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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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론
오늘은 우리가 정말 많이 들었지만, 정말 안되는 주제에 대해서 나누어보고자 한다. 바로 순종이다.
순종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가장 안되는게 또한 순종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순종이란 말을 듣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다들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며, 좋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을 잘 꾸미고 드러낼 수 있는 디자인을 원하지 않는가? 그리고 연예인이 되기 원하는 애들도 참 많은거같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우리를 드러내기 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은 바로 ‘순종’이다. 사무엘과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자.
본론
오늘 사건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명령하심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출애굽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말렉을 진멸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사울이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자가 된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해야할 일을 위임함으로써, 사울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진멸’이라는 것은 그냥 다 죽이는 잔혹한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함, 구별됨이 포함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멸’이 물건에 적용될 경우, 그 물건은 제사장외 다른 사람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된다. 오로지 하나ㄴㅁ의 성전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물건이 된다.
헤렘이 짐승이나 사람에게 적용될 경우, 죽여야 한다. 왜냐면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든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함에 다다를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헤렘, 진멸이라는 거룩한 의식의 주체가 되라고 하셨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대행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말렉왕과 양과 소등 좋은 것은 다 남긴다. 가치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한다.
방금 말했듯이 진멸, 헤렘은 하나님앞에서 거룩함, 구별함이다. 헤렘된 것은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거룩해진다.
그렇다면, 사울은 가치없고 하찮은 것만 하나님앞에서 거룩하게 한 것이다. 좋은 것은 자신이 가지고 나쁜 것은 하나님께 드렸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울은 헤렘이 하나님앞에서 구별되게 하는 것, 지극히 거룩하게 만드는 것임응ㄹ 몰랐을 것이다. 그저 죽이고 부수고 불태우는 것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즉, 헤렘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사울은 자신의 판단대로 가치를 따져서 나쁜것은 헤렘시키고, 좋은 것은 남겨두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결정은 최악의 결정이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땅에 떨어뜨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정도가 아니라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11절에 하나님은 사울을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까지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두셨다. 이것은 아직은 불안한 사울의 왕좌를 위해서다. 첫 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정했을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옛날로 돌아갈수도 있는 상황이다. 백성들의 기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세워주려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구별됨을 나누어주고자 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그런 하나님의 깊은 뜻은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잘못하신 것인가? 헤렘의 의미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주고, 사울을 이해시키고, 그래서 어르고 달래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울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소위 말해 동반자, 동업자사이에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별됨과 거룩함이 있기 때문에 하시는 것이다.
우리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우리는 죄인이다. 여전히 죄속에 있다.
대체 구원이 뭐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위치에 가는 것이 ㅜ원이라고 새악ㄱ하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일이 모든 것을 다 말씀해주시길 바라는 건가. 그렇게 다 말하면,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한글을 배우는 아이가 대학교수의 논문을 읽으면 이해가 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에 따라 순종하며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대학에 가서 충분한 지식이 쌓였을 때, 대학교수의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정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더좋다.
사울이 그랬다. 당장 눈ㅇ에 보이는 결과를 원했다. 그래서 12절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좋은 것을 남겨서 일부는 제사로 쓰고 일부는 자신이 가지고 일부는 백성에게 주고자했다. 자신의 힘과 능력, 관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자신의 왕좌를 든든히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다. 불순종한 것이다.
우리의 불순종의 이유도 사울과 같을 때가 참 많다.
하나님의 뜻은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왜 어째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길로 오게 하셨는지.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지 우리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수도 있다.
모든 학생이 공부하지만, 모두가 다 대학교수의 논문을 읽고 이해할수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전부 알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느 것이다.
내 능력이 출중한 것같아도, 하나님을 먼저 뽐내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낫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참 힘들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솔직히 읽기 힘들다. 세상에 재미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이 읽기 힘든 말씀을 읽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수많은 말씀들중에 무엇이 대체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인지 우리가 알수가 있는가.
우리는 사울처럼 우리가 이해되는 것만 하고 싶어한다. ㄴ가 납득이 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끌려야 의욕이 생긴다.
사울도 그랬다. 모든 것을 진멸시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가장 좋은 것은 제물로 드리고, 나머지 것은 자신과 백성이 나눠가지는 것이 가장 좋다.
전쟁에 참여했는데 얻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에 지금처럼 생명수당이 있던것도 아니고, 뭔가 얻는게 있어야 전쟁에서 싸운 백성들도 힘이 날 것아닌가.
어떻게 다 죽이고 불태울수 있는가.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도 생각해야 할 거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불순종했다.
그 결과, 자신이 그렇게 얻고자했던 왕좌를 잃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달린다. 수능도 그 목표를 향한 과정이다. 관문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길,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는다.
이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다.
그리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그러니 우리 생각을 잠시 접자. 우리 판단을 잠시 접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듣자.
어떤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때, 우리의 죄악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착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한다면, 순종의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내 뜻을 내려놓고 걸어가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심을 경험하자.
우리 모두가 사울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주님을 보게 하소서” 찬양후 기도
헌금 “내게 있는 향유옥합” 후 기도
축도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을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