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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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1. 복음을 신뢰하게 된 경위

갈라디아서 4:13 NKSV
13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갈라디아에서 선교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자 재빨리 계획을 변경하여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때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뜻하게 환대하였다.
갈라디아서 4:14 NKSV
14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바울의 신체적 결함이 멸시나 외면을 불러일으길 만큼 중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예수님이라도 되듯 극진히 환대했다. 그 결과 갈라디아인들과 바울 사이에는 깊은 우정,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바울은 얼마간의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 선교 여행을 하던 중,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좇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사나 축복의 인사 없이 이들을 책망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울분을 토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복음,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최초로 전했던 복음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3:1 NKSV
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2주 전에 살펴본 대목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전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좇아 살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2천 년 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당시는 사뭇 진지한 결심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십자가 처형은 수치의 상징이었다. 국가내란, 반란, 반사회적 범죄를 지은 중죄인에게만 내리는 처형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은 한 마디로 이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켜야 하는 악질임을 알리는 처형방식이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전 1:18을 보자.
고린도전서 1:18 NKSV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예수를 믿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갈라디아서 1:4 NKSV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 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NKSV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바치셨다, 자기 몸을 내어주셨다. 이 문구는 단순히 예수님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문구가 아니다.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중요한 문화 형태가 하나 있는데, 후원자-피후원자 관계다. 벤허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유대 귀족인 벤허가 역경을 만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곳은 바로 로마 전함의 가장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된 것이다. 그러던 그가 다시 유대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자신의 전함에 타고 있던 장군의 목숨을 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장군은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벤허는 신분도, 재력도 삶의 기회에 이르기까지 다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그 시대에 사람들은 후원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마 제국의 최고의 후원자는 누구일까? 황제다. 황제의 눈에 들어 후원을 얻기 위해 제국의 도시들은 황제 숭배를 앞다투어 하였다. 왜? 황제 후원을 받기 위해서다. 자신을 주다, 자신을 쏟아붇다 라는 이 문구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후원자가 피후원자에게 비푼 은혜를 기리는 서류의 문구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즉 바울은 로마 시대의 후견인-피후견인 문화에 맞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니다. 신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씻어내기 위하여 십자가에게 자기를 주셨다. 자신의 생명을 쏟아부으셨다. 그 은혜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갈라디아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신적 후견인이시다.
바울이 이들에게 강조한 믿음은 신적 후견인인 예수의 죽음을 통해 신(하나님)과 인간이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첫 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만으로 충분한다는 바울의 주장과 근거를 확인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의로워지기 위하여 혹은 인정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첨부하는 것은 소용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을 이야기했던 거짓 교사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종종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구원을 위한 조건, 공로를 채택하기도 한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죄의 구속력이다. 그 구속력은 죄책과 습관이 큰 역할을 한다.
죄책은 사람을 불안하고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자꾸 죄에 매여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자 죄를 보면 올가미에 걸린 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떻게 보면 죄는 스스로에게 그물을 씌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죄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부자유한 삶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죄의 습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습관적인 죄, 욕망, 고의로 지은 죄, 나의 연약함으로 지은 죄등 경우도 우리가 느끼는 죄의 깊이도 다양하다. 이런 죄의 영향력을 우리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을가? 결단코 아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후반부에 함께 나누겠지만 에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잇다. 예수께서만이 철저히 우리를 새로운 사람을 만드실 수 있으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예수님을 신뢰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다른 예수, 다른 가르침을 좇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 그 문제의 완벽한 해결 원리를 가르치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거짓 교사들의 이야기를 대강 훑어보도록 하자.

주제2. 바울의 복음은 반쪽짜리인가? 온전한 복음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지역을 떠났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지 몇 달 후 이른바 ‘거짓 교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반쪽짜리 복음이라고 폄하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어야만 진짜라고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사도행전 6:7 NKSV
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사도행전 6:7에 보면 당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하였다.
사도행전 15:5 NKSV
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심지어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대인이었고, 성전이 그들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해했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식이었다. 특별히 바울이 한창 선교 여행을 하던 기원후 50년에는 성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본래 평화를 사랑하던 이스라엘이 독립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테러와 급진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열심당의 주장에 경도된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율법의 열심을 내었던 선조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율법의 열심을 내었을 때, 이스라엘은 재앙에서 구조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의 열심을 낸 사람은 구약 성경에서 두 사람을 뽑아 소개한다.
바로 엘리야와 비느하스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의 전염병과 멸망을 막기 위해 창을 들어 이방여인과 그 여인과 잠자리를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남자을 창으로 꿰뚤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모압에서 멸망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극심한 기근과 생존의 위협을 겪던 북이스라엘에 비가 내리도록 열심을 낸 인물이다. 우상숭배로 비가 오지 않았던 그 땅에 여호와에 대한 열심으로 800여 명의 이방신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도륙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비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극단적인 열심을 낸 또 다른 사람이 바울이었으며, 이것은 바울만의 모습이 아니라 50년 경의 성전과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제사장과 바리새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런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을까?
이들은 바울의 선교 여정을 뒤따라가며, 바울이 전한 복음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도행전 15:1 NKSV
1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바울이 전한 대로 예수를 믿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믿음이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의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그 율법이란, 종교개혁 시대 근방에 주장되었던 인간의 공로, 선한 행위, 윤리적인 삶, 이런 것들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2:3 NKSV
3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7–8 NKSV
7 도리어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 그들은,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12 NKSV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4:10 NKSV
1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갈라디아서 5:12 NKSV
12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들이 말한 율법은 주로 할례, 절기 준수, 음식법으로 대표되는 정결법 규정과 관련된 것이다. 사실 이 규정들은 유대인의 표징이다. 곧 유대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즉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이방인과 구별되어야 한다.
곧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빋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좀 더 와닿게 말하면 예수를 믿고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인과 똑같이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교의 한 형태로 보았다.
창세기 17:9–14 NKSV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10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이다. 12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의 언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언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읨한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예수를 믿고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구약의 성경절들을 인용하여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출애굽기 12:48–49 NKSV
48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주님의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면, 너희는 그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본국인과 같이 되어서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 49 본국인에게나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타국인에게나, 이 법은 동일하다.”
유월절의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레다.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면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례다. 신분을 바꾸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이사야 52:1 NKSV
1 너 시온아, 깨어라, 깨어라! 힘을 내어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아,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제 다시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너에게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성에 들어가야 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성에 출입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계21장 종말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짜 복음, 완전한 복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신임을 받은 선교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예루살렘 신학대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정식으로 결의된 이후 파송된 목회지가 아니다. 어느날 길에서 넘어지더니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사역을 시작한 듣도 보지도 못한 근본없는 선교사라고 말한 것이다.

주제3. 보탬이 필요 없는 복음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낸다. 그래서 편지에 감사 인사도 생략하고 갈라디아사람들을 향해 멍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짓교사들을 향해 교란하는 사람,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한다. 심지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그만큼 이 사태를 바라보는 바울의 심사가 불편했다.
바울은 이제 거짓 교사들에게 반박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최초에 전한 복음이 반쪽짜리 복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서 2:16 NKSV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 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서 자신을 실례로 든다.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율법에 대한 극단 적인 열심 대문에 교회를 잔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그를 의롭게 하였는가? 유대인이 되어서, 유대인처럼 살고,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서 과연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안에 머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율법에 대해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엘리야와 비슷한 행보로 자신의 일생이 인도되었음을 고백하면서 그의 사도권이 사람이나 예루살렘 총회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밝힌다.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갔던 것처럼, 그도 호렙이 있는 아라비아, 나타비아 왕국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 엘리야가 거기서 예후 왕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처럼, 이제 그도 다메섹에서 예수가 왕이 되심을 선포했다. 그리고 사도들을 만나 공인받고, 무할례자들을 위한 사도로 세워졌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소위 안디옥 사건이 일어났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유대인 이방인 모두 함께 한 자리에서 식사하였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더이상 유대인처럼 될 필요없이 예수님 한 분으로 구원 얻는 데 충분하다는 연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형제들을 보자 그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나바까지 부담을 느끼고 식탁교제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자칫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나무랐다. 그리고 바울 역시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힘 있게 전하고자 아브라함을 인용했다.
창세기 12:1–3 NKSV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 너는 복 자체가 되어라. 내 존재 자체가 복이다. 후손이 많아지고 땅을 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너와 후손으로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 부분을 이렇게 인용했다.
갈라디아서 3:14 NKSV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6 NKSV
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 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 후순에게 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은 이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세상에 나눠주실 분은 그의 후손인 예수 뿐이시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된다.
갈라디아서 3:27 NKSV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 바울은 항상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연합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된다는 것이고, 곳 그분을 옷으로 입는다는 의미가 된다.
영어로 빌리브는 본래 뒤에 전치사가 올 수 없다. 그런데도 빌리브 인.
갈라디아서 3:28 NKSV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하나로 충분하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지 않다. 사실 성별, 계급, 인종 등은 사람들이 임의로 만든 장벽일 뿐이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만 보신다. 예수를 옷 입고 있는지 아닌지.. 2천 년 전에 엄청난 혁명이 그리스도교회에서 일어난 셈이다. 성별에 대한 차별, 인종에 대한 차별, 계급에 따른 선민 의식이 너무나 강고했던 사회가 그때 모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혁명적이어야 한다. 급진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제4.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갈라디아서 2:16 NKSV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 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2 NKSV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인가?가 핵심 쟁점.
전통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해석이 현대에는 더 많아졌다. 사실 이 영역은 신약학자들간의 논쟁이기도 하고, 계속 싸워도 답이 안나는 영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는 그렇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둘 다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후견인-피후견인 문화를 기억하는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 문화를 차용하여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후견인-중개자-피후견인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의 후견이 되신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죽기까지 끝까지 신뢰하셨다. 곧 아버지께 신실하셨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셨다.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가지 신뢰함으로써 그 구원의 효력을 성취하여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종개자이시다. 곧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에 신실하셨던 예수님의 믿음이 있기에 구원의 은혜는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신실함 덕에 구원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을 믿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 중개인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주제5. 율법과 성령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거짓교사들만 한 주장일까?
사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지 않았고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말, 율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셨다. 동시에 율법을 깔아뭉개는 표현도 더러하셨다.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럼 이 율법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는 정확히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3:19 NKSV
19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억제하는 기능. 기한이 정해져 있어.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때까지.
갈라디아서 3:10 NKSV
10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주를 받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을 전부 다 지켜서 의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갈라디아서 3:11 NKSV
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8 NKSV
18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그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율법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30년 후에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이지, 율법 대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3:21–23 NKSV
21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개자가 준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죄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모세 시대로부터 그리스도 때까지 한시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죄를 고발하는 것이며, 율법을 통해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율법의 감옥에 갇혀 산다. 누구도 그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갈라디아서 4:1–3 NKSV
1 내가 또 말합니다. 유업을 이을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고, 2 아버지가 정해 놓은 그 때까지는 보호자와 관리인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상태를 그리스-로마 세계의 몽학선생으로 예시를 들었다.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임시로 맡아 가르치는 노예 출신 가정교사다. 로마제국 사교육 시장에는 그리스 철학이 인기과목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출신 노예들 중 철학을 가르칠 수 있거나, 언어를 가르치고 책을 읽힐 수 있는 노예들이 이 역할을 수행했다.
몽학선생처럼 본래 주인, 자유인은 아니지만, 자녀가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맡아서 양육한다. 그러니까 성년이 되기까지는 사제지간이지만, 성년이 되고나면 다시 주인과 노예로 돌아간다. 율법도 이와 같다. 모세시대부터 그리스도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맡아서 양육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받았다.
따라서 믿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이제 몽학선생과 같은 율법에게서 벗어났다. 그런데 갈라디아인들이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 스스로 노예가 된다니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
주제6.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모세 시대에 맺었던 언약을 뒤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새 언약을 맺었음을 상기시킨다. 예 언약을 맺을 때를 생각해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보호를,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 표징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체결된 새 언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 언약의 표징으로 성령이 주어졌다. 이것은 요한복음 13-16장에 잘 나타난다.
요 13장 1-30절은
세족식 / 십자가를 통해 그를 믿는 자들의 죄가 깨끗하게 씻겨짐을 묘사
새계명을 주심 / 곧 사랑의 계명을 수여받음(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요한복음 14:16 NKSV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실 것이며, 이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능력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신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으며, 그 성령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고
갈라디아서 4:6–7 NKSV
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
갈라디아서 3:8–11 NKSV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는 종처럼 얽매여 거기에 굴종하고 살 필요가 없다. 믿음을 통해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율법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갈라디아서 2:20 NKSV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9 NKSV
19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의자녀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순종하게 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통해 의로운 삶을 산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2:20),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4:19)
갈라디아서 5:25 NKSV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더이상 죄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 않는다. 물론 죄의 습성과 환경은 우리 앞에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다.
갈라디아서 5:14 NKSV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 NKSV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1 NKSV
1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잘못한 사람에게 온유함으로 교정하고 자기 성찰을 한다.
갈라디아서 6:2 NKSV
2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타인의 짐을 나눠진다
갈라디아서 6:6 NKSV
6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함께 나눈다.
갈라디아서 6:9–10 NKSV
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을 특징짓는 일은 율법이 아닌 성령이다.
갈라디아서 5:6 NKSV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10월 한달 갈라디아서. 부족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의로워지기 위하여, 혹은 인정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덧붙이거나 첨부하는 것은 소용없다.
과거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노력 들, 가령 금식 헌신 헌금 곳행 봉사 구제 등으로 생각했다면, 현대에는 그리스도에 더해지는 그 무엇으로본다.
이런 점에서 우리 역시 바울 당시 유대인들과 동일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도는 더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되 반드시 재림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교파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혹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 목사 장로 집사 각가지 직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에 더해 외모, 학벌, 재력 등 다른 조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액새서리들이야말로 더 나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믿는 경우도 종종 본다.
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믿음이다. 조건은 인간이 세운 장벽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만 충분하다.
빌립보서 3:8 NKSV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외에 다른 것들은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의 고백을 되새겼으면 한다.
코로나 시기에 오직 예수 한 분으로 충분한 것은 아무래도 예배에 대한 관념 변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가 교차한다. 그리고 대면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전을 절대화, 신성시 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대면 예배를 드리든 비 대면 예배를 드리든 어떤 것이든 좋다가 아니다. 대면 예배든 비 대면 예배든 절대화 시키고, 신성화 시킬 때 필연적으로 예수는 밀려나고 악세사리 같은 다른 조건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역사들을 본다.
영과 진리로 그분을 예배하는 길을 찾자. 비대면이든, 대면이든 어떤 예배 형식과 조건이 나의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되게 하지 말자. 참으로 예수님을 찾고 그분과 연결되는 예배를 지향하자! 가난하든 부하든 어떤 환경에서든지 예수님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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