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지금도 여전한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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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구조
갈라디아서의 구조
6개장 149절로 구성된 갈라디아서.
크게는 5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음.
1:1-10 서론
1:11-2:14 사도직 옹호
2:15-4:31 복음에 대한 공격을 방어함
5:1-6:10 권면들
6:11-18 결론
기억하기 쉽게
1-2장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변호
3-4장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설명
5-6장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삶에 적용
3:1-5는 1:11-2:21
바울의 경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설명
3:6-4:31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한 단계적인 논증(율법인가? 믿음인가?)
이 두 본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내용. 그러니까 자신의 삶으로 설명한 복음을 차분히 설명하기에 앞서 왜 설명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부분.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논증하기 전에 논증이 필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부분.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5가지 질문으로 구성된 본문이다. 사실 이 질문들을 공통점을 찾아 다시 정리하면 4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질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두 번째 질문,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세 번째 질문,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 합니까?
네 번째 질문,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마로 허사였습니까?
다섯 번째 질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어려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사실 이 질문들을 정리하면 네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두 번째와 다섯 번째 질문은 결국 복음의 핵심은 율법의 행위인가? 아니면 복음을 들음에서 인가? 로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질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장까지의 바울의 삶과 복음의 경험이 어떻게 복음인지를 설명하는 본문이 3:6절부터인데, 1-5절은 그 다리 역할을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만 잘 살펴보아도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첫 질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개정개역판 성경에서는 누가 너희를 꾀느냐? 라고 질문한다.
지난 설교를 통해 확인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곧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두고 “어리석다”라고 책망한다. 원문을 그대로 가져오면, 멍청하다 혹은 정신 나갔다 라는 표현 정도가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욕설이며, 비난이다. 갈라디아인들은 다른 복음을 선택하는 정신 나간 행동을 했다는 말이다. 누가 이들을 홀렸는가?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원인은 이 세상의 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해서 라고 말한다. 다시 갈라디아서 3:1을 보자. 이 세상 신들이 갈라디아인들으 꾀었다. 그래서 예수를 못보게 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이 점을 매우 이상하게 여긴다.
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 앞에 생생하게 있으니 못 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공개적인 사건으로 모두가 볼 수 있게 이미 제시되어 있는데 이들은 왜 보지 못한 것인가? 밝히 보이거늘 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자. 이 본다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시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공개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이 십자가, 곧 복음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보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소식이다. 그분의 십자가로 내가 구원을 받았으므로 다른 복음과 구원의 수단이 필요치 않다.
또한 복음 과거의 사건이기는 하다, 십자가는 확실히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바울은 현재시제를 썼다. 현재 시제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는 일, 동작을 나타날 때 사용된다. 따라서 복음, 곧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만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다. 십자가의 능력, 복음은 지금도 여전히 충분하게 능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복음은 과거 사건이 아닌 현재까지도 여전히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생하고 공개적인 이 일을 과거의 일로 치부하는가?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현재는 할례와 율법의 준수가 필요하다는 이 말에 왜 넘어가는가?
오늘날로 돌아와 살펴보면, 왜 십자가의 사건을 박제처럼 만들었는가? 마치 멸종위기종의 사체를 박제하여 박물관에 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종류의 동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존 자체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복음을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배는 과거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공로, 곧 과거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일인가?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묻고 있다. 이 질문은 비단 갈라디아교회에만 던진 질문이 아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연구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다.
복음은 확실히 과거의 사건이기는 하지만,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갈 2:20을 보자.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목할 표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부분이다. 2,000년 전 그리스도께서 홀로 지신 십자가 사건을 바울은 지금 우리가 함께 못 박힌 사건이라고 소개한다. 왜 그런가? 복음은 과거의 일이 아닌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곧 그분의 십자가 소식을 듣고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죽고 새 창조를 경험하는 일이다. 십자가는 윤리나 도덕을 통해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새 창조를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전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그곳이 십자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이를 노력으로 바꾸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존재로 만드는 십자가 사건을 오늘 기억하고, 깊이 이해하며, 경험하는 것이다.
갈 2:20 중반부를 보라.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과거에만 충분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새로운 현재인 미래까지 충분한 은혜의 사건임을 기억하자.
TS: 바울은 복음이 현재 일임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 신을 좇아 다른 복음을 좇은 이들의 문제를 2-5절에 걸쳐 나열하고 있다. 4가지 정도의 특징을 통해 갈라디아 인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까?
복음의 능력은 신실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복음의 능력은 신실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2절을 보자.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성령을 받은 기적의 역사는 복음을 들음으로 일어난 일인가? 행위로 얻은 일인가?
복음을 들음으로 일어난 일이다.
그러면 성령을 받고 복음을 들은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것인가?
성령이 먼저다. 다음 질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 복음은 성령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고 한다. 왜 그런가?
성령, 곧 하나님으로 시작했는데, 율법의 행동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많은 체험, 혹은 복음으로 얻은 고난은 다 헛된 일인가? 정말 헛된 일인가?
이 모든 체험이 율법을 지키기 않아서 초래된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로 시작된 복음을 믿었기 때문인가?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생긴 문제인가?
이 질문들과 복음의 요소에 대한 물음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바로 시작이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고난의 시작도 십자가의 복음, 곧 아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게 된 것도 사실 하나님의 섭리가 먼저 선행되었다. 곧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에 듣고 믿었으며, 성령으로부터 은사와 능력을 얻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시작은 성령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육체로 돌아갔다.
시작점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육체로 돌아감,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함, 고난의 원인을 종교적 행위에서 찾는 모든 문제는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다.
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회 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분, 그 약속으 십자가를 통해 지키신 하나님을 말이다. 수천년 전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이들은 매일 잊었다. 신실함, 곧 정말로 믿을 만한 그분의 성품 더 깊이 알지 못했다. 결국 복음의 버리게 된 일, 다른 복음을 좇아간 일은 복음의 시작이신 하나님, 그분의 신실함을 잊거나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 역사에 신실하셨던, 십자가에서 나를 구하셨던 하나님일 뿐이다.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성령의 역사, 복음을 듣고 믿음, 그 복음을 주신 분으로 인해 받은 고난까지 모두 하나님과 연결하지 못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복음이 먼저 말했던 것처럼 현재와 연결되지 못했다. 그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만한 분인지 충실하게 설명한다. 그 믿을 만한 하나님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에만 움직이셨던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눈 앞에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복음과 신앙의 뿌리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복음과 신앙의 뿌리입니다.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역사를 통해 말씀하신다.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구성요소 중 하나가 충족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백성"이다. 성경은 이어서 출애굽기를 통해 이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왕을 소개한다.
###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23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25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430년 동안 침묵하시다가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이유는 그분이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4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5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억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자기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듣고 약속을 기억하셨다. 이후 7절을 읽어보라. 애곱 왕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해서 그분의 백성으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포로기에서 회복하기까지 무려 49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신약 시대가 시작되는 때까지 포로와 속국의 억압과 아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신 분이신가요?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주셨다. 구약의 약속의 핵심은 메시야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셔서 보내실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아래 성경절을 자세히 읽어보라.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이루려고 예수를 보내실 뿐만아니라,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가 받게 하셨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초기교회 신자들은 믿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신앙 고백은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3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라는 말의 의미는 곧,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라는 뜻이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능력 이상의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순교와 시험의 현장에서 초기 교회는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 하나님을 기억했다. 그렇기에 곧 오실 예수님, 재림의 약속을 굳건히 믿고 견뎠다.
3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
초기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뿌리는 확실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굳세게 하시고, 악에서 혹은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지켜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과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신실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여전합니다.
결론: 신실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여전합니다.
기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뿌리는 확실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굳세게 하시고, 악에서 혹은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지켜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과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복음 참으로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과거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던 그 때도, 오늘날 그 편지를 읽는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반성과 함께 결심을 하게 된다. 복음의 본질이 되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신학을 구분할 때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주로 구분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예수의 복음을 붙들고 사는 동방교회는 전통적으로 신학을 2가지로 분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곧 말그대로 신학,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나머지는 경륜학이다. 경륜학에는 교회론, 구원론, 그리스도인 생활, 심지어 과학과 철학까지 들어간다. 경륜학의 의미가 살림살이, 집을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 내용, 곧 하나님이 그의 집을 다스리는 내용을 구별된다.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분의 경륜을 아는 기초이자 본질로 보았다.
우리의 예배가 삼위 하나님께 향하도록, 과거에 연구되었던 학문적인 분, 역사에 등장했던 분으로 보자 말자.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사막에서만 능력이 있는 사막신으로 보았던 이방인들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복음을 주신 근원,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동일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신뢰하자!
거기에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삶으로 연결되는 신앙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