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가르치니 반항하고,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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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군을 위해 싸웠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군 장서오가 동행하여 아젼 병원에 있던 장병들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심한 부상 때문에 침대 구멍에 얼굴을 넣고 엎드려 있는 한 장병이 있었습니다. 군의관은 그레이엄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저 병사는 다시 걷지 못할 듯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병사는 그레이엄 옆에 선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저는 장군님을 위해 싸웠습니다. 전장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 옆에 계시니 제게 얼굴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 장군은 바닥에 누워 침대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고 대화를 했습니다. 병사는 장군과의 대화가 벅찼는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은 죄와 이어진 타락으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마치 큰 부상을 입고 엎드려 누워 있으며, 본인과 주변 사람 모두 다시 걷제 못할 것이라 생각한 병사와 같습니다. 선과 악의 큰 전쟁터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역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과 푸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깨어지고 망가지더라도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또한 하나님께서 내가 깨어지고 부숴졌더라도 기억하시고 꼭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기억절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고린도후서 4:6 KRV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까요?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교과의 기억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아가는 다른 방법들도 있습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거나, 구약 제사나 율법에 적힌 내용을 연구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최고의 계시, 특별한 계시인 예수님에 대해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크신 교사, 곧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예수 선생님을 만나 무엇을 배우고, 배운 것을 어떻게 살아낼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계시하는 예수님

히브리서 1:1–4 NKSV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역사를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절에 보시면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많은 소통의 방법으로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놓아 담을 쌓아버린 죄의 문제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람, 곧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경계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가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데 넘지 못할 벽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죄, 곧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역한 결과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9:2 NKSV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직접 뵐 수도 없고, 하나님께 아뢰도 듣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이 벽을 뛰어 넘는 방법, 새로운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말의 뜻은 덮개로 덮여 있는 것을 들추어 내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로 벽이 생기고,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가늠할 수도 없게 감추어진, 뎦여진 존재처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을 아시고 본인이 직접 자신을 들어내어 보여주십니다.
히브리서 1:1 NKSV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여러 선지자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에 걸쳐 말씀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히브리서 1:2 NKSV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곧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만 시작하며,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여러가지 방법과 여러 번의 말씀을 전달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곧 그분의 의지와 생각과 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신 겁니다. 그럼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1:3 NKSV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성경은 언급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묘사합니다. 영광은 그 존재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영광은 밝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히브리어에서의 영광은 무거움을 뜻합니다. 곧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곧 그분의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신 내용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고린도후서 4:6 NKSV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 기억절을 보실까요? 예수님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 그분을 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그 하나니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5 NKSV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빛을 비추십니다. 그런데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똑깥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것처럼 빛을 비춰주실 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창조주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심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그저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는 말씀 정도로 이해하면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잠언 15:3 NKSV
3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주님의 빛, 주님의 눈은 악인이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지켜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으로 지나지 않고,
히브리서 4:12 NKSV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위의 말씀처럼 우리 속을 꿰뚫어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낯낯히 밝혀 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우리를 자키보시며, 우리를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분을 온전히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담지 못합니다. 그 모습을 스스로 직면하는 일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생애를 말씀으로 간주하여 반복해서 듣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많이 깊이 알게 됩니다. 그때 각 사람은 그 빛에 반응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계시하신다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음서 중에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 되심을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 1:18 NKSV
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한은 예수님을 독샌하신 예수님, 곧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외아들로 묘사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려주십니다. 요한 참으로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알려주신다고 말합니다.
이후 요한은 7번에 걸쳐 나는 ~~ 이다 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언급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 말씀을 읽거나 들었을 때 초기 교회 성도들은 출애굽기를 떠올렸을 겁니다.
출애굽기 3:14 NKSV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 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430년 동안 말씀이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계시, 곧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름을 알려주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시내산에서 한 번 더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직접 드러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에 가려진 광채로 나타나셨고, 모세에게는 그 영광을 잠시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모세는 나는 ~ 이다 라고 알린 주님을 좇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그렇게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요한복음에서 충격적인 방법으로 나타났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 예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약하면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드러낸 순간들이었던 겁니다.
그럼 교과에 나타난 질문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 나타난 전체 내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 1:18 등의 성경을 통해 보시면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 자신을 예수님이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말씀, 곧 가장 고상하고, 완벽하며, 모든 것을 있도록 만드는 어떤 것을 견주어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은 영광이라 할만한 화려함이나 광채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그나마 다른 복음에서에 나타난 멋진 사건, 변화산 사건도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십자가에서의 초자연적 현상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처향 당하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담담하게 기술할 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가 적힌 13~20장을 영광의 책이라고 구분입니다. 대체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 것일까요? 아니 질문을 바꾸어서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을까요?
요한복음 17:21 NKSV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시며,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16장 32절에도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날 때 어디에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슴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 하나님을 함께 보는 겁니다. 십자가에 예수께서 달리셨다면 그와 함께 계신 아버지를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은 함게 고통당하셨습니다.
독일의 목회자 본 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도와주실 수 있다. 죄와 사망에 갇힌 그리고 삶 속의 온갖 고통과 상처를 겪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삶 전체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자신을 낮추신 분이 바로 예수님, 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아버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분 자신은 가장 낮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함께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한 예수님을 보는 도마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도마를 통해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분명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 그분의 몸에서조차 고통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난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입니다. 도마는 그 흔적을 보고서야 부활을 납득했습니다. 그 고통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고, 부활을 노래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을 기록하였고, 그 기록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예수를 통해 계시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시며, 너무나 그 고통을 잘 아시는 분이 늘, 빠짐없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준 겁니다.
배경 설명
요한1서 2:11 NKSV
11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4 NKSV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미움과 혐오로 사람들 사이의 벽은 두텨워지고 높아만 지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은 코로나를 맞아 급증했습니다. 어쩌면 함께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한 그간의 역사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시는 최고의 교사이십니다. 그 교사께서 하시는 일을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에서 3가지로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2:5–8 NKSV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두드러지는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낮추심입니다. 요한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임을 확인할 수 잇습니다. 하지만 낮아짐은 그분께서 낮추셨다는 역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9–11 NKSV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여 온 우주가 그분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섬기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2장 서두를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3–4 NKSV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벽을 무너뜨리는 삶은 우리가 세운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감입니다.
수요일은 그렇게 겸손함으로 무너진 담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설명합니다.
로마서 5:10 NKSV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더 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경계에 서서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죄인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인간이 세운 수없이 많은 차별과 정죄, 혐오의 장벽을 몸소 무너뜨리셨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빛으로 주셨을까요?
고린도후서 5:18 NKSV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받은 직분, 부르심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하늘 가기 위해 모인 사람이 아닙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의 척후가 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세대와 계층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불화와 반목이 만연한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가요?
예수님처럼 화평하게 하는 겁니다. 작은 친절과 배려, 사랑으로 얼음처럼 단단한 벽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어쩌면 화목하기 위해 먼저 나누고 베푸는 것들이 나를 따뜻하게 녹여 행복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고 있던 영생의 집에 왔습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여성들이 머무는 구역으로 갔습니다. 그는 한 수녀 옆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 수녀는 구더기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 병자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수녀의 손과 얼굴과 눈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수녀에게 일할 힘을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 남자는 테레사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서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갑니다. 저는 마치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병든 여자를 돌보는 그 수녀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아름다운 영혼, 행복한 미소>>, 92쪽)
테레사 수녀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죄로 가로막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세상에서 오셔서 온 몸으로 담을 무너뜨리신 분이시다.
슬픔, 고통, 죄로 기우는 사람의 어쩔 수 없음 그 심연까지 낮추셔서 함께 하셨다. 인간의 가장 끝에 놓인 죽음마저도 그분이 안으셨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에게 비추셨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 돌아서도록,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따라 화목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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