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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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2:10-13

욥기 2:11-13 고난이 주는 외로움
- 오늘 설교는 뉴스 영상을 하나 보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2년 전 영상이지만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제 전염병으로 그 정도가 훨씬 더 강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이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은 훨씬 더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다. 외로움이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얼마 전에 어느 강연 프로에서 외로움 체크리스트라는 것을 소개해서 얼른 옮겨 적었다. 여러분도 한번 체크해 보시기 바란다. 1)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 떠들고 있다. 2) 새벽녘에 자꾸 눈이 떠진다. 3) 나 혼자서만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 휴대전화에 메시지 온 게 있는지 자꾸 확인한다. 5)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다. 6)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자꾸 쓰다듬거나 토닥인다. 7) 전보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8) 웃음 끝이 짧아졌다. 9) 맛보다는 배고프지 않기 위해 밥을 먹는다. 10) 항상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외로움은 훨씬 더 강력하게 다가온다. 프랑스어 중에 ‘말뢰흐’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려운데, ‘비운, 절망’이란 뜻에 가깝다. 시몬 베유라는 철학자가 ‘말뢰흐’를 이렇게 정의한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음과 맞먹으며, 온 심령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사로잡는 두려움.” 그러면서 이런 ‘말뢰흐’의 특징을 몇 가지로 소개한다. 1) 고립. 환난을 당하면 가장 가까운 친구 관계에도 담이 생긴다. 환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문득 거리감을 느낀다. 2) 자기 몰입. 신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몰입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 말고는 모든 일에 무감각해진다. 3) 파멸, 절망, 정죄에 대한 감각. 시몬 베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환난은 인간을 경직되고 낙담하게 한다. 빨갛게 달궈진 강철 낙인처럼 영혼 깊은 자리에 모멸감, 역겨움, 심지어 자기혐오,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범죄가 낳은 결과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죄책감과 더렵혀졌다는 생각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4) 분노. 자신을 향한 분노, 해코지하거나 기대를 저버린 이들에 대한 억하심정도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분노도 있고, 불공평하고 공허한 삶을 향한 분노도 있다. 5) 유혹. 시련이 주는 불편을 익숙하게 여기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런 유혹이다. “고난은 어려움을 겪는 이의 심령에 타성이란 독물을 주입해서 야금야금 공범을 삼는다.”
- 지난 3주 동안 우리는 욥에 대해 살펴봤다. 욥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이 찾아왔다. 그렇게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사랑하던 자녀들도 모두 잃었다. 자신의 몸의 건강까지 잃어버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한 몸에 받고 욥이었는데 이제 그는 재위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어떻게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순전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입술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는다. 이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숙연하게 했다.
-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아무리 믿음과 인격이 훌륭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도 욥도 사람이다.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다음 주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욥의 순전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마음과 감정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욥의 내면은 심각하게 흔들렸다. 이 점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욥기 6:11-13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내게 무슨 힘이 있어 희망을 붙들겠는가? 무슨 미래가 있어 계속 살아가겠는가? 내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아나? 내가 무쇠인간인가? 내가 자력으로 지금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닐세. 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네!” ‘나는 지금 버틸 힘이 없다.’ 이게 지금 욥의 솔직한 심정이다.
- 앞에서 환난이 주는 첫 번째 특징이 고립이라고 했다. 욥도 그랬을 것이다. 욥이 지금 몹시 외롭다. 세상과 단절된 기분, 세상에 자기 혼자만 남아있는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옆에 있던 아내도 이제 자기편이 아니다. 자신의 자녀들도, 종들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욥이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 그런데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욥에게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이 이제 욥을 찾아온다. 우리가 뒤에 나오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해서 욥의 친구들은 무조건 나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욥이 가장 어려울 때 찾아온 친구들이다. 욥이 재물이 많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만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친구는 아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 아닌가? 잠언 18:24에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여럿의 친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정한 친구 한 사람이다. 정말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한 경우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헤세드’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놀라운 것은 친구간의 변함없는 사랑도 이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사무엘하 16:17에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 때 다윗의 친구 후새가 일부러 압살롬을 따르는 척했다. 여기서 ‘후대하는 것’이 바로 ‘헤세드’ 즉 변함없는 사랑, 충성을 의미한다.
- 욥의 친구들이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욥을 찾아온 게 아니다. 그들의 첫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11절에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그들은 진심으로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원했다. 여기서 ‘위문하다’는 뜻의 ‘누드’라는 동사는 고통 받는 자와 하나 된다는 의미로 머리를 앞뒤로 흔드는 행동을 뜻한다. 흔히 공감과 비슷한 단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위로하다’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 나오는 ‘위로하다’는 원어로 ‘나함’인데, 이건 ‘고통당하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단순히 욥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욥이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달라지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굉장히 대담한 목표다.
-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쉬울까? 결코 쉽지 않다. 목회자인 제가 짧은 목회 기간을 통해서 느낀 바도 그렇다. 공감하는 것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놓는 위로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를 둔 엄마였는데, 아이가 아파트에서 놀다가 택배 차량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담임목사님을 비롯해 모든 교역자가 병원 영안실에 갔는데 아이를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엄마에게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 제가 20대 후반이고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아이 잃은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 지금도 여전히 서투르다. 공감하며 위로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 있다. 이사야 50:4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하나님, 저에게도 정말 곤고한 자를 말로 위로해 줄 수 있는 학자의 혀를 허락하옵소서. 이 학자의 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능히 욥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욥의 친구들이 모두 에돔 출신인 게 거의 확실하다. 수아와 나아마는 지도 상에 잘 나오지 않지만 데만은 에돔의 주요 성읍이다. 에돔은 지혜로 유명한 곳이다. 오바댜 1:8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예레미야 49:7에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쉽게 말해서,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욥을 얼마든지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한다.
- 욥의 친구들은 어떤 면에서 실패한 것인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12절을 새 번역으로 같이 보자.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욥의 친구들이 멀리서 오다가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가 지금 쓰레기 소각장 위에 앉아 있다. 옷은 거의 입지 않고 남루하고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나 있다. 얼굴은 초췌하고 주름이 가득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바로 자신들의 친구인 욥이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알던 욥이 맞는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는가? 이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 머리에 뒤집어썼다.
- 이게 무엇이 잘못인가? 얼핏 보기에 욥의 친구들은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욥을 동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1) 친구들은 욥을 보면서 울지만 욥과 함께 울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이 중요하다. 욥이 처한 상황을 보고 우는 것과 욥과 함께 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감은 내 감정이 아닌 상대방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저 자기감정에 빠져서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12:15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물론 욥도 지금 슬프고 괴롭다. 그런데 친구들이 자신을 보자마자 소리 내어 울고 겉옷을 찢는다. 뭔가 어색하다. 친구 간에 오가던 자연스러운 포옹도, 악수도 없고, 다정한 미소도 없다. 욥으로서는 ‘이게 뭐지?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그 사람과 공감한답시고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굉장히 냉철하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라고 한다. ‘그래, 그 때 네 마음이 어떠했어? 왜 그렇게 느꼈던 거지?’ 내가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다. 공감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두 번째 그들의 문제점이 있다. 13절을 같이 보자.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친구들이 욥을 보고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친구들의 침묵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인 해석이 많다. “욥의 친구들이 대부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이곳 첫 부분에서는 제대로 했다.” “이들의 침묵은 이들의 진정한 공감이 한층 높게 표현된 것이다.” “슬픔이 깊을 때 연민이 침묵 외에 어떤 형식을 띄겠는가?” “이들은 외롭게 잿더미에 앉은 욥의 곁을 말없이 지켜 줌으로써 연민을 표현한 진정한 친구다.”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 고난당한 자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보다 침묵이 훨씬 더 나을 수도 있다. 2) 그러나 침묵이 너무 길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7일 밤낮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위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섬뜩하지 않을까? 몇몇 학자들이 여기서 7일간의 침묵은 죽은 자를 위한 애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로울리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은 욥을 이미 죽은 자로 여기고 그를 위해 애도한다.” 마치 친구들이 영구차를 불러 놓고, 관을 열어 놓은 채 욥의 곁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송장에게 말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송장 곁에서는 울 뿐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러 왔는데 7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온 건가?
- 앞에서 고난이 사람을 고립시킨다는 말이 정말 맞다. 고난이 주는 외로움이 있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욥의 옆에 아내가 있었지만 그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 이제 친구들이 찾아오지만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 무슨 대안이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두 군데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먼저,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마가복음 14:37에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아실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괴로워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잠에 빠져있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을 못 자는데 속 편한 남편은 옆에서 쿨쿨 잔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님께서도 고난 앞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셨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마가복음 15:34에 “제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욥이 당한 고난과 그 고난이 주는 외로움은 장차 우리 주님이 당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전주곡이다. 우리 대신에 철저한 외로움과 고독을 먼저 당하신 분이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진 다니엘이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사람을 외로움으로 에워싼다. 욥과 친구들 사이에 엄청난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친구들은 깜짝 놀라며 욥을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더는 그에게 가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골짜기를 건너실 수 있는데, 비극의 심연으로 내려가 가장 깊은 지옥에 뛰어드신다.”
- 또 한 군데는 고린도후서다. 고린도후서 1:3-4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참된 위로는 누구에서부터 오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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