓는 것은 이 계명들을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성취의 관점(마 5:17)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순종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율법’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새 언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렘 31:31–34)에 따라 그것이 마음속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21절의 ‘심어진’ 참조).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엄중하고, 철저한 요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를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임한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와서’ 자기 ‘멍에’를 메라고 요청할 때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약속하셨다(마 11:28–30).
추가 주석1. ‘자기의 생긴 얼굴’(1:23)
23–24절과 25절간의 대조를 좀 더 심오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자기의 생긴 얼굴’로 번역된 헬라어 구문은 ‘토 프로소폰 테스 게네세오스 아우투’(to prosopōn tēs geneseōs autou, 문자적으로는 그의 기원〈genesis〉의 얼굴)로 다소 어려운 구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토 프로소폰(얼굴)을 수식해 주는 테스 게네세오스라는 속격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원(genesis)이 ‘존재’(existence)를 의미할 수 있으며(솔로몬의 지혜 7:5; 유딧 12:8), 따라서 그 구문은 단지 사람이 가진 실제 얼굴을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기원’(genesis)은 보통 ‘탄생’ 또는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호르트(Hort)는 이 점에 주목하여 이 구문을 ‘하나님이 만드셨던 인간의 본래 모습’의 의미로 창조된 얼굴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23–25절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것을 보기는 하지만 그것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invisible) 하나님의 형상을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하나는 필로가 자주 사용한 것처럼, 기원(genesis)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역과 대조되는 피조물의 일시적인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실제 ‘얼굴’이나 특성-즉 그의 죄성-을 ‘온전한 율법’이 반영하는 이상적인 얼굴이나 특성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견해는 여러 면에서 장점이 많으나 지나치게 세밀한 점이 없지 않다. 특히 25절에는 ‘이상적인 특성’이 온전한 율법에 반영되어 있다는 언급이 없다. 또한 보여진 형상 간의 대조를 끌어냄으로써 분명하게 의도된 ‘잊어버림’과 ‘지속됨’ 간의 대조가 약간 약화된다. 이런 점에서 기원(genesis)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해석이 최상이다. 따라서 23–24절은 어떤 알레고리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한 실례로서 이해하는 것이 낫다. ‘듣기만 하는 자’는 단지 순간적으로만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에 비유된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지속적인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말씀을 만남으로써 변화되는 사람은 자기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26〉 야고보는 참된 기독교의 실천적인 측면을 서술하는 이 중요한 단락을 말씀 순종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음으로써 종결한다. 이들 중의 하나는 야고보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혀를 통제하는 문제이다. 그는 이미 독자들에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19절). 또한 3장에서 그는 좀 더 길게 그 문제를 전개할 것이고 4:11–12에서 다시 그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혀가 마치 야생동물과 같다고 주장한다. 물론 혀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재갈 물릴 수(bridled) 있다면, 그것은 큰 일을 이룰 수가 있다. 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 둔다면 혀가 지닌 파괴적인 힘은 실로 엄청나다.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religion)의 참됨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는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요, 들은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이 헛된 것임을 드러낼 뿐이다.
RSV 의 종교(religion)란 번역은 헬라어 단어 트레스케이아(thrēskeia, 형용사 형태 트레스코스〈thrēskos〉는 드물게 사용)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다. 이 용어는 기독교만의 전형적인 용어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헬라 종교에서 신 또는 신들을 숭배하고 예배하는 행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이 말은 종종 예배의 외적 행위(의식)를 의미하기도 한다. 야고보에 따르면 한 종교적 고백의 참됨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헌신은 소홀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참여하는 예배의 외적 의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종교가 참 되냐 그렇지 않느냐는 오직 순종으로만 가늠된다. 순종이 없다면 종교의식은 헛된 것, 즉 공허하고, 소용없고, 무익할 뿐이다.
〈27〉 야고보가 여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참된 예배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야고보)는 종교가 무엇인지 전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언급하는 것이 빠진 종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5 물론 진정으로 예배하는 마음과 영으로 드리는 종교의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들려지지’ 않으면 ‘행해질’ 수도 없다. 그러나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들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행함’은 소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말씀을 경건하게 ‘듣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두 가지 삶의 영역이 27절에 소개된다. 그것은 곧 사회적 관심과 도덕적 순결이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구약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 68:5). 이 단락과 유사한 점이 많은 구약성경의 한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그들의 ‘종교 의식’)를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씻으며…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사 1:10–17).
여기에서 고아와 과부는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경건이 순결한(pure) 그리스도인은 무력한 자를 도우시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 받아야 할 것이다. 제3세계 및 도시의 한복판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실직자과 구걸하는 사람들, 정부와 법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건’이 입증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도덕적 순결은 참된 경건의 또 하나의 특성이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 주변 사회의 가치 체계(value-system)를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반적으로 이 사회는 반-그리스도적은 아니지만, 비-그리스도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끊임없이 이 가치 체계의 얼룩에 물들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야고보가 이 마지막 부분을 참된 경건의 한 요소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고도 교훈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을 넘어서서 그 행동이 나오는 태도와 신념에까지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4절)의 ‘참된 경건’은 마음의 순결을 행동의 순결과 결합시킨다.
3. 차별 행위와 사랑의 법(2:1–13)
3. 차별 행위와 사랑의 법(2:1–13)
이 단락은 야고보서에서 단일 주제를 상당히 길게 전개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1절에 차별하지 말라는 권고가 이 단락 전체를 지배한다. 2–4절은 그 예로써 야고보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 즉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차별 행위는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왜 이러한 차별대우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첫째, 부유한 자에 대한 우대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하나님의 태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5–7). 둘째, 인간의 편에서 어떤 편애(favouritism)의 표현도 이웃 사랑을 요구하는 ‘왕의 법’(최고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8–13). 야고보가 이 주제에 대해 이처럼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이 일이 실제로 독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부자에게 당하고 있는 억압(6–7)의 결과가 일종의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반면, 보다 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모욕하고 경멸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이 들었던 왕의 법을 ‘행하지’ 못한 결과임에 틀림없다(1:22–25 참조).
〈1〉 차별(partiality)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받아들이다’(receiving the face)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차별을 의미하는 구약 히브리어의 문자적 번역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된다. ‘얼굴을 받아들이다’라는 말은 신체적 외모나 사회적 지위 또는 인종 등과 같이 외적인 조건들을 토대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외적인 조건(외모)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롬 2:11; 엡 6:9; 골 3:25도 참조). 하나님의 백성도 이러한 면에서 그 분을 따라야만 한다.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야고보가 1:21–2:26에서 관심을 표명하는 문제들에 영향을 끼친 신명기 10:17–1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떡과 옷을 주시나니”라고 상기시킨다. 그러나 야고보가 8절에서 레위기 19:18의 사랑의 계명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영향을 끼친 구절은 레위기 19:15일 것이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과된 이 요건은 구약성경의 이러한 기본적인 요구사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적 조건에 입각한 편애(favouritism)는 국적, 인종, 계급, 성 그리고 종교의 장벽을 깨뜨리기 위해 오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야고보서 2:1에는 이 서신 전체에서 딱 두 번 명시적으로 나오는 예수에 대한 언급 중의 하나가 나온다(1:1 참조). 이 때문에 야고보서를 이러한 두 번에 걸친 예수에 대한 언급을 첨가시킴으로써 (기독교로) ‘세례 받은’ 유대교 문서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개론 부분 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예수란 이름을 자주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의 서신 전체에는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야고보가 기독론을 충분하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에 대한 그의 묘사는 그의 기독론적 신앙의 깊이를 증언해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야고보에게 예수는 ‘그리스도’, 즉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심판자로 약속된 메시아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셔서 하나님의 원수들을 복종케 하고 계시는(시 110:1 참조) ‘주’이시다. 더욱이 70인역에서 철저하게 야웨(여호와)를 번역한 주라는 칭호에는 예수의 신적 지위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주’이실 뿐만 아니라, 영광의 주이시다. 이와 같이 영광(독세스, doxēs)을 ‘주’를 수식하는 서술적 속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2:8에서 예수를 유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야고보는 이러한 형태의 속격 구조를 선호한다. 그러나 테스 독세스(tēs doxēs)를 보충의 속격으로 이해하여 예수의 독자적인 칭호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영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에게 이러한 칭호를 붙이는 용례가 없기 때문에 타당성이 적다. 예수를 영광의 주로 수식함으로써 특히 그 분이 현재 올라가 계시고 역사의 종말에 구원과 심판을 위해 오실 천상의 영역이 암시된다(사 5:9 참조). 이러한 암시는 그리스도인이 인간에게 너무 많은 ‘영광’을 부여하는 상황에 특히 잘 어울린다.
〈2–3〉 1절에서 야고보가 책망하는 태도에 대한 실례가 2–3절에 나온다. 야고보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 가상의 상황인 것처럼 보이고 취지에 있어서도 과장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가 공동체 에서 낯설지 않은 상황임을 문맥으로부터 확실하게 간파할 수 있다. 특히 6–7절을 통해 야고보가 공동체의 현존하는 상황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이 예에 따르면, 외적인 모습이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 ‘회당’ 안으로 들어온다. 한 사람은 온갖 부의 표식을 달고 등장한다. 그는 로마의 상류층에 속하는 ‘기사계급’이 낀 것과 같은 금가락지를 끼고 있고, 아름다운(람프로스, lampros, 밝게 빛나는) 옷을 입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뤼파로스, rhyparos)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특별한 주목을 받으며 좋은 자리로 공손하게 안내 받는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Phillips에 따르면 ‘만약 앉아야 한다면, 바닥에 앉으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여기에서 내 발등상 아래에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내 발판 아래(휘포 토 휘포포디온 무, hypo to hypopodion mou)라는 뜻이지만 본문에서는 내 발판 근처의 바닥에 앉으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Mayor). 이 두 사람이 외모로 소개되고, 자리로 안내되는 것을 보아 아마도 이들은 회당을 처음으로 찾은 방문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회당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 회당(쉬나고게, synagōgē)은 보통 유대인의 예배처소를 가리킨다(계 2:9과 3:9은 예외).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의 주체인 것을 보면 그런 회당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회당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데, 야고보도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야고보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 간에 일어난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인 모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언한 것처럼).6 그러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방문자였으며, 어디에도 그 모임이 그리스도인의 재판 모임일 가능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고, 일반사람도 환영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예로 든 것으로 보인다.7
〈4〉 야고보는 조건절(만일…하면)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가 예로 든 차별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모순된다는 점을 묘사하였다. 이제 그는 and로 연결된 주절(then) 통해 그러한 행위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한다. 이 주절은 의문문의 형태를 취하지만, 야고보가 사용한 헬라어 구조는 우(ou, not)로 이끌어지는 의문문의 형태로, 독자들의 긍정의 대답을 이미 전제한다. 처음에 나오는 헬라어 동사 디아크리노(diakrinō)는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RSV 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이 동사를 차별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이 동사는 분명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고(행 11:12; 15:9 참조), 너희끼리 서로(among yourselves)란 표현은 이어 나오는 엔 헤아우토이스(en heautois)의 적합한 번역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미 이 동사를 1:6에서 분사 형태로 사용하였는데, 그 때에는 이 동사가 믿음이 없는 사람의 나누어지고 갈등하는 마음 상태를 의미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사용된 것처럼, 이 동사의 수동형은 보통 ‘나누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내면적인 갈등의 개념은 ‘믿음’이란 말이 1절에서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본문의 문맥에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2–3절에서 예를 든 악한 행동이 악한 동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야고보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처음 참석한 방문자를 대하는 성도들의 부적절한 ‘분열의 태도’(division)는 성도들의 마음(엔 헤아우토이스- 너희 각자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부적절한 ‘분열된 마음’(division)의 반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오로지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동기로부터만 오는 법이다.
야고보가 이 구절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레위기 19:15에는 차별 행위를 재판의 맥락에서 꾸짖는다. 아마도 이런 연관성 때문에 야고보는 차별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judge) 자들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교만하게도 재판관의 지위를 사칭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나쁜 것은 비-그리스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있다.
〈5〉 이러한 세속적인 기준이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가난한 자를 택하여 구원하신 그 분의 은혜를 통해 입증된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결과로 이해한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태도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 사람들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가난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부요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분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전한 선포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 분은 자신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셨다(마 12:28; 막 1:15; 눅 17:21). 그러나 그 통치의 완성과 그 축복의 부요함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신실한 종들이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마 25:31, 34).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가난할지라도 현재의 영적인 부요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더 큰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 물질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러한 영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분을 그 문장의 주어인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야고보는 또한 다음과 같은 예수의 복-선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참조. 마 5:3). 예수도 야고보도 가난한 자가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약속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1:9–11의 본문 주석 부분과 본서 서론 부분의 야고보의 신학 단락 참조), ‘가난한 자’는 거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사람과 영적으로 경건한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그 자체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부자들을 모두 배제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가 제자도의 걸림돌로서 부를 경고한 것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막 10:23; 눅 12:34), 또한 그 분도 야고보도 부자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배제시킨 것은 아니다.
야고보는 오직 가난한 사람만 선택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요지는 독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었고, 이 사실이 곧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차별 행위를 정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6–7〉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관심과 달리 너희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다고 야고보는 책망한다. 독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함으로써 그는 2–3절의 예화가 가상의 상황일지라도 독자들 중에 그러한 옳지 못한 차별 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암시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차별의 태도가 상호 관계의 틀을 거의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선을 선으로 갚기는커녕 그리스도인은 소규모에 불과한 성도들의 공동체를 억압하고 박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 부자들에게 명예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억압에는 경제적 착취가 포함되어 있다. ‘억압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뒤나스튜오(katadynasteuō)는 70인역에서 부자들에 의한 가난한 자(암 4:1 참조), 또는 고아와 과부(겔 22:7)의 착취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참된 경건’(약 1:26–27)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이 부자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고 있다.
6절에서 야고보서의 수신 공동체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기 교회의 역사를 볼 때 이 세상에 붙들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영적 약속을 매력적인 것으로 여겼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그들의 처지를 상기시켰다. 팔레스타인의 성도들,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은 심각한 가난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주후 46년경에 일어난 기근 때 안디옥 교회가 그들에게 구제금을 보냈고, 후에 바울도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에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세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구제금을 모았다(롬 15:26 참조). 야고보서에 반영된 심각한 사회-경제적 계급 차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소그룹의 부유한 지주와 상인이 점점 더 세력을 축적한 반면에 많은 수의 평민들은 그들의 땅을 빼앗겨 훨씬 더 가난해졌다. 야고보의 독자들 대부분은 아마도 이러한 가난한 소작농의 계층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독자들은 당시 다른 많은 유대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억압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 박해로 고난을 받았다. 아마도 이 경제적 억압과 종교적 박해라는 두 요인은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재정적인 근거로 인해 소송에 회부되었을지라도, 결국 그 동기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경멸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방’으로 번역된 블라스페메오(blasphēmeō)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비방당한’(블라스페문톤, blasphēmountōn) 것처럼(행 18:6), 말로 하는 욕설(언어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언어) 비방은 그 아름다운(칼론, kalon) 이름(벧전 4:14 참조), 즉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대조된다. 너희에 대하여 일컫는 바라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좀 어색한 구문인데, ‘토 에피클레텐 에프 휘마스’(to epiklethen eph’ hymas)는 문자적으로는 ‘너희 위에 불려진’ 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일반 히브리어 관용어의 의역인데, 흥미로운 점은 같은 야고보가 아모스 9:12을 인용한 사도행전 15:17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긴밀한 관계, 심지어는 소유권을 의미하고, 야훼와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서술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메시아인 예수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이 자리를 차지한다. 예수에 대한 충성(헌신)을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성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지닌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8〉 8–13절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강력한 논증을 제공해 준다. 본질적으로 이 논증은 그리스도인이 이웃 사랑을 가장 근본적인 요구 중의 하나로 포함하는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8절과 그 이전 절들과의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8절을 시작하는 헬라어 단어 멘토이(mentoi)가 ‘실제로’(RSV )로 번역된다면, ‘왕의 법’이 차별행위가 금지되는 경우에만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일곱 번의 용례를 보면 멘토이는 ‘그러나’를 의미하고 여기에서도 그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이해하면 8절은 앞의 맥락, 아마도 6a절과 반대되는 내용을 도입한다. “너희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왕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NEB ; NASB ).
이 왕의 법은 무엇인가? 10–11절에서 ‘율법’이 십계명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명칭은 구약 율법 전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늘의 왕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왕의’(royal)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8 그러나 ‘왕의’ 법을 구약의 율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동일한 이 율법을 12절에서는 ‘자유의 율법’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자유의 율법’은 1:25에서 복음의 요구(명령), 특히 예수의 가르침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왕의 법’이라는 표현 속에 기독교의 독특한 개념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왕의’(바실리코스, basilikos) 라는 수식어를 통해서도 암시되는데, 이 속격은 5절에 나온 ‘나라’ 또는 ‘왕국’(바실레이아, basileia)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가 레위기 19:18에 나오는 ‘사랑계명’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의 강령(마 22:34–40)으로 제시된 이 특별한 사랑의 계명을 ‘왕의 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단일한 계명을 율법(노모스, nomos)으로 지칭하는 예가 흔하지 않고, 야고보가 레위기 말씀의 인용 앞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카타 텐 그라펜, kata tēn graphēn)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을 보면 사랑의 계명을 그대로 ‘왕의 법’과 동일시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왕의 법을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 전체를 의미하는 또 하나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특히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고, ‘나라의 상속자’(5절)가 될 특권을 가진 성도들이 지켜야 할 예수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처럼(롬 13:8–10; 갈 5:14), 야고보도 ‘그 나라의 율법’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반영하고 있음을 보이는데 관심이 있다.
야고보가 왕의 법이 사랑의 계명에 따라 성취된다고 말한 의도는 율법을 지켜야 할 방식(‘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한다’는 의미에서)을 서술하기 보다는 오히려 율법 자체의 본질을 서술하려는 데에 있다. 즉 율법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요구가 자리 잡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웃(레아, rē‘a)은 특별히 동족 이스라엘인을 의미하지만, 예수는 외국인(눅 10:25–37)과 원수(마 5:44)를 포함하여 한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 그 적용 범위를 넓히셨다. 야고보는 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왕의 법’(최고의 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적용함으로써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그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9〉 특별히 사랑의 계명을 인용함으로써 야고보는 ‘차별하는’ 행위를 ‘죄를 짓는 것’으로 못 박는다. 그것이 옷이든, 국적이든, 사회적 계층이든 인종이든, 그것들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예수가 우리를 부르신 제한 없는(무한한) 사랑을 어기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계명이 바로 ‘왕의 법’의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별대우를 할 때 그 법을 어기는 자가 된다. 이런 점에서 8절과 9절은 분명한 대조 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에 순종하면 잘 하는 것이지만, 차별함으로써 율법을 어기면 죄를 짓는 것이다.
〈10〉 10–11절은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를 통하여 율법의 한 조항이라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9절 하반부의 근거를 제시해준다(개역개정에는 ‘가르’가 생략됨-역자 주). 이 두 구절은 야고보가 이미 9절에서 지적했던 동일한 책망을 11절 끝에서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즉 사람을 차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율법을 범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계명‘만’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율법’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을 어기면 그 전체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율법은 전체적으로 순종되어야 한다는 결론과 더불어 율법의 통일성(unity)은 당시 널리 알려진 개념이었다. 마카비4서에서 경건한 엘르아잘(Eleazar)이 율법에 어긋난 고기를 먹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과 함께 그것을 거절하였다. “더러운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사소한 죄라고 생각하지 말라. 작든, 크든 율법을 어기는 것은 똑같이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경우든 율법이 경멸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5:19–21). 예수도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19; 참조 갈 3:10; 5:13)라고 경고하심으로써 동일한 요점을 지적하셨다. 그러한 경고들은 상대적으로 보다 ‘중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 보다 ‘가벼운’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필요하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율법의 한 조항을 어기면 그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견해에 동의한다. 물론 야고보의 독자들이 어긴 ‘한 조항’, 즉 사랑 계명은 결코 ‘가벼운 요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논점은 그 이유(근거) 때문에 훨씬 더 타당성이 크다. 이 이유가 11절에 계속 설명된다.
〈11〉 11절에는 율법을 왜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율법을 단지 개별적인 계명들의 나열로서 이해한다면, 하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그 계명만을 어기는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개의 계명들은 모두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전체(통일체)의 구성요소들이다. 따라서 하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 불순종하는 것이요 곧 그 분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 된다.
10–11절에서 전개되는 내용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유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견되는 야고보의 의도는 얼마나 ‘유대적’인가? 만일 야고보가 유대적인 논리에 충실하였다면, 제의적 계명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여 율법의 모든 조항들의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야고보의 의도인가? 그의 서신 어디에도 그러한 율법에 대한 엄격한 견해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그는 9–10절 안에서 그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힌트를 준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신학자가 야고보가 11절에서 지적한 논점을 설명할 경우에는 ‘가벼운’ 계명을 ‘중요한’ 계명과 나란히 인용하곤 하였다. 이를테면 앞에서 인용한 마카비4서의 엘르아잘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작은 문제’는 ‘큰’ 계명의 불순종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11절에서 십계명 중 두 개의 계명을 인용하는데, 이 두 계명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중한’ 계명들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야고보가 10–11절에서 구약 율법의 몇 부분만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흥미로운 점은 사랑 계명이 초기 기독교에서 십계명의 두 번째 판에 기록된 ‘이웃’(fellow-man)을 위한 계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이다(마 19:18–19; 롬 13:8–10 참조). 그러므로 구약과 유대교에서 가져온 논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야고보는 그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구약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예수의 성취를 통하여 해석된 ‘왕의 법’(8절), ‘자유의 율법’(12절)이다. 마태복음 5:19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도 이러한 ‘성취’를 강조한다. 즉 율법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순종해야 한다는 예수의 요구는 그 분이 마태복음 5:17에서 선포한 율법에 대한 자신의 ‘성취’를 전제한다.
야고보가 11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인용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까? 예수는 이 살인 금지의 명령을 확대하여 분노(마 5:21–26)까지 포함시키셨으며,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라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의 관점에서 야고보가 기술한 차별의 태도가 이 계명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야고보의 독자들은 간음금지 계명과 같은 어떤 계명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을 차별함으로써 살인 금지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일리가 있고 시사적이긴 하지만, 거기에 너무 많은 무게 중심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는 이 두 계명이 단순히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란히 인용한 것일 수도 있다(마 19:18; 롬 13:9 참조).
〈12〉 10–11절은 야고보의 논의에서 일종의 삽입구(parenthesis)에 속한다. 그는 이제 8–9절에서 지적한 주요 논점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죄이며, 이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다스리는 ‘왕의 법’(최고의 법)의 시금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법 자체가 성도들의 말과 행동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야고보는 그 앞에 각각 후토스(houtōs, 그렇게)라는 상호 부사를 붙임으로써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하다’로 동사 하나 하나를 특별히 강조한다(개역개정에는 이 후토스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역자 주). 두 동사는 모두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이렇게 ‘말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헬라어에서 현재 시상은 계속, 반복의 뉘앙스를 가진다-역자 주). 12절이 일반적으로 모든 행동에 적용될 수 있지만, 야고보가 특히 사랑을 베풀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할 필요가 있음을 의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2절에서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호르트에 따르면, 이 말은 ‘자유의 율법이 그들을 심판할 기준이나 수단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들이 이를테면 자유의 율법의 분위기(atmosphere)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로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9 그러나 전치사 디아(dia, ~에 의해)를 단순히 자유의 율법의 ‘분위기’로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디아는 보통 수단의 의미(by)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의미가 12절에도 잘 어울린다. 즉 성도들의 행동이 자유의 율법이 설정한 기준에 의하여(by means of) 평가될 것이라는 것이다(유사한 용례를 가진 롬 2:12 참조). 그리스도인이 복음 안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예수는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되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에게만 상을 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25:31–46).
바울도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라고 단언한다(고후 5:10). 요한 역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서 거하고’라고 말한다(요일 3:24).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롭게 받아주신다고 해서 그 분께 순종할 우리의 의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운다. 하나님의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고 가두는 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제 자유의 율법, 즉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할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에서 흘러나오는 의무로 우리와 만나기 때문이다.
야고보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음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기록된 말씀’이다.
〈13〉 13절은 하나의 경고를 통해 12절의 권고를 보다 강화시킨다. 긍휼을 행하지(베풀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 때에 긍휼 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는 것’이 독자들이 인정해야 할 중요한 자유의 율법의 한 구체적인 측면임을 암시한다. 사실 ‘긍휼을 행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 요구하는 바요(8절), 야고보의 독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김으로써 행하지 못한 바로 그 일이다. 긍휼과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 사이의 관계는 스가랴 7:9–10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야고보의 독자들이 계속해서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엄한 심판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사람의 긍휼과 하나님의 긍휼 간의 상호관계는 예수에 의해서도 반복해서 강조되는데 특히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 6:14–15도 참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만일 긍휼을 베풀지 않아서 심각한 처벌을 받는다면, 그 반대의 경우, 즉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라는 말도 성립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니신 두 가지 속성의 상대적 가치평가에 대한 진술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논지는 하나님의 자비로 그 분의 심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긍휼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긍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긴다는 말은 그 긍휼의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호르트가 비유를 든 것처럼, “말하자면 크리시스(krisis, 심판)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고소인으로 등장하면, 엘레오스(eleos, 긍휼)는 당당히 그 앞에 서서 그 고소에 대해 변호한다.”10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는 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왕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심판을 면할 만큼 온전하지 못하다(10–11). 그러나 긍휼의 태도와 행동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로 간주된다. 또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주님과의 연합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심판 때에 자신을 변호할 확신을 가질 수 있다.
4. 구원하는 믿음(2:14–26)
4. 구원하는 믿음(2:14–26)
이 단락은 ‘참된 경건’이 행함으로 입증된다는 야고보의 논의의 절정부분이다. 이 단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신학적 주제가 전개되는 본문이기도 하다.
이 단락은 야고보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중심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19절)라는 고백과 같이 ‘믿음’을 주로 말 고백으로 간주하는 성도의 태도와 깊이 씨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요, 야고보는 이 믿음을 ‘죽은’ 믿음(17, 26절), 헛것(20절)으로 간주한다. 그런 믿음은 구원하거나(14절), 의롭게 할(24절) 능력이 없다. 야고보는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18절). 그러나 그가 가진 믿음은 ‘참된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14, 17절)이요,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 믿음이며(22절), ‘행함과 함께 일하는 믿음’(22절)이다. 그 믿음은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는 아브라함(21–23절)과 기생 라합(25절)이 보여준 믿음이다. 이 논의의 주된 논점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된 것처럼(17, 20, 26절), 행함이 믿음에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행함을 포함하는데 있다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본 논의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이 단락을 ‘디아트리베’(diatribe)라고도 불리는 ‘논쟁적인’(argumentative) 스타일로 서술한다. 야고보는 자신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가상의 반대자’를 도입하여, 그의 논의에 대한 배경으로 삼는다(18절). 그는 마치 그 가상의 반대자가 앞에 있는 것처럼(“허탄한 사람아”, 20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한다. 더 나아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판단하도록 독자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도 한다(“네가 보거니와”, 22, 24절). 이러한 디아트리베 스타일을 통해 야고보가 잘못된 믿음 개념을 선전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대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거짓 교사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바울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대결하고 있는 견해는 확실히 바울의 견해는 아니다. 적절하게 해석한다면,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 그리고 칭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서로 모순적이지 않다. 외관상 대립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이 ‘믿음’과 ‘의롭게 하다’는 핵심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두 사람의 논의가 서로 다른 오류(errors)와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14〉 야고보가 ‘긍휼을 행하는 일’과 그 일이 심판 날에 미칠 결과(12–13)를 강조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긍휼의 행위가 어떻게 심판 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결국 믿음이 아닌가?’ 야고보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기를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독자들을 겨냥한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그는 자신의 논의를 ‘오직 믿음만’(faith only)의 견해를 주장하는 한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처음에 나오는 두 개의 질문은 부정의 대답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실제로 두 번째 질문의 헬라어 구문은 부정의 대답을 전제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 또한 그런 믿음은 구원할 수도 없다.
두 번째 질문에서 믿음의 특성에 대한 강조는 매우 중요하다. 마치 야고보가 믿음이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이 부분을 KJV처럼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느냐’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헬라어 본문에는 믿음(피스티스, pistis)이라는 명사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어서, 이 믿음이 앞에서 언급한 그 믿음, 즉 어떤 한 사람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믿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야고보는 믿음이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믿음, 즉 행함이 없는 바로 그 믿음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이해하는 믿음의 개념은 바울과 그 밖의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믿음 이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1:6; 2:1, 5; 5:5 참조). 2:14–16에 나오는 ‘믿음’은 바울도 야고보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는 ‘가짜’ 믿음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이런 가짜 믿음에는 행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서 바울과 야고보의 차이를 구별하려는 사람이 있다. 한편으로 야고보는 행함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행해야만 하는 사랑과 긍휼의 행위로 사용한다(2:8–13 참조).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는데, 여기에서 율법의 행위란 특히 모세 율법의 제의 규정에 대한 율법주의적 준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이 율법의 행위란 표현을 그렇게 제한된 의미로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바울과 야고보는 ‘행함’이란 말을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다. 두 사람 간의 차이는 이 행함이 일어나는 상황의 차이이다.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행함의 어떤 가치(공로)도 인정하지 않는 반면에, 야고보는 일단 관계가 맺어진 후에 행함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점을 역설한다(본서 추가 주석2. 바울과 야고보의 ‘행함’ 참조).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다. 구원하다(소조, sōzō)는 말이 때로는 ‘회심’의 의미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통치)로 들어가는 최초의 상태를 지칭할 때가 있지만, 죄와 사망과 마지막 심판으로부터의 궁극적 구원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야고보 역시 ‘구원하다’는 동사를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21; 4:12; 5:20 참조). 바로 앞에 나온 13절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문맥에 적합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때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추가 주석2. 바울과 야고보의 ‘행함’(2:14)
칭의 문제에 관해 외관상 드러나는 바울과 야고보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두 사람이 행함(에르가, erga)이란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견해가 있어왔다. 그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칭의의 토대로서 ‘율법의 행위’만을 거부하였는데 이 행위는 구약의 제의 규정과 같은 특정한 행위 또는 ‘율법주의’ 정신으로 행해진 행위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가 요구하는 행함은 사랑의 율법을 지키는 자선(charity)의 행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사람이 행함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가 널리 인정되고 있을지라도 그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바울이 사용하는 ‘행위’ 개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 서신 중에서 로마서 9:10–11은 ‘행위’에 대한 정의를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본문이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에서 ‘행위’가 ‘선이든 악이든’ 행해진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해진다. 로마서 4장에서도 그가 자랑할 수 없다고 단언한 아브라함의 ‘행위’가 ‘선한 행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서 4장은 ‘율법의 행위’란 표현이 나오는 로마서 3:20–28의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특정한 ‘행위’, 즉 모세 율법에 따른 순종의 행위로 간주하는 경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단지 해당되는 유대적 표현 중에 두 개의 용례뿐이다(4Q Flor. 1:7의 마아세 토라 〈mā‘sē tōra〉; 참조 1QS 5:21; 6:18).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행위나 어떤 정신으로 행해진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를 칭의의 근거로서 배제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이다.11
다른 한편 야고보가 언급한 ‘행함’을 자선의 행위로만 제한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바로 앞에서 사랑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관해 언급했고, 15–16절에서 자선행위를 하나의 실례로 인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라합의 생애로부터 끌어낸 특정한 예(21–25절)는 분명히 자선의 행위와 관련이 없다. 특히 아브라함의 예의 경우 초점은 어떤 타인에 대한 자선행위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 자체에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과 야고보는 ‘행함’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섬김으로부터 나온 행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과 야고보 간의 차이는 행함과 회심의 순서(sequence)의 차이이다. 바울이 회심 이전의 행위에 대한 어떤 유효성도 인정하지 않는 반면, 야고보는 회심 이후의 행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5–16〉 14절에서 야고보가 오직 말로만의 믿음을 지닌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15–16절의 예를 통해 더 분명해진다. 그가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의 예를 드는 것을 보면, 해당되는 사람은 적어도 교회와 형식상의 관계를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 즉 충분한 옷 (헬라어 귐노스 〈gymnos〉 는 ‘벌거벗은’, ‘초라한’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종종 겉옷〈키톤, chitōn〉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과 일용할 양식이다. 본문에 나오는 ‘성도’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는 그 궁핍한 사람을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경건한 말 몇 마디만 전하고 떠나보낸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작별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인사말이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이라고 NEB 와 Phillips가 그 의미를 잘 포착하고 있다. ‘덥게 하라’(테르마이네스테, thermainesthe)와 ‘배부르게 하라’(코르타제스테, chortazesthe)는 동사는 문법상 중간태형으로도 수동태형으로도 볼 수 있다. 만일 중간태형의 경우라면, 그 ‘성도’는 궁핍에 처한 동료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필수품을 해결하도록 격려하는 셈이 된다. 즉 ‘네 힘으로 덥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NEB )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만일 수동태형의 경우라면, 이 작별의 말은 ‘당신이 덥게 되고, 배불러지기를’이라는 기도의 형태가 된다. 어떤 경우에든 요점은 동일하다. 자신의 형제와 자매 중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 이 ‘성도’는 선한 바램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것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라고 묻는다. 이 예의 문맥에서 볼 때, ‘유익’은 우선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궁핍의 상황을 의미한다.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말 자체는 이 궁핍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민한 독자라면 이 말들이 야고보가 14절에서 도입한 표현을 재현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성도’의 공허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영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
이 예화는 2:2–3에 나온 예화처럼 분명 가상의 예이다. 야고보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화에는 야고보의 실제적인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13절) 긍휼의 행위 중 하나이다. 이 점에서 야고보는 계속 반복되는 오랜 성경 전통 위에 서 있다. 이사야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드리는 종교 의식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라고 말하면서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라”고 요청한다(사 58:7–9).
그 때야 비로소 그들이 부를 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도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다(마 25:31–46). 또한 요한도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은 참된 사랑을 가진 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요일 3:17–18). 이러한 경고는 교회가 세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하나님이 행함의 자리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말로만으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여러 가지 면, 즉 설교, 기도, 신앙 고백, 현명한 조언, 격려 등에서 말은 참된 기독교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 말이 그에 상응하는 행위로 나타날 때에만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야고보는 촉구한다.
〈17〉 이제 야고보는 예화의 결론을 끌어낸다. 그 결론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자체(카트 헤아우텐, kath’ heautēn)란 말은 마이어(Mayor)가 말한 것처럼, 믿음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죽은 것’임을 암시해준다.12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그 자체로’ 유익이 없고, 전혀 작동하지 못한다(이와 같은 맥락에서 네크로스〈nekros, 죽은〉의 의미에 대해서는 롬 7:8; 히 6:1; 9:14 참조).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조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처럼(2:26 참조) 생명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 날에도 전혀 소용이 없다.
〈18〉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주입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논의로 넘어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개역개정에는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alla가 생략됨-역자 주). 이 사람이 누구이고, 그의 견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고대 사본에는 구두점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견해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어떤 사람’은 14–17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지적함으로써 야고보의 논의를 옹호하는 그의 ‘지지자’(ally) 중의 한 사람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너(예화에 나온 ‘거짓 성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행함이 있다. 그러나 너에게는 행함이 없기 때문에 너의 믿음을 내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믿음을 나의 행함으로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13 이 해석의 큰 장점은 대명사를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너’는 늘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행함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고, ‘나’는 늘 행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야고보 또는 그의 지지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견해가 지닌 최대의 약점은 18절을 시작하는 표현, 즉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을 야고보와 유사한 견해를 도입하는 구문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접속사 알라(alla)는 강조의 용법으로 ‘그래’ ‘실제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헬라 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앞에 나온 말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때 사용된다(고전 15:35과 ‘디아트리베’ 형태의 수많은 용례 참조). 더욱이 이 도입부분은 믿음이 있다는 야고보의 단언이 아닌, ‘너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라는 뉘앙스로 해석되어야 한다.
② ‘어떤 사람’은 믿음에 관한 야고보의 논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대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반대자의 말은 도입부분 후 처음 세 단어에만 해당되며 그것도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된다. “너(야고보)는 정말 믿음이 있느냐?” 야고보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행함이 있다. 너는 행함이 없으므로 나에게 너의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나는 그러한 행함으로 말미암아(by)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14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학자들 가운데는 반대자를 야고보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여, 18–19절의 모든 내용을 반대자의 말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리고 나는 행함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행함과 분리된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반면에,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나의 행함을 통해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 너(야고보)의 믿음은 악마의 믿음보다 더 낫지 못하다!” 이렇게 해석하면 야고보의 대답은 20절부터 시작된다.15 이 견해는 도입부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리고 나도 행함이 있으니’ 라는 말을 해석하기가 부자연스럽다는 약점을 가진다. 호르트는 이 부분을 적대자의 질문에 대한 야고보의 대답으로 이해하지만, 헬라어 카고(kagō, 나도)를 질문의 대답을 도입하는 용법으로 이해하기는 어색할뿐더러, 전체 구문이 너무 장황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8–19절 전체를 반대자의 이의로 해석하려는 견해는 18절의 하반부를 훨씬 더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③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견해에 비해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 견해에 따르면, 18절 상반부에 나오는 두 개의 대명사 ‘너’와 ‘나’는 어떤 특정한 논의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순히 입장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을 가리킨다. NEB 가 이 해석을 채택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여기에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 있고, 또 행함을 중시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GNB 도 참조). 이렇게 해석하면, ‘어떤 사람’은 각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은사’(gifts)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야고보의 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한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행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성령이 주권적으로 그러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말하지 않는가?(고전 12장) 또한 믿음 자체도 하나의 은사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고전 12:9; 참조 롬 12:3)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동시에 행함을 가져야 한다는 야고보의 권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의 제기에 대해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한 특정한 은사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행함은 하나의 옵션이 아니다. 행함이 있는 곳에만 구원하는 참된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약점은 18절 상반부의 ‘너’와 ‘나’가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될 수 없지만, 하반부에서는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이 견해에 따르면, 18절 하반부부터가 야고보의 대답이다-역자 주). 이러한 지적에 대해 롭스(Ropes)는 견유학파 메가라의 텔레스(Teles of Megara)로부터 이와 유사한 대명사의 의미 이동의 예를 제시한다. 결국 이 세 번째 견해가 다른 견해보다 가장 약점이 적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16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가상의 반대자를 도입한다. 믿음과 행함의 분리는 생각할 수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불가능하다. 참된 믿음은 행함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야고보가 가상의 반대자에게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나에게 보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에게 믿음에 대한 증거를 보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19〉 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야고보는 이 믿음이 지닌 본질적인 취약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 믿음을 귀신들이 가진 ‘믿음’과 비교한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2:1) 믿는다. 신명기 6:4에 나오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유대인이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한 기본 교리 셰마(Shema)의 일부였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많은 이방인의 다신론적 신앙의 틈바구니 속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고백하였다(고전 8:4–6; 갈 3:20; 엡 4:6; 딤전 2:5 참조).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가 이 고백에 ‘잘하는도다’라고 동의를 표하며 칭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동일한 이 믿음을 즉각적으로 귀신들의 믿음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이 칭찬 속에 적지 않는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고보는 또한 믿음에 대한 귀신의 반응도 아이러니하게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동사 프리쏘(phrissō, 떨다)는 몇몇 마술적 문헌에서 ‘마술사가 마법의 힘으로 가져오려고 한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MM ). 호르트는 그것이 ‘예배와는 거리가 먼 기가 죽은 무기력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떠는 것도 하나의 반응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외관상 귀신의 반응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19절에서 야고보는 여기에서 논의하고 있는 믿음이 자신과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인의 믿음 개념과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올바른 교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초기 교회의 어느 누구도 그것이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참된 믿음은 지성을 넘어 의지로 나아가야 한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믿음’(belief)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도 영향을 끼쳐야 한다. 미톤(Mitton)이 말한 것처럼, “정확한 신학을 소유하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 좋은 신학이 우리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 행함이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반응이 20절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19절에서 그는 이러한 ‘헛된’(bare) 믿음이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외에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떠는 두려움보다 더 낫지 못한 것임을 밝혀 주었다. 이제 그는 구약성경을 통해 참된 믿음이 늘 행함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은 늘 이처럼 ‘행동하는 믿음’이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옹호하는 자들을 향해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허탄한(케노스, kenos, 문자적으로는 ‘텅 빈’의 의미를 가짐)이란 형용사는 사람에게 자주 적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아마도 도덕적으로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둔 것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다(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차이를 찾기에 급급한 학자들 중에는 야고보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이도 있다!). 가상의 반대자에 대한 책망은 고대의 논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롬 2:1; 9:20도 참조). 야고보는 가상의 반대자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기노스코, ginōskō) 싶은지 묻는다(KJV에서는 열등한 이문을 받아들여, ‘헛것’이란 말 대신에 ‘죽은 것’으로 읽는다). ‘헛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그로스(agros)는 문자적으로는 ‘활동하지 않는’ 또는 ‘일하지 않는’(idle)’의 의미를 가지는데, 예수는 그 단어를 낮에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마 20:3, 6). 야고보가 여기에서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언어 유희 때문이다. 즉 행함(works)이 없는 믿음은 일하지(work) 않는다! 이런 점에서 20절은 이 단락 전체의 주요 논점을 반복하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하고(14절), ‘유익’이 없다(16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고(17, 20절), 아무 소용이 없다.
〈21〉 더 나아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의로워질’(justify) 수 없다. 이것이 21–25절의 핵심 주제인데, 야고보는 이것을 24절에서는 독자들에게 신학적으로 선언하고, 21–23절과 25절에서는 각각 아브라함과 라합의 생애를 통해 입증한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예로 든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반대자가 믿음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본문으로 이미 창세기 15:6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인 아브라함은 온갖 다양한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흔히 인용한 사람이었다. 알다시피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힘든’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놀라운 행위는 신학적이고 경건한 문헌에 특히 인기 있는 소재였다. 필로는 이러한 ‘이삭의 바침’을 아브라함의 ‘행위’ 중에 가장 위대한 행위로 부른다(On Abraham, 167). 마카비1서 2:52에서도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의 믿음(신실함)을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 15:6절의 선언과 연관시킨다. 야고보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꺼이 아들을 죽이려고 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행위’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야고보의 논의가 문제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그의 선언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by)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졌다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바울 (롬 4:1–3)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두 사람의 차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디카이오오’(dikaioō, 의롭게 하다)라는 핵심 동사가 사용된 방식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디카이오오’라는 용어는 무엇보다 ‘이신칭의’ 사상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핵심 주제로 전개한 바울과 연관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칭의 개념을 그의 신학 전체의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해서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용어를 한 사람이 최초로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거룩과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이러한 이동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로운 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일어난다. 바울에게 칭의는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죄인을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고 선언해 주신 법정적인 행위이다(롬 4:5).17
반면에 야고보가 사용하는 디카이오오의 개념은 바울과 차이를 보인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야고보가 이 용어를 입증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라합이 ‘행함으로 의로워졌다’는 말은 그들이 선행을 행함으로써 그들의 의로운 신분을 입증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 견해가 옳다면, 바울이 믿음을 의의 선언(declaration)의 유일한 조건으로 강조하는 반면에, 야고보는 행함을 그 의로운 신분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갈등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카이오오가 이런 의미로 사용된 선례가 몇 개 있긴 하지만(창 44:16; 눅 7:29, 35, 그리고 슈렝크 〈G. Schrenk〉, TDNT , 2, 213–214 참조), 그것은 이 동사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입증의 의미가 야고보서 2장에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야고보서 2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어떤 믿음이 의를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동사 디카이오오를 선언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가 바울과 다른 점은 그 동사를 믿음으로 최초로 의를 확보한다는 의미 보다는 한 사람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언에 적용시킨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는 바울이 심판에 대해 말하는 지점에서, ‘의롭게 하다’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Wesley)의 표현에 따르면, 이른바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의 구분을 통해 바울과 야고보 간의 외관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18
디카이오오가 이런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구약성경과 유대교,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풍부하게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디카이오오(히브리어로 차다크 〈ṣādaq〉)는 보통 ‘의’ 또는 ‘계약상의 신실함(loyalty)’이 입증된 후에 내리는 무죄판결을 의미한다(본서 추가 주석3.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의 ‘칭의’ 부분 참조). 이러한 판결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심판과 연관된다.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도 디카이오오의 이런 의미가 분명하게 발견된다. 그 분은 청중들에게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마 12:37). 야고보가 빈번하게 예수의 가르침-특히 마태복음에 나타난-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이런 해석의 타당성을 보다 더 강화시켜준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칭의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중요한 근거로는 RSV 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when) 의로워졌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과거 분사 아네넹카스(anenegkas)는 단순히 ‘제물로 바친 후’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고,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드린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브라함이 ‘마지막 칭의’를 얻는 데 기여한 여러 행위들 중의 하나임을 뜻한다.
우리가 야고보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했고, 이러한 행함(works)이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고 이 믿음이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인 근거(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22–23절).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받아들여진 사람의 삶은 선한 행위를 통해 그 관계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집중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들 이전의 상태이다. 바울은 사람이 오직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반면에 야고보는 하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함을 요구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가 주석3.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의 ‘칭의’(2:21)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는 70인역에 40번 정도 나온다. 히브리어 원본에는 28번 중에 22번이 히브리어 동사 차다크(ṣādaq)의 형태와 연관된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법정’과 관련되어 재판관이 내린 무죄 판결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차다크가 법정적 배경 없이 사용될 때도 많지만, 그 동사의 법정적 의미는 남아있다(창 38:26; 44:16; 렘 3:11; 겔 16:51–52). 하나님은 매우 자주 인간의 소송을 재판하시고(삼상 12:7; 사 43:26; 미 7:9), 남녀의 삶을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판결이 보통 실제 행동에 따라 내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가서 6:11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저울’로 속인 자를 죄 없다(디카이오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또 열왕기상 8:31–32에서도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디카이오쉬넨, dikaiosynēn)를 의롭다 하사(디카이오사이, dikaiōsai) 그 의로운 바(디카이오쉬넨, dikaiosynēn)대로 갚으시옵소서.” 이 경우에 의는 죄가 없는 행위가 아니라, 계약에 대한 신실한(충실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계약에 표기된 기준을 따르는 자들을 무죄하다고 선언하신다. 이와 함께 또한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무죄판결(acquittal)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이 점에서 칭의가 지닌 전적인 은혜의 특성을 강조하는 바울의 선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롬 3:20과 갈 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전반적으로 사실에 근거하여, 즉 일반적인 문제나 특정한 문제에 대해 정당하고, 결백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전반적인 주제이다.19 이러한 의의 선언이 마지막 심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 43:9; 45:25; 50:8; 하지만 사53:11은 미묘하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의’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의’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올바른 행위와 연관되었고, 의의 판결은 계약 규정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들에게 선언되었다.20 마태복음이 이러한 유대적 용례를 반영한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에 대한 헌신, 즉 예수를 따르는 것에 달려있지만, ‘의’는 배타적이지는 않으나 제자들에게 기대된 행위를 의미하고(5:20), 디카이오오는 최후의 심판에 적용된다. 그 때에는 ‘행위’, 즉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고려될 것이다(마 12:37).
〈22〉 야고보는 계속해서 18절의 ‘반대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였다고 단언한다. 21절의 내용이 마치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행함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면, 22절에는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 즉 ‘헛되지’(20절) 않은 믿음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창세기 15:6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아브라함의 삶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측면이 바로 이런 행함의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의 행위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의 독자들 중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이 믿음을 어느 특정한 유대교 전통에 따라 우상을 떠나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21 그러나 물론 이런 (종류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19절)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야고보는 또 하나의 언어 유희를 사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한다. 즉 믿음이 그의 행함(에르고이스, ergois)과 ‘함께 일한다’(쉰에르게이, synergei).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하는’(working) 믿음, 활동하는(active) 믿음, 즉 그의 행함의 출처(source)가 아닌, 영원한 파트너(동반자)로서의 믿음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함이 끝없이 협력하는 관계라는 점은 헬라어에서 계속 또는 반복되는 행위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동사의 미완료 시제를 통해 강조된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어떤 특정한 때에만 행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이 행함을 자극했고, 이끌었으며 협력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함 역시 한 일이 있다. 그의 행함이 그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텔레이오오(teleioō)는 ‘온전하게 하다’ 또는 ‘성숙하게 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 시련을 신실하게 인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처럼(1:3–4), 믿음의 ‘온전함’은 순종이라는 계속되는 행함을 통해 얻어진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계속되는 여러 ‘시험’(시련)에 의해 강해지고 성숙되었으며 깊어졌다. 야고보가 의미하는 바는 믿음이 행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거나(예를 들어 죽어가는 사람은 행함을 수반하지 않고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믿음이 단순히 행함을 통하여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행함은 구원하는 참된 믿음의 필수불가결한 산물이기에 믿음 자체를 ‘성숙’(maturity)하게 한다는 것이다.22 내가 쇠망치로 유리 탁자를 내리칠 때 그 탁자는 산산조각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산산조각 난 것 자체가 쇠망치를 휘두른 행위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후자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결정적인 ‘동작’(action)이다. 하지만 그 ‘동작’은 그것이 일어난 증거 즉 행함(works)을 남긴다. 믿음을 행함과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마찬가지로 믿음을 행함과 분리시킬 수도 없다.
〈23〉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의를 얻었고,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에 대해 논의할 때 줄곧 배후에 있었던 창세기 15:6이 이제 명시적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순종한 결과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한 것은 창세기 15:6은 예언의 말씀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구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셨다’ 또는 ‘여기셨다’고 분명하게 단언한다. 이 문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특히 아들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또 ‘의’는 법정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이 그를 자기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마 본래 의미였을 것이다.23 그렇다면 이러한 선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는 ‘이루다’라는 뜻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채우다’ 또는 ‘가득 채우다’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물(마 13:48)과 집(요 12:3)과 함께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전형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이 예수의 오심을 통하여 채워지거나 성취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는 예언 성취의 맥락에서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인 의의를 밝혀준다거나(마 2:15), 또는 구약 율법에 대한 최절정의 해석과 적용(마 5:17)을 가리키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가 창세기 15:6의 내용을 나중에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루어진’ 어떤 예언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구절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에서 그 궁극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올바른 관계 회복의 지위를 주셨다. 이 일은 그가 어떤 행함을 보이기 전, 할례 받기 전에 일어났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롬 4:1–17).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무죄 판결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의 천사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는 하나님의 판결을 재 언명했을 때, ‘가득 채워지고’(fill up), 그 궁극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드리기 훨씬 전에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 것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살아서 활동하는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판결이 그 행함을 통해 재확인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믿음에 토대를 둔 최초의 의의 선언이 ‘행하는 믿음’에 토대를 둔 의의 마지막 선언을 통하여 그 궁극적인 의미와 타당성을 얻게 된다. 바울은 창세기 15:6의 연대기적 위치에 초점을 두고,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최초의 의의 선언의 증거로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반면에 야고보는 동일한 구절을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지배했던 ‘모토’로서 인용하여,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에 적용시킨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행하는 믿음의 두 번째 결과를 언급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RSV 는 이 말을 창세기 15:6의 인용문과 분리시켜, 그것이 구약성경의 두 번째 본문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 말이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두 부분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고(대하 20:7; 사 41:8; 참조 사 51:2과 단 3:35 〈70인역〉, 또한 JB 도 참조), 그 호칭은 중간기 문헌에서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인기 있는 호칭이 되었다.24 야고보는 그 호칭을 인용하여 깊은 믿음과 실제적 순종으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24〉 야고보는 이제 독자들을 향해 직접 말을 건네(헬라어 본문에는 ‘너희가 보건대’〈호라테, hōrate〉로 표현됨-역자 주), 아브라함의 삶에서 끌어낸 신학적인 원칙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명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 있는 긴장의 최고조에 달한다. 바울은 이 구절과 거의 반대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14절과 21절의 주석에서 우리는 이미 중요한 점을 지적했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우리는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믿음만’이 전반적으로 다른 개념임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의 역동적인 개념에 주목하여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라는 개념 속에는 그 주님에 대한 순종의 헌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의 순종’(롬 1:5)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그리스도에게 효력이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에게 믿음은 순종의 헌신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믿음은 예수야 말로 믿음의 참된 내용이시며 구원과 의를 주시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롬 10:9–10).25 반면에 야고보의 믿음 개념은 이러한 바울의 이해와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그가 14–26절 전체에서 사용한 믿음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이다(14절). 이 ‘믿음’은 행함이 없는 말 뿐인 믿음이고(15–16절), 신뢰와 헌신이 결여된 말 고백(18–19절)에 불과하다. 야고보가 24절에서 ‘믿음으로만’이라고 표현한 믿음은 이처럼 죽은 믿음이고 헛된 믿음이다. 설령 바울이라도 이런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책망하는데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사람이 행함으로 의로워진다’고 말하는 바울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로마서 4:2–8(롬 9:10–12도 참조)이 보여주는 것처럼, 바울은 ‘행함’을 칭의의 토대로 삼는 것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바울이 칭의를 성도들이 최초로 얻는 의로운 지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는 이와 다르게 디카이오오를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결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하나님과의 최초의 관계가 오직 믿음에 기초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면(바울), 그 관계의 궁극적인 인정은 참된 믿음이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행함을 고려해야한다(야고보). 칼빈의 표현에 따르면, “…바울이 우리가 행함의 도움 없이 의로워진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결여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26 야고보가 ‘믿음’에 덧붙인 ‘만’이라는 짧은 말이 차이를 가져오는데, 그 말을 통해 믿음을 칭의 과정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야고보의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믿음, 이른바 ‘값싼 믿음’을 목도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야고보는 믿음의 행동하는 특성을 밝혀 결국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해야만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바울이 상대한 유대주의자들(예수에 대한 믿음 외에도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조한 유대-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함을 하나님의 계약 안에 머물기 위한 충분한 토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에 반대하여 바울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계약은 사실상 깨어졌고,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구원을 위해 종교적 활동에 의존할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전인적 헌신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호소가 강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어떤 교리에 대한 말뿐인 고백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할 때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순종으로 이해하는 야고보의 호소가 강력하게 재 언명되어야 한다.27
〈25〉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논점을 놓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예를 든다. 혹자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그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그런 행위였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합의 경우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라합은 믿음을 가질 만한 근거가 희박하였지만 그 여인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 2:11)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었다. 이 ‘믿음’에 기초하여 그 여인은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하였다. 야고보가 라합의 믿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논의의 문맥으로 볼 때 그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 11:31에서 그녀를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야고보의 요점은 21절의 내용과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한 사람이 행함을 통하여 보여준 실제적인 의를 고려한다는 것이다. 동사 접대하다(휘포덱사메네, hypodexamenē)와 나가게 하다(에크발루사, ekbalousa)는 둘 다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그 행위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결의 토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왜 야고보는 라합을 행함을 고려한 칭의의 한 예로 선택하였을까? 아마도 그는 클레멘트1서 10, 12의 경우처럼, 아브라함과 라합이 나란히 등장하는 전승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클레멘트1서의 본문에는 아브라함과 라합이 ‘믿음과 접대’의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것처럼 세 ‘사람’에게 베푼 접대를 말하는데, 이 사건은 유대전승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이었다.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인용한 이유를 이러한 접대 모티브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베푼 행위가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없는 바로 그 행위라는 것이다(15–16).28 그러나 이 견해의 가장 큰 취약점은 야고보가 창세기 18장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브라함과 라합이 나란히 언급된 이유를 두 사람 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행동한 개종자(converts)였을 가능성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라합을 기생(harlot)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라합의 차이이다. 널리 알려진 영웅이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평판이 좋지 않은 이방 여인과 나란히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명망 있는 족장과 보잘 것 없는 기생 두 사람 다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함에 기초하여 의롭다고 선언된다.
〈2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핵심 주제를 다시 언급함으로써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생기를 주는 영 또는 생명의 ‘호흡’(창 2:7 참조)이 없는 몸이 시체에 불과한 것 같이, 믿음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야고보의 의도가 ‘믿음’에 행함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믿음, 즉 ‘행하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기독교는 헛된 정통이 되고, 믿음이라고 불릴 어떤 권리도 상실하고 만다. 약간 역설적인 일이긴 하지만 야고보서 2:14–26의 기본 메시지를 루터보다 강력하게 포착한 사람은 없다. 그는 그의 로마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 살아있고 분주하게 일하는 강력한 이 믿음이여. 그것이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질문 전에 믿음은 이미 선행을 베풀었고, 계속해서 베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행함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신자이다. 그는 믿음과 선행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도 행함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한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이다.1
1 1 이와 다른 문맥상의 연결은 C. B. Amphoux(“Une relecture du chapître I de l’Epître Jacques”, Biblica 59, 1978, 554–561)이 제안하는데, 그는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표현이 시험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라는 권고(13절)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맥은 거리가 너무 멀다.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2 2 이 해석은 벧전 2:2의 ‘순전하고 신령한 젖’(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to logikon adolon gala)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KJV역 ‘말씀의 순전한 젖’(sincere milk of the word)과 J. N. D. Kelly, A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eter and Jude 〈Harper & Row, 1969〉, 85의 논의 참조).
NIV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3 3 엠퓌토스(emphytos)의 이런 의미에서 대해서는 Herodotus 9:94, Epistle of Barnabas 1:2; 9:9(복음을 언급하는 경우), 그리고 애덤슨(Adamson)의 주석, 98–100을 보라.
4 4 Calvin, Institutes, I.6.1.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NIV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GNB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5 5 Calvin, 299.
6 6 R. B. Ward, “Partiality in the Assembly; James 2:2–4”, HTR 62, 1969, 87–97. 그는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와 의복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랍비들의 진술을 토대로 그 모임을 재판모임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4절의 ‘판단하다’라는 말 또한 이 견해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7 7 Hermas, Mandate 11.9에서 쉬나고게는 ‘그리스도인들 혹은 의인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NASB NASB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8 8 민 20:17의 ‘왕의 대로’를 풍유적(allegorizing)으로 해석하면서, Philo는 하나님께 가는 길과 그의 말씀을 빈번히 ‘왕의 길’이라고 부른다(예컨대, The Posterity of Cain, 102; The Unchangeableness of God, 144, 145 참조).
9 9 Hort, 56.
10 10 Hort, 57.
11 11 이 문제에 관해 D. J. Moo, “Law, Works of the Law and Legalism in Paul” WTJ, 1983, 73–100. 펠라기우스(Pelagius)가 롬 3:28의 ‘율법의 행위’를 제의법(ceremonial law)으로 제한하려고 했다는 점을 관찰한 후 O. Weber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롬3:28의 율법의 행위를 제의법에만 한정함으로써 ‘도덕적 행위로 인해 얻는 의라는 문’이 넓게 열려버렸다. 이러한 ‘믿음’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십자가에 대한 ‘오직 믿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Christian Dogmatics, 2 〈Eerdmans, 1983〉, 311).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12 12 Mayor, 99. 요세푸스(Josephus)는 그 자체(by itself)라는 말을 율법의 ‘고유한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그러한 가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Contra Apionem 2.284). 이러한 유사성은 그 말이 ‘그 자체(자신)만’(by itself along)’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행 28:16 참조)보다 야고보의 의도에 더 가깝다.
13 13 Mayor, 99–10; Adamson, 124–125, 135–137; Mussner, 136–138.
14 14 Hort, 60–61.
15 15 C. E. Donker, “Der Verfasser der Jak. und sein Gegner. Zum Problem der Einwandes in Jak. 2:18–19”, ZNW, 72, 1981, 227–240; Z. C. Hodges는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문(variant reading)을 지지한다(“Light on James Two from Textual Criticism”. BibSac 120, 1963, 341–350).
NEB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GNB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16 16 약간 주저하긴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채택한다(특히 Ropes, 208–214 참조).
MM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New Testament (Hodder & Stoughton, 1914–29; Eerdmans, 1930).
17 17 이와 연관된 전반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특히 L.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Inter-Varsity Press, 1955), 251–298; 동일저자, The Atonement: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nter-Varsity Press, 1983), 177–202).
TDNT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ited by G. Kittel and G. Friedrich, trans, by G. W. Bromiley. 10 vols. (Eerdmans, 1964–76).
18 18 1744년의 회의록(J. Wesley, Works, VIII, 277).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19 19 J. A. Ziesler, The Meaning of Righteousness in Paul: A Linguistic and Theological Inqui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18.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의의 개념에 관한 Ziesler의 논의는 특별히 유용하다(17–127을 보라).
20 20 B. Pryzybylski, Righteousness in Matthew and His World of Though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37–76.
21 21 예를 들어 Philo, The Virtues, 216; Josephus, Antiquities, I. 154–157; Jubilees 11–12; Davids, 128–129 참조.
22 22 야고보가 사용한 어휘와 유사한 부분은 Philo, On Husbandry, 42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필로는 야곱이 ‘훈련의 결과로 온전해진 사람’(텔레이오텐티 엑스 아스케세오스〈teleiōthenti ex askeseōs; Confusion of Tongues, 181도 유사하다〉이었다고 말한다.
23 23 L.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263; The Atonement, 187 참조.
RSV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JB JB The Jerusalem Bible, 1966.
24 24 Philo, On Sobriety, 5b; On Abraham, 273; Jubilees 19:9 참조.
25 25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G. Eichholz, Glaube und Werke bei Paulus und Jakobus (Kaiser, 1961), 24–37을 보라.
26 26 Calvin, Institutes, III. xxvii. 12.
27 27 아마도 Luther가 다른 시대에 살았다면, 틀림없이 야고보의 메시지를 훨씬 더 강조했을 것이다. 행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상황에서 그는 바울의 믿음에 대한 메시지를 고수함으로써 균형을 잡고자 노력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D. O. Via, “The Right Strawy Epistle Reconsidered: A Study in Biblical Ethics and Hermeneutic”, JR 49, 1968, 253–267; J. Reumann, Righteousness in the New Testament (Fortress, 1982, 156–157; Dibelius, 179–180을 보라.
28 28 특히 R. B. Ward, “The Works of Abraham: James 2:14–26”, HTR 61, 1968, 283–290을 보라.
1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5–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