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5 SEEIT 청년선교사연합예배 (마10:34-39)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가 살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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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서론
서론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ㅁ 전쟁과 평화
- 싸우는 것보다는 안싸우는게 평화적이다
- 안싸우는 것보다는 싸우는게 해결적이다
ㅁ 영상
ㅁ 인생을 따르는 사람들
- 인생의 목적을 따른다
ㅁ 성경을 따르는 사람들
- 성경의 목적을 따른다
ㅁ SVM 운동
미국사회와 교회는 참혹했던 남북전쟁 이후, 19세기 말경에 이르게 되면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 속에 놓여지게 된다. 미국사회 전역에 불어닥친 산업화의 열풍은 수많은 사람들을 도시로 몰려들게 했고, 이 러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정통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는 이론들이 등장하 면서 미국교회는 급격하게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문화에 물들어 버린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미국교회는 도덕성의 혼란, 비인간적 산업 관계, 빈부의 격차, 기독교 가치의 신념 약화 등 도시화, 산업화, 세속화가 낳 은 수많은 문제들에 맞닥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끔찍한 남북전쟁 이후, 미 국인들은 더욱 영적, 내면적으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서 미국교회가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다. 1) 개인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사회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면서 미국사회의 구조변화를 보다 더 강조한 ‘사회복음운동’과 2) 다른 하나는 종교적 회심이 개인 생활의 변화를 낳고, 그렇게 변화된 개인들이 사회개혁의 근간이 된다고 강조한 ‘복음주의운동’이었다.
본론
본론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ㅁ 우리가 살릴 세계가 원하는 것: 화평(전쟁)
ㅁ 우리가 사는 세계가 원하는 것: 사랑(십자가)
예수님의 선교의 메시아적 특성을 인식한 사람은 누구든지 이사야 9:5–7, 스가랴 9:9–10 등에 근거해서 ‘메시아가 세상에 화평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적절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2:14이 선포하듯이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리고 마10:13 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그의 제자들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메시아가 가져오는 평화란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평화’라 부르며 숭고하게 그 의미를 고취시킨다). 평화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화를 가져옴에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검이라는 것은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마10:35-36 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연대마저도 끊을 수 있는 날카로운 사회적 분리를 말한다(참조, 눅 2:35; 22:36; ‘검’에 대한 비유적인 의미. 눅 12:51 에 있는 평행 본문에는 ‘검’이라는 단어 대신 ‘분쟁’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그러나 전후 본문이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반응에 있어서 더욱 더 많은 분쟁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평화의 왕을 따르는 것에는 항상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이 절들은 미가 7:6 을 풀어서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마10:21 에서 암시되고 있다(그곳의 주석을 보라). 그러나 미가에서는 사회적 분열에 관한 일반적인 예언이었던 것이 그리고 마10:21 에서는 종교적 박해에 적용되었던 것이 이제는 예수님 자신의 선교의 직접적인(그리고 의도적인) 결과로서 제시되고 있다. ‘불화하게 하다’(set against)라는 동사가 암시하듯이 예수님은 가족관계를 망쳐놓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의 사명에 반응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배척하는 사람들 사이에 안타깝기는 하지만 필연적인 구분을 야기시킨다. 세대를 지나가며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제 5계명에 대한 사랑과 순종에도 불구하고 마10:37 에 반영된 선택과 가족 사이의 결과적인 분열의 가능성은 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예수님이 가족들 사이에서 촉발시킨 분열 때문에(마10:34–36 ), 진정한 제자도는 충성심에 대한 충돌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보다도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다(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필레오[phileo]인데 이것은 자연적인 애정을 말한다. 아가파오[agapao], 즉 그리스도인의 특성인 헌신된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쓰이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족을 떠나야만 할 수도 있다(마19:29). 누가복음 14:26 에 등장하는 평행본문은 가족에 대한 ‘증오’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본문은 관용어구 표현으로서(참조, 창 29:31; 신 21:15; 말 1:2–3) 가족에 대한 실제적 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심의 우선순위 혹은 선택의 우선순위를 나타내고 있는 어구를 적절하게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는 태도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요구와 가족의 요구가 충돌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경우에 예수님을 우선순위로 먼저 기꺼이 놓으려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선생의 요구들은 아버지의 요구들 보다도 우선한다(미쉬나 BM 2:11).
ㅁ 우리가 사는 세계
D. L. 무디(Dwight L. Moody)는 바로 이 복음주의운동의 중심에 서있었으며, 그는 죄로 인해 철저히 부패되고 타락한 영혼과 그의 삶을 회복시키는 길은 오직 복음의 진리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한 영혼의 회복’을 매우 중요시한 다는 점이다. 무디는 19세기 말 대중집회의 새로운 장을 연 부흥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평생을 대규모 부흥집회의 설교자로서 사역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한 개인의 변화가 전체 사회의 변화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한 복음주 의자였다. 그의 설교의 목적은 분명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지 않 으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극단적이고 절박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설교 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도 관심 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영혼의 회복’을 이끌어낼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성경의 진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디가 사역할 당시 미국교회는 유 럽에서부터 불어닥친 고등비평과 진화론 등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며, 이로 인해 성경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며,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퍼 진 진보주의, 낙관주의의 시각을 성경적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자연히 죄인으로 가득찬 이 세상도 악할 뿐이 라고 보았다. 그는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점점 더 선해지고 좋아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 땅이 점점 더 악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설교했다. 그래서 그는 한 영혼을 회복시키 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 기독교 교육에 헌신한다.
ㅇ 해결방법
ㅇ 해결방법
ㅇ 나타난 결과
ㅇ 나타난 결과
결론
결론
ㅇ 핵심내용 정리
ㅇ 핵심내용 정리
ㅇ 결단할 내용
ㅇ 결단할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