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열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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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량 미달의 사도
함량 미달의 사도
1995년 11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당했다. 라빈은 과거 오슬로 협정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평화로 나아갈 약정을 만들어냈다. 사실 암살이 있기 한 해 전, 그는 그의 정치 라이벌인 시몬 페트레스, 팔레스타인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라빈은 노벨상 수상 이후에 요르단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것이 암살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이 모든 평화 협정이 지나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라반의 행동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안전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강경파에 속한 이갈 아미르라는 학생에게 암살당했다.
이스라엘 뉴스 매체는 라빈을 암살한 이갈을 ‘법학도'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법학도라는 의미가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의 법학도가 아니었다. 법정에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이가 아니었다. 그는 열심을 품은 토라 학생이었다.
그는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이 한 행동을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대 율법을 따라 했으므로 당당하다고 말했다. 유대인으로서 토라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총리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 셈이다. 왜냐면 강경파 입장에서는 토라를 수호하지 않으면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면 그는 지도자일 수 없다. 라빈을 암살한 이갈은 지금도 사형수로서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자신이 한 행동을 범죄로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있다. 21세기임에도 1세기 바리새파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그 열심을 가진 유대인의 눈에 보기에 라빈 총리는 유대인이 아닌 배도자일 뿐일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임에도,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당했다. 고발 장소는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었다. 갈라디아 지방에 들어온 어떤 교사들은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다른 복음을 전한 이유는 간단했다. 거짓 교사들 생각엔 바울이 함량 미달의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이 복음의 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예수의 의 하나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구원을 받은 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 유대인 중심의 율법을 설파하는 자들의 메시지는 꽤 효과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신속하게 버렸다. 대신에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을 따라기 시작했다. 이제 바울의 입장에서는 변증해야 했다. 그 내용이 바로 갈 1장, 2장의 내용이다.
오늘 이 본문을 살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참 그리스도인인가? 누가 복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인가? 당신은 복음을 소유했으며 구원을 확신하는가?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질문이다. 따로는 다른 교파를 공격할 목적으로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받다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보다는 과연 난 그리스도인인가? 그렇게 사는가? 와 같은 질문에 휩싸인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처럼 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예배 드리는 것 빼고 무엇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가? 이렇게 신앙을 해야 할까? 복음에 대한 질문은 내 현실을 마주할 때 그칠 줄을 모른다.
이럴 때 해야 할 일은 복음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 아닐까? 갈라디아 인들도 사실 거짓 교사들과 바울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때를 보내고 있다. 과연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복음 답게 사는 것인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의 은혜가 내 삶에 변화라는 약효를 나타내지 못하면 어떻할까? 등과 같은 질문에 그들도 섰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단순히 복음을 확인하는 이상의 수준으로 읽어내야 한다. 언제든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문제들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면밀히 살펴보자. 도대체 다른 복음을 말하는 이들은 바울의 복음 어디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복음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살펴보면 다른 편지서들과 확연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인 디모데가,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1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다른 편지 첫 시작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구성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또한 편지하노니 라는 말을 통해 당시 일반적인 형식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라. 구성원에 대한 묘사, 곧 신실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등과 같은 내용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갈라디아 구성원들이 신실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도 있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편지하노니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곧바로 본론 내용을 쓰고 있다. 굉장히 단도직입적이다. 그러니까 해야 할 말이 분명하고 급하다. 그리고 1절을 보라. 나는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되었다 라고 말한다. 곧 자신의 문제에 대해 변증하면서 시작한다. 바울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난 하나님이 부르셔서 임명한 사도입니다.”
이렇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공격하지 않고 바울을 공격했다. 바울을 공격하되 ‘그가 사도가 아니다’라고 공격하지 않았다. 10절 본문을 읽으면서 1절에서 바울이 사람이 세운 사도가 아니다 라고 변증하는 내용을 함께 생객하보면 “바울은 사도이기는 한데, 사람이 세운 사도"라고 말한 것이다. 아주 교묘한 주장이다. 그러니까 함량 미달의 사도다. 유대파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율법을 배제했고, 12사도에게도 속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사람에게서 세워진 사람. 그래서 그의 메시지, 곧 복음도 함량 미달이다. 부족한 그 복음이 아닌 우리 복음을 따르라! 라고 주장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 그의 사도권을 지켜야 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위를 세우는 목적이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사도권이 확실하다면, 복음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절 이후 17절까지 자신이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자전적 고백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그럼 이들이 말한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
4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해도,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을 잘도 용납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잘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서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잘도 받아들입니다.
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 곧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면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복음에 꼭 더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어쩌면 예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과 전통이 복음의 진수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다른 복음, 이 소식을 들은 갈라디아 교회는 신속하게 다른 복음을 쫓아 떠났다. 이 떠난다 라는 표현은 메타티테스타이, 이탈하다, 탈영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과정이 교회라는 새롭게 태어난 공동체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다. 그런데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이탈했다. 다른 복음을 좇아 진영을 벗어나 버렸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결국 다른 복음은 복음에다가 알파를 더한 것이다. 그 알파에 십일조가 들어갈 수도 있다. 유대 정결법, 제사법이 대입될 수도 있다. 혹은 할례. 오늘날 어쩌면 안식일, 다른 교회들이 준수하는 주일이 들어갈 수도 있다. 정말로 구원에 예수님의 의 외에 이런 것들이 필요할까?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 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정로 18
확실히 복음은 예수님의 의, 그분의 은혜 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어떤 것들이 필요치 않다.
사실, 재림 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차별적인 가르침은 안식일이나 재림 사상 도는 영혼멸절론 등이 아니라 균형 잡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중략) 어떤 의미에서 엘렌 화잇 70년 봉사 기간에 줄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구원의 교리를 균형지게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성경신학자료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재림교회의 시각 제한 없는 구원 중에서
구원은 결단코 예수님의 은혜다. 이것은 단순히 사법적으로 칭의, 곧 의롭다는 선고가 내렸다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선고가 끝났으니, 남은 삶은 예수님의 완전한 생애를 내가 살아내야 하는 생애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곧 부절제한 자유주의에 빠지도록 길을 여는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의다. 그분의 의가 있기에 앞으로의 삶과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사다. 은혜와 평화. 이 표현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의 은혜다. 그리고 복음의 결과, 곧 삶으로 나타난 신앙의 이치는 평화다.
이방인들은 일상이 사계절에 맞춰, 혹은 아무 리듬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복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을 기억하여 지킨다. 지켜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께서 하나님의 리듬으로 삶을 살아내도록 요청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식일을 통해 나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맞춰지는 미래의 그때, 재림을 기억한다.
할례, 비록 지금 우리는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 위생의 문제로 포경수술은 존재한다. 그러기에 할례를 지킬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할례가 가진 의미를 재해석 해보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성경시대 다른 민족들에게 성은 그저 장난스럽고, 쾌락을 추구하면 그만인 도구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할례는 오래된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역시 할례를 행해야 하지 않을까?
16 그러므로 당신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고,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4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너희는 나 주가 원하는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너희를 태울 것이니, 아무도 끌 수 없을 것이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의 오래된 약속을 상기했다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킬 수 있는 리츄얼, 반복적인 나만의 의식 등을 만든다든지.. 고민하고 실천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복음과 재림교회 교리들은 특별히 그 관계가 역동적이다. 미리 이야기하면 재림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은 단순히 사법적 허구로서의 칭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한 신나의 삶에 열매와 효력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른 복음을 주장하며 사도권을 공격한 이들에게 바울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복음에는 열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열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1장과 2장을 통해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 꽤 자세한 설명을 통해 자신을 부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임을 밝히고 있다.
13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적에 한 행위가 어떠하였는가를, 여러분이 이미 들은 줄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또 아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유대교에 소속된 사람이이었다.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그는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낸 사람이다. 여기서 우선 이 시대 배경과 본문의 배경을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바로 유대교, 열심이다. 먼저 유대교. 유대교는 현시대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일개 종교가 아니다. 유대교는 조상때부터의 삶의 방식을 수호하고, 토라의 전통을 다른 유대인들에게 권면하고, 유대인들이 전통을 버리고 타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막는 것이다. 곧 유대교는 민족의 정체성, 정신과 같이 더 넓고 포괄적인 의미다.
그러니까 바울은 옛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심, 토라를 잘 알고 지키려는 열심 등과 같이 말이다. 아마도 그는 어릴적부터 성경을 읽었을 것이다. 동시대의 친구들보다 어쩌면 천재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토라의 내용을 남김없이 섭렵하여 마치 모세의 법을 마치 손바닥보다 훤히 그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소 지방 출신의 디아스포라였지만 가말리엘 수하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이제 유대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구약에 기록된 유대 역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신실했을 때 성공했다. 비록 섬광처럼 짧은 시기이지만, 어쩌면 그런 시대를 지속해야 한다는 비전을 품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불성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많은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면서 14절에 인상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바로 열심이다. 일반적으로 열심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깊이 마음을 기울이는 것,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자세, 태도를 뜻한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열심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도 실패로 얼룩진 이스라엘 역사를 마주하게 된 바울, 특별히 1세기에 로마 제국에게 치욕을 당하고 있을 그때에 구약의 열심이라는 표현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6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 어귀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한 남자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한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7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서 나와, 창을 들고, 8 그 두 남녀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의 배를 꿰뚫으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그쳤다.
이 역사는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모압 땅에 왔을 때 발락은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쫓아내거나 망하도록 발람을 청해 저주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바람이 매번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 때 모압 여자들을 일거에 이스라엘 진영에 들여보내보라고 했다. 그러면 그들은 필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음행을 일삼고, 우상을 숭배해서 무너질 것이라고 전했다.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다. 이들의 십계명에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것과 한 아내만을 두어야 한다는 약속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과연 이스라엘은 모압여자들로 인해 음행하고 음란한 제사를 모압의 잡신들에게 바쳤다.
그런데 민수기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 한 남자가 모세와 모든 회중이 보는 앞에서 모압 여자를 데리고 자기 천막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본 제사장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두 사람이 있는 천막에 쳐들어갔다. 엉겨붙어 있던 두 남녀 배를 창으로 꿰어 죽이자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그쳤고, 모압여인들과 음행하던 일도 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질투. 질투심. 모두 열심과 같은 단어 젤레테스. 심지어 그의 열심은 살인을 했음에도 의로 여겼고,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게 된다. 바로 이 사건이 열심의 단어 의미를 결정한 순간이었다.
30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심판을 집행하니, 재앙이 그쳤습니다. 31 이 일은 대대로 길이길이 비느하스의 의로 인정되었습니다.
열심이 바로 하나님과 비느하스를 결코 깰 수 없는 언약의 관계로 만들게 된 것이다. 어린 사울은 어떤 식으로든 이 글귀를 알았을 것이다. 비느하스만이 열심을 대변하는 역할 모델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인물 하나를 열왕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엘리야이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황금 시대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지난 뒤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의 풍요와 다신의 신으로 삼기는 바알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모압의 신들도 자연스럽게 예배 받게 되었다.
엘리야는 모두가 우상숭배에 순응하던 그때에 일어난 사람이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00 여명과 대결했다. 이번에도 위대한 열심에 위대한 승리가 따랐다. 이런 내용은 옛적 기억거리들로 기념만 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은 사울처럼 새 시대에게 새로운 도전에 응하라고 요구한다. 사도 바울이 회심 이전에 보였던 열심을 언급했다면 우리는 비느하스와 엘리야 이야기를 듣는다.
비느하스와 엘리야를 함께 묶어서 생각해 보면, 바울이 나중에 고백한 일 곧 그가 폭력을 쓰면서까지 열심을 보였던 허다한 사례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급진적인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15 그러나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16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14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7 나의 친척이며 한 때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비느하스와 엘리야를 좇아 폭력도 불사했던 열심이 남달랐던 바울.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 일이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인도하신 섭리 안에 있었던 일이다.
그의 친척이 먼저 믿었다. 같은 가족 환경에서 다른 신앙을 선택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에 대한 열심으로 이를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연을 끊고, 그들을 죽지 않도록 찾지 않는 것이 최후의 배려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드디어 회심했다.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회심 직후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다녀왔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면 아라비아로 왜 갔을까?
사울은 조상들의 전통에 극도로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물려받은 전승 안에서 열심을 두드러지게 보였던 옛적의 두 영웅, 곧 비느하사와 엘리야를 그는 벤치마킹했음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엘리야는 왜 아라비아로 갔는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1세기에 아라비아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당시 아라비아는 시리아 동부로 조금 들어간 지역 다메섹에서 가까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요르단을 가르질러 저 멀리 시내 반도까지 아우르는 꽤 넓은 지역이다. 시내산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연약이 비준되고, 율법을 받은곳이다.
동시에 모든 것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엘리야가 간 호렙산이 곧 시내산이기도 하다.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이 한적한 광야에서 바울은 조용히 연구하고 명상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의 과거의 경험을 조용히 회고하였고 완전히 회개하였다. 그는 그의 회개가 가납되어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 때까지 마음을 다하여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았다. 그는 예수께서 장차 그의 봉사에 그와 함께 하신다는 보증 얻기를 갈망하였다. - 행적, 125
그 역시 엘리야와 비슷하게 열심을 냈었다가 아라비아로 물러났다. 다른 이들은 다 반역하고 열심을 내는 나만 남았다고 엘리야가 말했던 것처럼 열심을 냈지만, 결국 그도 홀로 광야에 머물게 되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바람과 지신과 불의 강력한 계시가 이어지고, 세미한 소리가 들리게 된다. 마침내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네가 오던 길을 돌이켜 다메섹으로 가라는 것이다. 거기서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다스릴 새 왕을 세우고 그 자신의 자리를 맡을 새 예언자 엘리사를 세워야 한다.
새 왕과 새 예언자는 그 땅에서 바알 숭배를 제거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술 더 떠 당황해 하는 엘리야에게 끝가지 성실한 사람 7천이 있을 것이며,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께서 성실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3 “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나 혼자밖에 없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 찾고 있습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내 앞에 남겨 두었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경험을 로마서를 통해 자신이 엘리야, 남은 7천명에게 로마 교회와 자신을 빗대어 설명합니다.
결론
결론
그는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이단을 뿌리 뽑으려고 폭력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바울 자신은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역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왜 아라비아로 갔는가?
그는 엘리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그도로 열심이었지만, 이제 그의 포부와 그의 세계관 전체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처럼 가서 새 왕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그림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너무 단순하다. 성경 중에서 가장 긴 역사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담아 놓은 기록들보다 빠뜨린 내용이 더 많다. 누가는 딱 두루 마리 하나에 들어갈 분량으로 책을 썼다.
행 9:20-28을 보면 바울은 그의 목숨을 앗아 가려는 음모가 이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예수를 선포했다. 이 이야기 어딘가 분명 다메섹으로 가기 전 거쳤던 광야 순례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는 단순히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을 해결하기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까지 회당에서 예수를 선포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에는 조금 다른 의도로 그의 변화를 일어준다.
핍박자로 열심을 내다가 예수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이 그는 광야로 갔다. 몇날 며칠 걸려 기도할 곳을 찾아 광야로 들어가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거기서 자신에게 일어난 새로운 일, 예수님에 관해 받은 계시가 정말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주신 목적의 성취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변함없이 충성을 다하고 싶었다.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안에서 이뤄졌다면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을 바울은 알았다. 이제 엘리야처럼 돌아가 그가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엘리야는 새 왕과 새 예언자에게 기름을 부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사울은 돌아가서 나사렛 예수가 진정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요 메시야이며, 세상에 정당한 주권자이심을 선포하는 예언자 직무를 시작해야 했다.
이로서 그는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음을 구약의 인물들과 자신이 직접 전달받은 계시를 고대 예언자 전통 안에서 세워졌음을 분명히 했다.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에 호소하려고 하지만, 바울은 예수 바로 그분이 그리고 자신이 받은 복음과 예언자 직무를 미리 보여주는 성경에 호소함으로 변증한다. 결국 이것이 아라비아로 간 이유다.
복음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복음에는 열심이 필요하지 않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면서 복음을 옹호한다. 그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바친 충성은 늘 그랬던 것처럼 굳건했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10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